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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4): 숲의 보석, 알쿠알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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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마법진을 바닥에 그린 방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것은 양옆에 까마득히 솟아오른 암벽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고운 잿빛
먼지를 날리는 가운데 얼굴에 문양을 문신한 엘프 여자가 다시 주문을 몇 마디 중얼거렸고, 잠시 후 이번에는 협곡 대신 햇살 가득한
숲이 나타났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머리 위의 새울음에 섞인지 한 호흡 후, 그들은 숲의 또 다른 지역에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나무 사이로는 왼편으로 찰박찰박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공기는 약간 서늘했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엘프 두
명이 대원의 수에 맞게 말 몇 마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이동하지요.”

엘프 여자는 지팡이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솜씨로 맨 앞의 순한 눈을 한 백마에 올라탔다. 정갈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뛰어난 혈통과
훈련이 돋보이는 말을 아스타틴과 다른 요원들이 하나씩 잡아타는 동안 아라는 가우르에 올라탔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들은 숲의 생동감 넘치는 고요, 점점 가까워오는 물소리 속에서 말을 달렸다.

“이쁜아이 상처는 괜찮아?”

아라가 가우르를 아스타틴의 말 옆에 붙이자 말은 신경질적으로 히힝거렸다. 아스타틴은 그런 말의 고삐를 필사적으로 당기며 귓가에
낮게 속삭여 간신히 말을 진정시켰다.

“니아가 침발라서 고쳐줄까?”

그녀는 검지를 입안에 넣었다가 히이 웃으며 들어보였다.

“아, 괜찮아요…”

아스타틴은 말고삐를 당기면서 부드럽게 말의 옆구리에 발뒤꿈치를 찔러 가우르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입가에 팽팽한 긴장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지만, 자신을 ‘니아’라고 하는 아라를 보는 눈빛에는 연민의 기색이 어렸다.

나무 사이 간격이 띄엄띄엄해지고 땅이 내리막길이 되면서 선두의 대원이 잠시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이어지는
나무들 너머로 완만한 골짝에는 평온한 강물이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굽이쳤다. 강가의 숲속에 희게 빛나는 도시의 탑과 지붕이
나무의 녹색 사이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뻗어올랐다. 대원은 그 모습을 가리켰다.

“알쿠알론데입니다.”

알쿠알론데는 돌 하나하나에도 마법이 서린 도시였다. 넓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정교하게 조각한 수정을 정확한 각도에 통과해
거울과 작은 인공 연못에 반사하고 굴절하며 대리석에 닿는 데마다 작은 빛무리가 일었다. 그런 곳마다 깊고 차분한 마법의 기운이
작은 불씨처럼 튀어오르는 것을 크세노바는 눈을 감고도 영안으로 ‘볼’ 수 있었다. 마탑에서 수련한 것보다 한층 더 견고하고 오랜
힘, 대지의 뿌리만큼이나 깊은 마력이 희미한 진동이 되어 그의 피부에 닿았다.

벤치에 앉아 뒤의 따뜻한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그는 안힐라스에 처음 도착한 순간을 떠올렸다. 이곳 실라엔(주:엘프어로 ‘빛나는 눈’) 탑 상층의 회의실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꼴사납게 등장한 후, 마탑 대표로 온 그는 그곳에 있던 노스탤지아 지도부를 소개받았었다. 학자 루크 폰 디엠,
냉엄한 얼굴의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크로이엄, 호탕한 성격 이면에 전사의 혼이 엿보이는 드워프 곤드 엔가마르, 고귀한
아름다움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감춘 엘프 여왕 이사벨라, 차가운 불길처럼 안으로 타들어가던 다크엘프 샤나에리스.

소개 끝에 그는 동료를 배정받을 때까지 실라엔에서 대기한 후 그들과 함께 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힐라스를 침략하고 정복하는 인간 국가들을 몰아낸다는 거대하고 두려운 목적을 품고 모인
그들, 노스탤지아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 나부랭이는 놀이판 위 많은 말 중 하나일 뿐이리라. 판을 전부 볼
수도 없는 게임에 뛰어들어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놀이말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희미한 불쾌감이 들었다.

“하아…”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안힐라스는 안 오려고 했건만.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는 한쪽 눈을 떴다. 탑의 거대한 양쪽문으로 사람이 몇 명 들어서고 있었다. 지상층의 드높은 천장 밑에서 순간
개미처럼 작다는 착각이 들었던 그들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 중 하나가 지나치게 빠르게 가까워오고 있었다.
샤나에리스와 마찬가지로 검푸른 피부를 한 다크엘프 여자가 달려오며 내는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넓은 로비에 울렸다.

“와아~ 이쁘다아아아-”

크세노바는 나머지 한쪽 눈도 뜨며 주춤 일어섰다.

“혹시 두 분이 동료- 우왓!”

다크엘프 여자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머리칼을 잡아당기자 크세노바는 고개가 확 꺾이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팔을 휘저었다. 혹시
어린아이를 잘못 보았나 그는 여자를 곁눈질했지만, 조금 키가 작은 편이기는 해도 몸에 꼭 맞는 가죽 갑옷에 드러나는 굴곡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인의 몸이었다. 혹시 저주에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영혼 바꿔치기라든지?

“이쁘다 이쁘다! 니아가 이쁘게 해줄게!”

여자가 머리를 당기면서 갈랐다가 꼬았다가, 마구 엉클어놓는 통에 모발과 두피를 잃지 않으려고 머리를 기울인 크세노바는 들어온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서는 이런 게 인사법은 아니겠지. 니아라는 여자를 그들이 보는 황당한 시선으로 미루어 이런 행동이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짐작한 크세노바는 안힐라스에 대해 조금은 안심했다. 머리카락을 두고 줄다리기를 그만할 수 있으면 더
안심하겠지만.

“이, 일단 이것 좀 놓고.”

성가시기는 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화를 내기는 어려웠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금씩
니아의 주먹에서 구출해내고 그녀의 손가락을 살살 풀어내자 그래도 학습능력이 있는지 니아는 아까처럼 당겨대지는 않았다. 대신 완전히
떨어질 생각은 없는 듯 머리 한 움큼을 느슨하게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대원 중 하나, 엘프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귀가 지금까지 본 엘프보다 더 짧은 어린 청년은 크세노바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한쪽은 녹색, 다른 한쪽은 파란색인 눈이 특이했다.

“이번엔 저런 것도 동료입니까..”

“마침 모두 모여계셨군요.”

대리석 바닥 위에 가벼운 발걸음이 다가왔다. 키가 크고 당당한 체격의 엘프 전사가 안쪽 계단에서 로비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흰 갑옷에는 금 상감 무늬가 반짝였고, 하얀 망토가 걸음에 가볍게 나부꼈다.

“저는 펠러티리스의 엘윙이라고 합니다.”

크세노바가 엘프를 맞으러 걸어가자 니아라는 다크엘프는 여전히 그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왔다. 어미오리가
이런 기분일까. 엘윙은 앞의 크세노바와 니아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무표정하게 한켠에 선 귀짧은 엘프 청년—아마 하프엘프?—을
잠시 보다가 역시 인사했다.

“여러분에게 임무를 설명하는 한편, 마지막 동료 또한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동료 이야기를 하는 순간 엘윙의 예의바르던 표정에는 뭔가 싸늘한 것이 스쳐갔다. 엘프의 눈빛이 딱딱해지는 것을 보며 크세노바는
순간 폭력의 기운을 느꼈다. 뜨겁고 우발적인 분노가 아닌, 빙산처럼 차갑고 거대한 증오를.

“동료라고…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엘윙의 입술이 경멸, 혹은 악의로 희미하게 비틀렸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발걸음이 엘윙이 들어온 입구에서 다가왔다. 그 소리에 크세노바의 머리끝을 헝클어놓고 있던 니아도 고개를
들었다. 엘윙보다는 무구가 덜 화려한 전사 네 명이 중간에 인간 남자 하나를 두른 채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호위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크세노바는 직감했다. 엘윙이 ‘마지막 동료’ 이야기를 했을 때 보인 폭력의 기운을 이 인간 남자를 포위한
엘프 전사들에게도 느낄 수 있었다. 엘프들의 냉랭한 표정을 보며 크세노바는 점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동료라는 자는
아무리 봐도 범죄자 아닌가. 그것도 도둑 같은 수준이 아니라 가장 경멸스럽고 파렴치한 범죄자에게만 가능한 취급을 받는…

동료를 배정해준다더니, 동료가 저 하프엘프의 말마따나 이런 것들? 크세노바는 다시 영혼 밑바닥으로부터 스승에게 이를 갈았다.

전사들이 비켜서며 뒤로 물러나는 동안 그 인간, 마지막 동료는 오만한 눈빛으로 크세노바와 니아, 하프엘프 청년을 훑어보았다.
남자에게서는 어딘가 포식자의 냄새가 났다. 온 세상을 경계하는 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끝없이 정보를, 위험을 찾아 움직였고,
간편하고 실용적인 복장은 사냥꾼이나 숲지기 느낌이 났다. 그의 움직임은 야수처럼 느긋하게 우아하면서도 언제든 폭력으로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시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듯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은 아직 젊은이의 생김새였지만, 젊음의 맑은
순수는 전혀 없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은 표정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부조화가 역설적이게도 엘프와 닮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크세노바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 말을 꺼냈다가는 적을 만나기도 전에 이곳 엘프들과 먼저 전투를 벌이게
될지도 몰랐다. 스승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지.

한편 니아는 뭔가 그의 머리를 땋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는데, 덕분에 머리끝은 엉망으로 엉켜가고 있었다. 크세노바는 손을 저어 허공에
색색의 나비떼를 만들어냈다. 이쯤이면 주의를 돌릴 수 있겠지. 아니나다를까 니아가 ‘와아~’ 환호하며 나비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그는 엉킨 머리끝을 풀어내리며 마지막 동료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쪽 분은?”

크세노바의 물음에 인간 남자는 그를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엘윙이
대답했다.

“엘레베스의 자비로 목숨을 건진 죄수, 랜돌프 에디우스입니다.”

맛이 지독하기라도 한 듯 엘윙이 그 이름을 내뱉자, 이름의 주인은 재밌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불가피하게 이 인간을 여러분과 함께 배속시키라고 전달받았습니다만, 노예사냥꾼이던 천박한 잡니다. 동료의 예우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노예 사냥꾼… 역시, 그렇다면 저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쪽 해안을 중심으로 땅을 차지해 들어가는 인간 국가들은
무수한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노예가 되느니 싸우다 죽는지라 정도는 덜했지만—다크엘프를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려고 아예 이종족을 전문적으로 납치해다 파는 노예사냥꾼은 그 중에서도 특히 증오의 대상이었다. 엘프에게 붙잡히고도 에디우스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게다가 노스탤지아 대원으로 배속받은 점이 크세노바는 오히려 놀라웠다. 엘레베스라면 그들의 여왕, 이사벨라
에르쉬아 호르뉴를 말하는 것일 터. 아까 본 고아하고 슬픈 눈빛의 여성을 떠올리며 크세노바는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눈 짝짝이 하프엘프 청년이 랜돌프 에디우스를 노려보는 시선은 크세노바를 볼 때보다도 한결 차가웠다. 그래도 노예사냥꾼보다는 좀
위라니 나름 다행인 건가. 아마도 인간의 피가 섞였을 청년이 인간을 저토록 싫어한다는 것은 안힐라스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안힐라스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목에 건 펜던트가 왠지 무겁기만 했다.

나비가 다 없어졌는지 아니면 싫증이 났는지 니아는 크세노바를 지나 에디우스에게 다가가더니, 2m쯤 앞에서 멈춰서며 작은 코를
킁킁거렸다.

“피냄새가 나는 아저씨네.”

랜돌프가 배속받은 이유는 목적지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던 엘윙은 그런 니아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저분은 왜 저러시죠?”

“사냥꾼이야..”

그 반응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반쯤 감고 니아는 랜돌프를 보며 말했다.

“포식자의 본능.. 사람 사냥꾼..”

“다른 건 모르겠고…”

하프엘프의 경멸을 무시해버리고 크세노바에게는 중립적이었던 에디우스의 눈빛은 니아에게 머물렀다. 그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는
엘윙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지?”

범죄자가 한 것이긴 해도 좋은 질문이었다. 저주, 영혼 바꿔치기, 아니면 그냥 광기? 원래 성격? 어느 것이든 니아가 노스탤지아
유격대의 일원이 될 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았다.

엘윙은 마치 질문을 넘기듯 하프엘프를 바라보았지만, 청년은 내가 아느냐는 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협조성은
있는지 그는 니아를 불렀다.

“니아.. 이리와요.”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니아에게 말하면서 그의 턱선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뭔가 갈등하는 감정과 싸우는 것처럼… 이
청년 역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으리라는 생각이 크세노바는 문득 들었다. 엘프란 헷갈리는 족속이었다.

“나비야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달래줘야죠.”

음? 나비는 이제 없어졌는.. 하프엘프 오른편으로 시선이 미친 크세노바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떨어졌다. 환하고 하얀 실내에서 잘라낸 한 조각 어둠, 커다란 검은 짐승이 노란 눈을 빛내며 랜돌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 동물원에서 본 적 있는
표범과 비슷하지만 훨씬 큰… 여기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 꿀꺽하실 수 있는 맹수가 소리도 없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크세노바는 소름이
끼쳤다. ‘나비야’가 언제든지 뛰어오르려는 듯 웅크린 자세, 그리고 그 근육질 목에 곤두선 털을 보고는 이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본능이 발동해 순간 정신없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계는 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위험은
없다고 이성은 겁에 질린 본능을 다독였지만, 여전히 크세노바의 발은 머리의 제어와는 상관없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했다.

니아는 득달같이 그녀의 나비야 곁으로 달려갔다. 앞발 한 번 휘두르면 그녀의 두개골을 계란처럼 부숴버릴 수 있는 짐승의 목을
그녀가 끌어안고 청년과 뭔가 재잘거리는 동안, 랜돌프는—그를 노려보며 낮게 으릉거리는 맹수를 곁눈으로 경계하며—건조한 표정으로
엘윙에게 말했다.

“날 불러내서 이놈들과 함께 묶는 걸 보고 사실 이 일행이 버리는 돌이라는 건 대충 파악할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니아에게 향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녀석까지 일행에 있다는건 좀 웃기지 않나?”

어디선가 스승이 정신없이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을 느끼며 크세노바는 이를 악물었다.

‘영감님 어디 두고 보십시다…’

“다 모이셨으니 임무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랜돌프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엘윙은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맹수가 위험해지지 않나 보려고 다시 곁눈질을 하다가 크세노바는 니아가 멍하니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 전에 만난 이래 그녀가 가만히 있었던 건 한 순간도 없었기에 이색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뭔가 답변해주고
있던 하프엘프를 어리둥절하게 보다가 니아는 눈을 깜박이며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의 그 이상하게 들뜬 웃음기가 사라진 채 그녀의
검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뭐지?

한편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 뜯었던 엘윙은 명령서를 보고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마굿간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말은 없어지고
돼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의 표정이랄까. 물론 크세노바가 그런 장난을 아카데미의 동료들에게 친 적은 없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지?”

이제 목소리마저 어린아이 목소리가 아니라 가라앉고 냉정해진 다크엘프 여인이 물었다.

“그게..”

잠시 더듬다가 냉정을 되찾고 엘윙이 말했다.

“에미넴 숲 서쪽의 페어리 마을로 이동해서…”

무엇 때문에 엘프가 저렇게 당황했을까 생각해보던 크세노바는 엘윙의 다음 말을 놓칠 뻔했다.

“축제… 준비를 도우라는 명령입니다.”

페어리라는 말에 눈쌀을 찌푸렸던 랜디는 그 말에 눈썹을 쳐들었다. 엘윙은 그 일대에 오크 활동이 늘어났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축제 준비라니? 설마 잘못 들었겠지?

”…페어리 마을의 축제 준비라고 하셨습니까?”

크세노바가 묻자 엘윙은 나도 모르겠다는 듯 하릴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은 누가 내린 것인가.”

니아—정말 니아?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기분이 변할 수도 있나?—의 목소리는 차갑고 고압적이었다. 짝짝이눈 청년이 엘윙에게 이동
위치를 확인하는 동안 다크엘프는 엘윙의 손에서 명령서를 잡아채더니, 잠시 읽고 땅에 내던지듯 버리며 돌아섰다.

“평소에도 시끌벅적하니 정신없는 놈들이…”

랜돌프 에디우스는 이마를 짚으며 끄응.. 신음을 흘렸다. 니아는 그런 그를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그쪽 인간. 페어리들을 아는가?”

“물론이다.”

랜돌프는 팔짱을 꼈다.

“그 날파리같은것들이 아니었으면 난 여기 잡혀와 있지도 않을 테지.”

“그들의 날개를 뜯어서 마석으로 만들려다가 잡히기라도 했나보군.”

니아의 입술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어렸다. 아니, 좀전에 노예사냥꾼 소리를 못 들었나? 혹시 나비에 너무 열중하느라 몰랐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일관성이 없는 그녀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 노예사냥꾼이라고 하더군요.”

하프엘프 청년은 툭 흘리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니아가 이렇게 변한 때부터 꾹 다문 입과 어깨선의 긴장은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그는 니아의 이런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고 있거나 최소한 익숙한 모양이었다.

다크엘프 여성은 순간 정지했다가 랜돌프를 다시 보았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엘프들만큼이나 깊은,
그러나 폭력의 기운이 더욱 검붉은 증오가 배어났다.

“다사케타…”

뭔가 그녀의 언어로 모욕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크세노바는 그녀 자신의 적의보다도 주인에게 맞장구치듯 다시 으르렁거리는 맹수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주인도 짐승도 랜돌프를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던데, 다크엘프 쪽은 사람을 분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마저도
단정하기는 일렀지만) 맹수는 인간 남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노예사냥꾼은 저쪽’ 표지판을 들고다녀야
하나 그가 고민하는 동안 랜돌프는 니아와 나비야에게는 개의치 않는지 엘윙에게 에미넴 숲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후우.”

크세노바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고 머릿속에는 이미 돌아가면 스승의 의자 밑에 심어놓을 폭죽 목록을 짜고
있었지만, 기왕 이곳에 있는 김에는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빨리 돌아갈 수 있겠지.

“주 목적이 설마 축제는 아니겠고 가서 보면 뭐 알겠죠.”

“그곳에 가면 특별한 손님이 있다고 하더군.”

