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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은 논쟁을 하는 세 가지 방법

어떤 게시판 글들을 좀 보다가 논쟁을 비생산적으로 이끄는 논지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웹상의 처절한 혈투를 꿈꾸는 당신이라면 함께 키보드 워리어의 길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키보드 워리어' 짤방1. 나의 방식은 너의 방식보다 우월하다
이건 취향을 객관화하는 오류이기도 한데, 자신이 느낀 주관적 장점을 일반화해서 타인의 방식을 무시하는 주장입니다. 결국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인지는 행위를 하는 목적, 즉 선호도 내지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 얘기는 쏙 뺀 채 모두 자신과 선호도 내지 취향이 같다고 단정하고 우열을 논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목적이라면 이러한 방식이 그 목적에 합치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지 ‘이러한 방식을 해봤더니 이러이러한 장점이 있었다’는 것이 의견 개진이라면, ‘나의 방식에는 객관적인 장점이 있다 = 우월하다’는 것은 더 이상 수평적인 토론이 아니라 우월한 입장에서 신탁 내지는 예언을 내리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네가 재밌어하는 건 객관적으로 잘못이고, 따라서 너는 뭘 잘 모르는 불쌍한 바보다! 하는 말로 들리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도 이전에 그런 언행을 해서 까인 적이 있었고, 그럴 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쓸데없는 우열을 매기는 것은 키보드 워리어의 필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죠.
2. 절대적 명제
~~는 필연적으로 ~~로 갈 수밖에 없다, ~~는 무조건 ~~하게 된다는 식의 절대적인 명제는 거의 필연적으로 반격을 불러옵니다. 그 명제가 참이 아닌 일이 많고, 현상의 일부를 전체로 확대해야 그런 절대적인 명제가 나오는 게 보통이니까요. 물론 정말로 반격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동 성폭행은 잘못이라거나, 나치는 나쁘다거나), 그런 일은 상대적으로 드문 데다가 그런 말에는 별로 논쟁의 여지도 없지요. 결국 막연하게 A는 무조건 B라거나 하는 식의 절대적인 명제는 보통 생각을 게을리했다는 증거이며,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키보드 워리어라면 근거가 있든 없든 자신의 주장을 예외 없는 절대적인 진리처럼 내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적과 위협 만들어내기
근본적으로 싸움이란 위협을 느끼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공격자라고 인정하는 일은 드물고, 보통은 상대의 어떤 위협에 방어하고 있었다고 생각 (내지는 정당화)하지요. 육탄전도 그렇지만 언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싸움을 지속적으로 이끌어주는 감정적 동기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훌륭한 키보드 워리어로 거듭나려면 모든 토론은 자신의 신념과 삶의 방식을 위협하며, 상대방은 자신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데서 쾌감을 얻는 사악한 적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무기보다 중요한 키보드 워리어의 정신무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외에도 기법은 많이 있겠지만 (개인적 모욕, 무례한 말투 등) 근본적으로는 위 세 가지만 갖추어도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의 기반은 충분하다고 보면 됩니다. 특히 적과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를 철저히 말살하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고 믿는 정신무장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키보드 워리어의 기본기를 갖추었다면 용감히 인터넷 세상으로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시간을 낭비하는 말다툼을 위하여!

RPG와 최적 경험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산다는 게 쉽지 않지요. 갑작스레 무거운 얘기일 지도 모르습니다만, 살아간다는 것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우연한 재해나 사고로 일시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해 인간관계는 갈등의 연속이며, 먹고사는 일은 언제나 전쟁이지요. 인간의 욕망이나 꿈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심한 우주에 살아간다는 것은 혼란과 고통에 쉴새없이 마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인간은 자기 나름의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비대한 뇌와 발달한 전두엽의 강점이지요. 똑같이 사고나 병으로 장애가 생긴 상황에서도 ‘난 틀렸어’ 하고 포기해버릴 수도 있고, ‘지금부터 시작이다!’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가 생긴 사실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에 부여하는 내적 질서와 의미가 다른 것이지요.

사람이 내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장치 중 하나가 최적 경험 (peak experience)입니다. 의식을 흐리게 하는 약물이나 단순한 유희와 같은 일회적인 쾌락을 통해 고통과 불안을 피하는 시도도 흔하지만, 이러한 것은 보통 심리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사람의 정신에 질서를 잡아주거나 의식을 확장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일체감과 조화감, 무아지경의 환희 등의 특징이 있는 최적 경험은 창의성과 공감, 자긍심, 의지력, 그리고 장기적 행복감을 증진하는 등 내적 질서를 정립하는 효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최적 경험 개념을 상당 부분 정립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 (Abraham Maslow, 1908-1970)는 지속적인 최적 경험은 자아실현의 척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마슬로우에게 최적 경험이 그야말로 최고봉 (peak)에서 겪는 것, 초월과 하나가 되는 대면상황이라면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교 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ly Csikszentmihalyi)는 최적 경험을 땅으로 끌어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적 경험의 중요한 특징인 일체감과 행복감, 그리고 그 결과인 성격과 능력의 긍정적 변화를 종교와 신비주의의 영역에 남겨두지 않고 일상생활로 끌어낸 것이지요. 생업과 놀이의 자연스러운 리듬 속에서 행복과 몰입을 느끼고 자아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주:제가 심리학도가 아니고 이 주제에 대해 철저한 문헌조사를 한 것이 아니므로 마슬로우와 칙센트미하이가 정립한 개념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적 주시거나 이후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일상 속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최적 경험을 플로우 (Flow)라고 부릅니다. 그는 동명의 책을 통해, 도전이 되는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서 자의식과 불안을 잊고 순수한 즐거움에 빠져드는 플로우는 심리적 에너지를 분산하지 않고
집중해 자아를 키우고 내적 질서를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은 예능, 학습, 노동, 감상,
가사, 놀이 등 어떤 활동에서든 느낄 수 있으며, 개인의 자긍심과 행복감을 크게 증진시켜 풍요로운 삶에 기여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책에서는 삶의 다양한 양상에서 플로우를 얻을 수 있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는 제목으로 한울림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활동이 플로우를 일으킬까요? 플로우에는 크게 네 가지의 공통 요소가 보입니다.(주:책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었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어 네 가지로 줄이고 약간 재배열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할 가능성이 있는 도전 활동일 때 플로우가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행위자의 능력을 너무 초과하는 도전에는 불안감을 느끼거나 포기하기 쉽고, 반면 너무 쉬워서 도전의식을 느낄 수 없으면 자극이 부족해서 완전히 집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플로우 경험에 중요한 성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활동을 발전적으로 지속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발전한 상태에서도 몰입을 지속하려면 도전의 수위를 높여가야 하지요. 그 결과 계속 발전해가고 새로운 도전에 마주하는 자신을 느끼게 되고, 자긍심과 자신감이 향상합니다.

