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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죄 없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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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니키아스가 죽은 밤 집에 돌아온 라이산드로스의 얼굴을 보고 오빠의 죽음을 확인한 에이레네는 그대로 쓰러집니다. 아이가 유산되기 시작하자 의사는 출혈이 심하고 자신이 적출을 할 자신이 없다며 킨다스 여자 의사 라첼레 베트 레초니를 권하고, 라이산드로스는 에우로시온을 타고 밤의 루키아노플을 질주해 그녀를 데려옵니다. 이후 에이레네와 라이산드로스는 죽은 니키아스와 아이에 대한 슬픔과 서로 미안한 마음을 나눕니다.

감상

여러모로 감정선이 마음 아프면서도 인상깊은 외전이었습니다. 라이산드로스와 에이레네 부부가 절절할 정도로 서로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니키아스가 죽은 밤에 얄궂게도 니키아스라고 이름 붙이기로 한 아이가 죽은 비극이 꽤 와닿았죠. 라이산드로스의 전설적 질주도 멋졌고요. 침착하고 냉정한 라첼레 RP도 재미있었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노래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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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하쉬르는 ‘선원의 노래’ 주점으로 나흐만과의 연락책을 만나러 갔다가 연락책이 옛 스승 아리칸인 것을 알게 되지만, 그녀를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대합니다. 처음에는 좀 당황했던 아리칸은 역시 모르는 사람처럼 대응하고, 하쉬르를 떠보며 아픈 데를 찌릅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쉬르는 황궁 정원에서 네야의 기습(?)을 받고, 훈련받은 반사신경이 작용해 자신도 모르게 네야를 다치게 할 뻔합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하쉬르는 네야가 머리에 꽂아준 꽃을 꽂은 채 부하들을 보러 갑니다. (…)

감상

아군 말마따나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하쉬르였습니다. 아리칸과 네야의 대비가 아주 재밌기도 했고, 하쉬르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게 할 수 있는 건 네야밖에 없다는 게 정답인 듯(…) 하쉬르하고 네야가 의외로 잘 어울려서 재미있군요. 플레이 후 얘기했듯 플로리앙과 하쉬르가 연적으로 가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미리암

오체스님이 정리해 주신 리플레이에서 따왔습니다. 플레이와 정리까지 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축하사절 일을 마친 아미르는 헬라 귀족으로 변장하고 돌아다니다가 킨다스(주:두 달을 숭배하는 소수종교. 태양을 숭배하는 쟈드교와 별을 숭배하는 아샤르교 지역 사이를 오가는 나라 없는 민족의 종교입니다.) 처녀 미리암이 보고 있는 가게에 얼결에 들릅니다. 그곳에서 엄청난 바가지를 쓰며(…) 그는 미리암과 친해집니다.

집 뛰쳐나온 정략 약혼녀와 모른 채 마주치다…라는, 그야말로 만화같은 설정입니다만 뭐 어때요. 귀엽고 재미있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가지에 치를 떠는 하인 카림은 안습..(…)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솔직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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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샤신 훈련을 시작한 10대의 하쉬르는 새로운 선생님인 아리칸을 만납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쳐 공감하는 친구가 되지요. 그 끝에 새로운 파견지로 떠나면서 아리칸은 그에게 너무 솔직한 얼굴이라며 진실을 섞어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치고, 고마워하는 하쉬르에게 자신은 그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자신 같은 사기꾼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감상

제목인 ‘솔직한 거짓말’은 하쉬르의 기만 스턴트입니다. 이걸 아리칸이 가르쳤다는 설정이죠. 아리칸 본인에게는 필요없는 스턴트인 게… 벌써 엄청난데 얼마나 더 흉악해지려고! (…)

아리칸은 RP하기에 꽤나 재미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 네 명 정도가 한 몸에 들어간 느낌이었달까요. 에로게임에 나올 만한 요염한 선생님에서 현실적이고 똑똑한 스승, 삶에 지친 냉정하고 냉소적인 여자,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끼는 취약한 인간까지. 워낙에 기만이 높은 인물이다 보니 본인도 어느쪽이 진짜 자기 모습인지 모를 것 같을 정도로… 진짜 사기꾼은 자신까지 속인달까요.

몇 년의 간격을 둔 두 장면에 걸쳐 하쉬르가 성장한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섹시한 선생님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년에서부터 그 선생님을 동요시킬 정도로 통찰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청년까지. 어쩌면 아리칸이라는 인물은 보는 사람에 따라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면이 있어서, 아리칸의 다양한 모습이 두 번째 장면에 드러난 건 역시 하쉬르의 변화 때문일지도요.

여러모로 하쉬르와 아리칸은 화학작용이 상당한 인물 같습니다. 다음 만남은 아마 루키아노플에서가 될 텐데, 어떤 만남일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플레이를 함께해준 아군에게 감사를~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선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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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외전이라기에는 본편과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정규 플레이 시간은 아니었으니 일단 외전으로 올려둡니다.

