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과 조연

참가자가 제어하는 인물은 PC (Player Character), 진행자가 제어하는 인물은 NPC (Non-Player Character)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법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과 ‘조연’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영어로는 PC는 Protagonist Character, NPC는 Non-Protagonist Character라고 치환해서 생각하고요. 뭐 의미는 좀 중첩됩니다만…

어쨌든 용어를 한글화하는 의미도 있지만, 제가 PC와 NPC를 주인공과 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PC는 주인공, NPC는 조연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가 큽니다. 진행자야 배경 세계 자체를 운용하고 인물도 많이 있지만, 참가자는 보통 하나씩의 인물밖에 없고 그들이 플레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길은 그 인물을 통하는 방법뿐입니다. 따라서 참가자 인물이 플레이의 초점이 아니라면 참가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심각하게 줄어듭니다. 심하면 참가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진행자의 실책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것이 바로 ‘GMPC’인 것 같습니다. GMPC란 진행자 인물인데 주인공인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행자는 이 인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든 이 인물을 돋보이게 하려고 참가자 인물을 들러리로 전락시키죠. 종종 플레이를 정해진 길로 이끌려는 용도도 있으며, 이때는 또 다른 악명높은 진행자 실책인 ‘일방통행식 진행’까지 겹칩니다. 오직 진행자의 자기만족만을 위하기 때문에 이런 인물을 사용하는 것은 RPG의 사회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실책일 뿐 아니라 굉장한 실례라는 것은 길게 얘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GMPC는 극단적인 예일 뿐, 참가자 인물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진정한 주인공으로 유지하려면 ‘GMPC를 만들지 않는다’ 같은 당연한 지침 외에도 주의할 것이 많습니다. 어쨌든 진행자 인물은 꼭 필요하고, 개중에는 주인공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권력이 강한 인물도 있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또 조연의 도움이 필요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일행에 따라붙기도 합니다. 진행자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인물도 있을 수 있고요. 이러한 요소에 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대응합니다.

1. 주인공보다 뛰어난 조연

능력이나 권력, 정보력 등이 주인공보다 뛰어난 조연은 일단 주인공 일행하고는 좀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이런 인물은 자기 일로 바쁘니 주인공 일행 일에 시시콜콜 참견할 시간이 있을 리 없죠. 따라서 주인공 일행과 만나는 것은 그쪽에서 불렀을 때, 혹은 주인공 일행이 찾아갔을 때뿐이고, 이렇게 하면 일단 등장 빈도 면에서 그들이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심리적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눈에 띄게 뛰어난 조연은 주인공의 적, 혹은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협력자 정도가 적합한 것 같습니다. 완전히 믿을 수 있다면 주인공이 그들에게 의지하거나 아니면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 진행자가 그들을 동원할 유혹이 커지니까요.

적이라면 이길 방법이 없는 적이어서는 안 되고, 그 과정이 어렵더라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무시해도 상관없는 적이어야겠죠. 신뢰가 안 가는 협력자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유형인데,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지 판단의 근거가 있되 그 판단이 쉽지 않다면 그 자체가 상당한 게임적 재미일 수 있죠. 우리 편이긴 우리 편이되 감정적으로 사이가 나빠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변형도 극적 재미를 더해줍니다.

이렇듯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이되, 의존하는 대신 주시하면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조연은 극적, 게임적 긴장감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은 뛰어난 조연의 그림자에 묻히는 대신 그 조연들과 극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지요.

때로는 주인공보다 뛰어나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조연도 있습니다. 후원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이럴 경우는 그가 주인공에게 줄 수 있는 도움에 뭔가 제한을 걸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바쁜 사람이라든가 (못 만나게 막는 비서를 막무가내로 돌파해서 들어가자 그 어른이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비서를 질책하더라… 같은 고전적인 진행도 한 번쯤 해볼 만 하죠), 도움에 뭔가 대가가 따른다든가, 후원자도 사람인 만큼 속수무책인 영역이 있다든가, 오히려 이 일에서는 후원자가 주인공의 도움이 필요해서 의뢰를 했다든가, 등등.

