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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헌터 –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하여 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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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헌터 표지

비스트 헌터 (Beast Hunters)는 기본적으로 1:1로 하는 게임으로, 전쟁과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 살아가는 수렵채집 부족 사회의 괴물 사냥꾼인 비스트 헌터가 주인공입니다. 이들 헌터는 괴물 사냥, 부족 간 중재, 상단 약탈 등 다양한 모험을 하며, 괴물을 성공적으로 사냥하면 그 피로 문신을 새겨서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비스트 헌터 판정은 창의성, 자원 관리, 전술성 등 게임적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도전을 시작했을 때 헌터 (참가자)는 우선 도전자 (진행자)에게 자신이 그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지 얘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자가 보기에 해결책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판정 없이 헌터의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헌터의 창의성과 판단력을 포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RPG든 참가자가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을 제시하면 판정 없이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즘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을 돌리면서 생각해보기도 했고,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플레이에 나오는 게임성 얘기를 하면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다만 비스트 헌터가 특이한 점이라면 도전자가 헌터의 창의성을 인정해 판정을 포기하는 것을 자원 관리와 직접 연관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판정 중 헌터의 맞수는 모두 도전자의 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적대 풀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예산 1점을 들여서 +2짜리 능력을 하나 구입, 예산 4를 들여 우선 순위 5를 구입하는 식입니다. 초보 헌터에게 대충 맞설 만한 적수를 만들려면 예산이 4~5점은 들어가는데, 판정에 들어가기 전에 헌터가 제시한 해결을 인정하고 도전자가 포기하면 적수를 구입할 필요 없이 예산을 2점만 들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도전을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밋밋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하면 헌터가 받는 경험치도 줄거든요. 헌터가 제시한 해결책을 도전자가 바로 받아들이고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 헌터가 받는 경험치는 1점입니다. 반면 판정으로 넘어가면 헌터가 도전에서 이겨서 받는 경험치는 적수의 예산 점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8점짜리 적수라면 이겨서 경험치를 8점 받을수 있으므로 헌터가 판정을 해서 위험을 무릅쓸 이익도 충분히 있습니다.

자원 관리는 판정 중에도 계속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명중과 피해 판정 대신 공격 동작을 통해 이점 점수 (AP, Advantage Point)를 축적하며, AP를 소모해야 피해 주사위를 굴릴 수 있습니다. 공격 동작은 신체 도전이라면 상대를 밀어붙인다든지 고지를 점거한다든지 하는 식이고, 사회적 도전이라면 연맹을 맺거나 소문을 퍼뜨리는 식입니다. 따라서 AP를 아주 많이 축적했다가 한꺼번에 지르면 서로 계속 맴돌며 눈치만 보다가 일거에 강력한 공격으로 끝내는 싸움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피해는 경상, 부상, 중상, 무력화, 사망 단계가 있으므로 일격에 끝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공격 동작과 AP도 헌터와 도전자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전술적 선택을 요구합니다. 헌터가 공격 동작을 하면 도전자는 선언의 창의성, 합리성 등을 고려해 일정량의 AP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헌터는 이 AP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주사위를 굴려서 AP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굴리면 자칫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도 AP가 덜 나오거나 아예 AP를 못 받을 수도 있지요. 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AP를 많이 받을 수도 있고요. 따라서 제시하는 AP 양을 보고 어느쪽이 유리할지 저울질하는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판정 중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고 각자 효과가 다르다는 점도 게임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입니다. 공격 동작과 타격 외에도 방어 동작, 능력치 발동, 자원 박탈, 자원 회복, 특수효과 등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이 총 7가지 있고, 같은 유형 내에서도 선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원 박탈과 회복이 흥미로운데, 창이나 방패, 인맥 등 헌터가 사용할 수 있는 외적 요소인 자원을 박탈해서 상대의 이점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창을 멀리 쳐낸다든지, 인맥에 미리 손을 써놓는다든지 하는 경우죠. 이러한 자원은 회복 시도도 할 수 있는 등,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도 다채로운 전술적 선택 여지가 있다는 점이 비스트 헌터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전체 모험의 구조 역시 판정과 연관성이 깊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도전자는 정해진 예산이 있는데, 이 예산 및 단일 도전에 할당할 수 있는 예산의 한도는 모험마다 도전자와 헌터가 함께 정합니다. 예를 들어 예산 20, 한도 5짜리 모험은 비교적 짧고 쉬운 편에 속합니다. 예산을 모두 소모하면 보통 모험은 끝나고, 비스트 헌트 모험이라면 예산을 다 소모했을 때 비스트가 등장합니다. (즉 최종 보스 개념?) 예산과 모험의 이러한 연관성은 긴장감과 완결성이 있는 모험을 진행하는 데 적합해 보입니다.

비스트 헌터 일러스트 (일부)

꺄아 언니~♡

각 비스트는 최소 예산과 한도 요구량이 있어서 일종의 레벨 내지는 HD 개념이 들어간 점도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급 괴물인 헤크트라탄은 최소 예산 20, 한도 5인 모험에 등장할 수 있고, 전설의 최강 괴물인 쿠림은 최소한 예산 250 (!), 한도 10인 모험에만 등장할 수 있습니다. 모험을 통해 비스트 헌터가 강해지면서 예산과 한도를 늘려가며 점점 강한 비스트와 맞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이렇게 보면 알 수 있듯 비스트 헌터는 도전자와 헌터의 경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임입니다. 동시에 도전자의 역할은 헌터를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서로 승부의 재미를 느끼며, 멋진 발상을 유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쟁적 요소를 게임에 국한시키고 감정이나 인간관계와 분리하는 장치로 비스트 헌터에서는 ‘경례’ 규칙을 사용합니다. 서로 오른손 아랫팔을 붙드는 동작으로 ‘경례해 들어가면’ 게임을 시작하거나 재개했다는 뜻이고, 게임을 끝내거나 논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같은 동작으로 ‘경례해 나와야’ 합니다. 경례는 게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신호이며 서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승복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그리고 상호 존중의 표시이기도 하죠.

야성적인 부족 사회 전사들의 모험을 즐기면서 신비하고 위험한 세계 속에서 인물의 기량을 발휘하고 싶다면 비스트 헌터는 꽤 추천할 만한 RPG입니다. 1:1이 기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만 모여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죠. 정정당당하고 한 치 물러섬이 없는 승부를 약속하며 첼’쿠리 부족의 악수를 주고받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비스트 헌터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섰을 것입니다.

권투와 사람 이야기, Contenders

(아사히라군이 도전자에 딱 어울린다고 추천한 록키–로키 아님–주제곡!)

