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와 진행자의 관계에 대한 의견

Wishsong님의 글 플레이어-마스터와의 관계와 이에 대한 성일님의 답변과 반론에 대한 의견입니다. 자칫 복잡해질 수 있으니 Wishsong님의 원문성일님의 원문을 색으로 구분하겠습니다. Wishsong님이 제시하신 전제들은 논의의 핵심이므로 진한 글씨로 나타내겠습니다.


1. RPG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플레이)을 이루기 위해 만드는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쌍방향이 진행자 (마스터)와 참가자 (플레이어) 사이 말씀이라면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Wishsong님의 글에 대한 반론의 중심이기도 하고요. 일단은 쌍방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제한적인 이유를 두 가지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성일님 말씀대로 대립과 긴장, 합의의 양상은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라고 해서 단일한 목적이나 지향이 있지는 않으며, 긴장의 축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입니다.

둘째, 좀 있다 얘기하겠지만 진행자와 참가자는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으로 제한해서 생각하기에는 설명의 일반성이 떨어집니다.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사람인데 진행자의 역할과 참가자의 역할은 반드시 사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략)

저는 RPG라는 형식이 의사소통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원문에서 읽힙니다.

(중략)

꼬투리를 잡는 것 같지만, 글 전체로 봤을 때 승한님께서는 RPG를 어떤 정해진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으로 파악하고 계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짚고 갑니다.

제 생각은 한 편으로는 비슷하고 한 편으로는 다릅니다. RPG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의 양식은 반드시 규정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일부는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칙 (룰)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예로는 ‘내 화살이 맞았나’ 하는 결과를 정하는 의사소통을 판정 규칙으로 양식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덜 흔한 예로는 폴라리스 (Polaris) RPG에서 이야기의 진행 자체를 의식 언어로 교섭하는 것도 들 수 있습니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암시하는 데가 있는 대목이라 일단 얘기해 둡니다.


2.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수단으로 플레이에 참여한다. 양측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속성은 다르다.



RPG는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축(플레이어-마스터) 중 한 쪽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유희입니다. ‘무대’를
만드는 건 마스터이고, 그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서로 적극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이라고 서로가 생각하고, 인정하는 암묵적 경계선은 있기 마련입니다.

RPG에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에 따라 구분한다는 점에서 분석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나치게 제한적인 이해라서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이나 제가 겪은 인디 RPG의 경험을 포괄할 수 없거든요.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RPG 플레이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지만, 그마저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많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일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논의하겠습니다.

(전략)

무대를 만드는 것이 마스터라는 법이 없고,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캐릭터라는 법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Wishsong님이 말씀하신 두 개의 축을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20년 전에 이미 등장한
RPG인 “아르스 마기카”에서는 마스터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세션마다 돌아가면서 한다고 했을 때, 조금 하다 보면
그 “무대”는 어느 한 명이 준비했다고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중략)


아르스 마기카만의 예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PC와 NPC의 구별이 흐리고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역할 분담이 뚜렷하지 않은
시스템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스템을 사용했을 때 RPG가 성립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아르스 마기카처럼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RPG 뿐만 아니라 아예 진행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진행자 역할을 여럿이서 분담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에는 진행자가 없이 참가자만 있고, 폴라리스는 4인이 플레이를 하면 그 중 3인이 전통적인 진행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갈등 제시, 조연 [NPC] 역할) 1인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인적 구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예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기능적 구분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아르스 마기카의 예를 들어서, 진행을 돌아가면서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한 편으로는 진행자 역할이 사람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뒤집어 말하면 진행자라는 기능, 혹은 직능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기능을 채우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적 구분을 부정할 이유가 될 뿐, 기능적 구분은 여전합니다.

폴라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심지어는 돌아가면서 맡지만 그 역할 자체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심지어는 진행자가 없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에서도 인적 구분은 없어도 기능적 구분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진행자의 전통적 역할을 일부는 규칙책에 나오는 기본 설정 (펨버튼 대학, 1년에 6가지의 교내 행사, 각종 행동 카드)에 맡기고, 일부는 참가자들이 나누어 맡습니다 (조연 역할). 이 경우는 설정을 정하고 진행하는 기능을 맡는 사람이 유동적인 정도가 아니라 규칙책과 카드 등 ‘사람이 아닌 것’이 맡지만, 기능 자체는 존재합니다.

