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글이지만 Asdee님의 글 RPG의 캐릭터: 시트, 캐릭터, 플레이어와 함께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엮습니다. 그 글에서 나온 논의의 세 가지 층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 이 글은 참가자 욕구에서 시작해 (플레이어) 인물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독자적인 생명력이 나오고 (캐릭터), 여기에 규칙상의 수치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 얽힌 (시트) 구성이 되겠군요. 덧붙여서 인물의 방향성이 산만하거나, 앞뒤가 안 맞거나, 심심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질적 고려도 들어가고요.
인물은 RPG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대개의 이야기는 인물 군상과 그들간의 갈등에서 나오지요. 그중에서 특히 주인공(PC)은 이야기의 주체이자 참가자가 RPG에 참여할 게임적, 감정적 수단으로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어떤 규칙책이든 주인공의 제작법을 설명하고 있지만, 규칙 외에 극적으로도 효과적인 인물을 만드는 것은 규칙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어떤 인물이 참가자와 진행자 모두 다루고 쉽고, 앞뒤가 맞으며, 능력도 짜임새 있게 넣고 성장시킬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각자 자신의 경험이나 취향에 기반한 해답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인물 설정의 중심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인물이든 캠페인이든 아니면 다른 발상이든 한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지나치게 복잡한 것이 보통입니다. 아니면 스스로 그 중심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개념을 좀 더 명확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한 문장 요약의 출처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구현해보고 싶은 어떤 이미지에서 추출한 것이라든지, 좋아하는 게임이나 소설 속 인물에게 따온다든지. 어쨌든 한 문장으로 요약한 설정은 예를 들면 ‘목장에서 자라난 순수한 소녀’라든지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고아 출신의 비정한 도둑’ 하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이렇게 요약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고,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제작하는 중이라면 어떤 식으로 주인공들이 아귀가 맞거나 갈등할지 토의합니다. 예를 들어 목장에서 자란 순수한 소녀와 고아 출신 도둑은 서로 가치관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사뭇 달라 보이므로 충돌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서로 배경이 판이하게 다르므로 서로 능력과 약점을 보완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소녀가 아무나 덥썩 믿으려고 한다면 도둑 쪽이 ‘야 이 촌X아!’ 하면서 경고해줄 수도 있고, 반면 도둑이 믿어야 할 사람도 못 믿어서 문제가 생긴다면 소녀 쪽이 잔소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문장 요약에 충분히 만족하면 여기에 살을 붙이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우선 필요한 것은 설정의 확장. 목장에서 자라났다면, 어디에 있는 목장? 기후는 어떤 곳? 인심은 어떤 곳? 목장의 경제사정은 어땠으며, 그것이 소녀의 가족과 소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은? 등등. 또 도둑 쪽은 어떻게 고아가 되었는지? 고아가 되고서는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어떤 분위기의 도시에서 자라났는가? 하는 식으로 질문을 통해 설정을 더욱 구체화하고 다듬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개별 설정을 규칙으로 어떻게 구현할지 메모하면 더욱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죠.
이 확장 단계에서는 자칫 설정이 중구난방이 되기 쉬운 만큼 위의 한문장 요약이 초점 역할을 합니다. 즉, 원래의 중심 설정에 비추어 이것이 과연 필요한 설정인지 판단해 보며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뒷골목에서 자라던 도둑이 대마법사의 눈에 띄어서 제자가 된다는 설정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원래의 설정과는 꽤 달라지게 됩니다. 그게 이 인물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바와 일치하는지, 너무 지저분하게 설정이 늘어나서 설정의 색채를 흐리지는 않을지 고려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위의 한 문장 요약입니다. 처음에 도둑으로 생각했는데, 마법사로 바꿀 것인가? 아니면 마법사이면서 도둑? 둘 다일 필요가 있을까? 아예 설정을 고칠까? 등등.
마찬가지로 한 문장 요약은 몇 가지 가능한 설정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데도 유용합니다.목장에서 자란 소녀가 어느날 떠돌이 검술사범이 집에 묵어가는 동안 그에게 검술을 배웠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양떼를 위협하는 짐승들을 쫓아내려고 돌팔매질을 잘하게 되었다는 게 원래의 한 문장 요약에 좀더 어울릴 테니까요.
이렇게 확장을 하고, 그 확장한 설정에서 유추해서 또 내용을 만들고, 이 모든 설정의 필요성을 한 문장 요약에 비추어 판단하고 나면 왠만큼 자세하면서도 방향성이 있는 설정이 생겼을 것입니다. 여기쯤에서는 다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아니면 아직 좀 심심한가?
이 판단을 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방향성이 확실한 설정은 일관성과 개성은 있지만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굉장히 복잡다단하기 마련이라 한 가지 면모만 존재하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아무리 아무도 믿지 못하는 도둑도 정말로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만 똘똘 뭉쳐있다면 숨막힐 수 있고, 아무리 순진한 시골 처녀도 이슬만 먹고 산다는 듯 청정하기만 하면 인물이라기보다는 캐리커쳐가 됩니다.