J. J. Prince의 ‘도전자’ (Contenders)는 내기 권투로 돈을 벌어 불우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꿈과 삶 이야기를 그리는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아픈 아내의 병원비를 대려고 낮에는 막일을 하고 밤에는 링에 뛰어드는 가장일 수도 있고, 사업을 시작할 꿈을 안고 밤마다 장롱에서 통장을 꺼내보며 멍투성이 얼굴 가득 웃음짓는 청년일지도 모릅니다. ‘도전자’는 하나같이 포기할 수 없는 마음과 사연을 안고 링 위에 맞선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내기 복서들을 둘러싼 휴먼 드라마를 구현하는 방법도 흥미로운데, 도전자 규칙은 희망과 고통, 돈 특성치가 권투 링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희망은 주인공의 인간관계를 만날 때면 늘릴 수 있는데, 시합 중 불리한 구석에 몰렸을 때 이 희망을 소모해서 능력 페널티를 만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이 떠오르는 순간 ‘이렇게 주저앉을 순 없어!’ 하고 벌떡 일어나는 분위기랄까요. (열혈!)

삶에서 괴로운 일이 벌어질 때마다 오르는 고통도 시합 중 ‘독이 올라서’ 상대를 제압하고 피해를 입히는 판정에 보너스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돈은 권투나 다른 일을 해서 벌고 훈련할 때 소모하며, 무엇보다 인간관계는 늘 돈이 들어갑니다. 그게 아픈 가족이든, 사업이든 말이죠. 희망과 고통은 또한 주인공의 미래가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는지도 결정합니다.[footnote]그런 면에서 이전에 소개했던 니코틴 걸즈 [Nicotine Girls]와 비슷하며, 실제로 도전자는 폴 세가의 니코틴 걸즈와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footnote]

진행자 없는 RPG로서 도전자는 진행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모든 참가자는 주인공을 하나씩 만들며, 돌아가면서 한 주인공씩 주역이 되는 장면을 만듭니다. 현재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참가자는 조연을 맡을 수 있습니다. 폴라리스 (Polaris)처럼 엄격한 역할분담은 없지만, 폴라리스의 방식을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건너편 참가자는 적대적인 인물을 한다든가, 왼편 참가자는 인간관계, 오른편 참가자는 트레이너 등 동료를 하는 식으로요. 물론 사람이 많거나 적어지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요.

장면의 종류와 효과, 할 수 있는 판정은 미리 정해져 있어서, 예를 들어 인간관계를 만나는 장면을 하면 희망 판정을 해서 희망이 증가하는지 정하며, 일 장면을 하면 돈 판정을 해서 돈을 버는지 정합니다. 그 외에 훈련, 위협, 시합 장면 등 다양한 장면이 얽히면서 수치를 조정하고, 권투 실력을 올리고, 희망을 확보하거나 상대의 희망을 없애는 전술적 판단과 각 주인공의 삶에 대한 입체적 조명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이 인상깊습니다.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시합 장면에서 하는 권투 판정도 간단하면서도 전술적 판단을 요구합니다. 각 라운드마다 공격 위주, 방어 위주 등 전술을 정해서 파괴력과 제어력 사이에 선택한 후 제어력 판정에 성공하면 파괴력 판정을 하며 (이때 각 권투 관련 능력이 보너스가 됩니다), 상대의 방어 판정에 대한 성공 정도에 따라 승리 점수 (VP)를 받습니다. 이 VP로는 상대의 권투 능력을 저하시킬 수도 있으며, 마지막 라운드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VP가 많은 쪽이 판정승을 올립니다.

시합 중에는 위에서 언급했듯 주인공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고통과 희망도 중요하게 작용하므로 시합은 주인공의 삶과 유리된 장면이 아니라 주인공의 모든 것을 건 응축적 투쟁의 장이 됩니다. 직접 시합에 나오지 않은 주인공도 시합 결과에 돈을 건다거나 관중석에서 경기를 남들에게 해설해주는 등 (‘지금 빌리는 스네이크의 약점을 끌어내는 거야. 보이지, 잽을 하기 직전에 고개를 돌리는 저 습관?’) 시합 장면에 등장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어느 한 주인공이 복서로서 명성이 10점에 도달하면 최종 장면을 하나씩 한 뒤 마지막으로 하룻밤 동안 시합을 연속적으로 벌이고, 각 참가자는 자기 주인공의 최종 결말을 서술합니다. 최종적으로 희망이 고통보다 높으면 행복한 결말, 고통이 더 높으면 불행한 결말, 희망과 고통이 같으면 아직 은 어느 쪽도 아닌 결말을 서술해야 합니다. 엔딩 조건이 확실한 만큼 도전자는 깔끔한 단기 캠페인에 적합해 보이는 규칙입니다. (‘주인님과 함께’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결론적으로 도전자는 피와 땀과 눈물에 젖은 열혈 휴먼 스포츠 드라마 (..길다)를 만들면서 전술성과 극적 재미를 동시에 즐기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일독하면서 번역도 해놓았으니 언제 꼭 해보고 싶네요.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

얼마 전에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을 아쉽게 끝낸 후에도 플레인스케이프 캠페인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스타워즈 캠페인을 하는 동안 정기 캠페인을 또 시작할 여유는 없고 해서 승한님과 얘기하다가 플레인스케이프 배경의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 캠페인은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배경 자체도 방대하고 난해한 데다가 글을 정기적으로 올려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 사람을 많이 타는 캠페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어떤 참여자와 함께 해야 재미있을까 생각해보니 조건이 꽤 까다롭더군요.

1. 플레인스케이프에 대한 관심

지식 자체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정말 플레인스케이프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넘치지 않으면 굳이 플레인스케이프를 사용할 필요도 없죠. 일단 관심만 많으면 지식은 필요에 따라 스스로 늘려갈 테고요. 제가 보기에는 사실 기본적인 내용만 알아도 되고, 여기에 덧붙이는 재해석과 상상력이 진짜입니다만 어쨌든 플레인스케이프의 분위기나 특색에 매력을 느끼는 게 시작이죠.

2. 어느 정도의 원서 해독 능력

이것도 영어를 기가 막히게 해서 플레인스케이프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따위 얘기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스스로 습득할 능력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위에 말했듯 지식 수준 자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3.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성실성과 열정

수정주의 플레인스케이프에서 유일하게(..) 안 까다로운 점은 바로 시간대죠. 글이야 언제 올리든 1~2주에 한 편 올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꾸준히 일정량의 글을 올린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최악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잘 쓰든 못 쓰든 글을 쓰는 데 부담이 별로 없고, 재미있게 장기에 걸쳐 글을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글 쓰는 게 늘 그렇듯 뻔뻔함은 필수고요. (…)

4. 의견을 활발하게 내는 주인의식

수정주의 역사에서 초기 설정은 모두 참여자들이 합의해서 정하고, 그나마 끌고갈 진행자도 없는 플레이입니다. 다들 의견 안 내고 우물쭈물하면서 눈치보면 캠페인 그냥 망합니다. 특히 정해진 시간대가 없는 플레이라서 토론은 게시판이 (혹은 위키 코멘트가) 중심이 될 것 같은데, 게시판이 유령 게시판이 되거나 한두 사람만 활개치면 이미 망조는 성큼..(..) 한 번 시작한 것은 뿌리를 뽑고 보는 사람, 활발하게 의견 내면서 주인의식 가지고 캠페인 끌고 가는 참여자가 아니면 재밌게 하기 힘듭니다.