일반적인 시스템을 사용한 일반적인 플레이에서도 “암묵적 경계선”의 위치는 팀마다, 캠페인마다 많이 다르게 설정됩니다. (중략)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말씀하신 “경계선”은 취향에 따라, 편의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지 RPG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후략)

제 생각은 여기서 성일님과 갈라집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경계선이 팀이나 규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애당초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이 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건 당연하죠. 경계선은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이 아닌 진행과 참가 기능을 구분하며, 그 기능은 경우에 따라 누구든 맡을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규칙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기능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혹은 무엇에 맡기냐에 따라 RPG라는 놀이가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보드게임적 성향이 짙고, 진행 기능의 모든 것을 컴퓨터에 맡기면 RPG가 아닌 CRPG가 됩니다. 하지만, RPG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 내에서도 이 기능을 누가, 무엇이 맡느냐는 성일님 말씀대로 상당한 유동성이 있습니다.

RPG에서, 혹은 놀이 전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능적 구분은 크게 설정, 진행, 참가라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가 이루어지는 배경, 혹은 상황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진행은 놀이 속 사건의 추이를 움직이고 배경이나 상황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참가는 의사 결정을 통해 그 배경이나 상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고전적인 RPG에서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 참가는 참가자에게 국한되지만 이것은 논리 필연적인 역할 분담은 아니며, 기능적 분담을 인적 분담과 혼동하면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생기기도 합니다. 참가자도 얼마든지 설정이나 진행에 참여할 수 있고, 진행자도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 없이 설정과 진행 기능 일부를 규칙책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고, 진행 역할을 셋이서 분담하고 한 명만 참가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기능적 구분은 존재하되, 그것을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은 유동적입니다.

2-1. 마스터는 RPG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근간 설정을 담당하고 책임진다.

(Wishsong님이 드신 예 생략)

이것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예임에는 확실하나, RPG가 그래야만 한다,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일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한다면 이 전제는 ‘고전 RPG 모델에서 진행자는 일반적으로 설정 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진행자라는 사람, 혹은 위치에 속한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 놀이의 기능을 참여자들에게 분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한 가지 모습입니다.

팀의 합의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마스터가 저렇게 얘기해도 결과가 안 되는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마스터는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팀에서 결정된 내용을 정리하여 발언할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좀 더 보충하자면, 합의에 따른 진행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합의 말고도 설정 혹은 진행 기능을 제어하는 장치도 있습니다. 폴라리스의 서술 교섭과 같은 규칙이 한 예이죠.


2-2. 플레이어는 마스터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면 마스터는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킬 수 없나요? 그렇다면 소설에는 생명이 없고 변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RPG에서 마스터가 소설 쓰듯 혼자 노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

소설과 RPG에서 나타나는 생명력과 변화는 분명히 다르고, 이것은 소설과 RPG의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RPG에서 나타나는 역동성을 소설에서 느끼는 역동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 혼동의 위험이 큽니다. 소설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고, 이미 내용을 알고 읽어도 끝없이 새로운 의미와 상상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RPG에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변할 수 있고, 이것은 참가 기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생명력과 변화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RPG에서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곧 RPG의 생명력이나 변화와 소설의 생명력과 변화는 다르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만… RPG에서 있어야 하는 생명력과 변화가 소설과 같은 것이라면 참가 기능은 의미가 없고,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도 생명력과 변화가 가득한 훌륭한 RPG일 테니까요.

(계속)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유일하게 플레이어에게만 허용된 속성이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후략)

역시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2-2는 참가는 보통 참가자가 맡는다는 일반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다른 기능적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인적으로는 유동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성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Wishsong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참가는, 그리고 참가 기능이 있는 참가자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판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니까요.

반면 성일님 말씀대로 진행자 역시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듯 참가가 설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이라면 진행은 변화 자체의 표현입니다. 진행자, 혹은 진행을 맡은 참여자는 그 변화와 역동성을 표현함으로써 얼마든지 플레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참가자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파급 효과가 있고, 여기에 반응해서 다시 또 변화를 일으키고… 하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죠.

