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더 재밌게 놀기

던전과 관계도

 

(위 던전은 https://donjon.bin.sh/ 을 사용해 무작위로 만든 지도입니다)

좋은 던전은 각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A방의 보물 상자를 얻으려면, B방과 C방에서 보물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A방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통로로 연결된 B방과 C방에 있는 괴물들은 그 소음을 듣고 무언가 행동을 할 것입니다. 플레이어들 역시 서로 연결된 던전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던전에 샛길이나 비밀문이 있다면, 플레이어들은 샛길이나 비밀문을 활용해 장애물을 우회하거나 기습을 취하는 등 던전의 지리를 이용한 다양한 작전을 구사할 것입니다.

 

(드라마 ‘내 남자의 비밀’ 관계도)

이런 면에서 관계도는 일종의 사회적 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던전의 각 방처럼 관계도 속 사람이나 세력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A의 호의를 얻고 싶다면(혹은 약점을 캐고 싶다면), 단순히 A뿐만 아니라 A와 연결된 B와 C를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또한 A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주변 사람들도 반응할 것입니다. 누가 기뻐할까요? 누가 분노할까요? 등등. 이를 주목하는 플레이어들은 마치 던전 탐사처럼 사람들의 관계를 파헤치고 최대한 활용합니다.

즉, 좋은 던전과 관계도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A Quick Primer for Old School Gaming (고전파 RPG 속성 지침서)을 통해 보는 올드 스쿨 마스터링과 그 위험성.

http://froggodgames.org/quick-primer-old-school-gaming

요즘 누메네라를 플레이하면서, 이 게임이 올드 스쿨 RPG의 플레이 방식을 지향한다고 느껴져서 이 글을 소개합니다.  위 지침서는 소드&위저드리(Swords & Wizardry)의 제작자인 매튜 J. 핀치가 쓴 올드 스쿨 RPG 입문서입니다. 지침서에서는 크게 네 가지 내용을 설명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1. 하나하나 룰에 의존하는 대신 상식으로 플레이하기 (룰 말고 룰링)
  2. 캐릭터 능력 말고 플레이어 능력으로 해결
  3. 평범한 인간이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는 플레이 지향
  4. 인위적인 “게임 밸런스”는 잊어라.

필자는 올드 스쿨 RPG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소개하기 위해 (편견을 듬뿍 담아) “따분하게 흘러가는 최신 RPG의 플레이 스타일”과 비교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최신 RPG)

마스터: “어둠 속에 복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플레이어: “덫 판정할래요.”

마스터: “굴려 보세요.”

플레이어: “15요”

마스터: “함정이 있네요.”

 

(고전 RPG)

마스터: “어둠 속에 복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플레이어: “물통에 있는 물을 바닥에 흘려서 바닥의 패턴을 확인할래요.”

마스터: “바닥에 흘린 물이 네모난 형태로 흘러가네요.”

플레이어: “함정인가요?”

마스터: “그럴지도요.”

플레이어: “제거할 수 있나요?”

마스터: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파악하기는 어려워요. 밟으면 함정이 열려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플레이어: “그냥 옆으로 지나쳐 갈래요.”

이 글만으로는 올드 스쿨 쪽이 좀 더 재미있게 보이는데, 저는 이런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합의한 게임 외적/내적 기준과 상호 존중하는 마음 없이 상식과 플레이어 실력에만 의존해 플레이하면 그 안에서 악의가 섞이기 쉽습니다. 예전에 한창 논의되었던 “사도 마스터링과 이에 대항하는 편집증적인 플레이”가 재현되겠지요.

특히 마스터는 “내가 창의적으로 마스터링을 하니까 너도 창의적인 플레이를 해야 해!”처럼 플레이어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플레이어 지식으로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아래처럼 악명높은 그림투스 트랩 같은 덫 모음은 자칫하면 테이블에서 다툼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제가 마스터라면 이런 덫을 쓰더라도 (플레이어가 아니라)PC는 이 정도 덫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할 거라고 간주하고 지각력 판정이나 덫 지식 판정을 요구할 것입니다. 마스터의 창의성은 플레이어를 돕고 창의적인 행동을 하도록 발휘되어야 하지, 플레이어를 괴롭히고 시험하는데 발휘되어서는 안 됩니다. 플레이어가 마스터의 ‘창의성’을 따라잡지 못해서 플레이어가 불쾌해했다면 룰링을 잘못 적용한 사례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그런 면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마스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정한 AWE의 강령-원칙-MC 액션을 좋아합니다. 상식과 규칙 사이에서 중용을 잘 잡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쓴 ‘월드 인 페릴과 룰링(클릭)’과 ‘롤플레잉 실력 격차 줄이기(클릭)’도 어느 정도 위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플레이어와 마스터의 창의성을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플레이어의 실력 격차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줄일 수 있는지 생각을 하면서 쓴 글이니까요.

안전한 플레이를 위해. X-카드를 사용해 보세요!

RPG 플레이를 하는 중 심기가 불편해지는 경험은 누구든지 한 두 번씩 느껴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 자신이 믿는 신념이나 신앙을 크게 조롱하는 내용이 나왔을 때.
  • 불편할 정도의 과도한 성적, 폭력 묘사가 나왔을 때
  • 이전에 겪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소재가 나왔을 때
  • 전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거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나왔을 때.

당연히 저도 겪어봤고, 이 때문에 플레이를 망친 적도 있습니다.

존 스타브로폴로스는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X-카드”라는 규칙을 제안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플레이 중 심기가 불편한 내용이 나오면 누구든지 인덱스 카드에 X자를 그은 다음 들어 올리거나, 테이블 중앙의 X자 카드를 툭 칩니다. 그럼 마스터든 플레이어든 다 같이 의논해서 해당 내용을 수정합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무척 재미있어서 간단하게 개념을 소개해봅니다.

 

어떻게 쓰는가? (조금 자세하게 풀자면)

우선 플레이를 진행하는 사람은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에 아래처럼 이야기합니다.

“도움이 좀 필요해요. 다같이 재미있게 즐기는 플레이를 하려면 여러분 도움이 필요합니다. 플레이 중 어떤 이유로든지 마음이 불편해지면 (인덱스 카드에 X자를 긋습니다) 이렇게 들어 올려주세요. (X자 카드를 테이블 한 가운데에 놓고) 이렇게 카드를 가볍게 툭 쳐도 됩니다. 왜 카드를 사용했는지는 설명할 필요 없어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카드를 들어올리거나 치면, 해당 내용을 수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가 있다면 누구든지 잠시 플레이 중지를 요청한 다음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X-카드 규칙을 사용하면 다 같이 재미있는 게임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보통 저도 이 카드를 많이 써요. 여러분 전부한테서 저를 지키려고요! 모두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는 평상시처럼 플레이하다가, 불편한 내용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X-카드를 사용하세요. 어떤 내용이 X-카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면 카드를 사용한 사람에게 몰래 물어보세요. 그리고 X-카드는 개인적으로 불편한 내용에만 사용해야 하며, 다른 이유로(다른 사람을 놀리기 위해, 게임의 내용을 되돌리기 위해 등등) 사용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X-카드를 쓰면 된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내용을 막장으로 만들지 마세요.

