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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과 석양의 도시 – 6화: 수사와 의혹

본편 6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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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플로리앙 피습 사건 이후 하쉬르는 직접 발로 뛰며 배후를 찾습니다. 수소문한 끝에 그는 팔레오로고스 혹은 노타라스 가문의 개입이 있다는 단서를 잡고 플로리앙과 라이산드로스에게 알리지요. 라이산드로스는 스틸리안느 팔레오로가 혹은 플로리앙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는 이올라스 노타라스를 의심합니다. 주인공들은 에이레네의 건강 회복에 대한 기쁨과 그림자 속에 숨은 적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는 저녁을 함께 보냅니다.

감상

1. 하쉬르 수사반장의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2. 스틸리안느 뒷배경을 언급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악녀 만세.

3. 전체 맥락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묘사들이 개인적으로 재밌었습니다. (잠꼬대하며 뒤척이는 아리칸, 라이네 연회장 등.)

4. 여전히 개별적으로 노는 감이 있지만 당분간은 이 진행으로도 괜찮을 것 같군요. 이렇게 하다 2부로 가면 보조 주인공을 만들면 되겠지요. 3부 가면 완전 군상극이고…

5. 캠페인에 대한 열정이 좀 돌아왔습니다. 상담해준 아군에게 감사.

여명과 석양의 도시 외전 – 하비브의 제안

오체스님이 로그를 정리해주셨습니다.

요약
사란티움에 억류된 마르얌 문제를 논의하고자 마르얌의 사촌 하비브는 마르얌의 약혼자인 아미르 황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아미르의 어머니 키네니아의 사람인 시녀장 세헤라자드가 하비브를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종장 카림의 제보로 아미르는 직접 나와 하비브를 맞아주고, 하비브와 아미르는 점잖은 신경전을 벌입니다. 약혼을 유지한 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은 아미르와 성혼을 시키고 싶은 하비브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대립한 끝에 하비브는 아미르가 마르얌을 되찾는 사절로 가서 사란티움에서 혼인을 올리고 마르얌을 세레니아로 옮기는 방안을 제시하지요. 아미르는 생각해보겠다고 합니다.
감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사회판정을 해보았는데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 갈등에 리듬감과 긴장감이 생기는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인물에게 중요한 결정을 판정으로 강요당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끝까지 판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초기에 틀을 좀 잡고서는 나머지는 그대로 흘러가게 두었지요.
판정에 대해 묘한 점이라면, 어차피 하비브가 수치상 유리한 판정이라 질 걸 알면서도 판정에 지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조연을 잡은 제가 그렇다면 오체스님은 더 그러셨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RPG의 게임적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였습니다. 어차피 판정에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면, 지는 데서도 게임적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판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더 중요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승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무도 기분 상하지 않고 다들 재밌으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요즘에 플레이할 때 저는 참여자라기보다는 관망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묘한 기분입니다. 참가자들이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인데 저는 먼발치에서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요. 캠페인은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제 취향에도 맞는 복잡하고 정서적인 이야기인데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제가 낄 자리가 별로 없다는 느낌? 어떻게 하면 저도 캠페인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여명과 석양의 도시 – 초기 자료와 구상

새로 시작할 이름만 바꾼 콘스탄티노플 배경 캠페인은 일단 ‘여명과 석양의 도시’라고 부르겠습니다. (줄이면 녀석도 (??)) 유럽에서 보면 동쪽, 아시아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 두 대륙 사이의 도시라는 점에서 붙여본 이름입니다. 한편 원래 역사에서 오스만 제국의 정복은 쇠락기의 콘스탄티노플이 저무는 동시에 새로 떠오르는 계기였다는 점도 있고요. 캠페인 상에서는 누구에게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 끝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요.

일단 우리의 영원한 호프 위키피디아에 이렇게나 좋은 지도가 있군요! (열광) 전쟁의 배경은 콘스탄티노플만이 아닌 만큼 주변 지역도 중요하겠지만요. 오스만 정복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전에 주변 지역을 먼저 점령해서 보급과 교통을 끊어놓은 만큼 콘스탄티노플 외곽은 2부의 중요한 각축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자료가 있으면 사용하고, 없거나 마음에 안 들면 만들어내면 되겠지요.
역사서로는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가 평도 좋고 푸짐해 보이네요. 읽는 게 필수는 아니지만 저는 빌려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역시 역사물이 아닌 역사 판타지물을 하는 것이니만큼 반드시 실제 역사에 충실할 필요는 없고, 재밌어 보이는 부분만 취하도록 하죠. 어쨌든 우리 캠페인 배경은 절대 비잔티움이 아니라 사란티움이므로 역사적 정확성을 논해도 무의미한 겁니다. (당당)
역사 (판타지) 소설로는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가이 게이브리얼 케이의 사란티움 모자이크 시리즈에서 이름을 많이 따올 것 같습니다. 전 이 책 못 구하겠어서 책값의 6배에 달하는 배송료 내고 헌책으로 샀습니다..ㅠ_ㅠ 케이는 좋아하는 작가기도 하고요. 일일히 다 이름을 바꾸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니 주요 역사적 인물이나 국가명 정도만 살짝씩 바꿔도 무난하겠죠.
또 유용한 자료나 다른 제안 있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큰 캠페인을 수 개월 내에 끝내려면 준비가 중요하니 지금부터 슬슬 얘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일요일 아침을 위한 제안 – 역사 판타지

승한군, 석한군, 아군하고 6월부터 함께할 캠페인에 대한 한 가지 제안입니다.

지구가 하나의 국가였다면 그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일 것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지금까지 나온 일요일 아침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캠페인 제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죠.

– 신나는 낭만 활극물 (로키)
– 대하 서사물 분위기 (석한)
– 다문화적 분위기 (승한)
– 15세기 이스탄불은 어떨까염 (아군)
– 휘번뜩! (로키)

군주의 권좌, 대륙의 다리, 바다의 연인, 열강의 전장, 만민의 우상, 아름답고 잔혹한 그대 비잔티움, 그대 콘스탄티노플, 그대 이스탄불이여!

