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5) – 무의식과 감

진행 (마스터링)을 하다 보면 아귀를 맞추느라 걱정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사건이 맞아떨어지는지, 인물의 동기에 비추면 이런 행동이 앞뒤가 맞을지 등등. 그래서 진행에는 종종 시나리오를 만들거나 앞으로의 진행에 대해 미리 합의하는 등의 준비가 들어가지요.

제가 한 가지 느낀 점이라면, 때로는 미리 앞뒤 맥락을 다 맞추기보다는 감으로 일단 질러놓고 나중에 맞추는 것이 효과가 좋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냥 이 인물은 왠지 주인공 일행에게 숨기는 게 많은 게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런 RP를 한 후 나중에 적 스파이였다고 아귀를 맞춘다든지, 주인공 일행에 대한 습격 장면을 많이 진행하고 나서 주인공 일행의 짐에 누군가 보물을 숨겼었다고 이유를 만들어낸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 그 이유는…’ 하는 부분은 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일반적이고, 실제로 저도 준비해놓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인물 중심 진행을 위해 인물을 미리 준비해놓을 때 조연 (NPC)의 동기, 이미 해놓은 행동 등을 준비해놓는 방식으로 하지요.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저런 부분을 다 준비하지 못하는 일도 있고, 준비하지 못한 인물이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부각되는 일도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놓은 사건이 막상 부딪쳐 보니 재미없거나 앞뒤가 안 맞는 일도 있지요.
그렇게 어떤 이유로든 준비가 없는, 혹은 준비한 게 별 소용이 없는 상황에서 감에 의존하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보다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으니까요. 이 인물은 주인공을 싫어할 것 같다, 혹은 지금은 강에 시체가 떠내려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감에는 보통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고요.
미리 질러놓은 사건이나 RP를 나중에 끼워맞추는 게 어렵지 않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규칙과 이유를 만들어내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별 상관 없어보이는 사건마저도 서로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죠. 현실에서는 그게 진짜 인과관계이느냐에 따라 과학부터 미신까지 결과는 가지각색입니다만, 허구인 RPG에서는 편리합니다. 조연이 주인공을 싫어한다면 왜 그런지, 강에 시체가 떠내려왔다면 왜 그런지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일단 감을 믿고 사건을 질러두면 진행자 자신의 두뇌가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분주히 움직일 뿐만 아니라 참가자도 이유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후 (그리고 참가자에게 귀기울인 후) 그 중 가장 재미있고 앞뒤가 맞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조연이 주인공을 싫어하는 것은 주인공이 그의 형을 죽여서이고,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온 건 상류에 있는 도시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있어서이고… 등등.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논리와 사전 준비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감이야말로 진행자 최고의 자산이라는 점입니다. 참가자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지만, 참가자가 ‘내 주인공은 이렇게 행동할 것 같아’ 하는 감으로 움직이기는 비교적 쉬운 반면 진행자가 그렇게 자기 감을 믿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진행자 역시 자신의 감을 믿었을 때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질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저의 지론이지요.

4 thoughts on “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5) – 무의식과 감

  1. 크리

    저도 애먼 npc를 끌여들여 마치 어느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처럼 떡밥을 투척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아무 준비없이 이런 떡밥강화(..)만으로도 이야기를 꾸려가는데에 무리가 없을 때도 있지요. 단지 이 경우에 반드시 따라줘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참가자의 제때 등장하고 통찰력이 담긴 감이지요.
    감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진행자보다는 참가자에게 더 중요한 기능이 아닌가 합니다. rpg 안에서 진행자와 참가자의 위치가 거의 동등하고 능력의 한계가 엇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이런 차이는 매우 줄어듭니다. pc보다는 npc에게 더 많은 비밀이 있게 마련이고 보통 이것을 파헤쳐가는 것이 평범한고로 npc를 자주 다루게 되는 진행자에게 감으로 상황을 연출하고 결말을 구현시키는 무언의 압력이 많이 가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진행자의 위트가 참가자들의 욕망(..)의 끝에 위치하게 되지요. 앞서 말한대로 참가자가 역량(이자 의무)을 발휘하여 진행자의 부담을 일부 덜어주게 되면 진행자에게 부여되는 여유가 많아집니다. 이렇게 많아진 여유는 곧 늘어난 선택지이기도 하므로 좀 더 아귀가 맞는(pc에게 맞는 것이겠죠, 참가자들의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도 됩니다. 물론 참가자들이 그렇게 생각할리는 만무하지만) 답안을 고르면 되겠지요. 이럴 때에 진행자의 위트가 더 반짝입니다(반짝반짝☆). 그런 이유로 위 글은 http://blog.storygames.kr/entry/improvisation?category=40 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참견이 심한 꼬마에게 철퇴를 아껴주세요!).
    진행자가 자신의 감을 믿지 못하는 것도 위의 내용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책을 한편만 꾸준히 읽는 사람보다는 여럿을 동시에 읽으면 내용이 혼선이 되고 일관성이 흩어질 테니까요. 물론 진행자가 자신의 뇌와 인격을 마치 변신술처럼 분리해서 완벽하고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처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에.. 그건 좀 문제가 있지요. 저는 아는 사람에게 정신질환 rpg라는 단어를 꺼내며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르는 것은 좋은 시도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숨막히게 부끄러워지겠지만 잘 모르는 미래로의 도약은, 가이드에 의해 완벽하게 제어되는 여행상품보다 길을 잃고 스스로가 이정표가 되어 떠나는 배낭여행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rpg를 하는 큰 이유들 중에 하나인 그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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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어떻게 보면 빚을 내서 물건을 사는 것과 비슷하죠. 노력과 시간은 나중으로 미루고 떡밥은 일단 던진다는 면에서요. 잘못되면 뭐 신용 위기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만, 그렇게 빚을 내서 저같은 경우는 나름 사업을 잘 꾸려 왔지요. 무의식이 ‘질러라!’ 하고 명령하면 믿고 충실하게 지르는 편이랄까요.

      아, 그리고 즉흥에 대한 글의 연장선이라는 말씀은 맞습니다. 정확히는 이 글을 쓰고 나서 이전 ‘진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 글을 보다가 ‘왜 같은 글을 두 번 썼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이미 썼으니 그냥 올렸습니다.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의 조명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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