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없는 (No-Rule) 플레이에서 배울 수 있는 점

어제는 초보자님과 규칙 없이 진행하는 1:1 플레이를 조금 진행했습니다. 그때 대오각성…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깨달은 점이라면 무규칙 플레이에서 배울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가자 선택의 합리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무규칙 플레이에서 결과 판정을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참가자의 선택, 혹은 주인공의 선택뿐이니까요.

어제 진행한 플레이에서 증권회사 직원 유은호는 한밤중에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주차장의 으슥한 구석으로 가봅니다. 여기서는 조폭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은호의 존재를 눈치채는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규칙이 있는 플레이였다면 보통 기척 죽이기와 지각 대결 판정을 했겠지만, 무규칙 플레이에서는 그럴 자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에 띌만한 행동’을 하면 눈에 띄도록, ‘눈에 띄지 않을만한 행동’을 하면 조폭들의 눈에 안 띄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선택의 합리성에 결과를 맡기기로 한 것이지요. 은호는 시종일관 눈에 안 띄게 어두운 통로 쪽에 있었으므로 결국 조폭들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핸드폰으로 112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핸드폰이 매너 모드로 돼 있는지, 사람 죽이느라 바쁜(…) 조폭들이 과연 조용히 한쪽 구석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인지 등을 고려했습니다.

다음, 조용히 집 쪽으로 가는데 조폭들이 하필이면(!) 은호가 있는 통로를 통해 현장을 떠날 때는 조폭들의 걸음이 꽤 빠르니까 달리지 않으면 따라잡힐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달린다면 그 소리가 지하주차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울려서 은호의 존재를 들키게 할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지하주차장에 완전히 갈림길 없는 통로라는 것도 있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 좌우로 빠지는 통로도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은호는 좌측 통로로 빠져서 조폭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규칙을 사용하는 플레이라도 위와 같은 진행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반 플레이에서 기능을 굴리고 대결판정을 하는 와중에서 제가 종종 잊었던 한가지 요소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상식’입니다.

분명히 은호가 기척을 죽이는 실력, 조폭들의 지각 능력에 따라 위 장면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위의 장면에서 기척 죽이기와 지각 판정을 하면 재미가 있었을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쩌면 위 상황에서 대결 판정을 하는 것은 참가자의 판단을 짓뭉개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요? 즉 진행자가 제시한 상황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위험을 무릅쓰지 않겠다는 참가자의 합리적인 판단 (바로 아파트로 올라가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어두운 통로에 서있겠다는 판단)에 오히려 벌을 주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대결 판정의 결과가 참가자의 승리였다 하더라도,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 것만으로도 말이죠. 저런 상황에서 판정을 한다면 앞으로 참가자는 모든 위험이나 흥미의 소지를 피해버릴지도 모릅니다. 진행자가 과연 그걸 탓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참가자와 주인공에게 완전한 안전과 성공의 지대를 주는 것은 진행자와 참가자 사회계약의 중요한 일부인 것 같습니다. 학대당하는 참가자 현상 (내지는 캠페인을 떠나는 참가자 현상)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이 글은 무규칙 플레이가 규칙 있는 플레이보다 우월하다든가, 앞으로는 규칙을 포기하겠다는 요지는 아닙니다. 규칙과 주사위 굴림이 상식에, 그에 의거한 참가자의 합리적인 선택에, 그리고 진행자가 그 합리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를 물먹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회계약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주장일 뿐입니다. 규칙이 재미에 우선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몰라도 진행자로서의 저는 그런 주객전도에 빠지기 쉬웠다는 반성입니다.

2 thoughts on “규칙 없는 (No-Rule) 플레이에서 배울 수 있는 점

    1. 로키

      규칙이 있으면 합리성은 더이상 필요 없다면 좋겠지만 규칙은 책에서 나오고 합리성은 사람에게 나오는 게 문제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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