시간이 나면 전문을 번역해보고 싶네요. 무척 괜찮아 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찾아보세요 : http://tinyurl.com/x-card-rpg

Aspect : Establishing Facts and Compelling

I was asked the same question by players who are new to Fate: “What mechanical effect do aspects have besides earning or spending Fate Point?” In Fate Core and FAE, there is a good answer: The aspects are true and established fact in the game. Then some players asked me next question. “Then why do you compel aspects(especially situation aspects) if you get already their effect?”

 

Here is my answer : Aspects are true and fact, obviously. You can burn yourself if you rush into the “On fire!” zone naturally, or you can’t use your weapon while you are “Disarmed” without spending fate point or rolling dice.

 

Then when do aspects need to be compelled? When the new stories evolve from the aspects. If you compel “On fire!” aspect, there will be not only a fire: there will be a child who is trapped in a room on fire, or the exit will be blocked by fire. If you compel “Disarmed” aspect, not only you can’t use the weapon, but also have a problem with it : Your weapon will be thrown off a cliff, or snatched by an enemy.

 

So, aspects(especially situation aspect) are equivalence of other RPG’s condition, or tag, modifier, etc. but it will make a new story when you compel them.

(You can check other’s comments in here.)

고된 탐험(Grind) 규칙을 페이트에 적용하기

고된 탐험(Grind) 규칙은 토르 올라프스루드가 만든 ‘토치베어러(Torchbearer)’에서 도입된 개념으로, 모험가들이 던전을 탐사하면서 점점 지치는 모습을 표현한 규칙입니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모험가들은 던전에서 네 번의 행동(판정과 전투)을 할 때마다 지칩니다. 예를 들어 함정을 조사하고(1턴), 찾아낸 함정을 제거하고(2턴), 보물상자에서 찾아낸 고대 문헌을 조사하고(3턴), 문헌을 조사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과 싸우면(4턴) 전투가 끝난 후 모험가들은 상태가 한 단계 악화됩니다.

토치베어러에서는 모험가의 상태를 총 여섯 가지로 표현하며, 고된 탐험에 따라 모험가들은 배고픔과 목마름 → 탈진 → 분노 → 병듬 → 부상 → 공포 순서로 상태가 악화됩니다. 이 여섯 가지 상태가 모두 채워진 다음 다시 상태가 악화되면 모험가는 죽습니다. 만약 중간에 전투를 치르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중간 상태가 이미 채워져 있다면 다음 상태가 채워집니다.

상태마다 회복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배고픔/목마름은 식량과 물을 먹어야 회복할 수 있고, 나머지 다섯 가지 상태는 캠프를 치거나 마을로 돌아가 판정을 해서 치료해야 합니다.

캠프 중 판정을 하기 위해서는 체크(Check)라는 점수가 필요한데, 이 체크는 모험 중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 일부러 판정에 페널티를 받거나 불리한 상황에 빠져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위 내용을 페이트로 적용해 볼까요? 물론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하지만 일단은 다음과 같이 만들 수 있겠네요.

 

1. 상태 규칙

고된 탐험 규칙에서는 페이트 시스템 툴킷의 상태(p.20) 규칙을 적용합니다. 단, 장기적 상태는 회복 액션 한 번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 상태 

없음. 고된 탐험 규칙을 적용할 때 모든 상태는 지속적 상태 또는 장기적 상태입니다. 모험자는 스트레스를 총 16점 흡수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 상태 (각 상태마다 2점씩 스트레스 흡수 가능)

배고픔과 목마름 :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입니다. 식량과 물을 먹으면 회복합니다. 캠프 중이 아니더라도 몇 분 정도 짬을 낼 수 있다면 회복 가능합니다.

분노 : 심리적으로 격앙된 상태입니다. 캠프를 친 후 의지력 기능(난이도 +2)으로 성공해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본인 대신 동료가 사교 기능이나(노래를 부르는 등) 눈치 기능 중 심리학자 특기로(난이도 +2) 달래줄 수도 있습니다.

탈진 :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 캠프를 친 후 체력 기능(난이도 +3)에 성공해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다면 난이도가 1 올라갑니다.

공포 : 겁에 질린 상태입니다. 캠프를 친 후 의지력 기능(난이도 +3)에 성공해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본인 대신 동료가 사교 기능이나(노래를 부르는 등) 눈치 기능 중 심리학자 특기로(난이도 +3) 달래줄 수도 있습니다.

장기적 상태 (각 상태마다 4점씩 스트레스 흡수 가능)

병듬 : 병이 든 상태입니다. 캠프를 친 후 의지력 기능(난이도 +3)에 성공해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의학을 배운 동료가 학식 기능(난이도 +3)으로 치료해 줄 수도 있습니다.

부상 : 부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캠프를 친 후 체력 기능(난이도 +4)에 성공해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의학을 배운 동료가 학식 기능(난이도 +4)으로 치료해 줄 수도 있습니다.

 

2. 모험 스트레스 칸

모험 스트레스 칸은 시간 경과와 모험가들의 피로도를 나타낸 수치로, 총 네 칸입니다. 던전 및 야외 탐사를 시작한 모험가들이 기능 판정을 하거나 전투를 겪을 때마다 칸을 하나씩 채웁니다. 단, 모든 모험가들이 같은 목적으로 동시에 기능 판정을 할 때는(예를 들어 발동된 덫을 피할 때, 또는 함정을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갈 때) 판정 한 번으로 간주합니다. 네 칸이 모두 채워지면 모험가들의 상태가 악화되고, 모험 스트레스 칸을 비웁니다. 상태는 다음 순서대로 악화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 탈진 → 분노 → 병듬 → 부상 → 공포

만약 전투나 불의의 사고를 겪어 해당 상태가 이미 채워졌다면, 그 다음 상태를 채웁니다. 모든 상태가 채워진 다음에도 회복하지 않은 채 판정을 네 번 한다면 그 후 모험가는 죽습니다.

모험가들이 캠프를 칠 때에도 모험 스트레스 칸을 비우고 처음부터 다시 채웁니다.

 

3. 광원 관리

야외나 지하에 들어갈 때, 모험가들은 자동으로 “어둠”이라는 상황 면모를 얻습니다(적외선 시각이나 암흑 시각을 가진 모험가는 예외입니다). 이 면모는 횃불이나 랜턴을 켜야 없앨 수 있습니다. 횃불과 랜턴은 모험 스트레스 칸이 비워질 때마다 새로운 횃불이나 기름을 소모해서 켜야 합니다.

 

4. 짐 관리

철판 갑옷 같이 무거운 갑옷을 입은 모험가는 탈진 상태를 회복할 때 난이도가 +1 추가됩니다.

또한 각 모험자는 체력에 따라 들 수 있는 짐의 양이 달라집니다. 모든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등짐 하나(30kg) 정도를 들 수 있다고 간주하세요. 체력 기능이 있다면 기능 1마다 등짐 하나씩 늘어납니다. 좀 더 빡빡하게 자원 관리를 하고 싶은 마스터는 등짐 하나마다 채울 수 있는 식량/물의 수와 횃불의 수를 정해도 좋습니다(예: 등짐 하나마다 식량/물 5인분, 횃불 5개를 채울 수 있다).

 

5. 캠프 치기

캠프를 치려면 다음 조건이 필요합니다.

– 최소 운명점 1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눈 앞에 닥친 위험이 없어야 합니다.

– 쉴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

마스터는 주변 상황에 따라 이곳이 캠프를 치기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모험가들은 주의력 기능으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이 판정 역시 모험 스트레스 칸을 채웁니다). 마스터는 주변 상황에 따라 난이도를 조정하세요(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은 +1~2 정도, 적들이 득시글대는 곳은 +4 정도로). 실패할 경우 그 장소에서는 캠프를 칠 수 없습니다.

