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1화 (2): 잿빛 메타포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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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처음으로 스토리 진행이라는 게 좀 나오는군요. 쓰다 보니 앞에 난 엘모스 부분이 생겨서 두 파트를 같이 올립니다. 어차피 긴 쪽은 뒤에 메타포노비아 부분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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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엘모스: 세계의 등줄기

마법의 소용돌이에 색채와 선의 혼란으로 뭉개졌던 공간은 하나씩 자신을 재구성했다. 거의 수직으로 뻗어올라가는 험준한 암산, 바위가
흩어진 까마득한 골짜기, 위에는 흐릿하게 찌푸린 하늘, 저 멀리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의 행진.

골짜기의 한쪽 벽을 이룬 암산
중턱에 한쪽은 암벽, 다른 쪽은 낭떠러지인 길 위에 갑자기 나타난 두 젊은이는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들이 방금 이동해온 곳이
어디인지 확인했다. 그들과 함께 나타난 밤처럼 검은 거대한 큰고양이 맹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털었다. 청년 중 키가 작은 쪽이
고개를 저으며 옆의 맹수의 어깨를 가볍게 짚자, 함께 나타난 검푸른 피부의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지친 건가, 아스타틴?”

검은 피부의 청년보다 키가 반 뼘쯤 작은 금발 청년은 그를 돌아보았다. 산봉우리 사이로 세차게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금발머리
사이로는 뾰족한 귀가 손가락 하나 반 정도의 길이로 튀어나왔고, 허벅지 바로 위에까지 늘어뜨린 모포 비슷한 외투 아래로는
단순하고 튼튼한 양모 바지와 많이 걸어서 닳고 부드러운 가죽 부츠가 보였다. 넓은 이마와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매끄러운 볼의
윤곽과 살짝 뾰로통한 입술이 조금은 아이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맹수의 등을 마치 고양이 예뻐하듯 긁어주더니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고 머리야… 우리 이쁜이는 괜찮지?”

맹수는 노란 눈을 빛내며 그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이쁜이가 괜찮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아스타틴은 몸을 세우며 옆의 청년에게 몸을 돌렸다.

“순간이동은 몇 번을 해도 기분이 이상해.”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둘의 뒤편에는 사람이 계속 허공에서 나타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걸어서 이동하면 안 되려나.”

아스타틴은 투덜거렸다.

“편리해서 좋지 않나.”

검은 피부의 청년이 기지개를 켜며 걸음을 옮기자 아스타틴도 그를 따랐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회색 피부를 한 청년은 군데군데
구리빛이 섞인 흰색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뒤로 묶고 있었고, 튜닉과 바지 위에는 부분 가죽갑주를 걸쳤다.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긴
귀가 머리카락 사이로 비져나왔다.

“편리는 하다지만…”

불만스럽게 말하며 아스타틴은 여행의 먼지가 앉은 외투를 탈탈 털어냈다. 옆에서 맹수 이쁜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득 내보이며 길게
기지개를 켜더니 다소곳이 앞발을 핥았다.

“괜찮아, 힘내라고. 이제 마지막이니까 말이야.”

청년은 미소지으며 아스타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들의,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암벽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너 말야, 아시타.”

뾰족한 입술을 부루퉁하게 더 내밀며 아스타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을 텐데. 애 취급하지 말라고.”

“요오.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군.”

아시타는 손바닥이 연회색인 양손을 들어보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다음에도 그러면 목을 확…”

아스타틴은 손으로 잡아채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봐, 난 말이야.”

아시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짐짓 과장되게 말했다.

“마법멀미를 하는 너를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네. 속으로 킬킬거리는 거 다 알거든.”

말하면서도 아스타틴은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얘기하면서 두 청년과 짐승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 암산 중턱의 큰 돌출부
위에 섰다. 발밑에는 거대한 기하학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놓고 여러 색의 준보석으로 상감한 둥근 부조가 거의 바닥 전체를 차지한 채 은은하게 빛났다. 앞으로는 험준한 산과 골짜기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흰 로브와 긴 녹색 외투에 후드를 쓴 여성이 바닥의 부조 가운데에 긴 지팡이를 세워들고 서있었다. 아시타와
아스타틴을 비롯해 각종 생김새의 사람들이 하나씩, 혹은 삼삼오오 도착해 마법진 위에 섰다.