그래서 위의 설정 확장 과정을 통해 좀더 다양한 질감을 끌어내는 것이지만, 때로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충분하다고 느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한 문장 요약과 오히려 반대인 설정을 추가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의 도둑은 사람을 잘 믿지 못하지만 자기 구역에서 구걸하는 눈먼 노파는 믿는다든지, 우리의 목장 아가씨는 마냥 순진해 보이지만 사실은 도시로 도망갈 자금을 모으려고 장에서 가축 판 돈을 아버지 몰래 떼어먹고 있다든지. 이와 같이 한문장 요약에 반대되는 설정을 추가하면 인물에게 의외성과 다면성, 그리고 흥미로운 갈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도 아직 인물이 완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인물의 방향성과 일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대되지도 않는 설정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자칫 인물의 방향성이 산만해지기 쉬우니 많이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추가하면 설정을 더욱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죠. 왠만해서는 위의 설정 확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설정을 만들고 나면 최종 점검을 합니다. 우선 앞뒤가 안 맞는 데는 없는지 봅니다. 위의 설정 확장 과정을 논리적으로 했다면 크게 어긋나는 부분은 없겠지만, 부분을 볼 때와 전체를 볼 때의 관점은 또 다르니까요. 목장에서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라난 아가씨가 집안일은 전혀 할줄 모르고 피아노와 하프는 기가 막히게 연주한다면 뭔가 수정이나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이 인물이 규칙과 캠페인의 성격에 비추어 효과적인지도 중요한 점검 내용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미 설정의 한 문장 요약에서 대부분 파악할 수 있지만, 점검 단계에서 또 한번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캠페인에 꼭 필요한 능력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거나, 전혀 필요없는 능력만 많이 배운 설정이라거나 하면 수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물에게 목적 내지는 바람이 있는지도 검사합니다. 보통 목적은 설정 내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설정과 캠페인을 감안해 단기 목표 한 가지와 장기 목표 한 가지 정도를 넣는 것이 무난하다고 봅니다. 주인공들의 목적은 진행자가 캠페인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참고사항 중 하나이며, 참가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도구이기도 하니까요.
이 목적이 캠페인에 어울리며 다른 주인공들의 목적과 어느정도 조화하는지도 확인합니다. ‘평생 아무 위험도 없이 평온하게 늙어가고 싶다’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자 열망인 주인공은 대개의 캠페인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이는 인류 공통의 소망이기도 하지만, 위험과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할 만큼 큰 바람이 없는 인물은 보통 모험을 하지 않으니까요. ‘반지의 제왕’의 예를 들자면 빌보와 프로도는 둘다 소박하고 먹기 좋아하는 호빗이었지만 빌보는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모험욕에 이끌려 위험한 여행을 떠났고, 프로도는 자기 신변과 중간계에 대한 위협 때문에 여행을 떠났듯이요.
주인공의 목적은 서로 어느 정도 공존 가능한 것이 좋지만, 충돌 역시 극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주인공들이 서로 적일 수밖에 없는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꽤나 특이한 캠페인이 아닌 이상 바람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충돌하는 목적을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어느 시점까지는’ 협력해야 하거나 협력할 수 있는 목적을 설정한 뒤, 그 목적들이 더이상 상호 공존할 수 없는 시점을 캠페인의 종결 내지 절정부로 만드는 정도겠죠. 예를 들어 A와 B는 모국을 외적에게서 되찾고자 협력하지만, 일단 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왕당파인 A는 왕실을 부흥시키려 하고 공화파인 B는 선거를 통해 민주정을 확립하려고 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
모든 설정을 마치면 이 설정을 규칙으로 구현해서 시트로 옮기면 됩니다. 게슈탈트적 제작이라면 설정을 구획화만 해서 거의 그대로 시트로 옮길 테고, 분석적 제작이라면 조금 더 해석이 필요할 것입니다.(주:게슈탈트적 제작과 분석적 제작 참조) 시트 기입 단계에서도 한 문장 요약을 참조해서 방향성에 맞는지 확인하고, 또 설정과도 어울리는지 확인하면서 하면 더욱 좋겠지요. 전술적 효율성을 확보하면서 설정이 달라질 수도 있는 등 (‘돌팔매질은 너무 피해가 안나오는걸. 아버지가 퇴역 군인이라 딸한테 검술도 좀 가르쳤다는 건 어떨까?’), 설정과 시트 기입은 서로 다양하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이상 적은 것은 주인공을 제작할 때 대체로 제가 거치는 과정을 풀어서 쓴 것일 뿐, 실제로 이 일련의 과정들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생략되거나 순서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취향이나 캠페인의 필요에 따라 주인공 제작법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먼저 시트부터 시작한 후 그에 맞는 설정을 만들기도 할 테고, 캠페인의 내용을 먼저 정한 뒤 이에 맞는 설정을 짤 수도 있는 등 방법은 다양합니다. 여기 나온 것은 수많은 접근 중 하나일 뿐이지요. 어쨌든 흥미로운 주인공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다룬 방법은 주인공(PC)에 대한 것이지 조연(NPC)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조연과 주인공을 만드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조연 제작에 대해서는 기회가 난다면 차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