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그림자] 신뢰

공화국의 그림자 종결 두 달쯤 후의 이야기입니다. 중간쯤 가서 좀 야합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흑흑)
I.

따뜻한 밤공기 속에 도시의 야경이 별의 바다처럼 빛났다. 20층 높이에서 도시를 내다보는 방안에는 촛불이 밖의 영롱한 빛무리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따뜻한 빛을 흩뿌렸다. 은은한 그 빛은 은제 식기에, 와인잔에, 고급 도자기에 비치면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젊은 남녀의 얼굴에 친밀한 온기가 되어 깃들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나직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마저 빛이 되어 금빛과 주황색으로 물든 저녁에, 부드럽고 너그러운 그늘에 녹아들었다.

마침내 반쯤 먹은 요리 접시를 밀어내며 다룬은 몸을 뒤로 기댔다. 긴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더는 도저히 못 먹겠군요. 요리사에게는 최고였다고 전해주십시오.”
“다 먹지 않으면 파비오가 서운해할 거에요.”
쟈네이딘은 촛불 너머로 그에게 웃었다. 따스한 빛에 검은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렇잖아도 오르가나 공이 고초를 겪으시고 여윈 것 같다고 그가 특별히 준비한 요리랍니다.”
“마음은 있지만 무리로군요. 혹시 대신 드셔달라고 하면 실례가 되겠습니까?”
다룬은 마주 웃었다. 오른쪽 눈에는 장난스러운 빛이 어렸지만, 흘러내린 머리에 가린 왼쪽 눈은 어둠 속에 순간 부자연스러운 빛을 발했다. 쟈네이딘은 짐짓 작은 한숨을 쉬었다.
“파비오가 마음 상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죠.”
쟈네이딘 앞에 접시를 놓아주고 다룬은 그녀가 음식에 열중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의 빈 접시와 가득 찬 와인잔을 마치 먼 곳에서 보듯 지켜보았다.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빈 잔을 스스로 채우면서 다룬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15년 묵은 테레아산을 가져온 것입니다만. 왕녀님께서 늘 좋아하셨지요.”
쟈네이딘은 천천히 접시에서 눈을 들며 입을 닦았다. 그녀는 다룬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닙니다… 그저 오늘밤에는 마음이 나지 않는군요. 미안합니다.”
“성의를 봐서 건배라도 하지요.”
다룬은 잔을 들었다.
“알데란의 미래를 위하여.”
쟈네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웃어보이며 그와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다룬이 잔을 거의 단숨에 비우는 동안 입술을 살짝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알데란의 미래 정도로는 술 생각이 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다룬의 눈빛과 미소에는 점점 날카로운 빛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공화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제다이…”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나이트 자락스 토레이를 위하여?”
저녁의 따스하던 친밀감은 사라져 버렸다. 방안에 가라앉은 깊은 그늘 속에는 불명확한 형체들이 스멀거리며 떠돌았다. 쟈네이딘은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제 말씀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아니면 영영 숨기실 생각이셨는지요, 전하?”
빈정거리며 다룬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자기 잔을 채웠다.
“그 숭고한 제다이 양반이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는 걸 말입니다.”
쟈네이딘은 창백해지면서 손으로 상을 짚었다. 손에 나이프 하나가 밀려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다룬도 쟈네이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마치 시선이 덫에 걸린 것처럼 서로 마주볼 뿐.
“어떻게… 내 주변에 사람을 심었나요? 혹시 내 주치의가?”
쟈네이딘의 목소리는 새되게 높아졌지만, 다룬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맙소사, 쟌느…”
왕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갑자기 연민과 절박감이 어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모할 수가 있습니까? 알고 있으면서…”
그의 시선은 쟌느의 가득 찬 와인잔으로 향했다.
“아직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는 상에 양손을 짚으며 쟈네이딘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처리하면-“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쟈네이딘은 무릎에 얹은 냅킨을 양손으로 쥐어짜면서도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듯 얼굴을 살피다가 다룬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생각이 없다…라.”
그는 장갑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배가 남산만해져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겁니까?”
“곧 얘기하려고 했었어요. 결혼식도 앞당기자고 하려고…”
쟈네이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오늘 저녁은… 오늘만은 이렇게 둘이서 보내고 싶었어요.”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말입니까? 내 아이라고 믿게 하기에는 어차피 너무 늦었을 텐데요.”
다룬의 차가운 대답에 쟈네이딘이 확 일어서자 식탁 위의 식기와 잔이 흔들리며 짤그랑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맹세코 그런 생각은…”
