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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마법진을 바닥에 그린 방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것은 양옆에 까마득히 솟아오른 암벽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고운 잿빛
먼지를 날리는 가운데 얼굴에 문양을 문신한 엘프 여자가 다시 주문을 몇 마디 중얼거렸고, 잠시 후 이번에는 협곡 대신 햇살 가득한
숲이 나타났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머리 위의 새울음에 섞인지 한 호흡 후, 그들은 숲의 또 다른 지역에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나무 사이로는 왼편으로 찰박찰박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공기는 약간 서늘했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엘프 두
명이 대원의 수에 맞게 말 몇 마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이동하지요.”
엘프 여자는 지팡이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솜씨로 맨 앞의 순한 눈을 한 백마에 올라탔다. 정갈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뛰어난 혈통과
훈련이 돋보이는 말을 아스타틴과 다른 요원들이 하나씩 잡아타는 동안 아라는 가우르에 올라탔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들은 숲의 생동감 넘치는 고요, 점점 가까워오는 물소리 속에서 말을 달렸다.
“이쁜아이 상처는 괜찮아?”
아라가 가우르를 아스타틴의 말 옆에 붙이자 말은 신경질적으로 히힝거렸다. 아스타틴은 그런 말의 고삐를 필사적으로 당기며 귓가에
낮게 속삭여 간신히 말을 진정시켰다.
“니아가 침발라서 고쳐줄까?”
그녀는 검지를 입안에 넣었다가 히이 웃으며 들어보였다.
“아, 괜찮아요…”
아스타틴은 말고삐를 당기면서 부드럽게 말의 옆구리에 발뒤꿈치를 찔러 가우르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입가에 팽팽한 긴장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지만, 자신을 ‘니아’라고 하는 아라를 보는 눈빛에는 연민의 기색이 어렸다.
나무 사이 간격이 띄엄띄엄해지고 땅이 내리막길이 되면서 선두의 대원이 잠시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이어지는
나무들 너머로 완만한 골짝에는 평온한 강물이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굽이쳤다. 강가의 숲속에 희게 빛나는 도시의 탑과 지붕이
나무의 녹색 사이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뻗어올랐다. 대원은 그 모습을 가리켰다.
“알쿠알론데입니다.”
알쿠알론데는 돌 하나하나에도 마법이 서린 도시였다. 넓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정교하게 조각한 수정을 정확한 각도에 통과해
거울과 작은 인공 연못에 반사하고 굴절하며 대리석에 닿는 데마다 작은 빛무리가 일었다. 그런 곳마다 깊고 차분한 마법의 기운이
작은 불씨처럼 튀어오르는 것을 크세노바는 눈을 감고도 영안으로 ‘볼’ 수 있었다. 마탑에서 수련한 것보다 한층 더 견고하고 오랜
힘, 대지의 뿌리만큼이나 깊은 마력이 희미한 진동이 되어 그의 피부에 닿았다.
벤치에 앉아 뒤의 따뜻한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그는 안힐라스에 처음 도착한 순간을 떠올렸다. 이곳 실라엔(주:엘프어로 ‘빛나는 눈’) 탑 상층의 회의실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꼴사납게 등장한 후, 마탑 대표로 온 그는 그곳에 있던 노스탤지아 지도부를 소개받았었다. 학자 루크 폰 디엠,
냉엄한 얼굴의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크로이엄, 호탕한 성격 이면에 전사의 혼이 엿보이는 드워프 곤드 엔가마르, 고귀한
아름다움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감춘 엘프 여왕 이사벨라, 차가운 불길처럼 안으로 타들어가던 다크엘프 샤나에리스.
소개 끝에 그는 동료를 배정받을 때까지 실라엔에서 대기한 후 그들과 함께 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힐라스를 침략하고 정복하는 인간 국가들을 몰아낸다는 거대하고 두려운 목적을 품고 모인
그들, 노스탤지아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 나부랭이는 놀이판 위 많은 말 중 하나일 뿐이리라. 판을 전부 볼
수도 없는 게임에 뛰어들어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놀이말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희미한 불쾌감이 들었다.
