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중심 진행의 간단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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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중심의 캠페인 제작이라는 글에 나온 신호 중심의 진행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전에 재밌게 봤던 CB마스터님의 세션 준비 글과도 관련이 있어 보여서 엮인글로 올립니다.

구체적으로 신호라는 뉘앙스를 캠페인으로 응결시키는 방법은 많은 직관적 비약과 주관성이 들어가는 과정인지라 설명하기가 좀 어렵지만, 비교적 간단한 1:1 단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 뻔한 얘기입니다만, 로빈 로스씨가 말했듯 뻔하거나 습관적인 것도 그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사용할 예는 구네님과 재작년쯤에 진행한 즉석 단편, ‘영혼의 우물’입니다. 구네님의 주인공 칼은 사냥꾼인 아버지와 형과 숲에서 살다가 모험을 떠난 모험가로, 명성을 쫓아 여행하다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을 못해서 형과 사이가 틀어졌죠. 여기서 도출되는 구체적인 신호는 일단 형, 어쩌면 숲. 좀더 추상적인 신호는 모험, 모험 경험에서 형성된 능력과 성격, 형과의 갈등, 가족에 대한 의무 등.

여기에다가 진행자인 저의 목표를 첨가하자면 고전 동화의 환상적인 분위기, 이미 밤새 RPG를 한 대미(..?)를 장식하는 시점이었으므로 무겁지 않은 가볍고 재미있는 분위기, 그러면서도 얄팍하지 않은 내용 정도였죠. 이렇게 참가자가 원하는 것과 진행자가 원하는 것들이 정해졌고, 욕구들 사이에 특별한 충돌이 없었으므로 시작할 기반이 갖추어졌습니다.

인물 제작을 마치고 바로 모험을 시작하면서 모험의 초점은 일단 주인공의 형과 숲으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형이 숲에서 실종된 정도는 어떨까 하고 생각했죠. 가족에 대한 의무는 주인공의 신호에도 속하기 때문에 사라진 형의 실마리를 쫓아 주인공이 여행해온 것으로 했습니다. 주점에서 주인장과의 대화를 통해 형이 이곳의 저주받은 숲에서 실종된 것이 확실하며, 아직 형이 칼에게 앙금이 남아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서 주요 신호를 강조하며 시작했죠.

숲에서 형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숲에서 돌아온 유일한 사람인 푸줏간집 딸을 만나러 가지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으니 소용없을 거라는 얘기 또한 듣지만요.

푸줏간집 딸 아이렌을 만나는 장면은 또다른 신호를 등장시킬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험이라는 소재와 갈등되면서 가족에 대한 의무와 연관되고, 동시에 인간의 모든 이야기에 무난하게 연관시킬 수 있는 소재… 바로 결혼! 그래서 푸줏간집 주인 아저씨는 미쳐버린 딸의 혼처를 심히 걱정하고 있으며,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딸이 낯선 남자와 함께 숲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주인공에게 딸을 책임지겠다고 약속시키는 반강제적 약혼을 시켰습니다.

아이렌과 숲에 들어온 주인공은 말하는 토끼를 붙잡아 취조(..?)한 끝에 (이 과정에서 사냥꾼으로서의 능력과 모험자의 기지를 활용하면서 제가 원하는 동화적이이면서 무겁지 않은 분위기 연출) 아이렌의 안내와 토끼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실종시키는 장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숲의 주인이라는 수호정령으로, 사람들이 숲을 파괴하는데 분노해서 숲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영혼을 영혼의 우물에 가둬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종자들은 자기 영혼이 갇힌 영혼의 우물을 떠날 수가 없었고, 숲을 헤매다 구출되었던 아이렌은 말 그대로 혼이 나간채 계속 영혼의 우물로 돌아오려고 애쓴 것이죠.

이런 식으로 숲을 떠난 주인공과 숲에 남았던 형, 그리고 형제간의 갈등이라는 신호를 건드려둔 후 절정 부분에서는 구네님의 멋진 문제해결을 지켜보면 그만이었습니다. 스스로 숲을 지키고 숲과 더불어 살아가겠다고 약속한 주인공의 진심은 숲의 주인의 분노를 잠재우고, 영혼의 우물에 갇혀있던 영혼들이 풀려나면서 주인공의 형을 비롯한 실종자들, 그리고 아이렌은 모두 제정신을 되찾습니다. 칼의 결정은 가족에 대한 의무와 그에 부수되면서 모험과 대비되는 ‘정착’이라는 문제, 그리고 숲이라는 신호를 살리는 것이기도 했죠.