위 모든 제안을 합치는 방법으로 이스탄불 배경으로 일요일 아침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특히 도시의 주인이 바뀌는 격동기를 중심으로 말이죠.

다만, 역사물 그대로 하면 아무래도 실제 역사에 대한 부담이 있으므로 살짝 벗어나서 매우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름은 다른 역사 판타지로 가면 어떨까 합니다.

구체적으로 제안한다면 판타지 작가 가이 게이브리얼 케이가 비잔티움을 본딴 도시, 사란티움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풍부한 역사적 자료는 활용할 수 있지만 자유도는 극대화하도록 말이지요.

사란티움 모자이크 시리즈 외에도 ‘알-라산의 사자들’과 ‘태양의 마지막 빛’의 배경인 케이의 역사 판타지 세계에는 태양신 쟈드를 숭배하는 쟈드교 (유럽 문명·기독교 모티프), 별을 숭배하는 아샤르교 (이슴람교·중동 모티프), 두 달을 숭배하는 킨다스교 (유대교 모티프) 세 문명과 종교가 공존합니다. 때로 협력하고, 때로 서로 정복하고 전쟁하면서 말이죠. 그 외에도 다양한 국가와 도시 국가가 세력권을 이루고 있지요.

비잔티움 역사에서 특히 흥미가 가는 두 시기라면 첫째는 13세기 초에 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 정복한다더니 엉뚱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한 사건입니다. 라틴 제국을 세워 비잔티움을 60년이 채 못 되는 시기 동안 다스렸다가 비잔티움 망명 귀족 라스카리스 가문에 결국 멸망했죠.

둘째는 역시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넘어가 이스탄불이 된 15세기 중반입니다. 샤리아 법에 따라 세 번 항복을 권고하는 술탄 메흐메드 앞에 중과부적인 것을 알면서 끝까지 거부하다 죽어간 콘스탄틴 황제, 48일 동안의 치열한 수륙 공방전, 술탄이 직접 설계했다는 공성 병기, 불타는 비잔티움의 전함! (와와) 결국 술탄은 함락된 콘스탄티노플에 당당히 입성해 이스탄불이라 명명했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이스탄불에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열었죠.

역사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역사 판타지인 만큼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치면 어떨까 해요. 구체적인 제안이라면…

세 참가자의 주요 주인공은 각각 다른 세력권 출신입니다. 예를 들자면 서방 쟈드교 사제 기사, 사란티움의 동방 쟈드교 귀족, 나흐만 제국 아샤르교 상인의 아들, 그 외에 킨다스 교도 의사라든가, 중앙 대륙의 기마부족 용병이라든가… 셋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대립하기를 원한다면 동·서방 쟈드교나 아샤르교 세 주요 세력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좋겠고,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주요 세력에 붙어도 좋다면 소수민족 출신도 좋습니다. 만약 세 참가자 중 하나가 소수민족을 고른다면 서방 쟈드교 쪽은 빠지고 사란티움과 아샤르교 제국 (나흐만 제국?)만의 대립으로 해도 되겠지요.

캠페인은 크게 1, 2, 3부로 나눕니다. 1부에서는 세 주인공이 평화로운 사란티움의 다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친구가 됩니다. 그러면서 일행으로서 모험과 음모를 함께 헤쳐가지요. 그 와중에도 사란티움을 둘러싼 주변 세력의 알력은 점점 심해집니다.

2부에서는 세 주인공은 각자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못하고 운명과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흩어집니다. 이미 적이 되었을 수도 있고, 다시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고 기약했을 수도 있을 테고요. 여기서 세력 구도에 따라 주인공 중 두 명 정도는 같은 편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1부의 일행이 갈라진 상태에서 두 혹은 세 진영을 번갈아 진행하게 되므로 모두 각 진영에 속한 보조 주인공을 만듭니다. (1부의 조연을 가져다 써도 되겠고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A, B, C라면 A가 속한 진영 이야기를 진행할 때는 B와 C의 참가자는 A의 친구, 친척, 부하 등인 A1과 A2를 맡습니다. 마찬가지로 B 진영 이야기 때는 C와 A의 참가자는 B1, B2를 맡겠지요. 둘 이상이 같은 편이 된다면 그에 맞추어서 하면 되고요. 만약 세 사람이 다 같은 진영에 들어가게 된다면 보조 주인공은 필요없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같은 편이라도 서로 다른 곳에서 활약한다면 보조 주인공을 활용하게 되겠죠.

3부에서는 2부에서 점점 높아진  갈등이 폭발해 마침내 사란티움을 두고 전투가 일어납니다. 참가자가 서로 다른 편으로 갈라졌다면 참가자끼리 대규모전을 벌이고, 모두 같은 편이 되었다면 진행자에 대항해서 싸웁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 선호.) 전자 쪽이라면 친구였던 주인공들이 전장에서 마주쳐서 싸울 수도 있겠고, 대면하지는 않은 채 치밀한 두뇌싸움을 벌일 수도 있겠지요. (칼로 대화가 아니라 군대로 대화?) 원한이 깊어갈 수도 있겠고, 전쟁 와중에도 서로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겠고요.

대규모전도 규칙을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세기의 혼으로 군대를 만들어서 하면 어떨까도 생각합니다. (이전에 구상했던 군사물의 연장선이겠군요.) 임무에 성공하면 ‘보급이 끊겼다’ 면모를 상대에게 부여한다든지, ‘새로운 공성병기’ 면모를 자기 군대에 부여한다든지요. 그리고 사령관의 명령과 실제 그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 사이에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해서 입체감을 살리고… 물론 주인공의 행동도 대규모전 판정에 영향이 있겠죠. 대규모전 규칙은 1부 때부터 소규모로 꾸준히 실험하면서 완성해가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란티움의 거취가 결정이 나면서 이야기를 끝맺고, 마지막 에필로그로 캠페인을 끝내면 되겠지요. 전체 길이는 석한군 제안대로 3~4개월 정도로 해서 각 부를 1개월 내지 5주 정도로 끝내면 될 것 같습니다.