딱히 Wishsong님의 전제에 대한 반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초기 조건이 참가이기 때문입니다. 즉 Wishsong님의 이 전제는 ‘참가자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유일성을 강조했다기보다는 ‘참가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참가의 능동적, 역동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세 구분을 논리적으로 따라가자면 진행자가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과 조연이 대화를 나눈다고 하면 주인공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참가, 조연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진행 기능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은 조연의 반응에 영향을 주고, 조연의 반응은 다시 또 주인공의 반응에 영향을 주면서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위의 설정, 진행, 참가 기능을 나누면서 참가가 기본적으로 작용이라면 진행 기능은 반작용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그 영향의 방향은 일방적이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행과 참가는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이며, 성일님의 말씀대로 진행자도 배경이나 상황에 생명력과 변화를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플레이어는 갈등과 서사를 원한다. 따라서 마스터에게 이 부분을 이양한다.

->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캐릭터가 맞부딪힐 갈등, 그리고 만들어갈 이야기를 관리할 존재로 마스터를 선택하고, 이 부분에 대한 ‘권력’- 갈등의 시작 및 PC를 위한 무대 설정을 위임합니다. 물론 마스터가 ‘이러이러한 캠페인을 합니다~’ 라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근본적으로 RPG의 권력은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세계를 맡기는’ 형태라고 봅니다.

물론 설정과 진행 기능이 일반적으로 진행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고, 여기에 참가자의 이양이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나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의문이 가는 부분은 ‘갈등과 서사에 대한 욕구’와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 설정의 권한을 갖는 것’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입니다. 어째서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에 관련한 권한이 있어야 유토피아가 아닌 갈등과 이야기가 성립하는지 하는 논리적, 혹은 현실적 필연성이 들어가야 완전할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의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플레이어와 마스터 사이의 갈등과 등치시키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플레이 내의 일이고, 마스터와 플레이어 사이의 권력 분배는 플레이 외의 일입니다. 마스터에게
갈등과 서사에 관한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도 갈등을 접하고 서사를 일으킬 수 있음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되었고, 실례도 많이
등장한 바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 성일님이 이미 하신 말씀과 같군요. (퍽)


4. 하지만 마스터도 사람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전략) 마스터는 자신의 생각한 이야기와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이 떠맡긴
잡무(….)를 처리하는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가 잡무를 처리하면서까지 RPG를 하겠다고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건
이런 이유겠죠.

저는 이 현상을 현실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잡무”라고 이야기하신 다양하고도 복잡한 의무들이 사실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권력임을 플레이어들이 깨닫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것을 포기함으로써 플레이는 마스터의 변덕에 그대로
노출되며, 마스터의 수완에 의해 플레이의 질이 결정 나버리는 결과에 달합니다. (후략)

‘잡무 대신 권력’이라는 발상이 위험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설정과 진행 기능이 대부분 진행자에게 있는 것이 곧 참가자가 놀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진행자의 자의에 노출되는 결과가 된다는 데에는 반대합니다. 이것은 참가 기능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설정과 진행은 각각 참가의 틀과 참가에 대한 반응을 이루며, 특히 진행이 참가에 반응하지 않고 진행자의 자의에 따를 때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 생깁니다. 설정과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도 나누어 갖는 것도 이러한 병리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잡무 대신 권력’이 위험하다는 점에서는 성일님과 생각을 같이하지만, 그 근거는 다릅니다.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분담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위험 현상이 아니라는 의견은 방금 얘기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부분은 첫 번째, 설정과 진행 기능을 기능이 아닌 권력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 두 번째, 반대급부라는 대가성을 넣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맡기 때문이 아니라 참가의 의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나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과중한 잡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었어! 따라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진행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기는 플레이 내 병리가 얼마나 많은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위에 말했듯 성일님이 말씀하신 설정과 진행 기능의 분담도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해결책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이지만요.


5.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멋진 것’과 마스터가 생각하는 ‘멋진 것’은 다르다.

-> 마스터도 플레이어도 모두 사람입니다.  서로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다릅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플레이어의 목적은 자신의 PC를 통해 충분히 롤플레이를 하면서 세션에서 드러난, 혹은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마스터의 가치관이 개입된 세계, 그리고 플롯에 맞부딪히면서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전략) 저라면 굳이 “플레이어” “마스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으며,
사전 합의는 이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그 목적의 하나입니다. (후략)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에 따라 저는 이 전제를 성일님이 지적하셨듯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멋진 것”은 서로 다르다’라고 고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역동적 긴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일님 의견하고는 조금 다르게, 플레이 외적 긴장은 플레이 내적 갈등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역동적 긴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겠지요.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플레이 안에서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서로 밀고 당기게 되며, 이 과정을 참여자 간의 파괴적인 갈등이 아닌 플레이 속의 생산적인 갈등, 서로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내면서도 조화로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역동적 긴장을 다루면서 생각한 핵심입니다.