둘째, 플로우를 일으키는 활동에는 보통 명확한 목표가 있습니다. 게임이나 스포츠에는 목표가 자명하지만 (공주를 구출해라, 상대의 골에 공을 넣어라), 예술이나 창작활동에는 그 목표의 범위가 일반적으로 개방적입니다. 후자와 같은 상황에는 목표가 무엇인지, 즉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가 어떤 모습인지 안목과 감을 기르는 것 자체가 플로우 달성에 중요합니다.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정답이 없는 이와 같을 활동은 더욱 복합적인 특징을 띱니다.

셋째, 그 목표의 달성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즉각적인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지 나쁜지 평가할 기준이 있다면 그만큼 몸짓, 붓질,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빠져들게 됩니다. 후회되는 과거와 불안한 미래, 일상의 자잘한 걱정에서 벗어나 현재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만큼 이 활동과 그 결과를 통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신감이 들고, 세계와 타인의 변덕에 흔들리는 불안한 객체가 아닌, 운명을 자기 손에 쥔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됩니다.

넷째, 그 활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을 의식하지 않고 몰입해 자의식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플로우의 중요한 특징인 일체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러한 집중은 다른 세 가지 요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활동 자체에 대한 호오(好惡)나 주변 환경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집중할 수 있고 그러고 싶은 활동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플로우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요.

이렇게 최적 경험, 혹은 플로우가 무엇인지 정립하고 나면 RPG에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RPG 자체가 워낙 복합적인 활동이라 RPG를 하는 능력이란 무엇인지, RPG를 할 때의 도전이란 어떤 성격인지, 또 어쩌면 가장 애매하게도 목표와 피드백이 어떤 것인지 모두 복잡한 문제입니다. 집중하는 것은 사안 자체는 간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행은 말처럼 쉽지 않고요.

앞으로 올리는 글에서는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RPG가 복합적인 활동인 만큼 RPG인의 능력도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RPG가 ‘규칙’을 매개로 ‘서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놀이라고 정의한다면, RPG라는 활동을 하는 능력은 크게 게임적, 창의적, 사회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능력과 향상 방법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RPG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실질적인 주체인 팀의 능력도 다루어 보겠습니다.

다음은 능력에 맞는 도전의 문제입니다. RPG인의 능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 도전 역시 그렇게 나누어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게임적이고 서사적인 측면에서 도전의 수위를 측정하고 높여가는 방법, 그리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가고 더욱 깊은 지적, 창의적,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표 설정은 RPG에는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팀 단위, 개인 단위, 그리고 등장인물의 목표가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게임적 목표, 서사적 목표, 그리고 개개인의 사회적 목표가 다르고 서로 긴장 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목표인지 일률적으로 말할 수도 없기에 더욱 복잡한 것이 RPG의 목표 설정이지요.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이렇듯 목표가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종종 긴장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RPG는 그만큼 복합적이고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합니다. 팀원간의 목표가 다르고, 또 등장인물 간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창의적인 긴장과 극중 재미의 원천인 갈등을 유발하니까요. 다만, 이 긴장이 지지부진한 분열이 되지 않으려면 팀 단위에서는 어느 정도 기본 목표에 대한 의사합치와 공통 가치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팀 단위에서의 목표 설정과 그 범위를 먼저 생각해보고 팀원과 등장인물의 목표, 그리고 그 목표에 부합하는지 여부로 개별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피드백을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중과 몰입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RPG를 하는 시간에 집중을 하는 조건과 마음가짐, 그리고 환경 등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즐겁게 RPG를 즐기면서 RPG인으로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며 글을 맺을 계획입니다.

이렇게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시작합니다. 제게는 RPG뿐 아니라 놀고 창의하고 어우러져 산다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보는 마음속 여행이 될 것 같군요. 이 여행에 많은 질책과 지적, 격려를 주시며 함께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래는 글에 대한 대략의 계획입니다. 광열군의 ‘RPG에 좋은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 시리즈를 보고 글에는 역시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는 걸 느껴서 말이죠. 물론 이미 이 첫 글을 쓰면서도 달라진 만큼, 쓰면서 목차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의기소침…

RPG와는 간접적인 관련밖에 없는 그냥 사적인 잡담이지만…

어디 가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성격 나쁘다는 소리를 들은 일은 없는 것 같은데, 특정 몇 분에 대해서는 뭔가 몹쓸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의기소침한 기분이군요.

뭐 사실 저도 좀 꼬인 성격이기도 하고, 말을 확대해석한다는 지적은 바로 얼마 전에도 들었으니 제 잘못이 크겠지요. 특히 한창 난리가 났었던 근 3년 전에는 지금보다도 못난 모난 성격이었던 것 같고요.

그렇다 해도 너하고는 (밑에서 두 번째 댓글) 얘기하기 싫어 (위에서 세 번째 댓글) 소리를 몇 번 듣고 나니 제 뇌구조가 뭔가 비정상이거나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인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이런 저와 별 문제 없이 지내주는 주변 사람들은 알고보면 성인군자일 수도 있겠어요. 아니면 저와 마찬가지로 비정상이거나! ㅎㅎ

결과적으로 이 피곤한 성격의 저를 누가 상대해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피하는 분들이 현명하신 것일 수도 있죠. 알게모르게 주변에도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앞으로는 인성과 의사소통 능력을 더욱 도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RPG가 사회적인 취미라는 것은 플레이뿐 아니라 커뮤니티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니까요.

로키, 메타블로그 조회수 1위 조작 (?) + 역대 조회수 10위

메타블로그 RPG 갈무리 시찰(..)을 돌다가 문득 오른편의 조회수 10위에 눈이 간 저는 ‘음?!’ 하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로 어제 업데이트한 IRC용 주사위 프로그램 글이 1위를, 그것도 2위와 20개 이상 차이나는 1위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글이 첫 페이지에 오래 있을 수록 조회수가 쌓이므로 조회수 10위 내에 들어가는 글은 대체로 올린지 1주일은 된 글들입니다. 오래 있으면 조회수가 느는 속성 때문에 옛날 글만 영구적으로 10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올린지 보름이 지난 글들은 자동으로 10위에서 탈락시키지요. (조회수 자체는 클릭할 때마다 계속 쌓이지만, 10위에 표시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잠시 생각하다가 저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아, 내가 조작했구나..ㅡㅡ;;;

IRC 주사위 프로그램 글은 새로 쓴 글이 아닌, 기존 글에다가 첨부파일을 최신 버전으로 대체한 후 올린 날짜를 갱신한 글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메타블로그에 올라왔을 때 쌓인 조회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날짜가 새로워졌으니 조회수 10위권에 진입한 자격이 생긴 것이지요. 즉, 오래 올라와 있었던 글의 조회수로 새 글의 탈을 쓴 본의아닌 조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RPG 갈무리의 최근글 조회수 10위가 아닌 역대 조회수 최고 10위는 어떤 글들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아마도 올린지 좀 오래된 글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메타블로그 방문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글들이기도 하겠지요. 데이터베이스를 조회수 순으로 정렬해보자 다음과 같은 글들이 역대 10위였습니다.