세 분은 의견이나 제안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제가 생각하기에 대규모 활극/역사/서사물을 하기에 좋은 구조이지만, 같은 구도를 다른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옮겨도 얼마든지 되겠고요. 아아, 이렇게 써놓는 것만으로도 전 잔뜩 기대가 되네요.

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5) – 무의식과 감

진행 (마스터링)을 하다 보면 아귀를 맞추느라 걱정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사건이 맞아떨어지는지, 인물의 동기에 비추면 이런 행동이 앞뒤가 맞을지 등등. 그래서 진행에는 종종 시나리오를 만들거나 앞으로의 진행에 대해 미리 합의하는 등의 준비가 들어가지요.

제가 한 가지 느낀 점이라면, 때로는 미리 앞뒤 맥락을 다 맞추기보다는 감으로 일단 질러놓고 나중에 맞추는 것이 효과가 좋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냥 이 인물은 왠지 주인공 일행에게 숨기는 게 많은 게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런 RP를 한 후 나중에 적 스파이였다고 아귀를 맞춘다든지, 주인공 일행에 대한 습격 장면을 많이 진행하고 나서 주인공 일행의 짐에 누군가 보물을 숨겼었다고 이유를 만들어낸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 그 이유는…’ 하는 부분은 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일반적이고, 실제로 저도 준비해놓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인물 중심 진행을 위해 인물을 미리 준비해놓을 때 조연 (NPC)의 동기, 이미 해놓은 행동 등을 준비해놓는 방식으로 하지요.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저런 부분을 다 준비하지 못하는 일도 있고, 준비하지 못한 인물이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부각되는 일도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놓은 사건이 막상 부딪쳐 보니 재미없거나 앞뒤가 안 맞는 일도 있지요.
그렇게 어떤 이유로든 준비가 없는, 혹은 준비한 게 별 소용이 없는 상황에서 감에 의존하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보다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으니까요. 이 인물은 주인공을 싫어할 것 같다, 혹은 지금은 강에 시체가 떠내려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감에는 보통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고요.
미리 질러놓은 사건이나 RP를 나중에 끼워맞추는 게 어렵지 않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규칙과 이유를 만들어내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별 상관 없어보이는 사건마저도 서로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죠. 현실에서는 그게 진짜 인과관계이느냐에 따라 과학부터 미신까지 결과는 가지각색입니다만, 허구인 RPG에서는 편리합니다. 조연이 주인공을 싫어한다면 왜 그런지, 강에 시체가 떠내려왔다면 왜 그런지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일단 감을 믿고 사건을 질러두면 진행자 자신의 두뇌가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분주히 움직일 뿐만 아니라 참가자도 이유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후 (그리고 참가자에게 귀기울인 후) 그 중 가장 재미있고 앞뒤가 맞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조연이 주인공을 싫어하는 것은 주인공이 그의 형을 죽여서이고,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온 건 상류에 있는 도시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있어서이고… 등등.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논리와 사전 준비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감이야말로 진행자 최고의 자산이라는 점입니다. 참가자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지만, 참가자가 ‘내 주인공은 이렇게 행동할 것 같아’ 하는 감으로 움직이기는 비교적 쉬운 반면 진행자가 그렇게 자기 감을 믿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진행자 역시 자신의 감을 믿었을 때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질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저의 지론이지요.

플레이하듯 마스터링하기: 인물 주도형 RPG

1. 태초에 인물이 있었으니

다른 놀이와 구분할 수 있는 RPG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여럿이서 하는 놀이, 대화로 하는 놀이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재의 목적상 제가 주목하고 싶은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RP로 하는 놀이라는 점. 즉, 직접 인물의 입장이 되어서 하는 놀이라는 특징입니다. 이 점은 참가자 (플레이어)든 진행자 (마스터)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인물에 대한 몰입도나 주목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RPG는 참여자 전원이 자기 담당 등장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직접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인물 중심적인 놀이입니다.

두 번째 주목할 만한 RPG의 특징은 직접 인물의 입장이 되는 RP가 실질적으로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인물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는지 정함으로써 공동 서사의 방향을 결정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RPG의 역동성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종합해보면 RPG의 참여자는 인물에 대한 서술을 통해 놀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한다는 명제가 나옵니다. (포괄적인 설명으로는 이전에 쓴 서술권 글 참조.) 마왕이 공주를 납치하는 것은 인질을 확보하려는 작전이고, 공주가 일부러 납치당한 것은 마왕을 암살하기 위해서이고, 용병이 공주를 구하러 가는 것은 돈이 필요해서이고… 하는 식으로 대개의 이야기는 인물의 행동과 결정, 동기가 맞물리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고, RPG에서는 그 인물을 참여자들이 직접 제어합니다.

참가는 보통 진행보다 쉬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가자는 자신의 인물을 움직여서 진행자가 제시하는 사건에 반응하면 되니까요. 반면 진행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작업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참가자가 반응할 사건을 제시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나아갈지 생각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RP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면 실은 진행도 참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작업입니다. 담당하는 인물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고, 직접 등장하지 않고 막후에서 움직이는 인물도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그 외에 엄밀히는 인물이 아닌 자연현상 등도 움직인다는 차이도 있지만, RPG 속의 서사를,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끌어가는 것은 역시 등장인물들입니다. 그게 왕이든 괴물이든 말이죠.

