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1화 (3): 출발

<< 이전: 잿빛 메타포노비아 다음: 숲의 보석, 알쿠알론데 >>

의자에 앉은 아스타틴은 전령이 주고 간 명령서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에 새 동료와
합류해서 15시까지 알쿠알론데에 귀환 보고.

다시 임무였다. 다시 동료를 만나고, 다시… 떠난다. 머리로 알고는 있었다, 노스탤지아에 있는 한 명령에 따라 임무를 떠날 것은.
그런데도 누가 죽고 누가 슬퍼하든 이 싸움은, 갈 곳과 할일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낯설기만 했다.

다시 사람을 알게 되고, 어쩌면 마음을 열고, 또 잃는다. 아스타틴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더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는가. 부모에 이어 텔루르마저 죽었을 때 그런 일은
이제 겪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 아시타를 만났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털과 커다란 온기를 찾았지만, 만져지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뒤늦게 이제 루테리온도 그의 곁에 없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정신 이상한 다크엘프 여자를 쫓아 떠났으니까. 그것이 녀석의 선택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머리로 아는 것들을 가슴은 납득하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명령서를 손에 쥔 채 무릎을 끌어올려 끌어안았다. 외로움만은 그에게 가장
오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라도 그를 버리지 않을.

창이 없는 방안은 쌀쌀하고 어둑했다. 창살 사이로 복도의 횃불이 비쳐드는 불안정한 조명 속에 구석에 비좁은 침상과 그 밑에 요강
외에는 텅 빈 가로 네 걸음, 세로 세 걸음의 좁은 방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었다.

방 한쪽 구석, 창살 반대편 벽에 양반다리를 하고 기대어 앉은 여인은 무표정하게 감방을 바라보았다. 횃불빛은
올려묶은 은백색 머리에 붉은 반사광이 되었고, 진회색 눈은 횃불의 흔들림에 따라 뜨거운 불길을 품었다가 싸늘한 어둠이 가득
고였다. 반들반들하고 검푸른 피부는 동상의 표면인양 미동도 없는 가운데 조각한 듯 또렷한 광대뼈와 작고 오똑한 코는 얼굴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꾹 다문 입술을 살짝 비튼 표정에는 폭력적인 잔인성과 드높은 긍지가 동시에 드러났다. 튜닉과 바지
위에는 가벼운 가죽 부분갑주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황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무기는 없었다.

발걸음이 들려오자 여자는 긴 귀끝이 살짝 까딱거리면서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인 채 창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라니아카? 알라스입니다.”

감방에 앉은 여인과 비슷한 검은 피부와 긴 귀를 한 여인이 가죽 갑옷에 무장을 한 채 다른 전사들과 함께 창살 밖의 복도에 섰다.
알라스의 눈짓에 전사 둘이 앞으로 나서 창살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아라니아카는 벽 구석에 다시 몸을 기대며 물었다. 알라스는 그런 그녀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장로회의가 아라의 처분을 결정했습니다.”

잠시 움직임 없이 앉아있다가 아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서도 알라스보다 키가 작았지만, 턱을 치켜들고 상대를 쏘아보는
그녀의 태도는 당당했다.

알라스 뒤에 있는 전사가 말없이 다가와 아라에게 짧은 칼 한 자루와 화살, 그리고 꽉 찬 화살통을 건넸다. 아라는 눈쌀을 찌푸리며
처음으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프리야 마타께서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면서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눈빛은 묘하게 간절했다.

“오지 않으시는가.”

“프리야 마타께서는 바쁘십니다. 그리고…”

알라스의 표정은 냉정했다.

“아라니아카는 프리야 마타의 자비에 의해 노스텔지아의 요원으로 활동하시게 될 겁니다.”

“뭐?”

아라는 눈을 부릅떴지만 알라스는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이미 노스텔지아의 마중이 나와있습니다.”

알라스는 허리의 대검을 철컥거리며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죠. 거기에 그대의 가우르도 있습니다.”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걸어가버리는 알라스의 뒷모습을 아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따랐다. 전사들은 어느새 그녀 주변을 두른 채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들의 무기와 수에 시선이 미친 아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칼을 찬 후 화살통과 활을 메었다. 절도있게 걸음을
옮기자 전사들은 일제히 그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걸어가는 아라니아카의 눈동자 속에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횃불의 불길이 비쳤다.