5. 스포츠맨쉽 (?)

수정주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진실’을 가지고 경쟁을 벌이는 규칙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의견이 충돌하면 해소할 장치도 준비되어 있고요. 동시에 진실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도 하죠. 이런 규칙으로는 자기 목소리를 강하게 내면서도 남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소통력이 중요합니다. 눈치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고, 남의 의견도 듣고 좋은 게 있으면 취해서 재해석하고 조합하고, 정 충돌하면 반박 판정을 해서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죠. 서로 규칙을 능력껏 교활하게 활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마구 밀고, 후회없이 싸우고, 깨끗이 승복할 때 제일 재미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식 ‘사상의 자유시장’ (Marketplace of ideas) 성격이 강하죠. 협력 자체보다는 경쟁과 연맹의 이합집산이 중점이라는 면에서 RPG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할 수 있을 듯.

6. 어느 정도의 글 솜씨

명문을 쓸 필요는 없지만, 근거에 맞춰 글을 논리적으로 쓸 필요는 좀 있습니다. 물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당장 지적이나 반박 들어오는 건 각오해야겠죠. 그리고 그런 지적이나 반박 앞에서 대범할 수 있어야 할 테고요.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보면 글 솜씨 늘리는 데도 꽤 좋은 방법입니다. 일단 글을 꾸준히 계속 쓰고, 계속 지적과 도전을 받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러면서도 공부가 아닌 놀이이니 학습의 적인 심적 부담도 적고…

7. 기술적 능력 내지는 호기심

한다면 저의 숙적(..) 제로보드보다는 위키에서 할 생각이므로 위키와 인터넷을 어느 정도 알면 도움이 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배워보겠다는 열의는 있어야 할 겁니다.

…뭐 쓰다 보니 이게 캠페인 참여 얘긴지 필살! 직장 생존법인지 모르겠군요. 실제로 이걸 다 갖춘 분이라면 1번 정도 빼고는 대충 성공의 조건은 다 갖추었을지도요..(…) 전에 말했듯 RPG 진짜 잘하는 사람은 뭐든 잘합니..(먼산)

어쨌든 한다면 약 한 달 정도의 시범 기간을 두고 실제로 의견 나오는 거랑 글 올라오는 걸 볼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가자끼리 투표하거나 로키 독재(?). 이 글은 이런 캠페인에 대한 관심도가 대충 얼마나 되나 하는 관심도 측정용이랄까요. 어쨌든 진짜 오래, 재밌게 할 사람만 모집하면 플레인스케이프는 정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세계이니까 뭔가 작품이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요.

포도원의 순사들

(2018. 5.9)

이야기와 놀이입니다.

원래 이 글은 해당 사이트를 개인 블로그로 쓰던 시절인 2007년에 일제강점기 시절의 순사들을 포도원의 파수견으로 플레이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생각나는 대로 쓴 글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부주의하게 다루고,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불쾌감을 드린 점을 사과드리면서 글을 지우겠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캠페인 구상 – Transhuman Adventures

이것저것 신청받은 것이 있어서 어째 진행 대기줄이 길어지는 느낌인데(..) 어제는 승한님과 트랜스휴먼 스페이스 캠페인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급변하는 기술과 사회가 인간 삶의 조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녹록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방대한 배경이라, Rpg.net 등지에서는 ‘매혹적이지만 부담되는 설정’에 꼽힌 걸 본 기억도 나더군요.

다른 진행자는 어떻게 접근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매력적인 괴물을 다룬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무조건 인물 중심.’ 사실 철학 토론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기술이 인간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하는 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RPG 세션은 인문 수업시간이 아닌걸요. 하지만 구체적인 인물, ‘사람’의 얘기로 다가올 때는 훨씬 피부에 와 닿죠. 자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한 인물이라든지, 인체 기관보다 기계 부속이 많은 인물이라든지…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든 인물 설정을 중심축으로 캠페인을 풀어가려면 제가 아는 규칙 중에서는 역시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이 가장 적당하겠더군요. 주인공들의 인간적 고민이 곧 캠페인의 화두가 되는 형태이고, 철저히 참가자 주도형이니까요. 또한, 시즌 하나가 5화나 9화 하는 식으로 떨어지니까 규모가 큰 배경에 자칫 눌리기 쉬운 완급 조절도 긴장감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게 하고 싶으면 시즌을 이어가며 재계약(..)하면 될 테고요. (안방극장 한 기를 마쳐보는 건 제 오랜 소원이기도 합니.. 조기종영은 싫어요! ;ㅁ;)

그러니까 첫 단계는 일단 모두가 마음에 드는 프로 기획. 두 번째는 논의와 조정을 좀 강도 높게 해가면서 인물 제작. 물론 주인공 상호 간의 조정도 중요할 테고요. 인물에 설정을 좀 밀도 있게 집어넣고, 자기 인물의 주변 설정 정도는 참가자가 알 수 있게 교육(?)을 시키면 이 시점에서 참가자에게 필요한 설정 정보는 대부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인물과 관련된 것이니 관심도도 대체로 높겠지요. 그리고 진행자도 실제 장면 진행을 하고 참가자의 장면 신청에 제안과 조언을 풍부하게 해줄 만큼의 설정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할 테고요.

여기까지 준비되면 준비가 좀 세지, 실제 플레이는 오히려 편할 것 같더군요. 참가자들은 자기 인물의 고민과 주제의식을 생각하며 장면 신청하고, 진행자는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제안과 조언 역할, 그리고 진행. 시즌 진행 중 서로 고민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THS 배경의 주제의식이 재해석과 재창조를 거치고, 인간적, 극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지적 자극이 되는 하드 SF가 나름 나오는 거죠, 뭐. 물론 세세한 규칙상 구현을 중시하는 취향이라면 안방극장은 끔찍하겠지만요. (..)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상만으로도 나름 즐겁군요. 요즘에는 구상하는 캠페인 중 몇 개나 끝내 못 하고 죽을까 하고 상상하는 것도 재미랍니다. (?!)

RPG의 기능적 구분 – 설정, 진행, 참가

지난번에 Wishsong님과 성일님의 글에 답변하면서 떠오른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RPG, 혹은 다른 놀이를 할 때 참여자가 맡을 수 있는 기능에는 크게 설정, 진행, 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의 초기 조건을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정하는 것이고, 진행은 설정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참가는 참가 수단 (RPG의 경우는 인물)을 움직여서 설정의 초기 조건을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수정 (07/06/24 08:19): 성일님의 반론대로 진행과 참가의 구분은 인적 구분이 개입한 면이 큽니다. 참가는 진행 중 서술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정리해보고 싶으니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보통 RPG에서는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의 역할, 참가는 참가자의 역할입니다만, 일반적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가 설정과 진행 권한을 나누어 가질 수도 있으며, 설정과 진행 일부를 규칙책과 카드에 맡겨놓고 진행자 없이 참가자만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인적 구분이라면, 사람이 아닌 기능에 따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기능적 구분입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부 구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리가 평소 놀 때 하는 각 활동이 전체 놀이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효용이 있겠지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각 상세 구분마다 제가 아는 규칙의 예를 들겠습니다.