요약

도시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가운데, 플로리앙은 라이산드로스의 처남이자 라이산드로스와 대립하는 갈등의 축이기도 한 니키아스를 그의
초청으로 만나러 갑니다. 니키아스는 플로리앙과 한 계약의 실제 명의자는 자신인 것을 밝히며 플로리앙에게 큰 돈을 줄 테니 도시를
떠나라고 하고, 생각해볼 시간을 사흘 줍니다. 매수해서 치우려는 게 뻔한 상황이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동질감을 느끼고, 다음
만남이 적으로서의 만남일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웃으며 헤어지지요.

니키아스의 집에서 나온 플로리앙은 추적의 낌새를 채고, 남장을 하고 자신을 미행하고 있던 네야를 결국 붙잡습니다. 네야는
플로리앙이 왜 니키아스를 만났는지 추궁하고, 플로리앙은 니키아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데도 네야 때문에 남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며 네야에 대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플로리앙은 어떻게든 도시에 남으면서도 부하들을 지킬 방법을 찾으려고 라이산드로스를 만나기로 합니다.

감상

니키아스와 플로리앙의 대화는 저도 로그를 본 석한군도 어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은 대목이었습니다. 분명 싸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그렇게 잘 이해하고 공감할 줄이야… 좀 가슴이 찡했었죠. 니키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또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고요. 제목인 ‘선을 넘어서’는 그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권력과 정치의 선을 넘은 인간적인 교감은 흔치 않은 만큼 소중하기 마련입니다.

네야와 플로리앙의 달달스런 장면은 또 다른 의미로(…) 선을 넘었죠. 물론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미의 선은 아니고,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넘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요. 플로리앙이 그런 식으로 달라지고 갈등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넘어 성장하는 과정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멋지죠. 말 위에서의 닭살씬이라는 발상도 재밌었었는데, 나중에야 생각한 거지만 저때 네야가 소년 차림을 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너무 웃겼었던..(…)

여러모로 의미 깊은 외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물의 모습을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하고 본편 캠페인에도 새로운 의미를 더했죠. 역시 제 캠페인은 본편보다 외전이 알짜 (?)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황금새장

황금새장

오체스님과 1:1로 진행한 외전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술탄의 죽음 이후이고, 배경은 나흐만 궁정입니다.
요약
전대 술탄이 서거하고 메흐디가 등극한 후 아미르는 형인 술탄을 찾아가 궁정 근처 수도원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감시를 붙여도 좋다고 돌려서 얘기하고, 메흐디 2세는 보호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아샤신 훈련을 받은 몸종을 붙여줍니다. 그렇게 아미르는 궁에서 나옵니다. 눈 밖에 나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위협 속에서이지만…
감상
오체스님과 이전부터 얘기했던 설정인데 이런 식으로 외전에 나왔군요. 메흐디와 아미르 사이의 무언의 합의, 아들을 걱정하는 키네니아의 불안과 지극히 평범한 하인 같은 아샤신 카림 등이 재미있었습니다. 사실 아샤신은 막 카리스마 넘치는 유형보다도 오히려 저런 있는 듯 없는 듯한 인물이 더 위험할지도요. 잘 정리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술탄의 죽음

술탄의 죽음

오체스님이 정리하신 글에 걸어둡니다. MSN으로 진행한 짤막한 외전으로, 첫 소설인 황제의 죽음 전 이야기입니다. (결국 같은 사건을 지칭하고 있지만요.)

요약

술탄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궁에서는 새 술탄이 될 메흐디 앞에 재빨리 줄을 서기 시작합니다. 아미르와 그의 어머니는 슬퍼하는 한편 발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에 실소합니다. 아미르 역시 메흐디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메흐디는 그런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지만 아미르는 석연찮은 느낌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합니다.

감상

마수드 1세 서거 당시의 현장을 볼 수 있어서 캠페인 사건에 좋은 배경이 되겠군요. 술탄의 죽음에 대한 반응들과 아미르, 메흐디, 키네니아, 마리사 등 다양한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고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메흐디는 원래 친화력이 그렇게까지 높은 인물은 아닌데, 이 장면에서는 미친 듯 페이트 포인트를 때려박고 있었던 것 같군요..(…) 자신이 주도권을 쥔 상황인 만큼 지도력 향상을 받아서 좋은 수준으로 굴리고 있었을 수도 있겠고요.

오체스님이 마기아로스 (헝가리) 공주로 설정하신 키네니아나 키네니아의 시녀장 안나도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메흐디와 아미르 사이의 4황자는 지금쯤 어디 변방 총독으로 처박혔을 것 같고… 키네니아는 외전이나 2부에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인물이니 시트도 짜놓으면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외전 – 폭풍의 전조

아사히라군과 함께 한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10년 후 에필로그 중 하나입니다. 또 다른 그림자가 비슷한 시기에 아우터 림에서 벌어지는 얘기라면 이쪽은 수도 코루선트가 배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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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향 행성 샤캄에서 공화국 대사로 지내는 마스터 모트가 회의차 코루선트로 오는 것을 마중나간 펠로스는 마스터 모트와 마스터 모트를 모셔온 그의 제자 티온과 재회합니다. 그리고 비행장으로 그를 미행해온 어린 파다완 레이안 시네란과 10년만에 조우하지요. (코루선트에 있을 때 종종 먼발치에서 지나가기는 했겠지만요.) 레이안은 당돌하게도 펠로스의 기량을 시험하려고 그랬다며 펠로스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합니다. 티온은 질투나서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못하죠.

