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들은 누구나 얼마나 가겠느냐고 했지요. 그 ‘나다움’이라는 기대치를 깨보려고 의욕적으로 시작했고, 또 그만큼 좋은 시간도 많았어요. 함께하는 시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분들의 재치와 실력에는 정말이지 감탄했고, 저를 칭찬해주시고 챙겨주실 때마다 뛸듯이 기뻤답니다.
지인들은 누구나 얼마나 가겠느냐고 했지요. 그 ‘나다움’이라는 기대치를 깨보려고 의욕적으로 시작했고, 또 그만큼 좋은 시간도 많았어요. 함께하는 시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분들의 재치와 실력에는 정말이지 감탄했고, 저를 칭찬해주시고 챙겨주실 때마다 뛸듯이 기뻤답니다.
암흑: 정혼자를 기다리는 록산나의 마음은 그러나 편할 수 없었으니, 왕이 죽은 후 섭정을 맡고 있는 제르문트가 자신의 야심을 위하여 그녀와 시베르트의 정혼을 해제하였기 때문이다.바위: 잠깐! 탐욕은 화를 부른다. ‘정혼녀 록산나 글리테렌’ 면모가 있는 운명 주제를 소진한다.
-> 탐욕은 화를 부른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는 방금 내놓은 것과 규모나 효과가 다른 서술을 내놓으라는 뜻이며, 요구하는 측에서는 인물의 주제 (직위, 운명, 축복, 능력) 중 하나를 소진해야 합니다. 각 주제는 초기화할 때까지 바위가 한 번, 암흑이 한 번씩 소진할 수 있습니다.
모루, 화로: 주제 소진을 인정한다.
-> 주제 소진이 적합한 지는 모루와 화로 (보름달과 그믐달) 둘이서 인정해야 합니다.
암흑: 쳇. 그렇다면… 섭정 제르문트는 아이자른 가문을 반역으로 몰았으며, 록산나를 겁박하여 미끼로 시베르트를 안심시키고 체포하려고 전사를 잠복시키고 있었다.모루, 화로: 종전과 다른 서술이라고 인정한다.바위: 그렇게 되었다.
-> 상대방의 서술을 받아들이고 서술 교섭을 끝내려면 ‘그렇게 되었다”로 마무리하면 됩니다. 이후에는 다시 자유 RP로 돌아가죠.
바위: 그때 군중 사이에서 다시 돌이 날아오자 벨레판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날린다!암흑: 도끼는 벨레판의 아버지 토르벤에게 적중한다.바위: (으악!)화로: (얼쑤!)모루: (으익)바위: 탐욕은 화를 부른다! 살육의 도끼 면모가 있는 축복 주제 소진.모루, 화로: 인정한다.암흑: 벨레판은 무의식중에 도끼를 연인 에르타의 남편 미칼에게 날렸고,암흑: 에르타가 미칼을 감싸고 대신 등에 도끼를 맞는다.화로: (인정!)화로: 에르타가 애처롭게 미칼을 잠시 쳐다본후, 떨리는 눈동자로 벨레판을 바라본다-> 화로는 정서적인 관계에 있는 주변인물을 담당합니다.바위: 뿐만 아니라 에르타는 심한 부상을 입되 죽지는 않아야 한다. ‘망자 군단의 전사’ 면모를 근거로 직위 주제 소진.-> ‘뿐만 아니라’는 (원래는 ‘그리고 또한’) 교섭 상대의 서술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추가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네 뜻이 그렇다면’ (‘그러나 그러려면’)과 같지만, 주제 소진을 요구하고 뒤에 올 수 있는 답변이 제한적입니다. (순서도 참조. ‘네 뜻이 그렇다면’에는 6개의 답변 가능, ‘뿐만 아니라’ 뒤에는 4개의 답변이 가능합니다.) 여기서도 주제 적합성은 모루, 화로가 인증하는데 분량 관계로 생략하겠습니다.암흑: 뿐만 아니라 에르타는 부상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야 한다. ‘암흑은 우리 안에 있다’ 면모가 있는 운명 주제 소진.바위: 탐욕은 화를 부른다. 적합한 주제가 없으므로 남은 주제 2개 다 소진.-> 적합한 주제가 없으면 주제를 2개 소진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바위는 주제를 모두 소진했으며, 주제를 초기화할 때까지 주제 소진을 요구하는 교섭어 (‘탐욕은 화를 부른다’와 ‘뿐만 아니라’)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고자가 되었어 엉엉위에 에르타 안 죽는다는 부분을 암흑이 뒤집지 못하게 뿐만 아니라를 사용했는데, 제 꾀에 제가 넘어갔군요.암흑: 에르타는 벨레판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된다.바위: 일은 그렇게 되었다.-> 더 망하기 전에 끝내야지… 시베르트 차례가 돌아오면 복수해줄 테다ㅠㅠㅠ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A.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B. 진실성
C. 배경세계
D. 인물성
E. 이야기 구조
F. 갈등과 의미있는 선택
G. RPG 특유의 서사성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진행자 위시송군이 이미 글을 썼듯, 연초부터 한 마계인천 드레스덴 파일 RPG 캠페인이 얼마 전에 끝났습니다. 도시를 양분한 뱀파이어와 타락천사라는 두 초자연 세력 사이에서 어느쪽 편도 들지 못하고 ‘이놈도 저놈도 싫어!’를 외치며 어떻게든 도시를 구해보려고 달린 끝에 달콤씁쓸한 해피엔딩을 맞았지요.