그를 흘깃 보며 니아가 말했다.

“너희들과 다니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특별한 손님? 니아가 엘윙에게 이동 마법진은 어디 있는지 질문하는 동안 크세노바는 니아가 명령서를 버린 데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아까 들은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쭉 읽은 끝에—노스탤지아 인장이 기억과 같은 것을 보니 위조는 아닌 모양이었다—드래고니안 요원 한
명이 마을에 도착해 있다는 대목에 시선이 미치자 그는 눈썹이 저절로 치켜올라갔다.

“가자, 아사나스.”

니아가 돌아서며 부르자 나비야, 아니 아사나스는 바로 일어나 주인을 따랐다. 드래고니안이라… 크세노바는 명령서에서 시선을 들고
아사나스에게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따랐다. 하프엘프 청년은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에디우스는 한숨을 쉬며
뭔가 페어리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 뒤따르면서 이 기묘한, 아니 어쩌면 최악의 일행은 임무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었다.

소감

써둔지 2주 가까이 된 분량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군요. 써놓고서는 다듬으면서 재촬영을 기다렸다가 소설화를 한지라… 랜돌프의 첫 등장 묘사와 그에 대한 크세노바의 반응이 쓰기 재밌었고, 나머지는 RPG 로그를 소설로 옮기느라 고심한 생각이 나는군요. 묘사 넣느라 이 피토하는 분량 같으니라고(..) 1화가 또 모든 것을 소개하는 첫부분이라 유달리 분량이 많은 점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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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3):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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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아스타틴은 전령이 주고 간 명령서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에 새 동료와
합류해서 15시까지 알쿠알론데에 귀환 보고.

다시 임무였다. 다시 동료를 만나고, 다시… 떠난다. 머리로 알고는 있었다, 노스탤지아에 있는 한 명령에 따라 임무를 떠날 것은.
그런데도 누가 죽고 누가 슬퍼하든 이 싸움은, 갈 곳과 할일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낯설기만 했다.

다시 사람을 알게 되고, 어쩌면 마음을 열고, 또 잃는다. 아스타틴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더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는가. 부모에 이어 텔루르마저 죽었을 때 그런 일은
이제 겪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 아시타를 만났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털과 커다란 온기를 찾았지만, 만져지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뒤늦게 이제 루테리온도 그의 곁에 없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정신 이상한 다크엘프 여자를 쫓아 떠났으니까. 그것이 녀석의 선택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머리로 아는 것들을 가슴은 납득하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명령서를 손에 쥔 채 무릎을 끌어올려 끌어안았다. 외로움만은 그에게 가장
오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라도 그를 버리지 않을.

창이 없는 방안은 쌀쌀하고 어둑했다. 창살 사이로 복도의 횃불이 비쳐드는 불안정한 조명 속에 구석에 비좁은 침상과 그 밑에 요강
외에는 텅 빈 가로 네 걸음, 세로 세 걸음의 좁은 방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었다.

방 한쪽 구석, 창살 반대편 벽에 양반다리를 하고 기대어 앉은 여인은 무표정하게 감방을 바라보았다. 횃불빛은
올려묶은 은백색 머리에 붉은 반사광이 되었고, 진회색 눈은 횃불의 흔들림에 따라 뜨거운 불길을 품었다가 싸늘한 어둠이 가득
고였다. 반들반들하고 검푸른 피부는 동상의 표면인양 미동도 없는 가운데 조각한 듯 또렷한 광대뼈와 작고 오똑한 코는 얼굴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꾹 다문 입술을 살짝 비튼 표정에는 폭력적인 잔인성과 드높은 긍지가 동시에 드러났다. 튜닉과 바지
위에는 가벼운 가죽 부분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황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무기는 없었다.

발걸음이 들려오자 여자는 긴 귀끝이 살짝 까딱거리면서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인 채 창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라니아카? 알라스입니다.”

감방에 앉은 여인과 비슷한 검은 피부와 긴 귀를 한 여인이 가죽 갑옷에 무장을 한 채 다른 전사들과 함께 창살 밖의 복도에 섰다.
알라스의 눈짓에 전사 둘이 앞으로 나서 창살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라니아카는 벽 구석에 다시 몸을 기대며 물었다. 알라스는 그런 그녀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장로회의가 아라의 처분을 결정했습니다.”

잠시 움직임 없이 앉아있다가 아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서도 알라스보다 키가 작았지만, 턱을 치켜들고 상대를 쏘아보는
그녀의 태도는 당당했다.

알라스 뒤에 있는 전사가 말없이 다가와 아라에게 짧은 칼 한 자루와 화살, 그리고 꽉 찬 화살통을 건넸다. 아라는 눈쌀을 찌푸리며
처음으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면서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눈빛은 묘하게 간절했다.

“오지 않으시는가.”

“프리야 마타께서는 바쁘십니다. 그리고…”

알라스의 표정은 냉정했다.

“아라니아카는 프리야 마타의 자비에 의해 노스텔지아의 요원으로 활동하시게 될 겁니다.”

“뭐?”

아라는 눈을 부릅떴지만 알라스는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이미 노스텔지아의 마중이 나와있습니다.”

알라스는 허리의 대검을 철컥거리며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죠. 거기에 그대의 가우르도 있습니다.”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걸어가버리는 알라스의 뒷모습을 아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따랐다. 전사들은 어느새 그녀 주변을 두른 채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들의 무기와 수에 시선이 미친 아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칼을 찬 후 화살통과 활을 메었다. 절도있게 걸음을
옮기자 전사들은 일제히 그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걸어가는 아라니아카의 눈동자 속에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횃불의 불길이 비쳤다.

노스탤지아 대원들 사이에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아시타를 죽인 것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라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든지,
심지어 그녀가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합류해서 동료로 대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지도부와 가까운 지위 때문에 오히려
고속승진할 지 모른다거나, 심지어 아시타의 죽음 자체가 노스탤지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다크엘프의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연락 기지의 회의실에서 새 동료를 기다리며 아스타틴은 어디까지 믿을 만한지 알 수도 없는 그 소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불안할
때면 쉽게 퍼지는 류의 근거없는 풍문이라 하더라도 들을 때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할 의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열심히들 얘기해준 덕분에 생각하기도 싫은 구설수는 폭넓게 섭렵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동료들과 서서도 그들끼리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좀 일하게 했다가 고속승진시켜서 지휘권을 쥐어줄지도…’
‘경력관리라는 거로군. 역시 백이 든든해서…’ ‘그걸 우리가 호위할지도 모른다고…’

눈을 감으며 아스타틴은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귀는 더욱 예민해지기만 했다. 대원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사가 죽었는데 그
죽음이란 결국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수단, 권력다툼의 한 수, 이용해먹기 좋은 혼란일 뿐이었던가. 아시타는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창가에 서서 내다보던 대원 하나가 밖에 대고 턱짓을 했다.

“저기 프리야마타의 의자매 나리가 오시는군.”

대원들은 웅성거리며 창가로 몰려갔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쳤다.

“여 아스타틴. 너도 와서 보라고. 꽤 위풍당당한 행차인걸.”

아스타틴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시타를 죽인 살인자를. 어떤 감정이 또 몰려올까, 얼마나 더 다칠까
두려워서 눈도 감고 귀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느새 이끌리듯 창으로 향했다. 살벌한 표정의 전사들에 둘러싸여
걸어오는 다크엘프 여자가 보였다. 어깨에 멘 저 활이 어쩌면 아시타를… 그는 속이 뒤틀렸다. 호위하는 전사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쳐든 머리나 당당한 걸음은 조금도 죄수의 태도나 심지어 일말의 죄책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
일행은 건물 문으로 들어와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귓가에 심장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뭔가 해야할 것, 할말이 있을 것 같았는데 무엇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그들 같은 말단 대원이 뭐라고 생각하든, 아무리 분노하든 저 여자는 동료라는 이름으로 아시타의
자리를 차지한 채 저리도 뻔뻔하게 활개치고 다닐 텐데.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동안 당도했는지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분노와 적의가 재 밑에 숨은 불씨처럼 시무룩하게 타는 방에 다크엘프 일행이 들어섰다. 선두의 전사들이 비켜서자 그들이 호위해온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방안에 있는 사람 대부분보다 키가 작았지만, 자신을 향해 꽂히는 시선을 일체 피하지 않은 채 어깨를 뒤로
젖히며 고개를 쳐드는 그녀는 그들을 올려보기커녕 오히려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는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으며 평가하고, 이내 무시해버렸다.

아. 그녀가 같이 온 다크엘프 전사의 우두머리에게 몸을 돌리는 동안 아스타틴은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냈다. 아시타가 죽기
전날, 그 기억의 검고 탁한 물 너머에서 루테리온과 함께 멀어져가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런 자들과 함께 싸우라는 말인가.”

기억 그대로 냉랭한 말투로 그녀는 다크엘프 전사에게 말했다. 전사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아라니아카.”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 그녀가? 아스타틴은 숨이 턱 막혀왔다.

“아라…니아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아, 너인가.”

그녀는 마치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듯 무덤덤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는 것일까?

“당신인가요?”

아라니아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여전사를 돌아보았다.

“인간과 혼혈들을 동료로 대하라는 말인가?”

적대감으로 더욱 무거워지는 공기는 개의치도 않고 그녀는 여전사와 가시돋힌 말을 주고받았다. 프리야 마타와 이야기하고 싶다며
항의하는 그녀에게 전사는 이것이 프리야 마타의 뜻이라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양어머니에게 배운 다크엘프어를 알아듣는 것은
어려움이 전혀 없었지만, 생각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들의 대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내려가지 않아서,
어떻게든 내보내지 않으면 까맣게 타버릴 것 같았다.

“저년이 그 의자매란다. 아시타를 죽인 놈이야.”

옆에서 동료가 속삭이는 소리는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아시타…’

그러는 동안 아라니아카를 이곳으로 데려온 전사는 그녀에게 종이쪽지를 내밀고 있었다.

“배속 명령서입니다.”

아시타를 죽인 여자는 동족의 전사를 노려만 보면서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받으라고 해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나았다. 감사하다며 굽신거리며 두 손으로 받들어도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아시타?

“프리야 마타께 또 다시 폐를 끼쳐드릴 생각이십니까?”

“폐?”

아라니아카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 때 내가 얼마나 폐를 끼쳤는지
프리야 마타께 직접 묻지 그러느냐.”

“노스탤지아 배속은 프리야 마타께서 직접 지시하신 상황입니다.”

두 여인 사이에는 길게 침묵이 흘렀다. 그 속에 무엇이 오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동료들과 함께 폭력의 기운을,
바람의 방향을 알릴 어떤 신호를 찾아 주시했다.

마침내 아라니아카가 손을 움직이자 몇몇은 움찔 긴장했지만, 그녀는 손등으로 상대의 손을 탁 쳐서 명령서를 떨어뜨리게 했다.

“받은 것으로 치거라, 알라스.”

그녀는 전사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네가 더 관여할 일이 아니다.”

“받지 않으셔도 이미 처리는 끝나 있습니다.”

알라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빛에는 가까스레 억누르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는 그럼 이만.”

아라니아카에게 목례하고 알라스는 몸을 돌려 전사들과 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동안 아라니아카는 가만히 그들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대원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여전사는 입을 열었다.

알라스와 그 부하들이 나간 문을 노려보면서 아라는 눈앞이 잠시 어질거렸다.

“동료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낮고 정확하게 유지했다. 언제 감히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는 신분이었다고 알라스 따위가…

“지금이라도 덤벼보거라. 여럿이라도 좋다.”

감히 프리야 마타의 권위를 업고 죄수 취급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 라스카야의 딸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를?

부족했다. 가슴에서부터 시작해 팔다리, 손끝까지 전율하는 이 불길을 끄기에는 너무나.

“여..이거 대단한 배짱녀가 납셨구만그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며 ‘동료’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을 달게 된 자들을 마주보았다. 인간과 인간 혼혈들,
노스탤지아가 오기 전이라면 이 땅에서 마주치자마자 죽여버렸어야 할 자들.

“아니면, 노스탤지아에는 전사다운 전사가 없는 것이냐?”

그녀는 팔짱을 끼며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피가, 격한 동작과 위험이 필요했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동료의 복수를 하려는 친구 하나 없다니, 죽은 그 튀기놈이 불쌍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하면 다들 거세한 염소가 아닌 이상 움직이겠지. 어쩌면 이곳에서 그녀가 공격당하면, 심지어 죽으면 노스탤지아와의 동맹은
돌이킬 수 없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름 합당한 처벌 아니겠는가? 놈의 동료들에게 죽는다면.

“어이, 정신나간 아가씨. 지금 댁 처지를 이해 못한 모양인데…”

인간 하나가 울컥하며 나서자 옆에서 그의 동료가 말렸다. 겁쟁이놈들. 어째서 나서지 않는가? 동료를 살해한 살인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복수하지 않는가.

왜 응당한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라는 이를 악물면서 손끝이 떨려왔다.

“당신 역시 전사를 자칭할 자격은 없다고 보는데요.”

침묵 속에 그 하프엘프 녀석, 아사나스를 넘겨주었던 젊은이의 목소리는 유달리 맑고 또렷했다. 그녀를 노려보는 눈에는 깊은 슬픔의
그늘과 차가운… 경멸이 어렸다. 노스탤지아 대원들은 조용해지면서 동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크엘프 여전사라면 최소한 명예는 지킨다고 들었으니까요.”

“명예라…”

쓴웃음을 지으며 아라는 아마도 이 어린 녀석을 키웠을 타하이샤를 떠올렸다. 그런 소리는 타하이샤에게 들은 것이었을까? 민족의
언어를 할 때면 그녀의 억양과 말버릇이 묻어나듯, 그런 순진한 명예관념도 물러빠진 어미에게 배웠겠지.

“저런 것이 동료입니까…”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청년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일부러 등을 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배웠을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생명을 포기한 것일까. 아시타라는 그 인간 튀기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의미였다면 둘은 어쩌면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리드와 생전의 이잔야르처럼? 셋째 남편을 비롯해 너무 많은 이가 쓰러진 그 비탄의 날 이후 하리드를
처음 만났을 때, 수 년의 포로생활에서 갓 돌아온 자신보다도 어쩌면 하리드가 더 변해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었다.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실망이었지만, 슬픔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한 모욕을 마음쓸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돌아서서
나머지 대원들에게 말했다.

“덤비기에는 다들 너무 겁쟁이라면 자리를 옮기자꾸나.”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들어가라는 것은 그녀를 살해하려는 함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노스탤지아가—그리고 어쩌면 가장 불안하게도—샤나에가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새삼 궁금해졌다.

“이 우스운 희극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지?”

“짐싸들고 이동할 준비나 하지 그래. 간만 큰 아가씨.”

인간 남자 하나가 이죽거렸다. 손등으로 저 얼굴을 후려쳐서 버릇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아라는 생각했다. 이런 무례를 참아내는
것이 샤나에가 내린 진짜 형벌일지도 모른다.

“아스타틴과 함께 가야할 테니 등뒤나 조심하라고.”

대원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 무례한 원숭이들을 성안에 들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죽은 튀기는 최소한 예의는 있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엘프 아이야.”

나중에라도 연인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실감이 나면 마침내 용기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들에게 기척을 죽이는 법쯤은 제대로
가르쳤겠지, 타하이샤? 틈을 봐서 확 해치워버리라고 대원 하나가 아스타틴에게 부추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가치가 있는 상대라면요.”

하프엘프의 목소리는 방안의 크고작은 소음 위에 또렷하게 울렸다. 가수나 시인 재능이 엿보이는 좋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나오는
목을 잘리지 않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공격할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전사도 아니죠.”

하프엘프는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대원에게만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연인을 잃고서도 직접 얘기할 용기조차 없어?
그렇게 가르쳤는가, 타하이샤?

”…저희 양어머니께서 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배우자를 잃고 연인마저 등을 돌리는 기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많은 것을 참아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죽임을 당한다 해도 정당한 복수이리라. 그러나 그녀가 옆에 있는데 마치 물건 얘기하듯 평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진귀하지
않은가, 흑요정이라니? 여인답게 꾸며놓으니 문명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다시는 사람 아닌 물건이, 소유물이 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하고 또 맹세했었다.

“어이, 아가씨. 가자고.”

툭툭 치는 손을 그녀는 탁 쳐냈다. 라스카야의 딸 아라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 한 집안의 가장, 한 부족의
전사, 무엇보다 세계수의 딸 중 가장 용맹하고 지략있는 전사와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자매였다. 그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도
그녀는 그 누구의 소유도, 부속물도 아니었다. 누구도 그녀를 지각력도, 목소리도 없는 물건처럼 평할 수는 없었다. 샤나에리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너희가 놀기 싫다면…”

돌아서면서 그녀는 허리의 칼집에서 칼을 휙 빼며 공중에 던져올렸다.

“내가 가겠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녀는 허공에서 칼을 잡아챘다. 앞에 두 명의 대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 한 명과 어깨를 부딪치며 그녀는 둘 사이로 쉽사리 빠져나와 하프엘프 아스타틴, 타하이샤의 아들에게
다가섰다.

“어…어! 지금 뭐하는 거야?”

그들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을 때 이미 그녀는 하프엘프의 목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내
칼끝이 하얀 목에 닿았다. 머리부터 부딪힌 아이는 잠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그녀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고요하고
무표정했다. 마치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더 상처는 받을 수도 없다는 듯이.

“왜요?”

아스타틴이 속삭였다.

“죽이시게요?”

“죽고 싶느냐, 아이야?”

그녀는 칼을 통해 그의 맥박을 느낄 정도로 지그시 눌렀다. 서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이 순간은 묘하게 친밀했다. 피와
생명을 걸고 맞서는 순간만큼의 친밀감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 정신나간 계집, 어서 떨어져라!”

뒤에서 놈들은 무기를 뽑고 있었다. 어지간히 상황 파악이 느린 자들이었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목숨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둔하다면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가까이 오면 이놈부터 죽는다.”

“죽어봤자 슬퍼해줄 존재들은 이미 가고 없으니까요.”

아스타틴은 그들의 대화가 끊기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맑은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 녀석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자비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은 이유로 의미를 잃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버리려는 영원한 중간자, 이 혼혈 아이에게는.
그렇게 할까, 타하이샤? 여기서 끝내고 그의 분노한 동료들에게 죽고, 그렇게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키고 영원한 망각으로
내려가 버릴까? 그렇게 하면 내가 더는 폐가 되지 않을까요, 샤나에?