노스탤지아 대원들 사이에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아시타를 죽인 것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라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든지,
심지어 그녀가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합류해서 동료로 대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지도부와 가까운 지위 때문에 오히려
고속승진할 지 모른다거나, 심지어 아시타의 죽음 자체가 노스탤지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다크엘프의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연락 기지의 회의실에서 새 동료를 기다리며 아스타틴은 어디까지 믿을 만한지 알 수도 없는 그 소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불안할
때면 쉽게 퍼지는 류의 근거없는 풍문이라 하더라도 들을 때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할 의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열심히들 얘기해준 덕분에 생각하기도 싫은 구설수는 폭넓게 섭렵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
동료들과 서서도 그들끼리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좀 일하게 했다가 고속승진시켜서 지휘권을 쥐어줄지도…’
‘경력관리라는 거로군. 역시 백이 든든해서…’ ‘그걸 우리가 호위할지도 모른다고…’

눈을 감으며 아스타틴은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귀는 더욱 예민해지기만 했다. 대원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사가 죽었는데 그
죽음이란 결국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수단, 권력다툼의 한 수, 이용해먹기 좋은 혼란일 뿐이었던가. 아시타는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창가에 서서 내다보던 대원 하나가 밖에 대고 턱짓을 했다.

“저기 프리야마타의 의자매 나리가 오시는군.”

대원들은 웅성거리며 창가로 몰려갔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쳤다.

“여 아스타틴. 너도 와서 보라고. 꽤 위풍당당한 행차인걸.”

아스타틴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시타를 죽인 살인자를. 어떤 감정이 또 몰려올까, 얼마나 더 다칠까
두려워서 눈도 감고 귀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느새 이끌리듯 창으로 향했다. 살벌한 표정의 전사들에 둘러싸여
걸어오는 다크엘프 여자가 보였다. 어깨에 멘 저 활이 어쩌면 아시타를… 그는 속이 뒤틀렸다. 호위하는 전사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쳐든 머리나 당당한 걸음은 조금도 죄수의 태도나 심지어 일말의 죄책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
일행은 건물 문으로 들어와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귓가에 심장소리가 울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뭔가 해야할 것, 할말이 있을 것 같았는데 무엇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그들 같은 말단 대원이 뭐라고 생각하든, 아무리 분노하든 저 여자는 동료라는 이름으로 아시타의
자리를 차지한 채 저리도 뻔뻔하게 활개치고 다닐 텐데.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동안 당도했는지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분노와 적의가 재 밑에 숨은 불씨처럼 시무룩하게 타는 방에 다크엘프 일행이 들어섰다. 선두의 전사들이 비켜서자 그들이 호위해온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방안에 있는 사람 대부분보다 키가 작았지만, 자신을 향해 꽂히는 시선을 일체 피하지 않은 채 어깨를 뒤로
젖히며 고개를 쳐드는 그녀는 그들을 올려보기커녕 오히려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는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으며 평가하고, 이내 무시해버렸다.

아. 그녀가 같이 온 다크엘프 전사의 우두머리에게 몸을 돌리는 동안 아스타틴은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냈다. 아시타가 죽기
전날, 그 기억의 검고 탁한 물 너머에서 루테리온과 함께 멀어져가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런 자들과 함께 싸우라는 말인가.”

기억 그대로 냉랭한 말투로 그녀는 다크엘프 전사에게 말했다. 전사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아라니아카.”

루테리온이 선택한 주인, 라스카야의 딸 아라니아카. 그녀가? 아스타틴은 숨이 턱 막혀왔다.

“아라…니아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아, 너인가.”

그녀는 마치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듯 무덤덤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는 것일까?

“당신인가요?”

아라니아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여전사를 돌아보았다.

“인간과 혼혈들을 동료로 대하라는 말인가?”

적대감으로 더욱 무거워지는 공기는 개의치도 않고 그녀는 여전사와 가시돋힌 말을 주고받았다. 프리야 마타와 이야기하고 싶다며
항의하는 그녀에게 전사는 이것이 프리야 마타의 뜻이라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양어머니에게 배운 다크엘프어를 알아듣는 것은
어려움이 전혀 없었지만, 생각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들의 대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내려가지 않아서,
어떻게든 내보내지 않으면 까맣게 타버릴 것 같았다.

“저년이 그 의자매란다. 아시타를 죽인 놈이야.”

옆에서 동료가 속삭이는 소리는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아시타…’

그러는 동안 아라니아카를 이곳으로 데려온 전사는 그녀에게 종이쪽지를 내밀고 있었다.