캠프에서 시도하는 모든 판정은(회복, 연구, 식량 찾기 등) 운명점을 사용합니다. 식량과 물을 먹는 데에는 판정이 필요 없으므로 운명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스터는 모험가들이 모험 중 적극적으로 면모를 역발현해서 운명점을 벌도록 권장하세요. 캠프 중에는 면모를 역발현할 수 없습니다.

 

6. 마스터의 할 일

모험가들은 본능적으로 기능 판정 3번~4번을 한 다음 캠프를 엽니다. 눈치 빠른 모험가들은 캠프를 열지 않은 채 식량을 먹어서 좀 더 시간을 벌지요. 그러니, 마스터는 탐험 중 모험가들이 고생하도록 여러 조치를 하세요. 예를 들어…

– 모험가들이 쉴 틈 없이 곧바로 다음 사건과 맞부딪혀서 판정을 더 하도록 만드세요. 특히 모험가들이 판정에 실패하거나 비길 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 모험가들이 모험에 필요한 물자(식량과 물, 횃불 등)을 잃어버리게 하세요. 특히 모험가들이 판정에 실패하거나 비길 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 항상 전투 중 모험가들에게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히세요.

– 모험가들이 서로 떨어지려고 할 때는 경고하세요. 모험가들이 각각 판정할 때마다 모험 중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상관없이 모험 스트레스 칸이 무조건 채워집니다.

상황 면모 / 캐릭터 면모 활용하기

페이트는 규칙의 많은 부분을 면모 활용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물을 던져 상대방의 움직임을 묶은 다음, 삼지창으로 찌른다. 상대방은 애써서 그물을 잘라 빠져나가려고 한다.” 라는 장면을 전통 RPG로 구현한다면, ‘포박’ 규칙과 ‘물건 파괴’ 규칙을 각각 설명해야 합니다. 물론 그물이 주는 효과와 데이터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페이트에서는 기회 만들기 액션으로 면모를 붙이고, 극복 액션으로 면모를 제거하는 기본 규칙만 알면 됩니다. 마스터는 그물이라는 면모가 붙은 캐릭터의 이동 및 행동에 적당히 제약을 주면 그만이지요. 페이트는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테이블 안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를 믿고, 상당수의 복잡한 규칙을 면모 관련 규칙 하나로 뭉뚱그렸습니다.

따라서, 이 면모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페이트는 무척 밍밍한 규칙입니다. 면모의 기본적인 활용은 판정에 +2의 보너스를 주거나 주사위를 다시 굴리는 방법이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지요! 면모는 이야기 속 현실입니다. 한번 등장한 면모는 면모 발현, 면모 역발현에 관계없이 플레이상 현실로 존재하고, 실제 플레이에 도움이나 제약을 줍니다. “날개” 면모가 있으면 하늘을 날 수 있고, “수갑에 묶임” 면모가 있으면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던전월드(링크)를 아시는 분이라면 무기나 물건에 붙은 태그를 생각해 보세요. ‘파괴적’(장비) 태그는 수치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피해를 주는 방식이 파괴적이어서, 맞은 사람이나 물건은 으깨지거나 찢어집니다.” 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예전 제 캐릭터는 파괴적인 공격을 맞고 팔 하나를 잃고, 신전에서 치료 마법으로 팔을 붙일 때까지 방패를 장비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이야기 속 현실이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는 예시지요.

페이트의 면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장면과 캐릭터에 붙은 면모가 실제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도록 다양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페이트 코어 시스템 p.202, “난이도에는 이유가 있어야”와 p.218 “환경적 위험요소”를 참조하세요!

 

면모를 실제 플레이에 활용하는 예시를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페이트의 면모 활용은 정해진 세부 사항이 없는 만큼, 이 예시는 다른 마스터의 면모 활용 사례라고 참조만 하세요.

 

“저 흡혈귀의 몸에 기름병을 던질게요. 철수야, 그 다음이 네 차례지? 횃불을 던져!”

→ 기회 만들기로 “기름 뒤집어씌우기” 면모와 “불 붙이기” 면모를 상대에게 붙이는 시도입니다. 흡혈귀는 ‘운동능력’(페이트 코어)이나 ‘날쌔게’(기동형 페이트)로 피하려고 시도하겠지만, 실패해서 불이 붙은 흡혈귀는 어떻게 될까요? 명백하게 규정한 규칙은 없지만, 불이 붙은 흡혈귀는 피해를 당하는 게 자연스럽겠죠. 저라면 불길의 ‘화상’ 실력을 대단함(+4) 으로 잡고 매 차례 흡혈귀를 공격하게 할겁니다. 흡혈귀는 ‘체력’이나 ‘강하게’ 로 방어를 하면서, 자신의 차례 때 극복 액션으로 불을 끄려고 하겠죠. 역시 난이도는 +4 정도로 할겁니다.소화기를 사용한다면 +2 정도로 낮출 수도 있겠지요.

 

“거대한 날개가 있는데, 좁은 통로에서 쉽게 움직일 수 있겠어요?”

→ ‘거대한 날개’라는 캐릭터 면모가 있는 캐릭터는 좁은 통로에서 곤란을 겪습니다(아마 상황 면모로 “좁은 통로”가 있겠지요). 아마 뛰어가서 적을 공격하려고 해도 좁은 통로 속에서 날개가 거치적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겠죠. 이 경우 마스터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캐릭터는 좁은 통로에서 공격하려고 할 때, 공격에서 최소 +3 이상은 나와야 한다.” 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방어자가 거대한 날개 면모를 발동하면, 공격 난이도가 +5가 되겠지요.

 

“밑에 있는 좀비들이 깔리도록 거대한 샹들리에를 쏴서 떨어뜨리겠어요!”

→ 멋지군요! 샹들리에를 떨어뜨려서 한 구역의 적들 모두를 공격한다면 플레이어가 제안하는 “면모의 역발현”을 응용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느리고 둔해 빠진 좀비라면 캐릭터는 샹들리에를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난이도는 +2 정도로 하고 싶습니다) 좀비들을 모두 공격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좀비들이 잽싸다면 운동능력으로 대항하겠지요. 그래서 캐릭터가 성공한다면? 그 밑에 있던 모든 좀비들은 성공 차이+ 샹들리에의 무게 때문에 얻는 추가 피해를 입습니다.

만약 ‘거대한 덩치’라는 캐릭터 면모가 있는 괴물 좀비라면 이 정도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는 캐릭터의 선언이 공격이 아닌 기회 만들기 액션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다만 “샹들리에에 깔리다” 라는 상황면모가 붙어 샹들리에를 치우기 전에는 이동을 못 하거나, 공격이나 방어에 페널티를 입을 수는 있습니다.

 

“저 녀석의 등 뒤로 돌아와 손을 꺾은 다음, 수갑을 채우겠습니다.”

→ 기회 만들기로 시도해보겠다고요? 대담한 발상입니다. 화끈한 마스터라면 한 번에 허락할 수도 있겠지만, 저라면 “먼저 붙잡아서 제압한 다음 수갑 채우기를 시도하세요.” 라고 제안할 겁니다. 기회 만들기를 두 번 시도하라는 거지요. 상대는 운동능력으로 저항하겠죠?

