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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달 2화 – 봄날의 벚꽃

요약

하세가와에 대한 마음과 마츠오가 제공하는 현실적 안정 사이에 갈등하던 우메하는 마츠오의 부탁대로  소학교 사업을 마츠오가 좌지우지하는 동안 하세가와의 주의를 적당히 돌리지만, 끝내 의심을 떨칠 수 없었던 하세가와에게 마츠오와 자신의 속임수를 결국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절대적인 힘의 차이 앞에 두 사람은 마츠오와 공개적으로 담판을 짓지는 못하지만 우메하는 겉모습은 유지하면서 술수와 속임수로 마츠오에게 대항할 뜻을 밝히고, 그녀를 통해 하세가와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처음으로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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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우메하는 단나인 마츠오 다이키와 함께 꽃이 채 피지 않은 벚나무 늘어선 길을 걷습니다. 마츠오는 하세가와에게 ‘보모 노릇’을 하라면서 우메하가 하세가와의 주의를 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소학교 사업의 방향을 자신이 정하고 공도 자신이 차지할 수 있게 말이죠.

그날 저녁, 요정에서 (이름은 우리말로는 한 ‘매화정’쯤 될 것 같은데) 연회 준비를 바삐 하던 카나코는 우메하의 지시로 다치바나를 포함한 다른 손님을 내보내고, 다치바나는 너도 이 일에 협력하는 거냐면서 냉소하지만 결국 나갑니다.

연회에서 마츠오는 고위층 자제를 위한 학교를 세울 뜻을 다시 밝히고, 이 점이 석연치 않은 하세가와는 학교는 모든 아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면서 마츠오의 뜻을 따져 묻지만, 우메하가 역시 젊은 분은 이상주의적이고 혈기가 넘친다는 식으로 말을 돌려서 흐지부지됩니다.

연회가 끝난 후 밖에서 인력거를 기다리던 하세가와는 우메하에게 마츠오의 태도와 소학교 사업의 향방에 대해 당혹과 불만을 토로합니다. 역시 마츠오의 계획에 동조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한 우메하는 그런 그를 위로하면서도 은근히 유혹하다가 충동적으로 키스해 버리고, 하세가와는 완전히 빠져듭니다. (장면과 판정 7분 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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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임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건물에서 수업을 파한 후 다치바나가 들어와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높은 분들에게 아첨하고, 밤에는 게이샤랑 놀다니 남은 하나 하기도 어려운 걸 훌륭하게 잘 해낸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우메하를 모욕하지 말라며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이는 하세가와에게 (진짜 TV 프로였으면 이 순간 수많은 야오이 팬픽 출범(…)) 다치바나는 정신 차리라며, 그 마츠오 다이키가 뒤를 봐주는 여자가 뭐하러 너에게 접근하겠느냐고 윽박지릅니다. 이에 하세가와는 그 말을 부정하면서도 우메하에 대해 일말의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장면 설정 논의에서 판정까지 해서 14분 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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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우메하는 붓글씨를 쓰며 카나코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치바나에 대한 카나코의 마음도 전에 없이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녀는 카나코에게 다치바나가 살아돌아온 지금 게이샤가 되려는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지만, 카나코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날 가게로 찾아온 하세가와를 우메하는 벚꽃이 피었다며 호수로 끌고 나가고, 두 사람은 호숫가를 거닐며 점점 가까워집니다. 요정에서 학교 관련 모임이 있는 것을 아는 우메하는 하세가와가 참석하지 못하게 주의를 돌리려고 하지만, 정신을 다잡은 하세가와는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러던 중 비가 내리자 우메하는 벚꽃이 비에 일찍 지겠다고 걱정하지만, 하세가와는 기억이 남아있는 한 괜찮다며 우메하가 젖지 않도록 웃옷을 덮어줍니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두 사람은 아이처럼 웃으면서 순수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자 하세가와를 따돌린 모임에서 마츠오가 완전히 귀족 학교로 사업을 몰아가는 논의가 들려오고, 우메하는 그동안 하세가와는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립니다. 하세가와는 연회장에 들어가 마츠오와 결판을 지으려고 하지만 애송이가 날뛰지 말라는 식으로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하세가와는 우메하를 도움을 구하듯 보지만, 꼴이 그게 뭐냐며 당장 가서 정돈하고 오라는 마츠오 앞에서 우메하는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하세가와를 데리고 나옵니다. 완벽한 게이샤의 모습을 갖추고 나온 우메하는 어쩔 줄 모르는 하세가와에게 마츠오는 너무 강하다며, 그가 당신을 이용한다면 당신도 그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순진한 청년 하나 망치는 현장!)

다음날 마츠오와 우메하는 다시 같은 벚나무 늘어선 길을 걷습니다. 비에 져버린 벚꽃이 덧없다는 우메하에게 마츠오는 원래 그렇다며, 애를 맡겼더니 자네도 애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보모 노릇은 즐거웠냐고 떠봅니다. 우메하는 나리도 장난이 심하시다며 웃습니다.

한편, 하세가와는 소학교를 세우려는 터의 절의 주지이자 친구인 쿠로다 겐코를 절로 찾아가서는, 사정이 어려운 와중에도 반겨주는 쿠로다의 환대를 받으면서도 전에 없이 차가워진 표정으로 절을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_M#]

예고편

그들의 삶에 덮쳐오는 탁류!

하세가와: (연회에 참석한 인사들에게) 이렇게 와주셔서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치바나: (반쯤 냉소, 반쯤 안도하는 표정) 그 멍청이도 머리를 쓸 줄은 아는 건가.

우메하: (하세가와를 보며 속을 내비치지 않는 미묘한 미소)

카나코: (화장한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보며 작게) 시게하루…

(연회상에 다소곳이 앉은 카나코의 손을 마츠오가 잡으면서 화면 정지)

도쿄의 달 3화에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상

의외의 전개였지만 그래서 더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연회 장면에서 우메하가 마츠오에게 대항할 용기를 내는지는 판정에 맡겼고, 그래서 뱀프님도 정말로 판정에 걸고 싶은지 확인하셨었죠. 제가 스스로 정한다면 우메하가 순수하게 나가는 쪽을 택했겠지만, 어느 쪽이든 재밌겠다는 생각이어서 그냥 판정으로 했습니다. 둘 중 한쪽 결과가 재미없다면 판정에 걸지 않는 게 물론 더 좋은 선택이었을 테지만요.

판정 결과 우메하는 정공법으로 나가는 대신 하세가와까지 흙탕물로 끌고들어가기로 했고, 하세가와도 변하기 시작하는 등 여러모로 재미있는 전개가 되었습니다. 뱀프님 말씀마따나 이제는 “웰컴 투 시궁창!” 하세가와가 변해가는 게 가건물 장면에서도 드러난 그의 이상 때문이라는 점도 재미있고요. 이걸 성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변질이라고 해야 할까요. 둘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한 건지.

어떻게 보면 우메하는 자신이 좋아하는 하세가와에게도, 후원자인 마츠오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게 안습이지만, 그런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또 공감이 가네요. 실제로도 그 자리에서 마츠오에게 곧이곧대로 대항했더라면 지금까지의 안정은 유지하기 어려웠을 테고, 그런 현실과 진심의 갈등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한 거겠죠.

그래서 저는 우메하가 하세가와의 젖은 웃옷을 팔에 걸치고, 화장은 지워지고 옷은 흐트러진 채 손님들 앞에 나타난 마지막 연회 장면, 게이샤의 완벽한 꾸밈새라는 방벽 없이 많은 사람 앞에서 순간 취약했던 모습이 인상깊었어요. 그 꾸밈없는 모습의 무방비함을 견디지 못하고 익숙한 곳으로 도망쳤다고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크건 작건 누구든 매일 하는 선택이기도 하니까요.

1기 후반의 주역이 될 다치바나와 카나코에 대해서도 좀 복선을 넣어둘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카나코는 광열님이 안 계셔서 계속 존재감이 미미한 점은 좀 아쉽지만, 반면 광열님, 승한님, 뱀프님의 3인 3색 카나코를 볼 수 있었다는 점도 만만찮은 즐거움.

비교하자면 광열님의 카나코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아가씨, 승한님의 카나코는 약간 푼수끼 있으면서 솔직하고, 뱀프님의 카나코는 절제되고 조용한 외면 아래 폭발적인 감정을 품은 점이  재밌죠. 광열님 카나코는 예술가 기질이 기본적으로 예능인인 게이샤에 어울리고, 승한님의 카나코는 순진한 어린 아가씨답고, 뱀프님의 카나코는 보수적인 시골 처녀다워서 제각기 다른 의미로 어울립니다.

그리고 물론 하세가와와 다치바나의 가건물 장면이 아주 멋졌습니다! 다치바나의 예리한 통찰, 하세가와의 순수한 혈기, 그리고 동종혐오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호 반감. 어떻게 보면 구제불능의 이상가라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닮았으니까요. 한쪽은 가망이 없어진 이상을 포기하느니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또 한쪽은 자신의 순수를 포기해가면서 이상을 이루려 하고.

어쩔 수 없는 사상적, 심정적 앙숙이면서도 상황이 달랐으면 최고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그리고 적으로서도 남이 못하는 따끔한 질책과 충고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아.. 자꾸 채찍질이라고 하고 싶다) 극적 긴장을 끌어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서 더 현실적이고 조심스러운 우메하와 카나코가 둘을 이끌고 조절해주면서 극에 뉘앙스와 깊이를 더하는 것도요.

멋진 플레이를 선사해주신 승한님과 뱀프님 두 분께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도쿄의 달 1화 – 움직이는 시간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시리즈 도쿄의 달 1화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도쿄의 달 1화

연회상에서 우메하는 그녀의 단나이자 하세가와의 후원자인 마츠오 다이키가 하세가와 마츠오 합체변신판 하스오 하세가와의 이상을 지원해주고 있다기보다는 마츠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또 카나코 앞에서도 내색은 하지 않습니다.

한편, 하세가와는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갖힌 방에서 탈출해 집에서 도망칩니다. 마츠오의 심부름으로 며칠 출입이 없었던 하세가와를 찾으러 온 우메하는 하세가와의 부모에게서 사정을 듣고, 가게로 돌아갔다가 문앞에서 웅크려 졸고 있는 가출 강아지 하세가와를 발견하지요. 하세가와는 당분간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우메하는 카나코에게 하세가와의 가족에게 연락하라고 지시합니다.

