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중심의 캠페인 제작

다음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반쿠에이씨의 Flag Framing 기법과 Conflict Web을 접목시킨 것입니다. (블로그가 사라져서 archive.org 저장본 링크 겁니다. 위에서 7번째, 8번째 글입니다.)

1. 개괄

캠페인 제작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설정에서부터 쌓아올리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실은 주인공 설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자의 관심방향을 보여주는 신호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참가자의 관심방향에 대한 신호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대상 그 자체, 두번째는 일정한 주제의식 혹은 감정선. 첫번째 부류의 예로는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조연이나 장소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주인공의 고향 플레인이라든지,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쌍둥이 언니라든지. 이러한 신호는 캠페인에 넣기가 비교적 간단하지만, 언제나 등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입니다. 캠페인 세계의 개연성이나 각 인물의 활동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등장시키기 힘들 때가 많으니까요.

여기에서 두번째 부류의 신호가 중요해집니다. 주제의식과 감정선은 보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캠페인 내에서 계속 끌고갈 수 있으며, 적당히 엮고 대립시키면 주인공들의 협력과 갈등관계를 보다 공고히 묶는 수단이 되니까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있다고 하면 정확히 어떤 어린아이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고, 어린아이를 위해주고 도와주는 상황을 계속 던져주면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상을 등장시키는 것보다 한결 유연한 진행이 가능합니다. 여기에다가 다른 주인공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넣는다든지, 또다른 주인공의 호기심이 동할 소지를 넣는다든지 해서 주인공들의 신호를 서로 엮어볼 수 있겠죠.

주인공끼리 신호를 엮는 방법을 사용하면 구체적인 대상 신호, 즉 첫번째 부류의 신호를 사용할 때도 그 신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주인공들 역시 개입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이 다른 주인공의 정체성 갈등과 연관된다든지 말이죠.

2. 신호 파악

참가자가 보내는 신호를 파악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인물 제작 과정에서 어떤 얘기들이 나오는지, 어떤 설정에 참가자가 흥미를 보내는지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가족 얘기를 많이 한다면 그 주인공의 이야기에는 가족을 개입시키면 참가자의 흥미를 끌 공산이 큽니다.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와 게임 세계 사이의 일종의 인터페이스이며, 참가자에게 무엇이 흥미로운지 하는 하나의 필터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인물 제작 과정에서부터 진행자가, 그리고 가급적이면 팀 전원이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발상을 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신호 중심 캠페인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많은 RPG 규칙에서는 캐릭터 시트 자체도 신호를 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성취 플레이는 참가자의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능력치와 인간관계 역시 이를 보조하는 신호로 기능하지요.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은 특히 열쇠가 신호 표시의 용도가 강하고, 캠페인 중 신호를 발동할 때마다 경험치가 쌓인다는 점에서 전술적 판단과 신호 활용을 강하게 엮고 있습니다. 페이트 (FATE) 혹은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면모에 그대로 신호가 드러나며, 참가자가 극점수라는 자원을 소모해서 능동적으로 신호를 발동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합니다. 겁스 (GURPS)의 장단점 역시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수가 비교적 많아서 그중 어느 것이 중요한지 가려내려면 참가자에게 더욱 열심히 귀기울여야 하겠지만요.

물론 인물과 별개로 참가자 자신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는지, 어떤 로망을 가지고 있는지.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의 관심거리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지만, 참가자가 원하는 것은 주인공 설정에 전부 포괄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이 사람은 적당히 코믹한 소년물 성향이구나. 이 사람은 극적이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등등.

주의할 것은, 참가자의 관심사에 중점을 둔다고 해서 진행자가 참가자 입안의 혀처럼 굴면서 진행자 자신의 관심사나 로망을
희생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진행자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캠페인을 만들어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캠페인에 진행자의 관심사가 반영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참가자의 신호에 신경쓴다는 것은 여기에 더해 참가자도 정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도록 캠페인을 만들어간다는 얘기일
뿐이죠. 신호는 참가자에게서 나오되 이 신호를 캠페인상에 해석하고 구현하는 것은 진행자의 역할이니까요. 인물 제작 단계에서부터 진행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3. 캠페인 준비와 진행