즉 믿을 수 있는 뛰어난 조연은 의존도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그 능력과 영향력에 제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뭐 사람인 이상, 심지어는 신이라 해도 뭔가 제한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하니까 (신의 속성이나 영역, 그리고 무엇보다 바쁜 일정!)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2. 조연의 도움이 필요할 때

주인공에게 조연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 아쉬운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조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타나서 ‘너네 내가 필요하지? 음하하하 여기 왔도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연의 조력을 조연 자신이 주도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에게 그만큼 주도권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주인공이 주도해서 조연을 불러들인다면 조연은 참가자가 판단해서 활용하는 게임적 자원일 뿐이지만, 조연이 스스로 나선다면 문제 해결의 능동성이 조연에게 넘어가니까요.

자기 판단 하에 주인공이 조연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물론 주인공이 필요할 때 주인공이 조연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플레이 내에서 참가자에게 어느 정도 판단과 운신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일반 원칙으로 돌아갑니다. 또 연락 가능 여부가 진행자 멋대로 달라지지 않고, 이런 때는 연락이 되고 이런 때는 안 되겠다고 참가자가 판단하거나 최소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건 또 RPG의 게임성과도 연관이 깊겠죠.

어떻게 보면 위에서 얘기한 뛰어난 조연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쁘다거나, 완전히 믿을 수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조연의 능력에 대한 활용에 뭔가 제한이 붙으면 참가자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자 의사 결정을 해야 하고, 그만큼 주도권은 참가자와 주인공에게 넘어갑니다. 참가자의 판단, 주인공의 행동이 필요 없이 도움이 무조건적이라면 주도권은 반대로 진행자와 조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부르지도 않았는데 조연이 멋대로 따라와서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나 만화에서 흔히 보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럴 때도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일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목마른 쪽이 주인공보다는 조연일 뿐이죠. 즉,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 도움을 준다면 그건 조연 자신의 목적이나 주인공에게 받을 수 있는 대가를 위한 것이지 순수하게 주인공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조연으로는 주인공 일행을 따라가서 모험을 해보려는 열혈 소년이라든지, 주인공 중 하나에게 접근해 보려고 수작을 거는 아저씨라든지, 정보를 캐내려는 첩자, 보물을 가로채려는 도둑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조연의 목적은 참가자가 의사 판단을 해서 이용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원, 혹은 장애가 되고, 그만큼 플레이의 내용은 풍부해집니다. (‘좋아, 넌 오늘부터 짐꾼이다!’ ‘저 귀찮은 인간을 어떻게 떼어놓지?’ ‘그때 마주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도와주겠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 그러려면 그러한 의도나 목적을 알려주거나 알아낼 여지를 줘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공은 이유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좋건 싫건 도와주는 조연에게 치여서 플레이의 주도권을 잃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조연이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그건 도움일 뿐 조연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연이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해도 좋은 문제라면 주인공이 다른 활약을 하는 동안 무대 뒤에서 처리하고 (“의뢰하신 총은 다 만들었으니까 와서 찾아가세요.”), 플레이상 직접 드러나는 활약은 주인공이 하면서 조연이 보조하는 정도여야 하죠.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든가, 혹은 주인공이 개입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게 좋습니다.

주인공이 조연의 도움을 받은 최근 예로는 포도원의 제다이 플레이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제다이 일행이 도시에서 잠적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젊은 시스 하나를 어찌어찌 주워서 데리고 있었는데, 도시의 뒷골목에 익숙한 이 청년에게 주인공 하나가 주도적으로 얘기해서 숨을 곳을 마련하게 했죠.

자락스 토레이: “아를란. 이 주위에 이만한 인원이 조용하게 숨을곳 없나?”
로키: “이..이 주위에? 없진 않지만 좀 동네가..”
로키: 아를란은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군요.
자락스 토레이: “이 주위에서 활동했으면 당연히 숨을곳 정도야 여기저기 스승 모르게 마련해뒀을 거 아냐. 내놔봐. 지금 난리가 났다고.”
로키: “알았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주소를 하나 말합니다.

캔티나 지하실인 은신처를 이용하려면 캔티나 주인과 교섭해야 했고, 이 사람은 아를란이 아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아를란의 주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를란의 역할은 캔티나를 찾아내고 주인과 연결하는 정도로 끝내고 싶어서 교섭 장면은 다음과 같이 진행했습니다.

