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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와 소설의 시점 (월광을 쓰면서)

월광 소감 2부에 해당합니다.

RPG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라면 아마도 시점이 아닐까 합니다. RPG는 대체로 외부적인 시점이고,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시점은 단편적일 뿐 지속성이 없지요.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가자나 진행자가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며 그의 내적 서술을 유지하는 것은 RPG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진행자 하나와 참가자 하나가 하는 1:1 플레이 정도에서나 가능하지요.

반면 소설은 1:1이 아닌 여러 인물이 있는 상황에서도 특정 인물의 시점을 유지하면서 그의 내면과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점 인물의 생각이나 성격도 드러낼 수 있고, 인물이라는 관점을 통해 왜곡 혹은 제한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요. 그래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 가까운 RPG를 특정 인물 시점으로 전환하면 인물의 시각과 내면이라는 새로운 면모가 생기는 점이 로그와는 또 다른 소설적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정찰 임무’ 로그의 외부 시점에서 인물 시점으로 전환해서 ‘월광’을 쓰면서 역시 조심스러웠던 것이라면 제가 다루는 인물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인물의 시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월광에 가장 많이 활용한 시점은 오체스님 인물인 아스타틴의 시점이었고, 그 다음은 이방인님의 랜돌프(랜디)였죠. 이 인물의 행동이 어떤 내적 충동에서 나오는지, 동기와 내면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인물에 대한 지식과 대사, 행동을 통해 짐작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조마조마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나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위키에 올렸었고, 앞으로도 그런 과정을 거쳐 공개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물의 내면에 파고들면서 의외의 면모들이 나타난 점이 소설화의 가장 큰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아라에 대한 아스타틴의 동정이라든지 무모한 단독행동을 했을 때의 심정, 언제든 아라에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을 맡기는 랜돌프의 각오, 랜돌프를 죽게 둘까 생각했다가 아스타틴에게 자극받아 마음을 고쳐먹는 아라의 변화 등은 하나같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인물의 새로운 발견이었죠.

시점을 전환해가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으로 진행한 것도 재밌었습니다. 제 인물인 아라의 시점으로 쓰는 게 정석이었겠지만, 아라 시점으로는 이야기가 재밌거나 완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선 랜돌프의 모습이 많이 왜곡되었을 것이고, 니아 시점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한데다 아스타틴과 랜디만 알 수 있는 부분들은 다 빠졌겠지요. 결국 최선의 시점 인물은 ‘제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혹은 특정 부분을) 가장 잘 끌어갈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인물의 내면은 짐작에 맡기는 게 가장 적절할 때도 있고요.

앞으로도 이오닉스 세션 소설화를 하면서 다양한 시점을 활용할 듯하고, 그때마다 인물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과 기법을 실험해 보면서 RPG와 소설의 서로 다른 문법에 대해 생각도 해볼 수 있겠군요. 그건 인물들이 떠나는 모험과는 또 별개로 제게도 모험이 될 것 같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게임의 규칙

이전 마음의 계절이 ‘여명과 석양의 청춘드라마’라면 이번에는 ‘여명과 석양의 막장드라마’ 판이군요. 야한 대목과 폭력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게임의 규칙

I. 절대 주도권을 잃지 말라

“이번 판은 아무래도 엑토라스의 승리 같습니다.”

새파란 하늘에는 티없이 하얀 구름이 흐르며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햇살은 밝지만 너무 뜨겁지는 않고,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식혀준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하고 음악적인 목소리는 품위에 한 치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달콤한 약속을 품고 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젊은이에게 대답한다. 목소리는 낮지만, 주변에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분명 이올라스에요. 10 듀캣을 걸죠.”

“10 듀캣에다가 입맞춤은 어떻겠습니까?”

어깨 너머로 돌아보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지만 냉정하고, 철저히 계산적이다. 아마도 그녀 자신의 눈빛이 그렇듯이.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입맞춤 대신 10 듀캣을 더 걸도록 하죠.”

주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다.

“스틸리안느 영애의 입맞춤에 10 듀캣의 가치밖에 없는지는 몰랐는데요.”

듣는 사람들이 웃기 전에 스틸리안느는 빠르게 쏘아붙인다.

“추가 10 듀캣은 니키아스 공의 입맞춤을 피하는 대가랍니다.”

좋은 공연을 본 관객이 박수치듯 주변에 앉은 귀족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못 들은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전해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그의 눈빛에도 웃음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며 스틸리안느는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린다. 궁정 무도회의 춤처럼 정교한 대화에도, 관객의 반응에도, 날씨에도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결국 그날은 이올라스 노타라스의 승리로 끝나고, 니키아스 콤네노스 두카스 안겔루스는 시종을 통해 그녀의 시종에게 10 듀캣과 편지를 전한다. 영애의 안목에 감탄을 표하고, 10 듀캣을 되찾을 내기를 위해 훗날 찾아뵐 수 있겠느냐는 편지 내용을 그녀는 만족스럽게 확인한다.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II. 약점을 보이지 말라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절 보내세요.

선택이라는 말은 때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를 볼 생각에 들뜬 동생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바스티아노스는 모르니까,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애의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영원히 변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나는 눈물과 절망의 눅눅한 냄새가 싫었다. 익사하는 사람처럼 세차게 끌어안는 품이 싫었다.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마주 안지도 않고 스틸리안느는 그 포옹 속에 가만히 서서 맞은편 벽만을 쳐다보았다. 절 보내세요. 이 한 마디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펼쳐나가는 미래를 꿰뚫어보듯.

“아..”

눈을 뜨자 어둠 속이다. 은빛과 청색 달빛이 얼룩진 검은 방안은 조용하다. 가슴은 놀란 새의 날갯짓처럼 세차게 뛴다. 눈가가 왜 젖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섯 살이었던 그날도, 아버지 소식이 왔을 때도, 어머니가 뒤를 따르듯 돌아가셨을 때도 한 번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강하고 따스한 팔이 끌어당겨 꼭 안아주자 가슴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던 새는 조금씩 조용해진다. 아직 졸음에 잠긴 그의 쉰 목소리는 걱정스럽다.

“예… 예.”

