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1화 (1): 안힐라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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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닉스 1화 1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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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높게 난 창문으로 봄 햇살이 비쳐들며 살짝 어수선한 작은 방을 비추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와 수정, 유리병 따위의 잡동사니가
흩어져 바닥에까지 일부 쏟아졌고, 옆의 소형 책장에는 커다란 책을 넘칠 정도로 꽂아놓아 언제 어느 책이 튀어나올지 위태위태했다.
좁은 침대 발치에 깔아놓은 싸구려 소형 양탄자 구석이 접혀 나무바닥이 드러난 데는 탄 자국이 보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브를 입은 깡마른 형체가 들어섰다. 허리까지 기른 황금빛 머리칼은 햇살을 끌어들여 품듯 빛나며 섬세한
얼굴선을 그윽하게 감싸주었고 가느다란 눈매와 매끈한 광대뼈, 유연한 턱선은 남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입을 벌리면서 나온 한숨은 완연한 남자 목소리였다.

“하아..”

청년이 침대에 몸을 던지자 이불과 침대보가 부풀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잠시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그는 끄응.. 몸을 뒤척여
등을 대고 눕더니 멍하니 햇살 가득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옷 속에서 목걸이에 매달린 펜던트를 꺼낸 그가 낮게 한 마디
중얼거리자, 펜던트가 열리면서 펜던트 뚜껑과 본체에 하나씩 두 여인의 초상이 드러났다. 작은 몸집에 수줍어보이는 긴 금발머리
여인을 그는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무른 쪽은 다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와 길고 우아한 목선,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갈색 눈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청년은 펜던트를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 저편에서는 예의바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노바 사형, 스승님께서 부르십니다.”

“응, 간다.”

제노바라고 불린 청년은 펜던트를 다시 로브 속으로 떨어뜨리며 일어나 앉았다.

“크세노바라니까 다들 왜..”

궁시렁거리며 그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책상 가장자리에 버티고 있던 구슬 하나와 매끈한
조약돌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똑또르르 굴러갔고, 이윽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부르셨어요?”

제노바, 아니 크세노바가 입이 잔뜩 부어서 문을 연 방은 청년의 방을 물건의 양과 혼돈의 정도에 맞추어 확장한 느낌이었다. 네
개의 벽을 다 차지한 대형 책장과 선반에는 얇은 책자에서 남자 어른이 간신히 양팔에 안을 만한 크기까지 무수한 책을 비롯하여 약재가 든
병, 약간 놀라보이는 토끼니 쥐 등 작은 동물이 떠있는 커다란 유리병, 물이 없는 어항, 새장 속에 떠도는 빛무리, 속에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수정구, 온갖 크기와 색깔의 깃털, 말린 원숭이 앞발 등등 형언할 수 없는 잡동사니가 꽉꽉 차있었다. 다리끝이 맹수의
발처럼 생긴 거대한 책상은 종이와 책이 넘쳐나서 표면이 보이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긴 작업대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분홍빛 시약이 든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계속 중얼거리는
노인 옆에는 양피지가 펼쳐 있었고—종이가 더 싸고 좋다고 아무리 잔소리해도 듣지 않는 노친네는 있게 마련이었다—그 위에는 노인이
말하는 속도에 맞추어 깃털펜 하나가 혼자 열심히 움직이며 필기를 했다. 문이 열리자 마법사는 무성한 눈썹 밑으로 푸른 눈을 문으로
향하더니, 병을 내려놓고 의자에 뒤로 기대앉았다.

“왔냐, 이 망나니놈아.”

작업대로 다가가면서 마법의 깃털펜이 왔- 냐- 이- 잉크병에 뛰어들었다가 돌아와 망- 나- .. 하고 열심히 적는 것을 보고
크세노바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스승이 짜증스럽게 손을 젓자 깃털펜은 잉크를 몇 방울 흩으며 툭 쓰러졌다. 길게 누운 펜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들려온 것은 아마 착각이리라.

“어떤 일로 부르셨습니까.”

로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무심히 묻는 제자를 보고 노인은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왠만하면 너같은 놈은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제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의자에 깊이 기대앉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허리까지 닿는 길고 풍성한 수염은 그러기에 딱
좋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느냐.”

청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노인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하여튼 내가 왜 너같은 놈을 키웠을꼬… 아무튼 각설하고.”

스승은 작업대에 팔꿈치를 얹으며 제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안힐라스로 가야겠다. 임마.”

크세노바는 잠시 이 노인이 치매인가 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말했다.

”…좀 뜬금없는데.”

“왜 얼굴이 뚱하냐 이놈아?”

스승이 깃털펜을 잡아채서 크세노바에게 대고 흔들자 펜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서 끽 소리를 냈다.

“이 인자한 스승이 해외여행을 시켜주겠다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만 20일은 걸리잖아요.”

청년은 이런 말다툼을 자주 한 기색으로 팔짱을 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스승 역시 익숙한 기색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누군지 잊었느냐? 시간은 걱정 말거라.”