녀석의 연인, 그 하프다크엘프가 쓰러지던 모습이 그녀는 문득 떠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갇힌 채 수없이 떠올렸듯이.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에게도 물러나라고 경고했었다. 그대로 노스탤지아의 뜻대로 놀아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너무나 많았지만, 그 이유는
하나하나 입속에 재와 모래 같은 맛이었다.

그녀는 살인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기 이 어린 녀석의 멍든 눈빛에 너무나도 뚜렷했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샤나에리스는, 혹은 노스탤지아는 무슨 의도인지 그녀를 살렸다. 이래놓고 죽음으로 도망칠 수 있는가. 마치 도살당하는 새끼양처럼
무력한 이 젊은이까지 길동무로 데리고?

“정말로 분하다면 칼을 들고, 나를 죽일 준비가 되었을 때 해라.”

전사의 명예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타하이샤, 샤나에리스, 자신 모두 지금보다 젊었던 날들의 기억이 아련했다. 그때는
아직 세상에 대해 신뢰가 있었다. 시련은 극복하고, 싸움은 아름답고, 전우는 믿을 수 있던 그런 때였다.

“젊은 녀석이 등뒤에서 노인처럼 푸념하는 소리는 듣기 성가시구나.”

동맥을 피해 칼로 목을 얕게 긋자 청년은 작게 움찔했다. 생에 미련을 심어주는 방법으로는 작은 고통만한 것도 없는 법이었다.
그에게 웃어주며 아라는 칼을 닦고 칼집에 꽂으며 돌아섰다.

“썅! 저년 묶어!”

대원들이 몰려와 팔을 뒤로 세게 당기자 아라는 작은 윽.. 소리를 삼켰다. 뭐,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오히려 부족했다. 벌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바란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피곤했다… 눈꺼풀 뒤에서 몰려오는 편안한 어둠에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맡겨두고 쉬면 되겠지, 잠깐 동안만.

“어, 이쁜아이다!”

표정없이 묶이던 아라가 돌아보며 갑자기 아이처럼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피났네~ 아야했어! 니아가 침발라줘?”

“저, 저기…”

작게 욱신거리는 상처에 아스타틴은 손을 댔다. 금새 손가락이 피에 젖었다. 곧 옷에도 젖어들어 축축해지리라.

“아라…니아카..?”

“연기하는 거야, 저거?”

대원 하나가 수근거렸다.

“혹시 정말 미쳤나…”

다른 대원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니아야!”

그녀는 아라의 얼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알아챌 수 있었다. 둘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니아…”

웃으면서 아스타틴에게 오려다가 니아는 포박 때문에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대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동안 바닥에 뒹굴며
해맑게 깔깔거리는 저 여자가 아시타의 원수, 방금 전에 그에게 칼을 들이댄 여인이란 말인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면 세상에 확실성이란 어디에 있는가? 응, 아시타? 텔루르? 누구라도…

그러나 죽은 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삶의 혼란과 불확실성에 내팽개쳐진 것이 살아남은 이들의 몫, 생존의 형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아스타틴은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감

아라가 엄청난 오해를 했군요. 과연 풀릴 날이 있을지 묵념(..) 아시타가 살아있었다면 애인 맞다고 하면서 아스타틴을 놀려먹었을지, 아니면 아라에게 기습 키스라도 해서 오해를 풀었을지 모르겠군요. 후자였으면 어차피 죽었을 테니 제명에 살다 간 게 맞을지도요.

장면 중간에 시점을 바꾸는 건 선호하지 않지만, 이 경우는 시점전환이 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 대원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라든지 대원들과 아스타틴의 심정은 아스타틴의 시점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웠고, 후반에 아라가 아스타틴을 공격하는 대목은 아라의 시점이 아니었으면 인물이 아스트랄로 날아갔을 테니까요. 그 서술 중에 아라의 배경이나 내면을 의외로 많이 끄집어낼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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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처음으로 스토리 진행이라는 게 좀 나오는군요. 쓰다 보니 앞에 난 엘모스 부분이 생겨서 두 파트를 같이 올립니다. 어차피 긴 쪽은 뒤에 메타포노비아 부분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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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엘모스: 세계의 등줄기

마법의 소용돌이에 색채와 선의 혼란으로 뭉개졌던 공간은 하나씩 자신을 재구성했다. 거의 수직으로 뻗어올라가는 험준한 암산, 바위가
흩어진 까마득한 골짜기, 위에는 흐릿하게 찌푸린 하늘, 저 멀리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의 행진.

골짜기의 한쪽 벽을 이룬 암산
중턱에 한쪽은 암벽, 다른 쪽은 낭떠러지인 길 위에 갑자기 나타난 두 젊은이는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들이 방금 이동해온 곳이
어디인지 확인했다. 그들과 함께 나타난 밤처럼 검은 거대한 큰고양이 맹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털었다. 청년 중 키가 작은 쪽이
고개를 저으며 옆의 맹수의 어깨를 가볍게 짚자, 함께 나타난 검푸른 피부의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지친 건가, 아스타틴?”

검은 피부의 청년보다 키가 반 뼘쯤 작은 금발 청년은 그를 돌아보았다. 산봉우리 사이로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금발머리
사이로는 뾰족한 귀가 손가락 하나 반 정도의 길이로 튀어나왔고, 허벅지 바로 위에까지 늘어뜨린 모포 비슷한 외투 아래로는
단순하고 튼튼한 양모 바지와 많이 걸어서 닳고 부드러운 가죽 부츠가 보였다. 넓은 이마와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매끄러운 볼의
윤곽과 살짝 뾰로통한 입술이 조금은 아이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맹수의 등을 마치 고양이 예뻐하듯 긁어주더니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고 머리야… 우리 이쁜이는 괜찮지?”

맹수는 노란 눈을 빛내며 그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이쁜이가 괜찮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아스타틴은 몸을 세우며 옆의 청년에게 몸을 돌렸다.

“순간이동은 몇 번을 해도 기분이 이상해.”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둘의 뒤편에는 사람이 계속 허공에서 나타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걸어서 이동하면 안 되려나.”

아스타틴은 투덜거렸다.

“편리해서 좋지 않나.”

검은 피부의 청년이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기자 아스타틴도 그를 따랐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회색 피부를 한 청년은 군데군데
구리빛이 섞인 흰색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뒤로 묶고 있었고, 튜닉과 바지 위에는 부분 가죽갑주를 걸쳤다.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긴
귀가 머리카락 사이로 비져나왔다.

“편리는 하다지만…”

불만스럽게 말하며 아스타틴은 여행의 먼지가 앉은 외투를 탈탈 털어냈다. 옆에서 맹수 이쁜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득 내보이며 길게
기지개를 켜더니 다소곳이 앞발을 핥았다.

“괜찮아, 힘내라고. 이제 마지막이니까 말이야.”

청년은 미소지으며 아스타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들의,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암벽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너 말야, 아시타.”

뾰족한 입술을 부루퉁하게 더 내밀며 아스타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을 텐데. 애 취급하지 말라고.”

“요오.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군.”

아시타는 손바닥이 연회색인 양손을 들어보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음에도 그러면 목을 확…”

아스타틴은 손으로 잡아채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봐, 난 말이야.”

아시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짐짓 과장되게 말했다.

“마법멀미를 하는 너를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네. 속으로 킬킬거리는 거 다 알거든.”

말하면서도 아스타틴은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얘기하면서 두 청년과 짐승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 암산 중턱의 큰 돌출부
위에 섰다. 발밑에는 거대한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놓고 여러 색의 준보석으로 상감한 둥근 부조가 거의 바닥 전체를 차지한 채 은은하게 빛났다. 앞으로는 험준한 산과 골짜기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흰 로브와 긴 녹색 외투에 후드를 쓴 여성이 바닥의 부조 가운데에 긴 지팡이를 세워들고 서있었다. 아시타와
아스타틴을 비롯해 각종 생김새의 사람들이 하나씩, 혹은 삼삼오오 도착해 마법진 위에 섰다.

“정숙해 주십시오.”

로브와 녹색 외투를 입은 여자의 엄숙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 위로 울렸다. 조용해지자 그녀는 후드를 내렸다.
드러난 얼굴의 이질적일 정도로 우아한 선과 형태 위에는 기하학적 형태의 문신이 가득 새겨 있었다. 백금빛 머리 사이로 나온 긴
귀는 아스타틴이나 아시타보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더 길게 뒤통수를 넘어 머리 뒤로 나왔다.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그녀가 지팡이를 쳐들며 음악적으로 흐르는 말을 길게 영창하자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면서, 발밑의 상감한 무늬가 눈부신 빛을 냈다. 그녀가
마치면서 지팡이를 내리치자 그 뒤틀림이 훅- 하고 부조의 한가운데로 빨려들면서 그 안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정적 속에 멀리서 새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새울음은 언덕 위로 구슬프게, 소름끼치게 울렸다. 비명을 지르듯, 혹은 흐느껴 울듯 높이는 목청은 잿빛 먼지를 싣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황량한 잿빛 언덕과 들판 위로 내렸다. 나무에 앉은 검은 새가 다시 찢어지는 목청을 높이는 위로는 높고 날카로운 목책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아래로 경사져 내려가는 언덕과 주변 평지에는 집과 농지, 가축우리가 펼쳐 있었다. 목책 위로 보이는 지붕은 몇 개 되지 않았지만, 몇 군데 난
문을 통한 사람과 수레, 짐승의 왕래는 그 안에 활발한 정착촌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목책 아래쪽,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는 나지막한 건물 몇 채와 그 가운데 큰
마당을 가슴높이 정도의 울타리가 두르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다리와 목이 유달리 길다란 새 한 마리가 울타리 주변에 난 얼마 안
되는 풀을 먹으며 걸어다녔다. 마당은 검푸른 피부와 긴 귀, 흰색이나 은색 머리에 가벼운 가죽 갑주를 입은 남녀 10여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빙 둘러 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마당 가운데에 공간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소리로 들리기에는 너무 낮은 진동이 공기를 울렸다. 마당을 두르고 있는 검은 피부의
전사들이 불안한 기색은 없이 살짝 긴장하는 동안 다리가 긴 새는 꿔억거리며 울타리를 따라 달아났다. 이윽고 그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고, 그 수는 점점 늘었다.

“저들인가.”

순간이동자들이 도착하고 있는 마당에서 언덕 위편의 목책에서는 울타리 안이 들여다보였다. 이곳에서는 두 명의
전사가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은 긴 망토에 후드를 쓰고 뿔이나 뼈로 만든 활을 둘러멘 채 목책에 기대어
있었고, 마당에 선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암회색 피부에 긴 귀, 얼굴에는 큰 흉터가 눈에 띄는 쪽은 대검을 차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사 쪽이 목책에 기댄 궁수를 돌아보았다.

“예, 마하스트린,(주:뛰어난 궁수를 가리키는 다크엘프어) 이번에 노스탤지아에서 보내는
전령단인 모양입니다.”

궁수는 하나하나 도착하는 전령단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허리에 찬 화살통에 가득한 화살 깃털을 어루만졌다. 후드의 그늘 속에
그녀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빛을 띄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대원을 보내는 것인지… 짐작이 맞다면…”

검사는 이제 살짝 안절부절 못하며 동의를, 혹은 대답을 구하듯 궁수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아라니아카? 정말 인간들이 뜻대로 하게 두실 겁니까?”

마당 가운데서 금발 청년 하나와 검은 피부의 청년이 치고받으며 낄낄거리는 모습을 내려보다가 아라니아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인간과 싸우려는 것이지 그들에게 지배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으면서 결연했다.

“라카’쟈나인,(주:다크엘프의 군사적 지도자, ‘붉은 여인.’ 흔히 ‘여왕’이라고 번역한다) 그 자리가 공석인 지금은 프리야 마타(주:라카’쟈나인의 후계자, ‘소중한 어머니.’ 흔히 ‘공주’라고 번역한다)께서 우리를 지휘하신다.”

마당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동맹이라고 자칭하는 인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그녀를 돌아보는 검사의 뺨에 흉터가 실룩였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저들이 프리야 마타를 알현하기 전에…!”

“서두르지 말거라, 칸드라사.”

궁수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저들의 요구를 듣고 나서도 늦지 않아.”

후드 아래서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오히려 그때가 가장 적기일지도 모르지.”

“아라?”

칸드라사가 불안하게 보는 동안 아라니아카는 화살통 위로 휙 망토를 덮고 목책에서 떨어지더니 유유히 남쪽 문을 지나 들어갔다. 문에 드나드는 상인과 농부, 전사들이 그런 그녀를 보고 인사했다.
아래편, 울타리 안에서는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이들이 경비서던 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칸드라사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역시 돌아섰다.
밑에서 다리가 긴 새는 다시 평온하게 풀을 뜯으며 가끔 하늘을 보고 꿔억거렸다.

다음날 밤…

다크엘프들의 도시, 메타포노비아의 밤은 적막했다. 가끔 밖에서 베하라쟈 새만 비명을 지르듯 우는 동안 아시타는 배정받은 숙소의 공동 접대실에서
부드러운 등잔빛 속에서 서류를 넘겼다. 가뜩이나 환영받지 못하는데 보고까지 대충 해서는 무슨 책을 잡힐지 모른다. 고요의 해안,
아렌 고원, 아나르 시릴에서 들어온 첩보를 보며 그는 머릿속에서 정보를 종합하고 정리했다. 십자군의 내륙 진출, 아렌 고원을 둔
각축, 록윌 요새와 연합개척기지의 존재와 확장하는 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림은 머릿속에 착실히 그릴 수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문에서 나는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손이 칼로 갔다가 그는 아스타틴이 아직 안 들어왔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환영하지
않는 다크엘프들의 눈빛 때문인가, 여기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노스탤지아 대원이 아니었으면 혼혈인 그는 이곳에 오는 순간 죽었다. 게다가
노스탤지아 대원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떨구었다.

“아직도 덜 끝난 거야?”

아스타틴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등잔빛 속에 그의 얼굴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늦었는데 적당히 좀 하고 쉬지.”

“아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이대로 가면 우리는 진다는 생각을…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일 뿐이었으니.

“가우르(주:표범 비슷한 검은 큰고양이과 맹수)는 어쩐 거냐? 밖에 매어놨나?”

늘 옆에 그림자처럼 따르던 루테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사냥이라도 하러 갔나?

잠시 침묵하며 아스타틴은 겉의 그 이불 같은 외투를 벗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네 녀석 단점 하나 말해줄까?”

등잔불 속에 그의 눈은 피곤하고 슬프면서도 어딘가 맑았다. 양쪽 색이 달라서 처음부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또렷하게 녹색과 파란색으로
빛났다.

“지나치게 일에 열심히야. 그리고 궁금증도 많고.”

“아가씨의 비밀이란 말이지… 알았어.”

아시타는 팔짱을 끼며 뒤로 기대앉았다. 아스타틴과 이야기하면 어딘가 기분이 편해졌다. 혼혈이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같은
아픔 때문일까.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누구에게나 가시부터 세우는 아스타틴에게서 이전의 자신을 알아보았고, 아시타 자신이 도움을
받았듯 아스타틴을 도와주고 싶었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원수 대하듯 하는데, 무리할 것 없잖아.”

아스타틴은 쌓인 듯 조금은 격앙된 어조였다.

“억지로 녀석들한테 아부하지 말라고.”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다크엘프 녀석들이 편견과 원한에 매달려 자멸하고 싶다면 그렇게 두라지. 하지만 무엇이
걸렸는지 생각하면…

“그런가, 내 입장에선…”

그는 문득 뉴 임페리얼 작전을 실행한 밤을 떠올렸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울지조차 못했던 노예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수천의 목숨을
생매장한 폐광을, 사람을 죽여 쓰레기처럼 버렸던 그 단체 무덤, 아니 시체 쓰레기장을, 굶어서 퀭한 얼굴의 아이들을, 파헤쳐진
숲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없는 사람들을.

알면서 좌시할 수 있는가. 다크엘프 몇이 좀 불친절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 있어?

”…좀 더 잘 풀렸으면 하는데.”

프리야 마타에게 전해야 하는 노스탤지아의 요청, 여기까지 몰린 그들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진통은 만만찮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 싸움의 주축이었던 이 긍지높은 민족이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원하지 않아도 또 다른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다크엘프들의 적의어린 눈빛,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대화. 사태는 노스탤지아 지도부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심각했다. 어쩌면 프리야
마타조차 잘 모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전사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스타틴.”

“응?”

혼자 뭔가 생각에 빠져있던 하프엘프는 그를 마주보았다.

“내일 보고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 가는걸로 하지. 너와 다른 녀석들은 숙소에서 대기하도록 해.”

“어째서?”

아스타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일 있어?”

“별거 아냐.”

아시타는 웃으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정말 별거 아닐지도 몰랐다. 쓸데없이 예민해져서 걱정만 많고, 이거 노인이 다 됐나. 아무일도 없이 무사히 끝난다면
나중에 아스타틴에게 그의 착각을 털어놓고 실컷 비웃음을 들으리라. 그러기를 바랐다.

“보고하는 자리에 입이 많으면 오히려 번거로우니까.”

등불 심지에 뚜껑을 덮어씌우자 불빛이 나갔다. 이제는 달빛만 방안에 고요히 비쳐들었다.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아시타는 걱정스러운 아스타틴을 보고 미소지었다. 누군가 걱정해주는 것이 얼마나 생소하고 반가운지 녀석은 알까.

“음. 아까 내 단점을 말해준 보답으로 이번엔 너의 단점을 말해주도록 하지.”

아시타는 손을 뻗어 아스타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누가 하고 싶어서 하냐. 시키지나 말지.”

그런 아스타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키고 싶은 전우,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에 너희더러 그
불투명한 먹구름 속으로 동행해달라고 할 수가 없다고. 혼자 살아온 혼혈에게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낯선 만큼이나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겠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신 그는 말했다.

“면담은 새벽녘이라고 하니, 푹 자둬.”

아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지나친 생각이겠지.

“다른 녀석들에게도 나 혼자 갈 거라고 전해두고.”

등잔과 서류를 집어든 그는 아스타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잠들 때까지 보고사항을 더 읽어보면 잠이 올 것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들어온 아시타는 침대가 탁자에 등잔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고요 속에 속삭이는 동안 작은 등잔빛만이 적막하고 거대한
밤을 몰아냈다.