하세가와를 씻기고 옷 갈아입힌 후, 마츠오가 찾아와 마츠오는 우메하가 술시중을 드는 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꾸 하세가와가 생각하는 것보다 소학교 계획을 늘리려는 마츠오를 보고 우메하는 슬쩍 나으리는 정말 관대하시다며 최소한 건물을 짓는 비용은 마츠오가 대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한편, 하세가와는 마츠오의 계획은 자신의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조금은 깨닫습니다.

우메하가 붓글씨를 쓰며 하세가와와 전통과 신문물의 갈등에 대한 우회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 하세가와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왜 자기가 있는 곳을 알렸냐며 화를 내는 하세가와에게 우메하는 대업을 이루려는 사람이 가족을 피할 생각이냐며 일침을 놓습니다. 그 말에 하세가와는 우메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감금당합니..(…))

지역 유지들을 부른 연회에서 마츠오는 하세가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고위층 자제들을 위한 사립 학교를 세울 뜻을 밝히고, 삼촌 대신 참석한 다치바나는 개혁파의 논리적 허점을 비판하지만 우메하가 주의를 돌리는 바람에 기세가 꺾인 채 나와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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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치바나를 카나코는 쫓아나오지만, 그는 자신은 살아돌아오면 안 되었다고, 아니 이미 네가 아는 시게하루는 죽어버렸다고 자책합니다. 카나코는 그래도 약속을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간신히 말합니다.  각자 귀가한 다치바나와 카나코는 몇 년 전, 다치바나가 신센구미가 되려고 떠날 때 카나코가 검에 술을 달아주며 꼭 살아돌아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일을 괴롭게 떠올립니다.

2화 예고편

마침내 세워진 학교 설립 계획!

하세가와: (친구이며 절의 주지인 쿠로다 겐코에게) 부탁이네! 이 절에서 떠나주게.

(눈을 감는 쿠로다 겐코)

다치바나: (건립 계획서를 보고 피식 웃더니 병째로 술을 마신다)

우메하: 하세가와상! (하세가와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춘다)

도쿄의 달 2화를 기대해 주세요!

감상

오늘도 정말 재밌게 했습니다. 스카이프로 플레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녹음을 하기도 했는데, 용량이 크고 (2시간 30분이 MP3로 약 67MB) 분량도 있어서 10분 가량만 잘라서 올렸습니다. 사용한 녹음과 편집 프로그램은 Audacity입니다. 마이크 음량을 좀 줄였는데도 제 목소리만 너무 튀어서 다음에는 더 줄여야겠더군요. 대체로 음량은 저 > 승한님 > 석한님 순서? (..)

비중은 우메하와 카나코 2, 다치바나와 하세가와 1이긴 했는데 카나코의 참가자분인 광열님께서 안 계시기도 했고 다음 화에 나올 우메하의 중심 갈등에 하세가와가 중요한 역할을 해서 결과적으로는 우메하와 하세가와가 비중 2처럼 나왔죠. 그래도 그나마 카나코와 다치바나를 끝에서 좀 살려서 어느 정도는 비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1기 끝에 큰 역할을 할 두 사람이니 지금부터 복선을 넣어놓는 게 좋겠죠.

카나코는 이번 화를 비중 1로 바꾸고 다른 화 중 하나를 비중 2로 넣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해요. 광열님이 다음 주에 오실 수 있다면 다음 화에 카나코가 비중 2인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인간성과 일신의 안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메하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하세가와 못지않게 카나코하고도 관련이 깊으니까요. 시범 방영 때 카나코를 이용하려고 했던 모습도 있고, 하세가와보다 카나코를 오래 알았고 카나코는 일종의 피보호자 위치이기도 하니까요.

비중 3인 주인공이 없기도 했고 사람 수도 전보다 하나 줄어서 비교적 짧게 끝난 1화였지만 내용도 충실했고 2회 준비도 깔끔하게 한 것 같습니다. 우메하의 갈등이 다음 화에 어떤 식으로 결판이 날지, 그리고 남은 1기 동안 우메하와 다른 주인공들이 그 결과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며 변해갈지 기대되는군요. 모두 다음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도쿄의 달: 기획, 제작과 시범 방영

도쿄의 달 위키 페이지

기획

이번 금-토요일 심야-새벽 스카이프 플레이에는 뭘 할까 이것저것 얘기하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으로 시리즈물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배경으로는 처음에 승한님이 늘 노래를 부르시는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Transhuman Space)를 제안하셨는데, 뱀프님은 썩 마음에 차지 않으셨죠. 그래서 전에 쓴 놀이와 교섭 글을 활용해서 승한님은 왜 THS를 바라는지, 뱀프님은 왜 별로 원하지 않는지 얘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재밌게도 승한님은 THS 배경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신 게 인류의 격변기에 일어나는 변화와 안정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셨습니다. 뱀프님은 그런 주제는 좋지만 THS 같은 하드 SF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고요. 저도 하드 SF는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대신 공통 관심사인 ‘격변기의 인간’을 다룰 수 있는 소재를 같이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얘기 나온 것은 나치당 집권기의 독일, 노예 해방기의 미국 남부, 고려 조선 왕조 교체기 등이었는데, 이런저런 제안을 주고받다가 결국 일본의 메이지 유신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고증에 치이지 않게 판타지나 대체역사는 어떻겠느냐는 얘기도 했는데, 역시 현실 배경이 다들 더 끌렸죠. (어차피 놀이로 하면 모두 다소간에 대체역사긴 하고..(…)) 제가 메이지 유신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제일 주저했는데, 생각해 보니 제 이유는 지식이 없다는 것뿐이었으므로 저보다 좀 더 아는 게 많은 다른 두 분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가며 하기로 했습니다.

인물 제작

막 메이지 유신을 배경으로 하기로 정했을 때쯤 광열님이 들어오셔서 플레이에 끌어넣고 시리즈 주인공을 제작했습니다. 이때 동환님의 규칙 요약에 많은 도움을 받았죠. PD (진행자)를 따로 정하지 않고 일행 개념 없이 전원이 주인공을 만들고, 자기 주인공이 지금 안 나오는 분은 임시 PD나 조연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다 보니 자기 주인공이 안 나와도 다들 진행 중인 장면 가지고 만담 웃고 떠들며 제안하기에 바빴고요.

그렇게 얘기해서 나온 네 인물은 고향에 신식 소학교를 지으려고 하는 하세가와 준이치로 (승한님), 도쿄에서 요정을 운영하는 발 넓은 게이샤 우메하 (로키), 신센구미 출신으로서 비겁하게 살아남았다고 자책하는 다치바나 시게하루 (뱀프님), 그리고 다치바나의 옛 약혼녀이자 우메하에게 교육받으며 게이샤의 길을 걸을까 고민 중인 아가씨 유리 카나코입니다. 그리고 인물 사이의 관계와 주제 의식의 연관성을 생각해 배역 비중의 흐름을 정했고요.

제작을 하는 데 시간이 꽤 들었지만 시간이 좀 있어서 전원 비중 2짜리 첫 시범 방영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시범 방영

고향에 소학교를 지으려고 동분서주하던 하세가와는 우메하를 통해 우메하의 단나이며 정계의 명사인 마츠오 다이키를 소개받습니다. 마츠오는 지금 절이 있는 터를 소학교 터로 제안하고, 하세가와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일이 진척을 보이는 데 안심합니다. 하세가와와 우메하는 서로 이끌리는 것을 느끼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마츠오는 카나코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입니다.

자기 단나가 카나코에게 관심을 보이는 관심을 눈치챈 우메하는 마츠오의 호의를 더 얻을 생각으로 카나코에게 마츠오의 밤시중을 들 것을 요구합니다. 카나코는 우메하의 단나와 그럴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낮에 하세가와를 보던 우메하의 시선까지 들먹이자 우메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카나코의 뺨을 때려 얼굴에 상처를 낸 관계로 밤시중 건은 무위. 머리를 식히라며 우메하는 카나코를 광에 가둬버립니다.

하세가와의 아버지는 아들이 하고 다니는 일에 대해 분개하며 소학교를 세우겠다는 짓은 당장 그만두라고 윽박지릅니다. 하세가와는 근대화를 옹호하며 계속하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버지는 쓸데없는 짓 은 그만 하라며 하세가와를 방에 가둬버립니다. (광열님 말씀마따나 다들 갖히고 있어요! (…))

한편, 다치바나는 우메하의 요정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값이 모자라다며 신센구미에 있을 때 찼던 낡은 칼을 빼앗깁니다. 처음으로 무력감이 아닌 의욕을 보이며 칼을 돌려받으려고 덤볐다가 흠씬 얻어맞고 칼을 뺏긴 그는 거리에 처량하게 혼자 앉아 자기는 죽는 게 나았다고 죽은 옛 조장에게 읊조립니다.

새벽에 광에서 풀려나온 카나코는 칼을 되찾으러 몰래 들어온 다치바나와 마주칩니다. 전에도 몇 번 스쳐갔지만 서로 모습이 달라져서 설마 했었던 두 사람은 눈물로 화장이 다 지워진 카나코, 오랜만에 술병을 내려놓을 만큼 의욕이 생긴 다치바나를 달빛 속에서 서로 알아봅니다.

네가 죽은 줄 알았다며 오열하는 카나코에게 다치바나는 나 같은 놈 때문에 울지 말라며,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두 사람과 세월을 느끼고 돌아섭니다. 거리에 서서 혼자 우는 카나코를 보고 사태를 짐작한 우메하는 카나코에게 진정한 마음을 주는 건 아무 쓸모도 없다고 충고합니다.

제 1화: 움직이는 시간 예고편

도쿄에 불어닥치는 변화의 바람!

(창문으로 탈출하려다가 굴러떨어지는 하세가와)

우메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물론입니다, 나으리.

(몰래 나오려던 하세가와, 문지방을 넘자마자 개가 마구 짖어대는 바람에 방안으로 도주.)

카나코: (다치바나의 검에 술을 달아주며) 꼭 살아돌아와야 해. 약속이야!

다치바나: (술이 달린 검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긴 모습)

(방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하세가와)

우메하: (하세가와 집 대문 앞) 하세가와상 계신지요?

