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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개들 스크립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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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플레이에 사용할 주사위 굴림과 결과 관리용 IRC 스크립트입니다. 스크립트 제공은 제가 하니 설치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확히는, 참가자분들은 다운은 받더라도 플레이중에는 켜지 말아 주세요. 주사위 결과가 중첩돼 버릴테니…)

3/26/07: 제가 덜렁거려서 이것저것 불편해서 주사위 내역 관리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사용법은 2.5 부분을 봐주시길.

사용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들은 기본 기능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1. 기본 기능

1.1. 주사위 굴리기

주사위의 크기와 그 내역을 치기만 하면 됩니다. 첫 단어는 주사위, 둘째 단어부터는 내역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서가 고정된 명령문은 굴림 명령문 뿐입니다.

1d6 낮고 편안한 목소리

8d6 신체 + 의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이와 같이 하면 주사위 결과가 나오고, 굴린 사람 이름별로 그 결과가 쭉 저장됩니다.

1.2. 자기 주사위 결과 보기

지금까지 나온 자기 주사위 결과를 보려면 ‘결과‘ ‘주사위‘ ‘다이스‘ 혹은 ‘굴림‘ 중 한가지 말과 함께 ‘보기‘라는 말을 쳐주면 됩니다. 즉

결과보기

혹은

주사위 보기

하는 식이죠.

‘보이기’나 ‘보여주기’도 되는 등 ‘보’와 ‘기’가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다이스 보여주기

라든지요.

1.3. 남의 주사위 결과 보기

주인공(PC)이든 조연(NPC)이든 타인의 결과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결과를 보고 싶은 인물의 정확한 이름네모 괄호 ([와 ]) 뾰족한 괄호 (<와 >) 사이에 묶어 1.2 에 나온 것과 같은 명령문 어디엔가 넣어주세요. 예를 들어

결과 보기 <덩치큰 시스>

라든지

<마스터 사두르>의 주사위 보이기

하는 식입니다.[footnote]2007년 1월 29일
조연 이름 표시를 사각괄호 대신 뾰족괄호로 고쳤습니다. 혹시 사각괄호 방식이 더 좋다고 느끼시는 분은
스크립트 파일을 열어서 $chr(60)을 모두 [으로, $chr(62)를 모두 ]으로 자동치환하시면 사각괄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footnote]

1.4. 결과에서 주사위 빼기

주사위 결과의 목록에서 주사위 결과를 지우는 기능입니다. ‘뻐기‘라는 명령과 지우고 싶은 숫자를 지정해주면 됩니다. 예를 들어

1, 4, 5, 8 빼기

빼버리기 1 4 5 그리고 8을

하는 식으로 말이죠. 결과 중 없는 수라면 없다는 안내문이 나오고, 있다면 결과에서 그 수를 빼줍니다. 두자릿수까지만 인식이 됩니다.

1.5. 결과에 숫자 넣기

주사위 결과 목록에 숫자를 넣는 기능입니다. 실수로 숫자를 지웠다거나 남에게 주사위를 받았을 때 쓸 수 있습니다. ‘넣기‘라는 명령과 넣고 싶은 숫자를 지정해주면 됩니다.

3, 6, 10 넣기

넣어주기 3 6과 10을

하는 식입니다. 역시 두자릿수까지만 인식됩니다.

1.6. 결과 초기화하기

한꺼번에 많은 숫자를 지워야 한다면 초기화가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초기화‘라는 말이 들어간 명령문을 쳐주면 됩니다.

초기화

주사위군, 내가 굴린 거 초기화시켜버려.

등등. 이렇게 하면 자신의 굴림이 초기화됩니다. 주사위 결과를 하나하나 빼는 방법과는 달리 굴림 내역까지 초기화되며, 실수로 초기화시켰을 경우 위의 넣기 명령을 쓰면 됩니다.

2. 상급 기능

2.1. 조연의 주사위 굴리고 관리하기

주로 진행자가 사용할 기능으로, 조연의 주사위를 굴리고 관리하려면 명령문 어딘가에 조연의 이름을 네모 뾰족 괄호로 묶어서 넣어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마스터 사두르’라는 인물의 주사위를 굴리려면

2d8 라이트세이버 <마스터 사두르>

라든지

2d8 <마스터 사두르> 라이트세이버

하는 식으로 쳐주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관리할 때 ‘마스터 사두르’가 굴린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 외에도 마스터 사두르의 주사위 굴림을 지우거나 초기화하거나 숫자를 넣어줄 때도 위와 같이 사각 뾰족 괄호로 이름을 묶어서 넣어주면 됩니다. 이름은 정확해야 하며, 한 글자라도 틀리면 다른 이름으로 인식됩니다.

2.2. 정렬

주사위 결과를 정렬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 ‘굴림‘ ‘다이스‘ ‘주사위‘ 중 어느 한가지와 ‘정렬‘이라는 말을 함께 치면 됩니다.

정렬해줘 결과좀

이라든지

다이스정렬

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사위 결과를 작은 것에서 큰 것 순서로 정렬해 줍니다.

반대로 큰 수에서 작은 수 순서로 정렬하고 싶다면 ‘‘이나 ‘거꾸로‘라는 말이 위의 명령문 어딘가에 들어가면 됩니다.

주사위 역정렬해줘

라든지

굴림 정렬… 거꾸로!

등입니다. 한번 정렬한 결과는 정렬하기 전의 순서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2.3. 전체 초기화

모든 굴림을 초기화하는 기능입니다. 전체 초기화는 명령을 입력하는 사람의 등급이 10 이상일 때만 가능하도록 해두었습니다. 따라서 스크립트 편집창 (Alt+R)을 열어서 Users 탭을 선택한 후 원하는 사용자를 10 이상의 등급으로 지정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써주면 됩니다.

10:로키

이렇게 한다음에 10등급 이상의 사용자가 ‘전체 초기화’라는 명령문만 쳐주면 됩니다.

전체 초기화

2.4. 굴리지 않고 주사위 내역만 저장하기

주로 피해 주사위를 관리하기 위해 추가한 기능입니다. 주사위를 굴리지 않고 그 크기와 내역만 저장하려면 위 1.1 혹은 2.1의 주사위 굴리는 방법과 같지만, 주사위 갯수와 면수를 지정해 주는 첫 단어 어딘가에 느낌표(!)를 넣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2d4! <피해> 베론은 상원의원의 반박에 말문이 막혔다

3!d6 로크락은 캔티나에서 깡패들에게 얻어맞았다 <피해>

!!1d8 아크람은 <피해> 5층 건물에서 떨어졌다

반면 주사위 결과 자체를 표시하는 부분 외에 내역에 느낌표를 넣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2d10 <피해> 마할린은 블래스터에 맞았다!