아시타는 아침에도, 심지어 늦은 오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아마 열 번도 넘게 아스타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네 이녀석…”

오른손 손가락은 어느새 왼손 손등 위에 빠른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류트라도 연주하면 마음이 안정할까 싶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켜. 이러다가 ‘기다렸냐?’ 하면서 뻔뻔하게 웃으며 나타날 게 뻔했다.

아시타가 늦는다는 불안 이상으로 이곳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의 공기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문득 깨달았다. 묘한 침묵과 불편한 분위기,
대원들의 눈빛과 속삭임은 끊어지기 직전의 현처럼 잔뜩 긴장한 떨림을 손끝에 전달했다.

자신도 모르게 아스타틴은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그냥 두려워하는 무의미한 시간은 오래 전의
불쾌한 기억을 휘저었다. 아빠, 엄마는 언제 와? 아스타틴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갑작스런 소음이 오후의 침묵을 깨자 아스타틴은 화들짝 돌아보았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문이 우당탕 열리면서 급한 발걸음이 여기저기로 달려갔다.

“본부와 연락을 취해!”

“마법사! 연락 마법사를 불러!”

원하지 않으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문으로 향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아스타틴은 마당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다른 숙소 문을 쾅쾅
두드리는 사람, 마굿간에서 급히 끌어내어지자 고개를 쳐들며 히힝거리는 말, 언성을 높인 대화와 다급한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부딪혀 왔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해야 했다. 난 엘모스에서 같이 이동해온 동료를 알아본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손을 뻗어 그를
불러세웠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대원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가 그를 알아보고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스타틴.”

대원은 순간 피하고 싶은 듯 눈을 양옆으로 굴리다가 그를 마주보며 침을 삼켰다.

“아시타가…”

그의 목소리가 침중하게 가라앉자 아스타틴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혼자 가겠다고 하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게 무슨 잔혹한 장난이란 말인가. 텔루르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다크엘프들은 노스탤지아의 동맹이었고,
아시타는 사자였다.

아시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소란이겠지? 아니면 좀 다치기나 했겠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아스타틴은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죽었다. 회담장에서.”

대원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창백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그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사절이 왜? 동맹의 땅에서 왜? 아시타가 혼혈이라서? 어째서? 뭔가 착오가 있었다. 누군가의 농담이었다.
거짓말이었다.

빨리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를 바라며 쳐다보는 동안 대원이 하는 얘기가 조각조각 아무 의미도 없이 들려왔다. 본부와 사후처리 논의
중.. 네가 아시타와 가까웠다는 건.. 좀 쉬어두도록..

“장난…이라도 치시는 건가요.”

이 사람이 시인하지 않겠다면 아스타틴이 직접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지,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다만
머리가 너무 울려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장난 심한 건 알지만…”

류트 대신 너구리를 가방에다 넣어놓고, 연락 거점으로 간다면서 엉뚱하게 드워프 마을로 데려가서 밤새 술을 먹이던 게 녀석의 수법
아니었던가. 그런 아시타의 장난이 틀림없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비오는 날에 먼지나도록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그랬다. 그렇게 유쾌하게, 완전하게 살아있던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아시타?

“바로 어저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괜찮다고…”

그는 등뒤의 숙소에 손짓하며 바로 어젯밤에 멀쩡하게 저곳에 있던 녀석이 죽…었다는? (죽어? 그게 무슨?) 그런 소리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대원에게 열심히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그 완벽한 논리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끊어졌다.

“루카스!”

루카스는 그쪽을 쳐다보고 아스타틴을 다시 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아스타틴은 갑자기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멱살을 잡으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이 거짓말쟁이, 그 연민은 개나 줘버려. 아시타나 데려와! 그 녀석은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아스타틴… 이건 장난이 아냐.”

아스타틴은 갑자기 모든 분노가 사라지면서 힘이 빠졌다. 루카스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과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서 다리가 풀려왔다.

“미안하다.”

루카스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스타틴은 숙소 문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냐… 그럴 리가…”

왜 아시타가 죽었을 리 없는지 누군가를 설득해야 했다.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믿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사람이
이유도 없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잖은가. 그런 일은…

엄마 어디 갔어? 왜 안 와?

“어째서…”

아스타틴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막았다. 조금이라도 기댄 이는,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데려가고 또
데려가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막아내고 혼자만의 공간에 존재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다시는 아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슴이
꺼질 것 같은 이 고통을 또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목이 뜨겁게 메이더니 감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유쾌하게 웃던 아시타의 모습은 눈을 감아도 없어지지 않았다. 별거 아냐…
하던 그 뻔뻔한 얼굴이.

보고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 가는 걸로 하지.

아스타틴은 손을 내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을 뜨자 안개낀 듯 흐릿한 세상 속에 사람들이 아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래서 그 나쁜놈의 새끼가 혼자 간다고 했던 것인가. 억지로라도 혼자는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위험에는 함께 맞섰어야 했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죽어간 아시타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리면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나 때문이야…”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 말에 반박할 어떤 논리도 찾지 못하고 그는 가만히 앉아 고통을 숨쉬었다. 위기와 목표와 사명과 방향성을 띠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는 많은 이 가운데, 오직 혼자서.

“야 이 녀석, 여기 넋놓고 앉아있긴…”

아시타? 그러나 안쓰럽게 말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은 젖은 재 같은 진회색이 아닌, 기름진 흙처럼 풍부한
갈색이었다. 그 억세면서도 따뜻한 손에 이끌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아스타틴은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온기를 느끼며 (좋은 꿈 꾸렴, 아스타틴) 다시 기억이
끊어졌다. 어쩌면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놓쳐버렸지만, 누워있거나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다 보면 숙소가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일이 몇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루카스나 다른 대원이 한두 명 찾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에서 그는
원치 않아도 상황을 조금씩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다크엘프의 프리야 마타에게 다크엘프 부족 전사대 지휘권 이양이라는 노스탤지아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러 갔던 아시타는 회견장에서 다크엘프 여전사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 (전사. 여전사. 그들의 고위 전사는 모두 여자였다. 모닥불에 은은히 빛나던 텔루르의 하얀 머리칼이 기억을
스쳐갔다.) 인간 국가에 맞서싸우는 동맹 집단의, 설사 적이라 해도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사절을 다크엘프 전사가 쏘아죽였다.
프리야 마타의 눈앞에서.

그것이 프리야 마타의 배신이었다면 아스타틴도 다른 대원들도 여기에 앉아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리야 마타는 암살자를 구금할
것을 명했고, 노스탤지아에 알리며 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휘권 이양 문제도 크게 양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요?”

아스타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루카스는 잠시 쳐다보다가 불편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숙소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살이 갈색 피부에
반질반질 빛났다.

“뭐…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아시타가 죽었다는 얘기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든, 결과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든 못했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루카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문에까지 안내했다. 잘 좀 챙겨먹으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바쁜데 굳이 오시지 말라고
했다. 그가 가는 모습을 외면하며 아스타틴은 굳게 문을 닫았다.

소감

이번 분량은 대부분 1화 장면을 삭풍님, 오체스님, 저 셋이서 재촬영한 대목이군요. 재촬영한 분량 중 안 올라온 건 이제 한 장면쯤 남았습니다. 소수 인원으로 한 만큼 좀 더 긴 호흡으로 사건과 인물을 드러낼 수 있었던 점이 의미깊었던 것 같네요.

이번 화의 주축을 이루는 사건은 이 캠페인의 루바트 오르가나인 아시타의 죽음입니다. 성격 좋고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 캠페인 시작하기도 전에, 혹은 시작하자마자 자기희생하는 현상을 또 보니 재밌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 부분은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 소설 신들이 사랑하는…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1부에서 다룬이 형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의 반응이 생각나더군요.

슬픔의 다섯 단계 중 첫 번째는 부인이라던가요. (지금 장난쳐요?) 다음은 분노 (나쁜 새끼!), 다음은 흥정 (혼자 보내지만 않았어도…), 무기력 (방에서 시체놀이), 그리고 마침내 수용 단계라고 하죠.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순서인 건 아니고 또 단계가 서로 겹치거나 반복할 수도 있지만, 제 경험도 그렇고 글 쓸 때도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 단계를 따르게 되더군요.

아스타틴은 아시타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상처는 굉장히 크겠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엄마의 실종에서부터 시작해 사랑하는 사람을 대부분 잃은 정신적 외상을 건드렸을 것 같아서 어릴 때의 기억도 일부 넣어보았습니다. 상처받기 싫어 다시 사람을 멀리하게 된 그가 플레이 중에 그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가는군요. 그러나 아시타를 죽인 인물과 함께 여행하게 된 현실은 시궁창입죠.

처음이자 마지막일 아시타 시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좀 평면적인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겉보기와 다른 모습이 조금은 들어갔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죠. 안힐라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노스탤지아가 어떤 집단이며 싸움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 암시할 수 있었던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스토리 진행이나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너무 묘사만 해대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시타 시점으로 설명을 대신하니 어느 정도는 구색을 갖춘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래서 시점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점 하니, 메타포노비아 도착 장면도 지켜보는 다크엘프 쪽으로 시점을 바꾸니까 확 달라지는군요. 한편 아라의 살인은 계획적인 모살로 완전히 확정이 되어 인물은 점점 수렁에(..) 이렇게 악당에 가까운 PC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재밌습니다. 물론 랜돌프가 일행에 있는 한 일행 제일의 악당 자리를 먹기는 글렀습니다만… (죽여야지(?)) 아라 역시 플레이를 통해 어떻게 변해갈까 관심이 갑니다.

이 부분은 이전에 한 외전 어떤 작별과도 시간대가 겹칩니다. 아시타 시점 장면에서 숙소로 돌아온 아스타틴은 낮에 왠 정신나간 다크엘프한테 이쁜이를 뺏기고 허탈한 심정으로 종일 메타포노비아 주변을 쏘다닌 후겠죠.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시타의 죽음까지… 흑흑 불쌍해라, 위로하는 의미에서 랜디하고 BL 장면 써줄게요. (??)

전반적으로 이번 재촬영 플레이는 대사와 묘사가 다 좋아서 소설화하기에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좋은 마스터링과 플레이 해주신 삭풍님과 오체스님께 감사드리고요, 가차없는 피드백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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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1): 안힐라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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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1편입니다.

1153098952.html

벽에 높게 난 창문으로 봄 햇살이 비쳐들며 살짝 어수선한 작은 방을 비추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와 수정, 유리병 따위의 잡동사니가
흩어져 바닥에까지 일부 쏟아졌고, 옆의 소형 책장에는 커다란 책을 넘칠 정도로 꽂아놓아 언제 어느 책이 튀어나올지 위태위태했다.
좁은 침대 발치에 깔아놓은 싸구려 소형 양탄자 구석이 접혀 나무바닥이 드러난 데는 탄 자국이 보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브를 입은 깡마른 형체가 들어섰다. 허리까지 기른 황금빛 머리칼은 햇살을 끌어들여 품듯 빛나며 섬세한
얼굴선을 그윽하게 감싸주었고 가느다란 눈매와 매끈한 광대뼈, 유연한 턱선은 남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입을 벌리면서 나온 한숨은 완연한 남자 목소리였다.

“하아..”

청년이 침대에 몸을 던지자 이불과 침대보가 부풀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잠시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그는 끄응.. 몸을 뒤척여
등을 대고 눕더니 멍하니 햇살 가득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옷 속에서 목걸이에 매달린 펜던트를 꺼낸 그가 낮게 한 마디
중얼거리자, 펜던트가 열리면서 펜던트 뚜껑과 본체에 하나씩 두 여인의 초상이 드러났다. 작은 몸집에 수줍어보이는 긴 금발머리
여인을 그는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무른 쪽은 다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와 길고 우아한 목선,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갈색 눈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청년은 펜던트를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 저편에서는 예의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노바 사형, 스승님께서 부르십니다.”

“응, 간다.”

제노바라고 불린 청년은 펜던트를 다시 로브 속으로 떨어뜨리며 일어나 앉았다.

“크세노바라니까 다들 왜..”

궁시렁거리며 그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책상 가장자리에 버티고 있던 구슬 하나와 매끈한
조약돌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똑또르르 굴러갔고, 이윽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부르셨어요?”

제노바, 아니 크세노바가 입이 잔뜩 부어서 문을 연 방은 청년의 방을 물건의 양과 혼돈의 정도에 맞추어 확장한 느낌이었다. 네
개의 벽을 다 차지한 대형 책장과 선반에는 얇은 책자에서 남자 어른이 간신히 양팔에 안을 만한 크기까지 무수한 책을 비롯하여 약재가 든
병, 약간 놀라보이는 토끼니 쥐 등 작은 동물이 떠있는 커다란 유리병, 물이 없는 어항, 새장 속에 떠도는 빛무리, 속에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수정구, 온갖 크기와 색깔의 깃털, 말린 원숭이 앞발 등등 형언할 수 없는 잡동사니가 꽉꽉 차있었다. 다리끝이 맹수의
발처럼 생긴 거대한 책상은 종이와 책이 넘쳐나서 표면이 보이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긴 작업대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분홍빛 시약이 든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계속 중얼거리는
노인 옆에는 양피지가 펼쳐 있었고—종이가 더 싸고 좋다고 아무리 잔소리해도 듣지 않는 노친네는 있게 마련이었다—그 위에는 노인이
말하는 속도에 맞추어 깃털펜 하나가 혼자 열심히 움직이며 필기를 했다. 문이 열리자 마법사는 무성한 눈썹 밑으로 푸른 눈을 문으로
향하더니, 병을 내려놓고 의자에 뒤로 기대앉았다.

“왔냐, 이 망나니놈아.”

작업대로 다가가면서 마법의 깃털펜이 왔- 냐- 이- 잉크병에 뛰어들었다가 돌아와 망- 나- .. 하고 열심히 적는 것을 보고
크세노바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스승이 짜증스럽게 손을 젓자 깃털펜은 잉크를 몇 방울 흩으며 툭 쓰러졌다. 길게 누운 펜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들려온 것은 아마 착각이리라.

“어떤 일로 부르셨습니까.”

로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무심히 묻는 제자를 보고 노인은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왠만하면 너같은 놈은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제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의자에 깊이 기대앉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허리까지 닿는 길고 풍성한 수염은 그러기에 딱
좋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느냐.”

청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노인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하여튼 내가 왜 너같은 놈을 키웠을꼬… 아무튼 각설하고.”

스승은 작업대에 팔꿈치를 얹으며 제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안힐라스로 가야겠다. 임마.”

크세노바는 잠시 이 노인이 치매인가 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말했다.

”…좀 뜬금없는데.”

“왜 얼굴이 뚱하냐 이놈아?”

스승이 깃털펜을 잡아채서 크세노바에게 대고 흔들자 펜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서 끽 소리를 냈다.

“이 인자한 스승이 해외여행을 시켜주겠다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만 20일은 걸리잖아요.”

청년은 이런 말다툼을 자주 한 기색으로 팔짱을 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스승 역시 익숙한 기색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누군지 잊었느냐? 시간은 걱정 말거라.”

“아, 그러고보니 조만간 어머니 생신이군요.”

오랜 경험으로 패색을 느꼈는지 청년은 조금씩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 불효자식이 되기 싫으니 역시 그냥 가보겠습니다.”

크세노바가 잽싸게 문고리를 잡는 것을 보고도 스승은 느긋하기만 했다.

“어쨌든 그쪽과도 얘기가 끝났고…”

청년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지만, 노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얘기했으니 잘 다녀오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좀…”

청년이 방문을 열면서 도망치듯 나간 순간, 갑자기 부웅- 소리가 나면서 그 주변의 공기가 묘한 왜곡을 일으켰다.

“아 영감님 이러시기요!!”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청년의 고함 위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네놈이 그러리라는건 마탑의 현자 12인중 12인이 동의한 사항이지.”

크세노바의 금빛 머리카락을 더욱 눈부시게 물들이며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그 빛 속에 그는 이를 갈며 스승을 돌아보았다.

“잊지 않겠..!”

“여행 잘 다녀오거라.”

스승이 즐겁게 손을 흔들어주는 동안 빛은 더욱 눈부시게 확 끼쳐왔고, 빛이 사라졌을 때 크세노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더
낄낄거리다가 노마법사는 휘파람을 불며 시약병을 집어들었고, 깃털펜은 지친 한숨을 쉬며 폴짝 뛰어 일어났다.

텔레포트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장거리는 처음이어서 그런지 이전과 경험은 사뭇 달랐다. 어느 순간 그는 아득한 높이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의 땅덩이… 저것이 안힐라스? 끝없는 숲과 험준한 산맥, 바다와 사막과… 아니, 그 이전에
이대로 떨어졌다가는!

마치 헤엄치듯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저었지만, 그에게는 팔도 다리도 없었다. 오직 감각과 사유뿐. 아니, 이 높이에서 얼어죽을
정도로 춥지 않다면 완전한 감각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그 땅덩이는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오기만 했고, 크세노바는 입이 없었지만
비명을 질렀다.

눈을 질끈 감는 기분으로 잠시 인식을 껐던 것일까 (기절이라는 가능성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아니면 이 초자연적 여행의 단계전환을 유한자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한 것일까, 추락의 감각이 문득 끊어지더니 그는
이번에는 끼룩거리는 갈매기떼의 틈에서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저 밑으로는 장난감 같은 배들이 하얀 증기를 내뿜거나 돛을
부풀리며 항구로 들어왔다.

다시 전환. 그는 숲의 나무 사이를 빠른 속도로 날거나 혹은 달렸다. 나뭇가지와 나무둥치가 정면에서 때릴 듯 슉슉 다가왔지만,
그는 마치 바람 그 자체인 듯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더 빨리, 더 빨리…

그리고 산꼭대기를 스치고, 잿빛 모래바람을 헤치고, 도시의 지붕 위와 탁 트인 들판을 달리며 그의 속도는 빨라지기만 했다. 어디
가는지 모르는데도 이제 거의 다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빨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빛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졌다.

소감

이제부터는 어느 정도 실제 기록을 근거로 한 소설화입니다. 제노님의 제노법사 크세노바 등장장면 부분이죠. 리플레이 분량은 별거 아니어도 소설 분량은 의욕에 따라서는 정말 고무줄처럼 늘어나는군요. 실시간으로 하는 성격상 플레이 중에는 자세하게 할 수 없는 묘사를 대폭 추가한 것이 소설의 특유의 재미라면 재미일 것입니다.

