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와 소설의 시점 (월광을 쓰면서)

월광 소감 2부에 해당합니다.

RPG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라면 아마도 시점이 아닐까 합니다. RPG는 대체로 외부적인 시점이고,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시점은 단편적일 뿐 지속성이 없지요.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가자나 진행자가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며 그의 내적 서술을 유지하는 것은 RPG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진행자 하나와 참가자 하나가 하는 1:1 플레이 정도에서나 가능하지요.

반면 소설은 1:1이 아닌 여러 인물이 있는 상황에서도 특정 인물의 시점을 유지하면서 그의 내면과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점 인물의 생각이나 성격도 드러낼 수 있고, 인물이라는 관점을 통해 왜곡 혹은 제한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지요. 그래서 외부 관찰자 시점에 가까운 RPG를 특정 인물 시점으로 전환하면 인물의 시각과 내면이라는 새로운 면모가 생기는 점이 로그와는 또 다른 소설적 재미인 것 같습니다.

‘정찰 임무’ 로그의 외부 시점에서 인물 시점으로 전환해서 ‘월광’을 쓰면서 역시 조심스러웠던 것이라면 제가 다루는 인물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인물의 시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월광에 가장 많이 활용한 시점은 오체스님 인물인 아스타틴의 시점이었고, 그 다음은 이방인님의 랜돌프(랜디)였죠. 이 인물의 행동이 어떤 내적 충동에서 나오는지, 동기와 내면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인물에 대한 지식과 대사, 행동을 통해 짐작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조마조마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나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위키에 올렸었고, 앞으로도 그런 과정을 거쳐 공개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물의 내면에 파고들면서 의외의 면모들이 나타난 점이 소설화의 가장 큰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아라에 대한 아스타틴의 동정이라든지 무모한 단독행동을 했을 때의 심정, 언제든 아라에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을 맡기는 랜돌프의 각오, 랜돌프를 죽게 둘까 생각했다가 아스타틴에게 자극받아 마음을 고쳐먹는 아라의 변화 등은 하나같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인물의 새로운 발견이었죠.

시점을 전환해가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으로 진행한 것도 재밌었습니다. 제 인물인 아라의 시점으로 쓰는 게 정석이었겠지만, 아라 시점으로는 이야기가 재밌거나 완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선 랜돌프의 모습이 많이 왜곡되었을 것이고, 니아 시점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한데다 아스타틴과 랜디만 알 수 있는 부분들은 다 빠졌겠지요. 결국 최선의 시점 인물은 ‘제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혹은 특정 부분을) 가장 잘 끌어갈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인물의 내면은 짐작에 맡기는 게 가장 적절할 때도 있고요.

앞으로도 이오닉스 세션 소설화를 하면서 다양한 시점을 활용할 듯하고, 그때마다 인물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시점과 기법을 실험해 보면서 RPG와 소설의 서로 다른 문법에 대해 생각도 해볼 수 있겠군요. 그건 인물들이 떠나는 모험과는 또 별개로 제게도 모험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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