위군도 얘기했듯 이번 캠페인의 참가자분들은 상당히 대담한 RP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담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진행자가 우리에게 쉽지 않은 도전을 제시해주어서 가능했던 일이지요. 가족을 선택할 것인가, 악의 세력과 싸울 것인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한 사람을 죽일 것인가? 신념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가? 도시의 번영과 정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극명한 선택상황 앞에서 참가자들은 선택을 피하거나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정면돌파했습니다. 훈님의 캐릭터인 화염술사 제임스는 얼굴에 끔찍한 흉터를 입어가며 괴물과 싸워 이겼고, 나중에는 동료의 목숨을 구하려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강해지는 힘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캠페인 종결 후 인천 대화재를 일으킨다는 뒷이야기가..;ㅁ; 전혀 거리낌 없이 인물을 망가뜨리는 훈님의 투혼(?)에는 참 감명을 받았었죠.
키님의 캐릭터인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주연은 신비한 힘을 부여해주는 반지의 속삭임을 따르면서 마이 푸레셔스 점점 도덕적 회색지대로 빠져들고 결국 임무의 성공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릅니다. 키님 역시 인물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고 어둠에 빠져드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훌륭한 RP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전 겁스 캠페인 PC를 재활용한 제 인물 리이는 살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댄스클럽 조명을 햇빛으로 바꾸는 주문으로 인천의 뱀파이어를 대부분 몰살시켰고, 그 결과 뱀파이어 세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대신 타락천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뱀파이어들 회사와 거래를 트고 있던 가족의 가세는 많이 기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 죽고 나 죽자의 묘미인가…) 무엇보다 그 보복으로 오빠가 뱀파이어들에게 감염당해 피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러한 극명한 선택과 대가를 통해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마스터인 위시송군이 그러한 상황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선택도 녹록하지 않은 대가가 따르도록 하고, 선택의 극적 의미를 부각함으로써 ‘선택’이라는 RPG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진행이었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런 성과에는 인물의 극적 키워드를 시트에 적어놓고 규칙상 효과를 부여한 드레스덴 RPG라는 규칙도 한 몫 했지요.
결국 이번 캠페인에서 배운 것은 RPG에서는 진행자와 참가자 모두 재지 말고, 빼지 말고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재밌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야 신중해야겠지만, 허구적인 인물은 이런거 저런거 따지지 말고 적극 망가뜨리는 것이 RPG의 묘미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더 큰 즐거움을 위하여…
지난번 글에서는 백만 년 전에 RPG의 게임적 측면을 다루었습니다. 그 글에서 다루었듯 RPG에는 게임으로서의 측면이 있으며, 이는 역할극과 구분되는 RPG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규칙의 지향점을 파악하고, 숙독과 연습을 통하여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얘기를 했었죠.
게임성 외에 또 다른 특징이라면 RPG라는 놀이는 반드시 서사적인 틀 속에서 진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드게임이나 퍼즐게임 등은 서사 없는 놀이가 가능하지만, RPG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플레이를 하든, 아니면 이야기는 괴물을 잡고 보물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일 뿐이든 뭔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RPG는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놀이인 셈입니다.
서사성이 RPG의 또 다른 특징인 만큼 이야기가 훌륭하면 그만큼 RPG의 만족감도 높아지고, 좋은 이야기를 목표로 노력하면 그만큼 최적 경험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처음에 최적 경험, 혹은 플로우를 다루면서 말했듯 플로우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노력을 하면서 집중감과 몰입감, 그리고 행복감이 드는 경험입니다. 따라서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플로우가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먼저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살펴보고 다음 글부터 각 요소를 달성하는 방법을 논하겠습니다.