“정숙해 주십시오.”

로브와 녹색 외투를 입은 여자의 엄숙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 위로 울렸다. 조용해지자 그녀는 후드를 내렸다.
드러난 얼굴의 이질적일 정도로 우아한 선과 형태 위에는 기하학적 형태의 문신이 가득 새겨 있었다. 백금빛 머리 사이로 나온 긴
귀는 아스타틴이나 아시타보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 더 길게 뒤통수를 넘어 머리 뒤로 나왔다.

“이제 이동하겠습니다.”

그녀가 지팡이를 쳐들며 음악적으로 흐르는 말을 길게 영창하자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면서, 발밑의 상감한 무늬가 눈부신 빛을 냈다. 그녀가
마치면서 지팡이를 내리치자 그 뒤틀림이 훅- 하고 부조의 한가운데로 빨려들면서 그 안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정적 속에 멀리서 새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새울음은 언덕 위로 구슬프게, 소름끼치게 울렸다. 비명을 지르듯, 혹은 흐느껴 울듯 높이는 목청은 잿빛 먼지를 싣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황량한 잿빛 언덕과 들판 위로 내렸다. 나무에 앉은 검은 새가 다시 찢어지는 목청을 높이는 위로는 높고 날카로운 목책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아래로 경사져 내려가는 언덕과 주변 평지에는 집과 농지, 가축우리가 펼쳐 있었다. 목책 위로 보이는 지붕은 몇 개 되지 않았지만, 몇 군데 난
문을 통한 사람과 수레, 짐승의 왕래는 그 안에 활발한 정착촌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목책 아래쪽,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는 나지막한 건물 몇 채와 그 가운데 큰
마당을 가슴높이 정도의 울타리가 두르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다리와 목이 유달리 길다란 새 한 마리가 울타리 주변에 난 얼마 안
되는 풀을 먹으며 걸어다녔다. 마당은 검푸른 피부와 긴 귀, 흰색이나 은색 머리에 가벼운 가죽 갑주를 입은 남녀 10여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빙 둘러 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마당 가운데에 공간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소리로 들리기에는 너무 낮은 진동이 공기를 울렸다. 마당을 두르고 있는 검은 피부의
전사들이 불안한 기색은 없이 살짝 긴장하는 동안 다리가 긴 새는 꿔억거리며 울타리를 따라 달아났다. 이윽고 그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고, 그 수는 점점 늘었다.

“저들인가.”

순간이동자들이 도착하고 있는 마당에서 언덕 위편의 목책에서는 울타리 안이 들여다보였다. 이곳에서는 두 명의
전사가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은 긴 망토에 후드를 쓰고 뿔이나 뼈로 만든 활을 둘러멘 채 목책에 기대어
있었고, 마당에 선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암회색 피부에 긴 귀, 얼굴에는 큰 흉터가 눈에 띄는 쪽은 대검을 차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사 쪽이 목책에 기댄 궁수를 돌아보았다.

“예, 마하스트린,(주:뛰어난 궁수를 가리키는 다크엘프어) 이번에 노스탤지아에서 보내는
전령단인 모양입니다.”

궁수는 하나하나 도착하는 전령단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허리에 찬 화살통에 가득한 화살 깃털을 어루만졌다. 후드의 그늘 속에
그녀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빛을 띄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대원을 보내는 것인지… 짐작이 맞다면…”

검사는 이제 살짝 안절부절 못하며 동의를, 혹은 대답을 구하듯 궁수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아라니아카? 정말 인간들이 뜻대로 하게 두실 겁니까?”

마당 가운데서 금발 청년 하나와 검은 피부의 청년이 치고받으며 낄낄거리는 모습을 내려보다가 아라니아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인간과 싸우려는 것이지 그들에게 지배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으면서 결연했다.

“라카’쟈나인,(주:다크엘프의 군사적 지도자, ‘붉은 여인.’ 흔히 ‘여왕’이라고 번역한다) 그 자리가 공석인 지금은 프리야 마타(주:라카’쟈나인의 후계자, ‘소중한 어머니.’ 흔히 ‘공주’라고 번역한다)께서 우리를 지휘하신다.”

마당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동맹이라고 자칭하는 인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그녀를 돌아보는 검사의 뺨에 흉터가 실룩였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저들이 프리야 마타를 알현하기 전에…!”