그리고 실종자들의 귀환 (당면한 문제 해결), 주인공과 형의 화해 (형이라는 신호 해소), 그리고 주인공과 푸줏간집 아가씨와의 썸씽(..?)으로 (로맨스라는 보편적인 소재, 숲에 정착하기로 한 주인공의 결정과 연결, 가족에 대한 의무와 모험 사이의 갈등 해소) 영혼의 우물 단편은 끝을 맺습니다.

여러모로 이 단편은 실종 문제라는 과제의 해결 뿐만 아니라 주인공 자신도 약속의 책임을 지고 형과 화해하는 등 내적으로 성장을 이룬 꽤 깔끔한 단편으로 기억합니다. 설명한 바대로 주인공 설정을 통해 드러난 신호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고요.  당연히 참가자의 좋은 의사결정이 아니었으면 나오지도 못할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구네님도 저도 저걸 다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말한대로 직관적 비약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이니까요. 하지만 참가자와 별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걸 참가자에게 보여주는 방식보다는 주인공 설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부드럽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신호의 해석과 구현 과정에서 참가자와 진행자의 취향과 관심사가 둘다 들어가니 서로 즐거울 수 있는 거죠.

주인공이 여럿인 플레이라면 신호를 엮어가는 방식을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시기에 진행했던 라이테이아 전기에서는 세 주인공을 초창기에 엮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주인공 중 하나인 니콜라이는 뉘우친 도둑으로서 양녀를 위해 큰 돈을 벌려고 하고 있었고, 또 하나인 아리에는 여사제였다가 포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고, 세번째인 케사르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죠. 그래서 이 세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아리에가 팔려가는 밤에 니콜라이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고용되었고, 케사르는 아리에와 함께 여행하면 친부모를 찾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상태에서 우연히 그 장소를 지나게 했습니다.

물론 신호 중심의 진행에 대한 글에서 밝혔듯 이러한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참가자의 능동성을 요구합니다. 영혼의 우물에서 칼이 ‘음… 별로 형을 찾고 싶지 않아. 술이나 마시면서 뭔가 다른 일이 생기길 기다리자.’라고 한다든지 라이테이아 전기에서 니콜라이가 ‘위험해 보이니까 돈은 포기해야지’라고 한다면 진행자는 난감해집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신호를 주는 것이겠지만, 다른 신호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난감함은 더욱 깊어집니다. 신호 중심 진행에서 진행자가 준비한 이야기는 주인공의 목적과 욕구를 통해 표출된 참가자의 흥미에서 나오는 것이고, 참가자가 이 흥미를 잘못 표시했거나 흥미가 없으면서 진행자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더이상 진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신호 중심 진행에서 이야기는 참가자 혹은 주인공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진행자가 상황을 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스스로 행동하며 사건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뭐 언제든 막힐 수는 있고, 그럴 때면 주인공이 반응할 수밖에 없게 진행자가 위기상황을 던져주는 것도 늘어지는 진행을 활성화시키는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참가자가 반응하다 보면 진행자가 또 그 반응에 반응할 빌미가 생기고, 그런 식으로 플레이가 이어지니까요.

참가자가 진행자가 주는 모든 신호를 거부하면서 위기상황에 빠뜨리면 불평한다면 그건  결국 플레이하기가 싫다는 얘기니까 맞아야 됩 플레이의 기본적인 사회계약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여자간 대화로 풀어가야 할 문제이지 더이상 진행 방식과 같은 플레이 내적 문제는 아닌 것이죠.

신호 중심 진행의 예만 들려고 했는데 결국 원래 글의 2부에 가깝게 됐군요. 어쨌든 제가 진행하는 방식, 내지는 지향하는 이상은 이런 것입니다. 당연히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법도 많이 있겠고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저와 방식이 다른 CB마스터님의 글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듯 다른 분들도 생각해볼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바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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