로키: 아를란은 이곳에 있는 은닉처에서 지내고 싶다는 눈치를 주지만
로키: 신문을 봤는지 로디안은 꺼리는 낌새군요.
로키: 아를란은 설득하다가 슬슬 참을성이 떨어져 가고..
로키: 자칫하다 싸움이라도 벌이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센 테즈나: @아를란의 어깨를 잡고 진정시킨 다음 입을 엽니다.
센 테즈나: “충분히 사례는 하겠습니다. 반대로 그쪽이 비밀을 지켜 주신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일 거라 봅니다만.”
센 테즈나: “이미 이곳으로 저희가 들어오는 걸 본 사람이 있을 테니 그게 알려지면 이쪽의 행적을 알기 위해 누군가 추적을 해올지 모르는 일이죠.”
로키: “그건 협박이오?” 로디안은 툭 튀어나온 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군요.
센 테즈나: “아니요, 조언입니다.”

주목도도 낮추고 시간도 절약할 겸 조연끼리의 대화는 요약하고, 아를란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해서 센의 개입이 필요하게 했습니다. 물론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더라면 실제로 싸움이 나서 문제는 더 커졌겠죠. 센의 개입 시점부터는 다시 직접 화법으로 전환해서 주목도를 높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연의 도움은 주인공이 스스로 활용하는 자원이 되고, 조연의 활약이 있어도 주도권은 주인공에게 두는 것이 제 방침이라면 방침입니다.

3. 일행에 따라붙는 조연

가장 위험한 경우 중 하나로, 위에서도 얘기한 아를란과 관련해 고민과 토론이 들어간 부분이기도 합니다. 진행자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자기가 관심 있는 인물을 돋보이게 하고 싶고, 그건 자칫하면 참가자와 이해 충돌 상황이 되기 쉬우니까요. 이 인물이 플레이의 중심인 일행에 상주하면 이해 충돌은 한결 심해집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위에 말한 GMPC겠죠.

하지만, 이럴 때도 주도권은 참가자와 주인공에게 있어야 한다는 일반 원칙만 기억한다면 의외로 해결은 간단한 것 같습니다. 우선 일행에 합류 여부를 진행자가 아닌 참가자가 결정하게만 두어도 문제는 대부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참가자끼리 의견이 갈릴 때일 테니, 참가자가 몇 명이나 찬성해야 하는지, 미온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 찬성해야 할지 등 의사결정 과정상의 문제도 있지만요.

일단 일행에 합류하면 역시 조연에게 도움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연의 활약은 원칙적으로 주인공 주도로, 활약 정도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을 보조하거나 무대 뒤에서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정도, 조연 자신이 능동적으로 활약할 때는 조연 자신의 이유로… 같은 사항을 기억하면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일행과 행동을 같이하는 특수 상황 때문에 조연이 행동하는 이유가 일행의 목적과 부합하는 경우도 많아질 것이고, 그런 식으로 쌓이는 신뢰와 감정적 유대는 플레이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죠.

결국, 중요한 건 주인공을 더욱 주인공답게 하는 조연인가, 아니면 주인공에게서 주도권을 빼앗는 조연인가 하는 문제일 뿐, 일행 상주 조연도 전자라면 잘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행자로서는 진행자의 재미뿐 아니라 참가자의 재미까지 일부 누린다는 점에서 색다른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일행 상주 조연은 분위기를 띄우는 용도라든가 자잘하게 써먹을 데도 있고요.

로키: 숙소로 돌아와 문을 열자..
로키: 순간적으로 쿵쾅거리는 음악과 함께 마치 물흐르듯 움직이는 색색의 트윌렉 댄서들의 홀로 이미지가 방안에 가득하군요.
로키: 세 사람이 돌아온 것을 보고 아를란은 황급히 동영상을 끕니..