마탑 묘사는 해리 포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자동구술 깃털펜이나 생명력 있는 마법물품 같은 건 해리포터 보신 분들은 낯익으시겠고, 엉뚱하고 혼란스러운 마법사들 분위기도 해리포터에 영향을 받았죠. 삭풍님과 제노님의 코믹한 RP를 보고 더 해리포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리플레이와 많이 다른 부분이라면 우선은 크세노바의 안힐라스 도착 후에 있었던 노스탤지아 지도부와의 만남을 뺐다는 점이고 (이 대목은 나중에 간단한 회상으로 축약합니다), 두 번째는 순간이동 중의 경험을 추가하면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 크세노바 관점으로 전환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역시 안힐라스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분위기라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그런 면에서는 서장과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소개가 충분히 되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나중에까지 읽다 보면 안힐라스의 상황이 전달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마법적 이동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고 해서 크세노바는 대륙 간 이동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만, 그의 경험은 워낙에 장거리 이동이라는 점과 크세노바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점에 영향을 받았을 듯합니다. 나중에 나오는 랜돌프의 순간이동 경험이 꽤 다르듯이 순간이동의 구체적 경험은 인물마다, 또 상황마다도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법은 어느 정도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다음 편은 ‘잿빛 메타포노비아’군요. 이쪽은 내일 저녁 재촬영 일정(..)이 있어서 아마 내일 모레나 그 후에 올라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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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서주 – 신세계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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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첫 플레이 후 며칠 동안 리플레이 소설화 작업을 했습니다. 피드백 기간이랑 설정 조율 때문에 또 며칠이 들어갔군요. 그나마도 재조정 관계로 아직 빠진 장면이 있어서 한꺼번에는 못올리겠군요. 게다가 분량도 좀 피를 토하는지라 몇 편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리플레이는 올려두지만, 오늘 올리는 서주는 리플레이에는 안 나오고 소설판에만 추가한 부분입니다.

1302947083.html

숲 어귀에는 시원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이곳까지 따라온 길은 숲으로 얼마 들어가지 못해 좁아져 사냥꾼이 다닐 만한 오솔길이
되더니 곧 그마저 없어졌다. 그리고 이곳, 길이 끊기고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두 남녀는 잠시 멈추었다.

“이곳에서부터 안전히 가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묶은머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이른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며 몇 가닥이 가벼운 바람에 흩날렸다. 가볍게 주름지기 시작한 가느스름한 눈매, 흐르듯
부드러운 광대뼈와 턱의 선 때문에 순한 인상이 드는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그 표정에는 다스리려고 태어난 사람의 기품과 절제가,
꾸밀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귀족의 흔적이 뚜렷했다. 그러나 몸짓은 얼굴만큼 차분하지 못했다. 마치 손을 어디다 둘지 모르겠는
듯 그는 양손을 비싼 외투의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빼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다시
서글서글한 눈 앞으로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 작은 짐꾸러미를 꼭 안고 선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잠시 올려다보는 얼굴은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한 번이라도 본 이는 인간이라고 착각할 수 없었으리라. 넓은 이마와 동그란 눈에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 작은 턱을
향해 좁아지는 갸름한 다갈색 얼굴의 선, 그리고 유달리 긴 매끈한 갈색 목에 깃든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우미함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후드를 내린 지금 길고 끝이 뾰족한 귀가 검은 머리칼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 처녀
같았지만, 갈색 눈에 깃든 슬픔과 세월에는 인간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사내는 잠시 말을 잊고 그런 그녀를 마주보았다. 머뭇머뭇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괜찮…겠습니까?”

여인은 그의 말에 가슴이 아릴 정도의 슬픔이 담긴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베인그람 제독님.”

목례하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로엔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들며 눈을 마주치자 로엔은 데인 듯 손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감사드릴 이는 저입니다, 마이아나.”

한결 침착해지며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때 나를 구해주고 산장에서 치료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죽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노예 되어 갖힌 나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하루하루 천천히 죽어갔겠지요.”

그녀는 손바닥을 앞으로 해 오른손을 그의 어깨 높이 정도로 내밀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대와 나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에어그웬드(주:엘프어로 ‘신성한 우정’)를 나와 나눈 그대에게 감사해요,
로엔 베인그람.”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해가 더 높이 떠오르면서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그녀의 머리칼 위에 반짝이며 맑은 눈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베인그람은 눈이 부신 듯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마주댄 채
똑바로 눈을 마주친 둘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거울에 손을 대고 응시하듯 그렇게, 모든 차이와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그 영원의 숨결 속에서.

이윽고 마이아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서 손을 떨구었다. 조용히 웃는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 보였고, 옷가지나 음식 따위가 든
짐꾸러미가 형용할 수 없는 무게기라도 한 듯 작은 어깨는 지쳐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에요, 로엔.”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녀는 자신마저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날들에도 축복의 순간은 분명 존재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와주었듯, 내가…”

말을 끊고 마이아나는 돌아서서 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길 없는 숲으로 향했다.

“안녕히.”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는 로엔의 얼굴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과 싸우는 사람처럼 그는 한손을 뻗었다가
억지로 주먹을 쥐어 그 손을 거두고, 부르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그를 순간 돌아보는 마이아나의
형체는 이미 햇살의 일부가 된 듯 현실감이 없었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꿈처럼…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낮추더니, 녹아 없어지듯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어선과 상선, 군함이 정박한 제국령의 앞바다에는 조용히 저녁이 내렸다. 어스름이 깔린 동쪽 하늘에는 하나둘 별이 떴고, 석양의 불타는 광휘 가득 펼쳐진
서쪽 하늘에는 세인트 힐더의 첨탑과 지붕과 더 서쪽의 숲이 검은 윤곽을 만들었다. 이 빛 속에서는 안힐라스의 야생림과 제국 도시의
선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서로 싸우는 두 문화에 속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증기선에 갑판 난간에 기대선 남자는 피곤하게 얼굴을 비볐다. 서쪽을 마주본 그의 뒤로 묶은 머리는 석양에 붉게 물든 채 바닷바람에
가볍게 날렸다. 오전에 출발했어야 하는 배는 그의 명령으로 빠진 여행서류 확인, 빠뜨린 짐 회수, 기후현황 확인 등 온갖 지연
때문에 이미 오후를 넘어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도 간간히 선원들의 투덜거리는 불평이 들려왔지만, 그는 떠나야 할
방향이 아니라 하염없이 서쪽만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 자신도 어쩌면 알지 못한 채 그는 제국 도시
너머에 펼쳐진 먼 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독 각하.”

갑판에 발걸음이 저벅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의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말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이 일대에 폭풍우가 닥쳐오기 전에 벗어나야 합니다.”

폭풍우 얘기에 아주 잠깐 표정이 밝아졌다가 로엔 베인그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부관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는 세인트 힐더에, 그리고 그 너머의 안힐라스에 손짓했다.

“떠나는 것이 아쉽지는 않은가, 데니? 아름다운 땅인데, 그립지 않겠나?”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상관의 옆얼굴을 보다가 부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기도 합니다. 이미 실종되었다가 돌아오셨는데, 이 개척지에서는 되도록 계시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미욱한
마음입니다.”

“위험… 그래, 그 말이 맞네.”

제독은 천천히, 다소 고통스럽게 미소지었다.

“개척지…니까.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옛것을 파괴하는 곳.”

바다의 움직임에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등뒤의 도시와 들판과 숲, 세인트 힐더와 안힐라스를
돌아보았다.

“자아와 타인,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맞닿는 안힐라스이니까.”

“괜찮으십니까, 제독님?”

다시 고개를 돌려 데니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제 괜찮아야겠지. 출항 명령을 전하게.”

“예, 각하.”

데니는 인사하고 서둘러 갑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런 데니가 항해사와 이야기한 순간부터 선원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함치듯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이윽고 배의 거대한 증기 엔진이 가동하면서 하얀 연기가 어둑한 하늘에 퍼지는 모습을 로엔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치 이끌린 것처럼 흐려가는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삐죽삐죽한 검은 선일 뿐인 서쪽 숲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각하!!”

갑자기 난간을 붙잡더니 마치 몸을 던지기라도 할 듯 내미는 제독을 보고 데니는 소리를 질렀다. 로엔이 홱 돌아보는 동작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출항 준비를 중지한다! 승강대를 내리게!”

“예? 각하..”

데니가 저지하기도 전에 로엔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선원들이 서둘러 승강대를 내리는 것도 미처 기다리지 않고 배에서 뛰듯 내리는
그를 부하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았다.

부두에 내린 로엔은 몇 척 건너 정박한 배 뒤편으로 뛰어갔다. 머리에는 후드를 쓴 채 가슴에는 작은 짐꾸러미를 안은 여인은
금새라도 도망갈 사슴처럼 연신 주변을 불안하게 보다가 발걸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로엔이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자 그녀는
작게 소리를 지르면서 짐꾸러미를 떨어뜨렸다.

로엔은 그녀의 어깨를 붙든 채 몸을 조금 떼었다. 그의 목소리는 격정을 간신히 억제한 채 떨리는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했습니까…!”

후드가 벗겨진 마이아나는 동그란 눈이 어둠 속에 물기를 품고 빛났다.

“한 번…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진짜인가 확인하듯 그의 팔을 맞잡더니 마이아나는 천천히 그에게 몸을 기대왔다. 로엔은 치명상을 입은 사람처럼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그의 팔이 올라와 마이아나를 꼭 붙들었다. 그렇게 그저 서로 상대의 존재를 호흡하며 침묵한 긴
순간 끝에 마이아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며 올려다보았다.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마이아나!”

석양의 마지막 빛에 잠긴 그의 얼굴은 잠깐 환해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럴 수는… 당신에게는 완전히 낯선 곳인데, 게다가 그곳에서 당신의 신분은-”

마이아나가 손을 들어 그의 입술에 손끝을 대자 로엔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당신만큼이나 나도 많이 생각했어요. 무모하고 위험한 건 알아요. 다 알지만…”

가끔 갈매기만 우는 조용한 공기중에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어쩌면 비겁하게 도망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슬픔을 피해버리는 걸지도요.”

혼잣말처럼 말하다가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해요. 헤어지고 후회하기보다는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함께하고 후회하고 싶어요.”

시선을 낮추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는데… 여기서 헤어지면 1년 후에 내가 이곳에 있을까요? 당신은? 그러니까..”

로엔은 몸을 숙여 마이아나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추었다. 석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윤곽은 하나가 되어 서로 녹아들었고, 짧은
입맞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한 가지 작은 확신을, 위안을 찾아 서로 기대는 따뜻한 포옹이 되었다.

마이아나의 머리카락에 입맞추고 로엔은 고개를 들었다.

“나와도 좋네, 데니.”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부관이 어망 뒤에서 걸어나왔다.

“부하들은 배에 남아있게 했겠지?”

“물론입니다.”

데니는 마치 질문 자체가 모욕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마이아나는 데니를 보고 놀란 기색은 아니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며
그를 살피고 있었다. 로엔은 그런 그녀의 머리에 부드럽게 후드를 씌워주고 어깨를 감싸안으며 부관을 마주보았다.

“내가… 자네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겠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데니는 이윽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함께 갑판에 서서 멀어져가는 해안을 바라보는 두 사람 위로는 검은 하늘에 저녁별이 빛났다. 세인트 힐더와 그 너머의 안힐라스는
석양의 마지막 빛 속에 붉게 빛나며 멀어져갔다.

“다시 이곳을 볼 날이 있을까요?”

마이아나의 낮은 목소리에 로엔은 그녀를 아프게 보다가 난간에 얹은 가느다란 손에 손을 포갰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자
밤처럼 검은 머리가 바람에 따라 날리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지켜보는 동안 안힐라스는 불꽃빛 석양이 식어가며
점차 어둠에 잠겨들었다.

소감

뭔가 멋지구리한 시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PC 중 한 명의 부모 이야기를 서장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안힐라스와 서대륙의 비극적인 역사를 표현하면서도 최소한 희망의 여지를 남기기에 그쪽 설정이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설정 조율과 확인에 협력해주신 제노님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급조해서 만들어넣은 데니를 가장 좋아하지만(..)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심리 표현을 하는 건 재밌으면서도 어렵더군요. 말해주기보다는 보여주는 게 묘사의 기본인 만큼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첫 플레이는 재밌게 했었는데, 처음이기도 했고 이것저것 마음이 급해서 삐걱거리는 부분은 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겁스 전투규칙의 재미를 느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주로 제가 이전에는 전투형 인물을 안 만들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무엇보다 충분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느낀 플레이였습니다. 다급하게 진행하시느라 마음고생하신 삭풍님과 참가자분들 모두 수고하셨고요, 나머지 소감은 올리면서 그때그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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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외전 – 어떤 작별

오체스님과 진행한, 아스타틴아라의 첫 만남을 다룬 외전입니다. 전에 오체스님과 얘기해서 정한 추가설정 부분을 기반으로 한 역할극이죠. 함께 해주신 오체스님께 감사드립니다.

1239834493.html
허무의 대지에서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세계수의 재라고 하는 발밑의 고운 흙이 바람에 먼지처럼 날렸고, 오늘은 하늘마저 엷은 회색이었다. 북쪽으로는 불타버린 세계수의 잔해가 잿빛 하늘에 거대한 검은 윤곽을 그렸다.

“저곳이다.”

아시타는 세계수의 잔해를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세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

평소의 장난기는 조금도 없이 우수어린 하프다크엘프의 눈빛에서 아스타틴은 또 다른 다크엘프 혼혈, 이제 세상에 없는 이를 떠올렸다. 아시타가 몇 발짝 떨어져 세계수를 묵묵히 바라보는 동안 아스타틴은 늘 가슴에 달고 다니는 애도의 브로치를 어루만졌다.

“돌아왔어요.”

브로치에 꼬아넣은 은백색 머리카락 위로 손가락을 쓸며 그는 속삭였다. 어쩌면 텔루르의 추억 때문에 이곳 허무의 대지는 그에게 더욱 잿빛일지도 모른다.

“아닌 척 했지만… 그리워했던 곳으로.”

그는 브로치를 손에 꼭 쥐었다.  그의 양어머니 텔루르는 나서 자란 이 땅에 대한 그리움을 한 번도 내색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가끔 북쪽으로 눈을 돌리던 그녀의 눈빛은 세계수의 잔해를 보는 아시타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그들에게 흐르는 다크엘프 피 때문일까, 아무리 배척받고 차별당해도 세계의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천형은.

고운 잿빛 흙을 품은 바람이 불어오자 아스타틴은 외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앉은 언덕 왼편으로 화살이 거의 닿을 만한 거리에는 언덕 위에 선 다크엘프의 수도 메타포노비아를 두른 목책과 그 위로 나온 지붕이 몇 개 보였다. 아래로는 주변의 언덕과 평원에 작은 민가와 가축우리, 밭 몇 뙈기가 메타포노비아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다크엘프의 지도자인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하러 온 노스탤지아 대원들에게 다크엘프들은 (혼혈과 심지어는 인간도 있는 일행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연락기지에 있으라고 무뚝뚝하게 지시했지만, 아시타는 답답하다면서 결국 아스타틴을 밖으로 끌고나왔다. 역시 먼지바람을 피해 얼굴을 가리며 이쪽으로 돌아서는 아시타를 보며 아스타틴은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 서쪽 언덕은 메타포노비아를 제외하고 주변에서 세계수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고, 왜 인간 혼혈 따위가 세계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지 시비걸 다크엘프도 없었다.

발치에서 커다란 하품소리가 들리자 아스타틴은 미소지으며 내려다보았다. 텔루르의 가우르 루테리온은 쭈욱 기지개를 켜고 입맛을 다시며 편안하게 그의 발치에 누웠다. 등을 쓸어주자 낮게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뼛속까지 기분좋은 진동으로 전해왔다. 지시를 어기고 메타포노비아를 나서는 그들을 경비가 굳이 저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녀석 때문이었으리라. 거대한 사냥꾼의 따뜻한 진회색 털과 주변의 잿빛 흙의 빛깔을 비교하며 아스타틴은 그도 루테리온도 처음 와보는 허무의 대지였지만, 루테리온의 조상에게는 고향이었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 아시타처럼 루테리온도 이곳에 애착을 느끼고 있을까? 마치 피를 통해 전해오는 기억처럼…

“태평한 놈이로고.”

올려다보자 아시타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루테리온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런 아시타 방향으로 잠시 눈을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 꼬리를 탁 털고 눈을 감았다. 그 반응에 아시타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녀석 타기도 해?”

루테리온을 흥미롭게 보며 아시타가 묻자, 아스타틴은 감상적인 생각을 떨쳐내며 미소지었다.

“아… 날 태워주기엔 저녀석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녀석, 사람보는 눈은 있군.”

낄낄거리는 웃음이 밉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이후 분노와 자책에 빠져지냈던 그를 아시타가 내버려두지 않고 말도 걸고 장난도 쳤을 때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네 일이나 신경쓰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아준 아시타에게 이제는 감사하고 있었다. 비록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시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뭐라고 할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아주 가끔이지만 자존심을 굽혀주기도 해.”

텔루르가 죽고 나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인간 장교를 살해한 후에, 쫓아오는 병사들에게서 헐레벌떡 도망치던 그를 루테리온이 등에 태우고 달린 일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폭풍을 탄 것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와 영원히 달리고 싶은 희열의 기묘한 연금술은 그를 취하게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 후, 루테리온의 거죽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싸매주며 미안하다고 되뇌이던 아스타틴의 사과는 어느새 루테리온이 아닌 이제 이곳에 없는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마침내 더 참지 못한 채 루테리온의 목을 끌어안고 밤새 목놓아 울었을 때 루테리온은 그저 조용히 체온을 빌려주고 얼굴을 부비며 차가운 새벽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 여러모로 위로를 받는달까. 루테리온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어느새 아스타틴은 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텔루르 이후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속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기쁨인 동시에 떨리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군사훈련을 받은 가우르인데 저대로 평생 둘 생각이야?”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추궁 역시. 조금의 전력이라도 더 필요한 전황에 훈련받은 가우르 하나가 놀고 있다는 것은 아시타가 보기에는 낭비일지도 몰랐다.

“음…”

아시타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루테리온을 그저 유용한 무기로만 볼 수 없는 아스타틴은 자신이 이 상황에 대해 객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값만 해도 꽤 나갈 텐데.. 뭐 팔아버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면서도 한쪽 어깨를 으쓱하는 아시타의 목소리에는 분명 제안이 들어있었다. 아스타틴은 순간 불쾌감을 느꼈다.

