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면…(1)

뭐, 지난번에 제 진행의 문제점을 자가진단해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어떻게 단점만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렇다고 해주십시…) 어제 정숙조신님과 1:1로 트롤베이브(Trollbabe)를 진행하면서 제가 진행자로서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진행 작업은 다른 분한테 넘겨받은 거라는 상당히 뻘쭘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앞뒤연관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주변인물들 이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놀이기록을 읽어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파악하면 로키가 아니죠~(퍼벅) 어디까지나 즉흥, 또 즉흥인 겁니다!

아, 이 글은 제가 잘하는 것에 대한 얘기였죠? 넘어갑시다.(…)

내용

주인공은 ‘셀리나’라는 트롤베이브 마법사입니다. 셀리나는 스승이자 연인인 아무개씨가 병에 걸리자 그를 치유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요. 트롤과 인간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는 트롤베이브인 셀리나는 늘 자신의 트롤 혈통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느 갈림길(?)에서 기묘한 노파를 만납니다. 노파는 셀리나에게 말하죠. 치유약을 찾으면 스승 말고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그러면 트롤 혈통에 대한 얘기를 해주겠다고요.

또다시 얼마간을 가다가 셀리나는 무너진(?) 다리에서 팀이라는 트롤과 마주칩니다. 팀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치유약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없다고 하죠. 셀리나는 팀을 도와 주지만, 팀은 치유약이 있는 데로 그녀를 데려다 주는 대신 트롤 마을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트롤 장로는 셀리나에게 그 장소는 트롤의 성소라 트롤이 아니면 갈 수 없다며, 아침이 오기 전에 인간을 죽여 그 피로 목욕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제가 맡았습니다)

(1회)

셀리나는 망연자실해서(아마도?) 마을을 나와 돌아다니다가 트롤 마을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인간 병사들이 트롤 마을을 공격하는 현장을 보게 되죠. 셀리나는 휘황법석한(!) 마법을 이용하여 인간 병사들을 물러나게 만들고, 셀리나에게 병사들을 죽일 것을 종용했던 트롤 장로는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해는 떠오르고…

(2회)

트롤 장로는 셀리나더러 인간이 우리 마을에 설 자리는 없다며 돌아가라고 일갈하고, 병사들의 공격 중에 어린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오열하는 동안 전사들은 보복 공격을 위해 집결합니다. 셀리나는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며 그만두라고 당부하지만, 장로는 그럼 인간들이 뭘 하든 누워서 당하라는 소리냐고 대꾸하고…셀리나는 외교로 해결할 수 있다며, 자신이 돕겠다고 합니다.

약 일주일에 걸친 교섭이 지나가고, 교섭기간에 걸쳐 조약의 조항들은 모양이 잡혀갔지만 마지막으로 서명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 지역 영주의 신하들은 트롤들과는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다며 평화조약에 서명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고…이때 셀리나는, 정말 트롤들이 그렇게 쉬운 상대일 거냐고 생각하면서 신호를 보내고, 밖의 숲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롤 샤먼들이 일제히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치고 비가 내리게 합니다. 이 광경을 본 영주는 드디어 신하들의 압박에 이길 카드를 쥔 셈이 되어서 조약에 서명하고, 셀리나의 도움에 사의를 표합니다. 더불어 다소 추근대지만 셀리나는 흥! (…)

분석

사실 저 위의 내용보다는 잡담 채널에서 진행자와 참가자가 열심히 쑥덕공모한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이게 반드시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일단 진행이 너무 느린데다가 단순히 진행자의 자신감 부족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좋은 점이라면 참가자가 원하는 것이 확실히 반영된다는 사실이죠.

우선 물려받은 진행인만큼 전 줄거리를 계속해야 한다는 점이 좀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전 진행자이신 이반님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제게는 셀리나가 자기 트롤 혈통을 찾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좀 비현실적인 갈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점을 정숙님과 상의하자 참가자분도 동의하셨습니다. 따라서 갈등의 초점을 살짝 바꿔서 인간과 트롤 사이의 폭력사태를 막는 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판정의 호흡은 제가 3번 성공하면 전체 성공으로 제안했고, 정숙님은 한단계 낮추어 2번 성공이 전체성공인 걸로 정하셨죠.

(잠시 규칙설명: 트롤베이브의 호흡조절이란 한 갈등에 승리하는데 한번의 굴림성공으로 성공할 것이냐, 두번으로 성공할 것이냐, 세번으로 성공할 것이냐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갈등을 시작하는 쪽이 제안하고, 받아들이는 쪽이 한단계 높이거나 낮춰서 최종적으로 정할 수 있죠. 즉 두번 성공으로 제안하면 사실상 상대에게 정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성공은 진행자가 서술하고, 실패는 참가자가 서술합니다. 주사위는 참가자만이 굴립니다.)