도쿄의 달, 그 대망의 1화에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상

뭐 일단, 재밌었습니다. 무척이나 즐거웠어요. 메이지 유신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 중요한 건 당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상황과 인물이더군요. 인물들이 다들 생생하고 참가자끼리 호흡이 잘 맞아서 아주 재밌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원래 규칙의 역할 분담은 고정 PD가 있고 나머지는 참가자인 아주 고전적인(?) 방식인데, 제가 배경 시대를 잘 몰라서 PD를 잘 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 또 이 규칙에 굳이 고정 진행자가 필요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방식으로 했는데, 나름 괜찮았던 것 같아요. 어차피 일행을 이루기는 어색한 인물들이고, 자기 인물이 안 나올 때 PD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특정 장면에 PD나 참가자로서의 역할이 없다고 해도, 어차피 이런저런 제안을 던지며 ‘이런 인격파탄자!’ ‘카나코가 불쌍해~’ ‘우메하라면 쇠몽둥이로 다 때려눕히고 하세가와 구출을..’ 등등 떠드는 것 자체가 진짜 재밌었습니다. 한 마디로 TV 보면서 웃고 떠드는 기분이었어요.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TV 프로, 스스로 만들고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재미까지 더해서 말이죠. 채팅이 아닌 음성 플레이여서 더 집중도가 높은 점도 있었겠고요.

어쨌든 안방극장 대모험은 이런저런 기회에 해보았지만 한 번도 1기를 마쳐본 적은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하나의 시즌을 마쳐보고 싶네요. 즐거운 플레이에 함께해주신 광열님, 뱀프님, 승한님께 감사드리고, 다음 주에도 다같이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꼬마 미우 구하기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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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한님과 지난주에 한 꼬마 미우 구하기 단편을 완결했습니다. (2 세션이 걸렸으면 단편은 아니려나요?) 1편은 여기에 있습니다.

요약

비행기 밀항까지는 성공하지만 곧 발각당한 미우는 티엔이 시키는 대로 망명 신청을 합니다. EU에 도착해서 티엔이 있는 이식물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러 가는 이송 과정에서 미우는 납치당해 빼돌려지고, 베트남 정보부 소속의 부이치운에게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미우는 뇌하수체에서 귀중한 약물이 될 성분을 분비하는 실험체이며, 티엔은 태평양 전쟁 후 미수거 상태에서 도난당했다가 프로그램을 조작당해 미우를 빼돌리는 데 이용당했다는 진상을…

티엔은 조국의 명령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프로그램 조작이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고, 미우는 자신을 속인 티엔을 원망합니다. 티엔은 미우가 듣지 못하게 부이치운과 얘기한 결과 5년 후 미우가 다 자라고 약물이 완성되면 미우는 뇌하수체를 제거당하고, 과한 비용 문제로 새 뇌하수체 이식 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동요합니다.

부이치운은 미우를 데리고 이동하면 발각당하기 쉬우니까 티엔에게 미우를 접선 장소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내리고, 미우를 찾고 있을 EU 경찰을 피해 접선 장소로 바로 이동하는 프로그램을 티엔에게 입력합니다. 티엔은 새 프로그램에 의지력으로 잠시 저항하면서 미우에게 조금 있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말라며, 접선 장소가 아니라 EU 경찰에게 가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꼭두각시 인터페이스를 스스로 망가뜨리지요. 이윽고 프로그램에 장악당한 티엔은 미우에게 경찰을 피해 접선 장소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미우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EU 경찰에게 발각됩니다.

망명 신청을 법원에서 심사한 결과 미우는 EU법에 따라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2등 시민의 권리를 인정받고, 베트남 정부는 5년 후 미우에게 새 뇌하수체 이식 수술을 해줘야 한다는 판결이 나옵니다. 이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기부금만으로도 수술비는 충당하고도 남게 되지만요.

마지막 장면에서 미우는 이후 5년 동안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줄 법원 지정 후견인과 대면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 의아해하던 미우는 이윽고 바이오쉘에 다운로드된 티엔을 알아보지요. 기쁜 재회는 곧 티엔의 무릎에 웅크려 행복하게 자는 낮잠으로 이어집니다. (…)

감상

지난 화에 진행자 없이 하다 보니 어느 쪽도 외부 세계에 대한 권한이 없어서 진행이 느려진 현상 때문에 이번 화에는 번갈아가면서 진행자 역할을 맡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가할 것이 있을 때, 혹은 진행자도 잘 모르겠을 때 페이트 챠트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덕분에는 이번에는 훨씬 속도감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전통적인 의미의 진행자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서술권에 공백이 생기면 곤란하다는 걸 느꼈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미딕은 진행자 없이 할 수는 있지만 진행자가 없어서 생기는 서술권의 공백을 충분히 채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번 화에서 제일 멋졌던 진행은 승한님이 하신 부이치운의 폭로 장면이었습니다. 부이치운을 티엔의 옛 동료로 설정하고 티엔의 과거를 만들어서 티엔의 극적 중심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고, 미우의 죽음에 대한 갈등을 설정해서 티엔에게 ‘조국에 대한 복종’이라는 AI다운 (그리고 인간다운) 가치와 ‘저항할 수 없는 생명 보호’라는 인간다운, 그러나 AI답지 않은 가치 사이에 충돌을 유도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RP는 티엔의 인격 (AI격?) 분열 부분. 프로그램에 저항하는 AI라는 줄거리는 흔하긴 하지만 시사점이 많은 갈등이고, 한편으로는 AI의 프로그램은 인간이 받는 명령에 대한 좋은 상징이기도 해서 흥미롭죠. 자신이 조금 있다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라고 호소하다가 프로그램에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싹 말이 달라지는 게 참 재밌었습니다.

제일 조마조마했던 대목은 티엔이 프로그램에 저항하는 판정을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실패하면 미우가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것이지만,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규칙은 극적 욕구를 다루지 않아서 실패가 성공보다 재미없어지는 판정 스트레스가 종종 생기더군요. 이번 화에도 그런 충돌을 꽤 심하게 느꼈습니다. 가상현실 표현 규칙이 극적 욕구를 받쳐준다기보다는 극적 욕구에 저항한다는 인상이었달까요.

최종적으로는 저야 원하는 해피엔딩이 나와서 좋았지만, THS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미우의 죽음을  은근히 바라셨던 피도 눈물도 없는 (?!) 승한님은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극적 흐름이나 요소를 다루는 규칙이 없으면 참여자 사이에 생기는 극적 욕구의 충돌을 해결하는 것은 순전히 참여자 사이 의사결정 구조에 맡겨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연장선인지라 서로 적당히 양보하거나 포기하기도 하지요. 이번에 승한님이 그러셨듯… 그런 의미에서 모두의 극적 욕구를 끌어내고 최종 전개에 반영한다는 점이 극을 직접 다루는 규칙의 중요한 효용이 아닌가 합니다.

가상현실 표현과 극적 요소 조작이라는 두 목표 사이에 생기는 긴장 관계가 또 드러난 부분이라면 승한님과 제가 판정을 보는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저는 판정을 갈등 판정 개념으로 보고 하나의 극적 결과가 판정으로 정해졌으면 그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판정을 하는 건 판정의 의미를 희석한다고 보았지만, 승한님은 행동 판정 개념으로 보시고 판정은 극적 결과 (미우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단일 행동의 결과 (미우가 티엔의 새 명령에 넘어가느냐 안 넘어가느냐)를 정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딕도 행동 판정 규칙이니까 규칙상 옳은 쪽은 승한님의 관념이었지요.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한 플레이였고 개인적으로는 신뢰와 인간성 등의 문제를 다룬 전개도 좋았습니다. 미우도 무척 귀여웠고, 티엔 RP도 재밌었고요. 다만, 판정이 때로 재미를 지원한다기보다는 방해한다는 느낌이 드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지난 화에서도 얘기했듯 의외성을 만들어낸다거나 무작위 키워드로 발상을 자극하는 규칙은 도움됐지만요. 예를 들어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납치당한 것도 d10을 굴려서 나온 장면 중단의 결과였죠. 무작위성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전개가 나온 점은 무척 유용했다고 봅니다.

잡상

아마 전쟁 중 프로그램 손상이랑 도난 후 조작, 부이치운이 한 패치와 그에 대한 저항, 그리고 스스로 꼭두각시 인터페이스를 망가뜨린 여파 등등으로 티엔의 프로그램은 골병이 꽤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우와 대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그래밍에 구멍이 많이 났다는 언급도 그런 의미에서 한 것입니다.

손상된 프로그래밍을 재구성해서 복구해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겠지만, EU에서는 SAI도 인권이 있으니까 티엔 본인이 거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자기 프로그램에 대한 외부 개입은 되도록 줄이고 학습 루틴으로 스스로 배워가겠다는, 말하자면 인간성에 한 발짝 다가가겠다는 티엔의 결심이랄까요. 미우를 만나고, 미우의 생명을 구하려고 명령과 프로그래밍까지 거부한 사건은 그만큼 그를 많이 변하게 한 것 같습니다.

베트남에 대한 티엔의 애국심이나 나노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지는 그쪽 프로그래밍까지 손상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적어도 유럽 체류는 자아 개념부터 정치적 신념까지 모든 것을 곰씹어볼 기회는 되겠죠. EU의 좌파 정치활동에 가담한다든가 지능 향상 동물과 AI의 권리 신장 활동을 하는 티엔을 생각하는 것도 나름 재밌군요. 이것이야말로 THS! 라는 느낌이기도 하고..^^

꼬마 미우 구하기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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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먼 스페이스 (Transhuman Space) 배경으로 미딕 (Mythic) 규칙을 사용한 플레이를 해보았습니다. 주인공은 다음 두 명입니다.

