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와 운전: 서술과 협의, 문제 플레이에 대한 생각

1. RPG와 운전

책[footnote]Mindsight: The New Science and Personal Transformation (by Daniel J. Siegel, M.D.)[/footnote]을 보다가 재미있는 비유가 나와서 RPG에도 적용해 보았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정신을 스스로 제어한다는 의미를 논하면서 운전을 하는 비유를 드는데, 운전대를 잡고 눈을 감고 있으면 차를 제어한다고 할 수 없고, 차 뒷좌석에 탄 승객은 운전을 감시는 할 수 있고 운전자에게 제안도 할 수 있지만 운전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RPG에서 서술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눈감은 운전자는 일단 차치하고 (ㄷㄷ) 서술과 협의의 관계는 마치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와 뒷좌석에 앉은 승객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참가자는 자신의 주인공 (PC)의 행동을 서술하는 서술권이 있고, 진행자는 조연 (NPC)과 외부 세계에 대해 서술권이 있습니다. 이때 참가자는 진행자에게 조연이 내 주인공을 죽이려고 했으면 좋겠다, 이쯤에서 비가 왔으면 좋겠다 하고 제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행자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요. 그런 식으로 활발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사실 바람직한 플레이기도 합니다. 승객이 운전자가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거나, 지름길로 가자고 운전자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그러나 뒷좌석의 승객이 운전자일 수 없듯, 서술권자가 아닌 사람은 서술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서술 영역이 아닌 영역에 대해서는 제안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참가자는 진행자에게 조연이나 외부세계에 대해 제안은 할 수 있지만, 직접 조연이나 외부세계 요소를 빼앗아 서술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진행자가 조연이나 자연현상 등을 참가자에게 넘기는 경우는 서술권이 넘어가는 것이므로 다른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진행자나 다른 참가자도 참가자에게 주인공이 이런 말이나 행동을 하면 어떨까 얼마든지 제안은 할 수 있고 또 참가자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진행자나 다른 참가자가 주인공에게 어떤 말이나 행동을 시키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뒷좌석 승객이 운전대를 빼앗으면 안 되는 것처럼요. 물론 운전을 교대하기로 하고 승객과 자리를 바꿔타는 것과는 다른 얘기이지만요.
2. 운전석과 뒷좌석을 구분하는 세 가지 이유
어째서 로키는 이런 독재적인 발언을 하는 것일까요? 내 서술권은 내꺼고 니 서술권은 니꺼니까 침범하지 말라는 이런 반공동체적, 반민주적 발상이 어딨습니까! 혹시 진행자는 신에게 권한을 받는다는 구닥다리 진행권신수설 신봉자, 혹은 시대에 뒤처진 권위주의자인 것일까요?
뭐 제가 독재파쇼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서술권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 외에도 (?)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구조적, 사회적, 감정적 이유입니다.
첫 번째, 서술권을 구분하는 구조적 이유는 우선 RPG는 어떤 식으로든 서술권을 구분해야 한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서술권이 있으면 그건 혼자 쓰는 소설이고, 아무런 서술권 구분이 없으면 서로 눈치만 보다가 놀이가 안 되거나 아니면 놀이 속 사건에 대해 서로 의견이 안 맞아 말다툼을 벌이기 쉽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너는 저 영역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나는 이 영역에 대해 결정권이 있다는 서술권 구분이지요.(주:또 다른 수단이라면  서술권 영역 사이를 매개하는 규칙과 협의입니다만, 서술권 글에서 그 역할을 적었던 만큼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술권을 어떻게 분배하든 그 분배에는 일정한 효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가자가 주인공을 맡고 진행자가 그 나머지를 맡는 전통적인 구조는 주인공 일행 대 세계라는 대립적인 구도를 이루기 쉽습니다. 서술권을 전혀 다르게 분배하는 놀이, 예를 들어 얼음깨기 (Breaking the Ice)는 주인공과 외부 세계를 같은 사람이 서술하는 만큼 한결 주인공과 외부 세계가 협력하기가 한결 쉬워집니다. 따라서 어떤 서술권 분배와 그에 따르는 효과를 선택했다면 그 분배를 어기는 것은 그 효과 또한 희석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두 번째, 서술권을 구분하는 사회적 이유는 서술권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면 서로 눈치를 보면서 진행이 늘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행자의 전통적 영역을 참가자 사이에 공동 분배하면 (‘꼬마 미우 구하기 1부’ 사진에서부터 5번째 문단 참조) 책임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논의와 의사소통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논의가 활발한 것은 더없이 좋지만, 논의 없이는 장면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면 좀 피곤하지요. 마치 운전자 없이 ‘승객이 투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차’를 탄 것처럼 정신없는 경험이 되기 쉽습니다.