마스터 모트가 레이안을 맡은 동안 펠로스와 티온은 군사 전문가 회의에 참석합니다. 그곳에서 티온은 공화국 영역 밖의 아우터 림에서 만달로르인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는 실태를 보고하고, 엄연히 공화국 영역 밖인데 대응을 해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 서로 의견이 갈립니다. 펠로스의 주장 끝에 일단 지켜보되, 만달로르인이 공화국 영내로 쳐들어온다면 대응책을 계획은 해야 한다는 보고를 공화국 의회에 올리기로 합니다. 나중에 펠로스와 티온은 공화국의 문제와 내부 분열, 10년 전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마스터 모트를 찾아간 펠로스는 레이안이 의자에 앉은 채 라이트세이버를 든 마스터 모트에게 덤비다가 번번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마스터 모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면 공의회에 펠로스를 레이안 스승으로 임명하도록 권유하겠다는 말을 듣고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죠. 펠로스는 세이버 기술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라이트세이버는 힘과 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레이안이 혼자 연습하는 동안 마스터 모트와 펠로스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마스터 모트는 레이안이 처음 제다이가 됐을 때의 펠로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며 놀리고, 펠로스는 겉모습만 적응했을 뿐 아직 내적 의문과 공허는 가시지 않은 심경을 약간은 토로합니다. 그리고 공화국에 서서히 다가오는 혼란을 내다보며 마스터 모트는 한탄하고, 펠로스는 오히려 설렙니다. 자신의 허무를 채워줄 그 거대한 폭풍의 예감에.

감상

10년 후의 펠로스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서 이 플레이 이전에 아군과 펠로스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거기서 내린 결론은 펠로스는 가혹했던 삶 때문에 사람도 세상도 믿지 못하는 공허를 호승심과 싸움으로 채우는 인물이라는, 꽤 어두운 전망이었죠. 또 다른 의미에서 망가진 제다이랄까요.

자락스, 아를란, 펠로스, 티온 네 전직 시스는 하나같이 성장하며 느낀 결핍을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에서 자락스가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했지만 그만큼 가혹한 선택을 해야 했고, 아를란은 감정적으로 부서지면서 비로소 평정을 찾았고, 티온은 공화국 외곽의 쉴새없는 위험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의미를 찾는 것 같아요. 가장 멀쩡해 보이고 위치도 안정적인 펠로스가 사실 속으로는 가장 허무감에 몸서리치는 건 역설적인 일입니다. 과거를 극복하려면 그만큼 반대급부를 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잔인한 거래일 지도요.

그와 관련해서 전직 시스가 과연 정말 제다이로 인정은 받는 건지도 아군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우터 림을 떠도는 자락스와 아를란이나 공화국 경계 외부 무법지대를 전전하는 티온을 보면, 제다이라는 이름 줄 테니 아우터 림에서 잘하는 싸움질 하고 여기서 우리 불안하게 하지 말라…는 느낌이랄까요. 가장 자기몸 사릴 줄 알고 정치력이 있는 펠로스가 그나마 코루선트에 붙어있죠. 마스터 아카마르가 사망한 이후 정치력 있는 제다이가 워낙 부재하기도 해서 가능한 일이었을지도요.

펠로스의 스승은 마스터 사두르이지만, 사두르는 그가 한 맹세의 무게 때문에 펠로스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다는 느낌입니다. (그저 아카마르가 원흉) 오히려 마스터 모트가 이전부터 펠로스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느낌이었죠. 사람을 못 믿는 펠로스가 답답한 속내를 마스터 모트에게 조금이나마 털어놓은 건 대단한 일이기도 하고요. 단 플레이에서는 마스터 모트가 많이 노쇠한 모습을 통해 한 시대가 끝나가는 암시도 했으니, 시간의 무자비한 흐름은 씁쓸한 법이죠. (그 양반 얼마 안 남았 (?))

그 외에 위험으로 다져지면서 더욱 날카롭고 치명적인 느낌이 된 티온, 미래의 시스로드 레반으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는 당돌한 레이안, 제독으로 몇 년 내에 승진할 사울 카라스 대령, 그리고 서서히 커지는 만달로르의 위협 등도 즐거웠습니다. 여기서 한 10년 더 가면 지금 어렴풋이 다가오는 새로운 혼란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공화국을 덮쳐오겠지요. 그리고 구공화국의 기사단 게임 시대가 되면서 다시 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입니다.

[공화국의 그림자] 신뢰

공화국의 그림자 종결 두 달쯤 후의 이야기입니다. 중간쯤 가서 좀 야합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흑흑)
I.