스틸리안느는 마치 졸음을 몰아내려는 듯 눈을 비벼서 눈물을 지워버린다. 꿈속 어머니의 눈물이 눈가에 묻어난 것일까. 그 기억에 대한 혐오감에 몸이 떨려온다.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머리를 쓸어넘겨주는 부드러운 손에서는 낙엽 태우는 연기와 박하꽃 냄새가 난다. 그 손을 붙잡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조금 물러나서 일어나 앉는다.

“아무래도 그렇죠. 귀족 처녀의 자존심도 버리고 잘생긴 불한당과 놀아나는 악몽을 꾸었답니다.”

“아, 저런.”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누구라도 놀라서 깰 만한 꿈이군요. 그래서 그 불한당은 어떻게 됐습니까?”

“불한당부터 걱정하시네요. 그게 유유상종이라는 건가요?”

익숙한 독설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는다. 오랜 악몽을 몰아내주는 그의 온기 속에서, 내밀하고 너그러운 밤의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에서 잠시 자유로울 수 있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용하고 버릴 남자를 이렇게까지 원하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위험했다.

“그자가 어떻게 하던가요. 이렇게… 손길로 영애를 유혹했습니까?”

발을 만지고 발목을 감싸는 손의 온기에 스틸리안느는 흠칫 떤다.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같이!

“그대를 여신이라고 부르고 숭배하듯 어루만지며 순진한 처녀의 마음을 훔치던가요?”

발등에, 무릎에, 허벅지에 입술이 차례대로 닿자 자제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달빛 속에 마주친 그의 눈에도 열정의 빛이 어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결한 입술을 차지하고…”

그가 와락 끌어안으며 입맞추자 그녀는 기꺼이 입을, 몸을, 영혼을 그에게 연다. 이건 미친 짓이다. 달빛 속의 광기, 미래가 없는 소모적인 불길인 것도 알고 있다. 그는 황제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 다 알고, 다 계산하고 있는데도…

나중에, 나른한 만족감 속에 그와 함께 누워서 그녀는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본다. 잠시나마 조금 다른 꿈을 꾸면서,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며. 가슴을 갉아먹는 공허를 잠시나마 충족받은 채, 부질없는 환상인 것을 알면서, 다 알면서.

III.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

“니키아스, 나…”

목소리는 부서진 유리조각이 되어 목을 찢으며 나온다. 떨리는 약한 목소리가 싫다.

그는 반쯤 열린 문앞에서 멈추어선다. 돌아보지는 않고, 그 작은 자비에 스틸리안느는 감사한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 채, 그녀는 말하려고 입을 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스틸리안느.”

그는 어깨 너머로 천천히, 반쯤 돌아본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등잔빛 속에서 익숙한 얼굴의 뚜렷한 윤곽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여신에게는 흠조차 되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해요.”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 우두커니 앉은 스틸리안느는 멍하니 보기만 한다. 잡을 수도, 부를 수도 없다.

창밖으로는 푸른 달과 하얀 달이 져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스틸리안느는 그가 말을 듣기도 전에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할말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도, 그 의미가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에 천천히 천천히 스며든다.

마침내 그 지식이 젖어들어 이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다가 이불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문다. 비명을 지를까 두렵다. 밤의 자락을 갈기갈기 찢는 비명을 듣고 모두가 달려온다면, 그때야말로 마지막 긍지마저 내버린 후일 테니.

그가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반역자의 딸이 콤네노두카이 안겔로이의 장자와 결혼하는 것은 니키아스가 황제의 신뢰를 잃는 것을 뜻했다. 여러 가문에 결혼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니키아스가 벌써,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죽은 반역자의 딸과 그 여자의 사생아를 위해 그가 왜…

이불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소리없는 긴 비명을 토해낸다. 목표를 위해 이용할 남자였을 뿐인데, 어떤 광기 때문에 이 지경에… 그가 버리고 갔을 수많은 여자들처럼, 문을 닫은 그의 등뒤에 남겨졌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틸리안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노려본다. ‘자신만을 생각해요.’ 단순하고 착각의 여지가 없는 대답.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한… 다른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신에게 인정하면서 그녀는 굴욕감과 분노가 타고 남은 재를 가슴 가득 안고 잿빛 새벽을 맞이한다.

IV.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워라

의사는 실력이 최고이며,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킨다고 했다. 그녀가 시술한 환자들은 이후에도 문제없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모두들 쉬쉬하는,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

“마음을 확실히 정하셨습니까?”

의사의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 앞에서 스틸리안느는 긴 순간 침묵한다. 확실히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은 있지도 않은데 가슴 속의 새는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린다. 할 수 있다면 뱃속의 아이도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칠까. 심장과 아이는 모두 그녀의 몸속에 갇혀 있다, 그녀 자신이 그렇듯이. 이 지독한 감옥을 찢어발겨 모두를 풀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듯 그녀는 눈을 꽉 감는다. 잠을 제대로 잔지 너무 오래 되었다…

의사가 조용히 일어서자 의자가 바닥을 가볍게 긁는다. 그 소리가 귀에 크게 울리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하실 수 있는 수술이 아닙니다. 가보십시오.”

마치 누군가 손을 붙잡아서 당긴 것처럼 멈칫멈칫, 부자연스럽게 스틸리안느는 팔을 뻗어 의사를 제지한다. 그리고 누군가 고개를 잡아 움직이듯이 천천히 끄덕인다. 선택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는 막다른 길에 서서. 의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침상 위에 누우십시오.”

자리에 눕자 신분을 숨기려고 얼굴을 가린 너울 너머로 깔끔한 하얀 석회 천장이 보인다. 가만히 누워 심장 소리에 귀기울이며 스틸리안느는 어려서 시골 별장에 새하얗게 내렸던 눈을 떠올린다. 눈밭 한가운데 지독히도 붉었던 선혈의 기억이 눈을 태울 듯 선명하다.