이 시점에서 규칙 이해에 대해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정숙님은 ‘서술권’이란 주인공의 행동을 포함한 모든 결과를 서술하는 걸로 이해하고 계셨고 저는 주인공 행동은 참가자가 맡되 그 나머지 (주변상황, 주변인물 행동 등)만이 서술권에 포함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트롤베이브는 대체로 참가자가 성공하는 쪽으로 확률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저는 거의 소설 쓰고 참가자는 구경하는 결과가 되는 느낌이더라고요. 원래 진행자 말이 많은 걸 안 좋아하는데다가 (저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말이 많아서..<-) 주인공을 진행자가 연기하는 건 더더욱 싫어하기 때문에 규칙 재해석을 제안했습니다. 즉 저의 해석에 맞추는 것이었죠.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

또 하나 참가자의 의견을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 게, 저는 원래 이 외교 교섭을 앞으로 몇 세션씩 걸리는 긴 얘기로 잡을 생각이었거든요. 자기 기사들이 트롤 잡는다고 병력 소모하는 게 탐탁치 않으면서도 권력기반이 약해서 별말 못하고 있었던 군터 공, 트롤들을 최대한 빨리 잡아서 자기 영지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생각하는 롤란드 경을 비롯한 기사들, 그리고 그 권력구조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트롤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둘 다이기도 한 젊은 여성 사절… (희미님, 울지 마십..)

저걸 제 맘대로 진행했더라면 참가자에게는 최악으로 지루한 시간이 될뻔 했습니다. 이미 의사소통의 채널(..말 그대로 IRC 채널)이 열려있지 않았더라면요.

다행히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싶다고 정숙님이 말씀해 주셨고, 그래서 교섭의 마지막 장면만 하고 한번 굴려서 성공하는 갈등으로 처리할까 의견을 묻자 동의하시더군요. 그래서 협동적으로 장면을 구성해서 마지막 장면 내보내고 2회를 만족스럽게 마쳤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것은?

I.

결론적으로 제가 잘하는 것은…진행 떠넘기기! (퍼억) 아니, 참가자 의견 묻기가 아닐까 합니다. 참가자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끌어내고 그걸 반영하는 것이요. 그건 한편으로는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결과물은 더 만족스럽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그건 놀이를 하는 목적에 달려있겠지만요. 모두가 협동해서 극적이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라든지 놀라움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심히 맘에 안드는 결과이겠지요.

II.

또하나…참가자에게 귀기울이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지만, 참가자 괴롭히기도 제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잘 들어보면 참가자를 괴롭힐 실마리는 참가자의 입에서 전부 나오거든요. 이번 경우도 정숙님을 결정적으로 갈등시킨 부분은 정숙님이 주신 정보에서 알 수 있었죠. 뭔가 대책이 없이는 트롤들이 인간에게 받는 대접을 그냥 넘길리가 없다고 하고, 또한 인간과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들에게 낯선 경험이다…라고 유도하자 정숙님은 그럼 셀리나가 도우면 된다고 하셨죠.

“그럼 스승이자 연인은? 치유약 가지고 빨리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트롤과 인간이 서로 죽이게 놔둘 건가요?”

전 이런 순간들이 너무 좋습니다! >_< (인간아…)

참가자는 (허깨비일 뿐인 주인공은 필요없습니다. 중요한 건 참가자) 거의 항상 두가지 이상의 극적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 욕구들을 대치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실마리는 바로 참가자가 하는 말과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역할놀이가 가진 재미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애당초 자세히 설정된 부분은 아니었으니 둘이서 협의해서 치유약을 가지고 돌아갈 시간제한을 대충 설정했습니다. 일단 연인이 오늘내일 하고 있으면 셀리나가 팔자좋게 여행 나오진 않았을테니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고, 그렇다고 몇달이고 지체할 수는 없는, 한마디로 어중간한 상황이란 거죠..(…) 따라서 셀리나는 결국 트롤들을 돕느라 여행을 일주일 지체했고, 그건 연인보다 트롤들을 돕는 걸 우선한 거겠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또다른 갈등의 축은 셀리나가 트롤로 인정받느냐였고, 그건 트롤의 성소에 있는 치유약에 셀리나가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 두가지는 오히려 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죠. 그리고 셀리나가 외교사절로써 그 지역의 인간과 트롤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는데, 트롤들이 과연 셀리나를 나몰라라 할까요?

전 이런 순간들도 너무 좋아한답니다~ ^-^♪ 선택과 갈등 끝에 모든 고민은 결국 녹아 없어지고, 그 속에 남는 건 오직 자아에 대한 긍정 뿐인 그런 순간을. 셀리나는 결국 자기 신념을 조금도 꺾지 않으면서도 트롤들에게 인정받고, 동시에 자기 은사를 도울 길을 연 것이죠. 그렇게 의도한 건 결코 아니었는데 (늘 떠들고 다니듯 전 준비 안합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이게 바로 협동 서술로서의 역할놀이가 가진 크나큰 가능성이 아닌가 합니다.

III.

마지막으로 제가 잘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묘사입니다. ‘번복할 수 없는 결론처럼 차갑고 분명한 새벽의 빛’이라든지 ‘회담장 문에 놓고 와야 했던 검을 찾아 무의식적으로 허리에 손을 뻗는 롤란드 경’ 같은 묘사는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죠. 뭐, 장식같은 것이지만 때로는 장식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

3 thoughts on “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면…(1)

  1. 초보자

    저하고는 명백하게 지향점이 다르군요. 저도 묘사에는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만.. 전 장식 지향이 아니라 미세한 정보 표현을 위한 행동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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