하지만 이런 힘든 시도를 뚫고 성공한다면, 당연히 그만한 보상은 있어야겠죠. “등 뒤로 수갑이 묶임” 면모가 붙은 캐릭터는 일단 손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불가능할 겁니다. 대표적으로 무기 사용이나 주먹 휘두르기 등이 있겠죠. 게다가 등 뒤로 손이 묶였으니, 방어 역시 매우 힘들겠죠? “등 뒤로 수갑이 묶임” 면모가 있는 이 캐릭터를 칠 때는 캐릭터의 운동능력 실력이나 난이도 +2 중 낮은 쪽을 넘기면 공격이 명중한다.” 정도의 제한은 어떨까요? 달리기도 힘들 테니 “전력으로 질주할 때는 난이도 +3 이상이 나와야 성공한다.” 정도의 제한을 붙이고요. 또한, 수갑을 푸는 시도는 아주 힘든 일이기 때문에 난이도를 +4 이상으로 줄 겁니다. 물론 묶인 캐릭터가 ‘유연한 관절’ 같은 면모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저 녀석의 손목을 베어버리겠어요! 물론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떨어뜨리겠지요?”

→ 물론 좋은 시도지만, 때로는 면모가 만능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하세요. ‘잘린 손’, ‘외눈’ 같은 영구적인 변화는 기회 만들기로 붙일 수 있는 상황 면모로는 너무 큽니다. 영구적인 변화는 극단적 타격이나 갈등 패배의 결과로 남겨두세요. 다만 기회 만들기 시도로 ‘손목 치기’ 같은 상황 면모를 붙인다면 무장 해제 정도는 가능하겠죠. 무장이 해제된 캐릭터가 무기를 주우려면, 극복 액션을 하느라 한 차례를 소모해야 합니다(극복 난이도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겁니다. 만약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난이도가 낮거나 자동 성공도 가능할 테고, 적이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무기를 주우려면 겨루기로 굴려야겠죠).

폴라리스 : 폭주 증후군 분석

“모두 죽여요.”

“악마의 힘을 빌려서 잔해를 함락해요.”

“(무언가 나쁜 짓을) 해요.”

처음 폴라리스를 접하는 분들과 플레이를 하다 보면 이런 광경을 심심치 않게 접합니다. 이 분들은 자신이 선언한대로 서술의 결과가 만들어지고, 기사가 타락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성장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하면서 기사를 신속하게 성장시키지요. 저희는 이런 현상을 “폭주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폭주 증후군에 물든 플레이는 처음에는 자극적인 재미를 주지만 결국 참가자 모두의 재미를 망칩니다. 왜일까요?

폴라리스는 마음과 후회 사이에서 서술권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는 구조로 게임을 진행합니다. 마음은 민족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유지하려 하고, 후회는 이런 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히며 마음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두 달은 그 가운데에서 때로는 마음을 편들기도 하고, 때로는 후회를 돕기도 하지요. 폴라리스의 재미는 그러한 극적 긴장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마음이 저항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 이러한 긴장감이 떨어지면서 이야기의 재미도 떨어집니다. 폴라리스의 갈등과 비극은 순수와 이상을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처음부터 순수도 이상도 없었다면 잃어버린 것도 없으니까요. 후회와 줄다리기를 해야 할 마음이 오히려 후회를 앞질러 막장의 결승으로 돌진하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폭주 증후군을 극복하는 동시에 비극을 만들어야 하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영웅이 악당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모든 타락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타락한 영웅의 대표적인 사례인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가 타락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까요?

① 어머니의 죽음을 예지했으나, 제다이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 고향에 가는 것을 미루다 간발의 차이로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② 그 다음에는 연인 파드메 아미달라의 죽음을 예지하고 이를 막기 위해 요다에게 방법을 물었지만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했다.
③ 반면 다스 시디어스는 다크 사이드의 힘으로 파드메를 살릴 수 있다는 답변을 주었다.
④ 그래서 다스 시디어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편을 둘 수 밖에 없었다.

다스 베이더의 타락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이 있습니다. 폭주 증후군이 비판 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개연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타락해야 하는가

어떻게 타락해야 할지를 알기 전에, 우선 기사가 지켜야 할 이상부터 알아봅시다.

“별빛의 기사는 후회에 맞서 민족을 지키는 영웅이다.”

이 대전제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타락은 개연성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민족을 지켜야 하는 기사가 왜 처음부터 대량 학살을 저지르나요? 왜 처음부터 악마들과 손을 잡아야 하나요?

서둘지 마세요! 아무리 언젠가 타락할 운명일지라도 기사는 기사입니다. 플레이를 하는 참가자는 기사의 운명을 알고 있지만, 기사 자신은 자신이 타락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참가자들은 기사가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차근차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후회는 기사에게 가혹한 선택을 제시하세요. 후회가 멍석을 깔아주지 않는다면 마음이 혼자서 타락할 수 있을까요? 후회는 위의 이상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마련해야 합니다.

마음 : 스피카(기사)는 후회의 대군을 무찔러 한 명도 살려두지 않고 죽였다.

후회 : 그러나 그러려면 스피카의 충성스러운 부관 시리우스가 악마에게 빙의 당해야 한다.

위와 같은 방법이 기사를 괴롭히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마음은 타락의 위험을 겪습니다. 시리우스를 방치하나요? 그럼 시리우스는 후회의 노예가 되어서 민족에 큰 해를 끼칠 것입니다. 스피카는 민족을 지킬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타락하게 되겠지요. 시리우스를 죽이나요? 그럼 스피카는 민족에게 잔인한 짓을 했기 때문에 타락하게 되겠지요. 마음이 “그러나 그러려면 스피카가 시리우스에게 퇴마 의식을 해서 악마를 쫓아내었다.” 라고 선언했나요? 그렇다면 더 가혹한 서술을 하세요. “그러나 그러려면 퇴마를 하는 과정에 시리우스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미쳐버렸다.” 언젠가 마음이 두 손 들고 항복을 외칠 때가 옵니다. 마음에게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 더 큰 무언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세요.

달은 기사의 인간관계를 지옥으로 만드세요. 보름달과 그믐달 역시 마음이 타락하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사를 마음껏 부려먹으세요. 여러분이 기사의 이상 따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세요. 여러분이 기사의 아버지라면 가문의 영화를 위해 이웃 가문의 장남을 죽이라고 명령하세요. 여러분이 기사의 연인이라면 사랑을 위해 기사의 아내를 죽이세요. 결국 기사는 멸사봉공을 택하고 자신의 마음을 도려내느냐, 타락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은 기사의 명분을 지켜주면서 타락하세요. 후회와 달이 타락으로 향하는 길을 닦았다면, 마음은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서둘지 마세요! 어차피 타락할 몸, 이왕이면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타락해야 이야기도 더 재미있어집니다.

타락을 할 때는 반드시 명분을 가지세요. 이상을 지키면서 타락하려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공리주의적인 명분이 가장 적합합니다. 친애하던 상관의 뒤를 찌르거나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면 “민족의 이름으로”라는 변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상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사의 명예를 포기하고 타락할 만큼 커다란 이유를 만드세요. 사랑 때문에, 가문 때문에, 혹은 증오 때문에.

그렇게 타락의 길을 걷다 보면 열정이 회의로 바뀌면서 기사 자신이 민족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선택하세요. 영광스럽게 죽을지, 계속 타락해서 후회에게 굴복할지.

