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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의 선택에 대하여

CB마스터님의 이 글을 보고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왠지 게시판 토론 삘이?) 특히 다음 부분이 인상에 남더군요.

다만 이런 방식을 쓸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게, 예상하실 수 있듯이 캠페인의 주도권이 대부분 마스터에게 넘어갑니다. 마스터
머릿속에서 이미 캠페인 엔딩까지 결정이 다 돼 있고 PC는 거의 마스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식이 돼 버리기 쉽더라구요. 앞서 말했듯이 마스터가 먼저 마련한 배경은 오히려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보장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마스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는 걸 아는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플레이어들은 곧잘 수동적인 대응만을 하게 됩니다.

RPG의 게임성에 대한 글에서 다루었듯, RPG의 재미는 의사결정과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참가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만, 사실과 일치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 제일 쉽다는 면에서 두가지는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CB마스터님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선택의 여지, 혹은 그 인상을 확보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인물 설정이나 지금까지의 사건에 비추어 선택이 뻔하고 어떻게 해도 진행자의 손안에서 놀 뿐이라고 생각되면 참가자는 자신의 선택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될 위험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2005년 말에 진행했던 라이테이아 전기에 나온 케사르라는 주인공이 그 예였죠. 케사르는 설정상 연쇄살인(..) 전적이 있는 청년으로, 찾던 친부모를 마침내 만나지만 친부모가 갓난아이였던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키워준 요정족의 숲을 구하려면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극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라는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궁지를 넘어 주인공을 거의 함정으로 몰아넣은 셈이었으니까요. 좀더 운신의 폭이라든지 권력기반이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7회짜리 단기 캠페인의 시간제한도 있었고, 케사르에게는 아버지에게 대항할 기반도 부족했죠. 결국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손에 입을 맞추며 후계자가 되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숲의 아들로서의 자신을 버립니다.

참가자분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지금 생각해도 멋진 장면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 저 상황에서 참가자분이 ‘에잇 선택의 여지 따위 없잖아! 알았수다. 후계자 합죠 뭐.’ 라고 반응했어도 진행자로서는 크게 할말은 없었던 상황이기도 합니..(..) 그만큼 저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혹은 극히 적은 상황설정은 최대한 아끼거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인물 설정이라는 또다른 ‘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고, 그래서 참가자의 이해와 협력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플레이 내에서의 선택이 제한되는 것은 틀림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와 같이 참가자의 선택의 여지가 줄어드는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원인에 대해서는 링크한 CB마스터님의 글과 얼마전에 천승민님이 다셨던 댓글이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진행자가 뭔가 ‘준비’했고, 어떤 결과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가자의 선택권을 줄이는 게 아닌가 하는, 어떻게 보면 기운빠지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라이테이아 전기 때 제 경험이 그랬습니다. 특정한 결과를 예상하고 상황을 만들다 보니 참가자들을 자꾸 그쪽으로 몰고 가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요정숲을 구하기 위해 희생해야겠지? 아직 이유가 부족해? 자, 여기 또다른 이유가 있다! ..) 그러다 보니 참가자들도 눈치채고 진행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줄여가는 게 아니었을지… 아마 그렇기 때문에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 등 많은  인디 RPG들이 어떤 사건의 진행이나 귀결을 절대로 정하지 말라고 진행자에게 조언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선택의 제한, 내지는 부정을 극복하는 법 역시 천승민님의 댓글 중 두번째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젠 아주 대놓고 남의 댓글을 우려먹고 있습..) 즉 모든 사건을 준비하는 대신 초기 상황설정 외의 부분은 개방형으로 해놓고 참가자의 선택에 따라 귀결을 실제로 ‘만들어’ 가는 것이 참가자의 선택을 최대한 확보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제 경험으로 예를 들면, 최근 진행하고 있는 포도원의 제다이 캠페인에서 첫 마을이었던 셀렌의 진행이 정말 아무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초기 세팅만 해둔 경우입니다.(주:다크포스 진행표는 포도원의 개들 원래 규칙에 나온 것을 찰스 페레즈씨가 스타워즈용으로 고친 것입니다. 페레즈씨의 글은 이곳에.) 포도원의 개들 같은 경우 저런 진행표를 통해 결과를 정하지 않은 개방형 진행을 지원합니다만, 사실은 어떤 규칙이나 캠페인에든 적용 가능한 것이기도 하죠.

이 진행표에서 정해진 것은 제다이들이 오기까지 마을에서 무엇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제다이들이 오지 않는다면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지. 그리고 몇몇 조연과 이들이 제다이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 제다이들이 들어와서 일으키는 변화에 저는 조연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 각자가 바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반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캠페인 내의 모든 사건은 제가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고, 그 차이는 상당히 크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이 방식의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라면 자칫 참가자를 막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뭔가 엄청난 상황은 있는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가 없으면 그건 선택의 폭이 너무 커서 결국 선택의 폭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죠. 따라서 참가자에게 이 상황을 이렇게 이끌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과제가 보이도록 실마리를 잡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참가자가 할 수 있는 일만 보여주면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나갈지는 참가자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참가자가 적극적일수록 실마리는 조금만 주고 참가자가 창의적으로 방향을 창출할 수 있고, 참가자가 소극적일수록 실마리를 뚜렷하게, 많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장소, 인물, 초기 상황 설정만 하면 된다는 면에서 진행자의 부담감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시나리오식 진행보다 준비가 더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도 유의사항입니다. 일단 시나리오가 짜지면 그로 인해 참가자가 접할 수 있는 장소와 인물이 어느정도 정해지는데 반해 참가자가 (이론적으로는)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준비해야 할 장소와 인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요.

여기에 유의미한 제한을 가하고 진행자 머리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상황이 중요해진다고 봅니다. 지금 상황이 살인사건의 해결이라면 실마리가 그쪽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갑자기 스트립바를 가진 않을 테니까요. (..가려나요?) 따라서 상황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적절히 던져서 이미 준비된 장소와 인물로 이끄는 진행의 일반 기법이 중요해지고, 이것은 위의 ‘참가자 막막하게 만들지 않기’와도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 피해자하고 마지막으로 얘기한 사람이요? 그건 옆집 루시였죠, 아마.’ 하는 증언이 있으면 이미 설정이 된 인물인 옆집 루시를 찾아갈 테니까요.

그렇다면 결국 진행자 손안에서 노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저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진행자는 특정한 상황을 주고 그 상황 속에서 운신할 수 있는 수단을 쥐어줄 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서 어떤 결과를 낼지는 참가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정해진 것이 없이 참가자의 행동과 그에 대한 반응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참가자 선택은 사건의 귀결에 하나하나 충실하게 반영됩니다. 누구에게 어떤 투로 얘기했는지부터 누구를 범인으로 지목했는지까지. 그것이 바로 참가자가 선택의 여지를 갖는다는 말의 의미 아닐까요.

물론 이것은 저같은 경우 이렇게 하니까 참가자 선택 여지가 커지더라… 하는 경험담일 뿐이지 모든 경우에 이렇다거나 모든
캠페인이 이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완성도 높은 줄거리라든지 특색있는 세트와 같은 요소를 즐기는 데는 부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가자의 선택에 의해 유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미리 정해진 줄거리의 철저한 완전성은 부족할 테고, 완벽하게
준비된 세트는 참가자들이 있는지도 모른채 안 가거나 부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진행 방법을 결정할 때는 RPG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재미들을 서로 저울질할 수밖에 없고, 저같은 경우 그중 참가자
선택의 극대화를 택했을 뿐입니다. 현재까지는 참가자들이 만족을 표시하고 있으므로 유지할 생각이며, 이것은 어떤 진행 방법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놀이인 RPG에서 ‘재미’보다 우선할 수 있는 가치는 어디에도 없고, 모두가 재미있다면 그것이 곧 좋은
방법이니까요.

신호 중심 진행의 간단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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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중심의 캠페인 제작이라는 글에 나온 신호 중심의 진행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전에 재밌게 봤던 CB마스터님의 세션 준비 글과도 관련이 있어 보여서 엮인글로 올립니다.

구체적으로 신호라는 뉘앙스를 캠페인으로 응결시키는 방법은 많은 직관적 비약과 주관성이 들어가는 과정인지라 설명하기가 좀 어렵지만, 비교적 간단한 1:1 단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 뻔한 얘기입니다만, 로빈 로스씨가 말했듯 뻔하거나 습관적인 것도 그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사용할 예는 구네님과 재작년쯤에 진행한 즉석 단편, ‘영혼의 우물’입니다. 구네님의 주인공 칼은 사냥꾼인 아버지와 형과 숲에서 살다가 모험을 떠난 모험가로, 명성을 쫓아 여행하다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을 못해서 형과 사이가 틀어졌죠. 여기서 도출되는 구체적인 신호는 일단 형, 어쩌면 숲. 좀더 추상적인 신호는 모험, 모험 경험에서 형성된 능력과 성격, 형과의 갈등, 가족에 대한 의무 등.

여기에다가 진행자인 저의 목표를 첨가하자면 고전 동화의 환상적인 분위기, 이미 밤새 RPG를 한 대미(..?)를 장식하는 시점이었으므로 무겁지 않은 가볍고 재미있는 분위기, 그러면서도 얄팍하지 않은 내용 정도였죠. 이렇게 참가자가 원하는 것과 진행자가 원하는 것들이 정해졌고, 욕구들 사이에 특별한 충돌이 없었으므로 시작할 기반이 갖추어졌습니다.

인물 제작을 마치고 바로 모험을 시작하면서 모험의 초점은 일단 주인공의 형과 숲으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형이 숲에서 실종된 정도는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 가족에 대한 의무는 주인공의 신호에도 속하기 때문에 사라진 형의 실마리를 쫓아 주인공이 여행해온 것으로 했습니다. 주점에서 주인장과의 대화를 통해 형이 이곳의 저주받은 숲에서 실종된 것이 확실하며, 아직 형이 칼에게 앙금이 남아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서 주요 신호를 강조하며 시작했죠.

숲에서 형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숲에서 돌아온 유일한 사람인 푸줏간집 딸을 만나러 가지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으니 소용없을 거라는 얘기 또한 듣지만요.

푸줏간집 딸 아이렌을 만나는 장면은 또다른 신호를 등장시킬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험이라는 소재와 갈등되면서 가족에 대한 의무와 연관되고, 동시에 인간의 모든 이야기에 무난하게 연관시킬 수 있는 소재… 바로 결혼! 그래서 푸줏간집 주인 아저씨는 미쳐버린 딸의 혼처를 심히 걱정하고 있으며,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딸이 낯선 남자와 함께 숲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주인공에게 딸을 책임지겠다고 약속시키는 반강제적 약혼을 시켰습니다.

아이렌과 숲에 들어온 주인공은 말하는 토끼를 붙잡아 취조(..?)한 끝에 (이 과정에서 사냥꾼으로서의 능력과 모험자의 기지를 활용하면서 제가 원하는 동화적이이면서 무겁지 않은 분위기 연출) 아이렌의 안내와 토끼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실종시키는 장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숲의 주인이라는 수호정령으로, 사람들이 숲을 파괴하는데 분노해서 숲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영혼을 영혼의 우물에 가둬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종자들은 자기 영혼이 갇힌 영혼의 우물을 떠날 수가 없었고, 숲을 헤매다 구출되었던 아이렌은 말 그대로 혼이 나간채 계속 영혼의 우물로 돌아오려고 애쓴 것이죠.

이런 식으로 숲을 떠난 주인공과 숲에 남았던 형, 그리고 형제간의 갈등이라는 신호를 건드려둔 후 절정 부분에서는 구네님의 멋진 문제해결을 지켜보면 그만이었습니다. 스스로 숲을 지키고 숲과 더불어 살아가겠다고 약속한 주인공의 진심은 숲의 주인의 분노를 잠재우고, 영혼의 우물에 갇혀있던 영혼들이 풀려나면서 주인공의 형을 비롯한 실종자들, 그리고 아이렌은 모두 제정신을 되찾습니다. 칼의 결정은 가족에 대한 의무와 그에 부수되면서 모험과 대비되는 ‘정착’이라는 문제, 그리고 숲이라는 신호를 살리는 것이기도 했죠.

그리고 실종자들의 귀환 (당면한 문제 해결), 주인공과 형의 화해 (형이라는 신호 해소), 그리고 주인공과 푸줏간집 아가씨와의 썸씽(..?)으로 (로맨스라는 보편적인 소재, 숲에 정착하기로 한 주인공의 결정과 연결, 가족에 대한 의무와 모험 사이의 갈등 해소) 영혼의 우물 단편은 끝을 맺습니다.

여러모로 이 단편은 실종 문제라는 과제의 해결 뿐만 아니라 주인공 자신도 약속의 책임을 지고 형과 화해하는 등 내적으로 성장을 이룬 꽤 깔끔한 단편으로 기억합니다. 설명한 바대로 주인공 설정을 통해 드러난 신호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고요.  당연히 참가자의 좋은 의사결정이 아니었으면 나오지도 못할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구네님도 저도 저걸 다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말한대로 직관적 비약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이니까요. 하지만 참가자와 별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걸 참가자에게 보여주는 방식보다는 주인공 설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부드럽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신호의 해석과 구현 과정에서 참가자와 진행자의 취향과 관심사가 둘다 들어가니 서로 즐거울 수 있는 거죠.