주의할 것은 RPG가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야기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둘 필요는 없으며, 또 그래야만 좋은 놀이인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RPG의 이야기란 그저 신나는 놀이를 하면서 (게임성), 혹은 아는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 (사회성) 부차적으로 생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얼마나 강조할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쏟을지는 각 팀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이야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로 한다면 더욱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은 분명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좋은 이야기란 워낙에 다양하므로 외적으로 보이는 특징, 예를 들어 장르나 배경을 가리켜 이것이 있으면 좋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좋은 이야기라고 해서 엘프와 마왕이 나오면 좋은 이야기인 것은 아니며, 영화 ‘가타카’가 좋은 이야기라고 해서 미래 디스토피아가 다 훌륭한 작품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라면 공유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는 합니다. 겉가죽은 연애물이든 추리물이든 동화이든, 모든 좋은 이야기의 속살에는 다음과 같은 본질이 있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제가 그동안 보고 생각한 것을 나름 소화하고 정리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진실성. 좋은 이야기란 무엇보다 진실한 허구, 즉 진실한 거짓말입니다. 비록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 속에 있는 인물과 사건 등이 삶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것이 좋은 이야기의 본질 중 으뜸입니다. 인물을 어떻게 하고 사건을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도 결국에는 ‘진실한가?’ 하는 단일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자연스럽고 진정성이 있는가, 삶에 대한 어떤 진실을 보여주는가, 이것이 좋은 이야기의 최종적이며 또한 유일한 시금석입니다. 나머지는 좋은 이야기는 진실해야 한다는 이 원칙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두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풍부한 배경세계가 있습니다. SF나 가상역사, 판타지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르거나 역사물처럼 우리 세계의 과거를 다루는 이야기도 배경세계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허구도 독자적인 배경과 문화가 있습니다. 21세기 한국의 고등학교나 중산층 가정, 혹은 21세기 한국 사회 전체도 이야기가 벌어지는 세계이며, 각자 법칙과 갈등, 문화가 있는 소우주를 이룹니다.
한편 배경세계가 풍부하다는 것은 설정자료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의미있는 갈등의 실마리가 있으며, 인물 및 인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 세계 특유의 문화와 규범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배경 때문에 생기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삶의 진실이 햇빛이라면 배경과 그 문화는 그 빛을 다양한 색채로 변주하는 프리즘입니다.
세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좋은 인물성, 특히 좋은 주인공이 있습니다. 좋은 인물이란 결국 이야기에 드러나는 삶의 진실을 사람을 통해 표현하여 흥미와 공감을 끌어내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주인공, RPG에서는 PC는 실현할 수 있는 욕구를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변하고 성장해가는 인물이지요. 이러한 인물과 그들 간의 관계는 좋은 이야기의 원동력이 되며, 깊은 감정적 경험을 이끌어냅니다.
네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경험을 고조시키는 이야기 구조가 있습니다. 모든 의미있는 이야기의 핵심에는 일상 – 일상에서의 일탈 – 새로운 평형 달성이라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따릅니다.) 그것을 기승전결, 발단-전개-절정-결말 하는 식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주인공들이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위험한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렇게 성장하고 변함으로써 한층 층위가 높은 새로운 안정성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얘기이든, 학교를 옮기는 전학생 얘기이든,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모든 좋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각자의 삶이라는 전투를 치르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의 지혜, 그 진실의 일면이라는 전리품을 탈취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진실을 위한 싸움에서 크게 승리할 수록 결말이 행복한 이야기이겠고, 의미 있는 배움을 얻지 못하거나 이를 위한 대가가 너무 크다면 비극적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삶을 더 깊이 깨닫고, 더욱 의미있는 존재를 누리려는 투쟁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이를 반영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좋은 이야기에는 의미있는 갈등과 선택이 있습니다. 내적 갈등이든 외적 갈등이든 인물은 의미가 있는 갈등에 마주해 뭔가 선택을 해야 하며, 이 선택에도 크든 작든 의미가 따라야 합니다. 