죽음을 선택한다면 강렬한 마지막 장면을 준비하세요. 영웅은 영웅답게 죽어야 합니다. 같은 민족에게 배반당해 최후를 맞이하든, 후회의 군세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이하든 멋진 모습을 보여주세요. 무엇보다도 후회를 감동시키세요. 마음이 아무리 “그러나 그러려면 (기사)는 죽어야 한다.” 라고 선언하더라도 후회가 방해한다면 기사는 죽지 못합니다. 후회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장면을 준비하세요.

타락을 선택한다면 지금까지의 과정을 반복하세요. 노병이 된 이상 기사는 자신이 결국 타락해서 민족을 배신하리라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기 때문에 좀 더 대담하게(=막나가게) 행동해도 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명분은 잊지 마세요. 회의가 4를 넘지 않는 한 기사는 여전히 기사, 민족의 수호자입니다. 민족의 절반을 죽이고 폭군의 자리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민족을 더욱 강하게 만들겠다는 명분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기만이 깨질 때는 오직 회의가 4를 넘을 때뿐입니다.

 

비극의 위치에너지

어찌 보면 폴라리스는 악행 및 냉소로 인해 성장한다는 점 때문에 폭주를 권장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는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폭주 증후군은 규칙의 약점을 이용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러한 반응을 절제하거나 최소한 멋지게 승화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한없이 추해질 수 있다는 점이 폴라리스 플레이의 함정입니다.

그러니 절대 잊지 마세요. 폴라리스는 비극입니다. 잃어버릴 것이 없는 비극은 비극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실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상실은 한때 고귀했던 기사, 바로 여러분의 캐릭터 자신이 타락하는 모습입니다. 그 이상을 드높이는 만큼 타락과 죽음도 더 슬퍼지는 원리가 바로 ‘비극의 위치에너지’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비극을 지향하려면 폴라리스는 ‘개망나니가 기꺼이 악마가 되는’ 이야기가 아닌, ‘고귀했던 기사가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더럽혀져 가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후회와 달, 마음이 합심하여 가혹한 선택을 제시하고, 인간관계를 고뇌의 연속으로 만들고, 그러면서도 명분이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는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컷의 삼박자를 유지해야 합니다. 끝끝내 영웅이 쓰러지는 그 순간이 더더욱 아름답고, 고고하고, 비참하도록 말이지요.

RPG와 최적 경험: 진실성

여러분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인생관이라고도 하고 신념이라고도 하는 이 진실은 여러분이 실제 경험이나 책이나 생각 등 삶의 과정을 통해서 배워온 법칙 혹은 규칙성, 즉 ‘삶이란 이런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보답을 받는다거나, 선인은 결국 상을 받고 악인은 결국 벌을 받는다는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거나,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거나 등등.
아니면 여러분의 세계관은 냉소적이고 어두운 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 있고 백 있는 사람의 편이라거나, 악인이 더 잘 된다거나, 가족이야말로 가장 못 믿을 사람들이라거나,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라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 바로 악이거나 하는 식으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이란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때그때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건전발랄한 생각과 짜게 식은 냉소가 공존할 수도 있지요.
여러분이 믿는 생의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이야기야말로 여러분에게 가장 재미있고 깊이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흔히 주제라고 하고, 다르게 말하면 책을 덮었을 때, 극장에서 나왔을 때, 텔레비전을 껐을 때 ‘남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진실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으면 남는 게 없는 이야기가 되거나 “그래서 어쩌라고?” 소리가 나오기 쉽지요. 주제의식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제는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드러날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가장 단순화하자면 ‘~~를 하면 ~~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관계의 반복을 통한 것이라는 설명이 저는 가장 와닿았습니다. 이것은 Robert McKee의 Story: Substance, Structure, Style and the Principles of Screenwriting에 나온 설명을 참조한 것으로서, 이 책은 국내에서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황금가지에서 2002년 출간하였습니다.
가난한 젊은이가 성공하려고 이를 악물고 사업을 하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없이 발로 뛰어 투자자를 감동시키고, 밤낮으로 공사장에서 지내면서 공장을 짓고, 경쟁사의 치사한 수법에 맞서 품질과 정직성으로 승부하는 끝에 성공하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는 ‘역경 앞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감동 성공신화일 것입니다. ‘노력 -> 성공’이라는 인과관계가 이야기의 각 단계 (투자자 확보, 공장 건설, 경쟁사 음모 분쇄)와 전체 이야기 (사업 성공)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위의 청년 실업가가 투자자를 모으려고 죽도록 노력했는데 경쟁사의 이간질로 투자를 못 받고, 결국 비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려 공장을 지으려고 했는데 공장은 경쟁사에서 보낸 깡패들이 불태워버리고, 허름한 창고를 빌려 밤을 새어가며 제품을 조립하여 출고하였는데 특허 소송에 휘말려 결국 제품은 사장되고 경쟁사 사장의 매수를 받은 검찰이 사기죄로 이유 없이 기소하여 결국 빚만 떠안고 감옥에 가는 이야기라면 이것은 살기 싫어지는 이야기 ‘돈과 권력 앞에 개인의 노력이나 성실성은 실패와 파멸로 이어질 뿐이다’라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이야기이겠지요. 역시 이야기의 각 단계 (투자자 확보 실패, 공장 화재, 제품 사장, 억울한 옥살이)와 전체 이야기 (돈과 권력에 져서 파멸) 속에서 ‘권력의 방해 -> 실패’라는 인과관계가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들 한쪽 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투자자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공장은 성공적으로 지어 제품을 출시했고, 특허 소송에 져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 결국 경쟁사의 비리를 밝혀내고 어렵게라도 회사를 꾸려갈 수 있었다… 하는 식의 달콤씁쓸한, 양쪽 진실이 공존하는 혼합적인 주제의식이 될 수도 있지요. 인생은 다면적인 만큼 보통은 이러한 혼합적인 주제의식이 가장 현실적입니다.
이미 정해진 이야기인 소설이나 영화 등은 위와 같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인 RPG는 이들 매체와는 주제의식 표현이 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이나 각본은 주제를 미리 정하고 이에 맞추어 이야기를 구성하고 수정할 수 있는 반면, RPG에서는 시나리오를 정한다 하더라도 실제 진행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크게 달라지니까요. 이런 RPG의 성격상 주제를 설정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RPG든 다른 이야기든 주제를 미리 설정하고 모든 인물과 진행을 주제에 맞추는 방식은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선전 소설마냥 구호 모음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니까요. 그보다는 좋은 주제의식은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실제 사람, RPG의 경우 참여자들이지요. 두 번째는 이야기 속의 가상적인 사람, 즉 허구 속의 인물들입니다. 여기서 시작하여 RPG에서 주제의식을 살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논의는 나중에 이야기의 개별적 요소들 (배경세계, 인물, 구조 등)을 다루면서 더욱 확장해갈 것입니다.
일단 처음 기획하고 설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왜 이러한 캠페인을 원하는지, 왜 이런 성격의 배경세계를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이 주제의식 형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벌써 주제를 정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만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 했던 중편 캠페인 도쿄의 달 제작시에는 ‘변혁기 인간의 모습’을 다루자는 합의 하에 이에 맞추어 배경세계를 정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 인간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질문은 주제의식이라기보다는 소재이지만, 나중에 주제의식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지요.
인물을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로 ‘왜’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적의 희생 때문에 살아남은 후 개과천선한 인물을 하고 싶다면, 왜 그럴까요? 어떤 이야기 혹은 방향성을 바라는 것일까요? (현실 속 참여자의 동기) 그러한 인물의 동기,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허구 속 인물의 동기) 참여자가 원하는 것과 인물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야 좋은 이야기와 진실한 주제의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주제의식이란 결국 인과관계인데, 이러한 인과관계가 나타나려면 사건이 일어나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는 동력원은 욕망이니까요. 위의 청년 실업가의 예에서는 그가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하기에 투자자를 모으고 공장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욕망에 다른 인물들이 반응하면서 감동 성공 스토리도, 산업 느와르물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기회과 인물 제작 단계에서는 크고작은 의견차이가 생기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의견 차이야말로 진실성과 주제의식을 둘러싼 차이점의 실마리인 까닭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참가자가 하고 싶어하는 인물은 자신이 뭔가 동기가 있어서 움직인다기보다는 주변 인물이 괴롭히고, 좋아하고, 구출하는 사건의 연속인 공주형 내지 소녀형 인물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참가자나 인물이 여자는 아닙니다.) 즉 행동하기보다는 사랑이나 미움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인물을 원할 수 있지요. 이럴 경우 그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진실성이란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거나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행동하기보다는 착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은 일이다’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의견 차이가 드러날 때에는 위 문단에서 다루었듯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가 대화를 충분히 하고 차이점을 조정해 보거나, 정 간극을 좁히기 어려우면 같이 플레이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하면 이전 단계에서 암시되었던 주제의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행자가 제시하는 상황, 참가자가 보이는 반응, 각 참여자가 원하는 이야기와 그 합치 혹은 불합치 속에서 각자의 욕망의 방향을 엿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진행자가 권력의 비리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면 진행자는 아마도 권력이 인간을 망친다는 주제의식에 관심이 깊을 것입니다. 또 참가자 A는 대개의 상황에 폭력적으로 반응하고 또 이로 인한 승리를 원한다면 그 참가자는 정의는 (혹은 나는) 승리한다는 진실에 끌리는 것이겠지요. 또 다른 참가자 B는 주변 인물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이런 참가자는 인생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한 참여자가 믿는 진실은 여러 가지일 수 있고, 서로 모순적인 진실을 믿을 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주제의식, 혹은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대화가 아주 중요해집니다. 참여자들이 해당 세션에서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점이 충족되었고 어떤 점이 불만족스러웠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얘기하면서 각자가 원하는 이야기와 주제의식을 끌어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참가자 A는 전투로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는데 진행자가 너무 강한 적을 내보낸 것이 불만일 수 있습니다. 진행자는 이기기 어려운 권력의 불의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강한 적을 내보낸 것일 수 있지요. 이러한 욕망이 드러나면 이들의 각자 다른 진실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경우 폭력과 권력은 결국 같은 현상이니까 참가자 A의 인물이 폭력을 휘두르면서 점점 강력한 권력이 되어가고, 그로 인해 새로운 억압자가 되는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혹은 참가자 A와 참가자 B의 욕구를 조화하여 혼자서는 이기기 어려운 상대이지만 원군을 부르면 이길 수 있는 적을 내보내서 정의의 승리와 사회관계의 중요성을 둘다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RPG에서의 주제의식은 모든 참여자가 생각하는 진실이 서로 대립하고 또 조화를 이루는 긴장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특히 긴 이야기일 수록 각자의 진실을 조화시키는 소통이 중요해집니다.
이상과 같이 주제의식이 무엇이며 RPG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주제의식 외에도 이야기의 진실성에는 개연성이나 진정성 같은 요소도 들어갑니다. 이야기의 진행과 인물의 행동과 감정이 얼마나 진실한가 하는 문제이지요. 이들 역시 참여자끼리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므로 의견 차이가 생기면 이때 왜 이런 사건이나 반응이 나왔는가,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이렇듯 좋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진실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부터는 RPG 캠페인 기획과 진행의 각 단계를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가장 기본인 배경부터 시작하여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캠페인 배경세계를 설정하고 선택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A.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B. 진실성
C. 배경세계
D. 인물성
E. 이야기 구조
F. 갈등과 의미있는 선택
G. RPG 특유의 서사성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RPG와 최적 경험: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지난번 글에서는 백만 년 전에 RPG의 게임적 측면을 다루었습니다. 그 글에서 다루었듯 RPG에는 게임으로서의 측면이 있으며, 이는 역할극과 구분되는 RPG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규칙의 지향점을 파악하고, 숙독과 연습을 통하여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얘기를 했었죠.