주인공이 여럿인 플레이라면 신호를 엮어가는 방식을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시기에 진행했던 라이테이아 전기에서는 세 주인공을 초창기에 엮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주인공 중 하나인 니콜라이는 뉘우친 도둑으로서 양녀를 위해 큰 돈을 벌려고 하고 있었고, 또 하나인 아리에는 여사제였다가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고, 세번째인 케사르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죠. 그래서 이 세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아리에가 팔려가는 밤에 니콜라이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고용되었고, 케사르는 아리에와 함께 여행하면 친부모를 찾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상태에서 우연히 그 장소를 지나게 했습니다.

물론 신호 중심의 진행에 대한 글에서 밝혔듯 이러한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참가자의 능동성을 요구합니다. 영혼의 우물에서 칼이 ‘음… 별로 형을 찾고 싶지 않아. 술이나 마시면서 뭔가 다른 일이 생기길 기다리자.’라고 한다든지 라이테이아 전기에서 니콜라이가 ‘위험해 보이니까 돈은 포기해야지’라고 한다면 진행자는 난감해집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신호를 주는 것이겠지만, 다른 신호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난감함은 더욱 깊어집니다. 신호 중심 진행에서 진행자가 준비한 이야기는 주인공의 목적과 욕구를 통해 표출된 참가자의 흥미에서 나오는 것이고, 참가자가 이 흥미를 잘못 표시했거나 흥미가 없으면서 진행자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더이상 진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신호 중심 진행에서 이야기는 참가자 혹은 주인공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진행자가 상황을 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스스로 행동하며 사건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뭐 언제든 막힐 수는 있고, 그럴 때면 주인공이 반응할 수밖에 없게 진행자가 위기상황을 던져주는 것도 늘어지는 진행을 활성화시키는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참가자가 반응하다 보면 진행자가 또 그 반응에 반응할 빌미가 생기고, 그런 식으로 플레이가 이어지니까요.

참가자가 진행자가 주는 모든 신호를 거부하면서 위기상황에 빠뜨리면 불평한다면 그건  결국 플레이하기가 싫다는 얘기니까 맞아야 됩 플레이의 기본적인 사회계약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여자간 대화로 풀어가야 할 문제이지 더이상 진행 방식과 같은 플레이 내적 문제는 아닌 것이죠.

신호 중심 진행의 예만 들려고 했는데 결국 원래 글의 2부에 가깝게 됐군요. 어쨌든 제가 진행하는 방식, 내지는 지향하는 이상은 이런 것입니다. 당연히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법도 많이 있겠고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저와 방식이 다른 CB마스터님의 글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듯 다른 분들도 생각해볼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바가 없죠.

설정 중심의 캠페인 제작

다음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반쿠에이씨의 Flag Framing 기법과 Conflict Web을 접목시킨 것입니다. (블로그가 사라져서 archive.org 저장본 링크 겁니다. 위에서 7번째, 8번째 글입니다.)

1. 개괄

캠페인 제작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설정에서부터 쌓아올리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실은 주인공 설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자의 관심방향을 보여주는 신호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참가자의 관심방향에 대한 신호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대상 그 자체, 두번째는 일정한 주제의식 혹은 감정선. 첫번째 부류의 예로는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조연이나 장소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주인공의 고향 플레인이라든지,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쌍둥이 언니라든지. 이러한 신호는 캠페인에 넣기가 비교적 간단하지만, 언제나 등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입니다. 캠페인 세계의 개연성이나 각 인물의 활동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등장시키기 힘들 때가 많으니까요.

여기에서 두번째 부류의 신호가 중요해집니다. 주제의식과 감정선은 보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캠페인 내에서 계속 끌고갈 수 있으며, 적당히 엮고 대립시키면 주인공들의 협력과 갈등관계를 보다 공고히 묶는 수단이 되니까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있다고 하면 정확히 어떤 어린아이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고, 어린아이를 위해주고 도와주는 상황을 계속 던져주면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상을 등장시키는 것보다 한결 유연한 진행이 가능합니다. 여기에다가 다른 주인공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넣는다든지, 또다른 주인공의 호기심이 동할 소지를 넣는다든지 해서 주인공들의 신호를 서로 엮어볼 수 있겠죠.

주인공끼리 신호를 엮는 방법을 사용하면 구체적인 대상 신호, 즉 첫번째 부류의 신호를 사용할 때도 그 신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주인공들 역시 개입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이 다른 주인공의 정체성 갈등과 연관된다든지 말이죠.

2. 신호 파악

참가자가 보내는 신호를 파악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인물 제작 과정에서 어떤 얘기들이 나오는지, 어떤 설정에 참가자가 흥미를 보내는지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가족 얘기를 많이 한다면 그 주인공의 이야기에는 가족을 개입시키면 참가자의 흥미를 끌 공산이 큽니다.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와 게임 세계 사이의 일종의 인터페이스이며, 참가자에게 무엇이 흥미로운지 하는 하나의 필터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인물 제작 과정에서부터 진행자가, 그리고 가급적이면 팀 전원이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발상을 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신호 중심 캠페인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많은 RPG 규칙에서는 캐릭터 시트 자체도 신호를 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성취 플레이는 참가자의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능력치와 인간관계 역시 이를 보조하는 신호로 기능하지요.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은 특히 열쇠가 신호 표시의 용도가 강하고, 캠페인 중 신호를 발동할 때마다 경험치가 쌓인다는 점에서 전술적 판단과 신호 활용을 강하게 엮고 있습니다. 페이트 (FATE) 혹은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면모에 그대로 신호가 드러나며, 참가자가 극점수라는 자원을 소모해서 능동적으로 신호를 발동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합니다. 겁스 (GURPS)의 장단점 역시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수가 비교적 많아서 그중 어느 것이 중요한지 가려내려면 참가자에게 더욱 열심히 귀기울여야 하겠지만요.

물론 인물과 별개로 참가자 자신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는지, 어떤 로망을 가지고 있는지.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의 관심거리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지만, 참가자가 원하는 것은 주인공 설정에 전부 포괄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이 사람은 적당히 코믹한 소년물 성향이구나. 이 사람은 극적이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등등.

주의할 것은, 참가자의 관심사에 중점을 둔다고 해서 진행자가 참가자 입안의 혀처럼 굴면서 진행자 자신의 관심사나 로망을
희생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진행자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캠페인을 만들어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캠페인에 진행자의 관심사가 반영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참가자의 신호에 신경쓴다는 것은 여기에 더해 참가자도 정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도록 캠페인을 만들어간다는 얘기일
뿐이죠. 신호는 참가자에게서 나오되 이 신호를 캠페인상에 해석하고 구현하는 것은 진행자의 역할이니까요. 인물 제작 단계에서부터 진행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3. 캠페인 준비와 진행

이렇게 신호를 추출해 내면 (‘가족’ ‘고향 플레인’ ‘쌍둥이 언니’ ‘어린아이를 좋아한다’ 등등) 그 신호에서는 다시 캠페인에 활용할 수 있는 인물과 장소, 이미지, 주제의식 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호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외에도 주제의식이나 감정선에서도 또다시 인물과 배경을 추출할 수 있지요. 조연들에게는 각각 주인공에게 바라는 바, 목표와 자원, 한계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주인공의 신호와 관계되는지 재확인합니다. 장소 역시 비슷하죠. 신호 관련성, 특색, 모험에 활용할 수 있는 요소, 이 장소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조연 등을 준비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들이 준비되면 진행자는 주인공 한명 혹은 그 이상의 신호가 개입된 상황을 던져주고, 참가자들은 자기 관심사가 직접 개입돼 있으니 그 신호를 쫓아 반응할 것입니다. 조연들은 그들 각각의 목표와 주인공에게 바라는 바에 따라 주인공들의 행동에 다시 반응합니다. 이 조연들은 주인공의 신호에서 추출한 것이니 이들의 행동은 다시 신호를 발동하게 될테고 (그러지 않는다면 진행자는 다시 신호가 발동될만한 상황을 던지면 되죠), 또 주인공들이 행동하면 조연들은 반응… 하는 식으로 캠페인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더이상 진행자는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역할을 맡아 상황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면 되니까요. 다만 그 인물이 한명의 주인공이 아닌 여러명의 조연일 뿐.

4. 한계

이와 같이 신호 활용은 캠페인 제작과 운용의 강력한 도구이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바로 참가자들이 신호를 쫓으며 적극적으로 뭔가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진행자로서의 저는 능동적인 참가자에게 기대는 면이 있으며, 참가자가 수동적이면 속수무책이 된채 쩔쩔매게 됩니다. 인물 제작 단계라든지 캠페인에 대한 토론 단계에서 분명히 이게 신호다! 라고 확신하고 진행하는데 정작 참가자는 신호를 쫓아오지도, 활용하지도 않으면 난감해지지요.

예를 들어 지금 진행하는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에서는 주인공들을 엮을만한 꺼리가 나름 풍부하게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그렇지 못해서 당황중입니다. 주인공 중 한명은 자기 고향 플레인을 찾으려고 하고 있고 이 동기를 열쇠로도 택했기 때문에 경험 많은 플레인워커인 다른 주인공과 쉽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고향 플레인에 대한 것은 일언반구 나오지조차 않아서 당황.

엮을 거리가 부족한가 염려되어서 약간 논리적으로 무리를 해가면서 두 주인공에게 공통으로 임무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 임무는 주인공 중 하나에게는 자기 고향 플레인을 찾는데, 다른 하나에게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접근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암시도 주었습니다…만, 역시 입질이 없더군요. 결국 주인공들끼리 별다른 접점이 없이 서로 겉도는 동안 진행자는 고민이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세번째 주인공을 추가하면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넘친다는 설정이니 어디든 쉽게 엮어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호기심 없는 인물인 것으로 밝혀져서 또다시 좌절..(…)

이와 같이 캠페인에 대한 신호 중심 접근은 신호에 대한 진행자와 참가자의 기대치가 어긋났을 경우 캠페인이 심각하게 표류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물론 참가자를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진행자의 실책이고, 참가자가 막막해하고 있으면 강력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진행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문제는 참가자가 적극적으로 신호를 쫓아가고 거기에 다시 반응하는 방식에 익숙한 저로서는 참가자들과 나란히 막막해진다는 것이죠. ㅠ_ㅠ 참가자가 적극적이지 않으면 진행자로서 잘 기능을 못한달까요. 그래서 요즘은 신호 중심 접근이 실패했을 때 보완할만한 방법을 모색중이기도 합니다. 어떤 진행 수단도 완전한 것은 없으니까요.

언더월드 16화 감상

언더월드 16화 플레이 감상입니다.

지연의 병문안과 유미나에 대한 문의를 위해 민설, 희연, 리이는 민랑을 태우고 병원으로 향합니다. 도착한 그들은 민랑에게는 먼저 지연의 병실로 올라가라고 한 후 경비 할아버지에게 그때 리이에게 받은 신분증에 대해 묻습니다.

여기서 민랑을 먼저 올려보내자는 리이의 판단이 화근이 됩니다. 사실 뭐, 민랑이 자세히 알아서 좋을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랬지만요. 역시 피보호자는 CP값을 해야..(퍽)

할아버지에 따르면 신분증은 그 다음날 자리를 비운 사이 없어졌으며, 그 신분증에 나오는 여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병원 증축 얘기가 나오자 질색을 하며 아침 일찍부터 원장실을 찾는 사람들에 얘기를 하죠. 군번표를 건네받자 할아버지는 리이의 예지에서처럼 눈물을 흘립니다.

6·25에 참전한 할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2005년에 그 자신 할아버지라는 건 사실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김정남씨 본인도 대충 6·25 때 참전이 가능했을만한 나이인 것 같은데 말입니.. 게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물론 슬프긴 하지만 5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저렇게 슬퍼할 사유인지도… (아니면 내가 비정한 건가!)

속보! (..) 사실 김정훈씨는 김정남씨의 형님으로 밝혀지다! (퍽)  제노님이 그때 실수로 할아버지라고 치셨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전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병실에 올라가자 뜻밖에 아무도 없고, 때마침 시준이 들어와 지연이가 아침부터 안 보여서 랑이의 부탁으로 찾으러 내려갔다 왔다고 합니다. 민랑이 안 나타나자 민설은 안절부절 못하고… 리이는 병실 안에, 특히 지연의 침대 중심으로 강한 영기를 느끼는데, 희연과 민설이 수색해본 결과 전에 붙였던 부적은 모두 찢어져 있었죠. 리이는 지연이 빙의되어 민랑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립니다.

여기서 시준의 말과 17화에서의 지연의 말이 모순되는 기분이… 그 점에 대해서는 17화에서 다루기로 하죠.

세 사람은 지연과 민랑을 찾기 위해 뛰쳐나가고, 리이는 전처럼 3층과 5층 사이에서 실마리가 있을까 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영기는 느껴지지 않고, 옥상도 이번에는 조용합니다. 내려오는 길에 6층에서 지연을 본 일행은 쫓아내려가지만 지연은 그들의 부름에 대꾸도 없이 5층으로 빠지지요. 급히 쫓아가도 지연은 보이지 않고, 대신 희연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것을 눈치챕니다. 멈춰선 곳은 지하 2층.