하는 식으로 입력할 경우 주사위는 정상적으로 굴려집니다.

위와 같은 식으로 굴려두면 나중에 갈등이 끝나고 그 갈등의 ‘피해’의 결과를 보여주는 기능을 사용하면 (1.3 참조) 위와 같은 주사위들이 결과는 유보되었다고 나오고 내역만 표시됩니다.

주의할 점은 한 인물의 주사위에 위와 같이 느낌표를 사용하면 그때까지 그 인물이 굴린 주사위 결과가 지워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위의 ‘피해’ 같은 가상 인물을 설정해서 굴린다든가 진행자 자신의 굴림으로 한다든가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2.5. 주사위 내역 관리하기

※ 테스트해보기는 했지만 새로 추가한 기능이므로 오작동할 수 있습니다.

주사위 내역을 추가하거나, 빼거나, 바꾸는 기능입니다. 셋 중 어느것이든 공통적으로 명령어 어딘가에 내역이 들어가야 발동됩니다. 자신의 주사위 내역을 바꾸려면 따로 인물명 지정이 없어도 되며, 타인이나 조연의 주사위 내역을 바꾸려면 일반적인 방식대로 뾰족괄호 (<>)로 둘러싸서 정확히 이름을 지정해주면 됩니다.

2.5.1. 주사위 내역 추가하기

‘ ‘추가‘ ‘더하기‘ ‘덧붙이기‘ 중 하나가 들어가면 추가 명령문이 발동됩니다. 추가할 굴림 내역을 작은따옴표()로 구분해서 지정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란 샨의 주사위 내역이 다음과 같다면

8d6 이성 + 마음, 1d4 거짓말에 익숙하다, 1d8 말재주가 좋다

내역의 마지막에 ‘1d8 여자가 꼬이는 편’이라는 내역을 추가해 주려면 다음과 같이 하면 됩니다.

<하란 샨> 내역에 ‘ 1d8 여자가 꼬이는 편’ 추가

이렇게 하면 내역은 다음과 같이 변경됩니다.

8d6 이성 + 마음, 1d4 거짓말에 익숙하다, 1d8 말재주가 좋다, 1d8 여자가 꼬이는 편

만약 끝이 아니라 두번째 내역으로 ‘1d4 민감한 자존심’ 내역을 추가하고 싶다면 이름과 내역을 제외한 명령문 어딘가에 숫자로 지정해주면 됩니다. (스크립트는 ‘두번째’ 같은 문자로 된 서수는 인식하지 못하며, ‘2번째’ 하는 식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하란 샨> 2번째 내역에 ‘ 1d4 민감한 자존심’ 넣기

이렇게 하면 내역은 다음과 같이 변경됩니다.

8d6 이성 + 마음, 1d4 민감한 자존심, 1d4 거짓말에 익숙하다, 1d8 말재주가 좋다, 1d8 여자가 꼬이는 편

2.5.2. 주사위 내역 빼기

‘ ‘지워‘ ‘지움‘ ‘지우‘ ‘제거‘ 중 하나가 들어가면 제거 명령이 발동됩니다. 제거문은 반드시 지울 내역을 말로 지정하지 않고 서수만으로 지정 가능하며, 만약 내역과 서수가 둘다 지정될 경우 서수만이 처리됩니다. 예를 들어 위의 하란 샨의 예를 계속하면

8d6 이성 + 마음, 1d4 민감한 자존심, 1d4 거짓말에 익숙하다, 1d8 말재주가 좋다, 1d8 여자가 꼬이는 편

에서 세번째 내역인 ‘1d4 거짓말에 익숙하다’ 부분을 빼버리려고 한다면

<하란 샨> 내역에서 3번째 ‘1d4 거짓말에 익숙하다’ 빼버리기

라고 하면 작은따옴표로 내역을 표시한 부분은 무시되고 세번째 내역을 지움으로써 내역은 다음과 같이 변경됩니다.

8d6 이성 + 마음, 1d4 민감한 자존심, 1d8 말재주가 좋다, 1d8 여자가 꼬이는 편

내역만 표시해서 제거 명령문을 사용할 경우 부분적으로만 일치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하란 샨> 내역에서 ‘여자’ 제거

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변경됩니다.

8d6 이성 + 마음, 1d4 민감한 자존심, 1d8 말재주가 좋다

2.5.3. 주사위 내역 바꾸기

바꾸‘ ‘바꿔‘ ‘바꿈‘ ‘대체‘ 중 하나가 들어가면 발동됩니다. 주사위의 내역을 바꾸는 것은 서수와 내역을 둘다 지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주면 지정된 순서의 내역을 지정해준 내용으로 바꿉니다. 예를 들어 하란 샨의 주사위 내역이 다음과 같다면

8d6 이성 + 마음, 1d4 민감한 자존심, 1d8 말재주가 좋다

두번째 내역인 ‘1d4 민감한 자존심’을 ‘1d6 고위 제다이 마스터에게 인정받았다’로 바꾼다고 하죠. 이 경우 다음과 같이 해주면 됩니다.

<하란 샨> 2번째 주사위 내역을 ‘ 1d6 고위 제다이 마스터의 인정’으로 대체

이렇게 하면 내역은 다음과 같이 변경됩니다.

8d6 이성 + 마음, 1d6 고위 제다이 마스터의 인정, 1d8 말재주가 좋다

주사위 내역 추가, 제거, 대체의 처리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추가, 제거, 대체 순위입..(퍽) 즉 추가 기능을 발동하는 명령문이 있다면 제거나 대체 발동어는 무시되며, 제거 발동문이 있다면 대체 발동문은 무시됩니다.

설정 중심의 캠페인 제작

다음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반쿠에이씨의 Flag Framing 기법과 Conflict Web을 접목시킨 것입니다. (블로그가 사라져서 archive.org 저장본 링크 겁니다. 위에서 7번째, 8번째 글입니다.)

1. 개괄

캠페인 제작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설정에서부터 쌓아올리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실은 주인공 설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자의 관심방향을 보여주는 신호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참가자의 관심방향에 대한 신호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대상 그 자체, 두번째는 일정한 주제의식 혹은 감정선. 첫번째 부류의 예로는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조연이나 장소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주인공의 고향 플레인이라든지,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쌍둥이 언니라든지. 이러한 신호는 캠페인에 넣기가 비교적 간단하지만, 언제나 등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입니다. 캠페인 세계의 개연성이나 각 인물의 활동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등장시키기 힘들 때가 많으니까요.