“팔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라면 남동생이나 누이를 팔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아스타틴은 참았다. 아시타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둘째치고라도, 루테리온은 텔루르와 전투를 함께 하던 군용 가우르이지 애완용 고양이가 아니었다. 가끔 녀석의 눈이 먼 곳을 보는 것은 아스타틴도 알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없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말하면서 아스타틴은 이미 텔루르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랑 없는 조용한 용맹, 세상이 뭐라 하든 절대 꺾이는 일 없던 긍지, 그러면서도 내밀한 순간에 보여주던 그 따스한 마음. 그래서 아직까지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런 주인을 기억하는 한 어떤 이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다소 안심하는 자신이 아스타틴은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수는 없겠지.”

루테리온을 아낀다고 하면서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위선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 슬픔에 가슴이 조여왔지만, 루테리온이 가겠다면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닌 우정의 시간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호~ 짐승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거야?”

아시타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루테리온이 원한다면 헤어질 수 있겠어?”

자기 이름이 들리자 루테리온은 한쪽 귀를 쫑긋했다. 그 모습에 아직 눈도 못 뜨고 낑낑거리던 자그마한 새끼 가우르가 겹치자 아스타틴은 새삼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아려왔다.

“.. 저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이뻐라 우유먹이며 키웠으니까.”

그는 애써 웃음지었다.

“좀 자신 없기도 해. 근데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달까.. 저 녀석 태어나는 것도 좀 힘들었고..”

루테리온의 어머니 히말은 가우르에게 드문 거의 흰색에 가까운 털이 돋보였었다.(주:오체스님에 따르면 히말은 히말라야에서 따왔고, ‘눈’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비노 가우르를 떠올렸어요 ㅋㅋ) 몇 번이나 임신을 하지 못하고 한 번은 새끼를 사산한 히말이 이미 죽은 새끼를 계속 핥아주던 모습을 텔루르는 차마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렸었고, 아스타틴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시체를 떼어놓았었다.

그랬던 히말이 많이 나이가 들어 근 하루에 거친 힘든 진통 끝에 마침내 작고 유달리 약한 루테리온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동시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 조그만 생명을 살리려고 젖을 못 먹이는 히말 대신 손가락에 우유를 묻혀 빨게 하고, 갑자기 토하는 녀석을 안고 한밤중에 약초사를 찾아 달리던 시간들 끝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건강하게 자라줘서 기뻐.”

손을 뻗어 귀를 쓰다듬어주자 루테리온은 귀를 뒤로 젖히며 가릉거렸다.

“그리고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아스타틴은 메이는 목을 살짝 헛기침을 해 풀었다. 역시 먼지바람 때문이리라.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고 싶어.”

언젠가부터 아시타가 아니라 루테리온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으며 그는 가우르의 머리에서 목을 따라 긁어주고는 손을 떼었다. 루테리온은 다시 크게 하품을 했다.

“뭐 그렇다면야.”

아시타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좀전에 아스타틴이 그랬듯 루테리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녀석 날 선택해주지는 않겠느냐아?”

루테리온은 뒤돌아보면서 고개를 들더니 아시타의 손에 대고 확 깨물었다. 물리기 전에 아시타가 웃으면서 손을 빼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미소지었다. 장난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면 아시타도, 아스타틴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손을 물어챘을 테니까. 역시 루테리온은 성격이 좋은 녀석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아시타는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이며 물러났다.

“그럼 난 보고서 정리하러 들어간다.”

그는 아스타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섰다.

“응응…”

언덕을 내려가는 아시타의 발걸음이 등뒤로 멀어져갔다.

“역시 넌 여기가 좋을까나…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루테리온 옆에 쪼그려앉아 등을 쓸어주었다. 루테리온이 반쯤 눈을 감고 바라보는 거친 풀섶과 황야, 민가와 가축우리를 내려다보며.

“아시타는 너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녀석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루테리온은 동의한다는 듯 가릉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아스타틴에게 비볐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며 루테리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스타틴의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때였다. 이런 순간이면 텔루르의 기억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때 루테리온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긴장하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작은 짐승을 보거나 냄새맡은 태도와도 비슷했지만, 사냥할 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냥할 때보다 훨씬 깊은 열중이 매끈한 근육의 긴장감에 역력한 채 가우르는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라… 어디가…?”

아스타틴을 휙 돌아보는 루테리온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다시 앞을 향하며 가우르는 순식간에 언덕을 달려내려가 풀섶 사이를 내달리더니, 다른 언덕을 돌아 사라졌다.

“루테리온…!”

아스타틴은 정신없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이런 모습의 루테리온은 처음이었다. 허무의 대지 특유의 거친 풀섶과 그 잎을 한가로이 뜯고 있는 큰뿔염소를 지나, 루테리온이 마지막으로 보인 언덕배기를 돌아 작은 집을 지나쳐 얼마나 걸었을까, 허무의 대지의 잿빛보다 한결 어두운 얼룩 같은 루테리온의 모습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도 들려왔다.

“꺄아 나비야아… 나비나비나비.”

목소리는 어린아이 목소리처럼 높고 들떴지만, 주변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구걸하는 노인처럼 웅크린 초라하고 작은 나무들 어귀의 땅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루테리온뿐이었다.

나무들의 흐릿하고 앙상한 그늘로 들어서면서 아스타틴은 이 예상치 못한 장면을 살폈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여자는 다크엘프였고, 이곳 전사들이 그렇듯 가죽이 주조를 이루는 갑옷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다크엘프 전사는, 아니 다크엘프는 처음이었다.

“놀자놀자~ 나비.”

깔깔 웃으면서 여자는 루테리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벼대더니 자기 얼굴을 루테리온의 목에 갖대대고 비볐다. 목소리나 말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도 경계심이나 체면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아이 같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루테리온의 반응이었다. 텔루르와 아스타틴 외에는 아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보이던 가우르는 처음 보는,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게 틀림없는 여자에게 ‘나비’ 같은 굴욕적인 이름을 들으면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몸을 기댔다.

‘아… 텔루르…’

텔루르가 죽은 이래 루테리온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애교를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잿빛 피부와 은백색 머리, 가벼운 갑옷 차림이 오랜 기억들을 고통스럽게 헤집었다. 입을 여는 그는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루테리온.”

루테리온이 돌아보자 다크엘프 여자도 그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듯 올려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니…?”

부드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다크엘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테리온을 보았다.

“누구야 이쁜 아이~? 아는 사이?”

왜 둘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지, 바보같은 기분이 든 아스타틴은 여자에게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저기… 아가씨…”

“음?”

루테리온의 목을 쓸어주며 여자는 그의 존재를 거의 잊은 것 같았다.

“그건 제 가우르거든요…”

아까 아시타에게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내것이라고 하기는 좀 남사스럽기도 했지만, 루테리온이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적어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리라.

“음? 니아 아가씨 아냐 애엄만데 우리 샤나 못봤어요?”

재잘거리다가 다크엘프–아마 니아?–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가우르르르르? 나비??”

“아는 사람에게 받았긴 했지만요. 잠깐 뛰어나가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아가씨에게 갔나보네요..”

입술을 핥고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뭔가 불길했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루테리온을 데리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싫어!!”

찢어지는 목소리에 근처 나무에서 파닥거리며 새가 몇 마리 날아올랐다. 니아가 루테리온의 목을 갑자기 콱 끌어안자 루테리온은 아팠는지 캬옹! 하면서 목을 뺐다.

“니아 나비야랑 놀거야아~ 나비~”

“아… 그렇게 안으시면 아파해요…”

당황해서 아스타틴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루테리온은 목을 뺀 후에도 여자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점점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저런 정신나간 여자를 뭐하러 루테리온이 일부러 쫓아온 걸까.

“..데리고 가도 괜찮지요?”

아스타틴은 루테리온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섰다.

“그리고 나비가 아니에요.”

“가지 마 나비, 으응?”

니아가 가우르의 귀를 잡아당기자 루테리온은 다시 캬옹.. 고개를 돌렸지만 아스타틴을 따라나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타틴이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데 니아는 갑자기 뭔가 본 듯 루테리온 왼편의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 샤나 거깄었어?”

“허…”

아무리 봐도 루테리온 왼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니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눈이 좋거나, 아니면…

“나비야는 엄마랑 있는 게 좋지? 샤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역시 이쁜 우리딸~”

마치 어린아이가 서있는 것처럼 허공을 쓰다듬는 것을 보고 아스타틴은 소름이 끼쳤다. 역시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여자가 완전히 미쳤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아스타틴은 긴장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루테리온 이리와.”

그의 명령에 루테리온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다가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웃고 얘기하는 니아를 돌아보다가 다시 아스타틴을 마주보았다. 마치 고뇌하듯이.

“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루테리온은 주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불안해했던 날이 정말 오늘, 바로 이 순간이라면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자신과 루테리온에게 그렇게 약속했으면서도 아스타틴은 갑자기 자신이 없었다.

“예쁜아이 일루와봐~”

‘샤나’에게 할말은 다 했는지 니아는 아스타틴을 똑바로 바라보며 옆의 땅을 탁탁 쳤다. 진회색 눈이 아주 맑았다. 이리 오라니 뭘? 무슨 짓을 하려는지 불안해졌다.

“얘기하자~ 응?”

아스타틴이 경계하며 보고만 있자 니아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루테리온이 이 여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조심조심 다가섰다.

“…이야기요?”

“응응, 나비얘기!”

니아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샤나가 좋은 생각을 얘기해줬어. 역시 똑똑하지 우리딸?”

다시 소름이 끼치면서 아스타틴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분명히 이곳에는 노스탤지아 일로, 프리야 마타에게 보고한다는 아주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임무를 띠고 왔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시타도 메타포노비아도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가우르한테 물어보자~ 응?”

니아는 말을 이었다.

“나비야는 니아 따라올래 이쁜아이 따라올래? 그렇게 말야.”

“물어보다니…. 루테리온의 의사에 따르자는 건가요?”

그는 니아와 루테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루테리온의 선택에… 정말로 루테리온이 이런 상대를 선택할까? 그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우리 딸이 그랬어. 샤나가!”

니아는 아주 만족스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아, 그래요?”

아스타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든 루테리온이 선택하는 대로…’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이런 선택을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정말로 그것이 루테리온의 선택이라면 그대로 해야 했다. 루테리온이 그러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아스타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텔루르의 잔영이 함께할 루테리온이 어떻게 그럴까.

“그렇게 해요, 아가씨.”

그말에 니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 아냐~ 나 애엄마다? 나이도 하나.. 둘.. 스물.. 열다섯.. 백..”

니아가 손을 꼽으며 엉터리로 수를 세는 것은 아스타틴은 냉정하게 끊었다.

“떼는 적당히 부리고요.”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요.”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이래 쭉 함께했던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 상실의 기분을 니아가 이해할 수나 있을지, 상관은 하는지 생각이 미치자 뜨거운 것이 속에 치밀었다.

그의 말에 마치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순간 시무룩해졌던 니아는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알았어, 그럼 숨바꼭질하자!”

그녀는 달려가며 뒤돌아보고 노래하듯 말했다.

“이쁜아이도 빨리 숨어~”

니아가 돌 던지면 닿을 거리까지 달려가 풀섶에 몸을 숨기자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루테리온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니아가 있는 풀섶과 곁의 아스타틴을 번갈아 보았다. 발이 움찔… 니아 쪽으로 움직였다가 루테리온은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아가씨가 마음에 들은 거니?”

루테리온은 노란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양옆으로 꼬리를 쉬익- 쉬익- 흔들었다. 그 진지한 표정을 보며 아스타틴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스쳐갔다. 루테리온은 이제 온기를 찾아 그의 외투에 파고들던 조그만 새끼가 아니었다. 그 연약하고 위태위태한 털뭉치가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서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난 세월의 의미 아니었던가.

잘 알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네가… 선택한 사람이야?”

루테리온은 니아가 숨은 방향을 한 번 돌아보고, 다가와서 아스타틴의 손 밑으로 따뜻한 머리를 들이밀며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스타틴은 그 모습에서 오래전 그에게 끼잉거리며 고개를 들이밀던 주먹만한 새끼 가우르를 떠올렸다. 15년과 한평생 전, 그들이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의 시작. 루테리온의 눈빛은 마치 이해를 구하는 듯했다. 슬픈 기색은 아스타틴 자신의 바람일 뿐일까.

“루테리온…”

바보같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아스타틴은 나직하게 말했다.

“아시타에게 말한, 니가 원하는 존재가 그 누구라도 괜찮다고 한 건 사실이야.”

이미 다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원할 때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으면, 각자의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니가 선택한 건 누구라도 상관없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이제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루테리온은 위로하듯 나지막히 가르릉거렸다.

“넌 내가 가장 힘들 때 위로가 되준 친구고.. 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 영원히 그럴 거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장난치고, 그저 함께 앉아있었던 그 많은 시간이 이제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나갔듯, 텔루르가 떠나갔듯 이제 루테리온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그 기억만으로 버텨야겠지. 루테리온 같은 친구가 곁에 있었던 시간은, 언제까지나 서로 마음과 기억 속에 함께한다는 사실은 따뜻한 위안인 동시에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그걸로 됐어…”

아스타틴의 목소리는 쉰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시종일관 그를 똑바로 보고 있던 루테리온은 묵직한 온기를 그의 다리에 잠시 기대었다가 아스타틴의 손을 한 번 축축하게 까끌까끌한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떨어져서 몇 발짝 걸어가더니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밥을 굶긴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면 돼. 우리 이쁜이.”

눈앞이 눈물로 뿌얘서 루테리온의 모습이 잿빛으로 흐릿해졌다.

“자, 가렴.”

마치 이해했다는 듯 루테리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빠르게 뒤돌아서 니아의 은빛 머리칼이 빼꼼히 보이는 풀섶을 향해 긴 걸음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있을 곳을 향해 내달리는 그 모습을 아스타틴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디에도 속할 곳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있을 자리는 사랑하는 이들 곁이었는데, 이제 그의 자리는 어디일까. 루테리온처럼 저렇게 자신이 선택한 자리로 달려갈 날이 있을까?

루테리온이 고개를 풀섶에 들이밀자 니아가 꺄아~ 하고 좋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풀섶에서 튀어나와 루테리온을 쓰다듬고 입맞추었다. 저렇게 털 역방향으로 쓸어주면 싫어할 텐데, 평소에는 그러면 바로 도망가던 루테리온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주인 앞에서는 싫어도 참겠다는 것일까 생각하자 가슴이 작게 아파왔다.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갑자기 니아가 떠드는 소리가 조용해지더니, 그 앞에까지 가자 니아는 멍한 표정으로 루테리온을 마주보며 주저앉아 있었다. 또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저희 아이를 잘 부탁해요, 아가씨.”

아스타틴이 입을 열자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본 유쾌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그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에서 아스타틴은 순간 적과 마주했을 때의 텔루르를 떠올렸다.

“넌 누구지?”

일어서며 말하는 목소리와 말투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침착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 가우르의 주인인가? 하프엘프가…”

하프엘프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은 경멸로 더욱 차가워졌다.

“네 주인에게 가거라.”

그녀는 루테리온의 어깨를 아스타틴을 향해 밀었지만, 가우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주인을 찾을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했지요.”

이미 작별인사는 한 터였다. 앞으로 더 아프고 더 보고 싶겠지만, 그건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었고 익숙했다. 이제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여인에게 루테리온의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자각시키는 게 먼저였다.

“주인?”

여자는 가느다란 눈썹을 혼란스럽게 찌푸렸다. 정말로 모르겠다고 할 참인가.

“나비야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냉랭한 목소리에 분노를 완전히 숨기기가 어려웠다. 루테리온은 그녀에게는 그저 물건일지는 몰라도 아스타틴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녀석을 데려간다면 최소한 진지한 태도는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이 여자는 왜…

“그렇게 떼를 부려놓고 데려가더니 이제와서 시치미이십니까?”

묘하게도, 그 말에 다크엘프 여자의 얼굴에 스쳐간 당혹감은 진짜였다. 이내 찾아온 체념한 깨달음도.

“내가 그러면… 설마…”

그녀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직하게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최소한 정신이라도 온전한 주인을 골라야지,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이 이제 시치미까지 뗀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스타틴은 분노로 몸이 굳으면서 목소리가 더욱 딱딱하게 나왔다.

“저도 댁같은 미친 다크엘프에게 소중하게 받은 가우르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아니, 사실 주인이 누구라도 싫었지만, 놓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루테리온 저 녀석이 선택했으니까요.”

선택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루테리온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가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희생이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이면 이 아픔이 그칠까.

“그런 그녀… 미친 여자를 선택했다는 말이냐.”

니아, 혹은 니아의 모습을 한 여인은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루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판단력이 좋지 않구나.”

루테리온이 만족스럽게 가르릉거리는 동안 그녀는 이번에는 아스타틴에게 몸을 돌렸다.

“오랫동안 함께했느냐.”

“저 녀석이 태어난 직후였죠. 마사다 요새 함락 직후로 기억합니다.”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루테리온에게 말했다.

“내가 가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루테리온이 계속 그녀를 보며 가르릉거리자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젓더니 아스타틴에게 말했다.

“공짜로는 받지 않겠다.”

그녀는 귀에서 꽤 값이 나가보이는 보석 귀걸이를 떼어 내밀었다.

“나머지는 기회가 되는 대로 갚을 터이니 일단 받거라.”

“굳이 주지 않아도…”

그의 손을 붙잡아 귀걸이를 억지로 쥐어주는 손길이 억셌다. 전사답게 굳은살이 박힌 손의 감촉은 다시 본의아니게 텔루르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지 않았느냐, 신세지지 않겠다.”

신세지지 않겠다는 말은 호의도, 염치도 아니었다. 인간과 엘프 혼혈인 그, 아스타틴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뜻일 뿐. 그 생각에, 그리고 루테리온을 넘기고 돈을 받는다는 거부감에 그는 억지로 손을 빼고 귀걸이를 든 손을 내밀었다.

“이건 돌려드리죠. 밥이나 굶기지 말아주세요.”

눈에 고여오는 눈물을 그는 이를 악물면서 참았다.

“아까처럼 털 역방향으로 문지르지 말고요.”

손바닥 위의 귀걸이가 천 근은 되는 듯 무거웠다. 이 순간의 무게가, 시간과 마음과 외로움의 무게가 너무나.