갈등과 선택은 위의 모든 요소를 통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배경세계와 인물은 다양한 갈등을 만들어내며, 갈등의 발생과 해결은 배경과 인물,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진실에 비추어 진정성이 있고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또한 갈등상황에서 인물이 하는 선택에 따라 인물성은 더욱 깊이가 생기고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상황과 선택은 미지의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새로운 평형을 만들어가려는 인물의 투쟁을 반영하며 이를 통해 삶의 어떤 진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RPG의 좋은 이야기는 소설이나 연극과는 다른 RPG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정하는 규칙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함께 즉석에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따라서 RPG의 다른 두 요소인 게임성과 사회성과의 관계, 그리고 즉흥성과 계획성의 관계 등을 살펴보면서 RPG인의 서사적 능력 논의를 마칠 계획입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의 요소를 논하는 여섯 편의 글을 열어봅니다. 아는 것이 짧아 쓰기까지 많은 고민과 변경을 거친 끝에 결국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군요. 어려운 얘기인 만큼 많이 부족할 텐데 격려와 질책, 지적과 질문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이 서론에서 잡고 있는 구성을 변경하려면 나머지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하는 것이 좋으니까 의구심이나 반론, 보충할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A.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B. 진실성
C. 배경세계
D. 인물성
E. 이야기 구조
F. 갈등과 의미있는 선택<
G. RPG 특유의 서사성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책[footnote]Mindsight: The New Science and Personal Transformation (by Daniel J. Siegel, M.D.)[/footnote]을 보다가 재미있는 비유가 나와서 RPG에도 적용해 보았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정신을 스스로 제어한다는 의미를 논하면서 운전을 하는 비유를 드는데, 운전대를 잡고 눈을 감고 있으면 차를 제어한다고 할 수 없고, 차 뒷좌석에 탄 승객은 운전을 감시는 할 수 있고 운전자에게 제안도 할 수 있지만 운전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최적 경험 시리즈 쓰다가 옆으로 샌 또 다른 글입니다. (엉엉)
RPG에는 일반적으로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흔히들 쓰는 말인데, 마스터 (진행자)라는 의미, 혹은 플레이어 (참가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들의 역할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이러한 역할 구분에는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그리고 이 역할 구분을 토대로 하여 진행이란 어떤 활동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 구분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고전적 구분, 두 번째는 협의형, 세 번째는 분산형 구분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가장 흔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세 번째는 일반적인 의미의 진행자가 없는 형태까지 포함해 가장 광범위하고 다양합니다만, 고전적인 형태와 대비하는 의미에서 하나의 범주로 다룹니다.
1. 고전적 진행
진행자는 세계이며, 주인공은 세계와 맞서 싸운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가장 고전적인 역할 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는 각자 하나씩의 인물, 흔히 PC (주인공)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권 혹은 서술권이 있습니다. 진행자는 그 주인공 일행 외의 모든 극적 요소, 즉 PC 외의 모든 인물 (NPC, 혹은 조연)과 주변 환경에 대해 서술권이 있습니다. 이 서술권이 맞닿는 곳에서 중재하는 것이 합의와 판정이지요.
이러한 고전적인 역할 구분은 이전에 서술권 구분의 영향에서 다루었듯 일행 대 외부세계라는 서사구조에 가장 적합합니다. 자신이 서술권이 없는 요소에 대해서는 정보나 영향력, 예측가능성이 제한적이므로 참가자는 일행 외적인 요소와 협동하기보다는 물리적, 사회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쉽습니다. 이러한 정보와 영향력 제한은 의외성과 박진감을 증진시키므로 대립은 더욱 흥미로워지지요.
이러한 고전적인 역할 구분 속의 진행자는 시나리오 제작자이며, 참가자의 적수이자 도전자입니다. 서술권 구분이 완전할 수록, 그리고 그 효과인 예측불허성이 강할 수록 진행자는 혼자 시나리오에 대한 사항을 정하며, 참가자가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과 도전을 제시합니다. 참가자와 그들이 움직이는 주인공은 진행자가 제시하는 외적 도전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치며 스릴을 느끼고, 주어진 고난을 뛰어넘는 판단력과 규칙 활용력을 최대한 활용하며, 생각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의외성과 극적 재미를 느낍니다. 한 사람 머리에서 나오는 만큼 서술의 일관성이나 체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고전적 진행의 장점입니다.
유의할 점은 진행자와 참가자가 제어하는 요소들이 서로 대립하는 내용에 적합하다 해도 진행자와 참가자가 곧 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게임적, 극적 재미라는 목적을 위해 놀이 속에서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자고 합의했을 뿐이지요. 물론 놀이 속
요소와 실제 참여하는 사람 사이의 심적 구분을 지키지 못하면 정말 사람끼리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만, 이건 관계가 나빠질 수
있는 수많은 원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서로 정보와 서술권이 차단되어 적수를 맡는다 해도 그건 더
큰 재미를 위한 역할 구분인 것이지요.