따뜻한 밤공기 속에 도시의 야경이 별의 바다처럼 빛났다. 20층 높이에서 도시를 내다보는 방안에는 촛불이 밖의 영롱한 빛무리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따뜻한 빛을 흩뿌렸다. 은은한 그 빛은 은제 식기에, 와인잔에, 고급 도자기에 비치면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젊은 남녀의 얼굴에 친밀한 온기가 되어 깃들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나직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마저 빛이 되어 금빛과 주황색으로 물든 저녁에, 부드럽고 너그러운 그늘에 녹아들었다.

마침내 반쯤 먹은 요리 접시를 밀어내며 다룬은 몸을 뒤로 기댔다. 긴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더는 도저히 못 먹겠군요. 요리사에게는 최고였다고 전해주십시오.”
“다 먹지 않으면 파비오가 서운해할 거에요.”
쟈네이딘은 촛불 너머로 그에게 웃었다. 따스한 빛에 검은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렇잖아도 오르가나 공이 고초를 겪으시고 여윈 것 같다고 그가 특별히 준비한 요리랍니다.”
“마음은 있지만 무리로군요. 혹시 대신 드셔달라고 하면 실례가 되겠습니까?”
다룬은 마주 웃었다. 오른쪽 눈에는 장난스러운 빛이 어렸지만, 흘러내린 머리에 가린 왼쪽 눈은 어둠 속에 순간 부자연스러운 빛을 발했다. 쟈네이딘은 짐짓 작은 한숨을 쉬었다.
“파비오가 마음 상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죠.”
쟈네이딘 앞에 접시를 놓아주고 다룬은 그녀가 음식에 열중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의 빈 접시와 가득 찬 와인잔을 마치 먼 곳에서 보듯 지켜보았다.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빈 잔을 스스로 채우면서 다룬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15년 묵은 테레아산을 가져온 것입니다만. 왕녀님께서 늘 좋아하셨지요.”
쟈네이딘은 천천히 접시에서 눈을 들며 입을 닦았다. 그녀는 다룬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닙니다… 그저 오늘밤에는 마음이 나지 않는군요. 미안합니다.”
“성의를 봐서 건배라도 하지요.”
다룬은 잔을 들었다.
“알데란의 미래를 위하여.”
쟈네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웃어보이며 그와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다룬이 잔을 거의 단숨에 비우는 동안 입술을 살짝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알데란의 미래 정도로는 술 생각이 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다룬의 눈빛과 미소에는 점점 날카로운 빛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공화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제다이…”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나이트 자락스 토레이를 위하여?”
저녁의 따스하던 친밀감은 사라져 버렸다. 방안에 가라앉은 깊은 그늘 속에는 불명확한 형체들이 스멀거리며 떠돌았다. 쟈네이딘은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제 말씀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아니면 영영 숨기실 생각이셨는지요, 전하?”
빈정거리며 다룬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자기 잔을 채웠다.
“그 숭고한 제다이 양반이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는 걸 말입니다.”
쟈네이딘은 창백해지면서 손으로 상을 짚었다. 손에 나이프 하나가 밀려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다룬도 쟈네이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마치 시선이 덫에 걸린 것처럼 서로 마주볼 뿐.
“어떻게… 내 주변에 사람을 심었나요? 혹시 내 주치의가?”
쟈네이딘의 목소리는 새되게 높아졌지만, 다룬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맙소사, 쟌느…”
왕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갑자기 연민과 절박감이 어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모할 수가 있습니까? 알고 있으면서…”
그의 시선은 쟌느의 가득 찬 와인잔으로 향했다.
“아직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는 상에 양손을 짚으며 쟈네이딘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처리하면-“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쟈네이딘은 무릎에 얹은 냅킨을 양손으로 쥐어짜면서도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듯 얼굴을 살피다가 다룬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생각이 없다…라.”
그는 장갑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배가 남산만해져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겁니까?”
“곧 얘기하려고 했었어요. 결혼식도 앞당기자고 하려고…”
쟈네이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오늘 저녁은… 오늘만은 이렇게 둘이서 보내고 싶었어요.”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말입니까? 내 아이라고 믿게 하기에는 어차피 너무 늦었을 텐데요.”
다룬의 차가운 대답에 쟈네이딘이 확 일어서자 식탁 위의 식기와 잔이 흔들리며 짤그랑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맹세코 그런 생각은…”
그 눈빛에 담긴 안타까운 진심에서 눈을 돌리며 다룬은 잔을 들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야경을 등진 채 그는 방안의 빛과 어둠 너머로 쟈네이딘을 마주보았다.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낮고 지친 목소리는 쉬어서 나왔다.
“왕가를 지키려고? 알데란의 평화를 위해서? 뱃속의 후레자식을 키워줄 얼간이가 필요해서?”
발끈하며 뭔가 대답하려다가 쟈네이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탁자 뒤에서 걸어나와 그의 앞에 와서 섰다.
“셋 다에요.”
다룬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왼눈을 가린 머리칼 뒤로 의안이 불안정하게 깜박거렸다. 쟈네이딘이 한 발짝 다가와 뺨에 부드럽게 손을 대자 그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쟈네이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세 가지가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 얼간이가 맞아요.”
“…가봐야겠습니다.”
다룬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손을 떼어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는 잔을 창틀 위에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
“다룬…”
문이 열리면서 복도의 불빛이 방안으로 길게 비쳐들었다. 그가 돌아보지 않고 나가자 방은 다시 촛불로 얼룩진 어둠에 잠겨들었다. 쟈네이딘은 잠시 창가에 서서 도시의 차갑게 빛나는 야경을 내다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II.