“서두르지 말거라, 칸드라사.”

궁수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저들의 요구를 듣고 나서도 늦지 않아.”

후드 아래서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오히려 그때가 가장 적기일지도 모르지.”

“아라?”

칸드라사가 불안하게 보는 동안 아라니아카는 화살통 위로 휙 망토를 덮고 목책에서 떨어지더니 유유히 남쪽 문을 지나 들어갔다. 문에 드나드는 상인과 농부, 전사들이 그런 그녀를 보고 인사했다.
아래편, 울타리 안에서는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이들이 경비서던 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칸드라사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역시 돌아섰다.
밑에서 다리가 긴 새는 다시 평온하게 풀을 뜯으며 가끔 하늘을 보고 꿔억거렸다.

다음날 밤…

다크엘프들의 도시, 메타포노비아의 밤은 적막했다. 가끔 밖에서 베하라쟈 새만 비명을 지르듯 우는 동안 아시타는 배정받은 숙소의 공동 접대실에서
부드러운 등잔빛 속에서 서류를 넘겼다. 가뜩이나 환영받지 못하는데 보고까지 대충 해서는 무슨 책을 잡힐지 모른다. 고요의 해안,
아렌 고원, 아나르 시릴에서 들어온 첩보를 보며 그는 머릿속에서 정보를 종합하고 정리했다. 십자군의 내륙 진출, 아렌 고원을 둔
각축, 록윌 요새와 연합개척기지의 존재와 확장하는 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림은 머릿속에 착실히 그릴 수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문에서 나는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손이 칼로 갔다가 그는 아스타틴이 아직 안 들어왔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환영하지
않는 다크엘프들의 눈빛 때문인가, 여기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노스탤지아 대원이 아니었으면 혼혈인 그는 이곳에 오는 순간 죽었다. 게다가
노스탤지아 대원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떨구었다.

“아직도 덜 끝난 거야?”

아스타틴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등잔빛 속에 그의 얼굴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늦었는데 적당히 좀 하고 쉬지.”

“아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이대로 가면 우리는 진다는 생각을…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일 뿐이었으니.

“가우르(주:표범 비슷한 검은 큰고양이과 맹수)는 어쩐 거냐? 밖에 매어놨나?”

늘 옆에 그림자처럼 따르던 루테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사냥이라도 하러 갔나?

잠시 침묵하며 아스타틴은 겉의 그 이불 같은 외투를 벗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네 녀석 단점 하나 말해줄까?”

등잔불 속에 그의 눈은 피곤하고 슬프면서도 어딘가 맑았다. 양쪽 색이 달라서 처음부터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또렷하게 녹색과 파란색으로
빛났다.

“지나치게 일에 열심히야. 그리고 궁금증도 많고.”

“아가씨의 비밀이란 말이지… 알았어.”

아시타는 팔짱을 끼며 뒤로 기대앉았다. 아스타틴과 이야기하면 어딘가 기분이 편해졌다. 혼혈이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같은
아픔 때문일까.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누구에게나 가시부터 세우는 아스타틴에게서 이전의 자신을 알아보았고, 아시타 자신이 도움을
받았듯 아스타틴을 도와주고 싶었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원수 대하듯 하는데, 무리할 것 없잖아.”

아스타틴은 쌓인 듯 조금은 격앙된 어조였다.

“억지로 녀석들한테 아부하지 말라고.”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다크엘프 녀석들이 편견과 원한에 매달려 자멸하고 싶다면 그렇게 두라지. 하지만 무엇이
걸렸는지 생각하면…

“그런가, 내 입장에선…”

그는 문득 뉴 임페리얼 작전을 실행한 밤을 떠올렸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울지조차 못했던 노예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수천의 목숨을
생매장한 폐광을, 사람을 죽여 쓰레기처럼 버렸던 그 단체 무덤, 아니 시체 쓰레기장을, 굶어서 퀭한 얼굴의 아이들을, 파헤쳐진
숲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없는 사람들을.

알면서 좌시할 수 있는가. 다크엘프 몇이 좀 불친절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 있어?

”…좀 더 잘 풀렸으면 하는데.”