그 눈빛에 담긴 안타까운 진심에서 눈을 돌리며 다룬은 잔을 들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야경을 등진 채 그는 방안의 빛과 어둠 너머로 쟈네이딘을 마주보았다.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낮고 지친 목소리는 쉬어서 나왔다.
“왕가를 지키려고? 알데란의 평화를 위해서? 뱃속의 후레자식을 키워줄 얼간이가 필요해서?”
발끈하며 뭔가 대답하려다가 쟈네이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탁자 뒤에서 걸어나와 그의 앞에 와서 섰다.
“셋 다에요.”
다룬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왼눈을 가린 머리칼 뒤로 의안이 불안정하게 깜박거렸다. 쟈네이딘이 한 발짝 다가와 뺨에 부드럽게 손을 대자 그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쟈네이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세 가지가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 얼간이가 맞아요.”
“…가봐야겠습니다.”
다룬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손을 떼어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는 잔을 창틀 위에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
“다룬…”
문이 열리면서 복도의 불빛이 방안으로 길게 비쳐들었다. 그가 돌아보지 않고 나가자 방은 다시 촛불로 얼룩진 어둠에 잠겨들었다. 쟈네이딘은 잠시 창가에 서서 도시의 차갑게 빛나는 야경을 내다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II.
“결혼식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응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오르가나 내외는 아들을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왕녀와 식사하러 도시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간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머리는 흐트러지고 눈빛은 형형한 채로 들이닥쳐서 인사 하나 없이 내뱉은 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괜찮느냐.”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 아들을 도우러 부부가 테레아에서 본가로 올라온 이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늘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의아해하면서도 아들을 걱정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다룬?”
엘리리아 오르가나는 아들에게 걱정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었니? 좀 앉으렴. 와인이라도-“
“아뇨. 아닙니다.”
다룬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코루선트 전투 이후로 생긴 접촉 기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졌지만,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질 수 있다는 것은 의사도 이미 경고했었다.
“결혼식 준비는 어머니가 책임지고 계시죠. 얼마나 앞당길 수 있으십니까? 두 달 후면 될까요? 한 달?”
“얘야…”
어쩔 줄을 모른 채 엘리리아는 문간에 서서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다룬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알레산드로스가 등뒤에서 다가와 어깨를 붙들어주자 엘리리아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국가 행사인데 그렇게 급하게는 안 된다. 왕가와도 의논을 해야 하고-“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데요!”
다룬이 언성을 높이자 엘리리아는 흠칫했다. 알레산드로스는 얼굴이 굳었다.
“다룬! 지금 어머니에게 무슨…”
“전 지금이라도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혼인 신고만 하고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럽니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파산할 국왕이?”
경악해서 굳어버린 부모를 잠시 보다가 다룬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답고… 정숙한 내 아내를 데려와야죠. 동화 속 공주님처럼…”
어느새 복도까지 물러나서 복도 벽에 기대어선 다룬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흐느낌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엘리리아가 다룬을 달래서 일으키는 동안 알레산드로스는 하인 드로이드를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의사를 부르게.”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는 덧붙였다.
“왕녀님께도 통신을 보내도록. 내가 직접 통화하겠네.”
III.
눈을 떴다가 다룬은 방안에 가득한 햇살에 눈이 부셔서 도로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명암 적응이 빠른 왼눈의 의안만 살짝 떴다. 누군가 있었다. 침대가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그게 누구인지 깨닫고 다룬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룬! 괜찮아요?”
옷자락을 바스락거리며 쟈네이딘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다룬은 눈을 뜨며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왕녀님. 이곳에는 어인 일로?”
“아픈데 약혼녀를 부르는 건 당연하잖아요. 기분은 좀 어때요?”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나타난 쟈네이딘을 쳐다보지 않고 그는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홀몸도 아닌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거동하실 일은 아니었지요.”
