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의 기능적 구분 – 설정, 진행, 참가

지난번에 Wishsong님과 성일님의 글에 답변하면서 떠오른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RPG, 혹은 다른 놀이를 할 때 참여자가 맡을 수 있는 기능에는 크게 설정, 진행, 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의 초기 조건을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정하는 것이고, 진행은 설정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참가는 참가 수단 (RPG의 경우는 인물)을 움직여서 설정의 초기 조건을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수정 (07/06/24 08:19): 성일님의 반론대로 진행과 참가의 구분은 인적 구분이 개입한 면이 큽니다. 참가는 진행 중 서술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정리해보고 싶으니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보통 RPG에서는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의 역할, 참가는 참가자의 역할입니다만, 일반적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가 설정과 진행 권한을 나누어 가질 수도 있으며, 설정과 진행 일부를 규칙책과 카드에 맡겨놓고 진행자 없이 참가자만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인적 구분이라면, 사람이 아닌 기능에 따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기능적 구분입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부 구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리가 평소 놀 때 하는 각 활동이 전체 놀이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효용이 있겠지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각 상세 구분마다 제가 아는 규칙의 예를 들겠습니다.

1. 설정

1.1. 배경 설정

놀이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진행자 권한으로 전부 설정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모두 아는 배경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주로 상황 설정의 맥락이 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2. 상황 설정

놀이의 틀이 될 극적 상황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인물 설정에 제약이자 맥락 역할을 하며, 배경 설정을 의미 있게 활용하는 초점이 되기도 합니다.

1.3. 계획

놀이 속에서 벌어질 사건의 전개나 향방을 정하는 기능입니다. 반드시 소설이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하는 것은 아니고, 시나리오의 종류에서 다루었듯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진행자의 영역이지만,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다룬 성일님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참가자가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많은 순기능이 있습니다.

1.4. 장면 설정

미시적인 설정 기능으로, 한 장면의 초기 조건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습한 지하실입니다’ 하는 식으로 시작해서 이 장면에서 참가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설정의 다른 세부 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장면 설정은 특히 진행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진행 기능에 속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를 두고 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설정에 들어갑니다. 장면 설정도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이지만, 역시 참가자의 의견을 받기도 합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은 장면 설정 처리에서 흥미로운 데가 있는데, 각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원하는 장면을 얘기하는 장면 신청 규칙이 그것입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참가자는 ‘김 장군하고 박 장군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이끌 것인가 조정 앞에서 결판이 나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식으로 원하는 장면을 PD에게 신청합니다. 장면의 결말은 정하지 않고 (둘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지휘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김 장군, 박 장군), 장면의 배경은 무엇인지 (조정), 장면에 나올 사건은 무엇인지 (북방 원정군 지휘관 결정) 얘기하는 형식이지요. 그러면서 서로 제안도 주고받으며 (“조 부인을 사이에 둔 감정 문제도 나오면 재밌겠다”라든지)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의 과정이 있든 없든 각 참가자에게 규칙으로 이러한 장면 설정권을 보장(강제?)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장면 신청 규칙의 부수적 결과라면, 장면 설정 권한을 참가자들에게 주기 때문에 진행자 (PD)에게는 장면 설정권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신청 사항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권한은 있고 또 언제든지 제안이나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장면의 뼈대를 구성하는 창의적 권한은 기본적으로 참가자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진행자가 장면을 구성하고 참가자는 제안만 하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2. 진행

2.1. 서술

놀이 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정의 초기 조건이 변하는 것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기능입니다. 종종 참가에 반응해서 나옵니다. ‘고요한 연못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장면 설정, ‘돌을 던져요’가 참가라면 ‘크툴루가 튀어나옵니다’는 서술일 것입니다. 역시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에 들어갑니다.

폴라리스 (Polaris)는 서술 중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의식(儀式) 언어를 사용한 교섭으로 처리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서사나 설정의 영역도 넘나들지만…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노란색으로 강조한 글자가 의식 언어입니다.)

