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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나이로비 인물 제작, 시범 방영 1부

4월 5일, 일요일과 겹쳐서 슬픈 식목일에는 2100 나이로비 시리즈의 인물 시트를 만들고 시범 방영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만들어두었던 티엔 외에는 인물 고민 설정에 좀 시간이 걸렸고, 대신 논의 과정 중에 인물 배경이 확실히 잡힌 만큼 능력과 인맥은 거의 순식간에 나왔습니다. 셋의 화면 비중 배정을 조율하는 작업은 쉽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인물을 만들 때도 그랬고, 이후 진행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제가 좀 너무 나섰던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 제 입장에서야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특히 이 규칙이 익숙하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압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얘기하면서도 이래도 괜찮은가 했는데, ‘참여’와 ‘참견’의 경계는 늘 명확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PD (진행자)에게 한 질문에 제가 대답하는 일도 많았던 등 진행자 자리를 넘보는(?) 언행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 진행자와 참가자가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애당초 진행자와 참가자를 나누는 데에는 기능적 이유가 있는 만큼 역할 혼동이 일어나는 것은 조심해야겠지요.
또한, 저로서는 참가할 때마다 진행자하고 다투는 모습을 반복하게 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기도 합니다. 진행을 주로 해봐서 참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참가를 하면 진행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참 이율배반적인 심리입니다. (단순히 ‘그쪽이 익숙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트를 다 만든 다음에는 시범 방영 (파일럿)을 시작했습니다. 우주 엘리베이터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고  중장비 기사 프로비던스와 생물학자 틸리가 나이로비 역에 도착하면서 시작했지요. 역 앞은 우주 엘리베이터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메우고 있고, 아이 하나가 프로비던스와 틸리에게 엘리베이터 반대 성명 서명을 부탁합니다. 프로비던스는 서명하지 않고 틸리는 서명을 하면서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드러납니다.
한편 올림푸스 프로젝트 보안 AI인 티엔은 시위 현장에 내보낸 사이버쉘 등을 움직여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경찰청장의 압력을 받습니다. 티엔은 역에 도착한 직원들이라도 데리러 평화적으로 길을 뚫으려고 하다가 시위대 일부가 돌을 던지면서 혼란에 직면합니다. 결국 경찰이 보안 장비를 투입하면서 사태는 폭력으로 치닫고, 프로비던스와 틸리 등은 역사 안쪽으로 몸을 피합니다.
시위대가 흩어지고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면서 역사 주변은 진정이 되고, 공사 현장으로 가는 모노레일이 직원들을 싣고 출발하려고 하지만 프로비던스는 아까 서명을 부탁했던 아이가 혼자 우는 모습을 보고 두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주변에 경찰이 없어서 (정확히는 바빠서) 결국 티엔과 합의 하에 아이는 일단 현장으로 데려가기로 합니다.
현장에 도착하자 아이는 경비소에 데려가야 한다는 지시에 프로비던스는 애를 로봇과 둘 수 없다고 하고, 그와 틸리가 말다툼을 벌이던 중 틸리와 사이가 안 좋은 현장 소장인 아버지가 나타나 틸리의 편을 듭니다. 결국 프로비던스는 아이와 함께 경비소로 가고, 틸리와 아버지는 가시돋힌 말을 주고받습니다.
대체로 재미있게 했는데, 판정 서술권 문제에 대해서 좀 논의가 있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는 판정 결과와 별개로 서술권이 넘어가므로 판정의 승자와 서술권자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 플레이에서 한 두 판정 다 승자와 서술권자가 달랐지요.
첫 장면 판정에서는 티엔이 이기면 시위대를 평화적으로 해산하고, 티엔이 지면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고 정했는데, 티엔이 지기는 했지만 서술권은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프로비던스가 성공하면 아이가 경비소로 가지 않아도 되고, 틸리가 성공하면 아이를 경비소로 보내는 것이었는데 프로비던스가 졌지만 서술권은 프로비던스를 맡으신 세인님께 돌아갔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 특히 두 번째 판정에서 서술권 행사에 맞추어 반응하기 어려웠다는, 즉 낄 데가 안 보였다는 벨제르가님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의해본 결과 판정의 결과나 서술이 주인공 (PC)들과 관여되어 있으면 PD가 원래대로 진행을 맡되 서술권자는 원하는 사건 진행을 요약해서 전달하고 (‘틸리 아버지가 나타나서 틸리 역성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판정에 관한 서술 중에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반면 첫 판정처럼 서술하는 참가자 외 참가자의 주인공이 직접 관여되어 있지 않은 판정에는 서술권자가 사실상 PD 역할을 맡아 판정 결과에 관한 서술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위의 예에서 시위는 어차피 PC들이 직접 관여하는 문제는 아니었고, 참가자가 서술하든 PD가 서술하든 외부적인 상황에 대해 반응한다는 점 (‘역사로 대피합니다’)은 같으니까요.
두 가지를 늘 칼같이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 생각에는 서술권 행사는 위와 같은 기준을 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상황마다 똑같게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까요. 반면 PD님은 일관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 부분은 다음번에 좀 더 얘기해볼 수 있겠지요.
익숙하지 못한 규칙, 아직 확립되지 않은 인물 성격 등 때문에 고생하시면서도 잘 플레이해주신 벨제님과 세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인터넷이 끊어질 지경까지(?) 투혼을 발휘해 주신 PD에게도 그렇고요. 시범 방영은 말 그대로 시범이니까 설정이나 시트에 고칠 점이 보이면 시범 방영이 끝난 후 고칠 수도 있겠지요. 다음에도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100 나이로비 기획: 규칙과 설정, 인물