쟈네이딘은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다룬. 날 좀 봐요. 어서.”
이를 악물고 천장을 노려보다가, 쟈네이딘이 꿈쩍도 하지 않자 마침내 다룬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손이 멱살을 잡으면서 억지로 일으키자 세상이 순간 기울어졌다. 그 찰나 동안 그는 오랜 악몽에 빠져들었다.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이던 무자비한 손, 등뒤에 세게 부딪혀 오며 호흡을 몰아내던 충격, 그리고 벗어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이 머리에, 눈에 파고들던 고통-
찰싹. 고개가 돌아가면서 그는 다시 햇살 가득한 침실로 돌아왔다. 쟈네이딘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자 도로 침대에 나자빠진 그는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며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보았다. 뺨이 가볍게 화끈거렸다.
“왕녀님…”
“이 구제불능의 바보.”
감정 없이 말하면서도 그녀는 거칠게 침대가 탁자에 있는 컵에 물을 따르고 약병 두 개에서 알약을 손에 덜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서 한 손에는 알약을, 다른 손에는 물잔을 우악스럽게 쥐어주었다.
“안테르 선생님 처방이에요. 당장 먹어요.”
거부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겁이 난 그는 재빨리 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컵을 도로 받아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저기… 구타도 의사의 처방입니까?”
“그건 내 처방이에요.”
다시 쟈네이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는 움찔했지만, 그녀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품에 가득 안겨오자 팔을 둘러주는 동작은 자동적이었다. 코루선트 상공에서 다쓰 세데스를 만난 이후로는 부모의 포옹마저 공포스러웠지만, 그녀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한 예외.
“결혼식을 앞당겨야겠다는 건 또 뭐에요?”
그의 어깨에 대고 말하는 쟈네이딘의 목소리는 불분명했다.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가 태어나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쟈네이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검고 부드럽고 따뜻한.
쟈네이딘은 그의 가슴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머리칼 속에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며.
“내가 그랬죠? 구제불능의 바보라고.”
그녀는 조그마한 주먹으로 다룬의 가슴을 내리쳤다.
“괴로우면 놓아버리고, 싫으면 헤어지면 되잖아요. 나 때문에 그렇게 아프면 파혼하고, 내전을 일으켜서 스스로 왕이 되어버려요. 그럴 수 있는데 왜…!”
그가 어깨를 붙잡아 확 끌어안자 쟈네이딘은 그의 위로 비틀 넘어졌다. 목을 끌어안으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바보같아요?”
“왕녀님이야말로 어째서?”
쟈네이딘을 끌어안은 채 다룬은 햇살이 눈부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부가 되든 되지 않든 우리는 정적입니다. 이렇게까지 큰 약점을 제게 쥐어주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일까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룬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녀의 온기를, 숨결을, 향기를 들이쉬며.
“그 사람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쟈네이딘은 그에게 몸을 붙여오며 말했다. 작게 찔러오는 아픔은 감정의 습관일 뿐이라고 다룬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등뒤를 맡기며 싸울 수 있는 친구란 정말이지 흔하지 않다고요.”
“자신에게 이미 등을 맡긴 친구라면 신뢰할 수밖에 없겠지요.”
대꾸하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그녀의 체온이 이렇게도 가까운 동안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어려웠다. 부상 이후 자신의 것 같지 않았던 몸이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정적이라 하더라도요.”
속삭이며 쟈네이딘은 입술로 그의 입을 덮쳐왔다. 더 이상 어떤 계산도, 주저도 없었다. (아래층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10대 소년 같은 걱정이 순간 스쳐가기는 했지만.) 몸과 영혼에 넘쳐흐르는 열기에 그는 기꺼이 항복했고, 시스 로드의 손에 죽었던 그는 그 기나긴 오후 동안 쟈네이딘의 품속에서 되살아났다.
IV.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저택 안쪽에서부터 울려나오자 다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 역시 다행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우렁찬 울음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만면에 웃음을 지은 나스 브레이텍에게 다룬은 정중히 마주 인사했다. 주변에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동안 누군가가 와인을 따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잔을 채웠지만, 아직 아무도 다룬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할 일이 있었으므로.