10위: 귀차니스트들을 위한 겁스 즉플 관련 기법 (조회수 116)

천승민님의 2007년 6월 6일 글입니다. 역시 귀차니스트를 위한 글은 수요가 많은 것일까요. 이건 사실 2008년 4월 25일에 개장한 RPG 갈무리보다 한참 오래된 글이기는 합니다만, 세션의 편집자 추천 게시판은 업데이트가 잦지 않기 때문에 꽤 오래된 글들까지 피드에 들어있었죠.

9위:
Transhuman Space 소개(96) – 밈 : 광복교(Kwangbok) (조회수 117)

Wishsong군의 2008년 10월 27일 글입니다. 당시에 꾸준히 올리던 THS 소개글 중에서도 특히 THS 세계에서 미래의 한국에 빠른 속도로 퍼지는 광복교 글이 관심을 끌었던 모양입니다. 얼씨구 신토불이~

8위: [DND4] 무기 (Excerpt: Weapon) (조회수: 119)

티립님의 2008년 5월 13일 D&D4 무기 소개글이었지요. 지금 봐도 굉장히 자세하고 도움이 되는 글이군요. D&D4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당시 관련글이 탄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7위: 스티브 잭슨 게임즈가 헤비 기어의 라이센스를 샀다네요. (조회수: 120)

…라고 하는군요. 위시송군의 2008년 8월 27일 글입니다. 헤비 기어가 뭔데! (…) 라이센스 관련, 그것도 SJ사 일이라 관심이 컸나봅니다.

6위: D&D 4th 에서 해보고 싶은 캐릭터. (조회수: 121)

2008년 9월 5일 글입니다. 위시송 이 사람은 누구길래 10위권 글을 도배하나효(..) 글도 보니까 달랑 두 줄이고, 막 10위에서 탈락시켜버리고 싶은 글이로군요. D&D4에 대한 관심이 크긴 컸나봅니다.

5위: <포도원의 개들> 감상. (조회수: 124)

본인 블로그는 아니고 세션 기사란에 2007년 1월 16일 올라온 위시송군의 글입니다. 메타블로그보다도 오래된 세션 기사글들은 개장 초창기부터 올라와 있었던지라 초기에 몰린 조회수의 덕을 본 것 같군요. 이후에 포도원의 개들은 위시송군의 간판 마스터링 메뉴가 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본문에서 링크한 더 멋진 소개글이 더 멋져요! (흑)

4위: 겁스 장/단점으로 만들어보는 주문&능력 : (4) “하렘 페로몬” (조회수: 125)

또(..) 위시송군의 2007년 6월 10일 글입니다. 이런 글이나 올리는 블로거는 뭔가 매우 맞아야 할 것 같군요.

3위: RPG 감상 – Toxic Memes (조회수: 133)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서플먼트를 다룬 위시송군 (또!)의 2007년 5월 12일 감상문입니다. THS에 대한 관심도 꽤 컸던 것 같군요.

그리고 대망의 (과연?) 공동 1위는…(둥둥둥둥)


1위:
시나리오 없이 플레이 진행 (조회수: 137)

예, 귀차니스트를 위한 마스터링 2탄, 시나리오 없는 진행입니다! 천승민님께서 2007년 스승의 날에 몸소 설파하신 (..라기보다는 성일님이 기사게시판으로 옮기신 날짜겠지만) 시나리오 없는 진행이지요. 지금 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정말 실용적인 글이군요.

1위: 우리나라의 플레이어 양상과 GSD 모델. (조회수: 137)

백광열군의 2006년 11월 25일 글, GSD 모델을 한국 RPG계에 적용한 분석이었습니다. 광열군은 요즘도 세션 게시판에 플레이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기반으로 조언하는 좋은 글을 많이 내고 있지요. 플레이 중 서로 욕구와 로망을 파악하고 충족해가는 데에 제게는 GSD는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그걸 우리나라에 적용하니 더욱 흥미롭군요.

이상과 같이 조회수 순위조작 의혹에서 시작하여(..) 메타블로그 사상 조회수 1위부터 10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어차피 여러모로 한정적인 통계이기는 하지만 (메타블로그에서 클릭한 것만 포함 등) 당시 방문객의 관심사항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몇 년 전의 좋은 글을 들쳐볼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조회수는 결국 숫자일 뿐, 이 취미를 즐기는 데 필요한 건 이들 글에서 드러나는 꾸준한 관심과 발전의 의지겠지요. (두 줄짜리 글 하렘 페로몬 이런 거 말고…)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RPG 글이 나와 더욱 생각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국 RPG계가 발전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 발장과 쟈베르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며칠 푹 빠져서 지냈습니다. 고등학교 때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던 소설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최근 수전 보일 비디오 때문에 뮤지컬에 대한 관심도 불붙었죠.

[#M_스포일러 주의!|스포일러 닫기|서사적인 작품답게 레 미제라블은 연애에서 혁명까지 인간사의 온갖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심축을 이루는 갈등이라면 주인공 장 발장과 그의 숙적 쟈베르 형사의 자갸 나 잡아봐라 끈질긴 추격전과 근본적인 가치관 대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RPG인 입장에서 흥미가 간 점이라면 역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사상 대립은 AD&D식 성향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을까요. 법의 손을 피해 도망치는 범죄자이면서도 늘 자비를 베풀고 올곧게 행동하는 장 발장은 CG (혼돈 선) 내지는 NG (중립 선)이겠고, 법과 질서에 절대적으로 집착하고 어떤 자비나 인간적 고려도 거부하는 쟈베르는 LN (질서 중립) 성향이겠죠.

쟈베르가 워낙에 무자비하게 나오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LE (질서 악)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는 건 또 아니니까 역시 LN 분류가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저 법 앞에서는 다른 어떤 고려사항도 그에게 무의미할 뿐이죠. 쟈베르에게 법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음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비디오는 레미제라블 10주년 콘서트 영상)

Stars

별들이여

There, out in the darkness
A fugitive running
Fallen from God
Fallen from grace
God be my witness
I never shall yield
Till we come face to face
Till we come face to face

저 밖에, 어둠 속에
도망치는 불쌍한 자
추락해서 신에게서
그 은혜에서 멀어진…
신께 맹세하리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와 대면하는 순간까지
그와 대면하는 순간까지

He knows his way in the dark
Mine is the way of the Lord
And those who follow the path of the righteous
Shall have their reward
And if they fall
As Lucifer fell
The flame
The sword!