“하아…”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안힐라스는 안 오려고 했건만.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는 한쪽 눈을 떴다. 탑의 거대한 양쪽문으로 사람이 몇 명 들어서고 있었다. 지상층의 드높은 천장 밑에서 순간
개미처럼 작다는 착각이 들었던 그들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 중 하나가 지나치게 빠르게 가까워오고 있었다.
샤나에리스와 마찬가지로 검푸른 피부를 한 다크엘프 여자가 달려오며 내는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넓은 로비에 울렸다.
“와아~ 이쁘다아아아-”
크세노바는 나머지 한쪽 눈도 뜨며 주춤 일어섰다.
“혹시 두 분이 동료- 우왓!”
다크엘프 여자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머리칼을 잡아당기자 크세노바는 고개가 확 꺾이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팔을 휘저었다. 혹시
어린아이를 잘못 보았나 그는 여자를 곁눈질했지만, 조금 키가 작은 편이기는 해도 몸에 꼭 맞는 가죽 갑옷에 드러나는 굴곡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인의 몸이었다. 혹시 저주에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영혼 바꿔치기라든지?
“이쁘다 이쁘다! 니아가 이쁘게 해줄게!”
여자가 머리를 당기면서 갈랐다가 꼬았다가, 마구 엉클어놓는 통에 모발과 두피를 잃지 않으려고 머리를 기울인 크세노바는 들어온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서는 이런 게 인사법은 아니겠지. 니아라는 여자를 그들이 보는 황당한 시선으로 미루어 이런 행동이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짐작한 크세노바는 안힐라스에 대해 조금은 안심했다. 머리카락을 두고 줄다리기를 그만할 수 있으면 더
안심하겠지만.
“이, 일단 이것 좀 놓고.”
성가시기는 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화를 내기는 어려웠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금씩
니아의 주먹에서 구출해내고 그녀의 손가락을 살살 풀어내자 그래도 학습능력이 있는지 니아는 아까처럼 당겨대지는 않았다. 대신 완전히
떨어질 생각은 없는 듯 머리 한 움큼을 느슨하게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대원 중 하나, 엘프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귀가 지금까지 본 엘프보다 더 짧은 어린 청년은 크세노바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한쪽은 녹색, 다른 한쪽은 파란색인 눈이 특이했다.
“이번엔 저런 것도 동료입니까..”
“마침 모두 모여계셨군요.”
대리석 바닥 위에 가벼운 발걸음이 다가왔다. 키가 크고 당당한 체격의 엘프 전사가 안쪽 계단에서 로비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흰 갑옷에는 금 상감 무늬가 반짝였고, 하얀 망토가 걸음에 가볍게 나부꼈다.
“저는 펠러티리스의 엘윙이라고 합니다.”
크세노바가 엘프를 맞으러 걸어가자 니아라는 다크엘프는 여전히 그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왔다. 어미오리가
이런 기분일까. 엘윙은 앞의 크세노바와 니아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무표정하게 한켠에 선 귀짧은 엘프 청년—아마 하프엘프?—을
잠시 보다가 역시 인사했다.
“여러분에게 임무를 설명하는 한편, 마지막 동료 또한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동료 이야기를 하는 순간 엘윙의 예의바르던 표정에는 뭔가 싸늘한 것이 스쳐갔다. 엘프의 눈빛이 딱딱해지는 것을 보며 크세노바는
순간 폭력의 기운을 느꼈다. 뜨겁고 우발적인 분노가 아닌, 빙산처럼 차갑고 거대한 증오를.
“동료라고…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엘윙의 입술이 경멸, 혹은 악의로 희미하게 비틀렸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발걸음이 엘윙이 들어온 입구에서 다가왔다. 그 소리에 크세노바의 머리끝을 헝클어놓고 있던 니아도 고개를
들었다. 엘윙보다는 무구가 덜 화려한 전사 네 명이 중간에 인간 남자 하나를 두른 채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호위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크세노바는 직감했다. 엘윙이 ‘마지막 동료’ 이야기를 했을 때 보인 폭력의 기운을 이 인간 남자를 포위한
엘프 전사들에게도 느낄 수 있었다. 엘프들의 냉랭한 표정을 보며 크세노바는 점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동료라는 자는
아무리 봐도 범죄자 아닌가. 그것도 도둑 같은 수준이 아니라 가장 경멸스럽고 파렴치한 범죄자에게만 가능한 취급을 받는…
동료를 배정해준다더니, 동료가 저 하프엘프의 말마따나 이런 것들? 크세노바는 다시 영혼 밑바닥으로부터 스승에게 이를 갈았다.