마음: 강 도령은 “이 간신 놈!” 하고 외치며 이 대감의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
후회: 하지만 그러려면 그 순간 포졸들이 들이닥쳐야 한다.
마음: 그리고 또한 강 도령과 장래를 약속한 선화 낭자가 이 대감의 딸이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선화 낭자’를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복수가 부르는 비극’을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마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강 도령의 축복 중 ‘하인 돌쇠’를 발동해서 울부짖는 선화가 아버지의 죽음을 못 보게 돌쇠가 막았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의 효과로 마지막 서술을 대폭 수정)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아버지를 죽인 강 도령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마음: 일의 전말은 이와 같았더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서술을 받아들이고 갈등을 끝냄.)
후회: 이 대감이 죽어가는 사이 포졸들은 강 도령을 포위하고…

폴라리스의 교섭 규칙은 이처럼 의논이나 합의가 아니라 규칙으로 서술상 의견 충돌을 해소하는 점이 특이합니다. 게다가 서로 기본적으로 적수인 ‘마음’과 ‘후회’는 서로 제안이나 이견 조율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양보 없이 각자 의견을 밀고 나가면서도 일관성 있는 결론을 낼 수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2.2. 조연 RP

넓은 의미에서는 서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조연을 움직이는 것도 진행의 한 가지 기능일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과 조연을 오가는 인물도 있는 만큼 (여러 인물을 참가자와 진행자가 돌려가며 맡을 수 있는 아르스 마기카가 좋은 예죠) 늘 뚜렷한 구분은 아닙니다.

위에서 얘기한 폴라리스에서는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누어서 맡는데, ‘후회’가 전통적인 진행자에 가장 가깝지만 주인공과 사회적, 권력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남자 조연은 ‘보름달’이, 정서적, 감정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여자 조연은 ‘그믐달’이 맡습니다. 조연의 행동은 ‘후회’ 혹은 ‘마음’이 특수 교섭 언어로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2.3. 서사

역시 넓은 의미로는 서술에 들어갑니다만, 주인공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범위에서 생기는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좀 더 거시적으로, 주인공들이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는 범위에서도 배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사라고 조금 욕심을 내어 구분해 보았습니다. 서술과 마찬가지로 참가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참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도적 길드 마스터를 죽여서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옆 나라에서 홍수가 나서 난민이 몰려드는 것은 후자의 예입니다.

2.4. 규칙 운용과 해석

판정의 과정과 결과를 규칙에 따라 서술하고 해석하는 기능입니다. 규칙을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고, 참가자가 개별 판단에 따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단순 서술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규칙으로 규정한 영역에 발생하는 두 번째 효과를 참조하시길. 진행자가 최종 결정권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참가자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로 이러한 마찰의 핵심은 규칙의 올바른 해석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주도권 혹은 참가의 의의가 살지 않는다는 불만의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긴 하지만요.

3. 참가

3.1. 인물 설정과 변화

놀이 속 사건의 주체이자  참가의 수단이 될 인물을 설정하고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참가자 인물 (주인공, PC) 설정을
통해 보통 참가자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설정 기능이기도 합니다. 조연 (NPC) 설정은 배경이나 상황 설정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참가의 기본 틀이며, 참가자의 욕구를 표시하는 중요한 신호가 되어 설정, 진행 기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보통 인물 설정은 참가자 한 명의 권한으로 생각하지만, 이 과정에 진행자와 다른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습니다.

3.2. 선언

참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에서 나온 주인공 행동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에는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라는 전술적 판단, 이 장면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고 싶다는 극적 욕구, 인물의 성격과 배경에는 이런 것이 어울린다는 인물 자체의 성질 등 많은 층이 있습니다. 보통은 개별 참가자의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 제안, 의논, 혹은 합의가 들어갈 수 있겠죠.

3.3. 판정

선언의 일종이지만 위의 규칙 운용과 해석에서 말했듯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한 전술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규칙을 매개로 놀이에 참가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수치상의 능력만 들어가고 주인공의 배경이나 정서, 인간관계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수치상의 능력에 주인공 자체의 특징이 들어간다면 그러한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라면 ‘명사수 1d6’과 마찬가지로 ‘어려서 당한 사고 때문에 다리를 전다 1d6’도 판정에 도움이 되고,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이라면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 면모를 발동해서 판정에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용하려면 이러한 능력치나 면모가 판정에 들어가야 하므로 이런 내용은 판정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에도 영향을 주고, 이렇게 해서 생기는 ‘이야기’는 판정의, 그리고 참가의 또 다른 층을 이룹니다.

이처럼 일단 거칠게 설정, 진행, 참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잡아보았습니다. 말했듯 이 구분을 칼같이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각 활동이 놀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데에 효용이 있는 구분이긴 하지만요. 논의와 사고의 틀이 되는 하나의 도구일 뿐, 이리 비틀고 저리 끼우다 결국 부러지면 버리고 더 좋은 걸 만들면 되겠죠.