그는 어둠의 길을 알지만
내 길은 주님의 길이니
옳은 길을 따르는 이들은
상 받을지라
그리고 루시퍼가 추락했듯
추락하는 자에게는
화염이 있을 뿐
검이 있을 뿐!

Stars
In your multitudes
Scarce to be counted
Filling the darkness
With order and light
You are the sentinels
Silent and sure
Keeping watch in the night
Keeping watch in the night

별들이여
헤아릴 수도 없이
무수히 그대들은
어둠 속에 가득
질서와 빛을 채우네
침묵하는 확고한
그대 파수병이여
어둔 밤을 지키는
어둔 밤을 지키는

You know your place in the sky
You hold your course and your aim
And each in your season
Returns and returns
And is always the same
And if you fall as Lucifer fell
You fall in flame!

천공 중에 제자리를 지키고
방향과 길에서 어긋나지 않네
그리고 각자의 철에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변함없는 항상성이여
루시퍼가 추락했듯 추락할 때면
화염에 휩싸이나니!

And so it must be and so it is written
On the doorway to paradise
That those who falter and those who fall
Must pay the price!

그래야만 하고 그렇게 기록되었으니
천국의 문에 새기었듯
흔들리는 자, 추락하는 자는
대가를 받으리라!

Lord let me find him
That I may see him
Safe behind bars
I will never rest
Till then
This I swear
This I swear by the stars!

주여 그를 찾게 하소서
안전히 그를
제자리에 되돌리도록
그날까지 나는
쉬지 않으리다
나 그렇게 맹세하니
별들에 걸고 맹세하노니!

자칫 밋밋한 악역이 되기 쉬운 인물에 이 정도 깊이를 부여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감탄한 대목이었습니다. 어둡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질서, 별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죄수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쟈베르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절절하게 와닿았죠. 그것은 밑에도 나오는, 그가 감옥에서 태어나 비참하게 자라난 어린 시절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그 혼돈과 어둠에 빠질 수 있다는 불안이 그의 삶을 얼마나 크게 지배했을까요.

그래서 쟈베르는 법을 권력으로 삼아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는 위선자라기보다는 법과 질서라는 이상 앞에서는 자비고 사정이고 뭐고 상관도 안하는 이상주의자라는 것이 적합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 이상은 법과 무관한 선을 실천하는 장 발장이라는 인물에게 도전받고, 그 대립은 다음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죄수를 체포하러 온 형사, 불쌍한 여인이 남기고 죽은 어린 딸을 보호하기로 맹세한 죄수. 한쪽은 법과 질서, 다른 쪽은 자비와 인정의 언어를 말하는 상태에서 이들의 대립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죠.

Confrontation

대면

[JAVERT]
Valjean, at last,
We see each other plain
`M’sieur le Mayor,’
You’ll wear a different chain!

[쟈베르]
발장, 마침내
똑바로 보게 되었군
시장 나으리
전과는 다른 사슬을 둘렀어(주:죄수를 묶은 사슬과 시장이 목에 거는 관직의 증표를 빗댄 것)

[VALJEAN]
Before you say another word, Javert
Before you chain me up like a slave again
Listen to me! There is something I must do.
This woman leaves behind a suffering child.
There is none but me who can intercede,
In Mercy’s name, three days are all I need.
Then I’ll return, I pledge my word.
Then I’ll return…

[발장]
기다려 주게, 쟈베르
다시 날 노예처럼 사슬로 묶기 전에
내 말을 들어! 난 해야 할 일이 있네
이 여인은 고통받는 아이를 남겨두고 갔네
나밖에는 개입할 사람이 없어
자비의 이름으로, 사흘이면 되네
그러고 나면 돌아오겠네, 맹세코
그러고 나면 돌아오겠어

[JAVERT]
You must think me mad!
I’ve hunted you across the years
A man like you can never change
A man such as you.

[쟈베르]
누굴 바보로 아는가!
몇 년이나 너를 추적했다
너 같은 자는 변하지 않아
너 같은 자는…

[VALJEAN/JAVERT]
Believe of me what you will/Men like me can never change
There is a duty that I’m sworn to do/Men like you can never change
You know nothing of my life/No, 24601
All I did was steal some bread/My duty’s to the law
You know nothing of the world/You have no rights
You would sooner see me dead/Come with me, 24601
But not before I see this justice done/Now the wheel has turned around

[발장/쟈베르]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나 같은 이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맹세한 의무가 있다/너 같은 자도 변하지 않아
나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아니지, 죄수 24601
나는 빵을 훔쳤을 뿐이다/나는 법에 대해 의무가 있다
세상에 대해 무얼 안다고/네게 권리 따위는 없다
내가 죽은 꼴을 보고 싶겠지만/따라와라, 24601
정의를 행하기 전에는 안 된다/이제 수레바퀴는 돌아왔고

[JAVERT]
Jean Valjean is nothing now!

[쟈베르]
장 발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VALJEAN/JAVERT]
I am warning you Javert/Dare you talk to me of crime
I’m a stronger man by far/And the price you had to pay
There is power in me yet/Every man is born in sin
My race is not yet run/Every man must choose his way
I am warning you Javert/You know nothing of Javert
There is nothing I won’t dare/I was born inside a jail
If I have to kill you here/I was born with scum like you
I’ll do what must be done!/I am from the gutter too!

[발장/쟈베르]
경고한다 쟈베르/감히 나에게 말하느냐
훨씬 강한 쪽은 나야/죄와 네가 치른 대가를?
나는 아직 힘이 있고/누구든 죄 중에 태어나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누구든 스스로 선택한다
경고한다 쟈베르/네놈은 쟈베르를 몰라!
난 못할 짓이 없다/감옥에서 태어난 나다
여기서 널 죽이는 한이 있어도/너 같은 쓰레기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을 하겠어!/나도 시궁창에서 나왔다!

[Valjean breaks a chair and threatens Javert with the broken piece. Turns to Fantine]

(발장은 의자를 부수고 부서진 조각으로 쟈베르를 위협한다.)

[VALJEAN]
[to Fantine] And this I swear to you tonight

[발장]
(팡틴에게) 이것을 맹세하리다

[JAVERT]
[to Valjean] There is no place for you to hide

[쟈베르]
(발장에게) 숨을 수 있을 줄 아느냐

[VALJEAN]
Your child will live within my care

[발장]
당신 아이는 내가 돌보겠소

[JAVERT]
Wherever you may hide away

[쟈베르]
네가 어디에 숨는다 해도

[VALJEAN]
And I will raise her to the light.

[발장]
그 아이를 빛 속에서 키우겠소

[VALJEAN AND JAVERT]
I swear to you, I will be there!

[발장/쟈베르]
그곳에 내가 있으리!