여기에서 두번째 부류의 신호가 중요해집니다. 주제의식과 감정선은 보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캠페인 내에서 계속 끌고갈 수 있으며, 적당히 엮고 대립시키면 주인공들의 협력과 갈등관계를 보다 공고히 묶는 수단이 되니까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있다고 하면 정확히 어떤 어린아이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고, 어린아이를 위해주고 도와주는 상황을 계속 던져주면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상을 등장시키는 것보다 한결 유연한 진행이 가능합니다. 여기에다가 다른 주인공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계속 넣는다든지, 또다른 주인공의 호기심이 동할 소지를 넣는다든지 해서 주인공들의 신호를 서로 엮어볼 수 있겠죠.

주인공끼리 신호를 엮는 방법을 사용하면 구체적인 대상 신호, 즉 첫번째 부류의 신호를 사용할 때도 그 신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주인공들 역시 개입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이 다른 주인공의 정체성 갈등과 연관된다든지 말이죠.

2. 신호 파악

참가자가 보내는 신호를 파악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인물 제작 과정에서 어떤 얘기들이 나오는지, 어떤 설정에 참가자가 흥미를 보내는지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가족 얘기를 많이 한다면 그 주인공의 이야기에는 가족을 개입시키면 참가자의 흥미를 끌 공산이 큽니다.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와 게임 세계 사이의 일종의 인터페이스이며, 참가자에게 무엇이 흥미로운지 하는 하나의 필터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인물 제작 과정에서부터 진행자가, 그리고 가급적이면 팀 전원이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발상을 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신호 중심 캠페인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많은 RPG 규칙에서는 캐릭터 시트 자체도 신호를 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서 성취 플레이는 참가자의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능력치와 인간관계 역시 이를 보조하는 신호로 기능하지요. 과거의 그늘 (The Shadow of Yesterday)은 특히 열쇠가 신호 표시의 용도가 강하고, 캠페인 중 신호를 발동할 때마다 경험치가 쌓인다는 점에서 전술적 판단과 신호 활용을 강하게 엮고 있습니다. 페이트 (FATE) 혹은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은 면모에 그대로 신호가 드러나며, 참가자가 극점수라는 자원을 소모해서 능동적으로 신호를 발동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합니다. 겁스 (GURPS)의 장단점 역시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수가 비교적 많아서 그중 어느 것이 중요한지 가려내려면 참가자에게 더욱 열심히 귀기울여야 하겠지만요.

물론 인물과 별개로 참가자 자신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는지, 어떤 로망을 가지고 있는지. 주인공의 설정은 참가자의 관심거리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지만, 참가자가 원하는 것은 주인공 설정에 전부 포괄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이 사람은 적당히 코믹한 소년물 성향이구나. 이 사람은 극적이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등등.

주의할 것은, 참가자의 관심사에 중점을 둔다고 해서 진행자가 참가자 입안의 혀처럼 굴면서 진행자 자신의 관심사나 로망을
희생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진행자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캠페인을 만들어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캠페인에 진행자의 관심사가 반영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참가자의 신호에 신경쓴다는 것은 여기에 더해 참가자도 정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도록 캠페인을 만들어간다는 얘기일
뿐이죠. 신호는 참가자에게서 나오되 이 신호를 캠페인상에 해석하고 구현하는 것은 진행자의 역할이니까요. 인물 제작 단계에서부터 진행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3. 캠페인 준비와 진행

이렇게 신호를 추출해 내면 (‘가족’ ‘고향 플레인’ ‘쌍둥이 언니’ ‘어린아이를 좋아한다’ 등등) 그 신호에서는 다시 캠페인에 활용할 수 있는 인물과 장소, 이미지, 주제의식 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호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외에도 주제의식이나 감정선에서도 또다시 인물과 배경을 추출할 수 있지요. 조연들에게는 각각 주인공에게 바라는 바, 목표와 자원, 한계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주인공의 신호와 관계되는지 재확인합니다. 장소 역시 비슷하죠. 신호 관련성, 특색, 모험에 활용할 수 있는 요소, 이 장소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조연 등을 준비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들이 준비되면 진행자는 주인공 한명 혹은 그 이상의 신호가 개입된 상황을 던져주고, 참가자들은 자기 관심사가 직접 개입돼 있으니 그 신호를 쫓아 반응할 것입니다. 조연들은 그들 각각의 목표와 주인공에게 바라는 바에 따라 주인공들의 행동에 다시 반응합니다. 이 조연들은 주인공의 신호에서 추출한 것이니 이들의 행동은 다시 신호를 발동하게 될테고 (그러지 않는다면 진행자는 다시 신호가 발동될만한 상황을 던지면 되죠), 또 주인공들이 행동하면 조연들은 반응… 하는 식으로 캠페인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더이상 진행자는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역할을 맡아 상황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면 되니까요. 다만 그 인물이 한명의 주인공이 아닌 여러명의 조연일 뿐.

4. 한계

이와 같이 신호 활용은 캠페인 제작과 운용의 강력한 도구이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바로 참가자들이 신호를 쫓으며 적극적으로 뭔가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진행자로서의 저는 능동적인 참가자에게 기대는 면이 있으며, 참가자가 수동적이면 속수무책이 된채 쩔쩔매게 됩니다. 인물 제작 단계라든지 캠페인에 대한 토론 단계에서 분명히 이게 신호다! 라고 확신하고 진행하는데 정작 참가자는 신호를 쫓아오지도, 활용하지도 않으면 난감해지지요.

예를 들어 지금 진행하는 레이디의 그늘 캠페인에서는 주인공들을 엮을만한 꺼리가 나름 풍부하게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그렇지 못해서 당황중입니다. 주인공 중 한명은 자기 고향 플레인을 찾으려고 하고 있고 이 동기를 열쇠로도 택했기 때문에 경험 많은 플레인워커인 다른 주인공과 쉽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고향 플레인에 대한 것은 일언반구 나오지조차 않아서 당황.

엮을 거리가 부족한가 염려되어서 약간 논리적으로 무리를 해가면서 두 주인공에게 공통으로 임무를 주기도 했습니다. 이 임무는 주인공 중 하나에게는 자기 고향 플레인을 찾는데, 다른 하나에게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접근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암시도 주었습니다…만, 역시 입질이 없더군요. 결국 주인공들끼리 별다른 접점이 없이 서로 겉도는 동안 진행자는 고민이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세번째 주인공을 추가하면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넘친다는 설정이니 어디든 쉽게 엮어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호기심 없는 인물인 것으로 밝혀져서 또다시 좌절..(…)

이와 같이 캠페인에 대한 신호 중심 접근은 신호에 대한 진행자와 참가자의 기대치가 어긋났을 경우 캠페인이 심각하게 표류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물론 참가자를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진행자의 실책이고, 참가자가 막막해하고 있으면 강력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진행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문제는 참가자가 적극적으로 신호를 쫓아가고 거기에 다시 반응하는 방식에 익숙한 저로서는 참가자들과 나란히 막막해진다는 것이죠. ㅠ_ㅠ 참가자가 적극적이지 않으면 진행자로서 잘 기능을 못한달까요. 그래서 요즘은 신호 중심 접근이 실패했을 때 보완할만한 방법을 모색중이기도 합니다. 어떤 진행 수단도 완전한 것은 없으니까요.