어제는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Transhuman Space) 배경으로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규칙을 사용해서 진행할 캠페인에 대해 기획하고 논의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배경은 우주 엘리베이터를 건설하는 올림푸스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인 케냐 나이로비이고, PD는 Wishsong군, 참가자는 벨제르가님, 세인님, 그리고 저입니다.

기획 세션 중 처음은 PD가 안방극장 대모험 규칙을 설명했고, 다음은 THS 설정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하고 싶은 플레이와 인물에 대해 토의했습니다. 안방극장은 이전에도 해본 규칙이지만 기획 세션 전 오후에 다시 보니 제가 그동안 잘못 적용해온 부분이 한두 군데 있더라고요. 이번 캠페인에는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겠지요.
THS 배경에 대한 것은 사실 저는 좀 경계를 했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은 배경을 포함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모든 참여자의 열정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배경을 이미 정한 안방극장 대모험 시즌은 참가자의 감정적 투자가 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럴 위험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전원이 이미 배경을 보고 참가를 결정하기도 했고, 또 인물 설정을 잡으면서 다들 흥미도가 올라가는 느낌이어서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배경 결정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물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배경 중 재미있는 부분을 선택하고 캠페인의 초점을 정하는 과정에는 다들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계속 그 흥미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겠지요.
이러한 논의 과정을 거쳐서 나온 인물의, 그리고 캠페인 자체의 초점은 역시 나이로비의 우주 엘리베이터 프로젝트가 될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 건설에 반대하며 아버지와 대립하는 제인, 건설 작업에 참여한 엔지니어 프로비던스, 그리고 보안기기를 책임진 티엔이 맞닿는 접점은 역시 나이로비에, 그리고 THS 세계 자체에 들끓는 급격한 변화를 잘 상징하는 올림푸스 프로젝트이겠지요.
이런 플레이를 하다 보면 자칫 우주여행이나 로봇 같은 외적 장치에 현혹되어 인간관계와 인물 내적 갈등을 도외시할 위험이 있는데, 이 점에서 안방극장 대모험이라는 규칙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각 인물의 고민 (Issue)을 통해 의미있는 내적 갈등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되고, 화면 비중 배정을 통해서 한 시즌 동안 그 고민이 어떤 극적 흐름을 탈지 정하게 되니까요. 이와같이 규칙은 플레이의 초점을 더욱 뚜렷하게 잡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다음 세션에는 능력, 인맥, 개인무대, 그리고 비중 배정 등 인물을 마저 만들고 시간이 된다면 시범 방영 (파일럿)도 하게 될 것 같군요. 세 주인공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꼬마 미우 구하기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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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한님과 지난주에 한 꼬마 미우 구하기 단편을 완결했습니다. (2 세션이 걸렸으면 단편은 아니려나요?) 1편은 여기에 있습니다.