“목 졸라서 숨막히게 하는 것도 위험해요.”

그런 그를 보다가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기억하겠다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내가… 아까같을 때 다시 주의줄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 여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10대 이래 그보다 작았는데도 언제나 거인 같던 텔루르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그만큼 양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일까.

“언제까지나 작은 고양이 같은 그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친구를 잃는 것을 돈으로 보상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귀걸이 위에 아스타틴의 손가락을 쥐어주었다. 굳은살 박힌 손이 따뜻해서 왠지 목이 더 메였다.

“그렇게라도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너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싶지는 않구나.”

여인은 그의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니 받지 않겠다면 이곳에 내려놓고 가거라. 나는 대가 없이 이 소중한 아이를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니.”

그녀와 곁에 의연하게 선 루테리온을 보며 아스타틴은 귀걸이를 쥔 손을 조용히 떨구었다. 그녀 말대로 귀걸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에 못이긴 뗑깡일 뿐이라고 타이르는 텔루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루테리온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정말로 다시 한 번 등에 태울 만한 기수를 만난 것일까, 아스타틴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다크엘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나는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라고 한다. 아라, 혹은..”

그녀는 뼈아픈 농담을 떠올리듯 쓴웃음을 지었다.

“니아라고도 하지.”

“아스타틴.. 아스타틴 라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양친과 그리고…”

텔루르의 이름은 아직도 말하기가 고통스러웠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텔루르가 떠오르는 이 여인 앞에서는 더더욱… 아스타틴은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프다크엘프 텔루르의 양아들.”

“텔…루르?”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꿈틀했다.

“혹시 적검의 타하이샤가 아니냐? 내 기억이 옳다면…”

뭔가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던 아라니아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지.”

타하이샤?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텔루르라는 이름은 가명이라고 그녀가 얘기한 적은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생각의 갈피를 미처 잡기도 전에 아라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 허락한 선물에 감사를 표한다, 아스타틴 라펠.”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했다. 남자이며 혼혈인 그에게 다크엘프 여인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허무의 대지에서 추방당한지 여러 해가 지난 텔루르도 남자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너에게 무운이 함께하기를.”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에게 마주 인사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그는 아라 곁에서 노란 눈을 빛내는 가우르를 마주보았다.

“루테리온 너에게도.”

‘루테리온…’ 하고 중얼거리며 아라는 돌아서서 메타포노비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녀를 쫓아가던 루테리온은 문득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마치 망설이듯이, 마치 벌써 그리워하듯이. 아스타틴 자신이 이미 그렇듯… 그런 가우르를 아라니아카는 돌아보지 않고 불렀다.

“가자, 아사나스.(주:아스타틴의 ‘아스’ + 다크엘프어로 ‘아이’라는 뜻인 ‘아나스’, 즉 ‘아스타틴의 아이’)”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는 그 목소리에 몸을 돌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이의 당당한 걸음으로 주인을 쫓아갔다. 혼자 선 아스타틴이 하염없이 지켜보는 동안 전사와 그녀의 가우르는 그렇게 잿빛 정경 속으로 멀어져갔다.

소감

전부터 얘기한 장면이기는 했지만 막상 해보고 또 소설로도 써보니 예상한 것과 다른 새로운 극적 의미가 겹겹이 나와서 재미있네요. 오체스님 얘기를 바탕으로 구체화한 아스타틴과 루테리온이 함께한 일화들도 쓰기 재밌었고, 또 소중한 이가 모두 떠나간 아스타틴의 외로움을 표현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시점에는 이미 명이 얼마 안 남은(..) 아시타의 쾌활한 모습, 여기서는 왠지 사람같이 나오는 아라도 흥미로웠고요. 오체스님 말씀마따나 노예생활하고 샤나를 잃기 전에는 꽤 괜찮은 성격이었을 듯하네요. 아스타틴도 아라도 플레이를 거치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RPG에서 즉석으로 대사를 칠 때하고 소설로 쓸 때하고는 재미나 매체의 특성이 약간씩 다른 것도 좋은 도전입니다. 로그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면 소설의 경제성이랄까, 압축해서 콕 찌르는 언어의 맛은 좀 덜하기도 해요. 아스타틴의 후반부 대사에는 뒷받침할 만한 내면 묘사가 바닥난 기분도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여기서도 로그에 있는 대사를 몇 군데 자르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소설화 작업에는 좀 더 창조적으로 재구성하고 압축하는 게 소설의 특성을 더 잘 살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고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 제노님, 삭풍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에는 이제 본편이군요. 첫 본편 리플레이와 소설도 기대해 주세요! (왠 기대)

이오닉스 시범 세션 – 월광(月狂)

3월에 시작하는 이오닉스 캠페인 PC 시범가동쯤 되는 무룰 역할극입니다. 그 캠페인을 제가 소설로 써볼 생각이어서 RPG 세션 소설화의 예행연습이기도 하고요. 내용 자체는 외전을 넘어 이단이기는 하지만, 인물 성격이나 상호작용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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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사이의 그늘이 길어지면서 숲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렸다. 긴장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아스타틴의 청력에는 나뭇잎을 밟고 가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는 그들의 이동은 조마조마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주변을 살펴도 적의 기척은 없었다. 아직은.

아스타틴은 뒤따라오는 동료 둘을 흘깃 돌아보았다. 이 숲에 살았었던 인간, 랜돌프 에디우스는 주의 깊게 주변을 경계하며
마치 먹이에 몰래 접근하는 육식동물처럼 움직였다. 다크엘프 전사 아라는 언제나처럼 오만한 표정이었지만, 움직임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아라의 곁에서 소리없이 따라오는 가우르(주:흑표범과 유사한 큰고양이과 포식동물)의 눈빛이 어둠 속에 빛났다.

주변에 나무가 엷어지면서 숲속 공터로 나오자 아스타틴은 숙련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공터 주변의 나무와 덤불 사이에 적의
기척은 없었고, 덫이나 위험한 식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록윌 요새는 완만한 구릉을 넘어 있기에 불침번을 세워 알프 연방의
척후를 경계하면 휴식을 취할 만한 곳이었다. 그는 한손을 들어 뒤따라오는 랜돌프와 아라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느냐?”

아라의 건조한 목소리는 살짝 숨이 가빴다. 역시 휴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아스타틴은 대답했다.

“좀 쉴 만한 곳을 발견한 것 같아.”

“눈에 띄지는 않겠느냐?”

이 거만한 다크엘프는 여전히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토를 달고 있었다. 아스타틴이 대꾸하려는 순간 랜돌프가 끼어들었다.

“록윌 요새 근처는 전에 내가 사용하던 근거지다.”

근거지. 랜돌프가 ‘엘프 이터’로서 엘프를 사냥해 노예로 팔던 근거지라는 뜻이겠지. 아스타틴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곳은 록윌요새 숏 스카우터들의 수색범위 안이야. 그런상황에서 휴식이라니 위험해”

아라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말은 숨이 차서 헉헉거리지 않고 있을 때나 하거라, 사냥개여.”

아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독기에 차 있었다. 그녀는 랜돌프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이어서야 임무를 수행할 수나 있을까.’

아스타틴이 행장을 내려놓자 가우르는 식량이 들어있는 그의 가방 냄새를 맡으며 주의깊게 다가왔다. 아스타틴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런 가우르의 목과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털의 보드라움과 그 아래 커다란 짐승의 열기가 손을 통해 지친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에구구 힘들다… 울 이쁜이도 그렇지?”

가우르가 스스로 선택한 주인은 아라였지만, 녀석은 루테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아스타틴 곁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다. 아라에게
아사나스라는 새 이름을 받았고 요즘은 모종의 이유로 나비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지고 있기는 해도, 이름이 무엇이든 가우르는
아스타틴이 만져주던 손길을 잊지 않았다. 아스타틴에게는 그것이 늘 다행이었다. 이렇게 가우르가 귀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기분좋게 가르릉거리는 (혹은 가우르니까 가우르릉일까) 순간이면 그래도 누군가는 그의 곁에 남아주는 것 같아서… 그는 그
생각을 떨쳐내며 아라와 랜돌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잠시라도 쉬지 않으면…”

“손톱으로 사람 뼈도 가를 수 있는 맹수를 잘도 가지고 노는군.”

랜돌프는 아스타틴과 가우르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작 중요할때 도망할 힘도 없으면 곤란하겠지. 그럼 일단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

아라는 마치 랜돌프가 전원의 무기와 돈을 맡겨달라고 한 듯 쳐다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또 시작이었다. 어려서 이 숲에 살았고 아버지가 엘프 도망노예였던 아스타틴이라고 에미넴 숲의 악명높은 엘프 이터 랜돌프
에디우스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아라는 악감정을 넘어 랜돌프의 배신을 기정사실로 취급했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듣거나 짐작한 것을 종합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세 사람이 어떻게 서로 목숨을 맡기고 싸울지
아스타틴으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

아라의 말에 랜돌프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희들이 잠든사이에 포박해서 노예로 팔아먹기라도 할까봐 말이냐?”

아스타틴의 손길에 기분 좋아하던 아사나스는 마치 랜돌프의 말을 알아들은 듯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긴장했다. 어둠 속에 가우르의 노란 눈이 랜돌프를 지켜보며 빛났다.

“전적이 어디 가겠느냐?”

아라의 대답은 차분했다.

“더군다나 시장이 이렇게도 가까운데 말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알프 요새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군.”

랜돌프의 장난스러운 미소만으로 판단한다면 모르는 사람은 꽤나 유쾌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웃음이 닿지 않는 차가운 눈빛만 아니었다면.

“너는 아쉽게도 별로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 뭐… 생긴 거야 제법 반반하다만…”

그는 아라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평가하며 훑어보았다.

“너희 종족은 애초에 너무 뻣뻣하거든.”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땅에 벌렁 드러누워 버리는 그를 보는 아라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랜돌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날 실망시키는구나, 사냥개야.”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진짜 살의가 담겨 있었다. 아스타틴은 그런 그녀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자칫하면 적진에서 아군끼리의 칼부림을 뜯어말려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쯤이면 이미 배신해서 나에게 빌미를 줄지 알았다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간신히 자신을 제어하며 아라는 좀 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하긴, 마법적으로 구속받은 ‘노예’에게 큰 선택지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칼에 얹었던 손을 내리며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그녀를 랜돌프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거. 무슨 처치였는지 알고 있나?”

아라는 멈춰서며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눈이 간간히 반짝였다.

“네가 우리를 배신하려는 본능을 막는 것이 아니더냐?”

랜돌프는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시한부 독약 같은 거다. 달마다 꼬박꼬박 해독제를 먹어야 되는거지. 말하자면…”

그는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은 나를 죽일수는 있어도 구속하지 못해.”

“그리고 너는 우리를 배신할 수는 있지만 살 수는 없겠지.”

아까부터 긴장하고 있던 가우르가 마치 아라의 예측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아스타틴은 그런 루테리온, 아니 아사나스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러고 있다가 적들에게 들키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일까.

“그렇게 싸우다가는 들킬지도…”

“나를 믿고 안믿고는 너희들의 자유다.”

랜돌프는 그의 말을 끊었다. 희미한 조명 속에 웃고 있는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왕에 주어진 자원이라면 좀더 잘 사용해보는건 어때?”

“언제든지 본성을 드러내면 그 죽음을 앞당겨줄 용의는 있다. 다사케타.”

다사케타. 생전에 텔루르가 노예 사냥꾼을 가리켜 그 표현을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옥의 사냥개, 노예 사냥꾼들.
차가운 저녁바람이 스쳐가면서 아스타틴은 문득 몸을 떨었다. 달빛만 희미하게 섞여오는 숲의 어둠 속에서 그 원한과 비탄의 말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저주 같았다.

“그 외에는… 너를 믿지는 않는다. 너의 가치없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라면 조금 더 믿지만.”

순간적인 공포감을 잊으려 애쓰며 아스타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할 때였고, 적도 아니고
동료끼리 싸우다가 죽거나 잡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랜돌프가 지켜서는 것은 아라가 수긍하지 못했고, 아라는 지쳐보이는 데다
불침번을 완전히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언제 또 불청객이 찾아올지 몰랐으니까.

“그럼 공평하게 제가 먼저 불침번 서면 되는 거죠?”

아라는 아스타틴을 돌아보지 않고 시선만 흘깃 던졌다.

“그러거라.”

“나를 믿지 못하겠다니 나는 좀 쉬어두겠다.”

아스타틴이 공터 가운데에서 바싹 마른 낙엽만 빼고 나뭇잎을 치워내는 동안 랜돌프는 말을 이었다.

“마음이 바뀌어서 나에게도 불침번을 맡기려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깨워라. 그리고……”

랜돌프는 일어나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못마땅하다면 언제든지 덤벼봐. 나는 안타깝게도 가짜 싸움같은 걸 배워본적이 없다. 아마 목숨을 걸어야 할걸.”

“네가 진짜 얼굴을 드러냈을 때.”

랜돌프가 방만한 자세로 도로 드러눕는 동안 아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때로 하도록 하지.”

아라가 랜돌프로부터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스타틴은 주변의 나무에서 꺾은 죽은 나뭇가지를 쌓고 조그맣게 불을 지폈다. 이제
아주 대놓고 서로 협박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 둘을 임무에 같이 내보낼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지독한 유머감각의 보유자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가우르 옆, 공터 가장자리에 앉아 숲속을 내다보며 그는 수통에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아까 본 시내에서 떠올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의 공터에서 풀썩.. 하는 소리와 이내 조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타틴은 숲에서 뒤편의 공터로 잠깐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다를까, 아라가 바닥에 주저앉아 작게 노래하며 손가락으로 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생글생글 웃음지었다.

“타틴 타틴~ 같이 놀자아~~”

이런… 또 왔다. 이런 상태일 때면 아라는 아라가 아니었다. 아라의 뻣뻣한 성격과 불같은 성미가 비록 피곤하다 해도, 지금의 그녀는 아라보다도 한결 강적이었다.

“뭐해? 뭐해?”

아스타틴은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녀가 뒤로 슬금슬금 다가앉는 것을 느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더 위험해진 것을 알면서도 왠지 입가에는 웃음이 살짝 떠올랐다.

“안녕, 니아.”

“잘 지냈어어~?”

아라의 다른 인격, 니아는 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부벼댔다. 차가운 저녁 속에 그 온기는 등뒤의 작은 불길보다도 한결 따뜻했다. 그 따스한 안도감에 겨워 아스타틴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덕분에 잘 지냈지.”

“안녕~ 피냄새 나는 아저씨.”

니아가 한쪽 팔을 풀더니 몸을 돌려 랜돌프에게 손 흔들어주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여긴 왜 왔어요? 놀러왔어요?”

“아이들이 잠들 시간이다.”

랜돌프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니아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시키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아스타틴은 요새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무서운 아저씨들이 있는데.. 그 아저씨들이랑 숨바꼭질 중이야.”

“아, 정말?”

니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밝게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들 죽이면 돼?”

“아니아니…”

아스타틴은 고개를 저었다. 니아라는 인격을 그저 어른 몸속의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는 허를 찔리기 십상이었다. 예측불가능하고
유쾌할 뿐, 니아의 근본은 아라와 같았다. 유혈을 결코 피하지 않는 다크엘프 전사인 점은 매한가지였으니… 어찌보면 이성이라는
최소한의 제어가 있는 아라보다 이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들키면 지는 놀이야.”

“히잉… 죽이는 게 좋은데.”

어린애 목소리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아스타틴은 말을 이었다.

“아저씨들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하게 갔다가..”

주변의 숲에서 주의를 돌리지 않은 채 그는 슬금슬금 걷는 모습을 손으로 흉내내 보였다. 피에 굶주렸다 해도 니아는 어쩔 수 없이 사람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 조용하게 등 한 대 때리고 오면 된대. 오늘은 안되고.. 다음에 실컷 놀자.”

“나비가 때리면 안 돼?”

최소한 들키면 안 된다는 얘기는 이해했는지 니아는 숨죽여 깔깔 웃었다.

“나비가 때리면 죽을 텐데~”

옆에서 가우르가 다시 가르릉거렸다. 아사나스라는 이름이 있지만 주인이 자꾸 나비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제 나비 소리 나오면 자신을 부르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나비야아~~”

그 소리에 니아는 ‘나비’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이번에는 가우르의 목을 끌어안으며 부벼댔다. 털을 땋으며 작게 노래부르는
모습을 아스타틴은 어쩌지도 못하고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저 긍지높은 전사가 이런 모습을 보일 만큼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과
나비하고 노는 니아의 순진무구한 모습은 기묘한 모순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그녀가 아시타를 노스탤지아 대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해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텔루르가 죽은 후 처음으로 다가와준… 친구를. 왜 아시타의 생전에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거의
원수나 진배없는 이들과 왜 이런 곳에 있는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나무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렸다.

곁눈으로 움직임이 보였다. 잠들지 않았었거나 자다 깬 듯, 랜돌프가 단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때려서 기절시키겠다. 계속 떠드는것보다 낫겠지.”

너무 열중했는지 니아는 그 말에는 반응도 없이 노래하다 말고 가우르의 어깨를 아앙- 깨물었다. 나비는 가르릉거리며 고갯짓으로 그녀를 장난스럽게 밀어냈다.

“놔두면 알아서 본래대로 돌아와.”

아스타틴은 다시 공터 주변의 숲으로 눈길을 돌렸다. 랜돌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 이 자리에 있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에게 들킨 다음은 늦어.”

랜돌프의 목소리에는 으르렁거리는 저음이 섞여들었다.

갑자기 아스타틴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 자신 ‘엘프 이터’로서 얼마나 많은 엘프를, 여자들을 이렇게 만들었을지 모를
랜돌프가 무슨 자격으로 아라, 혹은 니아에 대해 뭐라고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니아에게 손을 대겠다고 뻔뻔스럽게 말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만든 게 너희 인간들이면서-”

랜돌프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숲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동시에 가우르가 긴장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잠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m쯤 거리, 요새와의 사이에 있는 구릉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요새에서 나온 정찰일까? 저대로 오다가는 이 야영지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신호탄이라도 올렸다가는 요새에서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등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랜돌프가 작은 모닥불을 껐는지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공터에 랜돌프와 니아는 살짝
흔들리는 한켠의 수풀을 제외하고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가우르는 그의 곁에 서서 눈을 빛내며 숲을 내다보고 있었다.

