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고 헤어진다는 의미: 패스파인더와 룬로드의 부흥

Rise of the Runelords 표지어쩌다가 모두가 나답지 않다고 하는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나답다’는 테두리 그 자체에 저항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변화가 필요했을 지도 모르죠.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바람처럼 찾아오고는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그분들에게, 그 공기에 이끌렸던 것 같아요. 함께하는 시간과 공유하는 즐거움에 대한 그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 그리고 만남을 바라는 정중한 부탁의 말씀. 이분들이라면 함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 결정에 후회는 없어요.

지인들은 누구나 얼마나 가겠느냐고 했지요. 그 ‘나다움’이라는 기대치를 깨보려고 의욕적으로 시작했고, 또 그만큼 좋은 시간도 많았어요. 함께하는 시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분들의 재치와 실력에는 정말이지 감탄했고, 저를 칭찬해주시고 챙겨주실 때마다 뛸듯이 기뻤답니다.

언제부터 무리가 생긴 걸까요. 결국 나다움의 울타리는 너무나 견고한 것이었는지, 함께하는 시간들 속에 ‘나’와 ‘실제’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주문이나 경험치, 물품처럼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저에게는 먼 일 같기만 했고, 저의 관심사는 그 시간 속에서는 현실이 되기 어려워 보였죠.
모두 걱정해 주시고, 대화와 노력과 고민이 따랐지만, 그 끝에 저는 결국 초심의 의욕을 잃어갔어요. 만나는 시간에도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지켜보는 시간이 늘면서 참으로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답니다. 좀 더 노력했더라면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옳은 길이었을까요?
고민 끝에 어느 추웠던 날, 모니터 위에 외롭게 빛나는 채팅창에서 저는 결국 결별을 고하고 말았답니다. 누구도 바라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거에요.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또 미련이 남는다 해도 서로 더 좋은 인연을 만나 이어가기를 바라는 저의 마음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 만남에서 여전히 저는 할말이 많지 않았지만, 헤어지기로 하자 처음에 저를 매혹시켰던 그분들의 열정은 더더욱 돋보였답니다. 이별을 물리고 다시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다시 시작하더라도 같은 일의 반복임을 알고 있었기에 참았지요. 마치 당긴 고무줄처럼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의 습관일 뿐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모든 일에 승자와 패자를 나누기를 좋아하지요. 끝까지 함께하는 것만이 진리이고, 어떤 이유로든 마지막까지 가지 못한 만남은 실수였거나, 잘못이었거나, 시행착오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흘러간 인연의 빛깔과 눈부심을 바로 보지 않는다면, 그 역시 당신과 나의 일부라고 소중히 품지 않는다면 그건 살아온 시간을 뭉텅이째 잘라내는 참혹한 처사가 아닐까요? 이별로 끝난 만남은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그 역시 인연이라고 저는 당당히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 함께한 시간들은 다른 어떤 색깔보다 ‘고마움’의 고운 빛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함께해 주어서, 소중한 시간을 우리의 만남에 써주어서, 그 많은 배려와 웃음과 대화에 감사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갈망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어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답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
백만 년만에 나타나서 이상한 글 남깁니다 ㅋㅋ Big Stick Carrier 팀의 패스파인더 캠페인 ‘룬로드의 부흥 (Rise of the Runelords)’에 오래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재밌는 세션도 많았고 많은 걸 배웠습니다. 맵툴도 처음으로 제대로 써보았고, 다들 대단한 마스터와 플레이어셔서 아주 즐거웠습니다. 제가 헤맬 때에 참을성 있게 챙겨주시고, 작은 일에도 칭찬해주셔서 더욱 감사했고요. 스토리도 탄탄하고 방대해서 공식 시나리오의 힘을 느꼈달까요. 결국 저하고는 잘 안 맞았지만, 패스파인더를 통해 이어지는 D&D의 생명력과 재미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즐거운 RPG 라이프 되시길!