“결혼식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응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오르가나 내외는 아들을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왕녀와 식사하러 도시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간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머리는 흐트러지고 눈빛은 형형한 채로 들이닥쳐서 인사 하나 없이 내뱉은 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괜찮느냐.”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 아들을 도우러 부부가 테레아에서 본가로 올라온 이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늘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의아해하면서도 아들을 걱정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다룬?”
엘리리아 오르가나는 아들에게 걱정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었니? 좀 앉으렴. 와인이라도-“
“아뇨. 아닙니다.”
다룬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코루선트 전투 이후로 생긴 접촉 기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졌지만,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질 수 있다는 것은 의사도 이미 경고했었다.
“결혼식 준비는 어머니가 책임지고 계시죠. 얼마나 앞당길 수 있으십니까? 두 달 후면 될까요? 한 달?”
“얘야…”
어쩔 줄을 모른 채 엘리리아는 문간에 서서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다룬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알레산드로스가 등뒤에서 다가와 어깨를 붙들어주자 엘리리아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국가 행사인데 그렇게 급하게는 안 된다. 왕가와도 의논을 해야 하고-“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데요!”
다룬이 언성을 높이자 엘리리아는 흠칫했다. 알레산드로스는 얼굴이 굳었다.
“다룬! 지금 어머니에게 무슨…”
“전 지금이라도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혼인 신고만 하고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럽니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파산할 국왕이?”
경악해서 굳어버린 부모를 잠시 보다가 다룬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답고… 정숙한 내 아내를 데려와야죠. 동화 속 공주님처럼…”
어느새 복도까지 물러나서 복도 벽에 기대어선 다룬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흐느낌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엘리리아가 다룬을 달래서 일으키는 동안 알레산드로스는 하인 드로이드를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의사를 부르게.”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는 덧붙였다.
“왕녀님께도 통신을 보내도록. 내가 직접 통화하겠네.”
III.
눈을 떴다가 다룬은 방안에 가득한 햇살에 눈이 부셔서 도로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명암 적응이 빠른 왼눈의 의안만 살짝 떴다. 누군가 있었다. 침대가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그게 누구인지 깨닫고 다룬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룬! 괜찮아요?”
옷자락을 바스락거리며 쟈네이딘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다룬은 눈을 뜨며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왕녀님. 이곳에는 어인 일로?”
“아픈데 약혼녀를 부르는 건 당연하잖아요. 기분은 좀 어때요?”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나타난 쟈네이딘을 쳐다보지 않고 그는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홀몸도 아닌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거동하실 일은 아니었지요.”
쟈네이딘은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다룬. 날 좀 봐요. 어서.”
이를 악물고 천장을 노려보다가, 쟈네이딘이 꿈쩍도 하지 않자 마침내 다룬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손이 멱살을 잡으면서 억지로 일으키자 세상이 순간 기울어졌다. 그 찰나 동안 그는 오랜 악몽에 빠져들었다.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이던 무자비한 손, 등뒤에 세게 부딪혀 오며 호흡을 몰아내던 충격, 그리고 벗어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이 머리에, 눈에 파고들던 고통-
찰싹. 고개가 돌아가면서 그는 다시 햇살 가득한 침실로 돌아왔다. 쟈네이딘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자 도로 침대에 나자빠진 그는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며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보았다. 뺨이 가볍게 화끈거렸다.
“왕녀님…”
“이 구제불능의 바보.”
감정 없이 말하면서도 그녀는 거칠게 침대가 탁자에 있는 컵에 물을 따르고 약병 두 개에서 알약을 손에 덜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서 한 손에는 알약을, 다른 손에는 물잔을 우악스럽게 쥐어주었다.
“안테르 선생님 처방이에요. 당장 먹어요.”
거부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겁이 난 그는 재빨리 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컵을 도로 받아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저기… 구타도 의사의 처방입니까?”
“그건 내 처방이에요.”
다시 쟈네이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는 움찔했지만, 그녀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품에 가득 안겨오자 팔을 둘러주는 동작은 자동적이었다. 코루선트 상공에서 다쓰 세데스를 만난 이후로는 부모의 포옹마저 공포스러웠지만, 그녀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한 예외.
“결혼식을 앞당겨야겠다는 건 또 뭐에요?”
그의 어깨에 대고 말하는 쟈네이딘의 목소리는 불분명했다.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가 태어나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쟈네이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검고 부드럽고 따뜻한.
쟈네이딘은 그의 가슴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머리칼 속에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며.
“내가 그랬죠? 구제불능의 바보라고.”
그녀는 조그마한 주먹으로 다룬의 가슴을 내리쳤다.
“괴로우면 놓아버리고, 싫으면 헤어지면 되잖아요. 나 때문에 그렇게 아프면 파혼하고, 내전을 일으켜서 스스로 왕이 되어버려요. 그럴 수 있는데 왜…!”
그가 어깨를 붙잡아 확 끌어안자 쟈네이딘은 그의 위로 비틀 넘어졌다. 목을 끌어안으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바보같아요?”
“왕녀님이야말로 어째서?”
쟈네이딘을 끌어안은 채 다룬은 햇살이 눈부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부가 되든 되지 않든 우리는 정적입니다. 이렇게까지 큰 약점을 제게 쥐어주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일까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룬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녀의 온기를, 숨결을, 향기를 들이쉬며.
“그 사람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쟈네이딘은 그에게 몸을 붙여오며 말했다. 작게 찔러오는 아픔은 감정의 습관일 뿐이라고 다룬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등뒤를 맡기며 싸울 수 있는 친구란 정말이지 흔하지 않다고요.”