별장 일꾼의 아들은 솔개를 하나 길들여 마당의 닭과 싸움을 붙이고는 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몇 살 위였던 그 아이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녔고, 새들의 싸움을 조마조마하면서도 두근거리며 지켜보곤 했다. 몇 번 쪼이면 물러나는 수탉의 모습을 보기 지루해진 스틸리안느는 홱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평소라면 누나 뒤를 쫓아왔을 바스티안은 들어올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놀란 세바스티아노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스틸리안느는 벌떡 일어나서 마당으로 달렸다. 그리고 눈밭 한가운데 튄 피를 보고 우뚝 섰다…

의사가 들어와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갈색 액체가 든 잔을 건넨다.

“드십시오. 잠이 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겠지. 얼룩진 핏자국만을 남기고.

여덟 살 스틸리안느는 우는 세바스티아노스를 가로막으면서 일꾼의 열두 살짜리 아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팔레오로고스의 후계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 남은 건 동생밖에 없어요, 신이여 부디 자비를-) 당장 말하지 않으면 황궁의 고문실에서 코를 베어내고 눈을 뽑아버린다는 말에, 가뜩이나 얼이 나가있던 소년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아노스는 누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리질렀다. 누나 하지마! 그게 아냐!

소년이 안고 있던 것이 눈밭에 툭 떨어졌을 때에야 스틸리안느는 눈앞을 가린 핏빛 안개가 걷혔다. 구겨지듯 눈밭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솔개… 도망치지 못하게 한쪽 다리에 묶었던 실이 피가 방울진 깃털에 엉켜 바람에 흔들렸다.

마당에서 제일 큰 수탉도 이겼던 솔개의 시체를 잠시 보다가 스틸리안느는 고개를 돌려 마당을 살폈다. 얼굴에 눈물이 얼룩진 채 얼어붙어 서있는 소년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당 저편에, 까다롭게 꼭꼭거리며 병아리 주변을 맴도는 자그마한 암탉이 눈에 들어왔다. 암탉의 부리와 깃털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잔은 내용물을 길게 쏟으면서 포물선을 그린 끝에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다. 스틸리안느는 너울 너머로 의사를 마주보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더러운 킨다스 마녀.”

목소리가 낯설다. 으르렁거리는 승냥이, 울부짖는 암늑대, 꼭꼭거리는 암탉. 이성이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아주 멀리서 그녀는 생각한다.

“이 일을 누구에게라도 얘기하면 다시는 아무것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해주겠다.”

의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잠시 마주보다가 돌아서서 바닥에 흩어진 잔 조각과 약물을 쳐다본다.

“기물을 파손하실 생각이라면 나가주십시오.”

한쪽 팔로 배를 감싼 채 스틸리안느는 자리에서 비틀 일어난다. 잔을 치우려던 의사는 마치 부축하려는 듯 다가오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러난다. 스틸리안느는 가져왔던 돈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주머니가 풀어지면서 바닥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흩어진다. 의사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밤거리로 나선다.

자신만 생각하라고? 찬바람 속에 허허로운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래주지, 이 후레자식. 네 이야기 같은 건 듣지 않겠어. 너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오직 나만, 그리고 나의…

밤의 도시에서 어두운 미궁을 헤매며, 스틸리안느는 어릴적 시골의 눈밭 위를 걷고 있다. 발밑에는 걸음걸음마다 붉게 물든 눈이 버석거리며 부스러져내린다.

V. 사랑에 빠지지 말라

대리석 벽을 따라 날아오르는 천사들은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이 남에게는 저렇게 보일까, 스틸리안느는 생각한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마다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이 초월적인 것을 바라보는 그들은 이해할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저들을 만든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차가운 바닥에 혼자 죽어가면서 그는 천사들과 같은 초월을 보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를 오늘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은 신도, 어떤 초월성이나 신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세속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진창을 딛고 이곳까지 왔다. 천사들은 천상의 신성, 태양의 찬란한 빛만을 우러르겠지만 그녀는…
그녀는 이 땅 위에 살아간다.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을 위하여. 구름과 광휘가 아닌 단단한 바닥을 딛고 그녀는 무수한 시선
사이로, 성당을 장식한 천상의 영광 아래 제단으로 걸어간다.

제3 군단의 장교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를 연회에서 만났을 때에 그녀는 그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아 블라스티아가 5년의 결혼생활 끝에 죽었을 때 두 사람 슬하에는 아이가 없었다. 율리아노폴리스 근무지에서 그가 정부로 두었던 여자도 둘이 관계를 지속한 동안에는 아이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와 헤어진 이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아들을 낳았다.

황궁 연회에서 그와 처음으로 시선을 맞추고 미소지으면서 스틸리안느는 그의 전처와 옛 정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와 소문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콘스탄티노스라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걸고 자신을 도박판에 올려놓았다.

사랑을 필요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콘스탄티노스만큼 남자를 뜨겁게 사랑한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줄 남자, 귀대 날짜가 걸려서 서둘러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다른 아이가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남자라면 더욱 좋았다. 그래서 콘스탄티노스 미크루라케스는 그녀에게는 꿈같은 이상형이었다. 그녀를 등뒤로 버려두고 문을 닫던 그 뒷모습의 기억이 아무리 아파도, 달빛 속의 열정이 때로는 못 견디게 그리워도 그것은 죽어버린 꿈일 뿐, 그녀에게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 더 절실하게 그 꿈을 사랑했다.

그 소박하고 강직한 콘스탄티노스가 그녀를 보는 눈길에 열정의 불길이 어린 순간 설레는 마음은 진짜였다. 사슴을 함정으로 몰아가는 사냥꾼의 가슴이 뛰는 흥분이 진짜이듯이. 만난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그가 참지 못하고 청혼했을 때 흘린 눈물도 진짜였다. 사막을 헤매이다 멀리에서 녹지를 발견한 여행자의 안도감만큼 진실한 감정이 있을까.

제단 앞에 무릎꿇기 직전에 스틸리안느는 다시 한 순간 차가운 대리석 천사들에게 눈길이 간다. 무표정하고 엄숙한 환희에 빠진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구애했던 조각가는 여지가 없이 거절당한 후 미친 듯 작업에 몰두했고, 마지막 천사를 완성한 다음날 아침 작업 도구로 손목을 그은 싸늘한 시체를 인부들이 발견했다. (새하얀 대리석 위에 붉게 흐르는 피.) 니키아스가 예술가의 죽음을 낙상으로 무마한 덕분에 성당은 예정대로 문을 열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으면서 그녀는 조각가의 죽음이 잠시 가슴에 남는다. 끝내 모르는 사람이었던 소녀 때문에 재능과 목숨을 내던진 그 무모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 파괴적인 불길을 통과해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하얀 대리석 위에 선명했을 붉은 피의 가르침을 가슴에 단단히 새긴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망칠 힘을 쥐어주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VI. 길을 정했다면 끝까지 걸어라

콘스탄티노스가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자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퍼진다.