6. 플레이어와 마스터는 사전 합의를 통해 이러한 마찰의 요소를 사전에 최대한 배제시키려고 한다.

-> 이건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권력을 주는 과정에서 합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일님 지적대로 대상이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플레이 외적 마찰은 배제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플레이 내적 갈등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플레이의 재미입니다. 아마도 전자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드신 예를 봐도 이것이 반드시 배제해야 할 마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역동적 긴장이라는 이름으로 했던 구분에 따라 논의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수단에 대한 긴장.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은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는 거인의 수중에 있습니다. 진행자는 거인을 때려잡는 것과 거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열쇠를 얻는 것 사이에 선택시키고 싶습니다. 반면 참가자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노래를 불러 거인을 잠들게 하고 열쇠를 훔친다거나, 열쇠 없이 성벽을 넘어간다거나, 열쇠를 걸고 수수께끼 겨루기를 제안한다거나.

이러한 것이 배제해야 할 갈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역동적인 긴장에 대한 글에서 얘기했듯 상당한 지적, 논리적 도전이 아닐까요? 참가의 의의를 살리면서도 진행자가 어느 정도 원래의 선택지를 유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정당해야겠지요. 성벽을 넘어갈 수 있나 탐사했더니 성벽에 마법 가시나무가 뒤덮여서 잘라내도 잘라내도 계속 자라나고, 부상을 입지 않고 올라가려면 마법이 걸린 보호구가 필요한데 그걸 구하려면 또 멀리 있는 마법사의 탑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이러한 설정들은 특히 규칙을 매개로 하면 참가자에게 의사 결정의 여지를 주며, 결국 참가자가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해서 성벽을 넘어간다면 그것도 즐거운 결론입니다. 아예 무너뜨린다거나, 가시나무를 태워버린다거나, 등등. 반면 무턱대고 너무 높다면서 오르기 판정에 수정치 -20을 붙이는 식의 자의는 참가의 의의를 줄이는 것이며, 자칫 플레이 외적인 감정적 마찰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 시점에서 합의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거인은 나중에 나름 중요한 인물인데 말야, 만나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난 가시나무를 넘어가는 쪽이 더 재밌는걸.’ 이것이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와 일부 나누는 방향입니다. 반면 합의 없이 밀고 나가서 규칙을 매개로 참가자가 성공하면 참가자의 해결책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어느 쪽이든 이것이 미리 배제해야 하는 성격의 충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 목적에 대한 긴장. 마왕에게 반한 주인공의 예를 가져오면, 사실 이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진행자가 생각하지 못한 마왕의 면모를 주인공이 발견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극적 재미는 깊어질 테니까요. 다른 주인공에게 마왕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라면 주인공 일행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반하는 일도 있을 수 있죠.

물론 이 경우도 이것이 플레이 내 갈등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 외적 마찰이 될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끊고 서로 합의를 보든지, 규칙대로 판정해서 해결하든지 해야겠죠. 플레이 내의 갈등은 플레이의 재미 그 자체이지만, 플레이 외적 마찰은 플레이에 독이 되니까요. 서로 생각이 달라서 플레이 내에서 밀고 당기는 것과 서로 감정이 상할 만한 마찰은 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전략) 사전 합의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 중에도 예측 못한
문제(갈등이라는 표현은 쉽게 쓰기 어렵습니다.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아예 다른 물건이니까요)가 발생합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사실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해야 할 문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리가 안 돼서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성일님 말씀대로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다르니까요. 플레이 내의 갈등이라면 그건 플레이의 재미이니까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하자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플레이 외적 갈등이라면 플레이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플레이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넘어서는 안 될 경계나 의사소통의 통로를 정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니까 굳이 얘기하자면 이쪽이려나요.

끝에 좀 헷갈려 버렸지만, 어쨌든 저도 정리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환호성을 지르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

저는 플레이어와 마스터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플레이를 꾸미고 진행하는 방식에 객관적인 장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RPG라는 놀이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봅니다.