1. 설정

1.1. 배경 설정

놀이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진행자 권한으로 전부 설정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모두 아는 배경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주로 상황 설정의 맥락이 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2. 상황 설정

놀이의 틀이 될 극적 상황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인물 설정에 제약이자 맥락 역할을 하며, 배경 설정을 의미 있게 활용하는 초점이 되기도 합니다.

1.3. 계획

놀이 속에서 벌어질 사건의 전개나 향방을 정하는 기능입니다. 반드시 소설이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하는 것은 아니고, 시나리오의 종류에서 다루었듯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진행자의 영역이지만,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다룬 성일님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참가자가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많은 순기능이 있습니다.

1.4. 장면 설정

미시적인 설정 기능으로, 한 장면의 초기 조건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습한 지하실입니다’ 하는 식으로 시작해서 이 장면에서 참가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설정의 다른 세부 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장면 설정은 특히 진행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진행 기능에 속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를 두고 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설정에 들어갑니다. 장면 설정도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이지만, 역시 참가자의 의견을 받기도 합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은 장면 설정 처리에서 흥미로운 데가 있는데, 각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원하는 장면을 얘기하는 장면 신청 규칙이 그것입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참가자는 ‘김 장군하고 박 장군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이끌 것인가 조정 앞에서 결판이 나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식으로 원하는 장면을 PD에게 신청합니다. 장면의 결말은 정하지 않고 (둘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지휘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김 장군, 박 장군), 장면의 배경은 무엇인지 (조정), 장면에 나올 사건은 무엇인지 (북방 원정군 지휘관 결정) 얘기하는 형식이지요. 그러면서 서로 제안도 주고받으며 (“조 부인을 사이에 둔 감정 문제도 나오면 재밌겠다”라든지)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의 과정이 있든 없든 각 참가자에게 규칙으로 이러한 장면 설정권을 보장(강제?)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장면 신청 규칙의 부수적 결과라면, 장면 설정 권한을 참가자들에게 주기 때문에 진행자 (PD)에게는 장면 설정권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신청 사항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권한은 있고 또 언제든지 제안이나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장면의 뼈대를 구성하는 창의적 권한은 기본적으로 참가자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진행자가 장면을 구성하고 참가자는 제안만 하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2. 진행

2.1. 서술

놀이 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정의 초기 조건이 변하는 것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기능입니다. 종종 참가에 반응해서 나옵니다. ‘고요한 연못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장면 설정, ‘돌을 던져요’가 참가라면 ‘크툴루가 튀어나옵니다’는 서술일 것입니다. 역시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에 들어갑니다.

폴라리스 (Polaris)는 서술 중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의식(儀式) 언어를 사용한 교섭으로 처리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서사나 설정의 영역도 넘나들지만…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노란색으로 강조한 글자가 의식 언어입니다.)

마음: 강 도령은 “이 간신 놈!” 하고 외치며 이 대감의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
후회: 하지만 그러려면 그 순간 포졸들이 들이닥쳐야 한다.
마음: 그리고 또한 강 도령과 장래를 약속한 선화 낭자가 이 대감의 딸이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선화 낭자’를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복수가 부르는 비극’을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마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강 도령의 축복 중 ‘하인 돌쇠’를 발동해서 울부짖는 선화가 아버지의 죽음을 못 보게 돌쇠가 막았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의 효과로 마지막 서술을 대폭 수정)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아버지를 죽인 강 도령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마음: 일의 전말은 이와 같았더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서술을 받아들이고 갈등을 끝냄.)
후회: 이 대감이 죽어가는 사이 포졸들은 강 도령을 포위하고…

폴라리스의 교섭 규칙은 이처럼 의논이나 합의가 아니라 규칙으로 서술상 의견 충돌을 해소하는 점이 특이합니다. 게다가 서로 기본적으로 적수인 ‘마음’과 ‘후회’는 서로 제안이나 이견 조율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양보 없이 각자 의견을 밀고 나가면서도 일관성 있는 결론을 낼 수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2.2. 조연 RP

넓은 의미에서는 서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조연을 움직이는 것도 진행의 한 가지 기능일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과 조연을 오가는 인물도 있는 만큼 (여러 인물을 참가자와 진행자가 돌려가며 맡을 수 있는 아르스 마기카가 좋은 예죠) 늘 뚜렷한 구분은 아닙니다.

위에서 얘기한 폴라리스에서는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누어서 맡는데, ‘후회’가 전통적인 진행자에 가장 가깝지만 주인공과 사회적, 권력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남자 조연은 ‘보름달’이, 정서적, 감정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여자 조연은 ‘그믐달’이 맡습니다. 조연의 행동은 ‘후회’ 혹은 ‘마음’이 특수 교섭 언어로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2.3. 서사

역시 넓은 의미로는 서술에 들어갑니다만, 주인공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범위에서 생기는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좀 더 거시적으로, 주인공들이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는 범위에서도 배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사라고 조금 욕심을 내어 구분해 보았습니다. 서술과 마찬가지로 참가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참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도적 길드 마스터를 죽여서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옆 나라에서 홍수가 나서 난민이 몰려드는 것은 후자의 예입니다.

2.4. 규칙 운용과 해석

판정의 과정과 결과를 규칙에 따라 서술하고 해석하는 기능입니다. 규칙을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고, 참가자가 개별 판단에 따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단순 서술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규칙으로 규정한 영역에 발생하는 두 번째 효과를 참조하시길. 진행자가 최종 결정권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참가자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로 이러한 마찰의 핵심은 규칙의 올바른 해석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주도권 혹은 참가의 의의가 살지 않는다는 불만의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긴 하지만요.

3. 참가

3.1. 인물 설정과 변화

놀이 속 사건의 주체이자  참가의 수단이 될 인물을 설정하고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참가자 인물 (주인공, PC) 설정을
통해 보통 참가자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설정 기능이기도 합니다. 조연 (NPC) 설정은 배경이나 상황 설정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참가의 기본 틀이며, 참가자의 욕구를 표시하는 중요한 신호가 되어 설정, 진행 기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보통 인물 설정은 참가자 한 명의 권한으로 생각하지만, 이 과정에 진행자와 다른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습니다.

3.2. 선언

참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에서 나온 주인공 행동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에는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라는 전술적 판단, 이 장면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고 싶다는 극적 욕구, 인물의 성격과 배경에는 이런 것이 어울린다는 인물 자체의 성질 등 많은 층이 있습니다. 보통은 개별 참가자의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 제안, 의논, 혹은 합의가 들어갈 수 있겠죠.