“많이 컸구나, 이녀석!”

아리스가 조막만한 손을 내밀어 콘스탄티노스의 코끝을 만지자 그는 웃으며 아이를 던졌다 받고, 스틸리안느는 아리스가 꺄악 웃으며 공중을 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면서도 미소짓는다. 머리에 햇살이 따뜻하고, 정원의 나무에서는 새가 지저귄다. 한여름의 정원에서 아리스가 웃는 세상에는 어둠도, 두려움도 한 점 없다.

“그동안 잘 지냈소?”

옹알거리는 아리스를 꼭 안은 채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팔로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맞춘다. 그 포근한  체온과 넓은 가슴에 안겨 스틸리안느는 그에게 웃어준다.

“그럼요. 율리아노플은 어땠나요?”

“당신과 아리스가 없었지. 보고 싶었소.”

막 대꾸하려는 순간 뒤에서 작은 헛기침이 들린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마님. 나으리를 빨리 뵈어야겠다고 하셔서…”

연기와 박하꽃 향. 잠시 돌아보지 않고 서서 스틸리안느는 태연하고 무심한 표정을 얼굴에 갑옷처럼 두른다. 콘스탄티노스에게 아리스를 받아들고 그녀는 천천히 돌아선다. 남편은 이미 그녀를 지나쳐 손님에게 다가서고 있다.

“니키아스 공.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오시자마자 이렇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콘스탄티노스 경.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도록 하지요. 건강하셨습니까, 스틸리안느 부인?”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린 것은 오랜 감정의 습관일 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헤집어진 옛 상처의 고통 앞에 그녀는 자신을 다잡고, 낯선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아리스를 꼭 끌어안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말씀 나누시지요. 마실 것을 올려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쪽은 아리스 공자인가요? 아주 잘생긴 아드님이군요. 두 분 많이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녀는 엷고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다시 귓전에 울려온다.

“감사합니다, 공. 당신을 꼭 닮았죠, 여보?”

“당신을 더 닮은 것 같은데.”

콘스탄티노스는 웃으며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춘다.

“먼저 들어가보겠소.”

“예.”

그녀는 인사하고 지나쳐가는 니키아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품안의 아들,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 순진무구한 눈빛과 포근한 아기 냄새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녀와 아이를 쳐다볼 자격조차 없는 남자와 그런 남자 앞에서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소리는 등뒤로 멀어져서 사라져간다.

가끔 그녀는 꿈을 꾼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런 꿈. 권력에 가족을 잃고 피눈물 흘린 사람이 어디 그녀뿐일까.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운은 좋았다. 이걸로 끝내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다른 꿈을 꾸고는 한다. 엄마, 바스티안은 못해요. 어머니의 눈물, 그녀에게 반갑게 고개 돌리던 아버지. 절 보내세요.

전쟁이나 다름없이 싸워서 얻은 행복에 잠기다가도 순간순간, 스틸리안느는 자신이 온전히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린 공허를 채우는 피의 꿈을 꾼다. 평온한 일상의 틈새에서 끝없이, 언제나.

아리스가 배가 고픈 듯 품안에서 칭얼거린다. 조그마한 등을 토닥여주며 스틸리안느는 집으로 돌아선다.

“미안해, 아리스.”

보드라운 머리칼에 입맞추고 그녀는 아들의 귀에 속삭인다.

“엄마를 용서하렴.”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용서를 비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도. 칭얼대는 아리스를 안고 그녀는 조용히 햇살 가득한 정원에 등을 돌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생명을 끌어안고 죽음의 그림자를 끌며, 가슴에는 재와 폐허 가득한 채 삶의 전장 한가운데로.

솔개를 길들여 닭과 싸움붙이는 얘기는 고등학교 때 들은 것인데 계속 기억에 남았었습니다. 이름없는 인물 중 하나는 (스틸리안느는 아랫것들 이름에 관심이 없뜸) 짐작하시겠지만 본편 캠페인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스틸리안느에게 얻어맞았던 소년은 지금도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등장할지도 모르죠.

[공화국의 그림자] 신뢰

공화국의 그림자 종결 두 달쯤 후의 이야기입니다. 중간쯤 가서 좀 야합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흑흑)
I.

따뜻한 밤공기 속에 도시의 야경이 별의 바다처럼 빛났다. 20층 높이에서 도시를 내다보는 방안에는 촛불이 밖의 영롱한 빛무리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따뜻한 빛을 흩뿌렸다. 은은한 그 빛은 은제 식기에, 와인잔에, 고급 도자기에 비치면서,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젊은 남녀의 얼굴에 친밀한 온기가 되어 깃들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나직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마저 빛이 되어 금빛과 주황색으로 물든 저녁에, 부드럽고 너그러운 그늘에 녹아들었다.