요약

비행기 밀항까지는 성공하지만 곧 발각당한 미우는 티엔이 시키는 대로 망명 신청을 합니다. EU에 도착해서 티엔이 있는 이식물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러 가는 이송 과정에서 미우는 납치당해 빼돌려지고, 베트남 정보부 소속의 부이치운에게 사건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미우는 뇌하수체에서 귀중한 약물이 될 성분을 분비하는 실험체이며, 티엔은 태평양 전쟁 후 미수거 상태에서 도난당했다가 프로그램을 조작당해 미우를 빼돌리는 데 이용당했다는 진상을…

티엔은 조국의 명령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프로그램 조작이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고, 미우는 자신을 속인 티엔을 원망합니다. 티엔은 미우가 듣지 못하게 부이치운과 얘기한 결과 5년 후 미우가 다 자라고 약물이 완성되면 미우는 뇌하수체를 제거당하고, 과한 비용 문제로 새 뇌하수체 이식 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동요합니다.

부이치운은 미우를 데리고 이동하면 발각당하기 쉬우니까 티엔에게 미우를 접선 장소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내리고, 미우를 찾고 있을 EU 경찰을 피해 접선 장소로 바로 이동하는 프로그램을 티엔에게 입력합니다. 티엔은 새 프로그램에 의지력으로 잠시 저항하면서 미우에게 조금 있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말라며, 접선 장소가 아니라 EU 경찰에게 가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꼭두각시 인터페이스를 스스로 망가뜨리지요. 이윽고 프로그램에 장악당한 티엔은 미우에게 경찰을 피해 접선 장소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미우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EU 경찰에게 발각됩니다.

망명 신청을 법원에서 심사한 결과 미우는 EU법에 따라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2등 시민의 권리를 인정받고, 베트남 정부는 5년 후 미우에게 새 뇌하수체 이식 수술을 해줘야 한다는 판결이 나옵니다. 이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기부금만으로도 수술비는 충당하고도 남게 되지만요.

마지막 장면에서 미우는 이후 5년 동안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줄 법원 지정 후견인과 대면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 의아해하던 미우는 이윽고 바이오쉘에 다운로드된 티엔을 알아보지요. 기쁜 재회는 곧 티엔의 무릎에 웅크려 행복하게 자는 낮잠으로 이어집니다. (…)

감상

지난 화에 진행자 없이 하다 보니 어느 쪽도 외부 세계에 대한 권한이 없어서 진행이 느려진 현상 때문에 이번 화에는 번갈아가면서 진행자 역할을 맡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가할 것이 있을 때, 혹은 진행자도 잘 모르겠을 때 페이트 챠트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덕분에는 이번에는 훨씬 속도감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전통적인 의미의 진행자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서술권에 공백이 생기면 곤란하다는 걸 느꼈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미딕은 진행자 없이 할 수는 있지만 진행자가 없어서 생기는 서술권의 공백을 충분히 채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번 화에서 제일 멋졌던 진행은 승한님이 하신 부이치운의 폭로 장면이었습니다. 부이치운을 티엔의 옛 동료로 설정하고 티엔의 과거를 만들어서 티엔의 극적 중심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고, 미우의 죽음에 대한 갈등을 설정해서 티엔에게 ‘조국에 대한 복종’이라는 AI다운 (그리고 인간다운) 가치와 ‘저항할 수 없는 생명 보호’라는 인간다운, 그러나 AI답지 않은 가치 사이에 충돌을 유도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RP는 티엔의 인격 (AI격?) 분열 부분. 프로그램에 저항하는 AI라는 줄거리는 흔하긴 하지만 시사점이 많은 갈등이고, 한편으로는 AI의 프로그램은 인간이 받는 명령에 대한 좋은 상징이기도 해서 흥미롭죠. 자신이 조금 있다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라고 호소하다가 프로그램에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싹 말이 달라지는 게 참 재밌었습니다.