게임성 외에 또 다른 특징이라면 RPG라는 놀이는 반드시 서사적인 틀 속에서 진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드게임이나 퍼즐게임 등은 서사 없는 놀이가 가능하지만, RPG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플레이를 하든, 아니면 이야기는 괴물을 잡고 보물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일 뿐이든 뭔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RPG는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놀이인 셈입니다.

서사성이 RPG의 또 다른 특징인 만큼 이야기가 훌륭하면 그만큼 RPG의 만족감도 높아지고, 좋은 이야기를 목표로 노력하면 그만큼 최적 경험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처음에 최적 경험, 혹은 플로우를 다루면서 말했듯 플로우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노력을 하면서 집중감과 몰입감, 그리고 행복감이 드는 경험입니다. 따라서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플로우가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먼저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살펴보고 다음 글부터 각 요소를 달성하는 방법을 논하겠습니다.

주의할 것은 RPG가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야기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둘 필요는 없으며, 또 그래야만 좋은 놀이인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RPG의 이야기란 그저 신나는 놀이를 하면서 (게임성), 혹은 아는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 (사회성) 부차적으로 생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얼마나 강조할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쏟을지는 각 팀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이야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로 한다면 더욱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은 분명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좋은 이야기란 워낙에 다양하므로 외적으로 보이는 특징, 예를 들어 장르나 배경을 가리켜 이것이 있으면 좋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좋은 이야기라고 해서 엘프와 마왕이 나오면 좋은 이야기인 것은 아니며, 영화 ‘가타카’가 좋은 이야기라고 해서 미래 디스토피아가 다 훌륭한 작품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라면 공유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는 합니다. 겉가죽은 연애물이든 추리물이든 동화이든, 모든 좋은 이야기의 속살에는 다음과 같은 본질이 있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제가 그동안 보고 생각한 것을 나름 소화하고 정리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진실성. 좋은 이야기란 무엇보다 진실한 허구, 즉 진실한 거짓말입니다. 비록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 속에 있는 인물과 사건 등이 삶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것이 좋은 이야기의 본질 중 으뜸입니다. 인물을 어떻게 하고 사건을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도 결국에는 ‘진실한가?’ 하는 단일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자연스럽고 진정성이 있는가, 삶에 대한 어떤 진실을 보여주는가, 이것이 좋은 이야기의 최종적이며 또한 유일한 시금석입니다. 나머지는 좋은 이야기는 진실해야 한다는 이 원칙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두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풍부한 배경세계가 있습니다. SF나 가상역사, 판타지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르거나 역사물처럼 우리 세계의 과거를 다루는 이야기도 배경세계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허구도 독자적인 배경과 문화가 있습니다. 21세기 한국의 고등학교나 중산층 가정, 혹은 21세기 한국 사회 전체도 이야기가 벌어지는 세계이며, 각자 법칙과 갈등, 문화가 있는 소우주를 이룹니다.