이렇게 신호를 추출해 내면 (‘가족’ ‘고향 플레인’ ‘쌍둥이 언니’ ‘어린아이를 좋아한다’ 등등) 그 신호에서는 다시 캠페인에 활용할 수 있는 인물과 장소, 이미지, 주제의식 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호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외에도 주제의식이나 감정선에서도 또다시 인물과 배경을 추출할 수 있지요. 조연들에게는 각각 주인공에게 바라는 바, 목표와 자원, 한계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주인공의 신호와 관계되는지 재확인합니다. 장소 역시 비슷하죠. 신호 관련성, 특색, 모험에 활용할 수 있는 요소, 이 장소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조연 등을 준비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들이 준비되면 진행자는 주인공 한명 혹은 그 이상의 신호가 개입된 상황을 던져주고, 참가자들은 자기 관심사가 직접 개입돼 있으니 그 신호를 쫓아 반응할 것입니다. 조연들은 그들 각각의 목표와 주인공에게 바라는 바에 따라 주인공들의 행동에 다시 반응합니다. 이 조연들은 주인공의 신호에서 추출한 것이니 이들의 행동은 다시 신호를 발동하게 될테고 (그러지 않는다면 진행자는 다시 신호가 발동될만한 상황을 던지면 되죠), 또 주인공들이 행동하면 조연들은 반응… 하는 식으로 캠페인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더이상 진행자는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역할을 맡아 상황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면 되니까요. 다만 그 인물이 한명의 주인공이 아닌 여러명의 조연일 뿐.

4. 한계

이와 같이 신호 활용은 캠페인 제작과 운용의 강력한 도구이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바로 참가자들이 신호를 쫓으며 적극적으로 뭔가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진행자로서의 저는 능동적인 참가자에게 기대는 면이 있으며, 참가자가 수동적이면 속수무책이 된채 쩔쩔매게 됩니다. 인물 제작 단계라든지 캠페인에 대한 토론 단계에서 분명히 이게 신호다! 라고 확신하고 진행하는데 정작 참가자는 신호를 쫓아오지도, 활용하지도 않으면 난감해지지요.

예를 들어 지금 진행하는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에서는 주인공들을 엮을만한 꺼리가 나름 풍부하게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그렇지 못해서 당황중입니다. 주인공 중 한명은 자기 고향 플레인을 찾으려고 하고 있고 이 동기를 열쇠로도 택했기 때문에 경험 많은 플레인워커인 다른 주인공과 쉽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고향 플레인에 대한 것은 일언반구 나오지조차 않아서 당황.

엮을 거리가 부족한가 염려되어서 약간 논리적으로 무리를 해가면서 두 주인공에게 공통으로 임무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 임무는 주인공 중 하나에게는 자기 고향 플레인을 찾는데, 다른 하나에게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접근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암시도 주었습니다…만, 역시 입질이 없더군요. 결국 주인공들끼리 별다른 접점이 없이 서로 겉도는 동안 진행자는 고민이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세번째 주인공을 추가하면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넘친다는 설정이니 어디든 쉽게 엮어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호기심 없는 인물인 것으로 밝혀져서 또다시 좌절..(…)

이와 같이 캠페인에 대한 신호 중심 접근은 신호에 대한 진행자와 참가자의 기대치가 어긋났을 경우 캠페인이 심각하게 표류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물론 참가자를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진행자의 실책이고, 참가자가 막막해하고 있으면 강력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진행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문제는 참가자가 적극적으로 신호를 쫓아가고 거기에 다시 반응하는 방식에 익숙한 저로서는 참가자들과 나란히 막막해진다는 것이죠. ㅠ_ㅠ 참가자가 적극적이지 않으면 진행자로서 잘 기능을 못한달까요. 그래서 요즘은 신호 중심 접근이 실패했을 때 보완할만한 방법을 모색중이기도 합니다. 어떤 진행 수단도 완전한 것은 없으니까요.

4 thoughts on “설정 중심의 캠페인 제작

  1. beholder

    떡밥에 반응없는 플레이어들을 보자면 뭐랄까요, 끓는 주전자에 손잡이가 안 달려있는 거 같달까나…^^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하더군요.

    흠… 영 반응이 없을 경우 – 어떤 것에 대해 욕망한다거나 추구한다거나 하는 것보다 다소 원초적일지 모르나 PC가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시나리오를 디자인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등따시고 배부르면 게을러(…) 지는게 인지상정이니 말이죠. +ㅃ+

    Reply
    1. 로키

      예, 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레이디의 그늘 4화에서는 위기상황을 집어넣기도 했죠. 참가자들이 막막해하고 있으면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을 던져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고요. 사실 그 캠페인에서도 참가자들이 모든 떡밥에 입질을 안한 건 아니고 능동적으로 플레이를 만들어가고 있는 면도 많은데, 진행자 입장에서는 좀더 욕심이 날 뿐이죠..^^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