객관적인 장점이 있다는 점에는 찬성하고 흥미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논리적 귀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설정, 진행, 참가의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도 반론할 여지가 많겠죠)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은 설정과 진행의 권한을 진행자와 참가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RPG의 병리 현상을 해결하고 모두가 더 재밌게 노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일하고 논리필연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설정과 진행의 권한이 진행자에게 있어도 참가의 의의 또한 확보하고 살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합의와 상관없이 서로 목소리를 내면서 밀고 당기며, 규칙과 논리에 따라 결론을 내서 각자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더 재미있는 결과를 내는 플레이가 제가 역동적 긴장이나 코스티캔의 게임론을 끌어들여서 구현하고자 하는 플레이입니다. RPG는 설정과 진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참가의 기능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일님이 그 가능성을 배제하신 것은 결코 아니니까 반론이라기에도 뭣합니다만..^^ ‘논리적 귀결’이라는 말씀에 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 점은 반박할 수 있는 근거 없이 성일님의 생각이라고 밝히셨으니까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취향이나 신념의 영역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어디에도 논의는 넘쳐나는 곳이 인터넷이지만, Wishsong님이 RPG에 대한 전제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밝히신 의미는 대단히 큰 것 같습니다. 종종 전제 자체가 다른 건 생각 못한 채 꼬리를 물고 도는 논의가 되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그 전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건 크나큰 생각의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정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고요.

19 thoughts on “참가자와 진행자의 관계에 대한 의견

  1. 소년H

    이야기들 다 반론할 만한 구석이 없는 편(이라기보단 귀찮은 편)이지만 (…)

    굳이 질문하자면, 진행 기능과 참가 기능은 일단 진행 기능이 뒤쪽에 설정이 있다는 게 차이점인 거 같은데 (그 외에 참가가 보다 능동적인 면이 있다거나) 뒤로 갈 수록 어쩐지 둘이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논리가 되는군요. 물론, 능동성이나 이런 면에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 경우 차라리 마스터도 참가 기능이 있다 하고 진행 기능에 있어서 또 다른 면이 있다고 보는 게 논리 전개가 그럴 듯 할 거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덧글 하나로 성일님이나 승한님이 볼 수 있을까 궁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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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그렇잖아도 진행 기능은 설정과 참가 사이에 있는 인터페이스 같은 걸로 생각하는지라 좀 애매해요. 하지만 말씀대로 참가 기능하고 두리뭉실하게 섞는 건 의의를 흐리는 면이 있네요. 진행자가 플레이에 생명력과 변화를 넣는다는 말을 하려고 굳이 참가 기능 얘기를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진행은 변화 그 자체니까. 그 부분은 논의를 좀 고치겠습니다.

      뭐 승한님 블로그에는 트랙백 날렸으니 보시겠죠. 세션 쪽은.. 눈에 띄게 하려면 글자색과 링크가 난무하는 이 난리굿을 제로보드 글로 올리는 자학을 하거나 아니면 링크 달랑 하나 있는 썰렁한 글을 독립적인 글로 작성하거나 둘 중 하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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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성일

    잘 읽어 보았습니다. 원문의 포맷이 포맷이고 주제의 무게가 무게인지라 이 자리에 곧바로 덧글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그렇다고 원문이 없는 세션에 쓰기도 뭐하고요… 하지만 대충 어디서 의견에 차이가 발생하는지 이제 좀 이해가 갈 것 같으니, 정리가 되는 대로 별문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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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dowan

    음. 밀고당기기가 재미있을 때도 있고, 그냥 주사위만 굴리는 게 재미있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아직은 주사위 쪽이 더 재미있습니다.)
    밀고당기기에 기력을 쓰려면 주사위 굴림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이 적어야겠지요.
    로키 님의 소갯글들을 보다 보면 요즘은 밀고당기기에도 신경 쓴 룰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왠지 다른 소리를 한 거 같지만 뭐라도 쓰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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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주사위를 굴리는 걸 포함한 규칙은 어떻게 보면 그 밀고 당기기를 양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이 상황이 어떻게 될지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에 의견이 일치한다면 굴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포도원의 개들 규칙책에서 진행자에게 하는 조언이 그 얘기죠. ‘예스 아니면 다이스.’ 참가자가 뭘 원하면 진행자는 된다고 하거나, 안 된다고 생각하면 판정하게 하라는…