꼭 필요할 때는 없는 영들이었습..(퍽) 이때의 지연의 행동은 빙의가 아닌 이상 설명하기 어렵죠. 조금 있다 나올 시준과 마찬가지로 원령들의 속임수일 수도 있지만요.

민설과 리이가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동안 희연은 5층 카운터에 들러서 민랑을 찾는 원내 방송을 부탁하고 계단으로 내려가던 도중, 비상구 문이 쾅 닫히고 층계참의 모든 불이 꺼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때마침 핸드폰 전원까지 떨어지고… 전파방해라면 몰라도 전원이 떨어진다는 건 자체 전원이 있는 핸드폰인만큼 영현상으로 좀 설명하기 어려울듯 합니다. 갑자기 밧데리 방전이 되는 영현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희연이 핸드폰 충전을 잊었다는 건데, 보통 그런 행동은  화장실 가고 목욕하는 것과 비슷하게 굳이 선언하지 않아도 처리되지 않나요? 이런 설정은 자칫하면 참가자들이 핸드폰 충전 같은, 캠페인과 별 상관없는 세세한 데 신경을 쓰는 등 소심해질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실제 전원이 떨어진 것은 아닌 것도 같은 게, 나중에 17화에서 희연의 핸드폰은 기사회생해서 악령들에게 문자를 받는 기염을 토하거든요! (…) 하지만 희연이 본 액정표시가 설사 눈속임이었다 하더라도 리이가 전화했을 때는 ‘사용자 전화기가 꺼져있어..’ 멘트가 나왔었고 말이죠. 결국 영들이 방전시켰다는 얘기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군요. 영에게 받는 문자는 전원이 안 켜져도 가능할지 모르고 말이죠. 여러모로 전파방해가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저는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해서..(…)

지하 2층에서는 길이 양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민설과 리이는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흩어지지요. 리이는 중년 의사와 유사장이라고 불리는 덩치큰 사내와 마주치고, 민설은 약품저장고 안에 서 부러진 주사바늘을 어깨에 꽂은 시체를 발견합니다.

의사와 유사장은 이곳은 일반인 출입 금지라고 나가라고 하고, 리이는 처음에는 사람을 찾기 전에는 못 간다고 완강히 저항하다가 완력으로 쫓겨날 지경이 되자 사실 사람을 찾는다는 건 눈속임이고 자신은 병원재단과 정림기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필사적으로 둘러댑니다. 유사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데리고 나가겠다며 의사를 먼저 올려보내고 리이에게 더 자세한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요. 경비업체 사장인 그는 이 병원과 이사장 주변에 워낙에 지저분한 일이 많아서 곧 손을 떼려고 한다고 그녀에게 토로합니다. 그때 의사와 유사장이 나왔던 문 저편에서 ‘깡! 깡!’하는 타격음과 함께 금속 문이 패이기 시작하고, 강한 원념을 느낀 리이가 저게 뭐냐고 추궁하지만 유사장은 일단 올라가면 얘기해주겠다고 달래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립니다.

이번 세션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리이가 떠드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죠. 특히 이 장면에서 그게 드러납니다. 게다가 유사장의 반응도 석연치 않아서, 정림기업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허세가 통했다면 병원장이 싫어 죽겠다는 얘기는 보통은 하지 않을 것 같고, 그 허세가 거짓말로 드러났다면 어째서 그런 서툰 아가씨에게 굳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걸까요. 깡패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유사장인지라 거리의 법칙을 시도하기는 했는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아직도 애매합니다.

한편 민설은 국장에게 전화해 시체의 존재를 알리고, 국장은 성모병원 경비업체가 조폭 계열이라면서 계속 조사할 것을 지시합니다. 민설은 민랑을 찾아 약품저장고에서 뛰쳐나오던 중 유사장과 리이와 마주칩니다. 뛰어오는 두 사람 뒤로는 차례대로 조명등이 꺼지고, 세사람은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에 타고 올라갑니다.

앗! 민랑을 찾아야 해! 앗! 귀신이 쫓아온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쫓기느라 바쁜 일행이었습…

희연이 층계참에서 너무 무서워서 흐느끼던 중 시준이 나타나고, 울며 매달리는 희연을 그는 따스하게 껴안아 줍니다. 시준이 목발을 안 짚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채 희연은 몽롱하게 의식이 멀어지지요.

이게 진짜 시준이었다면 꽤나 쾌재를 부를만한 상황이었지만, 불행히도 시준은 아무것도 몰랐죠..(…) 울며불며 매달리는 것은 그런 무서운 상황에 처한 평범한 아가씨에게 꽤 어울리는, 좋은 연기였다고 봅니다.

1층으로 올라온 민설은 민랑이 여전히 안 보인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하고, 리이는 유사장에게 사정 얘기를 듣습니다. 그는 병원과 같은 재단인 제약회사에서 인간의 생체조직을 원료로 한 약을 만든다는 소문을 전해주면서, 부하직원 하나가 약품창고가 있는 지하 2층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안 보인다고 합니다. (담당 경비가 없었으니 민설과 리이가 들어갈 수 있었던 거겠죠. 더불어 민설이 발견한 시체의 신원은 대충 확인된듯 하군요.) 그리고 자신이 지하 2층에서 본 보관중인 장기들은 기증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지나치게 많다는 의혹을 표명합니다.

보통 장기기증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고, 의학적 연구를 위해 건강한 장기를 기증하기에는 장기이식에 대한 수요가 너무나 많죠. 따라서 병원 지하에 쌓아놓은 저건 불법일 가능성이 상당히… 게다가 이식용 장기는 쉽게 못쓰게 되기 때문에 동의서에 서명한 사람보다 필연적으로 이식받는 사람이 적으므로 은폐하기도 쉽겠죠.

리이와 민설은 희연이 전화연락이 되지 않자 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하며 층계로 올라가려 합니다. 계단으로 들어선 순간 등뒤로 비상구 문이 꽝! 닫히며 조명이 꺼지는데…

전반적으로 스릴있고 재밌는 플레이였습니다. 공포영화 느낌이 나기도 했고요. 가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야 뭐, 주변이 산만할 때 진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저도 알기 때문에..^^

언더월드 11화 – 감상을 빙자한 잡상

원래 언더월드 11화 요약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너무 길어서 요약의 가치는 없다고 판단한 초본입니다. 대신 플레이 감상용으로 활용해 보겠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병원 옥상의 원령들을 진정시킨 일행. 옥상에서 내려오다가 리이는 다른 사람과 부딪혀서 계단에 데굴데굴. 리이와 부딪힌 사람은 뜻밖에도 엘리사가 문병왔다가 못 찾은 미카엘 고교 학생 서지연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지연이는 옥상에 뭔가 있는 걸 느끼고 올라오는 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그렇게 해서 다시 506호로 내려온 일행. 중간에 주사맞기 싫다고 도망치는 미라 아저씨 전태일 요원의 촌극이 벌어지고, 그 바람에 열린 문으로 보이는 것은 민설의 두 동생 민랑과 민상. 민랑은 친구인 지연을 문병온 것이었지요. 민랑은 지연에게 공책 필기한 것을 주고, 비를 쫄딱 맞은 민설의 꼴을 보더니 오빠가 아프면 자신과 민상은 누가 먹여살리냐며 구박합니다.

전태일 요원은 소싯적의 로키와 똑같은 짓을 하는군요..(..) 간염 예방주사 맞기 싫다고 울며불며 도망치는 꼬맹이를 꼬맹이 아빠와 주사기 든 간호사가 쫓아가는 장면은 너무나… 웃겼을 것 같습..(퍽)

민랑은 아이같지 않은 완전 꼬마 숙녀군요. 공부 잘하고, 예쁘고, 남 배려 잘하고… 무심한 보호자 밑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

꼬박꼬박 졸던 리이는 갑자기 뭔가를 느끼고 눈을 뜹니다. 그리고 지연 바로 옆에 영이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지연 역시 느끼는지 두려운 표정. 리이는 영에게 왜 지연에게 붙어 있느냐고 묻지만 영은 자기 마음이라며 달려들고, 리이는 지연을 감쌉니다. 다행히도 늘 하고 다니는 고딕펑크메탈풍 더블크로스(..) 덕인지 영은 일단 도망갑니다. 민랑은 지연의 어머니가 무당이기 때문에 지연이도 가끔 영적 현상을 목격하고, 그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다고 설명합니다.

민랑의 완벽성에 항목 하나 추가: 따돌림당하는 학생도 감싸준다! 뭐랄까.. 싫어할 수도 없지만 또 너무 빈틈없어 보여서 다가설 수가 없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더 살아 숨쉬는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진행용 소도구라는 느낌이 듭니다.그리고  그게 나쁜 건 아니죠. 진행용 도구로서의 주변 인물도 분명히 필요하니까요. 어차피 주변 인물은 근본적으로 도구일 뿐이기도 하고…

아무리 가라고 해도 붙어다니는 영 때문에 무서웠다며 리이에게 매달리는 지연. 왜 엄마가 저런 잡귀를 안 쫓아줬느냐는 리이의 물음에 지연은 엄마가 큰 굿을 한 이후 벌써 몇달 동안 누워계신다고 답합니다. 게다가 도와주러 온 다른 무속인들도 모두 어머니를 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엘리사의 환청들은 지연에게 붙은 건 저급 기생충일 뿐이라고 하고, 너네랑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하는 엘리사에게 절대 아니라고 펄쩍 뜁니다. (실체가 없는 것도 뛸 수 있나?) 결국 이런저런 안을 모색하다가 리이는 지연에게 고딕펑크메탈풍 더블크로스를 걸어주고 침대에 부적을 붙여둡니다. 혼자가 아니라며 지연을 안심시키는 리이에게 저차원적 딴지를 거는 기생충들!

정신적 구충제가 있다면 엘리사에게 먹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리이였습..

이때 주사맞고 살아돌아온(..) 전 요원은 민설에게 기다리던 물건이 왔다고 알립니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길에 3층과 5층 사이에서 차갑고 음습한 영기를 느낀 리이는 아직 병원의 귀신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가웃데 손가락을 들어 영들을 협박하고..(..) 헤어져서 버스타고 집에 가는 희연만 빼고 민랑의 길안내로 용인시 외곽의 산골에 있는 지연네 집으로 향합니다. 민기사 노릇하며 정작 정보수집은 못하고 있는 비운의 요원, 그 이름은 민설.

개봉박두! 민설의 고유장비가 곧 등장합니다!

이번 회에 리이양이 넘어진 횟수를 세어볼까요.

1.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부상자 (지연) 깔아뭉갬
2. 지연의 목발에 걸려 제풀에 넘어짐
3. 주차장으로 뛰어나가다가 엘리사가 넘어질까 걱정하는 순간 혼자 넘어짐

민설의 말마따나 몸이 강철 아니면 살기 어려운 아가씨인 겁니…

민설이 민기사 되느라 자기 일 못하는 건 어떻게 보면 재밌지만 어떻게 보면 일행 개념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리이가 조사대상인 점도 있지만, 어쨌든 그에게 일단 주어진 임무는 정림기업의 뒤를 캐는 것이니까요. 일행 개념의 허와 실에 대해서는 차후 다른 글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병원 순환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희연은 멀미체크에서 대성공을 하는 바람에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저녁 장사 준비를 돕습니다. 왠지 남은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들이 없다고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가자 눈에 보인 것은 쓰러진 화분과… 안형사와의 놀이공원 데이트 때 나타났던 걸묘 선생! 이곳 터줏대감 고양이들을 17:1로 싸워 이겼다고 자랑하는 걸묘를 희연은 안고 가서 목욕부터 시킵니다. (“냐옹- 물은 싫다냥-“)

희연이 일행과 분리된 것은 이번 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주인공이 각자의 생활과 목표가 있는 캠페인에서 일행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했지요. 희연은 수줍음을 타는데다 엄마가 집에서 가게일로 혼자 바쁜데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학생네 쳐들어가기는 좀 무리였겠죠. (리이가 끌고갈 걸 그랬나…)

물론 내적 일관성 (희연은 일행을 따라갈 이유가 없다)과 진행상의 편의 (일행은 가능하면 유지해야 한다)는 좀 다르긴 합니다. 내적 일관성과 진행상의 편의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는 것 자체도 하나의 문제입니다만.

조용한 일상 속의 희연은 참으로 편안해 보이는군요. 저 편안함을 어떻게 깨부시고(..) 저런 희연을 모험 속으로 끌어내느냐 하는 게 관건이겠죠. 그 과정에서는 진행자의 역할도 크지만 참가자의 적극성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러모로 말하는 고양이는 좋은 시작인 겁니.. 희연의 놀라는 연기가 재밌었어요. ^^

데이트 외전에 나타났던 걸묘 선생이 본 캠페인에 재활용된 게 매우 재밌군요. 외전과 본편 사이에 앞으로 어떤 연관이 나타날까 기대됩니다. 아직 동물 대화를 못하는 희연하고 천연덕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걸묘옹의 정체는 오래 묵어서 요괴화된 고양이가 아닐까 팀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연 어머니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간 일행. 파리한 안색의 어머니는 간신히 일어나 앉아 엘리사를 비롯한 일행을 맞습니다. 한편 엘리사와 리이는 기생충들의 지적으로 지연 어머니가 무당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영력의 수위가 낮아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지연 어머니는 리이와 지연이를 비롯해 병원에 있는 귀신 문제를 얘기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민설에게 리이는 병원에선 아무것도 못해준다며 자신의 생기를 지연 어머니에게 전해서 자연치유가 가능한 수준까지 소생시킵니다. 여전히 영력은 극도로 저하된 상태이지만요. 편히 잠든 지연 어머니를 두고 일행은 조심스레 나옵니다.