“아, 그러고보니 조만간 어머니 생신이군요.”

오랜 경험으로 패색을 느꼈는지 청년은 조금씩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 불효자식이 되기 싫으니 역시 그냥 가보겠습니다.”

크세노바가 잽싸게 문고리를 잡는 것을 보고도 스승은 느긋하기만 했다.

“어쨌든 그쪽과도 얘기가 끝났고…”

청년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지만, 노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얘기했으니 잘 다녀오거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좀…”

청년이 방문을 열면서 도망치듯 나간 순간, 갑자기 부웅- 소리가 나면서 그 주변의 공기가 묘한 왜곡을 일으켰다.

“아 영감님 이러시기요!!”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은 청년의 고함 위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네놈이 그러리라는건 마탑의 현자 12인중 12인이 동의한 사항이지.”

크세노바의 금빛 머리카락을 더욱 눈부시게 물들이며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그 빛 속에 그는 이를 갈며 스승을 돌아보았다.

“잊지 않겠..!”

“여행 잘 다녀오거라.”

스승이 즐겁게 손을 흔들어주는 동안 빛은 더욱 눈부시게 확 끼쳐왔고, 빛이 사라졌을 때 크세노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더
낄낄거리다가 노마법사는 휘파람을 불며 시약병을 집어들었고, 깃털펜은 지친 한숨을 쉬며 폴짝 뛰어 일어났다.

텔레포트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장거리는 처음이어서 그런지 이전과 경험은 사뭇 달랐다. 어느 순간 그는 아득한 높이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의 땅덩이… 저것이 안힐라스? 끝없는 숲과 험준한 산맥, 바다와 사막과… 아니, 그 이전에
이대로 떨어졌다가는!

마치 헤엄치듯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저었지만, 그에게는 팔도 다리도 없었다. 오직 감각과 사유뿐. 아니, 이 높이에서 얼어죽을
정도로 춥지 않다면 완전한 감각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그 땅덩이는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오기만 했고, 크세노바는 입이 없었지만
비명을 질렀다.

눈을 질끈 감는 기분으로 잠시 인식을 껐던 것일까 (기절이라는 가능성은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아니면 이 초자연적 여행의 단계전환을 유한자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한 것일까, 추락의 감각이 문득 끊어지더니 그는
이번에는 끼룩거리는 갈매기떼의 틈에서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저 밑으로는 장난감 같은 배들이 하얀 증기를 내뿜거나 돛을
부풀리며 항구로 들어왔다.

다시 전환. 그는 숲의 나무 사이를 빠른 속도로 날거나 혹은 달렸다. 나뭇가지와 나무둥치가 정면에서 때릴 듯 슉슉 다가왔지만,
그는 마치 바람 그 자체인 듯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더 빨리, 더 빨리…

그리고 산꼭대기를 스치고, 잿빛 모래바람을 헤치고, 도시의 지붕 위와 탁 트인 들판을 달리며 그의 속도는 빨라지기만 했다. 어디
가는지 모르는데도 이제 거의 다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빨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빛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졌다.

소감

이제부터는 어느 정도 실제 기록을 근거로 한 소설화입니다. 제노님의 제노법사 크세노바 등장장면 부분이죠. 리플레이 분량은 별거 아니어도 소설 분량은 의욕에 따라서는 정말 고무줄처럼 늘어나는군요. 실시간으로 하는 성격상 플레이 중에는 자세하게 할 수 없는 묘사를 대폭 추가한 것이 소설의 특유의 재미라면 재미일 것입니다.

마탑 묘사는 해리 포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자동구술 깃털펜이나 생명력 있는 마법물품 같은 건 해리포터 보신 분들은 낯익으시겠고, 엉뚱하고 혼란스러운 마법사들 분위기도 해리포터에 영향을 받았죠. 삭풍님과 제노님의 코믹한 RP를 보고 더 해리포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리플레이와 많이 다른 부분이라면 우선은 크세노바의 안힐라스 도착 후에 있었던 노스탤지아 지도부와의 만남을 뺐다는 점이고 (이 대목은 나중에 간단한 회상으로 축약합니다), 두 번째는 순간이동 중의 경험을 추가하면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서 벗어나 크세노바 관점으로 전환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역시 안힐라스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분위기라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그런 면에서는 서장과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소개가 충분히 되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나중에까지 읽다 보면 안힐라스의 상황이 전달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마법적 이동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고 해서 크세노바는 대륙 간 이동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만, 그의 경험은 워낙에 장거리 이동이라는 점과 크세노바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점에 영향을 받았을 듯합니다. 나중에 나오는 랜돌프의 순간이동 경험이 꽤 다르듯이 순간이동의 구체적 경험은 인물마다, 또 상황마다도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법은 어느 정도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다음 편은 ‘잿빛 메타포노비아’군요. 이쪽은 내일 저녁 재촬영 일정(..)이 있어서 아마 내일 모레나 그 후에 올라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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