제일 조마조마했던 대목은 티엔이 프로그램에 저항하는 판정을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실패하면 미우가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것이지만,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규칙은 극적 욕구를 다루지 않아서 실패가 성공보다 재미없어지는 판정 스트레스가 종종 생기더군요. 이번 화에도 그런 충돌을 꽤 심하게 느꼈습니다. 가상현실 표현 규칙이 극적 욕구를 받쳐준다기보다는 극적 욕구에 저항한다는 인상이었달까요.

최종적으로는 저야 원하는 해피엔딩이 나와서 좋았지만, THS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미우의 죽음을  은근히 바라셨던 피도 눈물도 없는 (?!) 승한님은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극적 흐름이나 요소를 다루는 규칙이 없으면 참여자 사이에 생기는 극적 욕구의 충돌을 해결하는 것은 순전히 참여자 사이 의사결정 구조에 맡겨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연장선인지라 서로 적당히 양보하거나 포기하기도 하지요. 이번에 승한님이 그러셨듯… 그런 의미에서 모두의 극적 욕구를 끌어내고 최종 전개에 반영한다는 점이 극을 직접 다루는 규칙의 중요한 효용이 아닌가 합니다.

가상현실 표현과 극적 요소 조작이라는 두 목표 사이에 생기는 긴장 관계가 또 드러난 부분이라면 승한님과 제가 판정을 보는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저는 판정을 갈등 판정 개념으로 보고 하나의 극적 결과가 판정으로 정해졌으면 그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판정을 하는 건 판정의 의미를 희석한다고 보았지만, 승한님은 행동 판정 개념으로 보시고 판정은 극적 결과 (미우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단일 행동의 결과 (미우가 티엔의 새 명령에 넘어가느냐 안 넘어가느냐)를 정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딕도 행동 판정 규칙이니까 규칙상 옳은 쪽은 승한님의 관념이었지요.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한 플레이였고 개인적으로는 신뢰와 인간성 등의 문제를 다룬 전개도 좋았습니다. 미우도 무척 귀여웠고, 티엔 RP도 재밌었고요. 다만, 판정이 때로 재미를 지원한다기보다는 방해한다는 느낌이 드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지난 화에서도 얘기했듯 의외성을 만들어낸다거나 무작위 키워드로 발상을 자극하는 규칙은 도움됐지만요. 예를 들어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납치당한 것도 d10을 굴려서 나온 장면 중단의 결과였죠. 무작위성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전개가 나온 점은 무척 유용했다고 봅니다.

잡상

아마 전쟁 중 프로그램 손상이랑 도난 후 조작, 부이치운이 한 패치와 그에 대한 저항, 그리고 스스로 꼭두각시 인터페이스를 망가뜨린 여파 등등으로 티엔의 프로그램은 골병이 꽤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우와 대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그래밍에 구멍이 많이 났다는 언급도 그런 의미에서 한 것입니다.

손상된 프로그래밍을 재구성해서 복구해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겠지만, EU에서는 SAI도 인권이 있으니까 티엔 본인이 거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자기 프로그램에 대한 외부 개입은 되도록 줄이고 학습 루틴으로 스스로 배워가겠다는, 말하자면 인간성에 한 발짝 다가가겠다는 티엔의 결심이랄까요. 미우를 만나고, 미우의 생명을 구하려고 명령과 프로그래밍까지 거부한 사건은 그만큼 그를 많이 변하게 한 것 같습니다.

베트남에 대한 티엔의 애국심이나 나노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지는 그쪽 프로그래밍까지 손상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적어도 유럽 체류는 자아 개념부터 정치적 신념까지 모든 것을 곰씹어볼 기회는 되겠죠. EU의 좌파 정치활동에 가담한다든가 지능 향상 동물과 AI의 권리 신장 활동을 하는 티엔을 생각하는 것도 나름 재밌군요. 이것이야말로 THS! 라는 느낌이기도 하고..^^

꼬마 미우 구하기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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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먼 스페이스 (Transhuman Space) 배경으로 미딕 (Mythic) 규칙을 사용한 플레이를 해보았습니다. 주인공은 다음 두 명입니다.