이러한 창조적인 충돌의 장을 혼자 준비하는 고전적 진행자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의외성과 대립의 맛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다면 참가자의 선제지식이나 시나리오 협의는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따라서 서술권과 정보의 구분이 철저할 수록 진행자는 준비할 것이 많아지며, 상대적으로 책임감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재미있는 상황들을 제시했는지, 플레이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진행자 잘못은 아닌지 고민이 느는 것이 고전적 진행자입니다. 소스북이나 시나리오집 등이 이렇듯 외로운, 그리고 바쁜 진행자를 도와주는 준비자료이기도 합니다. 덧붙이자면 이들 시나리오에 참가할 사람은 읽지 말라는 경고가 흔히 붙어있는 것도 고전적 서술권 분배에서 의외성의 극대화를 위한 정보 차단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렇게 판을 잘 짜야 하는 고전적 진행 형태에서 진행자의 덕목은 책임감, 치밀성, 임기응변, 성실성, 폭넓은 지식, 그리고 허를 찌르는 재치와 꾀일 것입니다. 참가자에게 제대로 된 도전을 제시하려면 규칙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겠고요. (사실 어떤 진행을 하든 미덕입니다만…) 어찌보면 웹툰 환상주사위에 나오는 TRPG부 부장이자 마스터 나현우가 그런 전형을 잘 나타내고 있지요. 고독하되 충분히 자기 책임을 수행할 수 있고, 속으로는 진행이 힘들더라도 겉으로는 내색 안하고 태연할 수 있는, 고전적 진행자는 어찌보면 영웅적 진행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이놈 고등학생이 머리가 그게 뭐냐!
대화와 소통으로 서술권의 벽을 넘다
위의 고전적, 혹은 ‘영웅적’ 진행자의 전형을 보고 진행자에 대한 부담이 지나치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무슨 초인도 아니고,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는 고독한 영웅이라니 이게 무슨 액션 영화란 말입니까. 실제로 환상주사위에 대한 RPG인의 비판 중에는 마스터의 모습이 왜곡된 RPG관을 심어주기 십상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사실 저 역시 진행자가 고독한 영웅이나 신비한 현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 얘기한 고전적 진행자의 모습 역시 순수한 형태로 현실에 존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하는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념형 (ideal type)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영웅적 진행자와 서술권의 철저한 구분이라는 그 이상은 현실 플레이에도 큰 규범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는 완전히 순수한 형태의 고전적 진행자가 아니라 해도 그런 영웅적인, 혼자서 다 짊어질 수 있는 진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저도 느껴 보았고 주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현실 속의 진행자는 (이상이야 어떻든지 간에) 모든 준비와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러한 플레이가 잘 되었을 때의 장점은 위에 고전적 진행 부분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부담을 느낀다면, 혹은 참가자가 진행에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협의해서 진행상의 사항을 정할 수 있지요.
이러한 협의의 내용은 워낙 다양해서, 사실 협의형 진행의 모습은 굉장히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순수한 이념형 고전적 진행 외에는 전부라고 할 정도로 폭넓지요. 간간이 참가자가 이런 조연을 내보내달라거나,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좋지 않겠느냐 하고 제안하는 정도일 수도 있고, 캠페인 준비 단계에서 시작해서 장면 하나하나까지 모두가 논의해 정하는 것이 보통인 플레이일 수도 있습니다.(주:후자는 X의에 의한 플레이라고도 합니다만, 이걸 글로 정리하신 분이 제가 쓰는 글에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으므로 따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협의형 진행은 그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므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협의형 역할구분,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는 협의형 진행이란 논의와 의사소통을 통해 정한다는 대원칙을 둔 온갖 플레이의 총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협의는 각 팀이 ‘필요한 만큼‘ 하면 되니까 어디까지 어떻게 협력하는 게 좋다 하고 방법론적으로 정의하기도 좀 어렵겠죠. 협의로 정하는 부분이
적으면 고전적 진행에 더 가깝고, 협의의 형태나 결과가 정형화되면 아래 분산형 진행에 가까워질 수도 있는 등, 협의형 진행은 하나의
독자적인 형태라기보다는 정도 차이를 구획한 분류에 가깝습니다.