“난 천재야! Genius! 열라짱멋져! Who yo mama? Who da maaaan?”을 외치는 리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건 착각인 겁니…아무렴, 환청이야.. (절레절레)

그 굿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답답해하는 리이에게 엘리사는 자신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은 알리지 않고 그때 썼던 물품이나 장소를 알아보자고 합니다. 민랑에 따르면 지연 어머니는 중앙도로에서 일어난 지연의 사고가 동티 (귀신 때문에 나는 탈) 같다며 굿을 했는데 그때 쓰러졌다고 합니다. 무구 같은 것은 집 옆의 사당에 모셔져 있을 거라고…

사당에 들어간 세 사람. 리이는 사당 안에 영기가 맴돌지만 위험한 것은 없음을 감지하고, 역시 영기가 서린 부채를 집어듭니다. 지연 어머님처럼 손상된 신기… 엘리사는 리이에게 부채를 자세히 볼 수 있겠냐고 하고, 부채를 잡은 순간 과거의 영상을 보게 됩니다. 부채춤을 추다가 쓰러지는 지연 어머님과 붉은 달, 그리고 쓰러진 형체 뒤로 다가온 흐릿한 영상, 강렬한 푸른 빛.

오, 저 불길한 붉은 달 또 나오는군요. 엘리사의 능력이 이 장면에서 십분 발휘된 것도 기쁩니다. 일행간에 서로 정보교환이 안되고 있는 건 아쉽지만, 정보 교환이 안되고 있는 제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있는 건 멋집니다.

리이는 기생충들하고 옥신각신하다 부채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누구하고 얘기하냐는 민설한테 엘리사를 가리키며 기생충과 얘기한다고 했다가 민설한테 혼납니..(..) 사고 난 지점으로 가보자는 엘리사의 제안에 민설은 혼자 차로 가서 국정원 DB에 접속한 후 중앙도로에서 사고 잦은 지점을 찾아냅니다. 더불어 전태일 요원이 조사한 정림기업 정보 역시 전달받고 자괴감에 빠집..

역시 전요원, 안 짤리고 국정원에 붙어있을 수 있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아름다운 청년!) 이 일로 민설은 ‘전요원이 날 비웃고 있다’ -5짜리 피해망상에 빠졌다는 제노님의 전언이..(퍽) 민설이 리이를 야단치는 대목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

세 사람은 민랑이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고, 지연 어머니는 아주 편히 주무시고 계신다며 오늘 여기서 자고 등교하겠다는 민랑을 말리려다 민설은 전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와 있었는데 민설이 무심해서 몰랐다는 민랑의 말에 반대가 쑥 들어가고..  궁색하게 변명하는 민설에게 오빠 바쁜 거 이해한다며 민랑은 웃어줍니다. 석양빛 속에 민설, 엘리사, 리이는 사고 지점으로 향합니다.

민랑의 완벽성에 또 한, 아니 두 항목 추가합니다..ㅋㅋ (자기 시간 내가며 친구 도와주기, 오빠에 대한 이해심) 더불어 여동생한테 지고 사는 민설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리이가 말썽꾸러기 여동생 노릇 할테니 힘내십! (아니 그건 좌절이잖..)

다음 화에서는 고속도로 귀신과의 대격돌! 희연도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밤에 사고 잦은 커브길로 차를 몰고가는 민설의 SM5가 무사하도록 우리모두 빌어봅시다.

규칙 없는 (No-Rule) 플레이에서 배울 수 있는 점

어제는 초보자님과 규칙 없이 진행하는 1:1 플레이를 조금 진행했습니다. 그때 대오각성…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깨달은 점이라면 무규칙 플레이에서 배울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가자 선택의 합리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무규칙 플레이에서 결과 판정을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참가자의 선택, 혹은 주인공의 선택뿐이니까요.

어제 진행한 플레이에서 증권회사 직원 유은호는 한밤중에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주차장의 으슥한 구석으로 가봅니다. 여기서는 조폭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은호의 존재를 눈치채는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규칙이 있는 플레이였다면 보통 기척 죽이기와 지각 대결 판정을 했겠지만, 무규칙 플레이에서는 그럴 자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에 띌만한 행동’을 하면 눈에 띄도록, ‘눈에 띄지 않을만한 행동’을 하면 조폭들의 눈에 안 띄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선택의 합리성에 결과를 맡기기로 한 것이지요. 은호는 시종일관 눈에 안 띄게 어두운 통로 쪽에 있었으므로 결국 조폭들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핸드폰으로 112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핸드폰이 매너 모드로 돼 있는지, 사람 죽이느라 바쁜(…) 조폭들이 과연 조용히 한쪽 구석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인지 등을 고려했습니다.

다음, 조용히 집 쪽으로 가는데 조폭들이 하필이면(!) 은호가 있는 통로를 통해 현장을 떠날 때는 조폭들의 걸음이 꽤 빠르니까 달리지 않으면 따라잡힐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달린다면 그 소리가 지하주차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울려서 은호의 존재를 들키게 할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지하주차장에 완전히 갈림길 없는 통로라는 것도 있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 좌우로 빠지는 통로도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은호는 좌측 통로로 빠져서 조폭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규칙을 사용하는 플레이라도 위와 같은 진행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반 플레이에서 기능을 굴리고 대결판정을 하는 와중에서 제가 종종 잊었던 한가지 요소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상식’입니다.

분명히 은호가 기척을 죽이는 실력, 조폭들의 지각 능력에 따라 위 장면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위의 장면에서 기척 죽이기와 지각 판정을 하면 재미가 있었을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쩌면 위 상황에서 대결 판정을 하는 것은 참가자의 판단을 짓뭉개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요? 즉 진행자가 제시한 상황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위험을 무릅쓰지 않겠다는 참가자의 합리적인 판단 (바로 아파트로 올라가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어두운 통로에 서있겠다는 판단)에 오히려 벌을 주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대결 판정의 결과가 참가자의 승리였다 하더라도,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 것만으로도 말이죠. 저런 상황에서 판정을 한다면 앞으로 참가자는 모든 위험이나 흥미의 소지를 피해버릴지도 모릅니다. 진행자가 과연 그걸 탓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참가자와 주인공에게 완전한 안전과 성공의 지대를 주는 것은 진행자와 참가자 사회계약의 중요한 일부인 것 같습니다. 학대당하는 참가자 현상 (내지는 캠페인을 떠나는 참가자 현상)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이 글은 무규칙 플레이가 규칙 있는 플레이보다 우월하다든가, 앞으로는 규칙을 포기하겠다는 요지는 아닙니다. 규칙과 주사위 굴림이 상식에, 그에 의거한 참가자의 합리적인 선택에, 그리고 진행자가 그 합리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를 물먹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회계약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주장일 뿐입니다. 규칙이 재미에 우선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몰라도 진행자로서의 저는 그런 주객전도에 빠지기 쉬웠다는 반성입니다.

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면…(1)

뭐, 지난번에 제 진행의 문제점을 자가진단해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어떻게 단점만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렇다고 해주십시…) 어제 정숙조신님과 1:1로 트롤베이브(Trollbabe)를 진행하면서 제가 진행자로서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진행 작업은 다른 분한테 넘겨받은 거라는 상당히 뻘쭘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앞뒤연관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주변인물들 이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놀이기록을 읽어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파악하면 로키가 아니죠~(퍼벅) 어디까지나 즉흥, 또 즉흥인 겁니다!

아, 이 글은 제가 잘하는 것에 대한 얘기였죠? 넘어갑시다.(…)

내용

주인공은 ‘셀리나’라는 트롤베이브 마법사입니다. 셀리나는 스승이자 연인인 아무개씨가 병에 걸리자 그를 치유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요. 트롤과 인간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는 트롤베이브인 셀리나는 늘 자신의 트롤 혈통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느 갈림길(?)에서 기묘한 노파를 만납니다. 노파는 셀리나에게 말하죠. 치유약을 찾으면 스승 말고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그러면 트롤 혈통에 대한 얘기를 해주겠다고요.

또다시 얼마간을 가다가 셀리나는 무너진(?) 다리에서 팀이라는 트롤과 마주칩니다. 팀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치유약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없다고 하죠. 셀리나는 팀을 도와 주지만, 팀은 치유약이 있는 데로 그녀를 데려다 주는 대신 트롤 마을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트롤 장로는 셀리나에게 그 장소는 트롤의 성소라 트롤이 아니면 갈 수 없다며, 아침이 오기 전에 인간을 죽여 그 피로 목욕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제가 맡았습니다)

(1회)

셀리나는 망연자실해서(아마도?) 마을을 나와 돌아다니다가 트롤 마을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인간 병사들이 트롤 마을을 공격하는 현장을 보게 되죠. 셀리나는 휘황법석한(!) 마법을 이용하여 인간 병사들을 물러나게 만들고, 셀리나에게 병사들을 죽일 것을 종용했던 트롤 장로는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해는 떠오르고…

(2회)

트롤 장로는 셀리나더러 인간이 우리 마을에 설 자리는 없다며 돌아가라고 일갈하고, 병사들의 공격 중에 어린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오열하는 동안 전사들은 보복 공격을 위해 집결합니다. 셀리나는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며 그만두라고 당부하지만, 장로는 그럼 인간들이 뭘 하든 누워서 당하라는 소리냐고 대꾸하고…셀리나는 외교로 해결할 수 있다며, 자신이 돕겠다고 합니다.

약 일주일에 걸친 교섭이 지나가고, 교섭기간에 걸쳐 조약의 조항들은 모양이 잡혀갔지만 마지막으로 서명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 지역 영주의 신하들은 트롤들과는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다며 평화조약에 서명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고…이때 셀리나는, 정말 트롤들이 그렇게 쉬운 상대일 거냐고 생각하면서 신호를 보내고, 밖의 숲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롤 샤먼들이 일제히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치고 비가 내리게 합니다. 이 광경을 본 영주는 드디어 신하들의 압박에 이길 카드를 쥔 셈이 되어서 조약에 서명하고, 셀리나의 도움에 사의를 표합니다. 더불어 다소 추근대지만 셀리나는 흥! (…)

분석

사실 저 위의 내용보다는 잡담 채널에서 진행자와 참가자가 열심히 쑥덕공모한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이게 반드시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일단 진행이 너무 느린데다가 단순히 진행자의 자신감 부족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좋은 점이라면 참가자가 원하는 것이 확실히 반영된다는 사실이죠.

우선 물려받은 진행인만큼 전 줄거리를 계속해야 한다는 점이 좀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전 진행자이신 이반님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제게는 셀리나가 자기 트롤 혈통을 찾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좀 비현실적인 갈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점을 정숙님과 상의하자 참가자분도 동의하셨습니다. 따라서 갈등의 초점을 살짝 바꿔서 인간과 트롤 사이의 폭력사태를 막는 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판정의 호흡은 제가 3번 성공하면 전체 성공으로 제안했고, 정숙님은 한단계 낮추어 2번 성공이 전체성공인 걸로 정하셨죠.

(잠시 규칙설명: 트롤베이브의 호흡조절이란 한 갈등에 승리하는데 한번의 굴림성공으로 성공할 것이냐, 두번으로 성공할 것이냐, 세번으로 성공할 것이냐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갈등을 시작하는 쪽이 제안하고, 받아들이는 쪽이 한단계 높이거나 낮춰서 최종적으로 정할 수 있죠. 즉 두번 성공으로 제안하면 사실상 상대에게 정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성공은 진행자가 서술하고, 실패는 참가자가 서술합니다. 주사위는 참가자만이 굴립니다.)

이 시점에서 규칙 이해에 대해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정숙님은 ‘서술권’이란 주인공의 행동을 포함한 모든 결과를 서술하는 걸로 이해하고 계셨고 저는 주인공 행동은 참가자가 맡되 그 나머지 (주변상황, 주변인물 행동 등)만이 서술권에 포함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트롤베이브는 대체로 참가자가 성공하는 쪽으로 확률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저는 거의 소설 쓰고 참가자는 구경하는 결과가 되는 느낌이더라고요. 원래 진행자 말이 많은 걸 안 좋아하는데다가 (저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말이 많아서..<-) 주인공을 진행자가 연기하는 건 더더욱 싫어하기 때문에 규칙 재해석을 제안했습니다. 즉 저의 해석에 맞추는 것이었죠.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

또 하나 참가자의 의견을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 게, 저는 원래 이 외교 교섭을 앞으로 몇 세션씩 걸리는 긴 얘기로 잡을 생각이었거든요. 자기 기사들이 트롤 잡는다고 병력 소모하는 게 탐탁치 않으면서도 권력기반이 약해서 별말 못하고 있었던 군터 공, 트롤들을 최대한 빨리 잡아서 자기 영지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생각하는 롤란드 경을 비롯한 기사들, 그리고 그 권력구조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트롤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둘 다이기도 한 젊은 여성 사절… (희미님, 울지 마십..)