새끼고양이

냐~

하나는 지능 향상 아기고양이 미우, 또 하나는 현재 미우의 뇌에 이식된 인공 지능 이식물입니다. 정말 하드 SF나 동화가 아니면 어려울 것 같은 엉뚱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베트남의 한 실험실에 있던 지능 향상 고양이 미우 (처음 시작했을 때는 ‘키티’)가 낯선 차에서 깨면서 시작합니다. 머리는 아프고 눈앞에는 느닷없이 인터페이스 디스플레이가 보이는 키티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차량에 폭탄이 설치된 것이 발견되면서 모두가 대피해서 나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키티가 머뭇거리자 강제로 몸을 조종해서 공항으로 도망시키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티엔 바 딘. 태평양 전쟁 참전용사로, 고도의 지능과 자아 개념을 갖춘 인공 지능인 그는 키티에게 멋대로 미우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 뒤 환태평양 사회주의 연합의 이념과 미우 자신의 생명을 위해 유럽 연합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우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유럽 관광객 가족을 발견해 데려가 달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만 세관에서 압수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미우는 도망쳐서 비행기 하나로 몰래 숨어들지만 미우를 쫓는 사람들은 비행기 이륙을 멈추고, 다시 뛰쳐나와서 출발 직전인 유럽 연합행 비행기를 발견해 화물칸이 닫히기 직전에 뛰어듭니다. 마침내 무사히 유럽 연합으로 향하게 된 미우는 티엔이 틀어주는 군가를 들으며(?) 잠이 듭니다.

재밌게 한 플레이였지만 시간은 꽤 걸렸습니다. 특히 진행자 없이 돌리다 보니 하나하나 질문하고 판정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죠. 그런 면에서 진행자를 포함한 서술권의 확실한 역할 분배는 시간 절약의 이점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 누군가 권한을 가지고 서술한 것에 수정이나 추가하는 것과, 어떤 상황이 나왔는데 어느 쪽에도 서술권이 없어서 서로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에너지 소모나 처리 시간 면에서 크게 다르니까요.

그래서 돌아가면서 한 장면씩 진행을 하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만 미딕의 상황 판정 규칙을 사용하는
것도 제안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이의나 추가의 빈도에 따라서는 사실상 전통적 진행자 구조와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요즘 생각하는 것인데, 전에 판정 스트레스 글에서 썼듯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규칙과 극적 현실을 중점적으로 표현하는 규칙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어떤 결과를 바라면서 판정을 하되 그 가상현실의 물리 혹은 논리 법칙에 대비해서 성공 여부를 판정하고, 후자는 물리나 논리 법칙과 상관없이 판정 성패는 극적 결과를 정하고 물리적, 논리적으로는 참여자가 모두 공감만 하면 괜찮은 방식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미딕은 판정의 극적 의미와 상관없이 그 판정의 논리적 확률에 비교해서 판정한다는 점에서 가상현실 표현이 기반인 규칙입니다. 그러한 논리 확률과 바라는 극적 결과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점에서 판정 스트레스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어떻게 보면 모든 가상현실 판정과 다르지 않죠. 또 미딕에서는 그 확률을 참가자가 스스로 정한다는 면에서 바라는 극적 결과가 일어나게 확률을 높이는 압력과 자신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확률에 맞추는 압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우가 화물칸에 뛰어드는 판정은 확률상 굉장히 어려웠지만 저와 승한님 둘 다 성공을 바라는 판정이었는데 거의 실패할 뻔했었죠. ‘미우가 무사히 탈출한다’하고 ‘미우가 실패해서 잡혀 죽는다’하고 극적 만족감 면에서 동등할 리가 없는데도 가상현실을 엄격하게 따라가자면 바라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가상현실 판정의 근본적인 모순이 아닌가 합니다.

반면 장점이라면 실패하면 해악이 따른다는 긴박감, 그리고 참가자가 예상하고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의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두 가지는 다른 방법으로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요즘 나오는 규칙이 흔히 그렇듯 미딕도 완전히 가상현실에만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판정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극점수가 그 대표적인 예죠. 실제로 미우가 화물칸에 뛰어드는 판정도 극점수를 소모해서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극점수와 같은 규칙은 이처럼 가상현실과 극적 욕구의 괴리를 어느 정도 좁히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판정 외에 미딕의 다른 일면은 재미있게도 전혀 가상현실이 아닌 극적 현실 제조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작위 사건이 발생할 때면 주사위를 굴려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 적수에 대한 신뢰’라든지 ‘새로 등장할 인물: 법적 방해자’ 등 새로운 상황을 무작위로 제조합니다. 이건 확률을 조작하는 규칙 없고, 앞뒤를 봐서 논리가 맞지 않으면 다시 굴려도 된다는 점에서 판정이라기보다는 생각을 자극하는 창의적 제약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이 미딕을 사용한 첫 플레이에 대한 제 감상입니다. 2부에서는 미우의 이야기를 완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재밌는 플레이 함께 해주신 승한님께 감사드립니다~

공화국의 그림자 18화 – 단투인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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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인 제목을 ‘포도원의 제다이’에서 ‘스타워즈: 공화국의 그림자’로 바꾼 수상한 제다이 캠페인이 4주간의 외도 외전을 마치고 본편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약

아우터 림으로 출발한 일행은 만달로리안 접경지대에서 만달로리안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어서 여러 행성에 난민이 대거 발생했다는 보고를 듣고 난민이 많이 유입된 행성 중심으로 여정을 재편성합니다. 만달로리안 침입 지역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혹시 만달로리안이 움직이는 이유도 파악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겠지요.

너무 오랜만에 원래 인물과 캠페인을 잡아서 이번 화는 다들 적응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특히 도입 부분은 천천히 시작했죠. 이때 시사적인 대목이 두어 군데 있었는데, 첫 번째는 쟈네이딘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로어틸리아가 보인 반응, 두 번째는 포스가 두 개냐고 물은 아를란의 질문과 이에 대한 자락스의 대답입니다. 둘 다 생각 없이 조연을 연기했을 뿐이었는데 참가자 반응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킨 경우죠. 이 맛에 RPG합니..(..)

단투인에 도착한 제다이들은 심각한 난민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넬반에 있는 신토넥스 지사에서 난민들을 받아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는 정보도 듣게 됩니다. 자락스는 정세가 불안정한 넬반에 난민들을 보내는 것을 당장 반대하지만, 센과 로어틸리아는 넬반으로 난민을 이주시키는 틈을 타면 넬반 잠입이 쉬워질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의논 끝에 제다이들은 일단 넬반에는 밀수꾼의 도움을 받아 잠입하고 넬반에서 난민을 받아준다는 제안은 거절하도록 단투인 회합에 권유하기로 합니다.

넬반에서 난민들을 받아주는 데 대한 제다이들의, 특히 자락스와 센의 의견 대립이 흥미로웠습니다. 나중에 캐스 하운드 전투에서도 나오겠지만, 자락스의 관심사는 항상 공동체와 그 수호에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죠. 성취 플레이부터가 시스에게서 한 마을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러다가 죽을 뻔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넬반의 상황은 참가자들이 정치 게임을 통해 직접 만들어간 것이라 참가자 지식이 너무(..) 풍부해서 주인공 지식과 참가자 지식 분리에 애를 좀 먹었습니다. 폭넓은 상황 형성권과 개별 인물에 대한 몰입은 그런 면에서 긴장 관계인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회합장에서 방을 안내받는 장면에서는 위에서 얘기한 로어틸리아의 반응에 착안해서 쟈네이딘의 동생 얘기를 급조한 결과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 과거를 활용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마스터 티로칸 언급도 그랬고…

쟈네이딘의 제안으로 난민 캠프로 출발한 일행은 캠프를 캐스 하운드가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하운드 떼와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면서 센은 다시 카론에서 겪었던 무아지경 상태에 빠지고, 하운드를 모두 죽이고서는 뜻밖에도 하운드떼와 맞서 싸우던 정착민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로어틸리아가 우두머리를 베자 나머지 하운드떼는 도망가지만, 이제 두 제다이는 동료인 센과 대치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도 정착민들을 지휘하는 자락스의 모습에서 그의 관심이 공동체에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나죠. 반면 우두머리를 혼자 공략하는 로어틸리아는 혼자 행동에 뛰어드는 나름 정통파(..) 제다이의 모습, 그리고 외계 식생에 대한 지식이 드러났고요. 센은 수많은 캐스 하운드에 혼자 맞서서 인도자의 힘을 빌려서 이겨내긴 했지…만, 문제는 인도자가 그 시점에서 물러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고 있다는 점.

캐스 하운드 전투 부분은 판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이전 토론에서 얘기했던 ‘참가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플레이’의 모습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따로 외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참가자의 선택, 즉 참가를 의미있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 진행이었다는 점에서요.(주:물론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플레이에서도 모든 것을 시시콜콜하게 합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은 각자의 영역이 인정되니까, 합의에 따른 플레이에도 참가의 의의가 사는 플레이가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플레이에서 결코 합의를 배제하지 않듯이요.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플레이라는 표현은 저 부분을 RPG의 3 기능론에 기반을 두고 강조한 것일 뿐이지요.) 세 분이 모두 합리적, 혹은 극적인 면에서 좋은 선택을 해서 (정착민 대열을 정비한다, 우두머리를 바로 공략한다, 인도자의 힘을 빌린다) 각자의 성격과 특징을 드러내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하는 재미있는 전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니 전에 승한님이 포도원의 제다이 플레이 기록을 보시고 미리 구성을 짠 ‘전통적인’ RPG 세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생각이 나는군요. 저는 미리 짜둔 구성은 전혀 없었고, 준비라면 참가자들에게 제시할 상황과 조연뿐이었거든요.(주:이번 화 잡담 부분을 보면 들통나지만 사실은 조연 준비조차 잘 안 했습…)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난민 문제가 심각하다’거나 ‘캐스 하운드떼가 난민 캠프를 습격한다’는 상황만 생각했을 뿐 그 귀결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정하지 않았습니다. 참가자가 그 상황에 반응하면 저는 다시 반응하고, 거기 또 참가자가 반응하다가 그 연쇄반응이 끊어지면 다시 새로운 상황을 제시하면 되니까요.