게시판 플레이용 규칙,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

수정주의 역사(주:몇번 왔다갔다하다가 역사학계의 관행은 ‘수정주의 역사’ 쪽이라는 기우님의 얘기를 듣고 어감도 낫다 싶어서 그쪽으로 정했습니다. 조언 주신 기우님께 감사드립니다.) (Revisionist History)는 글로 진행하는 게시판 플레이 (PbP, Play by Post)를 지원하는 규칙입니다. 각 참가자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조사하는 연구원의 역할을 맡아서 글을 씁니다. 각 연구원은 중립적인 입장이 아니라 각자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과거 사건을 조사합니다. 진행과정에서 연구원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과거 사건의 진상까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플레이의 핵심입니다.

1. 준비 단계

1.1. 플레이 매체

수정주의 역사는 게시판 플레이에 가장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플레이 매체는 게시판, 위키, 블로그 등 다양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모든 글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형태가 적당합니다. 전원이 이메일을 받도록 조치하거나 야후 그룹 같은 메일링 리스트를 만든다면 이메일 플레이도 가능합니다.

예: 참가자들은 외부 사이트에 호스팅된 위키를 사용해 플레이하기로 합니다.

1.2. 설정

수정주의 역사에는 진행자가 따로 없습니다. 시작 전에 참가자들은 서로 토의를 통해 그들이 조사하려는 사건과 인물들을 설정합니다. 세부적인 설정은 필요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플레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물들의 이름, 그들간의 관계, 대체적인 시대와 배경, 그리고 선택적으로는 그들이 관여된 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기본 배경은 21세기 초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 역사적 사건을 조사하면서 서로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지만, 얼마든지 수정을 가할 수 있습니다. 먼 미래 사람들이 현재 시대의 일을 조사할 수도 있고, 19세기 지식인, 중세 수도승, 고대 그리스 철학자 등이 더 과거의 일을 연구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있지요. 심지어는 전혀 다른 세계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 주기에 대한 설정을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루이지만, 사흘이나 일주일 등 다른 시기도 가능합니다. 플레이 주기는 차례를 정하거나 하는 용도가 아닙니다. 글을 올리는 빈도는 각자의 마음입니다. 플레이 주기는 연구비를 버는 대한 속도 제한으로 기능합니다. 또한 기사에 대한 반박을 해소하는 기간으로도 기능합니다.

예: 참가자들은 가상의 판타지풍 왕국 헤르가이스트를 배경으로 정하고, 플레이 주기는 하루로 정합니다. 다만 한사람 앞에 최소한 일주일에 글 하나는 올리자는 합의도 합니다

1.3. 연구대상

연구대상인 인물은 참가자의 두배 정도가 적당합니다. 참가자가 많다면 (5명 이상이라든지) 참가자와 동수가 더 적당할지 모릅니다. 각 참가자는 사람수대로 나누어서 연구대상의 이름과 이들 사이의 관계를 정합니다. 각 연구대상은 이름, 나이, 성별, 직업 정도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예: 세명의 참가자들은 여섯명의 연구대상을 가지고 시작하기로 합니다. 참가자 A가 두명의 연구대상을 제안합니다. 한명은 헤르가이스트의 제 1 왕자 카르디온 (25세), 또 한명은 빛의 여신을 섬기는 엘프 여사제 아엘레시아 (368세)입니다. 마찬가지로 B도 헤르가이스트 제 2 왕자 사피리온 (21세) 외에 또 한명, C도 두명의 연구대상을 제안합니다.

1.4. 인간관계

인간관계란 두명의 연구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혈연, 우정, 섹스, 혹은 의무 관계를 말합니다. 시작 인간관계의 갯수는 각 연구대상에 대한 연구원의 지식을 나타내는 권위도에 분배할 수 있는 시작 연구자금의 양을 결정합니다. 그 공식은 (10 + 각 인간관계당 1)입니다. 연구대상간의 인간관계를 설정하고 각 관계의 성격 또한 기록합니다.

모든 인물이 다 서로 얽혀있을 필요는 없지만 (인간관계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울 공산이 큽니다), 적어도 인간관계가 하나도 없이 따로 떨어진 인물은 없도록 합니다. 연구대상끼리 따로 집단을 이루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조사할 사건에 때문에 얽혀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예: 카르디온과 사피리온은 서로 혈연으로 묶입니다. 아엘레시아는 현재 왕족들과는 관계가 없고, 대신 신전쪽 인물들과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상태로는 왕궁쪽 연구대상과 신전쪽 연구대상이 갈라지게 됩니다.

1.5. 사건과 논쟁

과거에 연구대상들이 관여된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포물이라면 신비현상, 실종, 끔찍한 비극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정치물이라면 쿠데타, 전쟁 발발, 가문간의 분쟁, 암살 등도 가능할 것입니다. 기업간의 인수합병, 혹은 어떤 왕조의 몰락 등 가능성은 다양합니다. 추리물이라면 살인사건, 귀중품의 도난 등, 첩보물이라면 외교적 위기… 사건의 성격은 전반적으로만 정하면 됩니다. 자세한 것은 플레이 과정에서 만들어 갈테니까요.

사건의 성격이 무엇이든 구체적인 추이와 의미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의 발발을 다루고 있다면 누가 어째서 전쟁을 시작했는지, 어떤 사건이 발단이 되었는지 등이 논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서로의 발상을 얘기하고 경청하면서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논쟁을 결정합니다. 다수의 상호 충돌하는 인간관계는 더욱 흥미를 더해줍니다. 어떤 내용이 재미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만, 이름과 인간관계 외에는 플레이를 시작할 때까지 정해진 것은 없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 서로 얘기해본 결과 참가자들은 조사할 사건을 왕위 계승으로 정합니다.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가 결국 사피리온이 빛의 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름으로써 계승권을 인정받았으면 재밌지 않겠느냐, 고위 사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관을 씌워준 것이 아엘레시아면 어떻겠느냐, 내전이 없었다 하더라도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충돌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등등의 얘기가 오가고 플레이 과정에서 참고도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사건의 전반적인 성격만 정하고 시작합니다.

1.6. 연구원들

연구대상과 그들간의 관계, 그리고 사건을 정했으면 각 참가자는 연구원을 제작합니다. 모든 게시물 혹은 이메일은 이 연구원이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쓴 글입니다. 연구원의 능력치는 단순합니다. 각 연구대상마다 연구원은 권위도라는 점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연구원이 그 연구대상에 대해 가지는 지식, 그 지식의 신뢰도 등을 나타냅니다. 그 규칙상의 의미는 그 연구대상의 ‘진실’에 대해 참가자가 가지는 결정권의 크기입니다.