[They fight, Javert is knocked out. Valjean escapes]

(격투 후 발장은 쟈베르를 제압하고 탈출한다)

이전의 폭력성과 세상에 대한 원한을 극복한 장 발장도 (주교 덕분에 CE -> CG로 개과천선!) 쟈베르 앞에서는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쟈베르가 발장의 존재에 위협받는 것 못지않게 발장 역시 쟈베르에게 위협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는 물론이지만 세계관 자체를 말이지요.

그리고 발장이 팡틴의 딸 코제트를 양녀로 키우면서 세월이 흐릅니다. 코제트는 젊은 학생 마리우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마리우스는 반왕정 폭동 중 부상을 입고, 발장은 그런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구로 탈출합니다. 그 과정에서 발장은 쟈베르의 목숨을 손에 쥐고도 그를 살려주지요. 그리고 그 모순을 견딜 수 없는 쟈베르가 센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면서 둘의 오랜 대립은 결말을 맺습니다.



Javert’s Suicide

쟈베르의 자살

[VALJEAN]
It’s you, Javert
I knew you wouldn’t wait too long
The faithful servant at his post once more
This man’s done no wrong
And he needs a doctor’s care

[발장]
자네로군, 쟈베르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줄 알았지
자리를 지키는 충직한 하인처럼
이 사람은 잘못한 게 없네
치료를 받아야 해

[JAVERT]
I warned you I would not give in
I won’t be swayed

[쟈베르]
경고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나는 흔들리지 않아

[VALJEAN]
Another hour yet
And then I’m yours
And all our debts are paid

[발장]
한 시간이면 되네
그러면 끝이야
그 후에는 모든 빚을 갚는다

[JAVERT]
The man of mercy comes again
And talks of justice!

[쟈베르]
자비의 화신이 또 나타나
정의를 외치는군!

[VALJEAN]
Come, time is running short
Look down, Javert
He’s standing in his grave

[발장]
부디, 시간이 없네
발밑을 보게, 쟈베르
젊은 목숨이 죽어가네!

[VALJEAN/JAVERT]
Give way, Javert/Take him, Valjean
There is a life to save/Before I change my mind

[발장/쟈베르]
비켜라, 쟈베르/데려가라, 발장
구할 목숨이 있어/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JAVERT]
I will be waiting, 24601

[쟈베르]
기다리겠다, 24601

Who is this man?
What sort of devil is he?
To have me caught in a trap
And choose to let me go free?
It was his hour at last
To put a seal on my fate
Wipe out the past
And wash me clean off the slate!
All it would take
Was a flick of his knife
Vengence was his
And he gave me back my life!

이 자는 누구인가?
무슨 악마인가?
나를 함정에 잡고도
스스로 놓아주다니?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 운명을 결정할
과거를 지우고
나를 지울 수 있었는데!
칼 한 번 휘두르면
되는 일이었건만
복수의 기회를 쥐고도
내 생명을 돌려주다니!

Damned if I’ll live in the debt of a theif!
Damned if I’ll yield at the end of the chase.
I am the Law and the Law is not mocked
I’ll spit his pity right back in his face
There is nothing on earth that we share
It is either Valjean or Javert!

도둑에게 빚지고 살 줄 아느냐!
추적의 마지막에 포기할 것 같은가!
나는 법이며, 법은 절대적이다!
그 알량한 동정심은 면상에 되뱉어주지
우리에게 공통점이란 없다
발장 아니면 쟈베르인 거야!

How can I now allow this man
To hold dominion over me?
This desperate man whom I have hunted
He gave me my life, he gave me freedom.
I should have perished by his hand!
It was his right.
It was my right to die as well
Instead I live, but live in hell!

이제 어떻게 저 자에게
마음으로 빚을 지고 살아갈까
내가 사냥한 저 흉악범이
내게 삶과 자유를 주다니
그의 손에 죽었어야 했다
그것이 그의 권리
죽는 것은 나의 권리기도 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삶이 곧 지옥이구나

And my thoughts fly apart
Can this man be believed?
Shall his sins be forgiven?
Shall his crimes be reprieved?

생각을 걷잡을 수 없네
이자를 믿을 수 있는가
그의 죄가 용서받을까
그의 범죄에 참회가 있는가?

And must I now begin to doubt
Who never doubted all these years?
My heart is stone and still it trembles
The world I have known is lost in shadow.

이 오랜 세월 의심 없던 내가
이제 의심을 품어야 하는가?
돌과 같은 내 심장이 떠는구나
내 알았던 세상은 그림자에 묻혔네

Is he from heaven or from hell?
And does he know
That granting me my life today
This man has killed me even so?

이는 천국에서, 혹은 지옥에서 온 자인가?
그는 알고 있을까
오늘 내게 생명을 줌으로써
똑같이 죽였다는 사실을?

I am reaching, but I fall
And the stars are black and cold.
As I stare into the void
Of a world that cannot hold

손을 뻗으나 닿지 않아
별빛은 검고 어둡네
산산히 분열하는 세계의
거대한 공허를 들여다보며

I’ll escape now from the world
From the world of Jean Valjean
There is nowhere I can turn
There is no way to go on…..

그 세계에서 탈출하리라
장 발장의 세계에서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아
더는 갈 길이 없다…..!

결국 법이 절대적이었던 쟈베르의 세계관 속에서 법과 도덕의 모순은 설 자리가 없었죠. 그의 경직된 세계관에 균열이 드러난 순간 쟈베르는 삶 자체를 버립니다. 장 발장의 세계에서 벗어난다고 표현했듯, 쟈베르를 살려줌으로써 발장은 쟈베르의 세계관을 깨고 발장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지만, 쟈베르는 평생 절대적이었던 신념을 버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쉬웠겠지요. 부러지되 휘지 않는 철처럼. 세상은 발장 아니면 쟈베르여야 했고, 그 답이 발장이 된 이상 쟈베르는 부정당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발장을 끈질기게 쫓으면서 쟈베르가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혼자 쫓는다는 것은 고집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 결과는 예정되어 있기도 했죠. 그렇게 해서 발장이 더 참지 못하고, 혹은 탈출하려고 쟈베르를 죽이면 올바른 질서는 흐트러지지 않으니까요. 범죄자를 쫓다 순직하는 형사, 형사를 살해하는 흉악범. 마치 별들의 운행처럼 자연스러운 질서는 변함이 없겠죠. 죽이는 것이 발장의 권리였듯이, 죽는 것은 쟈베르의 권리였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렇게 있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 시나리오가 어긋난 순간 질서는 어그러졌고, 지극히 조화로웠던 별들은 어둠을 지켜주던 그 변함없는 빛을 잃었습니다. 그 세계 속에 더는 쟈베르가 설 자리가 없었죠. 아니, 그런 세계를 쟈베르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져버린 세상 속에서 유일한 확실성을 찾아 떠납니다. 죽음이라는 확실성, 인간사의 유일한 절대적인 질서를 찾아._M#]
장 발장과 쟈베르의 경우와 같은 세계관 대립은 굉장히 흥미진진한 소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RPG에서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표현할 규칙이라는 추가적인 도구도 있죠. 성향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고, 면모로 표현할 수도 있고, 장단점일 수도 있고…