이것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규칙책에서 조언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참가자의 선택을 극대화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죠. 승한님과 승민님의 진행도 제 이해가 옳다면 같은 원리인 듯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구성을 전혀 정하지 않은 진행의 결과물이 구성을 미리 정한 진행과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점은 매우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플레이가 끝날 때쯤에는 인도자의 의지 내지는 인도자의 본질에 대해 의견 충돌이 있어서 토론이 길어졌습니다. 이건 이성과 신비주의 사이에 고민하는 인물인 센의 인물 해석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넬반을 비롯한 나머지 캠페인에도 상당히 중요한지라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었죠. 이에 대한 제 의견을 정리하자면…

1. 인도자는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과는 별 상관없는 이질적 지성, 혹은 우주적 원리이다
-> 즉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며, 센의 뜻만 행하고 물러나는 애완견(..)이 아님
2. 인도자는 따라서 센이라는 인물을 이루는 축 중 이성과 대립축을 이룬다
3. 센이 이성과 신비주의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는 열쇠는 늑대 부족의 전통에 있다
-> 인도자라는 존재를 믿으면서도 유한자의 여과를 거쳐서 이성적 사회로 기능을 해온 늑대 부족의 전통과 분리된 채 인도자만 곁에 있었던 점이 성장기에 센의 혼란을 불러왔다


플레이 후 토론과 아카스트님과 개별적으로 나눈 대화를 종합해서 제 나름대로 정립한 아카스트님의 의견이라면… (제 의견하고 다른 부분만 정리했습니다)

1. 인도자의 의지와 목적은 우주적 규모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이다
2. 따라서 인도자는 이성의 대립축이 아니다
3. 늑대 부족을 비롯한 넬바니안 부족들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닌, 인도자의 뜻과 오랜 전통과 경험이 원동력이 되는, 예를 들면 꿀벌 군집에 더 가깝다


둘 다 센의 내적 모순이 조화할 수 있는 성격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지만, 제가 그 대립을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조화의 지점을 늑대 부족으로 잡았다면 아카스트님은 그 대립을 실질적인 것이 아닌 표면적인 것으로 보고, 인도자와 늑대 부족을 별개의 축으로 보지 않으시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좀 애매한 문제인 게, 좀처럼 합의가 되지 않으면서도 기능적 분립으로 쉽게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이죠. 센이라는 인물의 개별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캠페인 자체가 워낙 주인공 중심으로 짠 것이다 보니 동시에 중요한 캠페인 설정이기도 해서요. 다음 주에 할 갈등 판정에서 센은 아카스트님이 조종하시되, 나머지 참여자들이 거부권을 활발하게 행사하는 방향으로 이 의견 차이를 해소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 안 된다면 어느 한 쪽의 뜻을 따르거나, 어느 쪽도 승복할 수 없다면 합의에 따라 캠페인을 종결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감정적 대립으로 흐르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합의하는 것보다는 캠페인을 하지 않는 것이 나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번 플레이는 역동적 긴장의 세 단계가 모두 나타났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넬반 잠입 수단에 대한 논의가 수단에 대한 긴장이었다면 인도자의 본질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극적 긴장, 그리고 인도자에 대한 의견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는 대립과 상생 사이의 긴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이 긴장이 어떤 식으로 해소되거나 해소되지 않을지는 플레이를 통해 드러나겠지요. 다음 주가 기대됩니다. ^^

포도원의 워게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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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함대시스 함대 시트

어제 포도원의 제다이 세션은 소년H님이 못 오셔서 전에 구상했던 외전 플레이를 했습니다. 단순한 외전이 아니라 플레이 형태 자체가 달랐지만요. 각 참가자가 함대 하나의 역할을 맡아서 함대를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규칙으로 제작한 후, 갈등 판정으로 대규모 전투를 처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도전이 예를 들어 ‘제다이 돌격대를 내보낸다’라면 응대는 ‘아군 함선을 조우 경로로 보낸다’ 하는 식이었죠.

물론 이것만으로는 밋밋하니까, 그 도전과 응대의 인간적·극적 결과를 표현하려고 ‘줌인’ 기법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위의 예에서 사령관이 제다이를 출격시키는 결정을 내렸으면 거기서 장면 전환을 해서 출격을 기다리는 제다이들의 모습을 연기한다든가. 이러한 줌인 장면에서는 각자 인물을 즉석에서 만들거나 골라잡아서 자유롭게 RP했습니다. 줌인 장면의 향방은 도전과 응대 결과를 참조해서 같이 결정했고요.

전투는 엑자르 쿤의 전쟁 중 센타레스 주변에서 벌어진 센타레스 전투였습니다. 캠페인 설정에 있는 과거의 사건이어서 이미 있는 설정과 어긋나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죠. 일단 센타레스 전투는 공화국이 승리했다는 설정이었는데, 주사위를 굴려서 규칙대로 판정하다 보면 시스측이 이길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갈등 판정 개념을 살려서 ‘승리’가 무엇인지 규정하면 끝. 의논 끝에 공화국이 센타레스 성역을 차지하는 것은 어느 쪽이 이기든 마찬가지이되, 판정의 결과에는 다른 것을 걸기로 했습니다. 시스가 판정에 이긴다면 소모전으로 공화국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공화국군이 판정에 이긴다면 적은 피해만으로 센타레스를 통과해서 기다리는 다른 함대와 합류한다고 말이죠. 즉, 센타레스를 공화국이 차지한다는 결과는 아예 판정에 걸지도 않았습니다. 이로써 억지로 규칙을 비틀어서 ‘바람직한’ 결과를 낼 필요 없이 마음껏 판정할 조건은 갖춰졌죠.

혼자 구상할 때는 나름 재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플레이 방식이었는데, 실제 해보니 그 효과는 정말…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규모감과 박진감에 셋 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꼬박 10시간을 앉아, 결국 우주전 하나를 시작부터 끝까지 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러버렸어요. ;ㅁ; 끝나고 나서 다들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서는 감동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죠. 사실 이게 RPG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뭔가 ‘엄청나게’ 놀았다는 기분이었습니다.

보통 플레이 기록 정리할 때 잡담은 빼는데, 센타레스 전투는 아무 준비 없이 플레이의 모든 것이 저 ‘잡담’에서 나왔기 때문에 도저히 뺄 수가 없더라고요. 플레이 외 대화는 잿빛 배경으로 처리했고 안 보이게 끄는 컨트롤도 달아놓았습니다. 버튼 자체도 보이고 안 보이게 조절할 수 있고요. (ActiveX니 어쩌니 하는 익스플로러의 사기를 믿지 마십… 약간의 DHTML밖에 없는데. 위험하고 불편한 ActiveX는 MS 지들이 하지 내가 하나..ㅡㅡ++)

워낙 기니까 크게 3부로 나누어서 대체로 주요 대목별로 구분했습니다. 앞으로 각 부별로 천천히 요약을 올리도록 하지요.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주 (序奏)

1부: 개전의 포화
(1) 폰을 움직이다
(2) 젊은 파일럿에게 축배를
(3) ‘어쩔 수 없는 것’의 의미

2부: Kings and Queens
(1) 킹을 노리다
(2) 포스가 함께하기를
(3) 퀸을 움직이려면
(4) 목표 수정
(5) 체크메이트를 향하여
(6) 죽은 영웅, 산 청소부
(7) 폭풍이 다가오다
(8) 넷 러닝
(9) 사냥을 시작하다
(10) 사냥감 사냥꾼

3부: 난류 (亂流)
(1) 반격
(2) 반전
(3) 신뢰
(4) My Pace
(5) 결투
(6) 누구의 체크메이트?
(7) 나이트를 위한 만가

에필로그

뭐 이게 왜 이렇게 재밌었는지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일단 셋이서 상당히 손발이 척척 맞았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서로 떠오르는 발상을 활발하게 교환하면서 연출도 구성도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나오는 상승 작용도 상당했습니다. 사실 많은 인디 RPG가 그렇듯 포도원의 개들 규칙책도 이런 식으로 플레이할 것을 권장하는데, 보통은 제가 의견을 구해도 별로 의견이 나오지 않는 느낌이었거든요. 근데 이번은 진짜 백지상태로 들어가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플레이 내용이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굉장히 좋은 발상들이 끝도 없이 나와서 플레이를 풍부하게 만들었죠.

본 캠페인의 사건이나 인물과 이런저런 연관이 들어간 것도 굉장히 다층적인 극적, 감정적 의미를 더했습니다. 몇 년 후면 카론에서 죽을 다쓰 프리아트가 살아서 펄펄 날뛰는(…) 모습이라든지 (1부 (1) ‘폰을 움직이다’ 이하 다수), 캠페인 최초로 등장한 다쓰 세데스의 무시무시한 존재감 (3부 (5) ‘결투’ 등), 센타레스 전투가 설정에 나온 이유였던 칼레나 할라크의 죽음 (3부 (7) ‘나이트를 위한 만가’), 전장에서 아주 짧게 스쳐간 베오나드 코티에르와 자락스 토레이 사이에 싹틀 반목에 대한 암시 (2부 (10) ‘사냥감 사냥꾼’), 소년 시절에도 이미 극도의 기술적 재능과 신비한 인도자의 존재라는 두 세계를 오가는 센의 모습 (3부 (4) ‘My Pace’) 등.

캠페인 주요 인물들 외에도 이번 플레이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들도 인상깊었습니다. 젊은 공화국 파일럿들의 즐거운 모습과 가슴 아픈 죽음 (1부 (2) ‘젊은 파일럿에게 축배를’), 점령지에서 징발당해 소모품 취급받으며 죽어가는 시스 군인들 (1부 (3) ‘”어쩔 수 없는 것”의 의미’), 니모 선장 주제곡이 너무 잘 어울렸던 공화국 측 사령관 르베리에 제독 (2부 (1) ‘킹을 노리다’, 3부 (3) ‘신뢰’ 등), 시스 군 휘하 별동대원들의 왁자지껄한 동료애… (2부 (6) ‘죽은 영웅, 산 청소부’) 줌인 장면 동안 셋이서 어림잡아 스무 명 안팎의 인물을 잡으면서 우주전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상당히 폭넓게 조명한 점이 규모감 표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을 만들려고 있는 규칙을 즉석에서 집단에 적용하다 보니 특히 인간관계 부분이 애매했는데, 이것을 ‘외부 상황’ 정도로 얼버무린 결과 시스 군대를 ‘복잡한 공동체’ 배경으로 만든 의미가 좀 희석된 느낌도 들더군요. 복잡한 공동체 배경에 압도적으로 많은 인간관계 주사위는 군대에 얽힌 복잡한 인간관계와 알력들이 나올 때 사용해야지, 주변 지형물이나 숨겨둔 별동대까지 들어간 것은 지금 생각하면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두 지휘관 사이의 알력이나 시스에 대한 공포 등은 잘 어울렸고요. 생각해 보니 자기폭풍 같은 주변 상황 이용은 즉석 장비 규칙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였는데 하고 뒤늦게 후회중..(…) 그렇게 하면 자꾸 주변 환경을 끌어들이는 도전과 응대를 유도하기 때문에 서술도 더욱 입체적이고 창의적이었을 테고요.