각 연구원은 기본 연구자금 10에 준비단계에서 설정한 인간관계 하나당 1의 연구자금을 가집니다. 한명의 연구대상만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각 연구원의 자금은 10입니다. 권위도에 분배하지 않은 자금은 연구자금으로 저축해둘 수 있습니다. 이 연구자금은 나중에 연구대상에 대한 권위도에 투자할 수도 있고, 연구원들간의 갈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권위도와 연구자금 외에 각 연구원의 이름나이, 그리고 가족, 직장동료와 같은 인간관계 또한 설정합니다. 연구원이 어떤 지위이며 누구에게 연구자금을 받고 있는지도 정합니다. 대학이나 박물관, 혹은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는 전문가일 수도 있고, 역사소설을 쓰려고 준비중인 소설가일지도 모릅니다. 관여된 연구대상의 후손이고 자비로 조사를 진행중일 수도 있는 등, 가능성은 다양합니다.

또한 자기 연구원의 목표 또한 정해야 합니다. 연구하는 사건에 대한 통념을 뒤집으려 한다거나, 특정한 결론을 내라고 연구지원을 받고 있다거나, 가문의 오명을 씻으려고 한다거나 등등. 조사의 방향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연구원의 목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단 계속 같을 필요는 없으며,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개정주의 역사에서 서술은 다단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창작자이자 관객인 참가자들입니다. 이들은 연구원들이 남긴 기사 혹은 서신을 발견한 입장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역사적 사건과 그에 관여된 인물들을 조사하는 연구원들이고, 세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연구대상들 자신입니다.

연구원에 대한 자료는 모두가 볼 수 있게 게시합니다. 게시판 플레이라면 각 연구원에 대한 글이 있어야 할테고, 위키 플레이라면 각 연구원은 자신만의 페이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각 연구원의 연구자금과 권위도 변경을 추적합니다.

예: 여섯명의 연구대상 사이에는 다섯가지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각 참가자의 시작 연구자금은 15입니다. 참가자 A는 카르디온에 대한 권위도에 2, 아엘레시아에게 4, 사피리온에 3, 나머지 세 연구대상에게 2, 2, 0 하는 식으로 분배한 뒤 남는 2점의 연구자금을 저장해 둡니다. 다른 연구원들도 마찬가지로 15점의 연구자금을 연구대상 사이에 분배합니다.

참가자 A의 연구원은 텔루스라는 30대 중반의 사제로, 고위사제 몇몇의 지원을 받아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 대사제와 왕가에 비판적인 이들은 200년 전에 있었던 대관식과 관련해 아엘레시아의 위치를 끌어내려서 왕가와 신전의 현재 권력구도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고자 합니다. 다른 두 참가자도 각자의 연구원을 설정합니다.

2. 플레이 단계

2.1. 기사 쓰기

플레이중 각 참가자는 자신의 연구원 이름으로 기사를 씁니다. 논문의 형태를 빌릴 수도 있고, 서신일 수도 있는 등 어울리는 형태를 정할 수 있겠지만 일단 편의상 기사라는 용어를 쓰겠습니다. 기사의 형태에는 1차 기사반박 기사 두가지가 있습니다.

2.1.1. 1차 기사

1차 기사는 출처논평으로 이루어집니다. 출처는 다시 직접 출처간접 출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직접 출처란 연구대상들에게서 나온 것, 혹은 연구하는 사건과 관여된 주변 인물들이 제작한 자료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일기, 사진, 신문기사, 서신 등이 그 예입니다. 간접 출처란 사건이나 연구대상을 앞서서 조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책, 논문, 강연 등이 있습니다.

논평 부분은 연구원이 출처에 나온 증거를 활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대목입니다. 출처는 글씨체, 색, 배치 등을 다르게 해서 논평과는 시각적으로 분리해야 합니다. 즉 참가자의 입장에서 쓰는 글, 연구원의 입장에서 쓰는 논평, 그리고 출처의 세가지 시각적 구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 참가자들은 참가자의 글은 기울임체, 논평은 굵은 글씨, 출처는 보통 글씨체로 해서 세가지를 구분하기로 합니다.

직접 출처에 의존하는 글을 쓰는 플레이 주기마다 참가자는 3점의 연구자금을 벌며, 권위도에 연구자금을 최대 1점 투자할 수 있습니다. 간접 출처에 의존하는 글을 쓴 플레이 주기마다 1점의 연구자금을 벌며, 권위도에 연구자금 최대 3점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기사를 쓸 때 주로 직접 출처에 의존할지 간접 출처에 의존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두 종류의 출처가 한 기사에 모두 나오는 것은 상관없지만, 어느쪽의 중요도가 더 큰지는 정해야 합니다.

연구자금을 벌고 투자하는 것은 플레이 주기중에쓴 첫 글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같은 플레이주기 내에 또 기사를 쓴다고 해서 연구자금을 더 벌거나 연구자금 투자 한도가 늘지는 않습니다.

글을 쓰는데 있어 다른 글의 결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글에 참고 기사로서 링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참고가 된 글 역시 참고하는 글에 링크해야 합니다. 어떤 글을 참고하는 글이 몇개나 되는지는 나중에 반박 기사가 나올 경우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주:위키의 주석과 백링크, 편집권한 기능으로는 비교적 간단한 일입니다만..)

예: 참가자 A가 자신의 연구원인 텔루스의 이름으로 쓴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제 2 신전의 플레임키퍼 아엘레시아 자매가 바르나 대사제의 명령마저 어기고 (대사제의 명령에 대해서는 하스펠 에루디트의 글을 참조) 기어이 제 2 왕자 사피리온의 머리에 토리노의 관을 씌운 동기는 그녀가 사피리온에게 보낸 다음 서신을 보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M_줄인 글 보기|글 줄이기| 이 편지를 받는 그대가 축복의 광휘 속에서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신전의 창문에서도 들려오는 거리의 소란을 들으며 이 글을 씁니다… (중략)

마치 도둑처럼 잠시잠깐씩 시간의 손아귀에서 훔쳐내는 달콤함은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의 감미로움이며, 동시에 고통입니다. 내 귀가 밤중의 그대 속삭임을 기억하고 내 입술이 밀주와 같은 입맞춤을 여전히 기억함을 모르시지 않겠지요. 언제 또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그리고 운명의 폭풍 속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사이에서는 심장박동 하나하나가 고통스럽습니다.