갈등은 극을 끌어가는 주요 요소이며, 특히 그것이 근원적인 세계관 충돌의 표현일 때 더욱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허구에서 그렇듯 RPG에서도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모든 재미있는 허구의 끝에는 진실의 일면이 있기에.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지난번 글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 수집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이 다음과 같이 많이 때문이지요.
1. 타인의 관점과 정보를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현실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지요. 누구든지 감각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걸러내고 해석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얘기입니다. 그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실을, 즉 감각정보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감각정보의 홍수에 묻혀서 살 뿐 사람으로서, 아니 동물로서도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 때문에 입장에 따라 같은 현실에 대한 결론도 크게 다르다는 것도 역시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같은 경기를 보면서 A팀 팬에게는 심판 오심인 것이 B팀 팬이 보기에는 심판의 명판정이고 B팀의 나이스 플레이입니다. A팀 팬도, B팀 팬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둘다 옳을 수 있습니다. A팀 팬과 B팀 팬은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관점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확대하고,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지극히 당연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쳤을 테니까요. 그들이 각각 선택한 정보 내에서는 아마 그들의 해석은 각자 옳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A팀과 B팀 팬이 서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면 당연히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A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선을 넘지도 않았었는데! 그 심판은 경기 내내 A팀에 불리하게 판정했어!) 내에서 B팀 팬의 결론을 도출한다면 어불성설일 테고, 마찬가지로 B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휘두른 순간 공이 확 휘어져서 헛스윙했지! 그날 내내 A팀 경기는 엉망이었어!) 내에서 A팀 팬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요.
스포츠 팬끼리 적당히 싸우는 건 스포츠의 재미 중 하나기도 합니다만, 인간관계를 해칠 수도 있는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럴 때에는 상대가 왜 나하고는 의견이 다른지, 즉 같은 상황에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했기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들어보기 전에는 의견 차이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상대는 다른 정보를 가지고 다른 해석을 해서 당연히 결론이 다른 것인데, 그 생각을 (원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뿐만 아니라 입장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자체도 다릅니다. 플레이에 매번 늦는 참가자는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갔다가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동생과 싸워서 컴퓨터를 쟁취해낸 후에야 플레이를 위해 접속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정보는 공유하기 전에는 그 참가자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같은 현실을 어떻게 걸러내고 해석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아는지는 제대로 대화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필요한 정보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자신이 취사선택한 정보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만 고려하는 반쪽 대화가 될 테니까요. 결국 공감대 없이 서로 목소리만 높일 뿐, 진정 주고받는 소통은 없기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관점과 정보를 알아내고 자신의 관점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2. 타인의 의도를 모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의도를 타인이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합니다. 예를 들어 참가자가 플레이에 늦어서 플레이에 곤란이 생겼다면 참가자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고 했다, 혹은 곤란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진행자가 일방통행식 진행을 해서 재미없어졌다면 진행자는 내 재미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도가 나쁜 사람은 곧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런 상종 못할 게으르고 무배려한 인간, 저런 천하의 독재자 하는 식으로 우리의 삶에는 악역이 꽤 많지요. 타인을 나쁜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내기는 어려워지고, 감정이 쌓이거나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타인의 의도를 모릅니다.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할 뿐이지요. 자꾸 늦는 참가자는 자기 때문에 시간을 바꾸자고 하기가 미안해서 시간을 맞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일방통행식 진행자는 참가자의 적극성이 부족해서 자꾸 진행이 표류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이끄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행동의 의도와 결과는 서로 별개의 개념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행동의 결과가 의도와 어긋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로부터 추정한 의도는 그저 추정일 뿐,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추정한 의도로 타인을 마음 속에서 악역으로 만들고 왜 당신은 무배려하고 무책임하느냐, 왜 마음대로 하려고만 하느냐 하고 윽박지르는 것도 비생산적이지요.
따라서 타인의 의도를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추정은 그저 추리, 혹은 가설로 남겨놓고 타인의 진짜 의도를 알아내는 편이 더 정확하고, 감정적 소모가 적습니다. A님이 의도적으로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러이러한 점이 힘든데, 이유를 알 수 있겠는지, 혹은 B님의 진행 속에서 참가자는 할일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계신지 하는 식의 대화는 한결 얘기할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3. 타인에 대한 내 행동의 결과를 모른다
타인의 행동의 결과에서 타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의도에 맞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곤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독재자가 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참가자들은 내 진행을 독재로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면 그것은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지, 내가 독재적 진행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참가자가 할일이 없다고 그러는지 말이죠. 결국 자신의 좋은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며 역시 머릿속의 악역을 늘리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의도와 행동은 별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행동의 결과가 반드시 좋지는 않으며,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의도란 복잡해서 자신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좋은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비생산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다툼에 빠지기 쉽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의도보다는 행동의 결과이며, 대화의 목적은 의도가 좋았네 나빴네 다투는 것보다는 행동의 실제적 결과에서 생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참가자가 남을 배려하려고 시간을 바꾸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고 시간을 맞추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자꾸 늦는다면 플레이가 곤란해지며, 진행자가 진행이 표류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참가자가 낄 데가 없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타인의 의도를 혼자 억측하지 않고, 또 자신의 의도에서 결과를 유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도는 논의할 만하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보다는 결과입니다. 감정이 쌓이지 않게 생산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의도에 대한 토론은 분명 가치가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결국 의도와 결과는 별개이니까요.
4. 자신이 한 원인 제공을 모른다
위 1번에서 다루었듯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관점과 결론이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타인의 원인 제공을 크게 보고 자신의 원인 제공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 하는 시비가 흔히 붙는데, 이것이 무익하다는 것은 이미 이전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문제를 정말 해결하려고 한다면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논의는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입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과는 다른 개념으로, 상황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정죄 없이 따져보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번 늦는 참가자가 현실적인 시간으로 플레이 약속을 잡지 않은 점, 진행자가 참가자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진행하는 점은 그들이 상황에 한 기여이지만, 다른 참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상황에 기여했을 수 있습니다. 플레이 시간을 다시 잡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거나, 진행자에게 충분히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이 그 예이지요.
원인 제공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둘다 잘못했다는 식의 얘기와는 다릅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의 얘기이니까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제에 기여는 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또한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 잘못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대화의 중점을 잘잘못에 둘 것인가, 문제 해결에 둘 것인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다면 정죄보다는 원인 제공 논의가 낫다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목표라면 잘잘못과 별개로 기여도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거의 어떤 상황에서든 양측 모두, 비록 한쪽이 99%이고 다른쪽이 1%라도 기여도가 있게 마련이기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잘못이라는 결론이 나면 다른 쪽의 원인 제공은 묻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자신의 일방통행식 진행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고 행동을 고친다 하더라도, 참여를 잘 하지 않는 참가자의 원인 제공에 대응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를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를 파악해야 하는데, 타인의 원인 제공은 비교적 알기 쉽지만 자신의 원인 제공은 상대적으로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모두 알아야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논한 바와 같죠. 그래서 자신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아내고 타인이 어떻게 기여했는지 (정죄 없이) 알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석입니다.
5.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라
오랜 옛날에 어느 위대한 성현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탐구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크고작은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대화를 통해서 알아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추정과 억측을 기반으로 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 1~4번에서 다루었듯 타인의 개입이 있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정보의 반쪽밖에 모릅니다. 그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한 혼자 추정할 뿐이지요. 모르는 상태에서 내리는 진단과 해결은 불완전하고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쉽습니다. 결국 혼자 납득할 뿐 상대의 협력을 끌어내기는 어렵지요. 그리고 그 추정이 실제와 맞아떨어졌다 하더라도 먼저 대화로 풀어내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없이는 옳은 말도 상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확실성의 관점으로 대화에 접근하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우며,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모르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대화를 하면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의 공감과 협력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 수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첩보전을 벌이거나 독심술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상대의 관점과 의도, 자기 행동의 결과와 자신의 기여도를 알아내는 방법은 대화이며, 그 중에서도 발언보다는 경청이겠지요.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경청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2: 옳고 그름은 무의미하다