“배속 명령서입니다.”

아시타를 죽인 여자는 동족의 전사를 노려만 보면서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받으라고 해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나았다. 감사하다며 굽신거리며 두 손으로 받들어도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아시타?

“프리야 마타께 또 다시 폐를 끼쳐드릴 생각이십니까?”

“폐?”

아라니아카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니르나이스 아르노이디아드 때 내가 얼마나 폐를 끼쳤는지
프리야 마타께 직접 묻지 그러느냐.”

“노스탤지아 배속은 프리야 마타께서 직접 지시하신 상황입니다.”

두 여인 사이에는 길게 침묵이 흘렀다. 그 속에 무엇이 오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아스타틴은 동료들과 함께 폭력의 기운을,
바람의 방향을 알릴 어떤 신호를 찾아 주시했다.

마침내 아라니아카가 손을 움직이자 몇몇은 움찔 긴장했지만, 그녀는 손등으로 상대의 손을 탁 쳐서 명령서를 떨어뜨리게 했다.

“받은 것으로 치거라, 알라스.”

그녀는 전사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네가 더 관여할 일이 아니다.”

“받지 않으셔도 이미 처리는 끝나 있습니다.”

알라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빛에는 가까스레 억누르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는 그럼 이만.”

아라니아카에게 목례하고 알라스는 몸을 돌려 전사들과 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동안 아라니아카는 가만히 그들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대원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여전사는 입을 열었다.

알라스와 그 부하들이 나간 문을 노려보면서 아라는 눈앞이 잠시 어질거렸다.

“동료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낮고 정확하게 유지했다. 언제 감히 눈이라도 마주칠 수 있는 신분이었다고 알라스 따위가…

“지금이라도 덤벼보거라. 여럿이라도 좋다.”

감히 프리야 마타의 권위를 업고 죄수 취급해? 프리야 마타의 의자매, 라스카야의 딸 마하스트린 아라니아카를?

부족했다. 가슴에서부터 시작해 팔다리, 손끝까지 전율하는 이 불길을 끄기에는 너무나.

“여..이거 대단한 배짱녀가 납셨구만그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며 ‘동료’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을 달게 된 자들을 마주보았다. 인간과 인간 혼혈들,
노스탤지아가 오기 전이라면 이 땅에서 마주치자마자 죽여버렸어야 할 자들.

“아니면, 노스탤지아에는 전사다운 전사가 없는 것이냐?”

그녀는 팔짱을 끼며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피가, 격한 동작과 위험이 필요했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동료의 복수를 하려는 친구 하나 없다니, 죽은 그 튀기놈이 불쌍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하면 다들 거세한 염소가 아닌 이상 움직이겠지. 어쩌면 이곳에서 그녀가 공격당하면, 심지어 죽으면 노스탤지아와의 동맹은
돌이킬 수 없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름 합당한 처벌 아니겠는가? 놈의 동료들에게 죽는다면.

“어이, 정신나간 아가씨. 지금 댁 처지를 이해 못한 모양인데…”

인간 하나가 울컥하며 나서자 옆에서 그의 동료가 말렸다. 겁쟁이놈들. 어째서 나서지 않는가? 동료를 살해한 살인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복수하지 않는가.

왜 응당한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라는 이를 악물면서 손끝이 떨려왔다.

“당신 역시 전사를 자칭할 자격은 없다고 보는데요.”

침묵 속에 그 하프엘프 녀석, 아사나스를 넘겨주었던 젊은이의 목소리는 유달리 맑고 또렷했다. 그녀를 노려보는 눈에는 깊은 슬픔의
그늘과 차가운… 경멸이 어렸다. 노스탤지아 대원들은 조용해지면서 동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크엘프 여전사라면 최소한 명예는 지킨다고 들었으니까요.”

“명예라…”

쓴웃음을 지으며 아라는 아마도 이 어린 녀석을 키웠을 타하이샤를 떠올렸다. 그런 소리는 타하이샤에게 들은 것이었을까? 민족의
언어를 할 때면 그녀의 억양과 말버릇이 묻어나듯, 그런 순진한 명예관념도 물러빠진 어미에게 배웠겠지.