4. 진행자의 마음에 드는 조연

다른 항목과 겹치는 때도 많지만 개념적으로는 별개로 진행자 자신이 어떤 조연에게 굉장히 흥미가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플레이에 자꾸만 끌어넣고 싶고, 이 인물의 갈등이나 고뇌를 보여주고 싶고 말이죠. 이러한 사항을 참가자가 대응 가능하고 플레이 맥락에 어울리는 형태로 잘 엮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참가자들이 별 관심도 없고 플레이 내용을 깎아먹는데도 자꾸 이 인물에게 주목하고 싶어진다면 문제가 큽니다.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대화 맥락과 상관없이 자기 옛날 캠페인이나 인물 얘기를 늘어놓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행동이지요.

참가자 개입이나 플레이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그 인물 자체에 가는 관심이라는 면에서 이런 식의 흥미는 진행자로서 게임 요소에 갖는 흥미라기보다는 소설가가 소설 속의 인물에게 갖는 흥미에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제 개인적인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냥 소설 씁니다. (…) 얼마 전에 썼던 포도원의 제다이 캠페인 배경 소설들이 그 예입니다.

이렇게 하면 진행자의 순전히 개인적 흥미에 귀중한 플레이 시간을 소모하지도 않고,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미리 공개해서 플레이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알 수 없는 내용일 때는 참가자와 주인공 지식 분리가 필요할 것입니다만, 그건 제 경험상으로는 대체로들 잘 하니까요.

진행은 세계 만들기, 문학 등 다른 창의적인 활동과도 관계가 깊으니, 플레이 진행을 벗어나 창의성을 다른 방향으로 배출하는 것도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세션 진행을 하는 시간에는 진행자로서 행동해야겠죠. 진행자의 역할이란 자신의 개인적 창의성을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닌, 그 창의성을 기반으로 참가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사회적인 놀이의 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가자가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은 주인공을 통하는 것이므로 그 주인공의 주도성을 보존하는 것이 참가자의 참여를 확보하는 것이며, 이것은 참가자의 당연한 요구인 동시에 진행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7 thoughts on “주인공과 조연

  1. Wishsong

    GMPC에 대해서는 플레이어 시절 심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 시스템 어느 공식 캠페인에 대해 아주 깊게 알고 있고, 룰에 대해서도 매우 능통한 사람 밑에서 플레이를 했는데,

    ……NPC들의 심부름, NPC들의 음모의 장기말 역할만 하다가 끝나더군요. 뭐랄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룰을 과시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보인다… 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한 때는 사정이 있어서 1주일을 쉬었는데, 다음 주에 들어가서 전투를 하다가 옆의 플레이어가 농담처럼 말하더군요. “승한님 캐릭터는 NPC로 돌아와 주세요!”

    …. 알고 보니, 제가 빠진 주에 제 캐릭터를 마스터가 담당했는데, “자기 로망”이 담긴 옵션과 규칙을 동원해 전투에서 맹활약을 해서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아무리 그 사람이 많은 시스템과 룰을 꽤뚫고,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을지라도 다시는 같이 RPG를 할 생각이 안 들더군요.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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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아니 그 괴담의 주인공이셨단 말입..? (퍽) 참가자가 돌아오자 오히려 진행자가 돌렸던 그 인물을 돌려달라던 건 어디선가 들은 얘기 같거든요. 업그레이드까지 됐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까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여튼 정말 심하군요. 일방통행식 진행과 함께 GMPC가 최악의 진행자 실책이라는 심증은 굳어만 갑니..(..) 둘 다 참가자의 주도권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죠, 생각해 보면. 사회적인 놀이인 RPG에서 자기 로망과 지식의 일방적 과시 같은 사회성 없는 행동을 많이 본다는 건 묘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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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카스트

    포도원의 제다이에 등장하는 최강의 GMPC는 역시 아를란이겠죠?