이렇듯 다양할 수 있는 협의형 역할구분을 굳이 정의하자면 서술권 구분은 위 고전적 구분과 원칙적으로 같되, 자신에게 서술권이 없는 영역에 대해 제안과 논의라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가자는 주인공, 진행자는 그 외의 세계’라는 서술권의 차단을 협의라는 장치로 넘나드는 것이지요. 그 결과 진행자도 주인공의 행동에 대해 제안하고 논의할 수 있고, 참가자도 조연이나 주변 세계에 대해 얼마든지 토의할 수 있습니다.
협의형 진행의 장점이라면 고전적 진행에 비해 진행자의 부담을 경감한다는 점이 있겠지요. 고전적 진행자가 마치 안전망 없이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와 같은 부담감이 있다면, 협의형 진행 속의 진행자는 협의의 역할이 강할 수록 튼튼한 안전망을 갖추게 됩니다. 공동 창작과 공동 책임, 공동 부담인 만큼 혼자 부담감을 끌어안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한편 공동 창작과 공동 부담이라는 것은 혜택도 공동으로 누린다는 뜻입니다. 즉, 진행에 참가자 의사를 반영하는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 진행에 벙어리 냉가슴 앓을 필요가 없고, 본인의 로망을 좀 더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위에 이미 말했듯 협의형 진행은 고전적 진행과 완전히 별개의 유형이 아닌, 협의의 정도 차이로 구분한 것인 만큼 고전적 진행의 형태를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도 협의를 첨가해 이러한 장점을 향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협의는 역시 필요한 만큼 하는 거니까요.
또 한 가지 장점이라면, 고전형 역할분담에서 흔히 나타나는 개인 대 세계를 넘어 주인공이 외부 세계를 이용하기도 하고, 이끌기도 하는 등 한결 폭넓은 이야기를 하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서술권과 정보의 차단을 넘나드는 협의라는 장치가 있는 만큼 참가자가 놀이 속 세계에 대해 대립 외의 행동을 취할 운신의 폭이 커지는 것이지요. 고전적 진행에서 가장 하기 쉬운 것이 소수의 협력자와 함께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고독한 영웅 집단이라면, 협의형 진행에서는 세계나 조연에 대한 정보와 영향력이 훨씬 많은 만큼 지도자라든지 중간조정자 등의 역할을 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집니다.
물론 이러한 장점의 대가로 위에 고전적 진행을 다루며 이야기한 긴장감이나 의외성이 약해지는 점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협의를 얼마만큼, 어디까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만, 이미 얘기가 된 사건에 대한 반응은 아무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튀어나오는 충격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죠. 주인공이야 얼마든지 놀랄 수 있지만, 참가자가 느끼는 의외성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로망을 반영하였다든가, 플레이의 내용에 대해 불안할 필요가 없다든가 하는 다른 장점은 있으며, 의외성 약화 자체도 서술의 일관성이나 개연성 확보에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느 쪽 진행 형태가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과 취향에 비추어 어떤 장점과 단점을 고르느냐에 따라 최선의 선택이 달라질 뿐이지요.
플레이에 협의의 역할이 강할 수록 진행자는 고전적 진행자가 맡는 독자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시나리오 제작 위원회의 일원이라든지, 참가자의 의논 상대로서 또 하나의 참가자가 됩니다. 물론 서술권 분배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므로 주인공 외의 세계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것은 변함없지만, 협의의 역할이 크고 협의가 정형화되어 있을 수록 그 결정은 전체의 의사에 제약을 받습니다. 이러한 제약이 강해지면 결국 서술권 분배 변경에 이르고, 그러한 변경은 곧 논할 분산형 역할분배로 이어집니다. 결국 정도의 차이인 것이지요. (최하단 도면 참고)
협의형 진행자는 위와 고전형 진행자의 덕목도 갖추면 좋지만, 그 이상으로 풍부하고 정확한 의사소통 능력과 다양한 의견의 조율 능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참가자와 협의한 것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중요하겠고, 감정적 안정성과 인간관계 관리 능력, 의논한 것을 정리해서 자료로 만드는 꼼꼼함과 기록 습관 등도 도움이 되겠지요. 결국은 워낙 다양한 형태의 플레이를 포괄하는 용어이기에 진행자의 능력도 일률적으로 논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협의형 진행을 할 때 진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 분산형 진행
백짓장도, 진행자 권한도 맞들면 낫다?