그 외에 처음 시작한 1부는 아무래도 모두 생소한지라 다소 무리가 보이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1부 (2) ‘젊은 파일럿..’에서는 젊고 유쾌한 파일럿들의 희생을 유도하느라 논리적으로는 제가 약간 억지를 썼죠. 그냥 정석적으로 적 파일럿과 도그파이트하다 사망..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그 외에 자꾸만 인물이 바뀌다 보니 나중에는 누가 얘기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점은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부분은 말머리를 붙이거나 누가 얘기한다고 서술해서 간단하게 해결했지만요.

기록을 읽으면서야 알았는데, 자꾸만 아카스트님의 의견을 묵살하는 식으로 간 점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의는 아니었는데, 플레이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나 못 보거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그냥 제 생각대로 밀어붙인 데가 꽤 되더라고요. 좋은 의견이 많았는데… 그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흑흑)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단히 즐거운 플레이였습니다. 이방인님은 서로 죽도록 미워하는 두 시스 로드를 플레이하며 정신 건강에 대한 우려를 유발하시는 등(…) 아마 우리 중 제일 다양한 인물을 넘나드는 카멜레온적 괴력을 과시했고, 전투의 구성을 더욱 조이면서도 설정에 어긋나지 않도록 이끈 1등 공신이시기도 했습니다. 아카스트님이 맡으신 르베리에의 대담한 전술은 결국 전투의 중심 갈등을 끌어냈고, 서버가 나갈 때까지 나온 음악 방송은 영화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습니다. 스타워즈 서주 들으면서 상황 설명하는데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로크락 역을 맡아 어린 나이에도 능청스러운 센하고 농담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고요.

무엇보다 아카스트님의 르베리에와 이방인님의 다쓰 프리아트, 두 사령관의 180도 다른 철학과 목적이 전투 전체의 극적 맥락을 끌어가면서 플레이의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야비한 적 앞에서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부하에 대한 애정 사이에 고뇌하는 르베리에의 인간적인 모습, 전쟁을 체스 게임처럼 생각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적과 아군 모두를 파괴하는 다쓰 프리아트의 냉혹함…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공화국의 이상과 시스의 철학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갈등이기도 하고 (뭐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단서는 늘 붙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본 캠페인의 주제와도 닿아 있지요.

어쨌든 여러모로 제가 참가자 복 하나는 진짜 많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드는 플레이였습니다. (사실 제가 이 플레이의 진행자였는지도 애매한 문제… 일단 이걸 RPG라고 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니까요.) 좋은 플레이 함께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리며, 길면서도 박진감 넘쳤던 이 장대한 플레이에 대한 감상을 일단 접습니다. 정말 캠페인 하나쯤 마친 느낌이라니까요.

주인공과 조연

참가자가 제어하는 인물은 PC (Player Character), 진행자가 제어하는 인물은 NPC (Non-Player Character)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법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과 ‘조연’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영어로는 PC는 Protagonist Character, NPC는 Non-Protagonist Character라고 치환해서 생각하고요. 뭐 의미는 좀 중첩됩니다만…

어쨌든 용어를 한글화하는 의미도 있지만, 제가 PC와 NPC를 주인공과 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PC는 주인공, NPC는 조연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가 큽니다. 진행자야 배경 세계 자체를 운용하고 인물도 많이 있지만, 참가자는 보통 하나씩의 인물밖에 없고 그들이 플레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길은 그 인물을 통하는 방법뿐입니다. 따라서 참가자 인물이 플레이의 초점이 아니라면 참가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심각하게 줄어듭니다. 심하면 참가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진행자의 실책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것이 바로 ‘GMPC’인 것 같습니다. GMPC란 진행자 인물인데 주인공인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행자는 이 인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든 이 인물을 돋보이게 하려고 참가자 인물을 들러리로 전락시키죠. 종종 플레이를 정해진 길로 이끌려는 용도도 있으며, 이때는 또 다른 악명높은 진행자 실책인 ‘일방통행식 진행’까지 겹칩니다. 오직 진행자의 자기만족만을 위하기 때문에 이런 인물을 사용하는 것은 RPG의 사회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실책일 뿐 아니라 굉장한 실례라는 것은 길게 얘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GMPC는 극단적인 예일 뿐, 참가자 인물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진정한 주인공으로 유지하려면 ‘GMPC를 만들지 않는다’ 같은 당연한 지침 외에도 주의할 것이 많습니다. 어쨌든 진행자 인물은 꼭 필요하고, 개중에는 주인공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권력이 강한 인물도 있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또 조연의 도움이 필요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일행에 따라붙기도 합니다. 진행자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인물도 있을 수 있고요. 이러한 요소에 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대응합니다.

1. 주인공보다 뛰어난 조연

능력이나 권력, 정보력 등이 주인공보다 뛰어난 조연은 일단 주인공 일행하고는 좀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이런 인물은 자기 일로 바쁘니 주인공 일행 일에 시시콜콜 참견할 시간이 있을 리 없죠. 따라서 주인공 일행과 만나는 것은 그쪽에서 불렀을 때, 혹은 주인공 일행이 찾아갔을 때뿐이고, 이렇게 하면 일단 등장 빈도 면에서 그들이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심리적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눈에 띄게 뛰어난 조연은 주인공의 적, 혹은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협력자 정도가 적합한 것 같습니다. 완전히 믿을 수 있다면 주인공이 그들에게 의지하거나 아니면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 진행자가 그들을 동원할 유혹이 커지니까요.

적이라면 이길 방법이 없는 적이어서는 안 되고, 그 과정이 어렵더라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무시해도 상관없는 적이어야겠죠. 신뢰가 안 가는 협력자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유형인데,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지 판단의 근거가 있되 그 판단이 쉽지 않다면 그 자체가 상당한 게임적 재미일 수 있죠. 우리 편이긴 우리 편이되 감정적으로 사이가 나빠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변형도 극적 재미를 더해줍니다.

이렇듯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이되, 의존하는 대신 주시하면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조연은 극적, 게임적 긴장감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은 뛰어난 조연의 그림자에 묻히는 대신 그 조연들과 극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지요.

때로는 주인공보다 뛰어나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조연도 있습니다. 후원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이럴 경우는 그가 주인공에게 줄 수 있는 도움에 뭔가 제한을 걸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바쁜 사람이라든가 (못 만나게 막는 비서를 막무가내로 돌파해서 들어가자 그 어른이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비서를 질책하더라… 같은 고전적인 진행도 한 번쯤 해볼 만 하죠), 도움에 뭔가 대가가 따른다든가, 후원자도 사람인 만큼 속수무책인 영역이 있다든가, 오히려 이 일에서는 후원자가 주인공의 도움이 필요해서 의뢰를 했다든가, 등등.

즉 믿을 수 있는 뛰어난 조연은 의존도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그 능력과 영향력에 제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뭐 사람인 이상, 심지어는 신이라 해도 뭔가 제한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하니까 (신의 속성이나 영역, 그리고 무엇보다 바쁜 일정!)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2. 조연의 도움이 필요할 때

주인공에게 조연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 아쉬운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조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타나서 ‘너네 내가 필요하지? 음하하하 여기 왔도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연의 조력을 조연 자신이 주도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에게 그만큼 주도권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주인공이 주도해서 조연을 불러들인다면 조연은 참가자가 판단해서 활용하는 게임적 자원일 뿐이지만, 조연이 스스로 나선다면 문제 해결의 능동성이 조연에게 넘어가니까요.

자기 판단 하에 주인공이 조연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물론 주인공이 필요할 때 주인공이 조연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플레이 내에서 참가자에게 어느 정도 판단과 운신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일반 원칙으로 돌아갑니다. 또 연락 가능 여부가 진행자 멋대로 달라지지 않고, 이런 때는 연락이 되고 이런 때는 안 되겠다고 참가자가 판단하거나 최소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건 또 RPG의 게임성과도 연관이 깊겠죠.

어떻게 보면 위에서 얘기한 뛰어난 조연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쁘다거나, 완전히 믿을 수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조연의 능력에 대한 활용에 뭔가 제한이 붙으면 참가자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자 의사 결정을 해야 하고, 그만큼 주도권은 참가자와 주인공에게 넘어갑니다. 참가자의 판단, 주인공의 행동이 필요 없이 도움이 무조건적이라면 주도권은 반대로 진행자와 조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부르지도 않았는데 조연이 멋대로 따라와서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나 만화에서 흔히 보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럴 때도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일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목마른 쪽이 주인공보다는 조연일 뿐이죠. 즉,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 도움을 준다면 그건 조연 자신의 목적이나 주인공에게 받을 수 있는 대가를 위한 것이지 순수하게 주인공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조연으로는 주인공 일행을 따라가서 모험을 해보려는 열혈 소년이라든지, 주인공 중 하나에게 접근해 보려고 수작을 거는 아저씨라든지, 정보를 캐내려는 첩자, 보물을 가로채려는 도둑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조연의 목적은 참가자가 의사 판단을 해서 이용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원, 혹은 장애가 되고, 그만큼 플레이의 내용은 풍부해집니다. (‘좋아, 넌 오늘부터 짐꾼이다!’ ‘저 귀찮은 인간을 어떻게 떼어놓지?’ ‘그때 마주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도와주겠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 그러려면 그러한 의도나 목적을 알려주거나 알아낼 여지를 줘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공은 이유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좋건 싫건 도와주는 조연에게 치여서 플레이의 주도권을 잃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조연이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그건 도움일 뿐 조연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연이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해도 좋은 문제라면 주인공이 다른 활약을 하는 동안 무대 뒤에서 처리하고 (“의뢰하신 총은 다 만들었으니까 와서 찾아가세요.”), 플레이상 직접 드러나는 활약은 주인공이 하면서 조연이 보조하는 정도여야 하죠.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든가, 혹은 주인공이 개입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게 좋습니다.

주인공이 조연의 도움을 받은 최근 예로는 포도원의 제다이 플레이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제다이 일행이 도시에서 잠적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젊은 시스 하나를 어찌어찌 주워서 데리고 있었는데, 도시의 뒷골목에 익숙한 이 청년에게 주인공 하나가 주도적으로 얘기해서 숨을 곳을 마련하게 했죠.