프리야 마타에게 전해야 하는 노스탤지아의 요청, 여기까지 몰린 그들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진통은 만만찮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 싸움의 주축이었던 이 긍지높은 민족이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원하지 않아도 또 다른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다크엘프들의 적의어린 눈빛,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대화. 사태는 노스탤지아 지도부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심각했다. 어쩌면 프리야
마타조차 잘 모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전사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스타틴.”

“응?”

혼자 뭔가 생각에 빠져있던 하프엘프는 그를 마주보았다.

“내일 보고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 가는걸로 하지. 너와 다른 녀석들은 숙소에서 대기하도록 해.”

“어째서?”

아스타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일 있어?”

“별거 아냐.”

아시타는 웃으면서 자리에 일어났다. 정말 별거 아닐지도 몰랐다. 쓸데없이 예민해져서 걱정만 많고, 이거 노인이 다 됐나. 아무일도 없이 무사히 끝난다면
나중에 아스타틴에게 그의 착각을 털어놓고 실컷 비웃음을 들으리라. 그러기를 바랐다.

“보고하는 자리에 입이 많으면 오히려 번거로우니까.”

등불 심지에 뚜껑을 덮어씌우자 불빛이 나갔다. 이제는 달빛만 방안에 고요히 비쳐들었다.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아시타는 걱정스러운 아스타틴을 보고 미소지었다. 누군가 걱정해주는 것이 얼마나 생소하고 반가운지 녀석은 알까.

“음. 아까 내 단점을 말해준 보답으로 이번엔 너의 단점을 말해주도록 하지.”

아시타는 손을 뻗어 아스타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누가 하고 싶어서 하냐. 시키지나 말지.”

그런 아스타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키고 싶은 전우,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에 너희더러 그
불투명한 먹구름 속으로 동행해달라고 할 수가 없다고. 혼자 살아온 혼혈에게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낯선 만큼이나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겠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신 그는 말했다.

“면담은 새벽녘이라고 하니, 푹 자둬.”

아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지나친 생각이겠지.

“다른 녀석들에게도 나 혼자 갈 거라고 전해두고.”

등잔과 서류를 집어든 그는 아스타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잠들 때까지 보고사항을 더 읽어보면 잠이 올 것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들어온 아시타는 침대가 탁자에 등잔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고요 속에 속삭이는 동안 작은 등잔빛만이 적막하고 거대한
밤을 몰아냈다.

아시타는 아침에도, 심지어 늦은 오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아마 열 번도 넘게 아스타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네 이녀석…”

오른손 손가락은 어느새 왼손 손등 위에 빠른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류트라도 연주하면 마음이 안정할까 싶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켜. 이러다가 ‘기다렸냐?’ 하면서 뻔뻔하게 웃으며 나타날 게 뻔했다.

아시타가 늦는다는 불안 이상으로 이곳 노스탤지아 연락기지의 공기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스타틴은 문득 깨달았다. 묘한 침묵과 불편한 분위기,
대원들의 눈빛과 속삭임은 끊어지기 직전의 현처럼 잔뜩 긴장한 떨림을 손끝에 전달했다.

자신도 모르게 아스타틴은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그냥 두려워하는 무의미한 시간은 오래 전의
불쾌한 기억을 휘저었다. 아빠, 엄마는 언제 와? 아스타틴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갑작스런 소음이 오후의 침묵을 깨자 아스타틴은 화들짝 돌아보았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문이 우당탕 열리면서 급한 발걸음이 여기저기로 달려갔다.

“본부와 연락을 취해!”

“마법사! 연락 마법사를 불러!”

원하지 않으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문으로 향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아스타틴은 마당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다른 숙소 문을 쾅쾅
두드리는 사람, 마굿간에서 급히 끌어내어지자 고개를 쳐들며 히힝거리는 말, 언성을 높인 대화와 다급한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부딪혀 왔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해야 했다. 난 엘모스에서 같이 이동해온 동료를 알아본 아스타틴은 머뭇머뭇 손을 뻗어 그를
불러세웠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대원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가 그를 알아보고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스타틴.”

대원은 순간 피하고 싶은 듯 눈을 양옆으로 굴리다가 그를 마주보며 침을 삼켰다.

“아시타가…”

그의 목소리가 침중하게 가라앉자 아스타틴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혼자 가겠다고 하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게 무슨 잔혹한 장난이란 말인가. 텔루르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다크엘프들은 노스탤지아의 동맹이었고,
아시타는 사자였다.