마침내 반쯤 먹은 요리 접시를 밀어내며 다룬은 몸을 뒤로 기댔다. 긴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더는 도저히 못 먹겠군요. 요리사에게는 최고였다고 전해주십시오.”
“다 먹지 않으면 파비오가 서운해할 거에요.”
쟈네이딘은 촛불 너머로 그에게 웃었다. 따스한 빛에 검은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렇잖아도 오르가나 공이 고초를 겪으시고 여윈 것 같다고 그가 특별히 준비한 요리랍니다.”
“마음은 있지만 무리로군요. 혹시 대신 드셔달라고 하면 실례가 되겠습니까?”
다룬은 마주 웃었다. 오른쪽 눈에는 장난스러운 빛이 어렸지만, 흘러내린 머리에 가린 왼쪽 눈은 어둠 속에 순간 부자연스러운 빛을 발했다. 쟈네이딘은 짐짓 작은 한숨을 쉬었다.
“파비오가 마음 상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죠.”
쟈네이딘 앞에 접시를 놓아주고 다룬은 그녀가 음식에 열중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의 빈 접시와 가득 찬 와인잔을 마치 먼 곳에서 보듯 지켜보았다.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빈 잔을 스스로 채우면서 다룬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15년 묵은 테레아산을 가져온 것입니다만. 왕녀님께서 늘 좋아하셨지요.”
쟈네이딘은 천천히 접시에서 눈을 들며 입을 닦았다. 그녀는 다룬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닙니다… 그저 오늘밤에는 마음이 나지 않는군요. 미안합니다.”
“성의를 봐서 건배라도 하지요.”
다룬은 잔을 들었다.
“알데란의 미래를 위하여.”
쟈네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웃어보이며 그와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다룬이 잔을 거의 단숨에 비우는 동안 입술을 살짝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알데란의 미래 정도로는 술 생각이 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다룬의 눈빛과 미소에는 점점 날카로운 빛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공화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제다이…”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나이트 자락스 토레이를 위하여?”
저녁의 따스하던 친밀감은 사라져 버렸다. 방안에 가라앉은 깊은 그늘 속에는 불명확한 형체들이 스멀거리며 떠돌았다. 쟈네이딘은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제 말씀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아니면 영영 숨기실 생각이셨는지요, 전하?”
빈정거리며 다룬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자기 잔을 채웠다.
“그 숭고한 제다이 양반이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는 걸 말입니다.”
쟈네이딘은 창백해지면서 손으로 상을 짚었다. 손에 나이프 하나가 밀려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다룬도 쟈네이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마치 시선이 덫에 걸린 것처럼 서로 마주볼 뿐.
“어떻게… 내 주변에 사람을 심었나요? 혹시 내 주치의가?”
쟈네이딘의 목소리는 새되게 높아졌지만, 다룬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맙소사, 쟌느…”
왕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갑자기 연민과 절박감이 어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모할 수가 있습니까? 알고 있으면서…”
그의 시선은 쟌느의 가득 찬 와인잔으로 향했다.
“아직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는 상에 양손을 짚으며 쟈네이딘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처리하면-“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쟈네이딘은 무릎에 얹은 냅킨을 양손으로 쥐어짜면서도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듯 얼굴을 살피다가 다룬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생각이 없다…라.”
그는 장갑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배가 남산만해져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겁니까?”
“곧 얘기하려고 했었어요. 결혼식도 앞당기자고 하려고…”
쟈네이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오늘 저녁은… 오늘만은 이렇게 둘이서 보내고 싶었어요.”
“날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말입니까? 내 아이라고 믿게 하기에는 어차피 너무 늦었을 텐데요.”
다룬의 차가운 대답에 쟈네이딘이 확 일어서자 식탁 위의 식기와 잔이 흔들리며 짤그랑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맹세코 그런 생각은…”
그 눈빛에 담긴 안타까운 진심에서 눈을 돌리며 다룬은 잔을 들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야경을 등진 채 그는 방안의 빛과 어둠 너머로 쟈네이딘을 마주보았다.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낮고 지친 목소리는 쉬어서 나왔다.
“왕가를 지키려고? 알데란의 평화를 위해서? 뱃속의 후레자식을 키워줄 얼간이가 필요해서?”
발끈하며 뭔가 대답하려다가 쟈네이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탁자 뒤에서 걸어나와 그의 앞에 와서 섰다.
“셋 다에요.”
다룬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왼눈을 가린 머리칼 뒤로 의안이 불안정하게 깜박거렸다. 쟈네이딘이 한 발짝 다가와 뺨에 부드럽게 손을 대자 그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쟈네이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세 가지가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 얼간이가 맞아요.”
“…가봐야겠습니다.”
다룬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손을 떼어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는 잔을 창틀 위에 내려놓고 문으로 걸어갔다.
“다룬…”
문이 열리면서 복도의 불빛이 방안으로 길게 비쳐들었다. 그가 돌아보지 않고 나가자 방은 다시 촛불로 얼룩진 어둠에 잠겨들었다. 쟈네이딘은 잠시 창가에 서서 도시의 차갑게 빛나는 야경을 내다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II.
“결혼식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응접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오르가나 내외는 아들을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왕녀와 식사하러 도시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간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머리는 흐트러지고 눈빛은 형형한 채로 들이닥쳐서 인사 하나 없이 내뱉은 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괜찮느냐.”
알레산드로스 오르가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에서 회복하고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 아들을 도우러 부부가 테레아에서 본가로 올라온 이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늘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의아해하면서도 아들을 걱정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다룬?”
엘리리아 오르가나는 아들에게 걱정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었니? 좀 앉으렴. 와인이라도-“
“아뇨. 아닙니다.”
다룬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코루선트 전투 이후로 생긴 접촉 기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졌지만,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질 수 있다는 것은 의사도 이미 경고했었다.
“결혼식 준비는 어머니가 책임지고 계시죠. 얼마나 앞당길 수 있으십니까? 두 달 후면 될까요? 한 달?”
“얘야…”
어쩔 줄을 모른 채 엘리리아는 문간에 서서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다룬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알레산드로스가 등뒤에서 다가와 어깨를 붙들어주자 엘리리아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국가 행사인데 그렇게 급하게는 안 된다. 왕가와도 의논을 해야 하고-“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데요!”
다룬이 언성을 높이자 엘리리아는 흠칫했다. 알레산드로스는 얼굴이 굳었다.
“다룬! 지금 어머니에게 무슨…”
“전 지금이라도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혼인 신고만 하고 끝내버리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럽니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파산할 국왕이?”
경악해서 굳어버린 부모를 잠시 보다가 다룬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답고… 정숙한 내 아내를 데려와야죠. 동화 속 공주님처럼…”
어느새 복도까지 물러나서 복도 벽에 기대어선 다룬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흐느낌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엘리리아가 다룬을 달래서 일으키는 동안 알레산드로스는 하인 드로이드를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의사를 부르게.”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는 덧붙였다.
“왕녀님께도 통신을 보내도록. 내가 직접 통화하겠네.”
III.
눈을 떴다가 다룬은 방안에 가득한 햇살에 눈이 부셔서 도로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명암 적응이 빠른 왼눈의 의안만 살짝 떴다. 누군가 있었다. 침대가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그게 누구인지 깨닫고 다룬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룬! 괜찮아요?”
옷자락을 바스락거리며 쟈네이딘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다룬은 눈을 뜨며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왕녀님. 이곳에는 어인 일로?”
“아픈데 약혼녀를 부르는 건 당연하잖아요. 기분은 좀 어때요?”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나타난 쟈네이딘을 쳐다보지 않고 그는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홀몸도 아닌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거동하실 일은 아니었지요.”
쟈네이딘은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말했다.
“다룬. 날 좀 봐요. 어서.”