3.3. 판정

선언의 일종이지만 위의 규칙 운용과 해석에서 말했듯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한 전술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규칙을 매개로 놀이에 참가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수치상의 능력만 들어가고 주인공의 배경이나 정서, 인간관계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수치상의 능력에 주인공 자체의 특징이 들어간다면 그러한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라면 ‘명사수 1d6’과 마찬가지로 ‘어려서 당한 사고 때문에 다리를 전다 1d6’도 판정에 도움이 되고,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이라면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 면모를 발동해서 판정에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용하려면 이러한 능력치나 면모가 판정에 들어가야 하므로 이런 내용은 판정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에도 영향을 주고, 이렇게 해서 생기는 ‘이야기’는 판정의, 그리고 참가의 또 다른 층을 이룹니다.

이처럼 일단 거칠게 설정, 진행, 참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잡아보았습니다. 말했듯 이 구분을 칼같이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각 활동이 놀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데에 효용이 있는 구분이긴 하지만요. 논의와 사고의 틀이 되는 하나의 도구일 뿐, 이리 비틀고 저리 끼우다 결국 부러지면 버리고 더 좋은 걸 만들면 되겠죠.

참가자와 진행자의 관계에 대한 의견

Wishsong님의 글 플레이어-마스터와의 관계와 이에 대한 성일님의 답변과 반론에 대한 의견입니다. 자칫 복잡해질 수 있으니 Wishsong님의 원문성일님의 원문을 색으로 구분하겠습니다. Wishsong님이 제시하신 전제들은 논의의 핵심이므로 진한 글씨로 나타내겠습니다.


1. RPG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플레이)을 이루기 위해 만드는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쌍방향이 진행자 (마스터)와 참가자 (플레이어) 사이 말씀이라면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Wishsong님의 글에 대한 반론의 중심이기도 하고요. 일단은 쌍방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제한적인 이유를 두 가지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성일님 말씀대로 대립과 긴장, 합의의 양상은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라고 해서 단일한 목적이나 지향이 있지는 않으며, 긴장의 축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입니다.

둘째, 좀 있다 얘기하겠지만 진행자와 참가자는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으로 제한해서 생각하기에는 설명의 일반성이 떨어집니다.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사람인데 진행자의 역할과 참가자의 역할은 반드시 사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략)

저는 RPG라는 형식이 의사소통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원문에서 읽힙니다.

(중략)

꼬투리를 잡는 것 같지만, 글 전체로 봤을 때 승한님께서는 RPG를 어떤 정해진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으로 파악하고 계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짚고 갑니다.

제 생각은 한 편으로는 비슷하고 한 편으로는 다릅니다. RPG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의 양식은 반드시 규정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일부는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칙 (룰)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예로는 ‘내 화살이 맞았나’ 하는 결과를 정하는 의사소통을 판정 규칙으로 양식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덜 흔한 예로는 폴라리스 (Polaris) RPG에서 이야기의 진행 자체를 의식 언어로 교섭하는 것도 들 수 있습니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암시하는 데가 있는 대목이라 일단 얘기해 둡니다.


2.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수단으로 플레이에 참여한다. 양측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속성은 다르다.



RPG는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축(플레이어-마스터) 중 한 쪽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유희입니다. ‘무대’를
만드는 건 마스터이고, 그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서로 적극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이라고 서로가 생각하고, 인정하는 암묵적 경계선은 있기 마련입니다.

RPG에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에 따라 구분한다는 점에서 분석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나치게 제한적인 이해라서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이나 제가 겪은 인디 RPG의 경험을 포괄할 수 없거든요.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RPG 플레이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지만, 그마저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많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일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논의하겠습니다.

(전략)

무대를 만드는 것이 마스터라는 법이 없고,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캐릭터라는 법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Wishsong님이 말씀하신 두 개의 축을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20년 전에 이미 등장한
RPG인 “아르스 마기카”에서는 마스터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세션마다 돌아가면서 한다고 했을 때, 조금 하다 보면
그 “무대”는 어느 한 명이 준비했다고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중략)


아르스 마기카만의 예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PC와 NPC의 구별이 흐리고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역할 분담이 뚜렷하지 않은
시스템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스템을 사용했을 때 RPG가 성립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아르스 마기카처럼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RPG 뿐만 아니라 아예 진행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진행자 역할을 여럿이서 분담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에는 진행자가 없이 참가자만 있고, 폴라리스는 4인이 플레이를 하면 그 중 3인이 전통적인 진행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갈등 제시, 조연 [NPC] 역할) 1인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인적 구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예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기능적 구분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아르스 마기카의 예를 들어서, 진행을 돌아가면서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한 편으로는 진행자 역할이 사람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뒤집어 말하면 진행자라는 기능, 혹은 직능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기능을 채우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적 구분을 부정할 이유가 될 뿐, 기능적 구분은 여전합니다.

폴라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심지어는 돌아가면서 맡지만 그 역할 자체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심지어는 진행자가 없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에서도 인적 구분은 없어도 기능적 구분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진행자의 전통적 역할을 일부는 규칙책에 나오는 기본 설정 (펨버튼 대학, 1년에 6가지의 교내 행사, 각종 행동 카드)에 맡기고, 일부는 참가자들이 나누어 맡습니다 (조연 역할). 이 경우는 설정을 정하고 진행하는 기능을 맡는 사람이 유동적인 정도가 아니라 규칙책과 카드 등 ‘사람이 아닌 것’이 맡지만, 기능 자체는 존재합니다.

일반적인 시스템을 사용한 일반적인 플레이에서도 “암묵적 경계선”의 위치는 팀마다, 캠페인마다 많이 다르게 설정됩니다. (중략)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말씀하신 “경계선”은 취향에 따라, 편의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지 RPG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후략)

제 생각은 여기서 성일님과 갈라집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경계선이 팀이나 규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애당초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이 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건 당연하죠. 경계선은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이 아닌 진행과 참가 기능을 구분하며, 그 기능은 경우에 따라 누구든 맡을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규칙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기능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혹은 무엇에 맡기냐에 따라 RPG라는 놀이가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보드게임적 성향이 짙고, 진행 기능의 모든 것을 컴퓨터에 맡기면 RPG가 아닌 CRPG가 됩니다. 하지만, RPG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 내에서도 이 기능을 누가, 무엇이 맡느냐는 성일님 말씀대로 상당한 유동성이 있습니다.

RPG에서, 혹은 놀이 전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능적 구분은 크게 설정, 진행, 참가라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가 이루어지는 배경, 혹은 상황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진행은 놀이 속 사건의 추이를 움직이고 배경이나 상황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참가는 의사 결정을 통해 그 배경이나 상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고전적인 RPG에서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 참가는 참가자에게 국한되지만 이것은 논리 필연적인 역할 분담은 아니며, 기능적 분담을 인적 분담과 혼동하면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생기기도 합니다. 참가자도 얼마든지 설정이나 진행에 참여할 수 있고, 진행자도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 없이 설정과 진행 기능 일부를 규칙책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고, 진행 역할을 셋이서 분담하고 한 명만 참가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기능적 구분은 존재하되, 그것을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은 유동적입니다.