위에서 다루었듯 고전형 진행에서는 진행자가 주인공 일행 외에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서술권이 있고, 협의형 진행도 원칙적으로 비슷하지만 협의를 통해 자기 서술권에 속하지 않은 요소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결국 참가자는 주인공, 진행자는 그 외의 나머지라는 전통적인 서술권 분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협의형 진행에서는 비록 협의의 범위에 따라서는 서술권의 정도나 행사 방식을 수정하기는 하지만, 진행자는 세계, 참가자는 주인공이라는 자신의 서술 영역에 대한 재량은 다소간에 있습니다.
세 번째로 다룰 분산형 역할구분은 바로 그 전통적인 서술권 분배를 해체합니다. 참가자도 조연을 맡기도 하고, 진행자도 주인공 제작에 참여하고, 진행자가 여럿인 경우도 있고, 아예 진행자가 없기도 하지요. 일단 진행자는 세계, 참가자는 주인공이라는 전통적 구분을 벗어나면 정말 무수한 조합이 있는지라 일률적으로 얘기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래서 결국 서술권을 전통적인 형태와 다르게 분산했다, 내지는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가졌다는 의미에서 분산형 역할구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위의 협의형 역할구분에서는 남의 서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비정형적인 의사소통이라면, 분산형 진행은 서술권 분담을 규칙으로 확실히 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이란 RPG 책에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팀에서 함께 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전통적인 서술권 분담 구조를 벗어나는 만큼 명시화하고 명문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폴라리스 (Polaris)에서는 ‘마음’ 참가자는 주인공, ‘달’ 참가자는 우호적인 조연, ‘후회’ 참가자는 적대적 조연과 배경세계 하는 식으로 나누고 있지요. 달과 후회가 전통적인 진행자 역할을 나눠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달을 쏘다 (Shooting the Moon)에서는 진행자 없이 두 ‘구애자’와 한 명의 ‘님’으로 나누어서 하는 삼각관계 얘기인데, 자신의 주인공인 구애자나 님뿐 아니라 기타 조연에 대한 서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참가자 전원이 진행자의 역할을 나누어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협의로 타인의 서술권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규칙 자체로 서술권을 나누는 차이는 결국 부담과 확실성의 차이입니다. 협의형 역할구분 속의 참가자는 조연의 행동에 대해서 제안은 할 수 있지만, 일단 제안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고, 또 제안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서술권자인 진행자이므로 제안을 받아들일지, 그리고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진행자의 몫입니다. 반면 스스로 서술권이 있으면 자신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부담과 확실성의 차이 때문에, 서술권 분배를 다르게 하는 것은 협의와는 또 다르게 플레이의 모습을 변화시킵니다.
서술권을 분배하는 규칙은 협의 과정과 그 내용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똑같이 협의를 하더라도 위에 논했듯 일반적으로 자신이 서술권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발언권이 강하기 십상이지요. 또한, 협의를 구조화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달을 쏘다’에서 인물을 공통으로 제작하는 것이나,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 참가자가 장면을 신청하는 규칙이 그 예입니다. 이렇게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해서 만든 협의의 구조 속에서 그 발언권 행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네 캐릭터랑 내 캐릭터가 아까 일로 말다툼하는 장면은 어때?” “내가 생각하는 장면은 네가 말한 장면 다음에 나오는 게 좋은 것 같으니까 네가 먼저 신청할래?” 등등)
달을 쏘다나 폴라리스처럼 전면적으로 서술권을 분산하는 규칙도 있지만, 서술권 분산은 고전적 역할분담 속에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극점수 서술이 좋은 예이지요.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계열 규칙의 면모 발동이나 페이트 점수 소모가 좋은 예입니다. ‘항구마다 여자가 있다’ 면모를 발동해서 이 장면에서 옛 여자가 나타나는 서술을 한다거나, 페이트 점수를 1점 써서 옆에 무기가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물론 협의로도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위에 얘기한 부담과 확실성의 차이로 돌아오지요. 다르게 보면 극점수를 사용하는 것은 극점수를 소모한 사람의 발언력을 크게 강화한다고 보아 협의를 구조화하는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주:극점수 논의는 위시송군의 제안으로 추가했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위씨 탓[?])
분산형 역할분담의 장점은 협의형과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고전적 역할분담에서 진행자에게 속했던 서술권을 참가자에게 분배하므로 진행자 부담이 거의 없고, 아예 진행자 자체가 없는 형태도 있습니다. (달을 쏘다, 폴라리스, Grey Ranks 등) 이러한 역할분담 때문에 참가자의 욕구를 플레이에 직접 반영할 수 있으며, 세계와 주인공 서술권의 이분법이 없으므로 주인공 대 세계라는 이야기 원형보다 폭넓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인공에 대한 정보와 서술권이 있는 사람이 세계에 대한 정보와 서술권도 있다면, 그 점을 활용해 주인공이 세계를 이용하는 서술도 할 수 있으니까요.