“저런 것이 동료입니까…”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청년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일부러 등을 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배웠을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생명을 포기한 것일까. 아시타라는 그 인간 튀기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의미였다면 둘은 어쩌면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리드와 생전의 이잔야르처럼? 셋째 남편을 비롯해 너무 많은 이가 쓰러진 그 비탄의 날 이후 하리드를
처음 만났을 때, 수 년의 포로생활에서 갓 돌아온 자신보다도 어쩌면 하리드가 더 변해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었다.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실망이었지만, 슬픔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한 모욕을 마음쓸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돌아서서
나머지 대원들에게 말했다.

“덤비기에는 다들 너무 겁쟁이라면 자리를 옮기자꾸나.”

노스탤지아 알다론에 들어가라는 것은 그녀를 살해하려는 함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노스탤지아가—그리고 어쩌면 가장 불안하게도—샤나에가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새삼 궁금해졌다.

“이 우스운 희극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지?”

“짐싸들고 이동할 준비나 하지 그래. 간만 큰 아가씨.”

인간 남자 하나가 이죽거렸다. 손등으로 저 얼굴을 후려쳐서 버릇을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아라는 생각했다. 이런 무례를 참아내는
것이 샤나에가 내린 진짜 형벌일지도 모른다.

“아스타틴과 함께 가야할 테니 등뒤나 조심하라고.”

대원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 무례한 원숭이들을 성안에 들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죽은 튀기는 최소한 예의는 있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엘프 아이야.”

나중에라도 연인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실감이 나면 마침내 용기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들에게 기척을 죽이는 법쯤은 제대로
가르쳤겠지, 타하이샤? 틈을 봐서 확 해치워버리라고 대원 하나가 아스타틴에게 부추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가치가 있는 상대라면요.”

하프엘프의 목소리는 방안의 크고작은 소음 위에 또렷하게 울렸다. 가수나 시인 재능이 엿보이는 좋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나오는
목을 잘리지 않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공격할 의사가 없는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는 건 전사도 아니죠.”

하프엘프는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대원에게만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연인을 잃고서도 직접 얘기할 용기조차 없어?
그렇게 가르쳤는가, 타하이샤?

”…저희 양어머니께서 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배우자를 잃고 연인마저 등을 돌리는 기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많은 것을 참아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죽임을 당한다 해도 정당한 복수이리라. 그러나 그녀가 옆에 있는데 마치 물건 얘기하듯 평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진귀하지
않은가, 흑요정이라니? 여인답게 꾸며놓으니 문명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다시는 사람 아닌 물건이, 소유물이 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하고 또 맹세했었다.

“어이, 아가씨. 가자고.”

툭툭 치는 손을 그녀는 탁 쳐냈다. 라스카야의 딸 아라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 한 집안의 가장, 한 부족의
전사, 무엇보다 세계수의 딸 중 가장 용맹하고 지략있는 전사와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자매였다. 그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도
그녀는 그 누구의 소유도, 부속물도 아니었다. 누구도 그녀를 지각력도, 목소리도 없는 물건처럼 평할 수는 없었다. 샤나에리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명령할 수 없었다.

“너희가 놀기 싫다면…”

돌아서면서 그녀는 허리의 칼집에서 칼을 휙 빼며 공중에 던져올렸다.

“내가 가겠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녀는 허공에서 칼을 잡아챘다. 앞에 두 명의 대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중 한 명과 어깨를 부딪치며 그녀는 둘 사이로 쉽사리 빠져나와 하프엘프 아스타틴, 타하이샤의 아들에게
다가섰다.

“어…어! 지금 뭐하는 거야?”

그들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을 때 이미 그녀는 하프엘프의 목을 붙잡아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내
칼끝이 하얀 목에 닿았다. 머리부터 부딪힌 아이는 잠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그녀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고요하고
무표정했다. 마치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더 상처는 받을 수도 없다는 듯이.

“왜요?”

아스타틴이 속삭였다.

“죽이시게요?”

“죽고 싶느냐, 아이야?”

그녀는 칼을 통해 그의 맥박을 느낄 정도로 지그시 눌렀다. 서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이 순간은 묘하게 친밀했다. 피와
생명을 걸고 맞서는 순간만큼의 친밀감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 정신나간 계집, 어서 떨어져라!”

뒤에서 놈들은 무기를 뽑고 있었다. 어지간히 상황 파악이 느린 자들이었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목숨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둔하다면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가까이 오면 이놈부터 죽는다.”

“죽어봤자 슬퍼해줄 존재들은 이미 가고 없으니까요.”