대화를 할 때면 대화의 목적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평소에 편하게 하는 대화야 그냥 재미로 하지만,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지는 곤란한 상황이거나 대화를 통해 뭔가를 결정하는 뚜렷한 기능이 있을 때에는 그 대화에 임하는 자신의 목표의식에 따라 대화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때 대화의 목적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면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즉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납득시키는 것이 대화의 진짜 목적이라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거나 매우 비효율적인 목표이므로 침묵만 못합니다. 기껏 대화를 시작했다가 대판 싸움이 나고 후회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상대적입니다. 이것은 언쟁을 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지요. 보통 어느쪽도 자신이 옳았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대개의 사람에게 그것은  ‘내가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는 옳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이기에 상대의 마음 속에서는 그가 옳고 내가 틀렸지요.
그래서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대화는 스스로 옳다는 자신의 확신을 강화할 뿐, 상대를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설사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상하기 쉬우며, 관계를 손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 토론에 결론이 안 나는 이유이며, 우리말에서 ‘시비’라는 말의 어감이 부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옳고 그른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시비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자아 정체감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더더욱 지기 어려운 문제이고, 결론을 내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르면 나는 바보이거나 나쁜 사람이 된다면, 누구든지 절대로 그르다는 인정을 하지 않겠지요. 혹은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균형을 잃고 감정이 상할 것입니다. 내가 똑똑하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증명을 하려고 타인에게 그런 굴욕을 안겨주는 것도 다르게 보면 참 못할 짓입니다. (정체감에 대해서는 나중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대화는 결론을 내기도 어렵고, 낸다 하더라도 대가가 큰 비효율적인 활동입니다.
이렇듯 효용이 적은 시시비비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라면 한결 현실성이 있습니다만, 이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상대를 설복시키는 것’이나 ‘내 해결책대로 상대가 따라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라면 역시 위의 결론이 안 나고 소모적인 시시비비로 돌아갑니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정보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특히 감정이 얽힌 문제일 수록 사람은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플레이에 매번 늦는다면 그 참가자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일찍 와야 하며, 진행자가 일방통행식으로 진행한다면 그 진행자는 독재자이고 참가자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는 이미 문제와 해결책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대화에 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진단과 해결의 옳고 그름을 두고 역시 소모적인 대화를 하기 쉽지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요? 실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모르는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자신의 관점은 알지만 타인의 관점은 모르고, 자신의 의도는 알지만 타인의 의도는 모르고, 타인이 한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한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모르며,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한 기여는 잘 모릅니다.
이렇듯 모르는 것이 많다면, 먼저 모르는 정보를 알아야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알아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대화이지요. 따라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처음에는 그 목적은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글에는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을 다루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의 획득과 공유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1: 문제의 제기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다 그렇듯 RPG도 하다 보면 크고작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참가자가 원하는 인물 설정이 마음에 안 드는데 차마 뭐라고 하기는 그래서 그대로 진행하는 일도 있고, 반대로 뭐라고 했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지요. 진행자의 일방통행식 진행이 불만일 수도 있고, 진행자가 참가자의 설정을 왜곡하거나 참가자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옆에서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족쇄를 끊는다고요? 난이도는 초특급. 저런,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앞에서 여동생이 칼에 찔립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흔히 제시되는 해결책은 배려와 의사소통입니다만, 배려와 의사소통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배려와 의사소통이 각각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첫째, 배려가 침묵이 될 때. 기분이 나쁜데도 분위기를 깨지 말자고 생각하고 혼자 참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냥 넘기면 대수롭지 않은 일도 많지만, 실제로 감정이 상하고 플레이에 문제가 있는데도 그냥 참고 있다 보면 감정은 점점 쌓이고 플레이는 그만큼 망가집니다.
게다가 무조건 침묵하는 배려는 타인에 대한 배려일 지는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재한 반쪽 배려입니다. 분명히 자기 자신도 플레이에 참여하는 사람인데, 참여자 어느 한 사람이 무시당하는 것은 전원이 배려받는 건강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 무시가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도요.
두 번째 문제는 의사소통이 말다툼이 될 때입니다. 용기를 내서, 혹은 도저히 못 참고 말을 꺼냈는데, 그 결과 감정싸움과 언쟁이 일어나고 플레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까지 손상이 오는 것 역시 건전한 의사소통은 아니겠지요. 왜 이런 인물을 만들었느냐, 왜 그런 진행을 하느냐, 참을 만큼 참았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맨날 그러느냐.
역으로는 다들 역시 너무 조심하고 ‘배려’하느라 정작 중요한 얘기는 피하고, 아무 실질적인 해결도 변화도 없는 대화를 하는 것도 의사소통이 왜곡된 형태입니다. 아 예,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예 그건 몰랐네요. 앞으로 고치도록 하죠. 오늘 얘기해서 참 다행입니다. 등등 얘기하고 나서 다음번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벌어진다면 그것도 아주 김빠지는 일이지요.
언쟁이든 예의바르고 공허한 대화이든 가장 큰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소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할 얘기를 하고, 상대의 얘기에는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기 쉽지요. 그나마 예의바르고 알맹이 없는 대화는 예의 면에서는 진일보한 것입니다만, 역시 쌍방향 소통과 이해가 없이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쓰려는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시리즈에서는 RPG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플레이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물론이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대해 토의할 때에, 앞으로 플레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때에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도 그렇고요.
글에 나오는 내용은 여러분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이라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생각해보면 더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효과가 없는지 생각할 수 있겠지요. 또한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기에도 글이 있는 편이 좋을 테고요. 그래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시간나는 대로 써내려가보려고 합니다.
(이번 글 시리즈는 이전에 쓰려고 했던 놀이와 대화 시리즈를 대체하며, 역시 내용은 Difficult Conversations에서 따온 것에 제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책의 구성을 따라가기는 영 안 맞아서 그냥 제가 원하는 구성으로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자니까 마스터다?