분산형 역할분담의 한 가지 추가적인 특징이라면 일반적으로 의외성을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술권과 협의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술권의 영역에 있는 것은 서술권자가 독자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고, 협의를 통해 정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미리 얘기가 되어 있어야 하지요. 분산형 역할분담 속에서는 진행자뿐 아니라 어느 참가자라도, 주인공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그런 의외의 서술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협의나 판정을 통해 조절할 수는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여러 방향에서 다양하게 나온다는 차이입니다. 물론 그만큼 서술의 일관성이나 체계성 유지는 어려워질 수도 있으므로 긴밀한 의사소통과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주:이 일관성과 체계성 논의는 제노시아님 지적에 추가한 것입니다. 글 봐달라고 완전 온 동네를 불러냈구만[..])
단점이라면 협의보다 규칙에 기댈 수록 특정 방향의 서술을 유도하는 제약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예를 든 폴라리스는 비극으로 흐르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한 규칙이므로, 비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부적합합니다. 달을 쏘다 역시 인물의 변화와 희생을 유도하는 만큼 극단적으로 흐르기 쉬운 규칙이지요. 따라서 규칙이 지향하는 유형의 이야기를 원한다면 좋지만, 범용성은 떨어집니다. 범용성과 자유도가 강한 분산형 서술분담 규칙은 안방극장 대모험처럼 규칙의 정형성이 덜하고, 대신 협의를 구조화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산형 역할분담 속에서 진행자의 역할은 보통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고, 아예 진행자가 없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전통적인 진행자의 권한을 다들 나눠가지고 있으므로 전원이 진행자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분산형 ‘진행자’의 미덕은 서술권을 분배하고 행사하는 규칙을 잘 알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참가자들과 의사소통을 활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칙으로 부여받은 서술권과 참여자끼리의 논의를 둘다 이용해 자신과 상대의 로망과 반응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재미있게 노는 방법입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역할분담 유형은 이미 말했듯이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도 차이입니다. 그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상과 같이 RPG 속에서 서술권 분담의 차이와 그에 따른 진행자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이라면 서술권 분담 유형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고, 또 RPG의 서사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목적과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RPG라는 하나의 취미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진행자의 역할 (혹은 유무)만 해도 차이가 나고 또 같은 유형 속에도 굉장히 다양한 규칙과 플레이가 있습니다. 그런 다양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RPG는 더욱 풍요로운 취미가 아닐까요?
RPG와 최적경험 2편 (아직 미완성, 비공개) 쓰다가 갈라져나온 내용입니다. 도식을 만들기는 했는데 그 글에는 딱히 들어갈 곳이 없어서 일단 여기에 올려놓죠. 이전에 썼던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논의를 시각화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면은 OpenOffice Draw로 제작했습니다.
묘사적 규칙:
게임은 서사 내에 존재합니다. 이야기의 구조나 진행과 같은 서사적 요소를 직접 다루지는 않고, 판정을 통해 전체 서사 내의 일부 사건을 확정합니다. 보통 전투규칙이 제일 정교하고 양도 많지만, 사회적이거나 정신적인 사건 역시 판정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요소를 되도록 정교하게 규정하려고 할 수록 규칙이 복잡해집니다. 겁스, D&D 3.5 등. 7번째 바다 (7th Sea)나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처럼 기본적으로 묘사적인 규칙에 서사적 요소를 추가한 절충형도 있습니다.
서사적 규칙:
서사가 곧 게임입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에서는 서사가 끝나는 조건이나 결말의 향방도 규칙으로 결정합니다. 규칙으로 다루는 요소도 대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호감도나 타락 등 극적인 것입니다. 서사를 규칙의 논리로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는 만큼 규칙은 보통 간결하고 해석의 폭이 큽니다. 결국 서사를 만들어가는 작용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규칙의 역할입니다. 폴라리스 (Polaris), 달을 쏘다 (Shooting the Moon),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 등.
사람이 하는 행동 중에는 의도적으로 하는 것도 많지만, 무의식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하지 않을 때도 말이죠. 때로는 행동이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친구나 선후배로만 생각했던 상대에게 고백을 받는다든지, 인상이 무서워서 상대가 쉽게 겁을 먹는다든지, 좀 심각한 예로는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훔치는 도벽이 있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