전사들이 비켜서며 뒤로 물러나는 동안 그 인간, 마지막 동료는 오만한 눈빛으로 크세노바와 니아, 하프엘프 청년을 훑어보았다.
남자에게서는 어딘가 포식자의 냄새가 났다. 온 세상을 경계하는 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끝없이 정보를, 위험을 찾아 움직였고,
간편하고 실용적인 복장은 사냥꾼이나 숲지기 느낌이 났다. 그의 움직임은 야수처럼 느긋하게 우아하면서도 언제든 폭력으로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시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듯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은 아직 젊은이의 생김새였지만, 젊음의 맑은
순수는 전혀 없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은 표정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부조화가 역설적이게도 엘프와 닮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크세노바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 말을 꺼냈다가는 적을 만나기도 전에 이곳 엘프들과 먼저 전투를 벌이게
될지도 몰랐다. 스승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지.
한편 니아는 뭔가 그의 머리를 땋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는데, 덕분에 머리끝은 엉망으로 엉켜가고 있었다. 크세노바는 손을 저어 허공에
색색의 나비떼를 만들어냈다. 이쯤이면 주의를 돌릴 수 있겠지. 아니나다를까 니아가 ‘와아~’ 환호하며 나비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그는 엉킨 머리끝을 풀어내리며 마지막 동료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쪽 분은?”
크세노바의 물음에 인간 남자는 그를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엘윙이
대답했다.
“엘레베스의 자비로 목숨을 건진 죄수, 랜돌프 에디우스입니다.”
맛이 지독하기라도 한 듯 엘윙이 그 이름을 내뱉자, 이름의 주인은 재밌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불가피하게 이 인간을 여러분과 함께 배속시키라고 전달받았습니다만, 노예사냥꾼이던 천박한 잡니다. 동료의 예우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노예 사냥꾼… 역시, 그렇다면 저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쪽 해안을 중심으로 땅을 차지해 들어가는 인간 국가들은
무수한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노예가 되느니 싸우다 죽는지라 정도는 덜했지만—다크엘프를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려고 아예 이종족을 전문적으로 납치해다 파는 노예사냥꾼은 그 중에서도 특히 증오의 대상이었다. 엘프에게 붙잡히고도 에디우스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 게다가 노스탤지아 대원으로 배속받은 점이 크세노바는 오히려 놀라웠다. 엘레베스라면 그들의 여왕, 이사벨라
에르쉬아 호르뉴를 말하는 것일 터. 아까 본 고아하고 슬픈 눈빛의 여성을 떠올리며 크세노바는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눈 짝짝이 하프엘프 청년이 랜돌프 에디우스를 노려보는 시선은 크세노바를 볼 때보다도 한결 차가웠다. 그래도 노예사냥꾼보다는 좀
위라니 나름 다행인 건가. 아마도 인간의 피가 섞였을 청년이 인간을 저토록 싫어한다는 것은 안힐라스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안힐라스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목에 건 펜던트가 왠지 무겁기만 했다.
나비가 다 없어졌는지 아니면 싫증이 났는지 니아는 크세노바를 지나 에디우스에게 다가가더니, 2m쯤 앞에서 멈춰서며 작은 코를
킁킁거렸다.
“피냄새가 나는 아저씨네.”
랜돌프가 배속받은 이유는 목적지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던 엘윙은 그런 니아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저분은 왜 저러시죠?”
“사냥꾼이야..”
그 반응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반쯤 감고 니아는 랜돌프를 보며 말했다.
“포식자의 본능.. 사람 사냥꾼..”