자락스 토레이: “아를란. 이 주위에 이만한 인원이 조용하게 숨을곳 없나?”
로키: “이..이 주위에? 없진 않지만 좀 동네가..”
로키: 아를란은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군요.
자락스 토레이: “이 주위에서 활동했으면 당연히 숨을곳 정도야 여기저기 스승 모르게 마련해뒀을 거 아냐. 내놔봐. 지금 난리가 났다고.”
로키: “알았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주소를 하나 말합니다.

캔티나 지하실인 은신처를 이용하려면 캔티나 주인과 교섭해야 했고, 이 사람은 아를란이 아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아를란의 주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를란의 역할은 캔티나를 찾아내고 주인과 연결하는 정도로 끝내고 싶어서 교섭 장면은 다음과 같이 진행했습니다.

로키: 아를란은 이곳에 있는 은닉처에서 지내고 싶다는 눈치를 주지만
로키: 신문을 봤는지 로디안은 꺼리는 낌새군요.
로키: 아를란은 설득하다가 슬슬 참을성이 떨어져 가고..
로키: 자칫하다 싸움이라도 벌이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센 테즈나: @아를란의 어깨를 잡고 진정시킨 다음 입을 엽니다.
센 테즈나: “충분히 사례는 하겠습니다. 반대로 그쪽이 비밀을 지켜 주신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일 거라 봅니다만.”
센 테즈나: “이미 이곳으로 저희가 들어오는 걸 본 사람이 있을 테니 그게 알려지면 이쪽의 행적을 알기 위해 누군가 추적을 해올지 모르는 일이죠.”
로키: “그건 협박이오?” 로디안은 툭 튀어나온 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군요.
센 테즈나: “아니요, 조언입니다.”

주목도도 낮추고 시간도 절약할 겸 조연끼리의 대화는 요약하고, 아를란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해서 센의 개입이 필요하게 했습니다. 물론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더라면 실제로 싸움이 나서 문제는 더 커졌겠죠. 센의 개입 시점부터는 다시 직접 화법으로 전환해서 주목도를 높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연의 도움은 주인공이 스스로 활용하는 자원이 되고, 조연의 활약이 있어도 주도권은 주인공에게 두는 것이 제 방침이라면 방침입니다.

3. 일행에 따라붙는 조연

가장 위험한 경우 중 하나로, 위에서도 얘기한 아를란과 관련해 고민과 토론이 들어간 부분이기도 합니다. 진행자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기가 관심 있는 인물을 돋보이게 하고 싶고, 그건 자칫하면 참가자와 이해 충돌 상황이 되기 쉬우니까요. 이 인물이 플레이의 중심인 일행에 상주하면 이해 충돌은 한결 심해집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위에 말한 GMPC겠죠.

하지만, 이럴 때도 주도권은 참가자와 주인공에게 있어야 한다는 일반 원칙만 기억한다면 의외로 해결은 간단한 것 같습니다. 우선 일행에 합류 여부를 진행자가 아닌 참가자가 결정하게만 두어도 문제는 대부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참가자끼리 의견이 갈릴 때일 테니, 참가자가 몇 명이나 찬성해야 하는지, 미온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 찬성해야 할지 등 의사결정 과정상의 문제도 있지만요.

일단 일행에 합류하면 역시 조연에게 도움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연의 활약은 원칙적으로 주인공 주도로, 활약 정도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을 보조하거나 무대 뒤에서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정도, 조연 자신이 능동적으로 활약할 때는 조연 자신의 이유로… 같은 사항을 기억하면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일행과 행동을 같이하는 특수 상황 때문에 조연이 행동하는 이유가 일행의 목적과 부합하는 경우도 많아질 것이고, 그런 식으로 쌓이는 신뢰와 감정적 유대는 플레이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죠.

결국, 중요한 건 주인공을 더욱 주인공답게 하는 조연인가, 아니면 주인공에게서 주도권을 빼앗는 조연인가 하는 문제일 뿐, 일행 상주 조연도 전자라면 잘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행자로서는 진행자의 재미뿐 아니라 참가자의 재미까지 일부 누린다는 점에서 색다른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일행 상주 조연은 분위기를 띄우는 용도라든가 자잘하게 써먹을 데도 있고요.

로키: 숙소로 돌아와 문을 열자..
로키: 순간적으로 쿵쾅거리는 음악과 함께 마치 물흐르듯 움직이는 색색의 트윌렉 댄서들의 홀로 이미지가 방안에 가득하군요.
로키: 세 사람이 돌아온 것을 보고 아를란은 황급히 동영상을 끕니..

4. 진행자의 마음에 드는 조연

다른 항목과 겹치는 때도 많지만 개념적으로는 별개로 진행자 자신이 어떤 조연에게 굉장히 흥미가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플레이에 자꾸만 끌어넣고 싶고, 이 인물의 갈등이나 고뇌를 보여주고 싶고 말이죠. 이러한 사항을 참가자가 대응 가능하고 플레이 맥락에 어울리는 형태로 잘 엮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참가자들이 별 관심도 없고 플레이 내용을 깎아먹는데도 자꾸 이 인물에게 주목하고 싶어진다면 문제가 큽니다.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대화 맥락과 상관없이 자기 옛날 캠페인이나 인물 얘기를 늘어놓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행동이지요.

참가자 개입이나 플레이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그 인물 자체에 가는 관심이라는 면에서 이런 식의 흥미는 진행자로서 게임 요소에 갖는 흥미라기보다는 소설가가 소설 속의 인물에게 갖는 흥미에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제 개인적인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냥 소설 씁니다. (…) 얼마 전에 썼던 포도원의 제다이 캠페인 배경 소설들이 그 예입니다.

이렇게 하면 진행자의 순전히 개인적 흥미에 귀중한 플레이 시간을 소모하지도 않고,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미리 공개해서 플레이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알 수 없는 내용일 때는 참가자와 주인공 지식 분리가 필요할 것입니다만, 그건 제 경험상으로는 대체로들 잘 하니까요.

진행은 세계 만들기, 문학 등 다른 창의적인 활동과도 관계가 깊으니, 플레이 진행을 벗어나 창의성을 다른 방향으로 배출하는 것도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세션 진행을 하는 시간에는 진행자로서 행동해야겠죠. 진행자의 역할이란 자신의 개인적 창의성을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닌, 그 창의성을 기반으로 참가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사회적인 놀이의 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가자가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은 주인공을 통하는 것이므로 그 주인공의 주도성을 보존하는 것이 참가자의 참여를 확보하는 것이며, 이것은 참가자의 당연한 요구인 동시에 진행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가자가 빠진 세션

RPG는 여럿이서 하는 놀이이기 때문에 참가자가 한 사람이라도 빠지는 것은 큰 차질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유로 예고 후, 혹은 예고 없이 참가자가 결석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이럴 때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대응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빠진 이유를 갖다 붙이고 속행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각 세션을 될 수 있으면 하나의 단위 (예를 들어 캠페인 시간상 하루)로 진행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게 잘 안 되면 최소한 세션을 맺을 때 하나의 장면을 완전히 끝낸다거나요. 이렇게 하면 다음 세션에 참가자가 하나 빠져도 그 주인공이 없는 이유를 급조한 후 세션에 나온 참가자들과 계속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포도원의 제다이 8화, 그리고 9화부터 12화였는데, 3인 참가자 중에서 8화에는 이방인님, 9화에는 소년H님이 빠진 연속타를 먹었었죠. (흑흑.. 아카스트님을 붙잡고 웁니(?)) 그래서 8화에서는 ‘일행이 흩어져서 정보를 찾고 있다’라는 식으로 둘러대고 아카스트님과 소년H님 쪽을 진행했습니다. 그다음 9화 첫머리에서 이방인님의 주인공이 별 성과 없이 숙소로 돌아오는 연결부를 짧게 했죠.

9화에서는 소년H님의 주인공인 로어틸리아가 없으니까 ‘정보를 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바람쐬러(..) 나갔다’라고 한 후 아카스트님과 이방인님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8화 말에 이미 9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밤은 폭풍이 있을 것 같다고 묘사한 후였으니까, 바람 쐬겠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뭔가 일이 있다는 암시를 연결하기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참가자 결석이 몇 회에 걸쳐 계속되면 주인공이 빠진 이유도 좀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소년H님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정으로 9, 10, 11, 12화를 빠지면서 로어틸리아가 일행에서 일탈한 시간도 24시간이 넘었고, 그래서 귀환 후 상의해서 ‘바람 쐬러’ 나간 로어틸리아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바람 쐬러 나갔다가 바람났다…?) 정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로어틸리아 24라는 글은 저와 소년H님만 볼 수 있게 권한 설정을 해서 위키의 장점 또한 십분 활용할 수 있었죠.

이 방법의 또 다른 장점은 참가자의 결석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해 캠페인의 내용에 깊이를 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로어틸리아의 일탈은 졸지에 어미 닭 없는 병아리 나이트 없는 파다완 일행이 된 자락스와 센이 공의회로 귀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코루선트의 상황으로 내용이 이어질 이유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소년H님의 귀환 후 재회 장면을 연출하는 재미도 있었죠.

로키: 넓은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시야가 순간 환해지는군요.
로키: 눈이 적응되자 둥근 방안에 둘러앉은 열두 제다이 마스터의 모습이 보이고
로키: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은 로어틸리아,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작은 아이가 있습니다.
자락스 토레이: “……!….” -나이트 로어틸리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가는 이내 다시 표정을 되돌립니다.
로어틸리아: @미묘한 미소를 띄고 인사합니다.
센 테즈나: @로어틸리아를 잠깐 놀란 듯 바라보다 다가가 서서 목례를 합니다.

자락스 토레이: ‘….무사했구나……’ -보일듯 말듯 살짝 미소

이렇듯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참가자가 빠진 것은 캠페인의 위기에서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제약이 창의성을 자극한다는 원칙은 참가자의 부재도 예외가 아니니까요.

2. 외전을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참가자가 한 명이라도 빠지면 본 캠페인 진행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세션에 악당이 ‘훗훗훗 드디어들 나타나셨나’ 하면서 등장하는 걸로 끝났다든지 해서, 갑자기 땅이 갈라져서 주인공 하나를 삼켰다는 식이 아니면 부재를 설명하기 어려울 때도 있죠.