“착하지, 착하지…”

아스타틴은 가우르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옆의 수풀로 살짝 밀었다. 이곳에 가우르가 숨어있으면 혹시 정찰이 오더라도 랜돌프와 니아를 돕기에는 충분했다.

그 ‘혹시’의 경우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밤의 숲속에서 아스타틴은 이미 현재가 아닌 오랜 옛날의 시간을 달리고 있었다. 어서 도망쳐요, 텔루르! 수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는 안 됐었다. 그렇게 무작정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수백, 수천 번을 생각했듯이 그는 다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유인했어야 했다. 텔루르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멀리…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듯이 그는 류트를 집어들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숲속으로 달려갔다.

”…잠깐.”

엘프 튀기는 굳어서 숲속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불빛 속에 긴 귀가 두어 번 까딱였다.

그 순간 랜디는 위험을 직감했다. 제길, 역시 록윌에 너무 가까운 위치였다. 하프엘프가 자세를 낮추며 숲을 살피는 동안
랜디는 모닥불을 당장 발로 차 흩어버리고 아직도 넋놓고 앉아있는 다크엘프 여자를 붙잡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입을 막고
함께 수풀로 들어가는 것은 약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지금이 어디 그딴 생각 할 때냐고.

하프엘프가 ‘니아’라고 불렀던 여자는—이런 꼴일 때면 이름까지 달라지는 건가?—한 박자쯤 늦게 버둥거렸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시점.. 아씨, 이게 아니고! 랜디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 술래다.”

입에 팔뚝을 물려놓자 미친 다크엘프 여자는 앞니로 팔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상처를 입히려고 무는 건 아니었고 (그런 일은
질리도록 많았으니 차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저 뭔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공포에 질려 비명이라도 지르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

랜디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놀랍게도 튀기 녀석은 말 한 마디 없이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냐 저 자식!’

불렀다가는 정찰에게 나 여기 있소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미친 여자를 끌고 쫓아갔다가는 역시 들켜버리기 십상이었다.
결국 말 한 마디 못하고 랜디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대원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별빛과 달빛에 의지해 아스타틴은 숲속을 달렸다. 정찰은 미끼를 물었는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찬 밤공기를 마시며 달려가는 이 상황은, 일이 잘못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감은 가슴 뛰는 기묘한 희열이었다.

이 기분 때문에, 달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노스탤지아라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더 잃을 것이 없어서, 두려움의 날이 선 이 흥분밖에는 남은 것이 없기에…

공터에서 상당한 거리까지 왔을 때 그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차가운 달빛을 마신 듯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지만 왠지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 순간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어쩌면 광기가 몰려왔다.

그는 살아있었다.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지만 그는 매번 죽음을 피해 이 달빛 아래 서있었다. 그것이 가혹한 슬픔인지, 광기어린 희열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 기왕 유인한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정찰이 여럿이라면 공터의 야영지를 찾아낼 지도 몰랐다. 등뒤에 류트의 무게는 든든하고도 가벼웠다. 텔루르는 그의 류트 연주를 좋아했었다.

그는 류트를 손에 잡고 잠시 조율했다. 그리고 공기중으로 맑은 음들을 진혼곡처럼, 달빛 속의 광시곡처럼, 세상에 대한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한 도전장처럼 날려보냈다.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어둠에 귀기울이며 빌어먹을 하프엘프 녀석이나 정찰의 기척을 살피던 랜디는 갑자기 목에 와닿는 차가운 날카로움에 몸이 굳었다.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눈만 돌려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든 화살끝을 그의 목에 댄 다크엘프 여자의 눈빛은 또렷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어둠 속에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놓지 않으면 죽이겠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랜디는 마치 덴 듯 팔뚝을 치우며 이를 드러냈다.

“도대체 지휘부에서 왜 널 믿는지 모르겠지만 너 때문에 죽는건 사양이다. 얼간아.”

“어찌 된 상황인가?”

여자는 그에게서 떨어져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튀기놈은 어디 있지?”

“정신이 들었으면 여기 숨어서 다른놈들이 오지않나 경계해라.”

랜디는 격하게 속삭였다.

“그녀석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그때 달빛과 어둠을 타고 맑은 류트음이 동쪽에서 들려왔다.

“네 말이 맞구나, 왠일로.”

다크엘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석이 시선을 끄는 동안 내가 뒤로 돌아가 정찰병을 해치우겠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는 있는 기회를 되도록 활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넌 내 뒤에 다른놈이 없나 경계해.”

단단히 미쳤긴 해도 활솜씨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수틀려서 랜디 자신의 등짝을 쏴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기랄,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녀석들과… 천화의 계곡과 페어리들을 속으로 저주하며 그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 바보짓을 해서 이 고생이란 말인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얼간이야 젠장.”

새삼 짜증을 느낀 그는 으르렁대듯 중얼거렸다.

나무와 수풀 사이를 이동하면서 차차 눈이 어둑한 환경에 익숙해졌다. 얼마나 갔을까, 류트음을 따라가며 주변을 경계하던
그는 눈앞의 수풀에 조용조용 다가서는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그 너머에는 하프엘프놈이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앉아있었다.

랜디가 소리죽이며 다가가고 있을 때, 하프엘프를 수풀 너머로 지켜보던 알프군 정찰이 뒤돌아보더니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
이런 젠장, 최소한 둘이 있는 모양이었다. 뒤돌아봐도 빽빽한 수풀 속에서 제2의 정찰의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어쨌든 이쪽은 뒤에서 경계하고 있는 궁수라는—좀 불안하기는 해도—카드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랜디는 한손에 단도를 빼어들고 다른 손에는 망토를 벗어들었다. 짜릿한 두려움이 손끝, 발끝까지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정찰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에 망토를 덮어씌우자 상대는 놀라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가 무기에 손을 뻗거나 공격해오기 전에 랜디의 칼은 이미 그의
등에 파고들고 있었다. 늑골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칼의 손맛이 매끄러웠다. 빠른 죽음이 나았다, 불운한 정찰에게나 랜디
자신에게나. 정찰이 내뱉은 단말마의 고함은 망토가 소리를 죽여주었다.

이윽고 정찰의 저항이 약해지더니 그는 푹 늘어졌다. 랜디는 그를 놓으면서 칼을 빼려고 단검 자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등뒤에서 소리를 들었다.

“움직임을 보니… 두 명 정도…”

아스타틴은 류트에서 고개를 들어 두 정찰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까 봐둔 길이 있기는 했는데 어디까지 유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머지 둘과는 어떻게 다시 조우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혼자 말없이 떨어져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그는
억눌렀다. 시간이 없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어차피 일행이란 짐이었다. 그냥 혼자 행동하는 게 편했다.

어차피 모두 떠나가 버릴 테니까, 익숙해지지 말아야 했다. 의지하는 건 위험했다.

눈앞의 수풀이 폭발적인 움직임에 갑자기 심하게 출렁였다. 두 정찰이…? 아니, 저건 분명히 전투였다. 그렇다면 또 한 명은 정찰이 아닌 아군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이 한 명이 쓰러지고, 랜디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달빛 속에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을 숨기고 있던 두 번째 정찰이 랜디의 등뒤로 육박해 왔다.

시간이 없었다. 피할 시간조차, 반격할 시간은 더더욱. 그러나 기분 더럽게도 등뒤에서 누군가 죽이러 달려오는 것을 인식할
시간은 있었다. 더욱 끔찍하게도 그의 생명은 전혀 미덥지 않고 적보다 아군끼리 먼저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동료에게
달려있었다.

‘제기랄 늦는다. 쓸모있다는 걸 증명 좀 해봐 미친 계집아!’

눈앞의 하프엘프가 갑자기 움직였다. 얼굴 바로 옆으로 뭔가 스쳐갔다 싶더니 이내 뎅- 하고 현이 한꺼번에 울리는 불협화음이 울렸다. 정찰의 발걸음이 아주 잠시 정지했다.

쐑- 공기중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스쳐갔다. 다시 뎅- 하고 현악기 떨어지는 소리와 섞여 나뭇잎이 푹신한 땅에 무거운 것이 쓰러졌고, 발소리는 완전히 멈추었다.

가만 있기만 하면 된다.

튀기와 노예사냥꾼의 뒤를 따라와 풀섶에 숨어있던 아라는 노예사냥꾼이 등뒤에서 공격받으려는 모습을 보고 화살을 매겨두었던 활시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당겼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위를 놓으려는 손이 멈추었다.

가만 있기만 하면 두 발 짐승을 사냥하던 사냥개는 죽을 것이다. 시위를 당기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아니, 조금 늦기만 해도
된다. 아주 잠시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주받을 다사케타를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 자를 두려워해? 시위를 당긴 손이 움찔했다.

그 순간 하프엘프가, 저 여리여리 어리버리한 녀석이 손에 든 것을 무작정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인책으로 연주하던 류트를.

저 멍청한 녀석이.

이 숲에 살았더라면 바로 저 사냥개에게 붙들려 노예로 팔아넘겨졌을 녀석이 저 사람 잡는 개도 동료라고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다.

류트를 맞고 적이 멈칫한 바로 그 순간, 아라는 시위를 더 세게 당기며 한 번의 심장 박동 동안 화살촉을 정찰의 등 중앙에 조준하고 다음 심장 박동 동안 숨을 멈추고 시위를 놓았다.

죽일 때는 죽여도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노예 사냥꾼이 본색을 드러내는 날에는 기꺼이 죽이겠지만, 그날까지는, 동료인
동안에는 비겁하게 적에게 저 자의 목숨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 그 확신은 예리하게 공기를 찢으며 적에게 날아가는 화살만큼이나
곧고 확고했다.

그러지 않으면 겨우 류트 하나 든 저 하프엘프 튀기에게 져버릴 테니까. 잠시라도 노예 사냥꾼의 죽음을 타인에게 맡길 비열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정찰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는 활을 내리며 일어섰다.

“캠프는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풀섶에서 일어서며 말하는 아라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다.

“하나가 전부였나?”

랜돌프는 천천히 돌아서서, 화살을 맞고 쓰러진 시체와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너머로 그녀를 마주본다.

“둘이 한 조였다.”

“결과적으로 잘 되었네요.”

살짝 말을 더듬는 아스타틴은 악기를 집어던질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아직 역력하다. 랜돌프는 그런 그를 돌아보며 이를 드러낸다.

“한 번만 더 얼빠진 짓을 해봐. 그때는 죽여서 파묻어버리고 갈 테다.”

“그 순간 류트를 맞아 정찰병이 주춤하지 않았으면 너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아라가 지적하는 동안 아스타틴은 구해준 게 누군데… 하고 투덜거린다. 위기의 순간이 지나간 지금 그들 사이에는 어떤 어색함이, 그리고 수풀 위로 달빛을 싣고 부는 바람 같은 시원함이 있다.

가우르가 땅에 떨어진 류트를 주워다 아스타틴에게 갖다주는 동안 아라는 풀섶을 헤치며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캠프를 옮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른 안전하게 쉴 곳이 있는가, 패스파인더?”

랜돌프는 고개를 젓는다.

“적의 경계지역과 너무 가까워. 정찰조가 안돌아오면 반드시 다른 놈들이 올 것이다.”

그는 즐거움 없이 이를 드러내며 멀리 달빛 속에 보이는 요새를 돌아본다.

“오히려 잘됐지. 이쪽으로 적들의 병력이 파견된 동안, 그 공백을 노려 정찰을 속행하자.”

“그러도록 하지.”

내키지는 않는 태도이지만 아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동하자.”

“아까 저녁 무렵 봐둔 곳이 있긴 합니다만.. 정찰을 마치고 거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이제 한결 진정한 기색인 아스타틴을 아라는 흘깃 쳐다보고는, 가우르의 등에 실은 짐을 끌러서 던져준다.

“이 인간들의 소굴에서는 빨리 빠져나갈 수록 좋겠지.”

그녀가 랜돌프에게 짐을 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랜돌프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것만은 동감이군. 솔직히 익숙지가 않아. 사람냄새 나는 지역은….”

아라는 랜돌프를 잠시 표정없이 보고, 아스타틴은 엷게 웃는다.

“간만에 옳은 말씀을 하는군요.”

달빛 속에 흐릿하게 빛나는 요새를 향해 걸음을 떼면서 아스타틴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라에게 고개를 돌린다.

“절묘한 타이밍에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앞으로 단독행동은 삼가도록.”

“집단생활은 좀 무리라서요…”

우물쭈물하는 변명에 아라는 대꾸하지 않고 말한다.

“앞장서겠는가.”

“그러죠.”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수풀을 헤치고 주변을 경계하며 셋은 조용히 이동한다. 단 셋이서 이곳 적진 한가운데서, 공통의 목표와
공동의 위험에 묶여 어쩔 수 없이 함께. 길고 위험한 밤이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을 창백한 달만이 내려다본다.

소감

역시 플레이 내용이 별로 안 길어도 소설로 쓰면 막 고무줄이 되는군요..OTL 삭풍님 말씀마따나 원래의 대사와 선언 사이에 묘사가 들어가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분량을 폭주시킨(..) 묘사와 내면 때문에 인물에 또 새로운 면들을 추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소설의 재미겠지요. 리플레이 제목은 ‘정찰 임무’였지만 소설 제목은 ‘월광’이 된 것도 원본 로그에 없는 내용들이 들어가서였으니까요.

플레이의 재미였다면 역시 인물끼리 으르렁거리다가 막상 위기상황에는 서로 목숨을 구해주는 역동적인 인물 관계였습니다. 죽도록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끼리 결정적인 순간에 협력하는 과정이 입체적이어서 좋았습니다. 아직 갈등의 소지는 많고도 많으니 이 임무 하나로 갑자기 우리 친구 아이가를 외치며 닭살을 날릴 리는 없지만, 최소한 일행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겠지요.

물론 월광 자체에서도 드러났듯 동료끼리 으르렁거리다 보니 임무에도 지장이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런 갈등을 해소해가는 게 또 캠페인의 중요한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인물 간의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간의 갈등이 아니라 노예제, 인종차별, 노스탤지어 내의 알력 등 안힐라스 자체의 모순과 문제점이기도 한 만큼, 그런 큰 문제들을 인물의 감정과 고민, 인간관계 내로 끌어들여 표현하고 해소하는 건 좋은 극적 장치라고 봐요.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 큰 사회적 문제가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지만, 최소한 인물의 성장과 깨달음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는 엿볼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고 또 갈등이 가장 컸던 건 랜디와 아라의 충돌이었던 것 같습니다. 둘다 성격 만만찮은 사람끼리 입장까지 정면으로 대립하니 불꽃이 안 튈래야 안 튈 수가 없죠. 랜디가 과연 양심을 찾을 수 있을지, 아라가 원한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둘다 도덕률과 감성의 실마리는 있지만 제대로 발현은 못하고 있는, 어찌보면 가장 성숙하지 못한 인물들인 만큼 입체적인 변화의 소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설로 쓰면서 어렵고도 재밌었던 것은 시점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은 길어서 별문으로 옮깁니다.

피드백 주신 오체스님과 이방인님, 제노님께 감사드리고, 이단 플레이에 소설까지 공개를 허락하신 삭풍님께도 감사드립니다. 3월부터는 본편 로그도 올릴 수 있겠군요. 많이 부족한데 지적과 질책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m(__)m

월광 세 줄 요약

아라: 이 강아지 같은 녀석 숨만 잘못 쉬면 넌 나한테 죽.. 는… 꺄하하 얘들아 놀자! (헬렐레)

타틴: 싸우지좀 말고… 우헤헤헤 나잡아봐~라~ 디링디링~

랜디: 왜 제정신인 놈이 나밖에 없냐!! (운다)

RPG와 소설의 시점 (월광을 쓰면서)

월광 소감 2부에 해당합니다.

RPG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라면 아마도 시점이 아닐까 합니다. RPG는 대체로 외부적인 시점이고,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시점은 단편적일 뿐 지속성이 없지요.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가자나 진행자가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며 그의 내적 서술을 유지하는 것은 RPG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진행자 하나와 참가자 하나가 하는 1:1 플레이 정도에서나 가능하지요.

반면 소설은 1:1이 아닌 여러 인물이 있는 상황에서도 특정 인물의 시점을 유지하면서 그의 내면과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점 인물의 생각이나 성격도 드러낼 수 있고, 인물이라는 관점을 통해 왜곡 혹은 제한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요. 그래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 가까운 RPG를 특정 인물 시점으로 전환하면 인물의 시각과 내면이라는 새로운 면모가 생기는 점이 로그와는 또 다른 소설적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정찰 임무’ 로그의 외부 시점에서 인물 시점으로 전환해서 ‘월광’을 쓰면서 역시 조심스러웠던 것이라면 제가 다루는 인물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인물의 시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월광에 가장 많이 활용한 시점은 오체스님 인물인 아스타틴의 시점이었고, 그 다음은 이방인님의 랜돌프(랜디)였죠. 이 인물의 행동이 어떤 내적 충동에서 나오는지, 동기와 내면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인물에 대한 지식과 대사, 행동을 통해 짐작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조마조마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나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위키에 올렸었고, 앞으로도 그런 과정을 거쳐 공개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물의 내면에 파고들면서 의외의 면모들이 나타난 점이 소설화의 가장 큰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아라에 대한 아스타틴의 동정이라든지 무모한 단독행동을 했을 때의 심정, 언제든 아라에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을 맡기는 랜돌프의 각오, 랜돌프를 죽게 둘까 생각했다가 아스타틴에게 자극받아 마음을 고쳐먹는 아라의 변화 등은 하나같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인물의 새로운 발견이었죠.

시점을 전환해가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으로 진행한 것도 재밌었습니다. 제 인물인 아라의 시점으로 쓰는 게 정석이었겠지만, 아라 시점으로는 이야기가 재밌거나 완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선 랜돌프의 모습이 많이 왜곡되었을 것이고, 니아 시점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한데다 아스타틴과 랜디만 알 수 있는 부분들은 다 빠졌겠지요. 결국 최선의 시점 인물은 ‘제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혹은 특정 부분을) 가장 잘 끌어갈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인물의 내면은 짐작에 맡기는 게 가장 적절할 때도 있고요.

앞으로도 이오닉스 세션 소설화를 하면서 다양한 시점을 활용할 듯하고, 그때마다 인물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과 기법을 실험해 보면서 RPG와 소설의 서로 다른 문법에 대해 생각도 해볼 수 있겠군요. 그건 인물들이 떠나는 모험과는 또 별개로 제게도 모험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