“다른 건 모르겠고…”
하프엘프의 경멸을 무시해버리고 크세노바에게는 중립적이었던 에디우스의 눈빛은 니아에게 머물렀다. 그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그는
엘윙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지?”
범죄자가 한 것이긴 해도 좋은 질문이었다. 저주, 영혼 바꿔치기, 아니면 그냥 광기? 원래 성격? 어느 것이든 니아가 노스탤지아
유격대의 일원이 될 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았다.
엘윙은 마치 질문을 넘기듯 하프엘프를 바라보았지만, 청년은 내가 아느냐는 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협조성은
있는지 그는 니아를 불렀다.
“니아.. 이리와요.”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니아에게 말하면서 그의 턱선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뭔가 갈등하는 감정과 싸우는 것처럼… 이
청년 역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으리라는 생각이 크세노바는 문득 들었다. 엘프란 헷갈리는 족속이었다.
“나비야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달래줘야죠.”
음? 나비는 이제 없어졌는.. 하프엘프 오른편으로 시선이 미친 크세노바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떨어졌다. 환하고 하얀 실내에서 잘라낸 한 조각 어둠, 커다란 검은 짐승이 노란 눈을 빛내며 랜돌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국 동물원에서 본 적 있는
표범과 비슷하지만 훨씬 큰… 여기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 꿀꺽하실 수 있는 맹수가 소리도 없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크세노바는 소름이
끼쳤다. ‘나비야’가 언제든지 뛰어오르려는 듯 웅크린 자세, 그리고 그 근육질 목에 곤두선 털을 보고는 이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본능이 발동해 순간 정신없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경계는 하고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위험은
없다고 이성은 겁에 질린 본능을 다독였지만, 여전히 크세노바의 발은 머리의 제어와는 상관없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했다.
니아는 득달같이 그녀의 나비야 곁으로 달려갔다. 앞발 한 번 휘두르면 그녀의 두개골을 계란처럼 부숴버릴 수 있는 짐승의 목을
그녀가 끌어안고 청년과 뭔가 재잘거리는 동안, 랜돌프는—그를 노려보며 낮게 으릉거리는 맹수를 곁눈으로 경계하며—건조한 표정으로
엘윙에게 말했다.
“날 불러내서 이놈들과 함께 묶는 걸 보고 사실 이 일행이 버리는 돌이라는 건 대충 파악할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니아에게 향했다.
“그렇다고 해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녀석까지 일행에 있다는건 좀 웃기지 않나?”
어디선가 스승이 정신없이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을 느끼며 크세노바는 이를 악물었다.
‘영감님 어디 두고 보십시다…’
“다 모이셨으니 임무에 대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랜돌프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엘윙은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맹수가 위험해지지 않나 보려고 다시 곁눈질을 하다가 크세노바는 니아가 멍하니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 전에 만난 이래 그녀가 가만히 있었던 건 한 순간도 없었기에 이색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뭔가 답변해주고
있던 하프엘프를 어리둥절하게 보다가 니아는 눈을 깜박이며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의 그 이상하게 들뜬 웃음기가 사라진 채 그녀의
검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뭐지?
한편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 뜯었던 엘윙은 명령서를 보고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마굿간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말은 없어지고
돼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의 표정이랄까. 물론 크세노바가 그런 장난을 아카데미의 동료들에게 친 적은 없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지?”
이제 목소리마저 어린아이 목소리가 아니라 가라앉고 냉정해진 다크엘프 여인이 물었다.
“그게..”
잠시 더듬다가 냉정을 되찾고 엘윙이 말했다.
“에미넴 숲 서쪽의 페어리 마을로 이동해서…”
무엇 때문에 엘프가 저렇게 당황했을까 생각해보던 크세노바는 엘윙의 다음 말을 놓칠 뻔했다.
“축제… 준비를 도우라는 명령입니다.”
페어리라는 말에 눈쌀을 찌푸렸던 랜디는 그 말에 눈썹을 쳐들었다. 엘윙은 그 일대에 오크 활동이 늘어났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축제 준비라니? 설마 잘못 들었겠지?
”…페어리 마을의 축제 준비라고 하셨습니까?”