6 thoughts on “RPG의 기능적 구분 – 설정, 진행, 참가

  1. 김성일

    잘 읽었습니다. 아직 면식이 없는 분의 블로그에 인사 외의 글을 쓰는 것은 여간해서는 내키지 않으나, 많은 의견 바라신다는 말씀에 힘입어 몇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1. 진행과 참가를 기능적으로 구별하는 실익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순이가 돌을 던지자 돌이가 튀어 나왔다”고 했을 때 돌을 던진 것은 참가요 튀어 나온 것은 진행이라고 하면, 그 뒤에 이어질 “돌이가 튀어나오자 순이는 도망을 쳤다”를 순전히 기능적 구분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구조는 같은데 정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술이 참가에 반응해서 나온다” 하셨지만, 실제로 보면 말씀하신 서술과 참가는 서로 얽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무런 자극이나 맥락 없이 새로이 등장하는 서술도 있고 참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차이를 상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조연 RP”가 진행으로 분류된 점을 보면, 순이가 NPC인가 PC인가, 돌이가 NPC인가 PC인가에 따라 진행이냐 참가이냐가 변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진행과 참가를 구별짓는 것이 인적 분류를 떠나서 가능한지, 또는 실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설정”을 세분화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계획, 장면 설정, 배경 설정, 상황 설정(모두 제 구분에서는 계획이라고 부릅니다만)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요?

    예를 들어 PC들이 여행길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 도중에 뭔가 고난을 극복한다는 “계획”을 마스터가 설정한다고 하지요. 그 계획에는 그저 고난을 겪고 이겨낸다는 것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카라드라스라는 높은 산에 눈이 쌓여 있고 그 밑에는 모리아라는 드워프 지하도시가 있다는 배경 설정은 물론, 산에서는 눈사태가 일어나기 쉬우며 지하도시에는 괴물 떼가 진을 치고 있다는 상황 설정, 그리고 눈사태를 만나거나 괴물 무리와 맞닥뜨린 PC들이 겪을 장면 설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실제로 뭉쳐서 나타나고, 같은 목적을 수행하며, 상호간에 구별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나눌 근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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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안녕하세요~ 반론 올리셔도 아무 상관없는데… 여기는 RPG 블로그니까 RPG 토론을 하면 저야 오히려 좋죠. ^^

      1번은 저도 쓰고 나서 고민한 부분입니다. 특히 폴라리스 예시를 쓰고 나서 더요. 저 예시에서 보면 서술을 가지고 교섭하는 거지 어디가 진행이고 어디가 참가인지는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더군요. 이렇게 상세 구분을 하다 보니 어디서 말씀대로 인적 구분의 잔재가 남았는지 보여서 좋네요.

      진행과 참가는 순수 개념적으로 다르다기보다는 인적 구분이 있는 일반적인 상태에서 절대적이 되기 쉬운 진행자의 서술권에 묻힐 수 있는 참가자의 서술권을 강조하는 사상적(?) 의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구분하는 의미가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그리고 폴라리스처럼 인적 구분이 없는 RPG로 가면) 사실상 설정과 진행만 남겠네요. 그리고 진행의 향방을 가지고 밀고 당기는 다양한 장치들–규칙, 논의 등–이 중요해지고요.

      같은 맥락에서 지난번에 얘기한 ‘참가의 의의를 살린다’는 얘기는 ‘참여자의 서술권은 반드시 그 형태가 같을 필요는 없다’ 정도가 되겠군요. 이 부분은 글을 좀 수정해보겠습니다.

      2번에 대한 답은 이 상세 구분을 하는 의의에 있습니다. 말했듯 정확히 구분해서 정리하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활동이 놀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보려는 거니까요. 그러려면 모두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가능하면 특정 활동에 연계할 수 있는 형태로 나누는 쪽이 개념적으로 효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 상세 구분을 하는 의미라면 설정 (말씀하시는 계획)의 모든 부분을 모든 놀이에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배경 설정, 상황 설정은 하지만 (제가 얘기한 의미의) 계획은 하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도 좀더 분리된 형태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장면 설정은 특히 다른 세 가지와는 달리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는 전혀 할 수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런 세부 구분을 하지 않으면 예를 들어 위 안방극장 대모험 예시에 나오는 장면설정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설정의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이 아니라 그 장면의 일정한 변수를 정해주는 권한이니까요.