한편 배경세계가 풍부하다는 것은 설정자료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의미있는 갈등의 실마리가 있으며, 인물 및 인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 세계 특유의 문화와 규범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배경 때문에 생기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삶의 진실이 햇빛이라면 배경과 그 문화는 그 빛을 다양한 색채로 변주하는 프리즘입니다.

세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좋은 인물성, 특히 좋은 주인공이 있습니다. 좋은 인물이란 결국 이야기에 드러나는 삶의 진실을 사람을 통해 표현하여 흥미와 공감을 끌어내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주인공, RPG에서는 PC는 실현할 수 있는 욕구를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변하고 성장해가는 인물이지요. 이러한 인물과 그들 간의 관계는 좋은 이야기의 원동력이 되며, 깊은 감정적 경험을 이끌어냅니다.

네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경험을 고조시키는 이야기 구조가 있습니다. 모든 의미있는 이야기의 핵심에는 일상 – 일상에서의 일탈 – 새로운 평형 달성이라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따릅니다.) 그것을 기승전결, 발단-전개-절정-결말 하는 식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주인공들이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위험한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렇게 성장하고 변함으로써 한층 층위가 높은 새로운 안정성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얘기이든, 학교를 옮기는 전학생 얘기이든,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모든 좋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각자의 삶이라는 전투를 치르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의 지혜, 그 진실의 일면이라는 전리품을 탈취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진실을 위한 싸움에서 크게 승리할 수록 결말이 행복한 이야기이겠고, 의미 있는 배움을 얻지 못하거나 이를 위한 대가가 너무 크다면 비극적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삶을 더 깊이 깨닫고, 더욱 의미있는 존재를 누리려는 투쟁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이를 반영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의미있는 갈등과 선택이 있습니다. 내적 갈등이든 외적 갈등이든 인물은 의미가 있는 갈등에 마주해 뭔가 선택을 해야 하며, 이 선택에도 크든 작든 의미가 따라야 합니다. 갈등과 선택은 위의 모든 요소를 통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배경세계와 인물은 다양한 갈등을 만들어내며, 갈등의 발생과 해결은 배경과 인물,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진실에 비추어 진정성이 있고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또한 갈등상황에서 인물이 하는 선택에 따라 인물성은 더욱 깊이가 생기고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상황과 선택은 미지의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새로운 평형을 만들어가려는 인물의 투쟁을 반영하며 이를 통해 삶의 어떤 진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RPG의 좋은 이야기는 소설이나 연극과는 다른 RPG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정하는 규칙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함께 즉석에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따라서 RPG의 다른 두 요소인 게임성과 사회성과의 관계, 그리고 즉흥성과 계획성의 관계 등을 살펴보면서 RPG인의 서사적 능력 논의를 마칠 계획입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의 요소를 논하는 여섯 편의 글을 열어봅니다. 아는 것이 짧아 쓰기까지 많은 고민과 변경을 거친 끝에 결국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군요. 어려운 얘기인 만큼 많이 부족할 텐데 격려와 질책, 지적과 질문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이 서론에서 잡고 있는 구성을 변경하려면 나머지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하는 것이 좋으니까 의구심이나 반론, 보충할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A.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B. 진실성

C. 배경세계

D. 인물성

E. 이야기 구조

F. 갈등과 의미있는 선택<

G. RPG 특유의 서사성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RPG와 최적 경험 2. (1) RPG인의 게임적 능력

지난번 RPG와 최적 경험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글에서는 최적 경험이 무엇인지, 그리고 RPG를 통해 최적 경험을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일반적으로 필요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완전히 빠져들어 행복하게 몰입하는 플로우 경험을 위해서는 능력과 그에 맞는 도전, 목적성과 그 척도가 되는 피드백, 그리고 집중이 되는 조건이 있으면 유리하다고 하였죠. 이번 글에서는 그 중 첫 번째인 RPG를 하는 능력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원래는 3가지를 한 글에 다 다룰 생각이었지만, 분량이 많아져서 제노시아님 조언대로 첫 번째인 게임적 능력부터 올립니다.)

RPG를 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은 사실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RPG에는 워낙 여러 가지가 들어가니까요. 우선 워게임에서 시작한 놀이인 만큼 전투를 하는 규칙이 RPG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 많고, 실제 플레이에서도 종종 중요한 역할을 차지합니다. 주로 전투를 다루었던 규칙은 AD&D와 같은 시스템을 거치면서 각종 비전투 행동 역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RPG의 게임적 영역, 즉 규칙을 활용해서 노는 것은 RPG 실력과 관련이 깊습니다.

물론 규칙으로 처리하는 영역이 RPG의 전부는 아닙니다. 전투와 기타 판정 이상의 이야기를 원하는 팀도 많지요. 컴퓨터 게임은 퍼즐 게임처럼 전혀 서사가 없는 것도 있지만, RPG는 가장 워게임에 가까운 유혈난무 플레이라도 최소한의 서사적 구조는 있습니다. 이미 이야기가 정해진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이러한 이야기의 전부 혹은 일부는 플레이 중에 즉흥적으로 만들어가지요. 결국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도 RPG의 중요한 부분인 만큼 서사적 능력, 특히 즉흥적인 서사 능력도 RPG를 잘한다고 할 때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을 팀으로서 함께 한다는 것도 RPG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혼자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 한다면 괜히 주사위 굴리거나 칩 돌리느라 난리칠 것 없이 조용히 소설 쓰는 게 낫겠지요. (혼자 노는 시도도 있었지만, 정규적인 것은 아닌 실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RPG에 규칙이 존재하는 의의 중 하나도 서로 다른 의견을 조화롭게 해소하는 장치인 만큼, RPG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놀이입니다. 어떻게 같이 놀고 의견을 조화하느냐 하는 사회성이 중요해지는 것이 RPG입니다. 그러므로 RPG 능력 이야기를 할 때면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며 의견충돌을 해소하는 사회적인 능력을 빼놓을 수 없지요.

이상과 같은 RPG의 양상을 생각해 보면 RPG에 중요한 능력은 크게 게임적 능력, 서사적 능력, 그리고 사회적 능력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느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하는 강조점은 놀이의 성격이나 팀의 취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전투 중심 플레이라면 게임적 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이야기가 중심이라면 서사적 능력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점이 어느 쪽에 있든 저 세 가지 능력 모두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므로 이 세 가지는 어떤 RPG를 하든 필요한 공통 분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능력을 차례대로 다루고, 마지막으로 RPG를 하는 실질적인 주체인 팀의 능력을 논한 후에 시리즈 2편을 마치겠습니다.