이럴 때 제가 선호하는 방법은 캠페인 본편을 벗어나 외전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알데마르 캠페인 때 주인공 셋 중 하나가 빠져서 나머지 둘의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진행한 것이 그 예입니다. 아예 두 명이 없었을 때는 남은 한 명의 과거 설정을 RP로 재현한 일도 있습니다.

외전 역시 캠페인에 깊이를 더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이야기, 인물 간의 관계 등을 통해 본편 캠페인과는 다른 각도에서 인물과 사건을 조명한다는 점이 재미있죠.

외전의 또 다른 효용은 참가자의 결석보다 한결 난감한 경우, 즉 진행자가 빠졌을 때 대응책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경우 참가자 중 하나가 부진행자 역할을 맡아서 진행자가 나올 수 없을 때 외전을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더월드 3기의 경우 진행자 제노시아님이 사정이 있을 때 제가 외전인 브루하 폭주전대를 진행한 경우가 그 예입니다. 그 외에도 참가자가 빠져서 본편 진행이 어려울 때 본편의 진행자인 제노시아님이 제가 진행하는 외전에서 참가자가 되기도 했었죠.

브루하 폭주전대의 경우 비슷한 시간대일 뿐 전혀 다른 캠페인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 배경이 된 가상의 도시 뉴 세인트 헬렌이 나중에 본편에 합류한 유르겐의 배경에 나오는 등 연계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본편의 주인공 하나와 조연 하나가 데이트하는 내용을 연애물 규칙인 얼음깨기 (Breaking the Ice)로 오체스님과 함께 진행하기도 했고요. 이렇듯 똑같이 외전이라고 해도 본편과 연계 정도, 규칙 등에서 여러 가지 변형이 있기 때문에 더욱 다채로운 캠페인이 될 수 있습니다.

3. 주인공을 다른 참여자가 제어한다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대응으로는 다른 참여자, 보통은 진행자가 해당 주인공을 제어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별로 선호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의 부재를 설명할 필요 없이 본편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본편을 속행하거나 외전을 하는 방법에서도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로어틸리아의 예에서 로어틸리아가 바람 쐰다며 나갔다고 진행자인 제가 서술한 대목이라든지, 로어틸리아가 다른 일행에게 보낸 홀로크론 메시지를 제가 간접 인용으로 전한 부분 등이 그 예입니다.

주인공을 타인이 제어하는 방법에는 소극적인 방법도 있고, 적극적인 방법도 있습니다. 소극적인 방법은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다는 정도만 알리고, 필요한 최소한의 행동만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 가장 적극적으로는 진행자 혹은 다른 참가자가 그 주인공의 모든 연기를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겠죠. 전투 정도가 아니면 드문 경우겠지만요.

4. 세션을 쉰다

개인적으로는 참가자 한 명이 예고 없이 빠져서 세션을 쉰 적은 없으며, 이는 가장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위에 말했듯 참가자가 빠지면 차질이 생기지만, 플레이를 자꾸 쉬면 캠페인의 맥이 끊어지는데다, 성실하게 참여한 다른 참가자들에게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석한 사람이 있는 김에 팀원들끼리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가끔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놀이를 한다든가, 캠페인의 제반 사항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든가. 진행자나 참가자가 빠져서 본편을 진행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전혀 다른 캠페인을 준비해서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이런 방법은 위에서 얘기한 외전의 변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캠페인의 세션은 쉬지만 플레이는 하니까요.

어쨌든 다른 준비를 한 게 아니면 참가자가 빠져서 세션을 쉬는 것은 원칙이라기보다는 예외인 것이 바람직한 듯합니다. 참가자가 빠지는 것 자체가 예외인 게 바람직하듯 말이죠.

이상과 같이 참가자 (혹은 진행자)가 빠졌을 때 생각할 수 있는 대응책들을 나열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도 있을 것이고, 각 팀과 캠페인 사정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죠. 약속은 소중하지만 때로 깨지기도 합니다. (저도 최근에 그런 경우가 있었죠..ㅠㅠ) 이에 대한 대응에 따라 캠페인에 대한 의욕, 나아가서는 캠페인의 존속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참가자 부재에 대한 대응은 진행자에게, 그리고 팀에게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재가 잦다면 참가자가 계속해서 참가할 수 있는지, 시간대가 적당한지 하는 의논이 필요하겠지요. RPG에 만병통치약이 있다면 그건 팀원 간의 활발한 의사소통뿐이니까요.

비동시성 플레이의 가능성과 도전

최근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이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들의 시험기간이 서로 달라서 근 한달간 플레이를 쉬게 된데다가, 진행자 사정으로 방학중 플레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한달 쉬는 것도 캠페인 존속이 불확실한데 ORPG에서 네 달을 쉰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캠페인을 그만둔다는 얘기나 다름없으니까요.

이 시점에서 제가 제시한 방향은 플레이의 체제를 아예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채팅으로 하는 동시성 플레이가 아닌, 글로 쓰는 비동시성 플레이로 말이죠. 얼마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안인중님의 PBS(Play by System)와 TRPG (외부 링크, 다이스&챗 로그인 필요) 시리즈, 蘭님과 나누었던 PBEM 얘기, 그리고 게시판 플레이용 규칙인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 번역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얘기가 시작돼서 결국 방학이 끝날 때까지는 캠페인을 수정주의 역사 규칙으로 전환해 위키상에서 플레이하기로 했습니다. 규칙 뿐만 아니라 캠페인의 시간축 자체가 달라져서, 본 캠페인의 사건을 미래 (제 생각에는 약 100년 후)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형식의 외전 플레이가 되었습니다. 설정 결과 세 주인공이 서로를 배신하고 후대까지 악명이 자자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게 되었죠. (…) 그리고 이 미래가 바로 외전의 시간대인 것입니다.

이렇게 채팅으로 하는 동시성 플레이에서 위키로 하는 비동시성 플레이로 전환한 것은 여러가지 흥미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한다고 봅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것은 캠페인 자체의 존속. 안인중님의 말씀마따나, RPG를 하기 위해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지만 사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일주일에 3~4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에’ 3~4시간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채팅 플레이가 어려운 사정이 있어도 비동시성 플레이 체제로
전환하면 형태는 달라도 캠페인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꾸준하게 유지될 때의 얘기지만요.

여기에 부수되는 것이 시간 부담이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한번에 뭉텅이 시간을 내야 하는 동시성 플레이와는 달리 비동시성 플레이는 틈이 날 때 짬짬이 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또하나, 이건 비동시성 플레이 전반이라기보다는 수정주의 역사의 특징이지만 TRPG 규칙을 사용하는 비동시성 플레이와는 달리 진행자가 계속해서 글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도 없습니다. (사실은 진행자도 없긴 합니..퍽)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포도원의 개들을 잠시 게시판 플레이로 했을 때 느낀 점인데, 동시성 플레이에 특화된 규칙을 비동시성 플레이에 그대로 사용하려고 하면 동시성 플레이의 열등한 대체물밖에 될 수가 없더군요. 제아무리 급하게 글을 올려도 채팅 기준으로는 속터지도록 느리니… 반면 수정주의 역사의 경우 일주일에 글이 3~4개만 올라와도 플레이가 충분한 속도로 진행되므로 글로 하는 플레이에 보다 적합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비동시성 플레이에는 비동시성 플레이에 특화된 체계와 규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비동시성 플레이가 제공하는 또다른 가능성이라면 캠페인의 사건을 신선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역시 수정주의 역사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동시성 플레이와 비동시성 플레이의 성격과도 연관이 깊은 것입니다. 채팅이나 대면상황은 닥쳐오는 사건을 그때그때 ‘겪는’ 데에 적합하다면, 시간 간격을 두고 생각해 가며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사건의 의미와 진상을 ‘음미하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수정주의 역사라는 규칙 고유의 특성상, 캠페인의 사건을 미래에서 바라본다는 점은 더더욱 캠페인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미래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먼저 진행했기 때문에 나중에 본 캠페인으로 돌아왔을 때는 일정한 방향성, 혹은 제약이 생겨 있을 테니까요. 어려움도 있겠지만 확실히 생각해볼 거리는 풍부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사태(?) 이전부터 다소 침체되어 있었던 캠페인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점들을 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대치일 뿐이고, 예상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중 첫번째는 꾸준한 흥미유지가 가능할까 하는 점입니다. 동시성 플레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비동시성 플레이는 많은 경우 정기적으로 모여야 하는 제약이 없기 때문에 흥미를 잃으면 슬그머니 그만두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소재가 세 참가자분이 만든 인물인만큼 어느정도 흥미의 요소는 갖춰졌지만, 흐지부지되지 않고 계속해서 플레이를 이끌어 가는데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두번째는 캠페인의 미래가 어느정도 결정된다는 어려움입니다. 이는 위에서 말했듯 새로운 자극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제약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채팅 플레이로 돌아왔을 때 정해진 미래에 맞추기 위해 진행자가 치밀한 구성을 짜고 그 속에서 참가자들이 선택을 제약받을 위험도 있죠. 100년 후의 미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꼭 당대의 진상에 부합하라는 법은 없는만큼 옴쭉달싹도 못할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캠페인의 큰 줄기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정도의 제약은 오히려 창의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문제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도전으로 생각하고 있지만요.

세번째는 선택한 매체 고유의 특징이지만, 위키라는 매체의 생소함이 있습니다. 전에 정보관리에 대한 단상 위키 편에서 다루었듯 위키는 아직 생소하고 사용편의가 떨어지는 매체에 속합니다. 그래서 게시판 플레이가 낫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버젼 비교, RSS 내보내기, 백링크 기능, 풍부한 구문 지원 등 위키의 지나치게(..) 뛰어난 기능성 때문에 결국 위키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사용성 부분은 자세한 설명서를 작성해서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앞으로의 플레이에 어떻게 하면 위키라는 매체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활용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이상과 같이 플레이 체제를 동시성 플레이인 ORPG 채팅에서 비동시성 플레이인 위키 플레이로 전환한데 대한 제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비동시성 플레이는 동시성 플레이의 대체물을 넘어 전혀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공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지는 플레이 경험만이 증명해 주겠죠. 방학이 끝난 다음에 이러한 기대와 문제의식이 얼마나 드러났는지 비교해 보아도 재미있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