그렇다면 진행 역시 참가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참가와 다른 점에 대해 대응하면 참가를 하듯이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시나리오를 미리 짜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이 말이지요. 그에 더해 시나리오를 미리 짰을 때와는 또 다른 예측불허의 재미를 느낄 수 있고, 흡사 참가자가 느끼는 재미처럼 자신의 인물로부터 이야기가 나오는 묘미도 있습니다. 즉흥성이 있는 만큼 참가자의 선택도 더 의미 있게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2. 준비와 논의: 천을 짜기 시작하다

인물 주도적으로 플레이를 끌어가려면 무엇보다 준비와 논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참여자가 맡은 인물을 이해하고 흥미도 느끼는 것이 중요해지니까요. 인물이 주도적일수록 모든 인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플레이 자체의 재미에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인물은 같이 앉아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차선책으로는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면서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요. 각자 따로 만들어오면 특히 참가자들은 어떤 인물을 만들어야 할지 막막하기 쉽고, 또 능력이 중복되는 것과 같은 문제도 생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 간 응집력이 떨어져서 인물 주도적으로 통일성 있는 서사를 꾸리기 어려워집니다. 서로 같은 방향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십상이니까요.

따라서 인물 주도형 캠페인을 준비할 때는 인물을 같이 만드는 것에 더해서 되도록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서 인물 배경과 특징도 함께 만들어갈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인물을 같이 엮고요. 나는 전사를 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나는 워로드가 어떨까, 얘네는 맨날 티격태격 싸울 것 같다, 이런 능력을 넣으면 서로 보완이 되겠구나, 어떤 식으로 만났을까, 하는 논의를 거치면서 각 인물은 따로 노는 대신 유기적인 연관이 생깁니다.

이렇게 인물 사이 연관성을 만드는 과정은 주인공 (PC)뿐만 아니라 조연 (NPC)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인물 주도적인 캠페인을 하려면 조연도 진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야 합니다. 진행자가 이미 어느 정도 생각해둔 이야기 틀이 있고 등장시키고 싶은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주인공과 연관성을 만드는 편이 참가자 흥미를 확보하기도 좋고, 또 인물이 끌어가는 극을 만들어가기에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하나가 어렸을 때 마을이 몰살당했다면 누가 몰살시켰는지, 왜 그랬는지 생각해 두고, 그 장본인이나 관련 이야기를 나중에 등장시키면 주인공의 이야기에 완결성을 부여하기 좋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디까지 참가자와 논의를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인지 참가자에게 명확한 생각이 있다면 자세한 논의와 조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그 생각이 너무 확고하고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RPG보다는 소설을 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참가자가 마을 몰살이라는 실마리를 던졌을 뿐 자세히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진행자가 재량껏 설정해서 참가자를 놀라게 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최소한의 논의를 통해 참가자가 싫은 내용이 나오지 않게 조정할 수도 있고요. (“친족이 그랬다는 건 너무 흔한 전개이려나?”) 저는 자세한 논의와 혼자 한 설정, 양쪽 접근 모두 상황에 따라 좋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인물의 이야기와 설정을 캠페인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반드시 과거의 인연으로 얽혀있지 않아도 조연은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야 연관성을 만들기 좋습니다. 내 편이 되어달라거나, 뭔가 해달라거나, 사랑을 받아달라거나, 방해하지 말라거나, 인정해달라거나, 죽어달라거나(..) 하는 것이 그 예겠죠. 아주 단순한 것이라도 조연들이 주인공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야 연관성이 생기므로 조연이 주인공에게 원하는, 혹은 상황에 따라 원할 만한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그 조연은 빼는 게 나을지도요.

이렇게 주인공과 조연 설정을 마쳤으면 진행자는 추가로 약간 준비를 합니다. 주요 조연의 동기와 자원, 한계에 대해 생각해본 다음에 그들이 각자의 욕구와 계획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적어보는 것입니다. 참가자가 돌리는 주인공과 달리 진행자가 돌리는 조연은 늘 등장하지는 않으므로 그들이 ‘화면 밖’ 혹은 막후에서 취하는 행동들을 생각해보는 과정으로서, 조연 RP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마왕

동기: 북방의 영토를 두고 왕국과 하는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거한다. 어디가나 차별받고 살해당하기도 하는 마물들을 위한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

자원: 수많은 병력, 국민의 충성, 북방의 일부 영주들이 마왕과 내통하고 있다

한계: 자신의 영토 외에서는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고, 눈에 띄는 수하 대신 동맹이나 고용인을 통해 행동해야 한다.

행동: 북방에 시찰을 나온 공주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았다

주인공 관련성: 주인공인 용사와 아는 사이로, 용사는 마왕과 몇 번이나 싸우고도 마왕의 이상과 사람됨을 봐서 살려준 적이 있다

공주

동기: 전쟁을 빨리 끝내서 왕국을 구하고, 가능하다면 영웅도 된다

자원: 뛰어난 전사이지만 내숭도 뛰어나다. 왕국 내에서 꽤 인기가 좋다

한계: 무모한 성격이며, 왕국을 떠난 이상 혈혈단신이다

행동: 마왕을 암살하려고 일부러 납치당했다

주인공 관련성: 어려서 시골 영지에서 지내던 당시 용사와 함께 검을 배운 동문이다. 주인공이 마왕의 성에 온다면 함께 마왕을 죽이자고 할 것이다



동기: 전쟁을 빨리 끝내고, 경쟁을 물리치고 왕권을 공고히 한다

자원: 자신의 군대, 영주들의 충성, 왕으로서의 통치권

한계: 왕권을 확고하게 세우지는 못하고 있어서 대영주들과 누나 등 경쟁자를 의식해야 한다.

행동: 전쟁에 시달리는 북방 영지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인망이 높은 누나를 북방에 보냈지만, 동시에 그 지역이 위험한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부러 호위를 부실하게 했다. 인질이 잡힌 이상 공개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용사에게 잠입 구출을 의뢰할 것이다. 물론 상당히 많은 보수를 약속하고! 하지만 실제로 공주의 구출이 성공하게 내버려둘 의도는 없어서, 용사가 공주를 구해온다면 배신할 생각.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물쩍 누나를 마왕과 결혼시켜 정적 제거 + 종전 효과를 보려고 한다.

