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3) – 즉흥

RPG 창시자의 기일이 되어버린 GM의 날을 맞아 (?), 그리고 전에 물고기님과 한 얘기에서 생각난 것을 적어봅니다. 어떻게 보면 전에 썼던 많은 글을 재탕한 거기도 하군요.

진행이 어렵다는 얘기를 꽤 보게 됩니다. 실제로 저도 처음 시작할 때 어렵게 느꼈었고, 지금도 참가에 비하면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에는 그래서 진행자 없는 규칙에 부쩍 관심이 늘었고요. 그러나 좀 어렵게 느껴져도 또 굉장히 재미있을 수 있는 게 진행이며, 재미있으면서도 비교적 편하게 하는 열쇠를 저는 ‘즉흥’에서 찾습니다.

즉흥이라고 하면 더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즉흥은 대개의 진행자가 이미 해본 것이며 진행 중에도 계속해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가를 할 때면 즉흥은 당연하게 하죠. 캐릭터 시트와 배경 설정이라는 기본 자료만 가지고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해 인물의 행동을 선언하니까요.(주:물론 이게 어려운 분도 있습니다. 한 해결책으로 전에 질문을 제시했었고요.) 비슷하게 조연 (NPC)이 주인공을 만날 때도 무슨 말을 할까, 무슨 행동을 할까 하나하나 다 각본을 짜는 진행자는 (아마 거의) 없습니다. 성격과 설정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반응해 서술할 뿐. 이렇게 보면 즉흥 자체는 진행자와도 먼 얘기는 아닙니다.

물론 진행자가 해야 하는 서술의 범위는 개별 인물 단위의 즉흥보다는 좀 더 넓습니다. 수많은 인물 외에 집단, 지역, 나아가서는 세계 자체가 진행자의 서술 범위에 들어가는 만큼 진행자는 참가자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하고, 부담도 큽니다.(주:물론 설정 책임 등을 참가자와 나눌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때는 역할을 어떤 식으로 분담할 것이느냐의 문제가 또 남죠. 참가자가 그런 책임을 원하는지도 팀마다 다를 것이니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물 하나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즉흥적으로 하라는 것은 무책임한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즉흥이란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리에서 만들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건 다같이 그 자리에서 설정과 상황을 만들어간다면 몰라도 진행자가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것을 전제한 플레이에서는 직무유기에 가까우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즉흥은 ‘밑도끝도 없이 즉흥’이라기보다는 ‘준비한 즉흥’입니다. 즉, 인물을 일단 만들어놓고 그 설정에 맞추어 서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전체든, 지역이든, 집단이든 설정을 만들어놓고 사건과 상황–특히 참가자의 선택–에 반응해서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준비한 즉흥’ 방식은 사건의 귀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하고 선택지를 만든다거나 하는 시나리오 방식에 비해 사전 준비 노력이 덜 들고, 참가자 자유도를 살리기 좋고, 무엇보다 진행자 자신도 전개에 따라 놀라게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구성, 개연성, 주제의식, 복선 등도 설정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내적 일관성, 설정을 통해 표현하는 주제, 현재 전개상 미래에 나왔으면 좋겠을 장면 등을 고려해가면서 할 수 있고요.

진행을 즉흥적으로 하면 참가자의 선택으로 곤란해질 일은 없어집니다. 행동 그대로 결과를 주면 되니까요. 예를 들어 공작이 제3 세력에 암살당하는 것과 주인공 일행이 구해내는 것 사이에 선택지를 만들고 준비했었는데 주인공 일행이 공작을 살해해 버린다면 미리 준비한 전개가 틀어질 수도 있겠지만, 미리 만든 설정을 상황에 반응해 움직인다면 주인공 일행은 쫓기는 몸이 된다든지, 사실은 공작의 후계자가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었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 상황에 따를 만한 결과를 서술하면 됩니다. (이때 뻔해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준비한 즉흥은 시나리오 진행의 보조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준비한 즉흥 방식을 정형화한 좋은 예로는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 나오는 마을 제작 길잡이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무엇이 어디까지 잘못되었는가, 어떤 인물들이 휘말렸는가, 그들이 주인공 일행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주인공 일행이 마을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를 정해놓고 주인공 일행을 이 마을 한가운데 빠뜨려서 상황을 전개하는 것이죠. 승한님이 이 기법을 M&M 플레이에 활용하기도 하신 등, 규칙과 상관없이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기법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리플레이가 없군요! 찰싹찰싹)

그 외에 제가 즉흥을 하는 방식을 정리한 글로는 준비와 진행, 관리가 있고, 즉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참가자의 흥미를 끄는 방식은 신호 중심 준비 방식이 있습니다. 신호 중심 준비와 진행의 구체적인 예로는 영혼의 우물 단편이 있고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이면 좋겠고, 많은 질문과 비판, 반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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