저걸 제 맘대로 진행했더라면 참가자에게는 최악으로 지루한 시간이 될뻔 했습니다. 이미 의사소통의 채널(..말 그대로 IRC 채널)이 열려있지 않았더라면요.

다행히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싶다고 정숙님이 말씀해 주셨고, 그래서 교섭의 마지막 장면만 하고 한번 굴려서 성공하는 갈등으로 처리할까 의견을 묻자 동의하시더군요. 그래서 협동적으로 장면을 구성해서 마지막 장면 내보내고 2회를 만족스럽게 마쳤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것은?

I.

결론적으로 제가 잘하는 것은…진행 떠넘기기! (퍼억) 아니, 참가자 의견 묻기가 아닐까 합니다. 참가자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끌어내고 그걸 반영하는 것이요. 그건 한편으로는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결과물은 더 만족스럽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그건 놀이를 하는 목적에 달려있겠지만요. 모두가 협동해서 극적이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라든지 놀라움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심히 맘에 안드는 결과이겠지요.

II.

또하나…참가자에게 귀기울이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지만, 참가자 괴롭히기도 제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잘 들어보면 참가자를 괴롭힐 실마리는 참가자의 입에서 전부 나오거든요. 이번 경우도 정숙님을 결정적으로 갈등시킨 부분은 정숙님이 주신 정보에서 알 수 있었죠. 뭔가 대책이 없이는 트롤들이 인간에게 받는 대접을 그냥 넘길리가 없다고 하고, 또한 인간과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들에게 낯선 경험이다…라고 유도하자 정숙님은 그럼 셀리나가 도우면 된다고 하셨죠.

“그럼 스승이자 연인은? 치유약 가지고 빨리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트롤과 인간이 서로 죽이게 놔둘 건가요?”

전 이런 순간들이 너무 좋습니다! >_< (인간아…)

참가자는 (허깨비일 뿐인 주인공은 필요없습니다. 중요한 건 참가자) 거의 항상 두가지 이상의 극적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 욕구들을 대치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실마리는 바로 참가자가 하는 말과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역할놀이가 가진 재미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애당초 자세히 설정된 부분은 아니었으니 둘이서 협의해서 치유약을 가지고 돌아갈 시간제한을 대충 설정했습니다. 일단 연인이 오늘내일 하고 있으면 셀리나가 팔자좋게 여행 나오진 않았을테니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고, 그렇다고 몇달이고 지체할 수는 없는, 한마디로 어중간한 상황이란 거죠..(…) 따라서 셀리나는 결국 트롤들을 돕느라 여행을 일주일 지체했고, 그건 연인보다 트롤들을 돕는 걸 우선한 거겠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또다른 갈등의 축은 셀리나가 트롤로 인정받느냐였고, 그건 트롤의 성소에 있는 치유약에 셀리나가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 두가지는 오히려 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죠. 그리고 셀리나가 외교사절로써 그 지역의 인간과 트롤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는데, 트롤들이 과연 셀리나를 나몰라라 할까요?

전 이런 순간들도 너무 좋아한답니다~ ^-^♪ 선택과 갈등 끝에 모든 고민은 결국 녹아 없어지고, 그 속에 남는 건 오직 자아에 대한 긍정 뿐인 그런 순간을. 셀리나는 결국 자기 신념을 조금도 꺾지 않으면서도 트롤들에게 인정받고, 동시에 자기 은사를 도울 길을 연 것이죠. 그렇게 의도한 건 결코 아니었는데 (늘 떠들고 다니듯 전 준비 안합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이게 바로 협동 서술로서의 역할놀이가 가진 크나큰 가능성이 아닌가 합니다.

III.

마지막으로 제가 잘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묘사입니다. ‘번복할 수 없는 결론처럼 차갑고 분명한 새벽의 빛’이라든지 ‘회담장 문에 놓고 와야 했던 검을 찾아 무의식적으로 허리에 손을 뻗는 롤란드 경’ 같은 묘사는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죠. 뭐, 장식같은 것이지만 때로는 장식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

내겐 뭔가 문제가 있다

방금 즉플을 한회 마치고 왔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확인하고 싶었던 사실을 확인했지요. 제 진행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직 100% 진단됐다고 하기는 힘듭니다만…

제멋대로 붙인 시리즈명은 ‘방랑자의 노래’이며, 진행자 로키, 참가자는 미묘님과 초보자님, 사용 규칙은 안방극장 대모험입니다.

설정

그러나 별들 사이의 어둠을 떠도는 방랑자의 노래는
우주의 길고 차가운 침묵의 가슴에만 들리나니…

– 발굴작업 K11-b의 선체에 새겨진 이종족 언어를 카워드 연구원이 해석한 내용.
시구(詩句)로 보이는 이 글은 훗날 K11-b가 ‘스타페어러'(별들 사이의 방랑자)라고 명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과정을 말하자면, 미묘님과 초보자님과 함께 그야말로 즉석에서 컨셉을 잡고 그에 기반해서 1회를 시작했지요. 장르는 대충 스페이스 오페라로 잡고 거기서부터 캐메 시작.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형대로 한 척의 우주함선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로 하기로 했죠. 우주연방 제 2 내각 감사실과 우주군은 합동으로 이계 종족의 고대 함선, 나중에 스타페어러라고 불릴 배를 먼 소행성대에서 발굴했는데, 문제는 이 배의 작동 원리도 알 수 없고 작동하지도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연방의 어떤 현존 기술로도 닿을 수 없는 성능을 발휘할 기체였지만 말이죠.

다행히도 영재교육, 외계문명 연구 등 다양하고 수상한(…) 연구를 담당하는 연구시설 카워드 연구소에서 보내온 프로젝트 준책임자 이르힌 R. 카워드를 필두로 작동을 상당부분 해독해 내지만, 정작 엔진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테라에서 한 외계인 함선의 불시착의 현장에 있었고, 이후 이상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 로쉬 콜린이라는 컴퓨터공학과 학생이 우주군 소령 진샤린의 손에 강제로 끌려(…) 현장에 도착하고, 그가 컨트롤에 자리를 잡자마자 엔진은 기적처럼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배를 움직이는데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된 이르힌 R. 카워드, ‘명목상으로’ 제 2 내각 감사실 휘하 감찰관, 그리고 로쉬 콜린, ‘명목상으로’ 갑작스런 우주군 상병… 이 두 젊은이를 태운채 스타페어러 호는 외우주 탐사 임무를 맡고 출항합니다.

등장인물

주인공

이르힌 R. 카워드 – 열심히 인간인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과 유사한 외계종족입니다. 종족의 공식명칭은 출신 행성의 코드인 DEF-1031, 비공식적 통칭은 ‘퍼페티어.’ DEF-1031 종족은 항성간 항해 기술이 없던 종족으로, 우주연방과 접촉하면서 기존의 사회질서가 뒤집히고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지요. 이른바 ‘신경계 해킹’이라고 불리는 정신능력 때문에 경원시됩니다. 컴퓨터, 인간, 동물 등 주변에 신경계가 있으면 해킹해 들어가서 정보를 얻어내고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이르힌 같은 경우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카워드 연구시설에서 자라났습니다. 카워드라는 성은 연구소에서 입양한 아이라는 뜻으로, 연구소에서는 이런 식으로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아이들에 대한 후견권을 얻어 양육합니다. 어려서부터 연구대상이면서 동시에 학생이었던 이르힌은 DEF-1031 종족에 대한 차별 때문에 우주연방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출신 종족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스타페어러에서 그의 정체와 능력을 알고 있는 것은 함장과 일부 고위 장교 정도로, 신경 해킹 능력을 인간에게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락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나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종종 스타페어러의 컴퓨터 시스템에 깊이 들어가곤 하며, 방에서 키우는 곤충들의 신경계 역시 해킹합니다.

고민 – 자신의 종족을 감추고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능력
– 소수종족 □□□
– 시설 출신의 엘리트 □□□

인맥
– 제 2 내각 감사실장 로버트 D. 멘슈테트 □□□

개인 세트 – 스타페어러의 개인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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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쉬 콜린 – 테라의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지만, 어느날 이종족의 우주선이 불시착하는데 휘말리면서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추락 현장에서 죽어가던 외계인…오늘날까지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 존재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 로쉬에게 죽기 직전 자신의 기억을 덮어씌웠죠. 그때부터 로쉬에게는 원치 않았던 지식과 기억이 생겼고, 물건을 정신만으로 움직인다거나 순간 이동을 한다거나 하는 말도 안되는 정신 능력까지 생겨 버렸습니다.

그런 그를 구조했던 우주군 소령 진샤린은 군용 병원에서 치료 겸 연구를 받는 그를 관찰하면서 스타페어러의 발굴과 관련해 심상찮은 연관을 알아채고 협박 반, 설득 반으로 싫다는 로쉬를 끌고 발굴 작업이 진행되는 먼 소행성대까지 끌고 갑니다. 정 안되면 염동력으로라도 배를 움직이라는 억지와 함께… 하지만 왠걸, 그녀의 도박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져서 로쉬가 큰소리로 불평하며 콘트롤에 자리를 잡자마자 엔진은 기다렸다는듯 작동을 시작하지요. 결국 일파만파로 샤린은 스타페어러의 함장이 되고 로쉬는 원하지 않는 직책 불명의 상병이 되었습니다. (굳이 직책이 있다면 시동키?)

고민 – 원하지 않았던 능력으로 자기 삶에 대한 제어를 상실

능력
– 외계인의 능력 □□□
– 컴퓨터 구루 □□□

인맥
– 스타페어러 함장 진샤린 □□□

개인 세트 – 스타페어러의 컨트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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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인물

진샤린 – 30대 중반의 나이, 소령이라는 계급으로 연방이 희망을 걸고 있는 이종족 기술의 집결체 뉴로매트릭스 프로토타입 스타페어러의 함장입니다. 제일 잘한 일은 로쉬 콜린을 발견해낸 거라는 비아냥도 따르는 인물입니다만… 로쉬에 대해서는 마치 누나처럼 챙기고 잔소리하려는 마음과 인생을 완전히 어긋나게 한데 대한 미안함이 늘 함께합니다. 하지만 연방을 위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아니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르힌에 대해서는 한편 스타페어러에 대한 권한을 분할하고 있는 감사실 사람이고 또 퍼페티어이기 때문에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스타페어러 식구이니까 신뢰하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다소 감정적이고 과격한 성격으로, 사실 별로 군인답다거나 함장답지는 못한 사람.

로버트 D. 멘슈테트 – 제 2 내각 감사실장으로, 중후한 인상의 50대 신사. 연방 우주군과 함께 스타페어러에 대한 권한을 담당하고 있는 또 한 축. 뉴로매트릭스 프로젝트에 있어서는 이르힌의 직속 상관이기도 합니다. 연방 정치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고, 특히 프로젝트 책임자를 맡고 있는 스타페어러의 일에는 언제나 관심이 지대합니다.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인물. (..이라지만 PD도 모릅니..)

존 카프 – 스타페어러 수석 엔지니어. 요즘 들어 보조 파일럿 크란 러델과 영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자야 카트만두 – 스타페어러 보조의료원. 카프와 러델 사이에 생긴 알력의 원인.

크란 러델 – 감마 근무교대 보조 파일럿. 자야를 두고 수석 엔지니어 카프와 신경전중.

알리시아 셀번 – 로쉬 콜린에게 관심이 지대한 과학장교. 콜린 상병은 꽤나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그가 스타페어러의 엔진을 움직일 수 있는 건 퍼페티어 혼혈이기 때문이라는 친구 재니스의 이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

재니스 라이 티엔 – 알리시아의 친구이며 센서 오퍼레이터. 로쉬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장본인 중 하나.

진행

외우주를 항해하고 있는 스타페어러호. 알파 교대근무 시작시간에 로쉬와 이르힌은 각각 함교로 출근해 딴짓에 빠집니다..(…) 로쉬는 그나마 일상과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 작은 프로그램들을 돌리며 위안을 삼고, 이르힌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해킹에 제어가 걸려있기 때문에 스타페어러의 시스템에 들어가 정보를 모음으로써 감찰관의 직무를 다하려고 애씁니다. 사생활 개념이 없는 퍼페티어 특유의 감각으로 수석 엔지니어와 보조의료원, 보조 파일럿의 삼각관계라든가 알리시아 셀번 소위의 콜린 상병에 대한 수다 등 온갖 시시콜콜한 정보를 진지하게 수집하며 평온한 아침이 흘러가던 중, 갑자기 제 2 내각 감사실에서 연락이 들어옵니다.