“자신에게 이미 등을 맡긴 친구라면 신뢰할 수밖에 없겠지요.”
대꾸하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그녀의 체온이 이렇게도 가까운 동안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어려웠다. 부상 이후 자신의 것 같지 않았던 몸이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정적이라 하더라도요.”
속삭이며 쟈네이딘은 입술로 그의 입을 덮쳐왔다. 더 이상 어떤 계산도, 주저도 없었다. (아래층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10대 소년 같은 걱정이 순간 스쳐가기는 했지만.) 몸과 영혼에 넘쳐흐르는 열기에 그는 기꺼이 항복했고, 시스 로드의 손에 죽었던 그는 그 기나긴 오후 동안 쟈네이딘의 품속에서 되살아났다.
IV.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저택 안쪽에서부터 울려나오자 다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 역시 다행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우렁찬 울음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만면에 웃음을 지은 나스 브레이텍에게 다룬은 정중히 마주 인사했다. 주변에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동안 누군가가 와인을 따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잔을 채웠지만, 아직 아무도 다룬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할 일이 있었으므로.
다룬이 문 맞은편에 서자 함께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친척들은 그와 문 사이에 공간을 비워주었다.간간히 나지막한 목소리만 들려오는 고요 속에 다룬은 복도에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후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가 가끔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왔고, 문이 칙- 열리면서 통통하고 쾌활한 여인이 강보를 안고 들어섰다.
“강축드립니다.”
산파는 방에 들어서기 전에 깊이 허리숙여 인사했다. 방안은 이제 조용했다. 고대와 같은 의미는 없었지만, 이것은 엄숙하고 역사가 오랜 의식이었다.
“부인께서는 순산 끝에 건강하시며, 순조롭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다룬은 안도감으로 순간 몸이 풀렸다. 산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소식이었고 뭔가 비상사태가 있었다면 연락이 왔겠지만, 그래도 말로 확인하자 새삼 안심이 되었다. 여기서 할 일만 끝나면 아내의 침대가로 달려가리라. 그리고 그녀가 잠든 동안 손을 붙들고 자신 곁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리라고 그는 다짐했다.
산파는 방을 가로질러 다룬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강보를 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이불을 풀어헤치자 아기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산파는 다시 일어나서 깊이 인사하더니 몇 발짝 물러났다.
이불 위에서 몸을 뒤틀며 우는 아기를 보고 방안은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건강하고 튼튼한 사내아이, 오르가나의 이름을 이을 후계자를 보며. 그러다가 곧 방안은 다시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쪼글쪼글한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룬은 잠시 역사의 연속성에 전율을 느꼈다. 그도, 그리고 알데란 귀족가의 모든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나자마자 이렇게 아버지의 발치에 내려놓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 이래, 하나하나 모두가 차례대로.
개인적으로 그는 바보같은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잘못 넘어져서 아이를 깔아뭉개기라도 하면 어쩌라는 말인가. 게다가 이제 이 의식에는 이전과 같은 의미는 없는데.
수천 년 전, 고대에는 이 의식에는 형식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발치의 갓난아이를 안아올리지 않으면 아이는 얼어죽거나 굶어죽도록 밖에 내쳐졌다. 혹은 죽여서 내버리기도 했다. 생사여탈권. 불구로 태어났거나, 약하거나, 여자로 태어난 수많은 아이가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거부당해서 죽어갔다.
그 중에는 어머니의 정절을 의심받은 아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다룬은 생각했다. 부성을 확신하지 못한 아비의 질투에, 혹은 아내를 벌하겠다는 복수심에 얼마나 많은 갓난아이가 죽어갔을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문명 시대인 지금은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를 아버지 발치에 내려놓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관습일 뿐이었고, 아이가 불구이거나 약하다면 아버지는 아이를 서둘러 안아올려서 이름을 지어준 후에 의료 전문가들과 함께 치료 방안을 의논할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아이를 거부한다고 아이가 죽어야 하는 그런 야만적인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룬은 문득, 자신이 아이를 안아들지 않고 나가버리면 저들의 표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파가 아이를 도로 안고 하얗게 질려서 쟈네이딘에게 돌아갈까? 이 자리에 모인 친지들이 수근거릴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자,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눈을 뜨고 있었다. 보랏빛 도는 푸른색이 아닌 검은 눈. 그와 쟈네이딘과 같은… 아직 눈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룬은 아이가 자신과 조용히 눈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잘 보려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서 흥분해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무시했다. (형식일 뿐인데 뭐 그렇게 좋아할까.) 갓 태어났는데도 아기의 머리칼은 숱이 많고 검었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만져보자 부드럽고 따뜻했다. 문득 아이가 춥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그는 서둘러 강보를 여며주었다.
강보에 싸인 채 꼬물꼬물 손발을 움직이는 이 조그만 생명은 아내가 준 선물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충돌하는 이해와 야심 속에서 그녀가 쥐어준 치명적인 약점, 그들이 서로 품을 수 있는 만큼의 신뢰.
그 신뢰의 제물이 된 아이에게는 자신을 스스로 희생 제물로 내어주고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이들의 이름이 어울리겠지. 미리 상의한 것과는 좀 달랐지만, 아내는 이해할 것이다.
강보에 감싼 아이를 안고 다룬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이불 틈새로 조막만한 손을 내밀고 휘두르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방 구석구석까지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바트 자락스 오르가나. 환영한다, 아들아.”
마지막 장면에 나온 풍습은 고대 로마에 실제 있었던 풍속입니다. 알데란 문화는 제게는 왠지 로마 내지는 그리스식 이미지로 떠오르기도 하고, 또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뭐 결론은 자락스 지못미 (?)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외전 – 또 다른 그림자