주인공 관련성: 용사의 실패를 바라고 있고, 성공한다면 제거하고 공주는 다시 마왕에게 귀환시킬 생각이다.

물론 이건 단순화한 예시이고, 실제로는 주인공이 여러 명인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둘 이상의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조연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주인공 사이에 연관성이 많을 수록 처음부터 공통적으로 연관이 있는 조연도 많을 테고요.

이렇게 주요 조연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개별적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그로부터 생기는 결과를 포함해 상황을 전체적으로 정리해보고, 주인공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 시작할지 생각합니다.

상황: 공주가 마왕에게 납치당해서 민심이 술렁이고 있다.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면 왕이 누나인 공주를 포함한 정치적 경쟁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한다. 북방의 전황은 교착 상태. 왕은 어서 평화협정을 맺고 싶어하지만 그러려면 상당한 양의 영토를 내주어야 하며, 때문에 북방 영주들의 반발이 강하다. (등등)

시작: 공주 구출 의뢰를 하려는 왕에게 용사가 불려가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 외에 플레이하면서 또 새로운 조연이 생길 수 있으므로 조연 이름 목록을 미리 뽑아 준비해놓으면 좋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하면 이름을 붙여서 조연 기록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면 되니까요.


3. 진행: 나비 효과

일단 시작 상황을 던져주면 주인공은 뭔가 RP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조연의 동기와 이미 한 행동, 자원과 한계 등을 고려해서 반응하는 RP를 하면 됩니다. 왕이 용사에게 공주의 구출을 의뢰하는데 용사가 좀 건방지게 굴면 왕은 불쾌한 표시를 미묘하게 드러낼 테고, 이 점은 나중에 용사에 대한 왕의 태도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지요. 반면 용사가 아주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면 그를 배신하려던 생각이 좀 흔들릴 수도 있고요.

한 세션이 끝나면 조연, 특히 주요 조연의 정보를 수정해서 그 세션의 결과, 그 세션 동안에 무대 위에서 혹은 막후에서 한 행동과 벌어진 사건 등을 정리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

행동: 전쟁에 시달리는 북방 영지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인망이 높은 누나를 북방에 보냈지만, 동시에 그 지역이 위험한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부러 호위를 부실하게 했다. (중략)

1 세션: 용사에게 의뢰해 누나를 구출해달라고 보낸 후 북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영주 크라이스데일 남작에게 전령을 보내 용사의 인상착의를 알리고, 그를 환대하면서도 철저히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주인공 관련성: 용사의 실패를 바라고 있고, 성공한다면 제거하고 공주는 다시 마왕에게 귀환시킬 생각이다.

1세션: 그러나 알현 이후 용사의 정중함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 생각이 다소 흔들리고 있다.

1세션에 왕이 막후에서 한 행동의 결과로 크라이스데일 남작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그 설정을 하면 됩니다.

남작

동기: 입신양명! 영지를 확장하고 이기는 쪽에 줄을 선다. 일단은 좋은 혼처부터.

자원: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영지, 뛰어난 검술, 잘생긴 외모

한계: 영지 외에서는 영향력이 별로 없고, 주변에 강한 영주가 많다.

행동: 반란이나 독립을 모의하는 북방 영주들과 왕 중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하고 있다. 양쪽 사이에 위치한 영지 때문에 어느 쪽이든 최전방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지금으로서는 양쪽 모두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면서 정세를 엿보고 있다.

1세션: 왕에게서 공주 구출 작전에 대한 전령이 오자 역시 양쪽 모두에게 잘 보일 기회를 포착하고 북방의 영주 중 가장 강한 레오딘 공작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세션을 거듭하면서 진행자가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RPG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재미있는 부분, 즉 인물 설정과 인물성 살리기입니다. 이렇듯 인물 단위로 생각하면 그들의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고, 이야기를 딱히 미리 정해둘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쌓인 것을 기반으로 해서 주인공들의 행동에 반응하다 보면 이야기가 생길 뿐이죠. 각 주인공과 조연이 상황에 반응해 행동하며 미래를 알지 못하듯, 진행자도 캠페인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따라서 참가자도 진행자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물을 얼마나 자세히 설정할지, 혹은 인물 외의 다른 것 (장소 등)을 얼마나 설정할지는 그때그때 판단할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성격이란 인물을 RP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생각하므로 설정 한두 마디로 제약하기보다는 그냥 그의 동기와 이익에 맞게 RP하는 편을 선호하지만, 다른 분은 성격을 설정해놓으면 한결 RP하기가 편할 수도 있습니다. 조연의 말투와 성격을 한 번에 알 수 있는 대사 예시 같은 것을 적어놓을 수도 있을 테고요. 마찬가지로 캠페인 성격에 따라서는 자원과 한계 같은 항목보다는 인연과 감정 등이 중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소 등은 특히 맵을 사용하는 전투가 있는 규칙이라면 자세한 설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각적 상상력이 형편없는지라 장소 설정은 잘 못하지만, 그런 부분을 잘 설정하는 분은 장소를 통해 한결 입체적인 표현을 할 수도 있겠죠.

인물과 전혀 상관없는 사건–갑작스러운 폭풍이라든지 지진 등–역시 이야기를 더욱 다채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지역과 세계 설정에서 여기는 폭풍이 잦은 지역, 여기는 가끔 가다 지진이 있는 곳 하는 식으로 생각한 다음에 그 지역에 갔을 때 무조건 폭풍이 온다거나, 아니면 확률을 정해 놓고 (1d6에서 2 이하이면 폭풍이 몰아닥친다는 식) 폭풍을 등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뭐 결국 비는 진행자가 내리고 싶으면 내린다는 게 지론입니다만..(..)