다룬이 문 맞은편에 서자 함께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친척들은 그와 문 사이에 공간을 비워주었다.간간히 나지막한 목소리만 들려오는 고요 속에 다룬은 복도에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후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가 가끔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왔고, 문이 칙- 열리면서 통통하고 쾌활한 여인이 강보를 안고 들어섰다.
“강축드립니다.”
산파는 방에 들어서기 전에 깊이 허리숙여 인사했다. 방안은 이제 조용했다. 고대와 같은 의미는 없었지만, 이것은 엄숙하고 역사가 오랜 의식이었다.
“부인께서는 순산 끝에 건강하시며, 순조롭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다룬은 안도감으로 순간 몸이 풀렸다. 산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소식이었고 뭔가 비상사태가 있었다면 연락이 왔겠지만, 그래도 말로 확인하자 새삼 안심이 되었다. 여기서 할 일만 끝나면 아내의 침대가로 달려가리라. 그리고 그녀가 잠든 동안 손을 붙들고 자신 곁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리라고 그는 다짐했다.
산파는 방을 가로질러 다룬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강보를 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이불을 풀어헤치자 아기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산파는 다시 일어나서 깊이 인사하더니 몇 발짝 물러났다.
이불 위에서 몸을 뒤틀며 우는 아기를 보고 방안은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건강하고 튼튼한 사내아이, 오르가나의 이름을 이을 후계자를 보며. 그러다가 곧 방안은 다시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쪼글쪼글한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룬은 잠시 역사의 연속성에 전율을 느꼈다. 그도, 그리고 알데란 귀족가의 모든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나자마자 이렇게 아버지의 발치에 내려놓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 이래, 하나하나 모두가 차례대로.
개인적으로 그는 바보같은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잘못 넘어져서 아이를 깔아뭉개기라도 하면 어쩌라는 말인가. 게다가 이제 이 의식에는 이전과 같은 의미는 없는데.
수천 년 전, 고대에는 이 의식에는 형식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발치의 갓난아이를 안아올리지 않으면 아이는 얼어죽거나 굶어죽도록 밖에 내쳐졌다. 혹은 죽여서 내버리기도 했다. 생사여탈권. 불구로 태어났거나, 약하거나, 여자로 태어난 수많은 아이가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거부당해서 죽어갔다.
그 중에는 어머니의 정절을 의심받은 아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다룬은 생각했다. 부성을 확신하지 못한 아비의 질투에, 혹은 아내를 벌하겠다는 복수심에 얼마나 많은 갓난아이가 죽어갔을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문명 시대인 지금은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를 아버지 발치에 내려놓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관습일 뿐이었고, 아이가 불구이거나 약하다면 아버지는 아이를 서둘러 안아올려서 이름을 지어준 후에 의료 전문가들과 함께 치료 방안을 의논할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아이를 거부한다고 아이가 죽어야 하는 그런 야만적인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룬은 문득, 자신이 아이를 안아들지 않고 나가버리면 저들의 표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파가 아이를 도로 안고 하얗게 질려서 쟈네이딘에게 돌아갈까? 이 자리에 모인 친지들이 수근거릴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자,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눈을 뜨고 있었다. 보랏빛 도는 푸른색이 아닌 검은 눈. 그와 쟈네이딘과 같은… 아직 눈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룬은 아이가 자신과 조용히 눈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잘 보려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서 흥분해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무시했다. (형식일 뿐인데 뭐 그렇게 좋아할까.) 갓 태어났는데도 아기의 머리칼은 숱이 많고 검었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만져보자 부드럽고 따뜻했다. 문득 아이가 춥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그는 서둘러 강보를 여며주었다.
강보에 싸인 채 꼬물꼬물 손발을 움직이는 이 조그만 생명은 아내가 준 선물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충돌하는 이해와 야심 속에서 그녀가 쥐어준 치명적인 약점, 그들이 서로 품을 수 있는 만큼의 신뢰.
그 신뢰의 제물이 된 아이에게는 자신을 스스로 희생 제물로 내어주고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이들의 이름이 어울리겠지. 미리 상의한 것과는 좀 달랐지만, 아내는 이해할 것이다.
강보에 감싼 아이를 안고 다룬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이불 틈새로 조막만한 손을 내밀고 휘두르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방 구석구석까지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바트 자락스 오르가나. 환영한다, 아들아.”
마지막 장면에 나온 풍습은 고대 로마에 실제 있었던 풍속입니다. 알데란 문화는 제게는 왠지 로마 내지는 그리스식 이미지로 떠오르기도 하고, 또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뭐 결론은 자락스 지못미 (?)