새끼고양이

냐~

하나는 지능 향상 아기고양이 미우, 또 하나는 현재 미우의 뇌에 이식된 인공 지능 이식물입니다. 정말 하드 SF나 동화가 아니면 어려울 것 같은 엉뚱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이야기는 베트남의 한 실험실에 있던 지능 향상 고양이 미우 (처음 시작했을 때는 ‘키티’)가 낯선 차에서 깨면서 시작합니다. 머리는 아프고 눈앞에는 느닷없이 인터페이스 디스플레이가 보이는 키티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차량에 폭탄이 설치된 것이 발견되면서 모두가 대피해서 나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키티가 머뭇거리자 강제로 몸을 조종해서 공항으로 도망시키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티엔 바 딘. 태평양 전쟁 참전용사로, 고도의 지능과 자아 개념을 갖춘 인공 지능인 그는 키티에게 멋대로 미우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 뒤 환태평양 사회주의 연합의 이념과 미우 자신의 생명을 위해 유럽 연합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우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유럽 관광객 가족을 발견해 데려가 달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만 세관에서 압수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미우는 도망쳐서 비행기 하나로 몰래 숨어들지만 미우를 쫓는 사람들은 비행기 이륙을 멈추고, 다시 뛰쳐나와서 출발 직전인 유럽 연합행 비행기를 발견해 화물칸이 닫히기 직전에 뛰어듭니다. 마침내 무사히 유럽 연합으로 향하게 된 미우는 티엔이 틀어주는 군가를 들으며(?) 잠이 듭니다.

재밌게 한 플레이였지만 시간은 꽤 걸렸습니다. 특히 진행자 없이 돌리다 보니 하나하나 질문하고 판정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죠. 그런 면에서 진행자를 포함한 서술권의 확실한 역할 분배는 시간 절약의 이점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 누군가 권한을 가지고 서술한 것에 수정이나 추가하는 것과, 어떤 상황이 나왔는데 어느 쪽에도 서술권이 없어서 서로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에너지 소모나 처리 시간 면에서 크게 다르니까요.

그래서 돌아가면서 한 장면씩 진행을 하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만 미딕의 상황 판정 규칙을 사용하는
것도 제안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이의나 추가의 빈도에 따라서는 사실상 전통적 진행자 구조와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요즘 생각하는 것인데, 전에 판정 스트레스 글에서 썼듯 가상현실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규칙과 극적 현실을 중점적으로 표현하는 규칙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어떤 결과를 바라면서 판정을 하되 그 가상현실의 물리 혹은 논리 법칙에 대비해서 성공 여부를 판정하고, 후자는 물리나 논리 법칙과 상관없이 판정 성패는 극적 결과를 정하고 물리적, 논리적으로는 참여자가 모두 공감만 하면 괜찮은 방식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미딕은 판정의 극적 의미와 상관없이 그 판정의 논리적 확률에 비교해서 판정한다는 점에서 가상현실 표현이 기반인 규칙입니다. 그러한 논리 확률과 바라는 극적 결과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점에서 판정 스트레스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어떻게 보면 모든 가상현실 판정과 다르지 않죠. 또 미딕에서는 그 확률을 참가자가 스스로 정한다는 면에서 바라는 극적 결과가 일어나게 확률을 높이는 압력과 자신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확률에 맞추는 압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우가 화물칸에 뛰어드는 판정은 확률상 굉장히 어려웠지만 저와 승한님 둘 다 성공을 바라는 판정이었는데 거의 실패할 뻔했었죠. ‘미우가 무사히 탈출한다’하고 ‘미우가 실패해서 잡혀 죽는다’하고 극적 만족감 면에서 동등할 리가 없는데도 가상현실을 엄격하게 따라가자면 바라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가상현실 판정의 근본적인 모순이 아닌가 합니다.