    자, 일단 아를란이 언급하거나 말한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전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1. “프리아트 그녀석, 언제가 되건 없애버리고 말겠어!” <- 그리고 우리의 전위예술가는 장렬히 산화 (...). 2. "쓰레기는 쓰레기대로 쓸 데가 있다는 게 우리 스승의 지론이었지." 아를란은 코웃음을 칩니다. <- 그리고 단순히 우주최강 바보 시스였던 아를란은 15회가 된 지금 아직 멀쩡히 살아있으며 제다이가 되길 기다리는 중이기도 하죠. 혹자는 그것이 우주최강 형사인 자락스의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긴 합니다만. Q.E.D.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역시 그 중에 하나는 다양한 인물설정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설정들이 깊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주인공들과 깊은 연관성을 지녀야 하고, 그러자면 아무래도 자주 부딪히고 자주 이야기하게 되는 그런 관계가 이상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라이벌 캐릭터의 매력에 따라 플레이어의 관심도가 변화합...아, 그 매력은 아닙니다 자 형사님 <- ). 개인적으로도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이 이런 다양한 NPC들과의 관계성인데, 포도원의 제다이는 제다이라는 특별한 설정 덕에 이런 인물관계를 만들기 간단하고, 대부분의 이야기구조도 사실 스승이라던지 라이벌이라던지 혹은 협력자 (GMPC가 아닌 일반적인 범주에서의 협력자, 즉 주인공과 깊은 관계일수도 있으며 혹은 잠시 어떤 목적을 위해 협력했을 수도 있습니다) 를 만들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활동하는 NPC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죠. 제 마스터링 스타일도 소설 형식에 가까운 듯 한데 - 그건 아무래도 소설을 쓰다 무언가 부족함을 느껴서 RPG를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만 - 그런 캐릭터를 집어넣을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GMPC라는 말을 듣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고민이군요. 아를란 같이 대놓고 무능력할 수는 있습니...아니 아를란은 GMPC였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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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역시 아를란이..(두둥) 사실 캠페인 최대의 마수는 바로 저 녀석이었던 거죠. 게다가 무능을 가장하는 고단수 수법까지! (…)

      글쎄요, 다양한 인물 설정의 주인공 연관성과 조연의 등장 빈도가 비례한다는 데에는 일단 반론을 제기하고 싶군요. 포도원의 제다이를 예로 들자면 피나틸리아, 마스터 모트, 베오나드 코티에르, 마스터 아카마르, 로크락, 다룬 등 주요 조연들은 모두 등장 빈도가 상당히 낮지만 주인공 연관성은 매우 높습니다. 늘 발 밑에 걸리적거리는(..) 아를란이 등장 빈도만큼 주인공들과 얽힌 경우입니다만, 그 외의 인물들은 실제 등장은 코루선트 와서 최근 몇 화에서 좀 많이 나온 거지 첫 12화 동안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피나틸리아는 12화 동안 한 번 등장했죠.)

      그렇기 때문에 제 경험으로 얘기하자면 조연과 깊은 감정적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조연과 반드시 자주 얼굴을 맞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첫째, 참가자 자신이 그 인물에게 흥미를 갖는 것, 둘째, 그 조연이 갖는 ‘의미’가 그가 등장하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 아닐까요.

      첫 번째 조건은 설정에 나오는 인물을 조연으로 적극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자체야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이지만 그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가 어떤 데에 흥미가 가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이기 때문에, 설정에 나오는 인물은 일단 등장만 시켜도 참가자 흥미를 유발할 조건은 됩니다. 물론 여기에 진행자의 창의성도 가미하고, 계속해서 참가자 관심을 자극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해야 제대로 살릴 수 있지만요.

      두 번째 조건은 화면에 조연이 득시글거리지 않으면서도 말씀하신대로 인물 설정을 폭넓고 깊게 활용하려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그 인물을 통해 표현하려는 주제 의식이나 감정적 유대 등 극적 의미는 다양한 방법으로 띄워둘 수 있으니까요. 피나틸리아 본인이 안 나와도 계속해서 언급이 나오는 점이라든가, 본편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안습의 로크락이 캠페인의 중요 요소로 떠오른 점이라든지요. (어째 자꾸 자기 자랑처럼 되는데, 제가 이런 걸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잘 아는 장기 캠페인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또한, 진행자가 따로 얘기를 띄우지 않아도 첫 번째 조건, 즉 참가자의 관심이 충족되었다면 참가자 자신이 그 조연의 의미를 스스로 유지하기 때문에 편합니다.

      계속 얼굴을 맞대면서 유대를 쌓아가고, 그것이 더 깊은 극적 설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조연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 일행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연은 글에서 말했듯 주목도가 너무 높아지면 곤란한 점도 많고, 많이 등장시키려면 현실적으로 진행자에게 부담이 크니까요. 따라서 주인공의 모든 극적 맥락을 조연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것보다는 주인공 일행간의 설정과 관계를 엮는 것이 더 경제적이지 않을까 해요. 그렇게 하면 조연을 굳이 일행에 넣고 GMPC가 아닐까 고민할 필요 없이 주인공끼리도 충분히 극적인 게 나올 테니까요.