아시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소란이겠지? 아니면 좀 다치기나 했겠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아스타틴은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죽었다. 회담장에서.”

대원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창백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그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사절이 왜? 동맹의 땅에서 왜? 아시타가 혼혈이라서? 어째서? 뭔가 착오가 있었다. 누군가의 농담이었다.
거짓말이었다.

빨리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를 바라며 쳐다보는 동안 대원이 하는 얘기가 조각조각 아무 의미도 없이 들려왔다. 본부와 사후처리 논의
중.. 네가 아시타와 가까웠다는 건.. 좀 쉬어두도록..

“장난…이라도 치시는 건가요.”

이 사람이 시인하지 않겠다면 아스타틴이 직접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지,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다만
머리가 너무 울려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장난 심한 건 알지만…”

류트 대신 너구리를 가방에다 넣어놓고, 연락 거점으로 간다면서 엉뚱하게 드워프 마을로 데려가서 밤새 술을 먹이던 게 녀석의 수법
아니었던가. 그런 아시타의 장난이 틀림없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비오는 날에 먼지나도록 맞아야 정신을 차릴까.

그랬다. 그렇게 유쾌하게, 완전하게 살아있던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아시타?

“바로 어저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괜찮다고…”

그는 등뒤의 숙소에 손짓하며 바로 어젯밤에 멀쩡하게 저곳에 있던 녀석이 죽…었다는? (죽어? 그게 무슨?) 그런 소리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대원에게 열심히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그 완벽한 논리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끊어졌다.

“루카스!”

루카스는 그쪽을 쳐다보고 아스타틴을 다시 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아스타틴은 갑자기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멱살을 잡으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이 거짓말쟁이, 그 연민은 개나 줘버려. 아시타나 데려와! 그 녀석은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아스타틴… 이건 장난이 아냐.”

아스타틴은 갑자기 모든 분노가 사라지면서 힘이 빠졌다. 루카스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과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서 다리가 풀려왔다.

“미안하다.”

루카스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스타틴은 숙소 문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냐… 그럴 리가…”

왜 아시타가 죽었을 리 없는지 누군가를 설득해야 했다.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믿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사람이
이유도 없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잖은가. 그런 일은…

엄마 어디 갔어? 왜 안 와?

“어째서…”

아스타틴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막았다. 조금이라도 기댄 이는,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데려가고 또
데려가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막아내고 혼자만의 공간에 존재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다시는 아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슴이
꺼질 것 같은 이 고통을 또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목이 뜨겁게 메이더니 감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유쾌하게 웃던 아시타의 모습은 눈을 감아도 없어지지 않았다. 별거 아냐…
하던 그 뻔뻔한 얼굴이.

보고하는 자리에는 나 혼자 가는 걸로 하지.

아스타틴은 손을 내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을 뜨자 안개낀 듯 흐릿한 세상 속에 사람들이 아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래서 그 나쁜놈의 새끼가 혼자 간다고 했던 것인가. 억지로라도 혼자는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위험에는 함께 맞섰어야 했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죽어간 아시타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리면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나 때문이야…”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 말에 반박할 어떤 논리도 찾지 못하고 그는 가만히 앉아 고통을 숨쉬었다. 위기와 목표와 사명과 방향성을 띠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는 많은 이 가운데, 오직 혼자서.

“야 이 녀석, 여기 넋놓고 앉아있긴…”

아시타? 그러나 안쓰럽게 말하는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은 젖은 재 같은 진회색이 아닌, 기름진 흙처럼 풍부한
갈색이었다. 그 억세면서도 따뜻한 손에 이끌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아스타틴은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온기를 느끼며 (좋은 꿈 꾸렴, 아스타틴) 다시 기억이
끊어졌다. 어쩌면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놓쳐버렸지만, 누워있거나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다 보면 숙소가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일이 몇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루카스나 다른 대원이 한두 명 찾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숙소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에서 그는
원치 않아도 상황을 조금씩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다크엘프의 프리야 마타에게 다크엘프 부족 전사대 지휘권 이양이라는 노스탤지아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러 갔던 아시타는 회견장에서 다크엘프 여전사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 (전사. 여전사. 그들의 고위 전사는 모두 여자였다. 모닥불에 은은히 빛나던 텔루르의 하얀 머리칼이 기억을
스쳐갔다.) 인간 국가에 맞서싸우는 동맹 집단의, 설사 적이라 해도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사절을 다크엘프 전사가 쏘아죽였다.
프리야 마타의 눈앞에서.