화면에 등장한 로버트 D. 멘슈테트 실장은 다짜고짜 스타페어러의 항로에 있고 최근 통신이 두절된 소렌 8호 우주정거장에 구조임무를 나갈 것을 요구하고, 진 함장이 항의하자 콜린 상병과 카워드 감찰관과 함께 함장실에서 만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게다가 소렌 8호에는 장거리 센서에 대한 간섭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서 사태는 더욱 심상찮은…

함교에서 함장실로 전송된 통신신호는 멘슈테트 실장의 홀로그램을 함장실에 비추고, 네 사람은 곧 치고받고 싸웁니 토의에 들어갑니다. 실장의 요구사항은 장기 센서가 작동하지 않으니 이르힌과 로쉬를 셔틀에 태워서 소렌 8호로 보내고, 단거리 센서와 육안 관찰의 결과로 스타페어러를 원격조종해 구조를 완료하라는 상당히 무리한 것입니다. (로쉬 앞이니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르힌이 스타페어러의 시스템과 데이터링크를 만들어서 로쉬를 원격접속시키라는, 즉 이르힌의 신변상 비밀까지 노출시킬 수 있는 계획이죠.)

어느정도 두 사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는 했지만 스타페어러의 정교한 기능들은 여전히 이르힌과 로쉬 두 사람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데, 센서도 통신도 닿지 않는 위험지역에 스타페어러의 중추와 다름없는 두 사람을 보내라는 얘기… 게다가 아직 우주군 사령부의 명령도 없이 스타페어러를 감사실의 지휘 하에 넣으려는 듯한 움직임에 함장과 이르힌은 둘다 강하게 반박합니다. 우주군 사령부의 명령이 필요하다면 잠시 기다리라며, 그동안 통신을 끊는 짓은 하지 말라며 사라지는 실장의 홀로그램.

남겨진 세 사람은 도저히 답이 나지 않는 대책토의에 들어가고, 이 시점에서 PD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싸우느라 엄청나게 늘어져버려서 전혀 깔끔하지 못한 장면진행, 게다가 무리한 나머지 불쌍하게 삐걱거리는 구성. 전에도 이런 문제를 겪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당황한 PD와 황당한 참가자들이 좌충우돌하는 사이 멘슈테트의 말대로 우주군으로부터 구조 명령이 떨어지고, 진샤린 함장은 스타페어러를 위험에 노출시키느니 차라리 연방의 눈에 띄지 않게 잠항모드로 들어가고 통신에 필터를 넣습니다. 이 시점에서 세션은 자기파괴..(…) 시간이 늦어서 미묘님은 일어나셔야 했고, 로키는 두 분에게 죄송해서 눈치볼뿐.

문제점

우선적인 문제라면 두 사람을 스타페어러 밖으로 내보내는데 지나치게 집착했던 점 같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형에 집착한 나머지 말이지요. 사실 두 주인공 컨셉을 자세히 보면 ‘배의 작동이 두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배 밖에서보다는 배 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였는데 말이죠.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배 밖으로 내보낼까’에만 골몰하다가 뻔한 해결책을 놓쳐 버린 겁니다.

두번째 문제라면 너무 비정상적인 상황을 내보내려고만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도 제 진행에서 종종 드러나는 문제인데, 비교적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부터 시작하려고 하질 않고 처음부터 있는대로 다 뒤집으려는 경향이죠. 이 경우만 해도 거의 연방 정부의 전복까지 암시하는듯한 극도로 커다란 내용으로…(…)

또 하나, 이상과 같은 내용을 생각할 시간도 없이 플레이에 들어가는데만 급급했다는 점입니다. 설정의 양을 봐도 그렇고 규칙의 성격으로 봐도 그렇고 쉽게 한회에 끝날 내용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해결책

해결책이라면 두가지가 가능할 텐데, 한가지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없었던 걸로 하고 구조 파견대의 임무를 스타페어러에서 두 주인공이 지원하는 방향, 또 한가지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어떻게든 밀고 나가면서 두 주인공이 위험과 함장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스타페어러에서 나갈만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방향이 무리가 적고 마음에 들지만 내용의 연속성을 생각하면 두번째 방향이 낫겠죠.

이 시점에서 진행자로서 제가 배울 점이라면…

1. 장르의 전형보다는 주인공들의 특징을 먼저 살피자.

2. 규모 키우기에 집착좀 하지 말자! (…) 언제까지나 감당도 못하는 얘기만 늘어놓을 거냐.

설정도 마음에 들고, 잠재력도 있는 이야기인데 시간이 되면 이어서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방랑자의 노래. 더불어 진행자로서 제 약점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고 말이죠. 다음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ㅁ; (시꺼!)

첫 7번째 바다 마스터링

처음으로 7번째 바다 마스터링을 해봤습니다. 희생양은 초보자님. 초보자님이 다른 캠페인에서 플레이하시는 캐릭터를 납치했습니다.

처음이라지만 아주 생 처음은 아닌 게, 원래 7번째 바다 그룹에서 모의전투로 어느정도 전투룰을 익혔었고 또 대규모 전투룰을 플레이테스트하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정상적인(?) 플레이 룰을 돌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몇가지 하우스룰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이…

1. 캐릭터 제작

– 포인트는 원래 룰의 100 히어로 포인트(HP)가 아닌 140HP로 했습니다. 특성치 상한은 4, 낵 상한은 없이요.

로키: 캐릭터 100HP죠? 40HP 더 분배해서 주세요.
초보자님: 105HP인데요?
로키: 혼자니까 능력치가 더 필요해요. 40HP 추가로 분배해서 주세요.
초보자님: 네…(…)

뭐 기술보다 특성치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룰인지라 특성치에 불사르니 간단하게 끝. 그리고 공격(펜싱) 5라니 왠 검술 매니아..(…)

2. 극주사위는 물처럼 흐르고(?)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보이면 무조건 극주사위. 그리고 남기든 쓰든 경험치나 캐릭터 성장과는 무관하게 했습니다. 극주사위 0으로 시작한 플레이어가 한개 쓰고도 세션 끝에는 2개를 쥐고 있었죠. 저것도 제가 생각하기엔 약간 짰지만, 뭐.

GM이 극주사위를 가질지 말지는 고민입니다. 공식 NPC들이 140HP짜리 PC보다 강한 걸 깨닫고 경악을… 악당의 간계를 발동하려면 극주사위가 필요하긴 한데, 과연 제가 돌리면 진정한 의미의 악당이 있을지는 의문이군요. 아악..NPC 캐메 귀찮..(퍽)

아르메이아 오초아 이 라사르 델 까스띨리오로 말하자면 외로워도~ 슬퍼도~ 를 외치는 캔디소년이랄까요. (아닙..) 탕녀로 유명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의 미움이란 미움은 다 받고, 결국 외동아들인데도 아버지가 일부러 사촌을 친자로 들여서 상속권을 그쪽으로 넘겨버렸죠. 분명 아버지는 친부 맞지만, 이게 남들 보기엔 어떻겠어요. 탕녀로 유명한 어머니 -> 그 어머니를 꼭 닮은 아들 -> 아버지에 의한 상속권 박탈.

한마디로 까스띠예 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안주감인 겁니다, 아르메이아는. 별볼일 없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저렇게까지 유명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 일..(…) 까스띠예 궁정에 있을 때 명성 페널티를 제안했고 (룰적 근거 전무), 플레이어도 순순히 받아들이시더군요. 명성 다이스 페널티 쪽을 생각 중입니다. 흐흐..+_+

가진 건 쥐뿔도 없고 아는 건 머리 한가득인 아르메이아. 사악GM 로키와 함께 한 그의 첫 모험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냥 즉석에서 “할까요?” “하죠!” 수준이었던지라 준비 별로 안하는 제 기준으로도 정말 준비는 전무했던…

아르메이아는 추기경(여기서 우리는 GM의 준비부족과 까스띠예 소스북의 부재를 알 수 있다)의 저택에… 공식적으로는 초대손님, 사실은 통역사. 몽테뉴와 보다체 손님들이 있었거든요. (아르메이아는 모국어인 까스띠예어 외에 몽테뉴, 보다체, 아발론, 테아어를 하는 인재!) 따라서 얘기하는 손님들에게 공통되는 언어가 없을 경우 달려가 통역해주는 게 아르메이아의 일이었죠. 명색이 귀족이라도 가진 게 없으면 사람이 이렇게 됩..

어쨌든 아르메이아는 보다체의 치오사 추기경, 까스띠예의 돈 알다나, 그리고 한동안 대화를 진행한 후에야 GM이 이름을 지어준 비운의 몽테뉴 귀족 오렐리앙 비세 세 사람의 대화를 열심히 통역해주고 있었습니다. 치오사 추기경은 실종된 몽테뉴 추기경 자리를 없애고 까스띠예와 보다체에 추기경을 추가해서 몽테뉴 추기경의 실종 때문에 못 뽑고 있는 교황을 뽑아야 교회의 지도력 부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죠. 몽테뉴 귀족은 레옹 황제(몽테뉴 왕)께서는 누구의 신앙의 자유에도 간섭하지 않으며, 사라진 다르쥬노 추기경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성의없이 말합니다. (1. 몽테뉴 귀족사회가 교회에 등돌린지 한참 된. 2. 추기경 실종 후 몽테뉴 황제가 추기경 반지 끼고 나타남.)

죽도록 통역하고 있던 아르메이아의 귀에 무도회장 한켠의 소란이 들려오고, 이 시점에서 대화의 흐름을 놓치고 저쪽에 신경을 쓸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고 이쪽에 집중할 것인가 선택할 수 있었지만, 통역해주는 상대가 다 무시무시한 VIP인데다 다른 통역사도 파티장에 있다는 얘기를 빼먹는 바람에 의미있는 선택지를 주는데는 실패. 저때 소란 쪽에 신경을 썼다면 전혀 다른 모험이 될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쪽이 더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

자기 얘기가 영 먹히지 않자 답답하던 노인네…아니 치오사 추기경, 불쑥 아르메이아에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습니다. 조리있게 대답하는 아르메이아를 잠시 바라보던 추기경은 음료잔을 집는척 하며 아르메이아에게 무도회가 파한 다음에 잠시 보자고 작게 얘기하죠. 여기서 급작스러운 요청에 아무 반응 안하는데 에티켓 판정. 아르메이아는 쉽게 성공했고, 아무 내색 없이 무사히 파티 끝까지 목이 닳고 입이 마르도록 통역질을 합니다.

결국 손님들의 흐름에 밀려 떠나는 손님 마차타는 순간까지 통역하는 아르메이아. 더욱 짜증나는 건 까스띠예어가 안되는 주제에 까스띠예 귀부인 꼬신다고 설치는 몽테뉴 귀족청년 말 옮겨주기..(…) 참다 못한 아르메이아는 꼬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인의 눈치를 살피고, 겉보기에는 웃으며 끄덕이며 받아주고 있지만 사람보는 눈 판정이 성공하자 사실은 지루하고 짜증내고 있는 게 보이지요. 아르메이아는 몽테뉴어로 청년에게 여자 꼬시려면 언어 정도는 배우라며, 침대까지 통역 동행할 거냐고 쏘아주지요. 그리고 흔들림없는 에티켓 굴림으로 청년을 물러나게 만듭니다. 감동먹은 GM 극주사위 먹이고… 아마 명성도 조금 올려야 할 것 같군요, 이 시점에서. 까스띠예 귀부인은 웃으면서 가버리고…

여기서 끈기판정. TN 5 실패했으면 목소리가 갈라지고 쉬어서 나오게 하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성공. 어쨌거나 목이 마르고 다리는 붓고 초죽음이 된 아르메이아는 부엌으로 직접 내려가 물한잔 달라고 하고, 한 젊은 하녀가 물잔을 건네며 지체있으신 도련님이 이런 데로 직접 내려오시면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며 얼굴을 붉히지요. 하지만 곧 동료 하녀들에게 잡아뜯어집(?)니다. 저 사람 아무 실속 없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아르메이아의 지친 귀에까지 들리고… 아아, 하녀에게까지 실속없다고 외면받는 이 신세. 외로워도 슬퍼도~를 외쳐야 할 상황인 겁니다! ;ㅁ; 여기서 지치고 피곤한 아르메이아의 연기 때문에 다시 극주사위.

치오사 추기경과의 밀회를 위해 파티장으로 돌아가본 아르메이아. 무도회장을 치우는 하인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영 짜증내는 태도로 봐서 성실하게 전해줄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 무도회장의 찬란한 빛과 목소리, 웃음 소리 뒤에 공허하고 어둡기만 한 그 공간에서 아르메이아는 혼자 기다립니다.

바로 그때 정원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정원으로 통하는 큰 몽테뉴식 창(창틀이 바닥까지 닿아있는 문 비슷한 창)으로 나온 아르메이아는 산책로의 풀섶 저편에 사제복을 언뜻 봅니다. 그리고 두 사내가 좀전 파티에서의 소란에 대해 얘기나누는 것을 알아채지요. 그리고 재치판정. 그런데 아르메이아 뒤쪽으로도 발소리가 들립니다! 아직 두 사내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다가오면 알아채고 얘기를 멈추겠지요. 어차피 오는 사람을 안 들리게 막을 수 없는 이상 아르메이아는 몰래 접근해 얼굴이라도 확인하기로 결정하고 은신 체크를 성공해 두 사내의 얼굴을 확인합니다. 비록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요. 그리고 또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와 아르메이아를 부르는 소리 때문에 얘기 나누던 사제들은 그대로 산책로를 따라 가버리고, 돌아본 아르메이아가 본 것은 역시 라 치오사 추기경.