2-1. 마스터는 RPG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근간 설정을 담당하고 책임진다.

(Wishsong님이 드신 예 생략)

이것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예임에는 확실하나, RPG가 그래야만 한다,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일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한다면 이 전제는 ‘고전 RPG 모델에서 진행자는 일반적으로 설정 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진행자라는 사람, 혹은 위치에 속한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 놀이의 기능을 참여자들에게 분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한 가지 모습입니다.

팀의 합의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마스터가 저렇게 얘기해도 결과가 안 되는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마스터는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팀에서 결정된 내용을 정리하여 발언할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좀 더 보충하자면, 합의에 따른 진행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합의 말고도 설정 혹은 진행 기능을 제어하는 장치도 있습니다. 폴라리스의 서술 교섭과 같은 규칙이 한 예이죠.


2-2. 플레이어는 마스터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면 마스터는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킬 수 없나요? 그렇다면 소설에는 생명이 없고 변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RPG에서 마스터가 소설 쓰듯 혼자 노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

소설과 RPG에서 나타나는 생명력과 변화는 분명히 다르고, 이것은 소설과 RPG의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RPG에서 나타나는 역동성을 소설에서 느끼는 역동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 혼동의 위험이 큽니다. 소설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고, 이미 내용을 알고 읽어도 끝없이 새로운 의미와 상상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RPG에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변할 수 있고, 이것은 참가 기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생명력과 변화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RPG에서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곧 RPG의 생명력이나 변화와 소설의 생명력과 변화는 다르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만… RPG에서 있어야 하는 생명력과 변화가 소설과 같은 것이라면 참가 기능은 의미가 없고,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도 생명력과 변화가 가득한 훌륭한 RPG일 테니까요.

(계속)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유일하게 플레이어에게만 허용된 속성이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후략)

역시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2-2는 참가는 보통 참가자가 맡는다는 일반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다른 기능적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인적으로는 유동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성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Wishsong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참가는, 그리고 참가 기능이 있는 참가자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판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니까요.

반면 성일님 말씀대로 진행자 역시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듯 참가가 설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이라면 진행은 변화 자체의 표현입니다. 진행자, 혹은 진행을 맡은 참여자는 그 변화와 역동성을 표현함으로써 얼마든지 플레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참가자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파급 효과가 있고, 여기에 반응해서 다시 또 변화를 일으키고… 하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죠.

딱히 Wishsong님의 전제에 대한 반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초기 조건이 참가이기 때문입니다. 즉 Wishsong님의 이 전제는 ‘참가자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유일성을 강조했다기보다는 ‘참가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참가의 능동적, 역동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세 구분을 논리적으로 따라가자면 진행자가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과 조연이 대화를 나눈다고 하면 주인공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참가, 조연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진행 기능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은 조연의 반응에 영향을 주고, 조연의 반응은 다시 또 주인공의 반응에 영향을 주면서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위의 설정, 진행, 참가 기능을 나누면서 참가가 기본적으로 작용이라면 진행 기능은 반작용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그 영향의 방향은 일방적이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행과 참가는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이며, 성일님의 말씀대로 진행자도 배경이나 상황에 생명력과 변화를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플레이어는 갈등과 서사를 원한다. 따라서 마스터에게 이 부분을 이양한다.

->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캐릭터가 맞부딪힐 갈등, 그리고 만들어갈 이야기를 관리할 존재로 마스터를 선택하고, 이 부분에 대한 ‘권력’- 갈등의 시작 및 PC를 위한 무대 설정을 위임합니다. 물론 마스터가 ‘이러이러한 캠페인을 합니다~’ 라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근본적으로 RPG의 권력은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세계를 맡기는’ 형태라고 봅니다.

물론 설정과 진행 기능이 일반적으로 진행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고, 여기에 참가자의 이양이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나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의문이 가는 부분은 ‘갈등과 서사에 대한 욕구’와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 설정의 권한을 갖는 것’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입니다. 어째서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에 관련한 권한이 있어야 유토피아가 아닌 갈등과 이야기가 성립하는지 하는 논리적, 혹은 현실적 필연성이 들어가야 완전할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의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플레이어와 마스터 사이의 갈등과 등치시키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플레이 내의 일이고, 마스터와 플레이어 사이의 권력 분배는 플레이 외의 일입니다. 마스터에게
갈등과 서사에 관한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도 갈등을 접하고 서사를 일으킬 수 있음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되었고, 실례도 많이
등장한 바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 성일님이 이미 하신 말씀과 같군요. (퍽)


4. 하지만 마스터도 사람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전략) 마스터는 자신의 생각한 이야기와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이 떠맡긴
잡무(….)를 처리하는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가 잡무를 처리하면서까지 RPG를 하겠다고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건
이런 이유겠죠.

저는 이 현상을 현실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잡무”라고 이야기하신 다양하고도 복잡한 의무들이 사실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권력임을 플레이어들이 깨닫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것을 포기함으로써 플레이는 마스터의 변덕에 그대로
노출되며, 마스터의 수완에 의해 플레이의 질이 결정 나버리는 결과에 달합니다. (후략)

‘잡무 대신 권력’이라는 발상이 위험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설정과 진행 기능이 대부분 진행자에게 있는 것이 곧 참가자가 놀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진행자의 자의에 노출되는 결과가 된다는 데에는 반대합니다. 이것은 참가 기능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설정과 진행은 각각 참가의 틀과 참가에 대한 반응을 이루며, 특히 진행이 참가에 반응하지 않고 진행자의 자의에 따를 때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 생깁니다. 설정과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도 나누어 갖는 것도 이러한 병리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잡무 대신 권력’이 위험하다는 점에서는 성일님과 생각을 같이하지만, 그 근거는 다릅니다.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분담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위험 현상이 아니라는 의견은 방금 얘기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부분은 첫 번째, 설정과 진행 기능을 기능이 아닌 권력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 두 번째, 반대급부라는 대가성을 넣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맡기 때문이 아니라 참가의 의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나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과중한 잡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었어! 따라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진행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기는 플레이 내 병리가 얼마나 많은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위에 말했듯 성일님이 말씀하신 설정과 진행 기능의 분담도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해결책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이지만요.


5.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멋진 것’과 마스터가 생각하는 ‘멋진 것’은 다르다.

-> 마스터도 플레이어도 모두 사람입니다.  서로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다릅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플레이어의 목적은 자신의 PC를 통해 충분히 롤플레이를 하면서 세션에서 드러난, 혹은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마스터의 가치관이 개입된 세계, 그리고 플롯에 맞부딪히면서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전략) 저라면 굳이 “플레이어” “마스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으며,
사전 합의는 이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그 목적의 하나입니다. (후략)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에 따라 저는 이 전제를 성일님이 지적하셨듯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멋진 것”은 서로 다르다’라고 고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역동적 긴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일님 의견하고는 조금 다르게, 플레이 외적 긴장은 플레이 내적 갈등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역동적 긴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겠지요.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플레이 안에서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서로 밀고 당기게 되며, 이 과정을 참여자 간의 파괴적인 갈등이 아닌 플레이 속의 생산적인 갈등, 서로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내면서도 조화로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역동적 긴장을 다루면서 생각한 핵심입니다.