8 thoughts on “함께하고 헤어진다는 의미: 패스파인더와 룬로드의 부흥

  1. qws2

    오래간만에 올리신 글 잘 봤읍니다. 저는 D&D스러운 게임 정서를 Club&Coin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http://qws2.egloos.com/2651193).

    규칙이야 아물며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D&D스러운 게임의 정서는 Club(전투력), Coin(자원)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봅니다. D&D로 스토리텔링시스템처럼 할 수야 있겠지만, 결국 위 두 요소가 없으면 D&D로서 정체성이 흐려진다고 봅니다.

    그나마 딱 저것만 존재했던 시기라면 거기에 서사요소를 배합하기 쉬운데, 3.0 이후 시기로 와서 구축(Construct) 욕구가 D&D에 등장하면서 아마도 로키님스러운 사람들이 D&D에 더 적응하기 힘들어지지 않았는가하고 생각합니다. 가장 강하고(Club) 가장 효율적인 장비(Coin)를 통해 육성, 즉 구축(Construct)에 맛을 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무슨 조건을 만족하면 무슨 특기(Feat)를 얻고, 무슨 재료와 돈을 얼만큼 써서 장비를 사는 걸로 시트를 채우는 거죠.

    저도 방금까진 제대로 못 했지만, 이번 로키님 글을 보고 위와 같은 생각이 정리가 됐습니다. 남한테는 그리 좋지 않은 일인데, 그걸로 요상한 깨달음을 나열하니 뭔가 죄송함이 앞서네요(위에 나온 구축을 새로 떠올리면서 FATE의 방계 중의 방계인 운명의 실타래에 혐오감을 가진게 설명이 되더랍니다–).

    이런 걸 타파해보려고 페이트나 히어로퀘스트, 인디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영 생각만큼 결과물(좋은 번역)이 안 나오네요–(그전에 플레이나 많이 해봐야하기도 하고-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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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Club & Coin, 그리고 3.0이후로 Construction이라, 정말 정확한 요약이네요 ㅋㅋ 스토리가 얼마나 깊이가 있든지간에 D&D라는 룰을 제대로 살릴려면 그렇게 가야 하는 것 같아요. 특히 그 육성 부분에서 ‘설정’과 ‘효율’ 사이를 선택하게 되면서 (물론 잘하시는 분들은 둘다 살리겠지만) 로키스럽게 룰에 헤매는 사람은 우왕좌왕하기 쉬워진 것도 같고요.

      생각이 정리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덕분에 저도 정리가 되네요. 늘 활발한 번역활동 존경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번역 많이 하셨으니 이제 플레이도 많이 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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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년H

    목욜날 그런 이야기하시고 이런 글 올라와서 중간까진 깜짝 놀랐습니다.

    어차피 영원한 인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짧은 인연이라고 특별히 나쁜 인연인 것은 아니죠. 짧아서 아쉬운 인연은 있겠지만 (저랑 로키님 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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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훗훗 낚시글(…) 하긴 모든 인연은 언젠가는 끝나는 법이죠. 우리는 오래 이어가요!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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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머스터드젤리

    흑흑 로키님의 빈 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마 D20류는 아니게 되겠지요 ㅋㅋ

    오늘 저녁에 레이디블랙버드 피날레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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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저 나중 가서 완전 불성실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ㅠㅠ 오늘 (벌써 오늘!) 블랙버드 엔딩도 멋지구리하게 보고 다음 기회를 노려보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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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ay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그냥 봤네요.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시기에 열심히 pathfinder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좀 아쉽네요.
    그렇지 않아도 사멸 직전인 RPG인 하나가 사라지는건 정말 아쉬운 일이죠. 이후에 같이 플레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려나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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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아, 저 RPG 계속 해요!^^ 그저 패스파인더를 안할 뿐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서사 중심의 경량 규칙이 맞더라고요. 패스파인더 즐겁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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