용서하세요. 이 급박한 정국 속에서도 옛 습관은 버려지지 않는군요. 인간들 사이에 살면서 무섭도록 급해졌다고 고향의 어른들은 저에게 말하지만, 인간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답답하도록 느긋하겠지요. 하지만 누군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전에 합의해 두었던 암호와 전령을 사용할 터이니 그런 일은 당분간 없기를 바랍니다만) 내가 인간의 시간 감각은 아니어도 그 열정만은 완전히 배웠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요. 틸레딘 숲의 나무들처럼 서서히 자라나는 영혼의 노래가 아닌, 신전의 성화처럼 일시에 타오르는 이 낯설고 두려운 정열은 나의 모든 것이 되어갑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 그대가 한 얘기, 어쩌면 헤르가이스트가 헤르가이스트의 피를 흘리는 비극을 피할 우리의 마지막 기회… 저는 그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엘프로서는 다급할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영혼까지 속속들이 아는 당신이라면 능히 그 고뇌의 깊이를 짐작하리라 믿습니다. 혹시 나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내리는 결정이 아닐지, 스스로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밤낮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 뿐입니다. 그대의 형, 나의 은인이며 친구인 그를 나는 부인하고 배신할 것입니다. 신과 인간이 지켜보는 속에서 그대를 나의 미약한 권위가 아닌 빛의 군주의 이름으로 이 땅의 왕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나의 대답은 ‘예’입니다, 사랑하는 사피리온. 내가 이 손으로 당신에게 왕관을 씌우겠습니다. (후략)

빛의 군주를 섬기는 사제가, 게다가 인간의 저급한 열정에는 물들지 않는다고 하는 엘프가 사랑에 빠진 시골처녀처럼 감정에 휩쓸려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내리다니 얄궂고도 어쳐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결국 제 1·2 왕자의 계승 순서가 뒤집히고 대사제의 명령마저 무시당한 대관식 사건은 한 여사제의 연심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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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계속): 위의 글을 쓴 후에 참가자 A는 자신이 참조한 하스펠 에루디트 연구원의 글에 자신이 새로 쓴 글을 가리키는 링크를 달아놓습니다. 그리고 직접 출처에 의존한 글이니까 3점의 연구자금을 얻고, 연구자금 중에서 최대 1점을 연구대상에 대한 권위도에 투자할 수 있게 됩니다. (투자할 수 있을 뿐 꼭 투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 A는 생각하다가 연구자금을 1 투자해서 아엘레시아에 대한 권위도를 1점 증가시킵니다.

참가자 A가 원한다면 그날 내에 기사를 하나 더 쓸 수도 있지만, 같은 플레이 주기 내이기 때문에 연구자금이나 연구자금 투자한도가 추가로 늘지는 않습니다.

2.1.2. 반박 기사

반박 기사란 1차 기사의 결론 혹은 출처, 혹은 출처의 해석을 반대하는 글입니다. 반박 기사와 반박의 대상이 된 1차 기사는 서로 링크시킵니다. 반박 기사는 새로운 출처를 제시하거나 (직접 혹은 간접) 1차 기사에 나온 출처를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박 기사를 쓰는 플레이 주기마다 2점의 연구자금을 벌며, 권위도에 연구자금을 최대 2점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 참가자 B는 자신의 연구원 하스펠 에루디트의 이름으로 위 텔루스의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박을 집필합니다.

텔루스 형제의 글에 나온대로 아엘레시아 자매와 사피리온 선왕폐하 사이에 있었던 깊은 마음은 부정할 수 없어보이며, 필자는 부정할 생각도 없다. 무엇보다 텔루스 형제와 달리 필자는 두분의 사적인 연애관계는 대관식 사건의 귀결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 1 왕자 대신 제 2 왕자 사피리온에게 왕관을 씌운 아엘레시아의 결정은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 사실은 크게 두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첫번째, 사피리온이 왕이 됨으로써 아엘레시아는 그와 헤어져야 했다는 것. 두번째, 카르디온과 사피리온의 계승권 다툼은 단순히 두 형제의 대결이 아닌 이웃의 강대국 로사니아의 확장주의 야욕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M_줄인 부분 보기|글 다시 줄이기| 첫번째부터 살펴보자면 텔루스 형제는 그의 기사에서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사피리온 선왕폐하 곁에서 왕비가 된 것은 아엘레시아가 아닌 선왕폐하의 육촌 누이 클라리스였다. 더군다나 사피리온과 클라리스의 약혼은 대관식 이후에 결정된 일이었으며, 대관식 전까지는 이런저런 혼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사피리온은 대관식 이후에는 혼약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이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계승 순서를 거역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한 이상 그에게는 강력한 군사적·경제적 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관식으로 인해서 사피리온은 아엘레시아와 혼인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클라리스의 아버지 프리아수스가 기사 1천 2백, 보병 1만을 제공할 수 있는 대영주였던 반면, 아엘레시아와 약혼했다면 사피리온이 얻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사제의 명령을 어겨서 신전에서도 위치가 불안정했고, 틸레딘 숲을 떠나 인간 사이에 살아온 100여년 동안 엘프 여왕의 궁과도 멀어진 엘프 여사제는 사피리온에게 성기사 열명, 엘프 궁수 50명조차 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엘프 궁수의 놀라운 실력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궁수 수십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여기서 우리는 텔루스 형제의 글에 발췌된 편지 중,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결정을 내릴까 두렵다는 아엘레시아의 말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왕관을 씌우면 그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아엘레시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갓스물의 왕자였던 사피리온은 생각하지 못했다 해도 300년을 넘게 살아온 엘프, 게다가 플레임키퍼의 영안을 가진 사제였던 아엘레시아 자매가 몰랐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사피리온에게 왕관을 씌우겠다고 한 말은 곧 작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엘리시아가 그렇게 가슴아픈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이유, 그리고 제 2 왕자에 불과했던 사피리온이 제 1 왕자를 제치고 왕이 될 정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전에서 올린 대관식이 비록 신성하다고는 하나, 기존의 지지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는 있을망정 없는 지지를 억지로 창출할 수 있는 성격의 사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숨어있는 다른 이유, 두 왕자의 분쟁 뒤에 있던 진정한 분쟁은?

필자는 그 해답을 제 1 왕자 카르디온의 모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그의 모친이 이웃 로사니아의 왕녀 출신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그의 부왕이 서거한지 몇주 이내로 로사니아 국경의 병력 배치 변경은 수많은 정찰 보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카르디온의 사촌이기도 했던 로사니아 국왕은 필요하다면 침공을 통해서라도 카르디온의 계승권을 확보할 생각이었고, 로사니아의 내정 간섭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헤르가이스트의 영주들은 그래서 법적으로 정당한 계승자였던 카르디온 대신 제 2 왕자 사피리온을 지지했던 것이다.

아엘레시아 역시 그들과 뜻을 같이했음은 다음 자료에서 알 수 있다. 제 1 왕자의 서약한 방패이며 왕궁 기사단 청의단장이었던 키리엔 경의 회고록에서 발취한 것이다.