또한, 이런 우연한 사건에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행동에 반응하면서 조연 설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용사가 온다는 전갈을 받았던 남작이 수색대를 보낸다든지, 용사는 생존 판정에 성공해서 동굴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나이든 은둔자와 마주친다든지. 여기서 또 생겨나거나 떠오르는 설정이 있으면 조연 설정에 추가하거나 새로운 조연을 만들면 됩니다.

4. 결론이 있다면…

이상과 같이 인물 중심, 혹은 인물 주도형 진행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1년 반짜리 스타워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며, 저에게는 제법 잘 맞았습니다. 그 캠페인을 하면서 저조차도 앞으로 내용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어서 굉장히 즐거웠던 생각이 납니다. 한편 참가자들도 미래에 대해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을 아니까 자유도에 제약이 적었던 것 같고요.

인물 중심 진행을 요약하자면 준비된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물을 준비한 다음에 준비한 내용을 기반으로 새로운 상황에 반응하는 RP의 연속이지요. 그런 면에서 참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물을 한 사람씩만 다루면 되는 참가에 비해서 인물이 많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모든 방법론이 그렇듯 이것도 만인에게 좋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를 잘 쓰고 필요에 따라 쉽게 변형할 수 있는 분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용하는 규칙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나올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꽤 복잡한 스탯의 적을 준비해야 한다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진행 방식보다는 시나리오 진행이 안정적일 것입니다. 또한, 여러 인물을 가지고 한꺼번에 임기응변을 펼치기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인물 중심 진행을 사용하기 좋은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만들고 참가자 선택에 따라 바꾸는 작업이 어렵거나 재미없는 분, 조연을 비교적 간단하게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분, 그리고 여러 인물 RP를 한꺼번에 즉석에서 하는 게 괜찮은 분. 이런 분이라면 인물 중심 진행이 꽤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용하고 있으실 수도 있고요.

결국 진행자의 스타일이나 욕구가 다양한 만큼 진행 방법도 다양하겠지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 보이면 기존에 진행을 하지 않던 분도 진행을 잡게 될 수도 있고, 기존에 진행을 하던 분도 더욱 편하고 재미있게 진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다양한 진행 방법론이 정리되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막힌다면 다른 길을 찾아라

저번 일일 플레이 뒤풀이 때에 다른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와 비슷한 고충을 느끼고 계신 점이 놀라웠던 기억이 납니다. 두 분 모두 WoD, 겁스 등의 캐릭터 시트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점이 저와 비슷했지요. 시트를 짤 수는 있는데 효과적으로 만들기는 어렵다는 고충을 함께 나누기도 했고요.

그와 관련하여 다른 두 분은 아직 진행 (마스터링)을 맡으신 적은 없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누구보다 규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므로 규칙 운용과 시트 짜기에 자신이 없다면 당연히 맡기 어려울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구르고 깨지다 보면 결국에는 해낼 수 있겠지만, 처음에는 심리적 부담감과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겠지요.
저도 마찬가지로 겁스나 D&D처럼 제가 잘 모르는 규칙이었다면 아마 아직도 마스터링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몇 번 플레이를 한 겁스도 시트를 짜려고 하면 멀미부터 나니까요. 분명히 읽어본 규칙인데도 옆에서 얘기하고 있으면 외계어 같고요. 정도는 덜하겠지만 저와 얘기하신 분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규칙을 플레이하는 것 이상으로 마스터링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저는 RPG를 시작한지 약 6개월 후에 진행질(?)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도 대부분 참가보다는 진행을 맡았습니다. 1년 반짜리 캠페인을 진행해서 종결을 보기도 했고, 수많은 단편과 중편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진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저에게 맞는 규칙으로 진행을 하고, 그런 규칙이 안 보이면 찾아나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규칙을 찾아보라는 바바 히데카즈씨의 글과 각종 RPG를 소개한 존 킴씨의 사이트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진행을 해본 규칙이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였지요.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간단한 규칙, 그리고 서사와 규칙의 밀접한 관계가 서사와 참가자의 서사 제어를 중시하고 복잡한 규칙을 싫어하는 제 취향에 잘 맞아서 성공적으로 캠페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진행자로서 사용한 규칙도 이와 특징이 비슷한 인디 RPG, 내지는 이야기를 규칙으로 다루는 이야기 놀이 (story game)였죠.
결국 진행을 잡기 어렵다면, 혹은 RPG에 흥미가 떨어진다면 답은 ‘난 진행을 못한다’나 ‘RPG는 재미없다’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한다’일 확률이 높습니다. RPG는 워낙 다양성이 풍부한 놀이인지라 특정 형태의 RPG에 재미를 못 느낀다면, 그러면서도 인물성 표현과 사회적 창작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면 아마도 다른 형태의 RPG가 끌릴 것입니다.
RPG에 길은 무수히 많습니다. 어렵다면, 재미를 못 붙인다면, 혹은 권태를 느낀다면 다른 길로 가보면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아니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요. RPG에서 해볼 수 있는 시도에 제한은 없으며, 그것이 RPG의 재미이기도 합니다.

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4) – 외전

긴 캠페인을 하다 보면 참가가 상당히 성실하다 해도 누군가 빠지는 일이 가끔 생깁니다. 이전에 참가자가 빠진 세션이라는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이런 때 플레이를 쉬면 캠페인의 추진력에 심각한 제약이 됩니다. 일단 정기 플레이를 많이 쉴 수록 기억은 희미해지면서 내용의 연결성이 끊어지고, 완급은 늘어지므로 캠페인을 지속하기 어렵게 됩니다.