      물론 실제 놀이를 할 때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상세 구분에 있는 모든 활동이 그렇듯이요. 하지만 위에 얘기한 이유들로 개념적 구분은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어떤 것은 하지만 어떤 것은 하지 않는 등 분리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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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성일

    간혹 메타블로그에까지 링크시킨 공개 블로그를 자기집 골방처럼 생각하고, 누가 반응하면 금새 방어적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아온 탓인지… 분명 그렇지 않은 분을 상대로도 공연히 조심스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좀 과민해 보였다면 용서 바랍니다.

    플레이 양상에 따라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저는 “참가” 개념의 선을 그음으로써 말씀하신 “진행” 부분에 대한 마스터의 독점권이 개념 레벨에서 반사적으로 인정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특히나 마스터를 “진행자”, 플레이어를 “참가자”로 칭하는 로키님의 용법에서는 단어까지 맞아들어가니 더욱 그러합니다.

    아시다시피 제 문제의식은 항상 마스터의 진행 독점과 이에 대한 플레이어의 의존에 있어왔습니다. 따라서, /저라면/ 진행과 참가를 아예 한데 묶고, “설정과 진행”으로 구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제 표현인 “계획과 구현”과도 의미상 유사하게 될 것 같네요. 혹 그렇게 된다면 개념간의 세부적인 차이나, 설정(계획)과 진행(구현)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반이 설 것 같습니다.

    2번에 대해서는, 말씀하시는 의의를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합니다. 특히 플레이 방식에 따라 어떤 종류의 설정은 하고 어떤 종류는 안 한다거나 하는, 설정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의 효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깔끔하게 납득이 가지는 않는군요. 예를 들어 장면 설정은 플레이가 시작되기 전에는 전혀 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어요. 일반적인 플레이에서 오프닝이 많이 그렇고, 판매되는 시나리오에는 장면 설정은 물론 로키님 분류 하의 “계획”까지 꼼꼼히 다 쓰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그런 것은 디테일과 적용 타이밍에 관계 없이 상황 설정으로 봐야 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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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아녜요~ 배려해주시는 건데 고맙죠. 블로그마다 그런 식으로 주인 생각이 다르다보니 조심스러우실 수 있겠네요. 공지에다가 그 얘기도 추가해야겠습니다.

      참가에 대한 제 생각은 전에 얘기했듯 좀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설정과 진행 기능을 진행자만의 것으로 못박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 기능적 구분을 해본 것이기도 하고요. 용어가 겹치는 것은 저도 유감스럽습니다만, 대체로 설정과 진행 기능은 진행자, 참가 기능은 참가자에게 있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논리필연적인 구분이 아닌 그냥 일반적인 형태일 뿐이라는 상기만 시켜도 기능적 구분은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봅니다. 용어가 겹쳐서 이 구분을 통해 피해보려고 했던 바로 그 결과가 나온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용 이해 없이 오해해버리는 것을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참가 개념에 대한 제 생각이 또 다른 점이라면, 전에 말씀드렸듯 모든 참여자가 설정과 진행에 참여해야 진행자 의존성과 진행자의 독단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즉 일반적인 역할구분 (진행자는 설정과 진행, 참가자는 참가)을 하는 팀이라고 해도 참가자의 참가 기능이 충분히 살아난다면 진행자의 독단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비록 성일님 지적대로 순수 개념적으로는 참가는 진행, 특히 서술의 한 형태라 해도 참가를 따로 분리할 의의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현실적으로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그렇게 구분하는 팀이 다수이고, 그것도 얼마든지 진행자 독단을 피하는 훌륭한 플레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참가자가 참가 기능을 맡더라도요.

      설정과 진행에 대한 참가자 권한을 늘리는 것도 말씀드렸듯 훌륭한 방법입니다. 저도 그런 쪽으로 방향은 살짝 다르지만 모색중이고요. 하지만 참가 기능이 살아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해서 참가의 본래 의미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이나 진행에 참여할 생각이나 시간이 없더라도 진행자 독단이나 의존에서 벗어난 재미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장면 설정에 대해서는, 장면 설정에 대한 제 생각이 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지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다는 대답밖에는 할 수 없겠네요. ^^ 제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장면 설정은 진행하다가 아, 이런 장면이 필요하겠군 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만, 미리 그렇게 설정하는 분들도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어쩌면 사전 계획에 대한 제 태도하고도 관계가 깊을지도요.