이를 악물고 천장을 노려보다가, 쟈네이딘이 꿈쩍도 하지 않자 마침내 다룬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손이 멱살을 잡으면서 억지로 일으키자 세상이 순간 기울어졌다. 그 찰나 동안 그는 오랜 악몽에 빠져들었다.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이던 무자비한 손, 등뒤에 세게 부딪혀 오며 호흡을 몰아내던 충격, 그리고 벗어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이 머리에, 눈에 파고들던 고통-
찰싹. 고개가 돌아가면서 그는 다시 햇살 가득한 침실로 돌아왔다. 쟈네이딘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자 도로 침대에 나자빠진 그는 팔꿈치를 짚어 몸을 반쯤 일으키며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보았다. 뺨이 가볍게 화끈거렸다.
“왕녀님…”
“이 구제불능의 바보.”
감정 없이 말하면서도 그녀는 거칠게 침대가 탁자에 있는 컵에 물을 따르고 약병 두 개에서 알약을 손에 덜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와서 한 손에는 알약을, 다른 손에는 물잔을 우악스럽게 쥐어주었다.
“안테르 선생님 처방이에요. 당장 먹어요.”
거부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겁이 난 그는 재빨리 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컵을 도로 받아든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저기… 구타도 의사의 처방입니까?”
“그건 내 처방이에요.”
다시 쟈네이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는 움찔했지만, 그녀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의 품에 가득 안겨오자 팔을 둘러주는 동작은 자동적이었다. 코루선트 상공에서 다쓰 세데스를 만난 이후로는 부모의 포옹마저 공포스러웠지만, 그녀만은 언제나 예외였다.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한 예외.
“결혼식을 앞당겨야겠다는 건 또 뭐에요?”
그의 어깨에 대고 말하는 쟈네이딘의 목소리는 불분명했다.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가 태어나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쟈네이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검고 부드럽고 따뜻한.
쟈네이딘은 그의 가슴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머리칼 속에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며.
“내가 그랬죠? 구제불능의 바보라고.”
그녀는 조그마한 주먹으로 다룬의 가슴을 내리쳤다.
“괴로우면 놓아버리고, 싫으면 헤어지면 되잖아요. 나 때문에 그렇게 아프면 파혼하고, 내전을 일으켜서 스스로 왕이 되어버려요. 그럴 수 있는데 왜…!”
그가 어깨를 붙잡아 확 끌어안자 쟈네이딘은 그의 위로 비틀 넘어졌다. 목을 끌어안으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바보같아요?”
“왕녀님이야말로 어째서?”
쟈네이딘을 끌어안은 채 다룬은 햇살이 눈부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부가 되든 되지 않든 우리는 정적입니다. 이렇게까지 큰 약점을 제게 쥐어주는 것이 상식적인 행동일까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룬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녀의 온기를, 숨결을, 향기를 들이쉬며.
“그 사람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죠.”
쟈네이딘은 그에게 몸을 붙여오며 말했다. 작게 찔러오는 아픔은 감정의 습관일 뿐이라고 다룬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등뒤를 맡기며 싸울 수 있는 친구란 정말이지 흔하지 않다고요.”
“자신에게 이미 등을 맡긴 친구라면 신뢰할 수밖에 없겠지요.”
대꾸하면서도 머리가 멍했다. 그녀의 체온이 이렇게도 가까운 동안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어려웠다. 부상 이후 자신의 것 같지 않았던 몸이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정적이라 하더라도요.”
속삭이며 쟈네이딘은 입술로 그의 입을 덮쳐왔다. 더 이상 어떤 계산도, 주저도 없었다. (아래층에 부모님이 계신다는, 10대 소년 같은 걱정이 순간 스쳐가기는 했지만.) 몸과 영혼에 넘쳐흐르는 열기에 그는 기꺼이 항복했고, 시스 로드의 손에 죽었던 그는 그 기나긴 오후 동안 쟈네이딘의 품속에서 되살아났다.
IV.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저택 안쪽에서부터 울려나오자 다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 역시 다행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우렁찬 울음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만면에 웃음을 지은 나스 브레이텍에게 다룬은 정중히 마주 인사했다. 주변에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동안 누군가가 와인을 따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잔을 채웠지만, 아직 아무도 다룬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할 일이 있었으므로.
다룬이 문 맞은편에 서자 함께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친척들은 그와 문 사이에 공간을 비워주었다.간간히 나지막한 목소리만 들려오는 고요 속에 다룬은 복도에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후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가 가끔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왔고, 문이 칙- 열리면서 통통하고 쾌활한 여인이 강보를 안고 들어섰다.
“강축드립니다.”
산파는 방에 들어서기 전에 깊이 허리숙여 인사했다. 방안은 이제 조용했다. 고대와 같은 의미는 없었지만, 이것은 엄숙하고 역사가 오랜 의식이었다.
“부인께서는 순산 끝에 건강하시며, 순조롭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다룬은 안도감으로 순간 몸이 풀렸다. 산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소식이었고 뭔가 비상사태가 있었다면 연락이 왔겠지만, 그래도 말로 확인하자 새삼 안심이 되었다. 여기서 할 일만 끝나면 아내의 침대가로 달려가리라. 그리고 그녀가 잠든 동안 손을 붙들고 자신 곁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리라고 그는 다짐했다.
산파는 방을 가로질러 다룬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강보를 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이불을 풀어헤치자 아기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산파는 다시 일어나서 깊이 인사하더니 몇 발짝 물러났다.
이불 위에서 몸을 뒤틀며 우는 아기를 보고 방안은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건강하고 튼튼한 사내아이, 오르가나의 이름을 이을 후계자를 보며. 그러다가 곧 방안은 다시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쪼글쪼글한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룬은 잠시 역사의 연속성에 전율을 느꼈다. 그도, 그리고 알데란 귀족가의 모든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나자마자 이렇게 아버지의 발치에 내려놓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 이래, 하나하나 모두가 차례대로.
개인적으로 그는 바보같은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잘못 넘어져서 아이를 깔아뭉개기라도 하면 어쩌라는 말인가. 게다가 이제 이 의식에는 이전과 같은 의미는 없는데.
수천 년 전, 고대에는 이 의식에는 형식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발치의 갓난아이를 안아올리지 않으면 아이는 얼어죽거나 굶어죽도록 밖에 내쳐졌다. 혹은 죽여서 내버리기도 했다. 생사여탈권. 불구로 태어났거나, 약하거나, 여자로 태어난 수많은 아이가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거부당해서 죽어갔다.
그 중에는 어머니의 정절을 의심받은 아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다룬은 생각했다. 부성을 확신하지 못한 아비의 질투에, 혹은 아내를 벌하겠다는 복수심에 얼마나 많은 갓난아이가 죽어갔을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문명 시대인 지금은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를 아버지 발치에 내려놓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관습일 뿐이었고, 아이가 불구이거나 약하다면 아버지는 아이를 서둘러 안아올려서 이름을 지어준 후에 의료 전문가들과 함께 치료 방안을 의논할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아이를 거부한다고 아이가 죽어야 하는 그런 야만적인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룬은 문득, 자신이 아이를 안아들지 않고 나가버리면 저들의 표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파가 아이를 도로 안고 하얗게 질려서 쟈네이딘에게 돌아갈까? 이 자리에 모인 친지들이 수근거릴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자,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눈을 뜨고 있었다. 보랏빛 도는 푸른색이 아닌 검은 눈. 그와 쟈네이딘과 같은… 아직 눈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룬은 아이가 자신과 조용히 눈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잘 보려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서 흥분해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무시했다. (형식일 뿐인데 뭐 그렇게 좋아할까.) 갓 태어났는데도 아기의 머리칼은 숱이 많고 검었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만져보자 부드럽고 따뜻했다. 문득 아이가 춥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그는 서둘러 강보를 여며주었다.
강보에 싸인 채 꼬물꼬물 손발을 움직이는 이 조그만 생명은 아내가 준 선물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충돌하는 이해와 야심 속에서 그녀가 쥐어준 치명적인 약점, 그들이 서로 품을 수 있는 만큼의 신뢰.
그 신뢰의 제물이 된 아이에게는 자신을 스스로 희생 제물로 내어주고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이들의 이름이 어울리겠지. 미리 상의한 것과는 좀 달랐지만, 아내는 이해할 것이다.
강보에 감싼 아이를 안고 다룬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이불 틈새로 조막만한 손을 내밀고 휘두르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방 구석구석까지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바트 자락스 오르가나. 환영한다, 아들아.”
마지막 장면에 나온 풍습은 고대 로마에 실제 있었던 풍속입니다. 알데란 문화는 제게는 왠지 로마 내지는 그리스식 이미지로 떠오르기도 하고, 또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뭐 결론은 자락스 지못미 (?)