세 번째 감정적 이유는 서술권을 구분하고 그 구분을 지키지 않으면 감정이 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역할극을 다룬 글에서 역할극에 판정이 없어서 생기는 부작용을 적었었는데, 서술권 구분이 없거나 그 구분을 지키지 않는 것도 비슷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서술권 구분이 없다면 이 요소 (인물, 자연물 등)의 움직임을 내가 서술해도 괜찮은지 바로 확신할 수 없고, 그 요소를 움직였다가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이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서술을 해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지요. 서술권 구분은 이러한 눈치보이는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해서 인간관계와 놀이 속 서술 사이에 어느 정도 방벽을 만들어줍니다.
서술권을 일단 구분한 상태에서 지키지 않았을 때 생기는 감정적 결과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행자가 주인공에 대해 조언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한 간섭을 하거나 아예 행동을 강제한다면 해당 참가자는 자기 서술권뿐 아니라 인격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 것이며, 서술권 구분이 그런 식으로 무시당하면 위에 얘기한 구조적, 사회적 문제도 발생할 것입니다.
3. 뒷좌석 운전의 실제 모습
물론 실제 RPG에서는 ‘나는 너의 서술권을 부정하고 이 이야기 요소를 내가 제어하겠어!’ 라고 선언하고 서술권을 잡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있으려나요? 있으면 제보좀…) 그보다는 서술권 개념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침해하는 일이 많지요. RPG를 할 때 뒷좌석에서 운전대를 잡으려고 씨름하는 행동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강제 진행. 거의 진행자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권 침해입니다. 고전적인 RPG 서술권 분배에서 진행자는 참가자에 비해 서술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합니다. 그래서 세계와 조연을 움직여서, 혹은 장면 전환이나 편집을 해서 원하는 진행에 반하는 참가자 서술을 막아버리는 것을 강제 진행, 혹은 칙칙폭폭 진행이나 기찻길 진행 (Railroading)이라고도 합니다. 주인공에 대한 서술권을 무시당했으므로 참가자는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감정적 부작용), 세계와 주인공에 대한 서술권을 분리하는 이점을 취할 수 없어지는 (구조적 효과) 악효과가 있습니다. 의미있는 모든 서술권이 한 사람에게 모이므로 소설에 가까워지고, RPG를 하는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참가자와 협의를 해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넘기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며, 진정한 협의만 되어 있다면 강제가 아니므로 서술권 침해가 아닙니다. 따라서 진행자가 특별히 바라는 전개가 있다면 참가자와 의논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특정 전개에 애착이 강하다면 그냥 소설을 쓰는 게 낫습니다.