      다른 소리긴요. 답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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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dowan

      주사위에 관한 생각이라면 역시 시뮬레이션이라는 생각만 들었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장면은 말 그대로 1/20확률로만 터지더군요. ^^
      그것때문에 ‘주사위 굴리기가 과연 재미있나~’ 라면서 하던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 상황을 즐겨라~’ 라는 결론으로 해소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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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ddowan

      Yes or Dice는 여전히 멋지군요~!
      저는 그보다는 댓가라는 측면이 더 맘에 들었었습니다.(포도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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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로키

      저런.. 주사위 굴리는 것에도 극적인 재미가 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다는 건 판정 결과에 극적인 결과를 걸지 않았기 때문일 거에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판정 결과는 뭔가 재밌어야 좋겠죠.

      Yes or dice 멋지죠..ㅋㅋ 포도원의 개들에 좋은 진행자 조언이 많이 나와요. 판정의 대가성도 마음에 드는 특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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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Asdee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는데, 다시금 읽고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

    * 진행자/참가자가 인적 구분이 아니라, “기능적 구분”이라는 지적에 대해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부분은, 꼭 누가 100% 전담해야 할 일로 고정된 것은 아니죠.

    * 설정/진행/참가 세 가지로 기능을 분류하신 것이 인상 깊습니다. 이 각각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지가 많을 것 같네요.

    * 특히 [참가] 기능은, 소설 등과 달리 RPG가 갖는 “능동성”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 참가자는 1명의 인물을 통해 플레이에 참여하니까, 간접체험보다 ‘직접체험’에 가까운 느낌을 받지 않나 싶어요.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삶을 체험하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참여한달까… 그런 인상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플레이어링”의 묘미도 그렇구요. 😀
    (자기 캐릭터에만 몰입하다보면, 다른 팀원들을 배려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만;)

    * 플레이 내적 갈등과 플레이 외적 갈등… 이란 표현도 반복해서 나오는 듯 합니다.

    – 플레이 내적 갈등 : (가상세계 내의) 캐릭터들 혹은 캐릭터 vs. 상황/환경 간 갈등.
    – 플레이 외적 갈등 : (현실세계에서) 팀원들(참가자+진행자) 간의 갈등, 의견 충돌.

    로 이해하면 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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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 예, 기능적 구분 얘기는 (제가 써놓고도) 나름 흡족해하는 중입니다. 기능적 구분을 생각하면 RPG 외에 보드게임이나 CRPG 등 다양한 놀이를 같은 이론적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RPG의 경계에 있는 놀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고.. 당장의 효용은 말씀대로 기능적 구분을 인적 구분과 혼동해서 생기는 혼란과 병폐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겠죠.

      * 설정/진행/참가는.. 일단 거칠게 나누긴 했지만 말씀대로 아직 발전의 여지가 많네요. 역시 한 번쯤 적어보면서 지적을 받고 다듬는 과정이 필요할 듯합니다.

      * 참가는 놀이와 정적 허구를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동시에 가장 외면받기 쉬운 기능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참가의 수단이 하나로 고정되면 그만큼 몰입도도 커지고요. 그 몰입이 비사회적인 도취로 흐르지 않고 모두의 재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건 많은 사람이 고민해왔고 앞으로도 고민할 문제겠지요. 성일님도 훌륭한 대안을 여러 글을 통해 제시하셨고요.

      * 예, 플레이 내/외적 갈등은 용어 정립이 불분명했는데 깔끔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갈등, 후자는 마찰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말을 다르게 해서 좀 더 확실하게 구분하려는 욕심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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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Wishsong

    열심히 글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무심코 생각했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이정도는 동의하겠지’ 라고 써내려갔던 전제 자체도 수많은 모순과 논리적인 반박에 직면하는 것을 보니 역시 아직 멀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로키님이나 성일님처럼 논리 정연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실력은 되지 못하지만; RPG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바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노력은 계속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래야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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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일반적인 플레이만 생각한다면 비교적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전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능적 구분 면에서 봐도 일반론이자 시작점으로서는 좋죠. 그런 의미에서 틀린 말씀 하신 건 없는데, 또 당연하게 생각되는 전제를 해부하는 게 생각을 다듬는 데는 기가 막히게 좋잖습니까..ㅋㅋ 앞으로도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시면 역시 생각과 토론에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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