6. 플레이어와 마스터는 사전 합의를 통해 이러한 마찰의 요소를 사전에 최대한 배제시키려고 한다.

-> 이건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권력을 주는 과정에서 합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일님 지적대로 대상이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플레이 외적 마찰은 배제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플레이 내적 갈등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플레이의 재미입니다. 아마도 전자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드신 예를 봐도 이것이 반드시 배제해야 할 마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역동적 긴장이라는 이름으로 했던 구분에 따라 논의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수단에 대한 긴장.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은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는 거인의 수중에 있습니다. 진행자는 거인을 때려잡는 것과 거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열쇠를 얻는 것 사이에 선택시키고 싶습니다. 반면 참가자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노래를 불러 거인을 잠들게 하고 열쇠를 훔친다거나, 열쇠 없이 성벽을 넘어간다거나, 열쇠를 걸고 수수께끼 겨루기를 제안한다거나.

이러한 것이 배제해야 할 갈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역동적인 긴장에 대한 글에서 얘기했듯 상당한 지적, 논리적 도전이 아닐까요? 참가의 의의를 살리면서도 진행자가 어느 정도 원래의 선택지를 유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정당해야겠지요. 성벽을 넘어갈 수 있나 탐사했더니 성벽에 마법 가시나무가 뒤덮여서 잘라내도 잘라내도 계속 자라나고, 부상을 입지 않고 올라가려면 마법이 걸린 보호구가 필요한데 그걸 구하려면 또 멀리 있는 마법사의 탑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이러한 설정들은 특히 규칙을 매개로 하면 참가자에게 의사 결정의 여지를 주며, 결국 참가자가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해서 성벽을 넘어간다면 그것도 즐거운 결론입니다. 아예 무너뜨린다거나, 가시나무를 태워버린다거나, 등등. 반면 무턱대고 너무 높다면서 오르기 판정에 수정치 -20을 붙이는 식의 자의는 참가의 의의를 줄이는 것이며, 자칫 플레이 외적인 감정적 마찰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 시점에서 합의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거인은 나중에 나름 중요한 인물인데 말야, 만나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난 가시나무를 넘어가는 쪽이 더 재밌는걸.’ 이것이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와 일부 나누는 방향입니다. 반면 합의 없이 밀고 나가서 규칙을 매개로 참가자가 성공하면 참가자의 해결책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어느 쪽이든 이것이 미리 배제해야 하는 성격의 충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 목적에 대한 긴장. 마왕에게 반한 주인공의 예를 가져오면, 사실 이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진행자가 생각하지 못한 마왕의 면모를 주인공이 발견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극적 재미는 깊어질 테니까요. 다른 주인공에게 마왕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라면 주인공 일행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반하는 일도 있을 수 있죠.

물론 이 경우도 이것이 플레이 내 갈등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 외적 마찰이 될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끊고 서로 합의를 보든지, 규칙대로 판정해서 해결하든지 해야겠죠. 플레이 내의 갈등은 플레이의 재미 그 자체이지만, 플레이 외적 마찰은 플레이에 독이 되니까요. 서로 생각이 달라서 플레이 내에서 밀고 당기는 것과 서로 감정이 상할 만한 마찰은 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전략) 사전 합의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 중에도 예측 못한
문제(갈등이라는 표현은 쉽게 쓰기 어렵습니다.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아예 다른 물건이니까요)가 발생합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사실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해야 할 문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리가 안 돼서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성일님 말씀대로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다르니까요. 플레이 내의 갈등이라면 그건 플레이의 재미이니까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하자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플레이 외적 갈등이라면 플레이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플레이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넘어서는 안 될 경계나 의사소통의 통로를 정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니까 굳이 얘기하자면 이쪽이려나요.

끝에 좀 헷갈려 버렸지만, 어쨌든 저도 정리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환호성을 지르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

저는 플레이어와 마스터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플레이를 꾸미고 진행하는 방식에 객관적인 장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RPG라는 놀이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봅니다.

객관적인 장점이 있다는 점에는 찬성하고 흥미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논리적 귀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설정, 진행, 참가의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도 반론할 여지가 많겠죠)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은 설정과 진행의 권한을 진행자와 참가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RPG의 병리 현상을 해결하고 모두가 더 재밌게 노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일하고 논리필연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설정과 진행의 권한이 진행자에게 있어도 참가의 의의 또한 확보하고 살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합의와 상관없이 서로 목소리를 내면서 밀고 당기며, 규칙과 논리에 따라 결론을 내서 각자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더 재미있는 결과를 내는 플레이가 제가 역동적 긴장이나 코스티캔의 게임론을 끌어들여서 구현하고자 하는 플레이입니다. RPG는 설정과 진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참가의 기능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일님이 그 가능성을 배제하신 것은 결코 아니니까 반론이라기에도 뭣합니다만..^^ ‘논리적 귀결’이라는 말씀에 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 점은 반박할 수 있는 근거 없이 성일님의 생각이라고 밝히셨으니까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취향이나 신념의 영역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어디에도 논의는 넘쳐나는 곳이 인터넷이지만, Wishsong님이 RPG에 대한 전제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밝히신 의미는 대단히 큰 것 같습니다. 종종 전제 자체가 다른 건 생각 못한 채 꼬리를 물고 도는 논의가 되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그 전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건 크나큰 생각의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정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고요.

페이트 1~8장

07/04/13: 페이트 1판은 이제 더이상 번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감수가 안돼서 엉망이긴 하지만 일단 참가자에게 필요한 부분은 번역됐고,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출간에서 시작해 드레스덴 파일 (The Dresden Files) 출간까지 되면 페이트 3판 SRD가 나올 텐데 더이상 구판인 1판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직 드레스덴 파일 RPG의 출간과 정식 SRD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간격이 있는만큼 세기의 혼 규칙 요약을 나름대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페이트 1판 번역 파일은 이곳에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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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의 선택에 대하여

CB마스터님의 이 글을 보고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왠지 게시판 토론 삘이?) 특히 다음 부분이 인상에 남더군요.

다만 이런 방식을 쓸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게, 예상하실 수 있듯이 캠페인의 주도권이 대부분 마스터에게 넘어갑니다. 마스터
머릿속에서 이미 캠페인 엔딩까지 결정이 다 돼 있고 PC는 거의 마스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식이 돼 버리기 쉽더라구요. 앞서 말했듯이 마스터가 먼저 마련한 배경은 오히려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보장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마스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는 걸 아는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플레이어들은 곧잘 수동적인 대응만을 하게 됩니다.