[공화국의 그림자] 끝과 시작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 종결 약 1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이걸 기반으로 캠페인 주인공들의 10년 후를 그리는 공화국의 그림자 에필로그 프로젝트 (1:1 단편 플레이)를 해볼 수도 있겠군요.


방안은 조용했다. 둥근 창밖으로는 멀리서 말소리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창밖에 드리운 나뭇가지를 통해 햇빛이 비쳐드는 명상실에는 깊은 고요가 감돌았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사내는 그 침묵에 조금도 동요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존재로 방은 더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쓴 로브 두건에서 발끝까지 드리운 로브자락까지 미동도 없이, 어쩌면 정신마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는 침묵 속에 그저 존재했다. 침묵의 일부가 되어.

밖의 복도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어깨와 손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조금 굽히며 문을 비스듬히 향했다. 짐짓 편안하면서도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준비자세를 숙련된 전투원이라면 알아보았으리라. 그에게 이것은 지금 필요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것도.

발소리가 문앞에서 멎더니 미닫이문이 거의 소리없이 열렸다. 이윽고 인사를 하며 들어선 열네댓쯤 되어보이는 소녀는 긴 금발머리를 파다완의 갈색 로브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면서 햇살이 순간적으로 눈에 비치자 소녀는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이다, 멜리나.”

창가에 선 제다이는 두건을 내리며 문을 똑바로 향했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에는 살짝씩 잿빛이 엿보였고, 갈색 얼굴에는 눈가와 입가에 미세한 주름이 지고 있었지만 눈빛과 목소리는 서글서글했다.

“당신이?”

멜리나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너로서는 ‘나이트 아를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구나.”

사내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담담했다.

“‘스승님’도 좋겠다. 공의회에서 명령받았으니.”

“난 스승을 정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여전히 문가에 선 채 멜리나는 팔짱을 꼈다.

“당연히 그렇겠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를 찔린 듯 멜리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들어오겠느냐?”

천천히 멜리나는 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서 섰다. 아를란이 바닥에 정좌하고 앉자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로는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쳤다.

침묵 속에서 나이트 아를란은 편안하게 멜리나를 마주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깨달음 깊은 제다이로 보고 지나갔지만,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공허할 정도로 평온한 시선과 기쁨 없이 잔잔한 미소에서 폐허의 평화를 알아보았다. 아직 서른 남짓이었지만 거의 열 살 연배의 스승과 동년배로 보이는 그에게는 부서진 돌틈에 자라는 풀포기, 무너진 지붕으로 비쳐드는 햇살의 고즈넉함이 있었다.

드로이드가 하나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차 한 잔씩을 놓고 나간 후에 아를란은 입을 열었다.

“잘 지냈느냐?”

멜리나는 뻣뻣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럭저럭요.”