궁의 장미정원은 그해 유난히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어쩌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선머슴이긴 했지만 꽃은 여느 여자아이처럼 좋아했던 나는 향기와 색채를 음미하면서 장미 정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때 문득 장미덤불을 사이에 두고 인기척과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울타리 반대편에 멈춰서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흐드러진 장미꽃과 잎 사이로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리라 짐작하며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았고, 그들이 말하는 목소리와 내용이 귀에 들어오면서 나는 굳어버렸다.

“결국은 이 길을 계속 가실 생각인지요?”

향기로운 공기중에 음악처럼 녹아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빛의 신전에 있는 엘프 여사제… 나도 모르게 손이 검으로 갔다. 동생이 형의 왕관을 빼앗으려는 기도 안차는 이 사건 내내 제 2 왕자 전하를 부추기는 많은 사람 중 하나. 그럼에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는 묘하게 슬픈 떨림이 있었다.

“날 잘 알잖아, 엘.”

‘엘’이 ‘아엘레시아’라는 연관을 짓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나 엄격하고 정중한 제 1 왕자전하께서 신전의 플레임키퍼에게 저런 격식없는 애칭을? 두분이 절친한 사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둘만 있다고 생각할 때의 두 사람은 전하의 서약한 방패로서 보아왔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원하기 때문이 아냐. 의무이기 때문이지. 제 1 왕자로 태어난 이상 왕이 되는 것은 나의 의무이며…”

전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1 왕자 정도 되면 세상에 가지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바와는 별 상관없이 돌아가지. 아주 어려서부터 사무치게 깨우친 바다.”

“전하…”

“내 친구와 내 동생을 적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이웃나라 왕이 내 나라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 어머님이 궁에서 내쳐지시기를 원한 적도 없고, 돌아가신 후에는 장례식에라도 가고 싶었어, 나도. 왕자이지만… 동시에 아들이었으니까. 인간이니까.”

전하의 고통에 오히려 내가 지그시 눈을 감아야 했다. 내가 처음 본 그분은 주어진 길에서 한치 어긋남 없는 왕자, 그러면서도 한없이 외로운 눈을 하고 있던 아이. 부왕께서 외국 출신의 왕비폐하를 내치시었을 때도, 외롭게 돌아가신 폐왕비의 장례식에 가는 것마저 금지하셨을 때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그저 순종하던…나의 주군.

그분을 따른 것은 단순히 그가 왕국 제일의 기사여서가 아니었다. 그가 첫 왕자여서도 아니었고, 강대국의 왕족인 외가의 뒷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 아픈 마음을 알기에, 왕자로 태어난 의무를 얼마나 바보스러울 정도로 자기 감정보다 우선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서하세요, 전하…”

여사제의 목소리에는 흘리지 못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건 아마 인간보다 한없이 긴 시간을 살아가는 엘프만이 느낄 수 있는 슬픔의 깊이.

“이 나라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결정한 저와 제 2 왕자전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뜻입니다. 당신을 대적할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세요…”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어. 너인데, 내 동생 녀석인데.”

피곤한 웃음소리에 묻어나던 새파란 아픔을 생각하면 오늘날까지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리고 너희 두 사람이 치를 대가를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는데.”

나의 주군은 마치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사피리온이랑 둘이 떠나면 어떻겠냐고 떠본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유혹이 될까. 왕관도 칼도 피도 전쟁도 모두 잊고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될 수 있는 곳으로… 울음 대신에 노래를, 의무 대신에 기쁨을, 이별 대신에 서로의 온기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말야.”

“제발… 그만…!”

돌아서는듯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더니 작은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엘프가 이렇게 쉽게 감정을 보이다니. 그정도로 사피리온 전하에 대한 마음이 깊은 것일까. 그녀가 헤르가이스트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든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어째서 그렇게도 열심히 사피리온을 왕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불쌍한 엘. 그녀석의 바램이라면 영영 헤어지는 결과라 해도 이루어내고 말겠지. 네 마음이 으스러진다 해도 말야.”

중얼거리는 카르디온 왕자전하는 진정으로 딱해하고 있었다. 적에게까지 보일 수 있는 자비야말로 그분을 헤르가이스트 필두기사라고 하는데 모자람이 없게 하는 한없이 넓은 마음, 그리고 그분의 맑은 영혼의 반영이었으니까.

“예… 그래요.”

간신히 냉정을 되찾으며 아엘레시아는 다시 돌아섰다.

“이 땅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고 영혼이 갈라진다 하더라도 이 땅의 자유를 지켜낼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마음쓰지 말아줘. 이미 용서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웅변보다 많은 말을 품은 침묵이 흘렀다.

“너도 기억해줘.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이더라도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는 걸. 시간과 염원의 충돌 앞에서는 범부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왕자의 의지 또한 무력했음을.”

전하가 돌아서는 발걸음이 들렸다.

“안녕히…전하.”

“안녕히, 나의 엘.”

제자리에 굳은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분의 혼에 있는 고뇌를 한순간이나마 허락없이 들여본 지금, 나의 주군이 왕자로서 걸어야 하는 가시밭길에서 그분을 보호할 길이 없었기에.

“키리엔 경? 잠시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

좀전보다 다소 초연해지면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러면 그렇지, 엘프에게서 숨을 수 있을 거라는 건 무슨 착각이었을까. 칼로 땅을 파고 숨는 것은 별로 실용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사제님.”

얼마동안이나 엿듣고 있었냐고 물을 생각일까?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장미덤불의 새하얀 꽃송이들 너머로 엘프 여사제는 여전히 왕자전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듯한 옆얼굴은 평온했지만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왕자전하의 서약한 방패… 청의단장 키리엔 경. 한가지만 부탁할 수 있을까요?”

조용한 물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을 지켜주세요. 부디…”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나를 보는 눈빛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빛의 군주께 감사드렸다. 하루살이같은 우리 인생에는 결코 엘프만한 슬픔의 깊이는 알 수 없을 테니까. 제아무리 고통스런 삶이라도 행복한 무지 속에 살아가다 찰나에 스러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펴면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저는 왕자전하의 서약한 방패입니다. 전하는 제 목숨으로 지킵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보다 더 전부터 살아왔을 엘프를 도전적으로 노려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카르디온 왕자전하를 위협하는 자라면 이 검은 그 누구라도 벨 것입니다. 설사 그분의 혈육이라 할지라도!”

“고마워요… 그러게 말해줘서.”