RPG의 게임성에 대한 글에서 다루었듯, RPG의 재미는 의사결정과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참가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만, 사실과 일치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 제일 쉽다는 면에서 두가지는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CB마스터님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선택의 여지, 혹은 그 인상을 확보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인물 설정이나 지금까지의 사건에 비추어 선택이 뻔하고 어떻게 해도 진행자의 손안에서 놀 뿐이라고 생각되면 참가자는 자신의 선택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될 위험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2005년 말에 진행했던 라이테이아 전기에 나온 케사르라는 주인공이 그 예였죠. 케사르는 설정상 연쇄살인(..) 전적이 있는 청년으로, 찾던 친부모를 마침내 만나지만 친부모가 갓난아이였던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키워준 요정족의 숲을 구하려면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극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라는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궁지를 넘어 주인공을 거의 함정으로 몰아넣은 셈이었으니까요. 좀더 운신의 폭이라든지 권력기반이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7회짜리 단기 캠페인의 시간제한도 있었고, 케사르에게는 아버지에게 대항할 기반도 부족했죠. 결국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손에 입을 맞추며 후계자가 되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숲의 아들로서의 자신을 버립니다.

참가자분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지금 생각해도 멋진 장면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저 상황에서 참가자분이 ‘에잇 선택의 여지 따위 없잖아! 알았수다. 후계자 합죠 뭐.’ 라고 반응했어도 진행자로서는 크게 할말은 없었던 상황이기도 합니..(..) 그만큼 저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혹은 극히 적은 상황설정은 최대한 아끼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인물 설정이라는 또다른 ‘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고, 그래서 참가자의 이해와 협력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플레이 내에서의 선택이 제한되는 것은 틀림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와 같이 참가자의 선택의 여지가 줄어드는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원인에 대해서는 링크한 CB마스터님의 글과 얼마전에 천승민님이 다셨던 댓글이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진행자가 뭔가 ‘준비’했고,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가자의 선택권을 줄이는 게 아닌가 하는, 어떻게 보면 기운빠지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라이테이아 전기 때 제 경험이 그랬습니다. 특정한 결과를 예상하고 상황을 만들다 보니 참가자들을 자꾸 그쪽으로 몰고 가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요정숲을 구하기 위해 희생해야겠지? 아직 이유가 부족해? 자, 여기 또다른 이유가 있다! ..) 그러다 보니 참가자들도 눈치채고 진행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줄여가는 게 아니었을지… 아마 그렇기 때문에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 등 많은  인디 RPG들이 어떤 사건의 진행이나 귀결을 절대로 정하지 말라고 진행자에게 조언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선택의 제한, 내지는 부정을 극복하는 법 역시 천승민님의 댓글 중 두번째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젠 아주 대놓고 남의 댓글을 우려먹고 있습..) 즉 모든 사건을 준비하는 대신 초기 상황설정 외의 부분은 개방형으로 해놓고 참가자의 선택에 따라 귀결을 실제로 ‘만들어’ 가는 것이 참가자의 선택을 최대한 확보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제 경험으로 예를 들면, 최근 진행하고 있는 포도원의 제다이 캠페인에서 첫 마을이었던 셀렌의 진행이 정말 아무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초기 세팅만 해둔 경우입니다.(주:다크포스 진행표는 포도원의 개들 원래 규칙에 나온 것을 찰스 페레즈씨가 스타워즈용으로 고친 것입니다. 페레즈씨의 글은 이곳에.) 포도원의 개들 같은 경우 저런 진행표를 통해 결과를 정하지 않은 개방형 진행을 지원합니다만, 사실은 어떤 규칙이나 캠페인에든 적용 가능한 것이기도 하죠.

이 진행표에서 정해진 것은 제다이들이 오기까지 마을에서 무엇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제다이들이 오지 않는다면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지. 그리고 몇몇 조연과 이들이 제다이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 제다이들이 들어와서 일으키는 변화에 저는 조연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 각자가 바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반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캠페인 내의 모든 사건은 제가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고, 그 차이는 상당히 크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이 방식의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라면 자칫 참가자를 막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뭔가 엄청난 상황은 있는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가 없으면 그건 선택의 폭이 너무 커서 결국 선택의 폭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죠. 따라서 참가자에게 이 상황을 이렇게 이끌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과제가 보이도록 실마리를 잡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참가자가 할 수 있는 일만 보여주면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나갈지는 참가자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참가자가 적극적일수록 실마리는 조금만 주고 참가자가 창의적으로 방향을 창출할 수 있고, 참가자가 소극적일수록 실마리를 뚜렷하게, 많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장소, 인물, 초기 상황 설정만 하면 된다는 면에서 진행자의 부담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시나리오식 진행보다 준비가 더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도 유의사항입니다. 일단 시나리오가 짜지면 그로 인해 참가자가 접할 수 있는 장소와 인물이 어느정도 정해지는데 반해 참가자가 (이론적으로는)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준비해야 할 장소와 인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요.

여기에 유의미한 제한을 가하고 진행자 머리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상황이 중요해진다고 봅니다. 지금 상황이 살인사건의 해결이라면 실마리가 그쪽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갑자기 스트립바를 가진 않을 테니까요. (..가려나요?) 따라서 상황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적절히 던져서 이미 준비된 장소와 인물로 이끄는 진행의 일반 기법이 중요해지고, 이것은 위의 ‘참가자 막막하게 만들지 않기’와도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 피해자하고 마지막으로 얘기한 사람이요? 그건 옆집 루시였죠, 아마.’ 하는 증언이 있으면 이미 설정이 된 인물인 옆집 루시를 찾아갈 테니까요.

그렇다면 결국 진행자 손안에서 노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저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진행자는 특정한 상황을 주고 그 상황 속에서 운신할 수 있는 수단을 쥐어줄 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서 어떤 결과를 낼지는 참가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정해진 것이 없이 참가자의 행동과 그에 대한 반응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참가자 선택은 사건의 귀결에 하나하나 충실하게 반영됩니다. 누구에게 어떤 투로 얘기했는지부터 누구를 범인으로 지목했는지까지. 그것이 바로 참가자가 선택의 여지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 아닐까요.

물론 이것은 저같은 경우 이렇게 하니까 참가자 선택 여지가 커지더라… 하는 경험담일 뿐이지 모든 경우에 이렇다거나 모든
캠페인이 이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완성도 높은 줄거리라든지 특색있는 세트와 같은 요소를 즐기는 데는 부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가자의 선택에 의해 유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미리 정해진 줄거리의 철저한 완전성은 부족할 테고, 완벽하게
준비된 세트는 참가자들이 있는지도 모른채 안 가거나 부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진행 방법을 결정할 때는 RPG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재미들을 서로 저울질할 수밖에 없고, 저같은 경우 그중 참가자
선택의 극대화를 택했을 뿐입니다. 현재까지는 참가자들이 만족을 표시하고 있으므로 유지할 생각이며, 이것은 어떤 진행 방법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놀이인 RPG에서 ‘재미’보다 우선할 수 있는 가치는 어디에도 없고, 모두가 재미있다면 그것이 곧 좋은
방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