교회의 판도를 바꿔버릴 계획을 꾸미는 사람 치고는 너무나 순수하고 따스한 노인네인 추기경은 함께 산책하자고 아르메이아에게 말하고, 둘은 정원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눕니다. 아르메이아의 불우한 상황을 무도회장에서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다 파악해 버린 노인네 눈치. 내색하지 않는 판정에 GM은 재치가 아니라 끈기로 에티켓을 굴리라는 사악함을 과시했고, 결국 뽀록나 버려서 당황한 아르메이아. 그가 불편해하자 추기경은 화제를 바꾸어서, 몽테뉴 추기경직을 없애고 교황을 선출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얘기하지요. 그리고 도와주겠냐고 묻습니다. 아르메이아가 그러겠다고 하는 동안 플레이어분은 이 거대한 규모의 얘기를 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잡담채널에서 울부짖고..(…) 역시 황당하게 큰 규모의 이야기를 키우는 GM 버릇이 나온 겝니다. 나와버린 게지요..;;

줄이고 또 줄여서 아르메이아의 임무는 몽테뉴의 실종된 다르쥬노 추기경, 그리고 대주교들의 생사확인으로 좁혀집니다. 결국에는 몽테뉴 궁정, 그리고 가끔은 다른 나라 궁정 돌며 재밌게 놀라는 얘기지만요. 치오사 추기경은 아침에 몽테뉴에 있는 자기 조력자에게 줄 소개장을 전해주겠다고 하고, 세션 끝. 장면을 잘 진행한 포상으로 다시 극주사위.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재밌었습니다. ;ㅁ; 7번째 바다는 제가 하는 것 치고는 꽤 복잡한 룰이어서 실수도 있었지만, 요소요소 룰 적용하는데 쏠쏠한 재미가 있더군요. 또 초보자님도 캐릭터성을 잘 표현하고 극적 감각도 있는 분이라 제가 만드는 극적 요소들에 잘 반응해 주셨고요. 아르메이아 같은 경우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지나치게 건조한 캐릭터가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막상 플레이가 시작되고 많은 주변상황에 반응해야 하자 캐릭터가 살아나더군요.

개인적으로 제일 아쉬웠던 부분은 시작 장면. 통역 장면의 성격상, 그리고 시작 갈등을 설정해야 하는 필요상 NPC들끼리 얘기하는 걸로 시작하는 게 곤욕이었습니다. 또 위에서 말했듯 숨막히는 VIP 상대중, 게다가 엄청나게 중요한 얘기중, 게다가 다른 통역사들의 존재는 빼놓아서 결과적으로 전혀 선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선택지도 문제였습니다. 아아..활극이 될 수 있었는데…;ㅁ; 이쪽 얘기도 재밌긴 했지만 같은 결과라도 플레이어의 의미있는 선택의 결과였다면 저도, 플레이어도 더 보람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 장면에서 다른 통역사의 존재만 강조했더라도 의미있는 선택의 여지가 훨씬 생겼을지도요. 인물이나 대화를 덜 중요하게 만들면 이번에는 이쪽 옵션을 부당하게 뺏는 결과가 됐겠죠. 어려운 문제이지만, 앞으로는 의미있는 선택의 기회를 잘 포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삐걱거리는 면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밌었습니다. 앞으로의 캠페인도 기대되는군요. 소스북 안읽어본 까스띠예에서 슬쩍 주인공을 빼돌려 소스북 읽은 몽테뉴, 그리고 아마도 보다체 쪽으로 옮기는 저의 센스란..(이봐) 몽테뉴에서는 궁정음모 규칙도 적용할 생각인데, 궁정음모의 화폐는 다른 무엇보다 ‘부탁’입니다. (돈? 돈이야 당연히 다 있는 걸로 전제 깔고요. 아르메이아는 없어서 문제지만, 추기경의 조력자께서 알아서 해주심.) 남의 부탁을 많이 들어줄수록 소개부터 돈 꾸는 것부터 정보까지, 다른 사람의 호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자기 부탁을 해결할 수가 있거든요. 결국 부탁 들어주느라 온갖 모험 다 하라는 훌륭한 시스템..(…) 대리결투에서 귀부인 강아지 실종사건 해결까지, 온갖 뻘짓 다할 아르메이아의 대모험을 기대해 주시길~ 후기 올릴 기운이 다시 날 일이 있을까는 모르겠지만요.

첫 7번째 바다 마스터링은 나름대로 성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하고 싶은 7번째 바다의 색채가 나와서 기쁘군요..^^

안방극장 대모험 플레이테스트 – 오티엘 밴드 이야기 플레이 보고서

이번에 ‘안방극장 대모험(Primetime Adventures)’ 룰을 사용한 플레이테스트 겸 즉플을 해보았습니다. 광풍님의 잡담방에 있다가 갑자기 ‘즉플하고 싶다’는 생각에 준비도 없이 시작한, 그야말로 즉석 플레이였다죠..ㅋㅋ 희생양(?)들은 같은 잡담방에 있던 죄밖에 없었던 구네님, 러드네이님, 희미님 세분이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은 가상의 TV 드라마를 만드는 룰로, GM(이 룰에선 PD라고 함)과 플레이어들이 상의해서 프로를 기획하고 만든 다음, 그 내용을 롤플레이하는 룰입니다. 룰을 간단히 설명하고 기획에 들어갔습니다.

드라마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내용, 즉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연예계와 학교에서 겪는 내용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낙찰을 봤습니다. (실은 폭군 PD의 독단이었던 소리는 절대 못하겠…) 그다음 캐메에 들어갔죠. 원래 아이돌 댄스그룹으로 컨셉을 잡았었는데 러드네이님이 악기 다루는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재밌게도 그룹 컨셉에서부터 시작해 내용 자체에도 꽤 영향이 컸습니다.

구네님과 희미님에게 배스와 드럼을 맡은 캐릭터는 어떻겠냐고 물어봤지만, 두분 다 노래와 댄스를 하는 가수 캐릭터를 원하시더라고요. 이쯤에서 자칫하면 시작하기도 전에 플레이 끝나겠다는 위기감! (어이, 오버야) 진땀나는 PD, 방안을 짜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이 바로 전설의 그룹 아바(ABBA). 아름답고 노래 잘하는 아그네사와 프리다, 그리고 연주 파트를 맡은 베니와 비요른의 환상 4인조. 그래,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구네님과 희미님 캐릭터들은 노래와 댄스를 맡고 러드네이님 캐릭터는 밴드 쪽, 그리고 NPC 밴드 멤버들을 추가해서 순수 아이돌 그룹이 아닌 어느정도 음악성을 갖춘 젊은 밴드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러드네이님이 그 NPC 밴드멤버 중 키보드 맡은 녀석에 대한 설정을 해서 더욱 재밌어졌습니다. 내키지 않는 자신의 캐릭터를 연예계로 끌어들인 절친한 친구이자, 밴드의 노래 작곡을 맡은 캐릭터라고 말이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 캐릭터가 플레이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이와 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선회하는 플레이야말로 즉플의 매력이 아닐까요? ㅋㅋ

밴드 이름은 플레이어들의 최강의 작명센스로(…) 오티엘 밴드가 탄생했습니다..ㅡㅡ/ 최종 라인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김윤정(플레이어: 구네)

-오티엘의 보컬을 맡은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노래를 너무나 좋아해서 같은 밴드 멤버인 유리의 표현대로라면 하루종일 노래만 부르고 있으라면 행복할 아이. 아빠가 연예활동을 탐탁치 않아 하는 점이 괴롭습니다. 성적이 꽤 좋은 편으로, 활동하느라 바쁠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습니다.

-고민: 아빠와의 갈등

-능력: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 모범생

-인맥: 학교 선배 주인혁 (언더그라운드 밴드 쪽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기대주, 윤정이 몰래 가슴 두근거리는 상대)

2. 이세진(플레이어: 러드네이)

-기타를 맡고 있는, 역시 고등학교 2학년생. 고아이며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저 같은 학교 친구인 미희, 윤정, 인성과 음악을 하던 중 기획사의 눈에 띄었고,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인성의 강력한 권유로 함께 연예계에 뛰어들게 됩니다. 지금도 연예계가 과연 자신에게 맞는지 회의하고 있습니다.

-고민: 연예인의 삶이 자신에게 맞는 건지 고민중

-능력: 기타리스트

-인맥: 세진을 키워주신 할머니, 친구이자 밴드 동료인 황인성

3. 장미희(플레이어: 희미)

-윤정과 함께 오티엘의 보컬, 인성과 함께 작곡을 맡은 발랄한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집이 빚 때문에 어려운 관계로 연예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수입은 전액 부모님 통장으로 직행하고 본인은 쪼들리는 착한 딸이자, 이기적인 가족들한테 치이는 불쌍한 소녀이지요.

-고민: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능력: 귀여운 여가수

-인맥: 반항적인 남동생 원경, 미희를 이해해 주고 연예활동도 응원해 주는 담임선생님 유하진

시범 방송이므로 모든 PC들의 화면 존재감은 2, 그리고 짧은 플레이므로 PC들의 개인 세트는 모두 똑같은 학교 옥상으로 맞췄습니다.

4. NPC 멤버들

-명호일: 신디사이저와 필요할 때면 턴테이블을 다룹니다. 원래대로라면 고3일 나이이지만 학교는 자퇴했습니다. 음침한 성격과 태도에 그저 음악밖에 모릅니다. 정상적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고 보긴 힘들지만 음악적 재능만은 천부적인듯. 세진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멤버. (하긴 누가 좋아하겠어요..ㅡㅡ;;)

-박유리: 오티엘의 베이시스트이자 스타일 좋은 이쁜 언니.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인 관계로 젊은 밴드 오티엘의 최연장자..(…) 다소 건조한 성격이지만 의외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특히 윤정을 친동생처럼 아낍니다.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 착한 학교 선배와 시간날 때마다 데이트를 즐기며 목하 열애중.

-정우진: 드럼을 맡은 대학 1학년입니다. 성격 좋은 호남형으로, 밴드의 고등학생 멤버들에게는 형이나 오빠 같은 존재. 실은 일반 대학생을 훨씬 웃도는 주머니 사정으로 밥을 잘 사준다는 점 때문에 인심을 얻은 걸지도…;;

-황인성: 키보드를 치고 미희와 함께 작곡을 맡은 고등학교 2학년생. 미희, 세진, 윤정과 같은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세진의 절친한 친구이자 머뭇거리는 세진을 연예계로 끌어들인 장본인. 음악적 열정이 대단한 녀석으로, 부모님은 지방에 계신데 혼자 서울 올라와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오티엘 밴드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끊임없이 곡을 쏟아내고, 학교에서는 음악실에서 살다시피 합니다. 예술가적 기질만큼이나 자존심 세고 예민한 성격을 어느정도 누그려뜨려 주는 존재가 세진입니다.

…정말 PC와 NPC를 통틀어 캐릭들의 나이를 보면 한국 음악계에 신동의 시대가 도래했나 싶은..(웃음)

처음 플레이가 시작된 도입 장면에서 카메라는 불꺼진 방을 비춥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오티엘 밴드의 히트곡 ‘너에게’가 생방송으로 나오는 사이 컴퓨터 앞에는 사람이 혼자 앉아 게시판 글을 올립니다. 카메라가 다가가면서 그 사람이 쓰고 있는 글이 보입니다. ‘오티엘 밴드, 일본 밴드 표절.’ 여기서 플레이어들의 경악 큐.

다음 장면. ‘너에게’를 만족스럽게 공연한 오티엘 밴드 멤버들은 분장실 문 저편에서도 들려오는 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잠시라는 것을! +_+) 서로 웃고 장난치며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멤버들. 그때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분장실에 매니져 선생님이 벌컥 들어오고, 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로 좀전 게시판 글과 답글들을 출력한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집니다. 신생 인기 밴드에 자칫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악성 루머에 멤버들은 할말을 잃고… 특히 작곡을 맡은 인성이는 더더욱 견디지 못하고 먼저 나갑니다.

매니져 선생님과 멤버들은 사이버 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하고 일이 커질 경우 기자회견을 하기로 한 뒤, 세진과 미희, 우진은 인성이가 걱정돼서 가보기로 하고, 윤정은 머리가 아파서 집에 가겠다고 합니다. 유리는 다 잘 될 거라며 윤정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데이트하러 떠납니다. 장면신청을 받자 세진과 미희의 플레이어분들은 인성이와 만나는 장면, 윤정의 플레이어분은 집에 가는 길에 학교선배 인혁과 마주치는 장면이었습니다.

PD로서 자칫 난처할 수도 있는 PC들의 분리 상황이지만 룰의 성격 덕분에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자체가 (구네님이 예리하게 지적하셨듯이) 여럿이서 협력해서 멋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인만큼, 자기 PC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플레이어들은 활발히 참여할 수 있거든요. 다른 사람 캐릭터가 나오는 장면에서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하는, 다른 룰에서는 참견인 것이 안방극장에서는 꼭 필요한 참여입니다. 이런 참여는 룰적으로도 확보되어 있어서, 자기 캐릭터가 안 나와도 플레이어들은 팬레터 등을 통해 이야기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미희와 세진 일행이 인성에게 찾아가는 장면부터 시작. 작업실에 가 보니 인성은 혼자서 격하게 드럼을 치면서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세진이가 큰 소리로 부르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인성은 태연한척 하려 하지만 마음이 딴데 가있는 흔적이 역력하고… 위로하려고 애쓰는 세진과 미희에게 인성은 대뜸 자신이 밴드를 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합니다.

