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트 헌터 –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하여 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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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헌터 표지

비스트 헌터 (Beast Hunters)는 기본적으로 1:1로 하는 게임으로, 전쟁과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땅에 살아가는 수렵채집 부족 사회의 괴물 사냥꾼인 비스트 헌터가 주인공입니다. 이들 헌터는 괴물 사냥, 부족 간 중재, 상단 약탈 등 다양한 모험을 하며, 괴물을 성공적으로 사냥하면 그 피로 문신을 새겨서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비스트 헌터 판정은 창의성, 자원 관리, 전술성 등 게임적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도전을 시작했을 때 헌터 (참가자)는 우선 도전자 (진행자)에게 자신이 그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지 얘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자가 보기에 해결책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판정 없이 헌터의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헌터의 창의성과 판단력을 포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RPG든 참가자가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을 제시하면 판정 없이 승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즘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을 돌리면서 생각해보기도 했고, 규칙을 사용하지 않는 플레이에 나오는 게임성 얘기를 하면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다만 비스트 헌터가 특이한 점이라면 도전자가 헌터의 창의성을 인정해 판정을 포기하는 것을 자원 관리와 직접 연관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판정 중 헌터의 맞수는 모두 도전자의 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적대 풀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예산 1점을 들여서 +2짜리 능력을 하나 구입, 예산 4를 들여 우선 순위 5를 구입하는 식입니다. 초보 헌터에게 대충 맞설 만한 적수를 만들려면 예산이 4~5점은 들어가는데, 판정에 들어가기 전에 헌터가 제시한 해결을 인정하고 도전자가 포기하면 적수를 구입할 필요 없이 예산을 2점만 들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도전을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밋밋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하면 헌터가 받는 경험치도 줄거든요. 헌터가 제시한 해결책을 도전자가 바로 받아들이고 판정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 헌터가 받는 경험치는 1점입니다. 반면 판정으로 넘어가면 헌터가 도전에서 이겨서 받는 경험치는 적수의 예산 점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8점짜리 적수라면 이겨서 경험치를 8점 받을수 있으므로 헌터가 판정을 해서 위험을 무릅쓸 이익도 충분히 있습니다.

자원 관리는 판정 중에도 계속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명중과 피해 판정 대신 공격 동작을 통해 이점 점수 (AP, Advantage Point)를 축적하며, AP를 소모해야 피해 주사위를 굴릴 수 있습니다. 공격 동작은 신체 도전이라면 상대를 밀어붙인다든지 고지를 점거한다든지 하는 식이고, 사회적 도전이라면 연맹을 맺거나 소문을 퍼뜨리는 식입니다. 따라서 AP를 아주 많이 축적했다가 한꺼번에 지르면 서로 계속 맴돌며 눈치만 보다가 일거에 강력한 공격으로 끝내는 싸움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피해는 경상, 부상, 중상, 무력화, 사망 단계가 있으므로 일격에 끝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공격 동작과 AP도 헌터와 도전자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전술적 선택을 요구합니다. 헌터가 공격 동작을 하면 도전자는 선언의 창의성, 합리성 등을 고려해 일정량의 AP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헌터는 이 AP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주사위를 굴려서 AP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굴리면 자칫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도 AP가 덜 나오거나 아예 AP를 못 받을 수도 있지요. 반면 도전자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AP를 많이 받을 수도 있고요. 따라서 제시하는 AP 양을 보고 어느쪽이 유리할지 저울질하는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판정 중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고 각자 효과가 다르다는 점도 게임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입니다. 공격 동작과 타격 외에도 방어 동작, 능력치 발동, 자원 박탈, 자원 회복, 특수효과 등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이 총 7가지 있고, 같은 유형 내에서도 선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원 박탈과 회복이 흥미로운데, 창이나 방패, 인맥 등 헌터가 사용할 수 있는 외적 요소인 자원을 박탈해서 상대의 이점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창을 멀리 쳐낸다든지, 인맥에 미리 손을 써놓는다든지 하는 경우죠. 이러한 자원은 회복 시도도 할 수 있는 등,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도 다채로운 전술적 선택 여지가 있다는 점이 비스트 헌터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전체 모험의 구조 역시 판정과 연관성이 깊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듯 도전자는 정해진 예산이 있는데, 이 예산 및 단일 도전에 할당할 수 있는 예산의 한도는 모험마다 도전자와 헌터가 함께 정합니다. 예를 들어 예산 20, 한도 5짜리 모험은 비교적 짧고 쉬운 편에 속합니다. 예산을 모두 소모하면 보통 모험은 끝나고, 비스트 헌트 모험이라면 예산을 다 소모했을 때 비스트가 등장합니다. (즉 최종 보스 개념?) 예산과 모험의 이러한 연관성은 긴장감과 완결성이 있는 모험을 진행하는 데 적합해 보입니다.

비스트 헌터 일러스트 (일부)

꺄아 언니~♡

각 비스트는 최소 예산과 한도 요구량이 있어서 일종의 레벨 내지는 HD 개념이 들어간 점도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급 괴물인 헤크트라탄은 최소 예산 20, 한도 5인 모험에 등장할 수 있고, 전설의 최강 괴물인 쿠림은 최소한 예산 250 (!), 한도 10인 모험에만 등장할 수 있습니다. 모험을 통해 비스트 헌터가 강해지면서 예산과 한도를 늘려가며 점점 강한 비스트와 맞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이렇게 보면 알 수 있듯 비스트 헌터는 도전자와 헌터의 경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임입니다. 동시에 도전자의 역할은 헌터를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서로 승부의 재미를 느끼며, 멋진 발상을 유도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쟁적 요소를 게임에 국한시키고 감정이나 인간관계와 분리하는 장치로 비스트 헌터에서는 ‘경례’ 규칙을 사용합니다. 서로 오른손 아랫팔을 붙드는 동작으로 ‘경례해 들어가면’ 게임을 시작하거나 재개했다는 뜻이고, 게임을 끝내거나 논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같은 동작으로 ‘경례해 나와야’ 합니다. 경례는 게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신호이며 서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승복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그리고 상호 존중의 표시이기도 하죠.

야성적인 부족 사회 전사들의 모험을 즐기면서 신비하고 위험한 세계 속에서 인물의 기량을 발휘하고 싶다면 비스트 헌터는 꽤 추천할 만한 RPG입니다. 1:1이 기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만 모여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죠. 정정당당하고 한 치 물러섬이 없는 승부를 약속하며 첼’쿠리 부족의 악수를 주고받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비스트 헌터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섰을 것입니다.

6 thoughts on “비스트 헌터 –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하여 경례!

  1. Asdee

    멋지네요- 🙂 진행자-참가자 협의를 룰에서 신경썼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 매번 이렇게 새로운 룰을 발굴(?)해내시는 로키님의 열정에 감탄하게 되네요.
    전 그다지 얼리-어답터 체질이 아니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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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협동과 경쟁의 균형을 잡는 방식도 흥미롭고요. 전 그런 식으로 디자인 목적이 확실하고 규칙이 서로 잘 맞물리면서 그 목적을 뒷받침하는 규칙책이 참 재밌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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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dowan

    1:1이라는 점이 살짝 아쉽군요.
    아직은 사람이 많은 편이 더 재미있을 것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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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아, 멀티플레이어 규칙도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는 ddowan님처럼 기본인 1:1보다 멀티가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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