아스타틴은 그들의 대화가 끊기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맑은 눈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 녀석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자비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은 이유로 의미를 잃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버리려는 영원한 중간자, 이 혼혈 아이에게는.
그렇게 할까, 타하이샤? 여기서 끝내고 그의 분노한 동료들에게 죽고, 그렇게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키고 영원한 망각으로
내려가 버릴까? 그렇게 하면 내가 더는 폐가 되지 않을까요, 샤나에?

녀석의 연인, 그 하프다크엘프가 쓰러지던 모습이 그녀는 문득 떠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갇힌 채 수없이 떠올렸듯이.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에게도 물러나라고 경고했었다. 그대로 노스탤지아의 뜻대로 놀아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너무나 많았지만, 그 이유는
하나하나 입속에 재와 모래 같은 맛이었다.

그녀는 살인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기 이 어린 녀석의 멍든 눈빛에 너무나도 뚜렷했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샤나에리스는, 혹은 노스탤지아는 무슨 의도인지 그녀를 살렸다. 이래놓고 죽음으로 도망칠 수 있는가. 마치 도살당하는 새끼양처럼
무력한 이 젊은이까지 길동무로 데리고?

“정말로 분하다면 칼을 들고, 나를 죽일 준비가 되었을 때 해라.”

전사의 명예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타하이샤, 샤나에리스, 자신 모두 지금보다 젊었던 날들의 기억이 아련했다. 그때는
아직 세상에 대해 신뢰가 있었다. 시련은 극복하고, 싸움은 아름답고, 전우는 믿을 수 있던 그런 때였다.

“젊은 녀석이 등뒤에서 노인처럼 푸념하는 소리는 듣기 성가시구나.”

동맥을 피해 칼로 목을 얕게 긋자 청년은 작게 움찔했다. 생에 미련을 심어주는 방법으로는 작은 고통만한 것도 없는 법이었다.
그에게 웃어주며 아라는 칼을 닦고 칼집에 꽂으며 돌아섰다.

“썅! 저년 묶어!”

대원들이 몰려와 팔을 뒤로 세게 당기자 아라는 작은 윽.. 소리를 삼켰다. 뭐,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오히려 부족했다. 벌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바란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피곤했다… 눈꺼풀 뒤에서 몰려오는 편안한 어둠에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맡겨두고 쉬면 되겠지, 잠깐 동안만.

“어, 이쁜아이다!”

표정없이 묶이던 아라가 돌아보며 갑자기 아이처럼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피났네~ 아야했어! 니아가 침발라줘?”

“저, 저기…”

작게 욱신거리는 상처에 아스타틴은 손을 댔다. 금새 손가락이 피에 젖었다. 곧 옷에도 젖어들어 축축해지리라.

“아라…니아카..?”

“연기하는 거야, 저거?”

대원 하나가 수근거렸다.

“혹시 정말 미쳤나…”

다른 대원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니아야!”

그녀는 아라의 얼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알아챌 수 있었다. 둘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니아…”

웃으면서 아스타틴에게 오려다가 니아는 포박 때문에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대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동안 바닥에 뒹굴며
해맑게 깔깔거리는 저 여자가 아시타의 원수, 방금 전에 그에게 칼을 들이댄 여인이란 말인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면 세상에 확실성이란 어디에 있는가? 응, 아시타? 텔루르? 누구라도…

그러나 죽은 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삶의 혼란과 불확실성에 내팽개쳐진 것이 살아남은 이들의 몫, 생존의 형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아스타틴은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감

아라가 엄청난 오해를 했군요. 과연 풀릴 날이 있을지 묵념(..) 아시타가 살아있었다면 애인 맞다고 하면서 아스타틴을 놀려먹었을지, 아니면 아라에게 기습 키스라도 해서 오해를 풀었을지 모르겠군요. 후자였으면 어차피 죽었을 테니 제명에 살다 간 게 맞을지도요.

장면 중간에 시점을 바꾸는 건 선호하지 않지만, 이 경우는 시점전환이 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 대원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라든지 대원들과 아스타틴의 심정은 아스타틴의 시점이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웠고, 후반에 아라가 아스타틴을 공격하는 대목은 아라의 시점이 아니었으면 인물이 아스트랄로 날아갔을 테니까요. 그 서술 중에 아라의 배경이나 내면을 의외로 많이 끄집어낼 수 있어서 재밌었습니다.

<<

이전: 잿빛 메타포노비아

다음: 숲의 보석, 알쿠알론데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