반면 장점이라면 실패하면 해악이 따른다는 긴박감, 그리고 참가자가 예상하고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의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두 가지는 다른 방법으로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요즘 나오는 규칙이 흔히 그렇듯 미딕도 완전히 가상현실에만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판정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극점수가 그 대표적인 예죠. 실제로 미우가 화물칸에 뛰어드는 판정도 극점수를 소모해서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극점수와 같은 규칙은 이처럼 가상현실과 극적 욕구의 괴리를 어느 정도 좁히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판정 외에 미딕의 다른 일면은 재미있게도 전혀 가상현실이 아닌 극적 현실 제조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작위 사건이 발생할 때면 주사위를 굴려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 적수에 대한 신뢰’라든지 ‘새로 등장할 인물: 법적 방해자’ 등 새로운 상황을 무작위로 제조합니다. 이건 확률을 조작하는 규칙 없고, 앞뒤를 봐서 논리가 맞지 않으면 다시 굴려도 된다는 점에서 판정이라기보다는 생각을 자극하는 창의적 제약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이 미딕을 사용한 첫 플레이에 대한 제 감상입니다. 2부에서는 미우의 이야기를 완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재밌는 플레이 함께 해주신 승한님께 감사드립니다~

캠페인 구상 – Transhuman Adventures

이것저것 신청받은 것이 있어서 어째 진행 대기줄이 길어지는 느낌인데(..) 어제는 승한님과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캠페인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급변하는 기술과 사회가 인간 삶의 조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녹록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방대한 배경이라, Rpg.net 등지에서는 ‘매혹적이지만 부담되는 설정’에 꼽힌 걸 본 기억도 나더군요.

다른 진행자는 어떻게 접근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매력적인 괴물을 다룬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무조건 인물 중심.’ 사실 철학 토론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기술이 인간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하는 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RPG 세션은 인문 수업시간이 아닌걸요. 하지만 구체적인 인물, ‘사람’의 얘기로 다가올 때는 훨씬 피부에 와 닿죠. 자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한 인물이라든지, 인체 기관보다 기계 부속이 많은 인물이라든지…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든 인물 설정을 중심축으로 캠페인을 풀어가려면 제가 아는 규칙 중에서는 역시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이 가장 적당하겠더군요. 주인공들의 인간적 고민이 곧 캠페인의 화두가 되는 형태이고, 철저히 참가자 주도형이니까요. 또한, 시즌 하나가 5화나 9화 하는 식으로 떨어지니까 규모가 큰 배경에 자칫 눌리기 쉬운 완급 조절도 긴장감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게 하고 싶으면 시즌을 이어가며 재계약(..)하면 될 테고요. (안방극장 한 기를 마쳐보는 건 제 오랜 소원이기도 합니.. 조기종영은 싫어요! ;ㅁ;)

그러니까 첫 단계는 일단 모두가 마음에 드는 프로 기획. 두 번째는 논의와 조정을 좀 강도 높게 해가면서 인물 제작. 물론 주인공 상호 간의 조정도 중요할 테고요. 인물에 설정을 좀 밀도 있게 집어넣고, 자기 인물의 주변 설정 정도는 참가자가 알 수 있게 교육(?)을 시키면 이 시점에서 참가자에게 필요한 설정 정보는 대부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인물과 관련된 것이니 관심도도 대체로 높겠지요. 그리고 진행자도 실제 장면 진행을 하고 참가자의 장면 신청에 제안과 조언을 풍부하게 해줄 만큼의 설정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할 테고요.

여기까지 준비되면 준비가 좀 세지, 실제 플레이는 오히려 편할 것 같더군요. 참가자들은 자기 인물의 고민과 주제의식을 생각하며 장면 신청하고, 진행자는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제안과 조언 역할, 그리고 진행. 시즌 진행 중 서로 고민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THS 배경의 주제의식이 재해석과 재창조를 거치고, 인간적, 극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지적 자극이 되는 하드 SF가 나름 나오는 거죠, 뭐. 물론 세세한 규칙상 구현을 중시하는 취향이라면 안방극장은 끔찍하겠지만요. (..)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상만으로도 나름 즐겁군요. 요즘에는 구상하는 캠페인 중 몇 개나 끝내 못 하고 죽을까 하고 상상하는 것도 재미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