이방인님과 동환님과 2화에 이어서 한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즉플입니다. 본 캠페인보다 10년 후 이야기로, 끝과 시작으로부터 몇 달이 흐른 시점입니다. 로그는 집에 가면 보충하지요.

요약

아우터 림의 프랄락시아 항성계에 있는 데오르 행성에 도착한 아를란과 멜리나는 얼마 전에 데오르에서 시스를 대거 몰아낸 정체불명의 포스능력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멜리나는 묘한 포스 기척을 느끼고, 그들은 그 기척을 미행해서 가면을 쓰고 의수를 사용하는 포스 능력자와 대면합니다. 파다완 제쉬 로드레스 역시 마스터 자락스 토레이의 명으로 데오르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가 멜리나의 포스 기척을 따라와서 가면 쓴 검객과 대치합니다.

시체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던 전 나이트 로어틸리아 혹은 피나틸리아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가면 검객의 포스 기척과 목소리에 아를란과 멜리나는 심하게 동요합니다. 그러나 가면 검객은 로어틸리아나 피나틸리아 이야기에 대해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며 부인하고, 홀로크론 데이터카드를 제쉬에게 던져서 블래스터 조준을 어긋나게 하고 탈출합니다.

가면 검객이 제쉬에게 던진 홀로크론 데이터를 조사한 결과, 항성계 외곽에 있는 버려진 소행성 채굴 기지의 위치와 접근 암호 등이 나타납니다. 아를란과 멜리나는 그 연구소로 바로 가기로 하고, 제쉬는 자락스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아를란이 이미 기지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락스는 전투선 두 척만을 이끌고 급히 쫓아갑니다.

우주선 ‘시커’를 타고 홀로크론에 나온 좌표에 도착한 아를란과 멜리나는 좌표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우주선 하나가 그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지요. 10년 전 공화국을 파괴할 뻔했던 그림자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멜리나의 포스 능력으로 방어 시스템을 돌파하고 기지에 들어갑니다.

기지에 들어간 두 사제는 연구소 인원이 학살당한 것을 목격하고, 그 중 상당수가 대피한 통제실 앞에서 가면 검객을 막아섭니다. 과거의 망령을 청산하고 있다는 가면 검객의 말에 멜리나는 10년 전 로어틸리아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 추궁하지만, 가면 검객은 역시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쓰러졌던 경비 하나가 블래스터를 쏘자 멜리나를 포스로 밀어내서 구해주고 출구로 도망치지요.

기지에 도착한 자락스는 10년 전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그가 이끌고 온 전투선은 연구소에서 아무도 탈출하지 못하게 막을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멜리나가 외벽에 뚫은 구멍을 통해 기지로 들어가지요. 기지에 들어온 그는 막 도망쳐 나오는 가면 검객과 마주칩니다.