4 thoughts on “[공화국의 그림자] 신뢰

  1. orches

    잘 때렸어 쟈 공주! 라고 생각하는 제가 있었지라. 그녀가 가진 자락스에 대한 애정도, 다룬에 대한 애정도 거짓이라고 보기 어려울 듯 하다는 생각도 더불어.

    그러고보니 쟈네이딘이라면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했고 이득이란 이득은 전부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고귀하고 깨끗한 제 1왕녀의 이미지를 캠페인 끝까지 가져간 그녀가 공화국의 그림자에서 제일 무서운 인물일 거라고 로키님과 이야기했던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군요. 자락스 지못미(2)

    Reply
    1. 로키

      그저 찌질에는 매가 약이지요! 역시 공화국의 진짜 대마왕은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은 쟈 공주였던 겁니다.

      Reply
  2. 이방인

    원래 영웅은 괴롭힘 당해야 제맛(…)
    여자도 빼앗기고 자식도 빼앗겼으니 이제 커다란 운명의 회오리를 이기지 못하고 비극적인 파멸을 맞기만하면 영웅서사시는 완성이군요(…)

    쟈네이딘만이 승리자라고 하기엔 연애는 원래 자기만족인거라…
    모든것을 다 챙겨간 쟈네이딘 왕녀도.

    ‘사랑하는 사람과 운명의 하룻밤을 보내고 결국 이상을 쫒아 떠나간 멋진 남자’가 되어버린 자락스도.

    ‘사랑하는 여인이 낳은 다른남자의 아이까지 사랑하며 그녀를 감싸안는 멋진 남자’가 된 다룬도.

    어찌보면 모두가 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라고 할수 있겠죠.
    아무리 비극적인 연애도 이렇게 생각하면 다 나름대로 얻은게 있고, 잃은게 있고. 그 둘이 대충 밸런스가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거든요. 결론은 연애는 좋은거라는거(…)

    Reply
    1. 로키

      하긴요, 어쩌면 연애는 상대에게 심취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연애하는 자기 모습에 대한 심취가 아닐까도 해요. 그러면서 자신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 (그리고 상대)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거겠죠. 그리고 그 속에서 선택하면서 자신의, 그리고 삶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겠고요. 결국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외적인 기준으로 측정하기 어렵겠네요. 외면적으로는 잃은 것이 있어도 진짜 승부는 내면에서 나니까요. (그래도 역시 두 남정네를 꿀꺽 삼키신 쟈 공주는 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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