참가자가 빠질 때마다 플레이를 쉬면 파토가 나기 쉬운 것은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플레이를 쉰다고 하면 사실상 성실하게 참가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기 쉽습니다. 내가 잘 나와도 다른 사람이 빠져서 아무것도 안한다면 플레이에 나간 사람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 결과가 되니까요. 다른 사람의 참석 여부는 제어하기 어려운 만큼 성실하게 참가하는 것만으로는 참가의 목적 (플레이)을 달성하기 어려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라도 빠졌다는 이유로 플레이가 없으면 역으로 성실하게 참가한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이유로 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약속대로 참가한 3명보다 오지 않은 한 명이 더 중요해지고, 그 결과 생기는 박탈감은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이어집니다. 일단 캠페인의 분위기가 감정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면 계속할 동기는 약해집니다.

그런 악영향이 있는 만큼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고, 또 불참이 잦은 참여자가 있다면 빼든지 아니면 매회 나오지 않아도 플레이를 계속할 수 있게 하든지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캠페인을 계속하기는 어려워질 테니까요.

그러나 때로는 글 첫머리에서 말했듯 참가가 전반적으로 성실한데도 가끔 한 사람씩 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미리 연락하고 빠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때는 부재가 잦지는 않으므로 문제는 덜하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이 빠졌다는 이유로 플레이를 아예 쉬면 캠페인에 위와 같은 악영향이 생기는 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내용 연결상 빼고 진행하기는 어려운 일도 많죠.

이럴 때 제 경험상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캠페인 외전 세션입니다. 과거 이야기, 캠페인 세계의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 일행의 또 다른 모험, 심도 있는 대화 등. 외전은 본편 진행에서 잠시 벗어나는 좋은 기분 전환이 되기도 하는 등 단편 진행에서 다룬 다양한 이점도 있으며, 캠페인 세계와 사건을 다양하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캠페인에 깊이가 생기고 풍부해지므로 더욱 추천할 만하죠.

한 사람이라도 오면 본편이든 외전이든 뭔가 플레이가 있다는 것은 성실하게 참가할 좋은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합니다. 남이 잘 참가하는 건 직접 제어할 수 없지만, 스스로 성실하게 참가하면 (그리고 진행자도 그러리라고 믿을 수 있다면) 참가의 목적인 플레이는 어쨌든 이루니까요. 오히려 자신은 참가했는데 다른 참가자가 안 나온다면 개별 세션으로 자신의 주인공을 더 부각시킬 수도 있고, 플레이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누군가 빠져도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세션에 나온 사람에 대한 존중의 표시도 됩니다. 안 나온 사람도 있지만 나온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 플레이를 하자는 표시라는 의미에서요. 아니면 마침 본편이 슬슬 늘어지는데 다른 걸 할 수 있어서 잘 됐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약속대로 참가한 데에 대한 존중, 그리고 캠페인에 대한 열정을 전달하는 만큼 감정적 결속도 강해집니다.

물론 외전을 참가자가 빠진 상황으로 꼭 제한할 필요도 없겠죠. 캠페인에 대한 다각도의 조명, 기분 전환 등 참가자 부재와 상관없는 이점도 크니까요. 외전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주인공을 달리 해서 본편 캠페인과 배경만 같은 별도의 캠페인을 진행할 수도 있고, 규칙이나 매체가 다른 캠페인을 동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편은 채팅 플레이, 외전은 게시판 플레이라든지.)

요약하자면 외전은 참가자의 부재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캠페인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장기 캠페인의 흥미와 완급을 유지하는 데 거의 필수적이기도 하죠. 적극 활용하면 장기 캠페인 운영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3) – 즉흥

RPG 창시자의 기일이 되어버린 GM의 날을 맞아 (?), 그리고 전에 물고기님과 한 얘기에서 생각난 것을 적어봅니다. 어떻게 보면 전에 썼던 많은 글을 재탕한 거기도 하군요.

진행이 어렵다는 얘기를 꽤 보게 됩니다. 실제로 저도 처음 시작할 때 어렵게 느꼈었고, 지금도 참가에 비하면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에는 그래서 진행자 없는 규칙에 부쩍 관심이 늘었고요. 그러나 좀 어렵게 느껴져도 또 굉장히 재미있을 수 있는 게 진행이며, 재미있으면서도 비교적 편하게 하는 열쇠를 저는 ‘즉흥’에서 찾습니다.

즉흥이라고 하면 더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즉흥은 대개의 진행자가 이미 해본 것이며 진행 중에도 계속해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가를 할 때면 즉흥은 당연하게 하죠. 캐릭터 시트와 배경 설정이라는 기본 자료만 가지고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해 인물의 행동을 선언하니까요.(주:물론 이게 어려운 분도 있습니다. 한 해결책으로 전에 질문을 제시했었고요.) 비슷하게 조연 (NPC)이 주인공을 만날 때도 무슨 말을 할까, 무슨 행동을 할까 하나하나 다 각본을 짜는 진행자는 (아마 거의) 없습니다. 성격과 설정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해 서술할 뿐. 이렇게 보면 즉흥 자체는 진행자와도 먼 얘기는 아닙니다.

물론 진행자가 해야 하는 서술의 범위는 개별 인물 단위의 즉흥보다는 좀 더 넓습니다. 수많은 인물 외에 집단, 지역, 나아가서는 세계 자체가 진행자의 서술 범위에 들어가는 만큼 진행자는 참가자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하고, 부담도 큽니다.(주:물론 설정 책임 등을 참가자와 나눌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때는 역할을 어떤 식으로 분담할 것이느냐의 문제가 또 남죠. 참가자가 그런 책임을 원하는지도 팀마다 다를 것이니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물 하나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즉흥적으로 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즉흥이란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리에서 만들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건 다같이 그 자리에서 설정과 상황을 만들어간다면 몰라도 진행자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것을 전제한 플레이에서는 직무유기에 가까우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즉흥은 ‘밑도끝도 없이 즉흥’이라기보다는 ‘준비한 즉흥’입니다. 즉, 인물을 일단 만들어놓고 그 설정에 맞추어 서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전체든, 지역이든, 집단이든 설정을 만들어놓고 사건과 상황–특히 참가자의 선택–에 반응해서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준비한 즉흥’ 방식은 사건의 귀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하고 선택지를 만든다거나 하는 시나리오 방식에 비해 사전 준비 노력이 덜 들고, 참가자 자유도를 살리기 좋고, 무엇보다 진행자 자신도 전개에 따라 놀라게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구성, 개연성, 주제의식, 복선 등도 설정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내적 일관성, 설정을 통해 표현하는 주제, 현재 전개상 미래에 나왔으면 좋겠을 장면 등을 고려해가면서 할 수 있고요.

