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닉스 서주 – 신세계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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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첫 플레이 후 며칠 동안 리플레이 소설화 작업을 했습니다. 피드백 기간이랑 설정 조율 때문에 또 며칠이 들어갔군요. 그나마도 재조정 관계로 아직 빠진 장면이 있어서 한꺼번에는 못올리겠군요. 게다가 분량도 좀 피를 토하는지라 몇 편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리플레이는 올려두지만, 오늘 올리는 서주는 리플레이에는 안 나오고 소설판에만 추가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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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어귀에는 시원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이곳까지 따라온 길은 숲으로 얼마 들어가지 못해 좁아져 사냥꾼이 다닐 만한 오솔길이
되더니 곧 그마저 없어졌다. 그리고 이곳, 길이 끊기고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두 남녀는 잠시 멈추었다.

“이곳에서부터 안전히 가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묶은머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이른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며 몇 가닥이 가벼운 바람에 흩날렸다. 가볍게 주름지기 시작한 가느스름한 눈매, 흐르듯
부드러운 광대뼈와 턱의 선 때문에 순한 인상이 드는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그 표정에는 다스리려고 태어난 사람의 기품과 절제가,
꾸밀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귀족의 흔적이 뚜렷했다. 그러나 몸짓은 얼굴만큼 차분하지 못했다. 마치 손을 어디다 둘지 모르겠는
듯 그는 양손을 비싼 외투의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빼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다시
서글서글한 눈 앞으로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 작은 짐꾸러미를 꼭 안고 선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잠시 올려다보는 얼굴은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한 번이라도 본 이는 인간이라고 착각할 수 없었으리라. 넓은 이마와 동그란 눈에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 작은 턱을
향해 좁아지는 갸름한 다갈색 얼굴의 선, 그리고 유달리 긴 매끈한 갈색 목에 깃든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우미함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후드를 내린 지금 길고 끝이 뾰족한 귀가 검은 머리칼 사이로 삐져나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린 처녀
같았지만, 갈색 눈에 깃든 슬픔과 세월에는 인간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사내는 잠시 말을 잊고 그런 그녀를 마주보았다. 머뭇머뭇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괜찮…겠습니까?”

여인은 그의 말에 가슴이 아릴 정도의 슬픔이 담긴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베인그람 제독님.”

목례하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로엔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들며 눈을 마주치자 로엔은 데인 듯 손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감사드릴 이는 저입니다, 마이아나.”

한결 침착해지며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때 나를 구해주고 산장에서 치료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죽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노예 되어 갖힌 나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하루하루 천천히 죽어갔겠지요.”

그녀는 손바닥을 앞으로 해 오른손을 그의 어깨 높이 정도로 내밀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대와 나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에어그웬드(주:엘프어로 ‘신성한 우정’)를 나와 나눈 그대에게 감사해요,
로엔 베인그람.”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해가 더 높이 떠오르면서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그녀의 머리칼 위에 반짝이며 맑은 눈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베인그람은 눈이 부신 듯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마주댄 채
똑바로 눈을 마주친 둘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거울에 손을 대고 응시하듯 그렇게, 모든 차이와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그 영원의 숨결 속에서.

이윽고 마이아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서 손을 떨구었다. 조용히 웃는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 보였고, 옷가지나 음식 따위가 든
짐꾸러미가 형용할 수 없는 무게기라도 한 듯 작은 어깨는 지쳐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에요, 로엔.”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녀는 자신마저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날들에도 축복의 순간은 분명 존재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와주었듯, 내가…”

말을 끊고 마이아나는 돌아서서 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길 없는 숲으로 향했다.

“안녕히.”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는 로엔의 얼굴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과 싸우는 사람처럼 그는 한손을 뻗었다가
억지로 주먹을 쥐어 그 손을 거두고, 부르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그를 순간 돌아보는 마이아나의
형체는 이미 햇살의 일부가 된 듯 현실감이 없었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꿈처럼…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낮추더니, 녹아 없어지듯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어선과 상선, 군함이 정박한 제국령의 앞바다에는 조용히 저녁이 내렸다. 어스름이 깔린 동쪽 하늘에는 하나둘 별이 떴고, 석양의 불타는 광휘 가득 펼쳐진
서쪽 하늘에는 세인트 힐더의 첨탑과 지붕과 더 서쪽의 숲이 검은 윤곽을 만들었다. 이 빛 속에서는 안힐라스의 야생림과 제국 도시의
선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서로 싸우는 두 문화에 속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증기선에 갑판 난간에 기대선 남자는 피곤하게 얼굴을 비볐다. 서쪽을 마주본 그의 뒤로 묶은 머리는 석양에 붉게 물든 채 바닷바람에
가볍게 날렸다. 오전에 출발했어야 하는 배는 그의 명령으로 빠진 여행서류 확인, 빠뜨린 짐 회수, 기후현황 확인 등 온갖 지연
때문에 이미 오후를 넘어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도 간간히 선원들의 투덜거리는 불평이 들려왔지만, 그는 떠나야 할
방향이 아니라 하염없이 서쪽만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 자신도 어쩌면 알지 못한 채 그는 제국 도시
너머에 펼쳐진 먼 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독 각하.”

갑판에 발걸음이 저벅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의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말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이 일대에 폭풍우가 닥쳐오기 전에 벗어나야 합니다.”

폭풍우 얘기에 아주 잠깐 표정이 밝아졌다가 로엔 베인그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부관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는 세인트 힐더에, 그리고 그 너머의 안힐라스에 손짓했다.

“떠나는 것이 아쉽지는 않은가, 데니? 아름다운 땅인데, 그립지 않겠나?”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상관의 옆얼굴을 보다가 부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기도 합니다. 이미 실종되었다가 돌아오셨는데, 이 개척지에서는 되도록 계시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미욱한
마음입니다.”