이 시점에서 장면전환! (음하하) 집으로 가던 윤정은 집근처 음반가게에서 헤드폰을 끼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인혁 선배를 발견합니다. 뒤로 살금살금 접근해 헤드폰을 확 뺏어서 자기가 쓰는 윤정. 놀랍게도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건 윤정 자신의 목소리, 오티엘 밴드의 곡이었습니다. 윤정의 재능을 칭찬하는 인혁의 말에 윤정은 상기되고… 윤정은 인혁에게 밥사달라고 조르고, 인혁은 음악하는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윤정이 그러냐고 하면서 포기하려는 순간, PD와 플레이어들의 빗발치는 강요로(…) 결국 갈등판정을 하게 됩니다. 저는 예산을 2 배정해서 3d10, 윤정 쪽은 화면 존재감만 굴려서 2d10인데도 플레이어 쪽이 이겼습니다! 이때부터 플레이어 편드는 다이스의 배은망덕이 시작됩니다..(…)

돌아서려던 윤정은 순간 비틀거리고, 이런 상투적인 수법을 쓰느냐는 플레이어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인혁은 정말 몸 안좋은 거 아니냐며 걱정합니다. 밥 사주면 나아지겠냐는 인혁의 말에 윤정은 좋아서 그렇다고 하고, 인혁은 전화걸어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합니다. 여기서 윤정 플레이어분의 멋진 연기에 나머지 두 플레이어분들이 팬레터를 보냅니다.

다시 장면전환하면서 밝아졌던 분위기가 싸악 가라앉습니다. 세진은 주먹을 쥐면서 인성에게 다시 말해보라고 하고, 인성은 동료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세진은 자신을 억지로 끌어넣고서는 지금 와선 무슨 소리냐고 합니다. 인성은 폭발하면서, 그런 오해를 받은 것 자체를 참을 수 없다며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 피해 주기도 싫다고 합니다. 피해망상증이라며 네 맘대로 하라는 세진. 분위기는 진정되는데, 이때 PD 당황했습니다. 이건 제가 좀 잘못한 부분이지만, 당시에는 한 장면당 판정을 한번은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ㅋㅋ 1회 플레이로 끝날 거라고 생각한 관계로 차분하게 진행하지 못하고 가능한한 룰을 많이 활용하려는 조급함도 컸습니다. 뭐 플레이어분의 멋진 대응으로 결과적으론 더 좋았지만요.

PD 버벅거리는 거 보고 러드네이님 불쌍했는지, 다음 순간 세진이 주먹을 날립니다. 얼얼한 표정으로 나가떨어진 인성. 다시 다이스 타임~! 다이스는 여전히 플레이어 편..ㅡㅡ++ 인성은 세진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갑자기 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웃음을 터뜨립니다. 황당해하는 미희에게 세진은 원래 이랬으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합니다. 저녁 근사하게 쏘겠다는 우진의 선언에 모두 웃으며 밖으로 나섭니다. 역시 세진의 멋진 RP에 팬레터 두통이 들어옵니다. 이러한 플레이어간의 RP 포상, 나름대로 문제도 있을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점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다음 장면. 윤정은 인혁과 함께 국밥집에서 국밥을..(…) (구네님의 명잡담, ‘소녀에게 국밥이 뭐야.’가 이때 작열했다죠.) 음악 얘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시간가는 줄 모르죠. 가만히 놔두면 끝없이 땅만 파고드는 로키가 이 행복한 장면을 그냥 둘 리가! 이때 한켠의 텔레비전에서 연예 뉴스가 나오더니만 오티엘 밴드의 표절 의혹 얘기가 나와버렸다죠. 게시판 글 하나에서 일파만파! 윤정은 서둘러 달려가서 텔레비전을 꺼버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놀란 인혁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어서 그대로 도망칩니다. 인혁은 부르며 쫓아오지만 남자녀석이 뭐가 그렇게 느려터졌는지 뒤처져 버립니다. (사실은 마스터가 또 다이스의 농간에 놀아난..ㅠㅠ)

이때부터 분위기 완급조절이 제대로 안된 채 끊임없이 안좋은 분위기로만 흘러간 점이 좀 별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재밌는 플레이였긴 하지만요. 다음 장면은 밥먹고 들어온 미희와 가족들의 장면. 희미님이 얘기해준 가족 분위기에 따라 구성을 해보았는데, 정말 너무 사람 안 같게 됐더군요, 미희네 가족들이..(…) 빚 때문에 살벌하다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지가 해놓고 흥분함) 아버지는 자신이 돈 못 번다는 자격지심에 늦게 들어온 딸에게 소리부터 지르고, 자기도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싶다며 울먹이는 미희를 엄마는 따뜻하게 위로하는 듯하면서 결국에는 미희가 벌어오는 돈줄이 끊길까봐 조바심을 내죠. 제가 NPC 연기하면서도 심각하게 싫었던..ㅋㅋ 이렇게 PC 중에는 미희만 나오는 와중에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이야기한 점이 좋았습니다. 정말 TV 보면서 노는 기분이었달까요..^^

설상가상으로 미희의 반항기 남동생인 원경이 늦게 들어와서는 엄마한테 돈 달라고 조르고, 엄마가 돈 없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미희에게 손을 벌립니다. 더이상 집구석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어서 확 소리지르고 방으로 들어가는 미희. 그런 미희 뒤로 원경은 방에까지 들이닥쳐 돈 잘 버니까 좀 내놓으라고 큰소리칩니다. 연예활동 수입 전액이 부모님 통장으로 들어가는 미희는 돈이 없다고 타이르지만, 원경은 누나도 사람인데 설마 자기 몫을 안 챙기겠냐며 비아냥거리고… 연예인 누나를 은근히 질투하는 비뚤어진 모습도 드러나지요. 결국 참을 수 없게 된 미희는 아예 실력행사로 원경을 방 밖으로 밀어내고, 심통이 난 원경은 애꿎은 미희 방문을 걷어차고 자기 방으로 향합니다. 미희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죽여 울고…(토닥토닥)

다음날 점심시간. 세 사람의 공통 개인 세트인 학교 옥상에서 미희, 세진, 윤정은 학생들의 수근거리는 소리와 이상하게 보는 눈초리를 피해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티엘 밴드의 라이벌(실은 짝퉁..;;) 밴드 팬인 학교에서 좀 노는 여자애들이 시비를 걸어와서는 표절 시비 가지고 별말을 다하지요. 세진이 상대가 여자라서 참는 사이 뜻밖에도 윤정이 대폭발해서 칠공주 리더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악을 씁니다. (멋쪄~! 퍽퍽) 상대가 세게 나오자 오히려 자기들이 당황한 칠공주, 3학년 짱을 불러내고, 세진은 3학년 짱과 맞짱 뜨려다가 무지막지한 주먹 한방에 옥상 바닥을 뒹굴죠. (다이스는 드디어 내편! 크하하) 이때 미희의 플레이어 희미님이 미희의 인맥인 유하진 선생님 옆에 체크표시를 하고, 덕분에 유하진 선생님의 시기적절한 등장으로 옥상에 뒤엉켜있는 학생들은 모두 굳어버립니다. 화면 어두워지고 오티엘 첫회 시범방송이 끝을 맺습니다.

재밌는 플레이였지만 별다른 준비가 없었고, 반성할 것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갈등판정에 대한 부분과 분위기의 완급 조절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번 회 같은 경우 판정을 강요하다시피 한 점이 많은데 앞으로는 판정 여부는 플레이어가 주도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산은 장면 첫머리에 배정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판정을 선언할 때만 배정하고요. (내지는 판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선언한다든지요.)

행동판정과 갈등판정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시작한 것도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판정이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원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두가지 요소가 갖춰지면 벌어지는 것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하지만 행동판정이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캐릭터의 특정 행동을 성공시키는 것이라면 갈등판정은 그 욕망의 실현가능성 자체를 판정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겹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경우도 가능합니다. ‘라이벌 NPC를 앞질러서 달려요’ 하는 것이 행동 판정의 선언이라면 ‘라이벌 NPC에게 이겨서 애인을 가로채요’ 하는 것이 갈등 판정의 선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행동판정과 갈등판정을 구분할 가장 큰 이유라면 갈등판정에서는 무엇이 달려있느냐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따라서 극적 흐름에 적합하지 않은 우연적인 결과를 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룰북에 딱 맞는 예가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소형 원자폭탄을 차에 싣고 달리는 테러리스트를 잡아야 합니다. 주인공들이 원하는 것과 그 원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두가지 요소가 갖춰졌으니 판정이 일어납니다. 이 판정에 걸린 것은 무엇일까요? 실패하면 테러리스트들은 뜻을 이루고, 도시는 버섯구름과 함께 사라진다? 물론 극의 성격에 그게 맞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영웅적이거나 코믹한 분위기의 스파이물이라면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원자폭탄이 터지느냐 마느냐는 아예 판정에 걸지를 않으면 됩니다. 즉 판정에 실패하든 성공하든 원자폭탄이 터지는 일이 없다고 정하면 그만입니다. 0.0001초 전에 타이머를 해제한다거나, 잡힐 것 같으니까 테러리스트들이 차밖으로 던지고 내뺀다거나 하면 되니까요.

그렇다면 아무 중요한 결과도 없는 판정을 뭐하러 할까요? 중요한 것이 걸려있지 않다면 판정을 안하면 되지만, 원자폭탄이 안 터지더라도 판정을 할만한 가치있는 욕망은 얼마든지 걸려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자폭탄은 끝내 안 터진다 하더라도 테러리스트들을 이번에 못 잡는다면 다음에 또 주인공들을 괴롭히러 나타날 것입니다. 혹은 남편에게는 이런 일을 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자인 남편이 추격전을 열렬히 취재하고 있다면? 혹은 보도에서 지켜보고 있는 꼬맹이가 휘말리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면? 그럴 경우 판정에 의해 이루고 말고가 좌우되는 욕망은 ‘이번에는 꼭 경찰에 넘기고야 말겠어!’라든지 ‘으악! 남편한테 내 얼굴이 보이면 안되는데!’라든지 ‘저 꼬마 큰일나겠어!’ 등등이 될 수 있겠죠.

즉, 갈등판정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이 판정에 무엇이 걸려있는가’이고, 이것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판정 전에 정해야 합니다. 또 그 욕망, 혹은 목적은 캐릭터와 플레이어가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즉 ‘캐릭터에게 중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어린아이의 목숨을 지키겠다는 일념은 그 자체로도 꽤나 극적이지만, 만약 캐릭터가 예전에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서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과거가 있어서 정말 필사적이 돼버린다면 더더욱 심금을 울리겠지요. 다음번에는 이런 것들을 플레이어들에게 설명하고 들어가야겠습니다.

갈등판정 외에 또다른 아쉬운 점이라면 위에서 말했듯이 분위기의 완급조절이었습니다. 제가 워낙에 어두운 분위기로 쉽게 나가다 보니 이번에도 안좋은 분위기의 장면이 계속 이어진 것 같은… 어두운 분위기의 장면이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지만 계속 이어지면 긴장감이 없어지는 느낌이더군요. 처음에 세진·인성의 장면과 윤정·인혁의 장면 사이에 전환했듯이 서로 대조되는 분위기 사이의 적절한 장면전환으로 더욱 탄탄한 진행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럼 푸념 좀 했으니 긍정적인 면으로 넘어가 볼까요? ㅋㅋ 우선 굉장히 재미있는 플레이였습니다. 저도 즐거웠고, 플레이어분들도 즐겁다고 해주셨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플레이어의 실력’과 ‘현대물의 가능성’ 두가지로 꼽아보고 싶습니다.

우선 플레이어의 실력. 이거 요즘 들어 제가 많은 생각을 하는 부분입니다. 얼마전에는 ‘플레이어의 실력이란’이라는 글에서 즉플하기가 무섭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죠. 재밌게도 별 생각없이 마음을 비우고 시작한 그야말로 즉플에서 이렇게도 손발이 잘 맞다니 신기했습니다.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인디 룰을 놀랄만큼 빠르게 습득하신 점이라든지 생기있는 RP, 부드러운 분위기… 한마디로 운이 기막히게 좋았달까요! ㅋㅋ 또 생각해 보니 제가 플레이어 실력의 또다른 측면을 간과한 게, 바로 플레이어 친화도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잡담방 같은 경우 이미 좋은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즉플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요.

또하나 생각한 점은 현대물의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검과 마법물 판타지와 어정쩡한 SF물, 휙휙 날라다니는 활극물은 마스터링해봤지만 순수 현대물은 처음 해봤거든요. 위의 캐릭터 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극히 진솔하면서도 입체적인 고민과 캐릭터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역시 플레이어 실력에 더해 현대물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야말로 RPG인이 가장 잘 아는 시대와 공간이고, 그만큼 더 진실한 캐릭터와 표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전 어디까지나 환상 소설의 크나큰 신봉론자이지만 특히 즉플에는 현대물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