      어쨌든 장면 설정을 사전에 할 수 없다는 위의 제 얘기는 설정 기능을 상세 구분하는 많은 근거 중 하나일 뿐이었고 주요한 근거는 아니었는데, 그 점을 잘못 짚은 것이 설정 기능을 개념적으로 세분할 근거를 많이 약화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그 외에 또 근거가 약한 부분도 얼마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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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성일

    “일반적인 역할구분 (진행자는 설정과 진행, 참가자는 참가)을 하는 팀이라고 해도 참가자의 참가 기능이 충분히 살아난다면 진행자의 독단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 경험과는 배치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세션에서 2002년부터 이야기가 되어 오기도 했지요. 마스터가 독단을 원하기만 하면, 플레이어에게 자기 캐릭터에 대한 제어권(로키님 구성에서 ‘참가’의 본질이라고 생각됩니다)만으로는 그것을 저지할 수가 없습니다. 선언과 판정, 캐릭터의 설정이 있어도, 정작 마스터가 플레이를 지배하는 사건을 투하하기만 하면 만사는 마스터의 손에 들어갑니다. 무슨 선언을 해도 마스터는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결과로 바꿀 수 있고, 판정의 결과 또한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국 RPG 초기의 “마스터링 강좌”들이 대체로 “부자연스럽지 않게 마스터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을 다루고 있기도 하고요.

    이것은 굳이 논증할 필요 없이, 실제로 RPG에서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역할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플레이어의 권력을 “참가”에만 한정한 결과가 작금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합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키님이 서사를 제어하는 룰을 사용하고 계신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어떠신지는 모르겠습니다.

    장면 설정에 대해 드린 말씀은, 일단 설정의 종류를 분류한 것의 의의를 납득하고 세부 설명에 관하여 드린 질문에 불과합니다. 반박이랄 만한 것은 아니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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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마스터가 독단을 원하기만 하면, 플레이어에게 자기 캐릭터에 대한 제어권(로키님 구성에서 ‘참가’의 본질이라고 생각됩니다)만으로는 그것을 저지할 수가 없습니다. 선언과 판정, 캐릭터의 설정이 있어도, 정작 마스터가 플레이를 지배하는 사건을 투하하기만 하면 만사는 마스터의 손에 들어갑니다. 무슨 선언을 해도 마스터는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결과로 바꿀 수 있고, 판정의 결과 또한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진행자 (마스터)가 독단을 원한다는 전제가 들어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 독단대로 하고 싶은 진행자라면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제가 좋아하는 식의 서술권 분배형 인디 RPG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즉 ‘어떤 플레이를 하고 싶느냐’ 하는 문제는 플레이 방식이나 규칙 이전의 문제이죠.

      참가의 의의를 살린다는 얘기는 자기 독단을 좋아하는 진행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독단으로 인한 폐해를 피하고 싶은, 그러면서도 합의에 따른 플레이나 서술권 분배형 규칙 사용 등 비전통적인 플레이를 하고 싶지도 않은 진행자와 팀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합의에 따른 플레이나 서술권 분배형 규칙 사용을 하는 팀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설정과 진행권이 모두 진행자에게 집중된 형태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진행자의 독단이 나타나기 좀 더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마치 발언권을 보장하는 규칙 없이는 소극적인 사람의 의견이 묻히기 좀 더 쉬운 것처럼요. 하지만 이런 경향성아 있다 해도 이를 극복할 방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의 의지를 관철하는 진행 방법론이 있다면 참가자의 의지를 관철하는 진행 방법론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원한다는 전제 하에서요.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들 방법은 없으니까요.)

      설정권과 진행권을 대부분 가진 진행자라고 꼭 모든 것을 자기 독단대로 처리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 대안으로 꼭 설정권과 진행권을 참가자들과 나누고 싶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참가자들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러면서도 참가자의 의견을 반영하고 관철하려는 의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의지를 도울 방법이 있다면 진행자 독단을 피하면서 더욱 재밌게 플레이할 수 있을 테고, 저는 그 실마리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진행 방법론이나 팀내 사회계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티캔의 게임론에서 끌어온 RPG 게임론도 그 일환이고요. 전에 댓글에서 말씀드렸듯 RPG에서 재밌게 노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인 것이야말로 RPG라는 놀이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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