“위험… 그래, 그 말이 맞네.”

제독은 천천히, 다소 고통스럽게 미소지었다.

“개척지…니까.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옛것을 파괴하는 곳.”

바다의 움직임에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등뒤의 도시와 들판과 숲, 세인트 힐더와 안힐라스를
돌아보았다.

“자아와 타인,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맞닿는 안힐라스이니까.”

“괜찮으십니까, 제독님?”

다시 고개를 돌려 데니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제 괜찮아야겠지. 출항 명령을 전하게.”

“예, 각하.”

데니는 인사하고 서둘러 갑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런 데니가 항해사와 이야기한 순간부터 선원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함치듯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이윽고 배의 거대한 증기 엔진이 가동하면서 하얀 연기가 어둑한 하늘에 퍼지는 모습을 로엔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치 이끌린 것처럼 흐려가는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삐죽삐죽한 검은 선일 뿐인 서쪽 숲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각하!!”

갑자기 난간을 붙잡더니 마치 몸을 던지기라도 할 듯 내미는 제독을 보고 데니는 소리를 질렀다. 로엔이 홱 돌아보는 동작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출항 준비를 중지한다! 승강대를 내리게!”

“예? 각하..”

데니가 저지하기도 전에 로엔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선원들이 서둘러 승강대를 내리는 것도 미처 기다리지 않고 배에서 뛰듯 내리는
그를 부하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았다.

부두에 내린 로엔은 몇 척 건너 정박한 배 뒤편으로 뛰어갔다. 머리에는 후드를 쓴 채 가슴에는 작은 짐꾸러미를 안은 여인은
금새라도 도망갈 사슴처럼 연신 주변을 불안하게 보다가 발걸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로엔이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자 그녀는
작게 소리를 지르면서 짐꾸러미를 떨어뜨렸다.

로엔은 그녀의 어깨를 붙든 채 몸을 조금 떼었다. 그의 목소리는 격정을 간신히 억제한 채 떨리는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했습니까…!”

후드가 벗겨진 마이아나는 동그란 눈이 어둠 속에 물기를 품고 빛났다.

“한 번…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진짜인가 확인하듯 그의 팔을 맞잡더니 마이아나는 천천히 그에게 몸을 기대왔다. 로엔은 치명상을 입은 사람처럼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그의 팔이 올라와 마이아나를 꼭 붙들었다. 그렇게 그저 서로 상대의 존재를 호흡하며 침묵한 긴
순간 끝에 마이아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며 올려다보았다.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마이아나!”

석양의 마지막 빛에 잠긴 그의 얼굴은 잠깐 환해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럴 수는… 당신에게는 완전히 낯선 곳인데, 게다가 그곳에서 당신의 신분은-”

마이아나가 손을 들어 그의 입술에 손끝을 대자 로엔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당신만큼이나 나도 많이 생각했어요. 무모하고 위험한 건 알아요. 다 알지만…”

가끔 갈매기만 우는 조용한 공기중에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어쩌면 비겁하게 도망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슬픔을 피해버리는 걸지도요.”

혼잣말처럼 말하다가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해요. 헤어지고 후회하기보다는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함께하고 후회하고 싶어요.”

시선을 낮추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는데… 여기서 헤어지면 1년 후에 내가 이곳에 있을까요? 당신은? 그러니까..”

로엔은 몸을 숙여 마이아나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추었다. 석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윤곽은 하나가 되어 서로 녹아들었고, 짧은
입맞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한 가지 작은 확신을, 위안을 찾아 서로 기대는 따뜻한 포옹이 되었다.

마이아나의 머리카락에 입맞추고 로엔은 고개를 들었다.

“나와도 좋네, 데니.”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부관이 어망 뒤에서 걸어나왔다.

“부하들은 배에 남아있게 했겠지?”

“물론입니다.”

데니는 마치 질문 자체가 모욕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마이아나는 데니를 보고 놀란 기색은 아니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며
그를 살피고 있었다. 로엔은 그런 그녀의 머리에 부드럽게 후드를 씌워주고 어깨를 감싸안으며 부관을 마주보았다.

“내가… 자네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겠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데니는 이윽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함께 갑판에 서서 멀어져가는 해안을 바라보는 두 사람 위로는 검은 하늘에 저녁별이 빛났다. 세인트 힐더와 그 너머의 안힐라스는
석양의 마지막 빛 속에 붉게 빛나며 멀어져갔다.

“다시 이곳을 볼 날이 있을까요?”

마이아나의 낮은 목소리에 로엔은 그녀를 아프게 보다가 난간에 얹은 가느다란 손에 손을 포갰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자
밤처럼 검은 머리가 바람에 따라 날리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지켜보는 동안 안힐라스는 불꽃빛 석양이 식어가며
점차 어둠에 잠겨들었다.

소감

뭔가 멋지구리한 시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PC 중 한 명의 부모 이야기를 서장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안힐라스와 서대륙의 비극적인 역사를 표현하면서도 최소한 희망의 여지를 남기기에 그쪽 설정이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설정 조율과 확인에 협력해주신 제노님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급조해서 만들어넣은 데니를 가장 좋아하지만(..)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심리 표현을 하는 건 재밌으면서도 어렵더군요. 말해주기보다는 보여주는 게 묘사의 기본인 만큼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첫 플레이는 재밌게 했었는데, 처음이기도 했고 이것저것 마음이 급해서 삐걱거리는 부분은 좀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겁스 전투규칙의 재미를 느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주로 제가 이전에는 전투형 인물을 안 만들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무엇보다 충분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느낀 플레이였습니다. 다급하게 진행하시느라 마음고생하신 삭풍님과 참가자분들 모두 수고하셨고요, 나머지 소감은 올리면서 그때그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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