“그래, 내가 스승이 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순간 멈칫했다가 멜리나는 그를 도전적으로 마주보았다.

“잘 아시네요. 솔직히…”

“솔직히?”

“도대체 내가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멜리나는 다짜고짜 따져물었다.

“포스력은 나보다도 약한 시스 출신 스승을 붙여준다는 걸 말이에요. 당신.. 나이트 아를란이 우리집 응접실에서 엄마 목을 조르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왜…”

소녀의 목소리는 고통스럽게 잦아들었다.

“왜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에 있던 당신이…”

“뭐 굳이 내 변명을 하자면, 현직 제다이 나이트 중 너보다 포스 재능이 강한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아를란은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은퇴하신 나이트 미셸이 비슷했을지 모르지. 감지력 면에서는 단투인의 나이트 드리엘이 훨씬 강하겠고, 오히예사 그 친구는 능력이 엉뚱해서 비교하기 어렵고… 내 포스 능력이 좀 떨어지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무례했다면 죄송했습니다.”

멜리나의 볼멘 사과에 아를란은 손을 저었다.

“죄송할 거라면 말하지도 않았겠지. 괜찮다.”

그 말에 멜리나가 헷갈린 표정이 되는 동안 아를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시스 출신인 것도 사실이고, 너희 어머니를 공격했던 것도 사실이지. 지금와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니로구나.”

“저기… 제가 한 말은 잊어주셔도-”

“내가 나이트 로어틸리아가 아니라는 점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그건 다른 어떤 스승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너무나 태연하게, 지나가는 소리처럼 한 말의 의미를 멜리나가 이해하는 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해한 순간 파란 눈이 커지면서 얼굴은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고…”

“네가 인정할 수 있는 스승은 하나밖에 없겠지만, 그건 동시에 네가 용서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지. 네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제다이로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 역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멜리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반쯤 일어나 앉았다.

“나이트… 전 나이트 로어틸리아는 제 친구들을 학살한 살인자에요. 그런 사람을 생각하다니 제가 왜…!”

“그리고 시스에게 납치당한 너를 구출한 분이기도 하지. 너희 어머니 부탁으로 로크린에서 코루선트까지 너를 보호한 후견인이며,(주:http://wiki.storygames.kr/jedi/pc/til/secret 참조) 차갑도록 이성적이고 적에게는 치명적이었던… 이상적인 나이트.”

“차갑지 않았어요.”

멜리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억지로 짜내는 듯 힘겨웠다.

“속내가 깊은 분이었고… 내게는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분이었어요.”

아를란이 무표정하게 찻잔을 내려다보는 동안 멜리나는 고통스럽게 물었다.

“그런 분이… 왜…”

그 의문이 방안에 무겁게 가라앉는 동안 아를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고통이라기보다는 오랜 고통의 메아리가 얼굴에 스쳐갔다.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제다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전 제다이가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아를란은 천천히 눈을 뜨고 멜리나를 마주보았다. 멜리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말을 해서 그런지 차라리 후련한 표정이었다.

“나는 네가 의문을 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멜리나는 눈을 동그렇게 떴다.

“나는 너와 자란 환경이 좀 달랐고… 그래서 내게 제다이가 되는 것은 선택이었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평생 처음으로 한 선택이기도 했지.”

햇빛이 흐려지면서 창밖의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를란이 찻잔을 집어들고 목을 축이는 동안 빗방울이 지붕과 밖의 나무를 톡, 톡, 톡 두드렸다. 역시 찻잔을 집어들고 홀짝거리면서도 멜리나는 시선을 아를란에게 고정했다.

“그래서 공의회에서 자라나는 너희들이 제다이가 되는 것이 정말로 너희의 선택인지 나는 의문이 있다. 물론 훈련이나 교육의 질은 월등하다만… 제다이의 길은 환경과 기대에 휩쓸려서 걷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멜리나는 찻잔을 두 손 사이에 돌리면서 출렁이는 찻물을 지켜보았다.

“저더러 제다이가 되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조금 더 세상을 보고 결심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아를란은 입을 열었다.

“로크린에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로크린…이요?”

멜리나의 표정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찼다.

“셀렌, 카론, 단투인… 그래, 넬반도. 그 모든 곳들을.”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투명한 눈빛으로 멜리나를 마주보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오래 전에 했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네 어머니, 내 스승이신 마스터 토레이, 나이트 네루나, 레이디 미셸, 오히예사… 네가 그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이트 틸리아…가 했던 여행인가요?”

멜리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왔다.

“그 여행이 재난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구나.”

아를란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모든 것이 변한 것은 확실하지. 공화국, 공의회, 우리들… 그래, 나이트 로어틸리아와 그녀의 언니도.”

그가 조용히 일어서자 멜리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그 둘의 이야기도 해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아를란은 멜리나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 너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포스 안에서 너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지… 그 속에서 네가 평온을 찾기를.”

충만한 침묵 속에 잠시 빗소리만이 울렸다.

“함께 가겠느냐?”

멜리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번 끄덕였다. 아를란은 미소지으며 손을 떨구었다.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 같구나. 잘 부탁한다, 파다완.”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각자의 숙소로 갈 채비를 했다.

“내일 또 이야기하자꾸나, 멜리나.”

빗물이 흘러내리는 출구 앞에서 아를란은 로브 두건을 덮어썼다.

“되도록 빨리 떠날 터이니 채비를 해두거라.”

그가 몸을 돌려서 가려는 순간 멜리나가 불렀다.

“아, 저… 스승님?”

“왜 그러느냐?”

아를란은 돌아보았다.

“스승…님은 평온을 찾으셨나요?”

비를 등진 채 잠시 멜리나를 마주보다가 아를란은 천천히 말했다.

“어려운 질문이구나. 어쩌면 평온을 찾는 것을 포기한 것이 나의 평온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대답할 말을 찾는 멜리나에게 아를란은 시리도록 공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일 보자, 파다완.”

비를 뚫고 달려가는 나이트의 등뒤로는 로브자락이 긴 그림자처럼 따랐다. 멜리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어둑한 복도를 따라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잿빛 고요 속에 빗소리만이 시간의 조그마한 발걸음처럼 끝없이 톡, 톡, 톡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