      전에도 얘기 나온 것이고 포도원의 제다이에서도 느끼는 거지만, 이상하게도 주인공끼리 깊은 감정적, 극적 유대를 넣는 데에는 저항 같은 게 따르더군요. 전에 참가자로서 그런 걸 시도했다가 컨셉 자체가 퇴짜맞은 적도 있었고, 진행자로서는 캠페인마다 주인공끼리 대립이라든지 갈등이라든지 인간관계를 넣으려 해도 참가자들이 잘 협력하지 않아요..;ㅁ; 결국에는 조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엮는 정도로 만족하곤 하죠.

      어째서 주인공의 중요한 극적 갈등은 다른 주인공이 아닌 조연에게 향하는 속성이 있는지 전 잘 모르겠더군요. 주인공들끼리 좀더 긴밀하게 얽히면 일행 결집력도 높아지고 진행자 부담도 한결 줄어들 텐데 말이죠. 어쩌면 참가자끼리 경쟁이나 갈등이 생기는 데 대한 우려일지도 모르고, 캠페인 내 극적 갈등의 고삐는 진행자가 쥐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권력 구도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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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카스트

      아를란은 역시 로키님의 마수였던 게지요.

      확실히 그런 면도 있군요, 지금 포도원의 제다이를 보면 말이죠. 다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요즈음 준비중인 시나리오를 감안하고 말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도원의 제다이와 달리 주인공들이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는 일반적인 판타지 모험물일 경우에 주인공들의 ‘신호’ 를 기반으로 한 인물설정을 이용하는 방법은 물론 좋은 방법이지만, 장르의 특성상 라이벌처럼 식사시간이 되면 튀어나온다거나 (“제길 밥 먹을 시간이군, 또 그녀석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 일행에게 아주 중요한 목표가 되는 자가 아닌 한 다양한 인간관계를 엮기에는 힘들다는 판단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판타지 모험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물론 그런 인물설정을 이용할 수는 있습니다…만 역시 제가 걸리는 건 지금 만드는 중인 시나리오 때문이겠죠. 어쨌건 댓글은 잘 읽었습니다.

      주인공들간의 유대감이라면 제가 마스터링했던 시나리오에서 기억나는 건 역시 가족 플레이군요. 플레이어들이 형제자매로 설정되어 즐기는 플레이 말이죠. 그것 외로는 같은 고향 친구건 아니면 수없이 많은 고생을 함께한 동료건 왠지 유대감이 조연들만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왜인지는 저도 분명하지 않네요, 역시 서로에게는 신호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나요.

      확실히 플레이 내에서도 센이 자락스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 일이 있죠, 그때는 역시 남의 일이니까, 가 이유였긴 한데 설마 그것은 자 형사와의 사랑싸움을 경계한 나머지…(물론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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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sdee

    저도 은근히 GMPC 같은 짓을 많이 했죠. 그래서 많이 찔립니다. (ㅠ_ㅠ); 주로 PC들과 대립하는 NPC들한테 온갖 애정어린 설정을 쏟아붓는… NPC들 중심의 시나리오를 플레이한 적도 몇번 있었구요.

    언제… “참회록”이라도 한 번 써야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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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뭐 진행자야 참회록을 쓰자면 끝도 없는 사람들이죠..(..) 창의력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족함과 쪽팔림을 어찌 다 말로 형언하겠어요. (흑)

      전에 쓰신 블로그 글을 봐도 Asdee님도 저와 아카스트님과 비슷하게 소설가 본능이 강한 진행자 유형이신 것 같고, 실제로 글 쓰는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 진행을 많이 하더라고요. 글쓰기 능력은 분명 진행에 큰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진행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좋은 진행이란 무엇인지 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소설과 같은 일방적인 창의성 발산과 구분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 핵심에는 역시 RPG 최대의 매력이자 최악의 어려움, 즉 ‘사회적인 놀이’라는 속성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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