(1) 게임적 능력

RPG는 게임입니다. 게임만이 아니고 서사적인 요소도 있지만, 게임의 요소 역시 있지요. 그레그 코스티캔의 정의 (영문 PDF 링크)를 빌리자면,
게임이란 목표를 위해 장애를 극복하도록 요구하는 가상적이고 역동적인 구조입니다.(주:정의는 글 24페이지에 나옵니다만, 전체 다 읽을
만합니다.) RPG에서 장애 제시와 극복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RPG를 역할극이나 즉흥극과
구분하는 요소, 바로 규칙 내지 룰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던젼 모험물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을에 도착한, 혹은 주점에
죽치고 있는 모험가 일행에게 마을 장로, 혹은 로브를 입은 수상한 사내, 혹은 아름다운 아가씨 등이
의뢰를 제시하는 것은 게임의 큰 목표를 제안하는 서술입니다. 물론 그것이 유일한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개별 인물과 그 참가자는 보물을 훔쳐 달아난다, 이번에는 레벨을
올린다, 돈을 벌어 장비를 산다, 아가씨를 꼬신다 등등 다른 목표를 설정하기도 하고, 다른 장단기적 목표도 공존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이런 선택지를 제시한다면 어떨까요. “의뢰를 수락할래 거절할래?” 그리고 수락하면 바로 “임무 성공이다! 경험치와 돈을 챙겨요 짠짜라짠~” 뭐, 이렇게 한다면 쉬워서 좋긴 한데 뭔가 허전하지 않을까요. 결국 목표 달성 그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는 것은 달성에 장애가 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지요. 함정을 해체하든, 괴물과 싸우든, 리치퀸을 유혹하든 목표를 위해 도전이 되는 장애물을 극복해야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 형태의 RPG에서 진행자는 이러한 장애물을 제시하고, 참가자는 자신이 제어하는 인물을 통해 이들 장애물을 극복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모두 실제가 아닌 가상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놀이 속의 주인공 일행이 칼을 휘두르고 함정을 해체하는 것이지, 현실 속의 참여자가 하는 것이 아니지요. 또한, 퍼즐과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상태가 역동적으로 변하며 달라집니다. 오크의 HP가 닳는다든지, 상처를 입어 성난 트롤이 돌진을 해온다든지 해서 게임의 상태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입니다. 진행자이든 참가자이든 RPG를 하는 사람은 이렇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게임으로서의 RPG를 잘한다는 것, 즉 RPG의 게임적 요소를 잘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위에 나온 게임의 정의로 돌아간다면, 게임의 역동적인 구조 내에서 장애를 극복해 목적을 잘 달성한다면 게임으로서의 RPG를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이전에 바바 히데카즈가 말했듯 규칙이라는 구조 내에서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게임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게임적 능력을 키우는 데는 우선 게임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입니다. 어떤 의사결정이 좋은지 나쁜지는 그 의사결정을 하는 이유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RPG는 특히 보드게임과는 달리 목적을 참여자가 스스로 설정하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이 목표는 종종 다층적이고 서로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목표를 설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좋은 목표를 설정하였다면 다음은 그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설정하고 극복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게임의 요소들 (능력치, 판정방식 등)에 대한 이해와 게임의 상태가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양상 (생명점이 깎였을 때의 효과 등)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겠지요. 차례대로 이들 능력을 다루어보겠습니다.

RPG 속에서 규칙이라는 구조 속에 달성하려는 목표는 무수히 많고, 또 다층적입니다. 놀이 내적으로는 눈앞의 오크와 드래곤을 때려잡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고, 아가씨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지요. 진행자나 참가자와 그들이 제어하는 인물의 목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드래곤의 목적은 이 건방진 모험자들을 구워먹는 것일지 몰라도, 드래곤을 제어하는 진행자의 목적은 아마도 모험가 일행이 적당히 고전한 후 승리해 경험치와 돈을 획득하는 것이겠지요. 그 외에도 최종 목적과 중간 목표, 원래의 목표와 파생하는 목표, 거시적 목표와 미시적 목표, 장기적 목표와 단기적 목표 등등 온갖 서로 엇갈리는 목표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렇게도 목표란 많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과연 좋은 게임적 목표란 무엇일까요? 우선 도전이 될 만큼 어려운 장애물을 끌어들이는 목표여야겠지요. 너무 쉬우면 달성하는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능력으로 달성할 수는 있는 목표여야 할 것입니다. 너무 벅차서 달성할 수조차 없다면 장애물이 없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입니다. 특히 터무니없이 강한 적에게 주인공이 쩔쩔매고 있는데 영웅적인 조연이 나타나 다 해결한 경험이 있는 참가자라면 ‘주인공 자신’의 노력 없는 목표달성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진행자는 참가자에게 적절한 도전을 제시하고, 참가자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 게임적 목표의 핵심입니다.

목표를 설정했다면 그 목표를 향하여 진행자는 장애물을 운용하고 참가자는 이를 극복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 게임의 요소를 규칙으로 표현해서 영웅이면 영웅, 오크면 오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상황에 부딪히면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판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필요한 것은 게임적 의사결정이지요. 힘과 지혜 중 무엇을 올리는 것이 좋은가, 적을 밀어붙이는 것이 좋은가 후퇴하는 것이 좋은가 등등,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진행자와 참가자 모두 마찬가지로 RPG의 재미이자 어려움입니다.

물론 목표 설정과 의사결정에는 게임적 고려사항 말고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위에도 논했듯 RPG는 서사구조를 이루고 있는 만큼 이야기에 대한 고려도 필요합니다. 또한, 다른 참여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인지, 타인의 재미에 누가 되지 않을지 하는 사회적인 면도 고려해야 하지요. 이들 측면은 서사적, 사회적 능력을 다루면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게임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려면, 그리고 장애를 극복해 달성하려면 플레이하는 RPG 규칙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정도 수준의 목표와 장애물이 도전이 될지, 그리고 어떤 것이 좋은 의사결정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따라서 게임으로서의 RPG를 하는 실력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규칙에 대한 지식입니다. 규칙은 의사결정의 배경 내지 구조를 제공하고, 규칙의 방향성에 따라 같은 의사판단도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투에 이기고 오래 살아남는 인물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규칙을 보면 전투 중 치명상을 입기 쉬운 규칙이라면, 인물의 공격력보다는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 상대적으로 좋은 선택일 것입니다. 반면 같은 목적인데 인물이 잘 죽지 않고 쉽게 회복하는 규칙이라면 방어력보다는 공격력을 높이는 것이 좋은 의사판단이겠지요.

규칙에 대한 지식이 이와 같이 중요하다면, 이를 신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규칙을 읽는 것이 으뜸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용 자체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규칙의 지향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떤 선택이 유리한가,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읽으면 그만큼 게임적 실력이 늘겠지요. 또한 그러한 지향성을 파악하다 보면 이 규칙책 자체가 어떤 관점 혹은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감도 생겨서 규칙의 지향성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캠페인을 꾸려갈 수 있습니다. 이렇듯 규칙의 특성과 지향을 파악하는 것은 개별적인 게임적 판단에 대한 미시적인 평가에서부터 어떤 플레이를 할 것인가 하는 거시적인 부분까지 안목을 키워줍니다.

게임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규칙을 익혔다면 다음으로 남는 것은 규칙을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물론 규칙의 내용과 방향성을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에는 이미 읽고 익힌 것이 생각이 나지 않거나 생각한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게임은 위에서 말했듯 역동적인 구조이므로 게임 속 행동에 따라 변하는 상황 (HP가 깎인다, 적이 작전을 바꾼다 등)에도 대응해야 합니다. 이렇듯 상황에 좋은 게임적 판단으로 대응해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역시 경험이 으뜸이지요. RPG는 3번은 돌려봐야 감이 잡힌다는 얘기도 있듯, 규칙은 결국 실제로 적용해봐야 내용도 제대로 익히고, 적용할 때 생기는 오류도 바로잡고, 지향성과 응용 방법을 파악해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RPG의 게임적 능력과 그 능력을 향상하는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게임적 재미는 RPG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함께 즐기는 재미 역시 고려해야 할 테니까요. RPG의 서사성과 사회성은 게임성과 얽혀들어가며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다음은 RPG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력, 즉 서사적 능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