그것이 프리야 마타의 배신이었다면 아스타틴도 다른 대원들도 여기에 앉아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리야 마타는 암살자를 구금할
것을 명했고, 노스탤지아에 알리며 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휘권 이양 문제도 크게 양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요?”

아스타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루카스는 잠시 쳐다보다가 불편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숙소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살이 갈색 피부에
반질반질 빛났다.

“뭐…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아시타가 죽었다는 얘기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든, 결과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든 못했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아스타틴은 루카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문에까지 안내했다. 잘 좀 챙겨먹으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바쁜데 굳이 오시지 말라고
했다. 그가 가는 모습을 외면하며 아스타틴은 굳게 문을 닫았다.

소감

이번 분량은 대부분 1화 장면을 삭풍님, 오체스님, 저 셋이서 재촬영한 대목이군요. 재촬영한 분량 중 안 올라온 건 이제 한 장면쯤 남았습니다. 소수 인원으로 한 만큼 좀 더 긴 호흡으로 사건과 인물을 드러낼 수 있었던 점이 의미깊었던 것 같네요.

이번 화의 주축을 이루는 사건은 이 캠페인의 루바트 오르가나인 아시타의 죽음입니다. 성격 좋고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 캠페인 시작하기도 전에, 혹은 시작하자마자 자기희생하는 현상을 또 보니 재밌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 부분은 공화국의 그림자 캠페인 소설 신들이 사랑하는…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1부에서 다룬이 형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의 반응이 생각나더군요.

슬픔의 다섯 단계 중 첫 번째는 부인이라던가요. (지금 장난쳐요?) 다음은 분노 (나쁜 새끼!), 다음은 흥정 (혼자 보내지만 않았어도…), 무기력 (방에서 시체놀이), 그리고 마침내 수용 단계라고 하죠.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순서인 건 아니고 또 단계가 서로 겹치거나 반복할 수도 있지만, 제 경험도 그렇고 글 쓸 때도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 단계를 따르게 되더군요.

아스타틴은 아시타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상처는 굉장히 크겠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엄마의 실종에서부터 시작해 사랑하는 사람을 대부분 잃은 정신적 외상을 건드렸을 것 같아서 어릴 때의 기억도 일부 넣어보았습니다. 상처받기 싫어 다시 사람을 멀리하게 된 그가 플레이 중에 그런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가는군요. 그러나 아시타를 죽인 인물과 함께 여행하게 된 현실은 시궁창입죠.

처음이자 마지막일 아시타 시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좀 평면적인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겉보기와 다른 모습이 조금은 들어갔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죠. 안힐라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노스탤지아가 어떤 집단이며 싸움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 암시할 수 있었던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스토리 진행이나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너무 묘사만 해대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시타 시점으로 설명을 대신하니 어느 정도는 구색을 갖춘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래서 시점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점 하니, 메타포노비아 도착 장면도 지켜보는 다크엘프 쪽으로 시점을 바꾸니까 확 달라지는군요. 한편 아라의 살인은 계획적인 모살로 완전히 확정이 되어 인물은 점점 수렁에(..) 이렇게 악당에 가까운 PC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재밌습니다. 물론 랜돌프가 일행에 있는 한 일행 제일의 악당 자리를 먹기는 글렀습니다만… (죽여야지(?)) 아라 역시 플레이를 통해 어떻게 변해갈까 관심이 갑니다.

이 부분은 이전에 한 외전 어떤 작별과도 시간대가 겹칩니다. 아시타 시점 장면에서 숙소로 돌아온 아스타틴은 낮에 왠 정신나간 다크엘프한테 이쁜이를 뺏기고 허탈한 심정으로 종일 메타포노비아 주변을 쏘다닌 후겠죠.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시타의 죽음까지… 흑흑 불쌍해라, 위로하는 의미에서 랜디하고 BL 장면 써줄게요. (??)

전반적으로 이번 재촬영 플레이는 대사와 묘사가 다 좋아서 소설화하기에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좋은 마스터링과 플레이 해주신 삭풍님과 오체스님께 감사드리고요, 가차없는 피드백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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