이전 캠페인의 플레이어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나름 재미있어서 적어봅니다.

이방인님과 저는 둘다 생명력을 띈 인물의 내면과 의지에 따라 흘러가는 인물 중심적 플레이를 즐기는 편입니다. 이방인님은 인물에 많이 몰입하시고, 심지어 나중에 끝나면 자신이 그런 RP를 했다는 기억도 나지 않으신다고 하더군요.
저도 인물 중심 마스터링에 정리했듯 조연 (NPC) 초기 설정에서 시작해 인물 간의 상호작용에 진행의 상당 부분을 맡깁니다. 조연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는 일은 물론 많고, 그냥 ‘얘는 이렇게 할 것 같아서’ RP를 했다가 나중에서야 그 이유가 떠오르는 일도 있습니다.
이방인님과 저의 차이라면 이방인님은 하나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참가 (플레이)를 선호하시고, 저는 여러 인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진행 (마스터링)을 선호합니다. 그 차이가 성별 차이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일반화이지만, 도식화하자면 남성인 이방인님은 개체 중심적 사고가 발달한 예가 아닌가 합니다. 남자들의 로망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활약과 승리, 고뇌가 중심이고, 물론 사회와 주변 인물과 관계도 맺지만 그런 사회성은 주인공 개인의 존재에 비해서는 덜 중요합니다. 초보자님과 제가 이방인님 인물들을 가리켜 ‘마초’라고 하는 것은 그런 특징도 포함하고 있겠죠.
반면 저는 관계 중심적 사고가 더 발달한 것 같습니다. 여자들의 로망에는 물론 개인도 존재하지만, 개인 간의 관계와 감정이 그 개인의 활약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특히 감정이 가장 얽히고 섥히는 가족과 연애관계 (까놓고 말하면 피와 섹스)는 지대한 관심사이지요. 제 경험으로는 일반적으로 여성 참가자가 주인공의 가족이나 연애 설정에 적극적인 편입니다. 그리고 종종 진행자가 그런 설정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서 설정이 묻혀지곤 하죠. (안습)
이러한 대조의 예를 들자면, 이방인님이 맡으셨던 주인공 자락스 토레이는 루바트 오르가나라는 조연이 대신 죽어줘서 목숨을 부지하고는 시스에서 제다이로 전향한 인물입니다. (죽은 이의 뒷모습) 흔한 듯하면서도 보편적인 당위성이 있는 설정이고, 강한 떡밥이기도 했죠. 다만, 죽은 루바트와의 ‘관계’라는 요소는 별로 없었습니다. 자락스라는 인물의 영웅 서사시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결국 자락스에게 루바트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의 불편함이 없는 편리한 추상이었죠. 희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상징하는.
참가자 설정에 나온 이 떡밥을 활용하는 것은 진행자인 저였는데, 제가 루바트 오르가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가족은 심정이 어땠을까’였습니다. 아들이자 형제가 죽어서 돌아오면 억장이 무너지는 건 너무 당연한데 루바트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가족 관점으로는) 루바트를 죽게 한 시스에 대한 마음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자락스에게는 관계가 부재한 상징이었던 루바트의 이야기가 저에게는 관계의 그물에 남은 커다란 구멍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마침 오르가나는 (이방인님이 무작위 제조기에서 뽑으신 이름이었지만) 스타워즈 영화 시대의 알데란 왕가기도 하겠다, 아주 정치물로 갈 수도 있겠더군요.
그래서 생긴 설정이 루바트의 동생 다룬이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선택을 한 형도, 그 죽음의 계기가 된 자락스도 용서할 수 없으며, 아끼고 존경한 형에 대한 열등감의 반작용으로 무서운 야심가가 된 모순투성이 어린아이. 자락스의 적수에서 시작해서 공의회의 적수로서 캠페인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한 다룬은 철저히 관계 중심적 사고의 산물이었습니다. 제게 루바트는, 그리고 나아가서 자락스도 그 개체만으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거죠. 혈육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가족 간에 얽히게 마련인 감정과 그에 따르는 무수한 왜곡과 오해를 생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게는 루바트도 자락스도 제대로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관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행자란 꽤나 편리한 위치입니다. 인물을 관계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면 인물의 단위 자체가 ‘다수’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진행자는 여러 인물을 설정할 수 있으니까요. (참가자의 의견이나 설정을 받을 수는 있지만 조연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일반적으로 진행자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플레이 중 사건의 결과도 여러 인물에게 한꺼번에 적용할 수 있고요. 같은 원리로 개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물만 맡으면 되는 참가자가 일반적으로 더 편할 것입니다.
위와 같이 생각해 보면 진행자는 여성에게 꽤 적합한 역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정확히는 관계 중심적으로 인물과 설정을 생각하는 사람에게요. 마찬가지로 참가자는 남성, 정확히는 개체 중심성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에게 적합할 수 있겠지요.
당연하지만 이것은 좀 지나칠 정도의 단순화이고, 남녀로 구분하는 것은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경향에 대한 일반화한 표현일 뿐입니다. 실제로 개체 중심적 사고와 관계 중심적 사고는 서로 완전히 다른 부류라기보다는 중점의 차이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라고 다 개체 중심적인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다 관계 중심적인 것도 아니죠. (즉 제목은 떡밥입니다 (?)) 그저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이 RPG 진행을 맡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성별이 아니라 개체이며, RPG인의 개인적 특징 중에는 얼마든지 좋은 마스터링이나 플레이로 이어질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관심사가 한 영웅의 심리와 모험을 탐험하는 것이든,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의 탐구이든, 무술이든, 정치물이든, SF이든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의 취향과 관심사, 그리고 개인적 스타일이야말로 RPG 생활을 풍요롭게 할 테니까요.

참가자 스펙 얘기를 하다가..

이번에 시작하는 어스돈 (Earthdawn) +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얘기를 제노님과 하다가 얘기가 왠지 삼천포로 샜군요. 이것이 바로 두 청년 인생 망치기의 현장 중요한 건 전 분명 참가자들을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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