또한, 강제 진행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서술 무시를 통해 상대의 서술권을 없는 것처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진행자와 참가자 모두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진행자가 하는 편이 효과가 강력합니다. 주인공이나 조연의 행동이나 대사를 무시해서 놀이 속 효과를 부정하는 것인데, 강제 진행만큼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부작용은 강제 진행과 비슷합니다. 기분이 나쁠 뿐 아니라 놀이 속 현실이 무엇인지 혼란을 야기하므로 (선전포고를 한 거야, 안한 거야? 비가 왔어 안왔어?) 이런 일이 잦으면 놀이 자체를 망가뜨리기 쉽습니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인물이’ 다른 인물을 무시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인물끼리 대립하는 거야 얼마든지 극적으로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인물끼리 갈등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참여자끼리 갈등하는 것은 지루하고 혼란스럽지요. 마음에 안 드는 건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로 푸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서술을 무시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서술이 쏟아진다거나 (특히 주인공이 다수 등장하는 장면이 이러기 쉽습니다), 다른 세션이나 이전 장면 등 전에 나온 정보를 잊어버렸다거나 할 때 벌어지는 일이지요. 의도적 서술 무시보다는 훨씬 낫지만 이것도 잦아지면 헷갈리므로 선언을 차례대로 한다거나 리플레이를 정리한다거나 해서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은근슬쩍 서술을 해서 서술권을 침해하는 것은 보통 참가자가 합니다. 이건 논의와 구분하기가 조금 애매할 수도 있지만, 선을 확실히 넘었을 때는 보통 알 수 있죠. 예를 들어 조연이 자신의 주인공 미모를 보고 넋을 잃는다는 선언을 참가자가 한다거나, 중요한 조연과 아는 사이라고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존 협의 없이 느닷없이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서술이 사소한 것일 때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사소한 사항이라 해도 서술권 범위 외에 있는 것은 먼저 서술을 해버리기보다는 간단하게나마 제안이나 논의를 하는 것이 이러한 기습 서술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얘네들이 주인공을 보고 넋을 잃으면 어떻겠느냐, 이 조연하고 아는 사이이면 어떻겠느냐 하고 의논을 하는 것은 물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규칙을 통해 이전받은 서술권을 행사하는 상황 역시 문제가 없지요. 서술권이 없는 요소를 갑자기 서술을 해버려서 서술권자를 당황시킬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전 논의 없이 서술권자 (보통 진행자)가 전혀 준비하지 않은 방향으로 상황을 끌고가려고 한다거나, 판정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판정을 건너뛰는 것은 서술권 구분을 교란하고 서술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부작용이 따릅니다. 서술권자는 이 서술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다른 참여자에게 싫은 소리를 할 것인가 하는 곤란한 선택에 처하게 되어 더욱 감정이 상하기 쉽지요.
이러한 기습적 서술권 침해는 특히 정당한 논의 과정이나 판정을 우회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합니다. 협의를 했는데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이런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참여자의 개인적 문제일 수도 있고 (RPG를 곤란하게 하는 행동유형 중 ‘예의바른 암살자’ 참조) 때로는 팀내 의사소통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서술권자에 대해 감정적으로 벌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술권을 장악하려는 행동도 있는데, 이것은 정당한 비판을 다소 격하게 하는 행동과 꼭 구분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논의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문제가 덜하고, 서술권 침해라기보다는 대인관계와 의사소통 문제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술권자를 위축시켜 서술권 행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문제 행동이기는 하다고 봅니다.
감정적으로 벌을 주는 행동은 보통 비판에서 시작합니다. 여기까지는 문제될 것이 없지요. 플레이를 향상시키려는 비판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니까요. 정당한 비판에서 감정적 괴롭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요소는 크게 반복성, 적대적 감정 표출, 플레이 도중에 길어지는 잡담, 인신공격성 발언, 구체적 해결책 부재가 있습니다. 즉, 특정 서술권자에게 집중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며, 그 비판에 사용하는 단어나 말투가 감정적이며, 플레이 중 당장 필요한 것을 교정하는 최소한의 의사표시를 하거나 플레이 이후 지적을 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 도중에 길게 말을 해서 흐름을 끊어놓으며, 특정 서술이 아니라 서술권자 자신의 결함에 초점을 맞추며, 무엇보다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지 제시하지 않아서 고치기조차 어려우면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감정적 괴롭힘은 처음 시작은 서술권 행사에 관한 의견 차이였을지 몰라도 (왜 저런 대사나 선언, 기타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감정이 쌓이고 바람직한 해소를 하지 못하면서 쌓인 적대감을 부적절하게 표출하는 대인관계상 문제가 되어가기 쉽습니다. 그냥 애당초 성격과 취향이 맞지 않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요. 이럴 때에는 진짜 맺힌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대화로 해결하거나, 정 해결할 수 없고 서로 맞지 않으면 플레이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4. 운전은 운전자가
운전석과 뒷좌석이 다르듯이 서술권자의 역할과 지켜보고 조언을 하는 역할은 분명 다릅니다. 그 구분을 하는 것은 서술권자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구분을 하는 편이 다같이 재미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점을 잊어버리고 뒷좌석에서, 혹은 조수대에서 운전대를 잡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대신 서술과 협의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활발하게 대화를 하면서 서술을 분배하는 의미를 되도록 살리는 것이 안전운전, 아니 건전 RPG의 시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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