가면 검객이 자락스와 아를란과 멜리나에게 앞뒤로 포위당한 동안, 밖에서는 시스 전투선이 자락스가 이끌고 온 제다이들과 우주 전투를 벌이고, 신토넥스 경비대장이었던 시스 제이 톨란이 이끄는 돌격부대가 자락스에 뒤이어 기지에 들이닥칩니다. 그들이 세 제다이와 전투를 벌이는 동안 가면 검객은 다시 통제실로 향하고, 톨란 역시 뒤따릅니다. 자락스는 아를란과 멜리나에게 전투를 맡기고 이들을 뒤쫓지요.

제이 톨란 앞에서 피나틸리아의 말투와 성격을 보이며 가면 검객은 그와 대치하고, 자락스도 합류하면서 이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확인합니다. 가면 검객은 연구소를 몰살시켜서 그림자 프로젝트를 영원히 끝내는 것, 톨란은 그림자 기술을 손에 넣는 것, 자락스는 그림자 프로젝트를 없애되 인명 피해 없이 하는 것.

그러나 정작 통제실은 이제 비어있고, 자락스는 연구소에서 빠져나오는 탈출정을 시스 함선이 포획했다는 부하의 보고를 듣습니다. 제이 톨란은 연구원이 빠져나올 시간을 확보하고 우주에서 그들을 손에 넣으려고 부하들을 이끌고 들이닥치고, 가면 검객과 자락스의 주의를 끌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좋아하는 것도 잠시, 가면 검객이 스위치를 하나 꺼내서 누르자 자락스의 부하들은 시스 함선이 사라진 방향에서 폭발이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멜리나 역시 수많은 생명이 우주공간에서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충격에 빠지지요. 자락스는 가면 검객의 무자비한 방식을 탓하지만 그녀는 다시 탈출하고, 제다이들은 제이 톨란을 끌고 귀환합니다.

데오르로 돌아가는 길에 자락스와 아를란은 제다이인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생명의 무게를 말하는 자락스에 이어 생명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는 멜리나에게, 아를란은 제다이가 되든 되지 않든 스스로 하는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감상

이렇게 10년 후의 재회를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특히 가면 검객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지만, 그래서 그만큼 여운도 남은 플레이였던 것 같습니다. 가면 검객은 죽은 쌍둥이 곁에서 깨어난 로어틸리아 혹은 피나틸리아며, 자신도 어느 쪽인지 모른다는 게 다수설이지만요.

10년 전의 인물들을 다시 불러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새로운 인물인 제쉬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름 있는 인물은 전부 본편 캠페인이어서 더더욱 동창회(?) 느낌이 났죠. 활극 중심인 내용 와중에도 본편 캠페인의 중심을 이루었던 철학적, 도덕적 대립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점이 즐거웠습니다.

세 제다이는 연구원을 학살하는 가면 검객을 막아서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는 점은 잔인한 진실이기도 합니다. 그림자 프로젝트만큼 위험한 기술의 존재마저 지워버리려면 시설과 데이터뿐 아니라 사람까지 사라져야 하는 게 사실이니까요. 관련 인원은 전부 죽었고 기지는 뒤따라온 자락스 부하들이 폭파했을 테니 아마 공화국에 대한 그림자 프로젝트의 위협은 여기에서 끝난 듯합니다. 과거의 망령을 청산하는 과거의 망령의 결단으로 말이죠. (그러나 만달로리안과 시스와 스타포지는 건재 (묵념))

제목인 ‘또 다른 그림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림자 프로젝트의 부활을 뜻하고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 그림자와 같았던 베오나드 코티에르의 후계자격 가면 검객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다고 하던가요. 다수의 평화 뒤에는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내놓을 준비가 된 그늘 속의 공로자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선택관계를 부인하고 원칙을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락스 같은 사람도 분명 있고, 또 있어야 하지만요.

캠페인 시간상 10년이 지나서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도 여전한 것도 많았습니다. 자락스는 이 양반이 나이를 먹긴 먹었나 싶을 정도로 하는 짓이 똑같고, 아를란은 여전히 삽질하고, 제이 톨란은 여전히 안습이고요. 자락스나 아를란처럼 개과천선하는 인물도 재미있지만, 톨란처럼 변함없는 시스도 어찌 보면 오히려 유쾌합니다. 탐욕스럽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지만 크게 악인이라는 생각은 안 든달까요. 앞으로도 뉘우침 없이 이기적인 길을 걸어주기를 왠지 응원하고 있는 저였습니다.(…)

본편 캠페인 때는 활약할 나이가 아니었던 신진 파다완 멜리나의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재능, 대담한 판단력과 행동력 (벌써부터 고생길이 훤한 아를란에게 묵념을), 그리고 어려서 받은 가혹한 충격에도 흔들림 없는 원칙을 보면 분명 뛰어난 제다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10년이 안 돼서 다시 닥쳐올 전란을 생각하면 훌륭한 제다이는 하나라도 더 있어야겠죠.
즐거운 플레이 함께해주신 동환님과 이방인님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캠페인은 끝났지만, 함께한 세계의 생명력은 변함없이 지속하겠죠. 머나먼 옛날의 머나먼 우주에서,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