크세노바가 묻자 엘윙은 나도 모르겠다는 듯 하릴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은 누가 내린 것인가.”
니아—정말 니아?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기분이 변할 수도 있나?—의 목소리는 차갑고 고압적이었다. 짝짝이눈 청년이 엘윙에게 이동
위치를 확인하는 동안 다크엘프는 엘윙의 손에서 명령서를 잡아채더니, 잠시 읽고 땅에 내던지듯 버리며 돌아섰다.
“평소에도 시끌벅적하니 정신없는 놈들이…”
랜돌프 에디우스는 이마를 짚으며 끄응.. 신음을 흘렸다. 니아는 그런 그를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그쪽 인간. 페어리들을 아는가?”
“물론이다.”
랜돌프는 팔짱을 꼈다.
“그 날파리같은것들이 아니었으면 난 여기 잡혀와 있지도 않을 테지.”
“그들의 날개를 뜯어서 마석으로 만들려다가 잡히기라도 했나보군.”
니아의 입술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어렸다. 아니, 좀전에 노예사냥꾼 소리를 못 들었나? 혹시 나비에 너무 열중하느라 몰랐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일관성이 없는 그녀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 노예사냥꾼이라고 하더군요.”
하프엘프 청년은 툭 흘리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니아가 이렇게 변한 때부터 꾹 다문 입과 어깨선의 긴장은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그는 니아의 이런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고 있거나 최소한 익숙한 모양이었다.
다크엘프 여성은 순간 정지했다가 랜돌프를 다시 보았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엘프들만큼이나 깊은,
그러나 폭력의 기운이 더욱 검붉은 증오가 배어났다.
“다사케타…”
뭔가 그녀의 언어로 모욕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크세노바는 그녀 자신의 적의보다도 주인에게 맞장구치듯 다시 으르렁거리는 맹수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주인도 짐승도 랜돌프를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던데, 다크엘프 쪽은 사람을 분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마저도
단정하기는 일렀지만) 맹수는 인간 남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노예사냥꾼은 저쪽’ 표지판을 들고다녀야
하나 그가 고민하는 동안 랜돌프는 니아와 나비야에게는 개의치 않는지 엘윙에게 에미넴 숲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후우.”
크세노바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고 머릿속에는 이미 돌아가면 스승의 의자 밑에 심어놓을 폭죽 목록을 짜고
있었지만, 기왕 이곳에 있는 김에는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빨리 돌아갈 수 있겠지.
“주 목적이 설마 축제는 아니겠고 가서 보면 뭐 알겠죠.”
“그곳에 가면 특별한 손님이 있다고 하더군.”
그를 흘깃 보며 니아가 말했다.
“너희들과 다니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특별한 손님? 니아가 엘윙에게 이동 마법진은 어디 있는지 질문하는 동안 크세노바는 니아가 명령서를 버린 데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아까 들은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쭉 읽은 끝에—노스탤지아 인장이 기억과 같은 것을 보니 위조는 아닌 모양이었다—드래고니안 요원 한
명이 마을에 도착해 있다는 대목에 시선이 미치자 그는 눈썹이 저절로 치켜올라갔다.
“가자, 아사나스.”
니아가 돌아서며 부르자 나비야, 아니 아사나스는 바로 일어나 주인을 따랐다. 드래고니안이라… 크세노바는 명령서에서 시선을 들고
아사나스에게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따랐다. 하프엘프 청년은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에디우스는 한숨을 쉬며
뭔가 페어리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 뒤따르면서 이 기묘한, 아니 어쩌면 최악의 일행은 임무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었다.
소감
써둔지 2주 가까이 된 분량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군요. 써놓고서는 다듬으면서 재촬영을 기다렸다가 소설화를 한지라… 랜돌프의 첫 등장 묘사와 그에 대한 크세노바의 반응이 쓰기 재밌었고, 나머지는 RPG 로그를 소설로 옮기느라 고심한 생각이 나는군요. 묘사 넣느라 이 피토하는 분량 같으니라고(..) 1화가 또 모든 것을 소개하는 첫부분이라 유달리 분량이 많은 점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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