진행을 즉흥적으로 하면 참가자의 선택으로 곤란해질 일은 없어집니다. 행동 그대로 결과를 주면 되니까요. 예를 들어 공작이 제3 세력에 암살당하는 것과 주인공 일행이 구해내는 것 사이에 선택지를 만들고 준비했었는데 주인공 일행이 공작을 살해해 버린다면 미리 준비한 전개가 틀어질 수도 있겠지만, 미리 만든 설정을 상황에 반응해 움직인다면 주인공 일행은 쫓기는 몸이 된다든지, 사실은 공작의 후계자가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 상황에 따를 만한 결과를 서술하면 됩니다. (이때 뻔해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준비한 즉흥은 시나리오 진행의 보조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준비한 즉흥 방식을 정형화한 좋은 예로는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 나오는 마을 제작 길잡이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무엇이 어디까지 잘못되었는가, 어떤 인물들이 휘말렸는가, 그들이 주인공 일행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주인공 일행이 마을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를 정해놓고 주인공 일행을 이 마을 한가운데 빠뜨려서 상황을 전개하는 것이죠. 승한님이 이 기법을 M&M 플레이에 활용하기도 하신 등, 규칙과 상관없이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기법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리플레이가 없군요! 찰싹찰싹)

그 외에 제가 즉흥을 하는 방식을 정리한 글로는 준비와 진행, 관리가 있고, 즉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참가자의 흥미를 끄는 방식은 신호 중심 준비 방식이 있습니다. 신호 중심 준비와 진행의 구체적인 예로는 영혼의 우물 단편이 있고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이면 좋겠고, 많은 질문과 비판, 반론 부탁드립니다~

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2) – 질문

물고기님과 얘기하면서 떠오른 내용입니다. 물고기님의 질문 내용이자 전에도 몇 분에게 들은 고민은 바로 언제 끼어들고 언제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죠. 그럴 때 참가자와 진행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레이 중 막힐 때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잘 모르겠는 건 물어보면 됩니다. ‘지금 눈앞에 적이 있나요?’ 라든지, ‘주변에 사람이 많아요?’ 혹은 좀 더 추상적으로 ‘우리가 지금 발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인가요?’ 등등. 궁금한 게 한두 가지 사실이 아니라 그냥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선택지를 제시해 주세요.’ 하는 요구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행동에는 무엇무엇이 있나요?’의 변형일 뿐이기도 하고요.

막혔을 때 진행자에게 질문하는 것은 진행자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행자는 (불행히도) 독심술이 없습니다. 따라서 참가자는 헤매고, 진행은 안 나가고, 다들 막막한 게 역력한 상황에서 어떤 점이 잘 전달이 안 되고 있는지, 어떤 정보가 더 필요한지, 어떤 부분에서 행동 선택지를 더 명확하게 해야 할지 진행자가 스스로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진행자의 전달 사항은 진행자 자신이야 완벽하게 이해하죠. 중요한 건 ‘진행자가 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참가자가 이해한다’는 소통 부분이므로 참가자는 이해가 안 될 때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질문이 너무 많으면 진행자의 전달 능력이나 참가자의 이해 능력, 혹은 양자의 소통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 수 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달이나 이해, 소통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드러낼 수 있고 해결도 할 수 있으니까요. 기침을 참는다고 병이 낫지 않듯, 질문이 생기는 원인은 질문을 안 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주의를 기울이고 서로 주의깊게 상대의 대사나 선언, 묘사를 해석하는 집중력은 필요합니다. 전혀 안 듣고 있다가 “마스터,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소리를 연발하는 참가자라면 좀 문제가 있겠죠. 하지만 그럴 때라 하더라도 질문은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스터, 지금 다들 위치가 어떻게 돼요?” 하는 질문이 자주 나온다면 진행자는 위치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는구나… 하는 자각을 하고 고칠 수도 있겠죠.

질문이 쓸데없는 것인 때도 있습니다. “공주를 죽인 건 누구에요?” 같은 질문에 “그게 지금 여러분이 알아낼 일이에요. ㅡㅡ;;” 라는 대답이 돌아올 수도 있죠. 그렇다면 그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플레이 중 과제를 확실히 알았으니까요.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조차 그 대답해줄 수 없다는 사실 자체에 충분한 가치가 있죠.

진행자가 참가자에게 던지는 질문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됩니다. 선언이 불명확할 때 (“사천왕 중 어느 쪽을 공격하죠?”), 행동의 결과가 참가자가 바라지 않는 것일 것 같은 때 (“함정 해체 안하고 들어가나요?”), 플레이가 잘 안 풀리고 있을 때 (“지금 지루한 건 저 혼자뿐?”) 등등. 그러나 진행 방식이 참가자와 상당 부분 정하고 들어가는 의논형이 아니라면, 왠만하면 선언에 불명확한 게 없는 이상 바로 그 행동에 효과를 주는 게 더 긴장감 있다고 보기는 합니다.

이상과 같이 플레이 중 질문의 효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질문이 잘 안 나오는 건 비단 놀이문화뿐 아니라 문화 전반적 현상이기도 한데요, 플레이를 완전히 질문으로 도배할 필요는 없지만 막혔을 때, 막막할 때, 잘 모르겠을 때야말로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아닐까요. 특히 글 첫머리에 언급한, 플레이 중 막막한 일이 잦은 참가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질문을 하는 데 어떤 심리적, 사회적 장벽이 있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하는 논의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