내가 놀라서 쳐다보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작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당신같은 분이 전하 곁에 있어서 안심이예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광의 광휘 속에 당신의 검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당신의 주군에게…”

그녀는 돌아서서 마치 노래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따스한 여름 바람속에 정원의 장미향이 잔인할 정도로 감미롭게 폐부를 채워왔다. 그렇게 여름은 끝나가고 피의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사피리온이 빛의 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대관식이 인정되었던 배경에는 이웃나라끼리의 갈등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고 두 왕자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엘레시아 자매 역시 개인적인 감정은 어땠든지간에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움직인 정치인이었다. 사피리온에 대한 감정만이 동기였다면 그녀는 대관식을 막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맞았다. 헤르가이스트의 독립이 동기였기 때문에 아엘레시아는 연인의 머리에 왕관을 얹었고, 그럼으로써 그를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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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연구자금과 권위도 증감 요약

– 직접 출처에 의존하는 글을 쓰는 플레이 주기마다 3점의 연구자금을 벌며, 권위도에 연구자금을 최대 1점 투자할 수 있습니다.

– 간접 출처에 의존하는 글을 쓴 플레이 주기마다 1점의 연구자금을 벌며, 권위도에 연구자금 을 최대 3점 투자할 수 있습니다.

– 반박 기사를 쓰는 플레이 주기마다 2점의 연구자금을 벌며, 권위도에 연구자금을 최대 2점  투자할 수 있습니다.

– 연구자금을 벌고 투자하는 것은 플레이 주기중에 쓴 첫 글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같은 플레이 주기 내에 또 기사를 쓴다고 해서 연구자금을 더 벌거나 연구자금 투자 한도가 늘지는 않습니다.

2.2. 반박 절차

반박 절차 처리는 반박 기사가 나왔을 때, 혹은 둘 이상의 1차 기사 사이에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후자의 경우 시간적으로 가장 이른 기사가 반박의 대상입니다. 일단 반박 상황에 들어가면 이 과정이 일단락될 때까지 아무도 기사를 올릴 수 없습니다.

2.2.1. 권위도 경매 (위키 플레이에서 활용한 구체적인 절차 참조)

반박을 처리하려면 당사자들은 사안에 관련된 모든 연구대상에 대한 권위도를 합산합니다. 여기에다가 추가로 연구자금을 얼마든지 투자해서 입찰액을 높일 수 있으며, 반박의 대상이 된 기사의 경우 그 기사를 참고하는 기사마다 입찰액에 1점씩을 더합니다. (이렇게 투자한 연구자금은 소모되어 사라집니다.) 최종적으로 입찰액이 높은 쪽이 승리합니다. 이 과정은 서로 주거니받거니 몇번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해당 1차 기사나 반박 기사를 집필하지 않은 다른 참가자들도 경매에서 한쪽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다만 연구자금에서 투자해서만 도와줄 수 있으며, 당사자 아닌 참가자의 권위도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경매는 반박 기사가 올라온 시간 기준으로 한번의 플레이주기 내에 해소되어야 합니다.

– 반박의 대상: 연구원의 권위도 + 연구자금 소모액 + 참고기사당 1 + 지지자들의 출자액
– 반박자: 연구원의 권위도 + 연구자금 소모액 + 지지자들의 출자액

예: 반박기사를 낸 참가자 B의 연구원 하스펠 에루디트는 아엘레시아에 대한 권위도가 5, 사피리온에 대한 권위도가 3, 연구자금은 현재 총 4입니다. 반박의 대상이 된 1차기사를 쓴 참가자 A의 연구원 텔루스는 아엘레시아에 대한 권위도 6, 사피리온에 대한 권위도 4, 연구자금 2점이 있습니다. 참가자 C의 연구원 디나 루카르노는 연구자금 3점이 남아있으며,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사피리온과 아엘레시아가 연인이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텔루스의 위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하지만 아엘레시아가 대관식을 거행한 이유가 사피리온에 대한 감정 때문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 경우 사피리온과 아엘레시아의 관계 자체가 아닌 아엘레시아의 동기가 논점이기 때문에 참가자 C의 기사를 참고기사로 칠 수 있을 것이냐를 가지고 토론한 끝에 결국 참고기사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가자 B는 모든 연구자금을 털어넣어서 5+3+4 = 12 입찰액이 되고, 참가자 A는 포기할까 생각하다가 그 결과가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래 참조) 역시 모든 연구자금을 털어넣어 6+4+2+0 = 12 입찰액으로 서로 동점이 됩니다. 잠시 고민하던 참가자 C는 참가자 B 쪽에 연구자금 1점을 더해주고, 결국 참가자 B가 승리합니다.

2.2.2. 승리와 패배

경매에서 패한 측은 자기 연구원의 입장에서 철회글을 써야 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출처나 해석이 옳다고 간단히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자기 출처의 전부 혹은 일부가 잘못되었거나, 불완전하거나,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승자는 다음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기 연구자금을 제한없이 소모해서 반박과정에 관여된 연구대상들의 권위도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반박과정에 관여된 연구대상 중 하나를 골라(주:이렇게 해석하긴 했지만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연구대상에 대한 패자의 권위도를 제한없이 낮출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낮추어진 권위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패자의 연구자금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굴욕을 겪은 참가자는(주:패배 자체인지 아니면 권위도를 상실한 경우만인지 불분명) 연구원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괴로운 일을 그리는 ‘개인 일기글’을 하나 써야 합니다. 이혼, 연애 문제, 동료간 갈등, 학계 내의 정치적 갈등, 연구자금을 대주는 기관과의 갈등 등 인간적인 갈등상황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일기글은 그 연구원에게만 영향을 주며, 조사에 대한 영향은 전혀 없습니다.

예: 참가자 B는 남은 연구자금이 있었다면 사피리온 혹은 아엘레시아 혹은 양자 모두의 권위도를 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연구자금이 남은 게 없으므로 대신 텔루스의 권위도를 떨어뜨리기로 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아엘레시아에 대한 텔루스의 권위도를 3점 깎습니다. 6점 모두를 깎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텔루스의 연구자금이 무려 6점 늘어날 테고, 다음번에 경매가 있으면 그 연구자금을 누구한테 대항해서 쓸지는 뻔하니까요.

참가자 A의 텔루스는 자신의 1차 기사에 대해 짤막한 철회글을 씁니다.

대관식 사건에서 아엘레시아 자매의 역할과 동기에 대한 나의 글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출처의 해석에 부정확하고 모순된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같은 교단의 사제로서 그분의 순수성을 충분한 근거없이 의심한 것이 부끄럽게 생각된다.

얼마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연구를 후원하던 고위사제와 말다툼을 하고, 이 사건을 일기글로 남깁니다.

오늘 베데스타 형제가 시뻘개진 얼굴로 내 사무실에 들이닥치더니 겨우 이런 짓이나 하려고 신전 돈을 처들이느냐고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돈에 매여서 학자적 양심을 팔아먹으려고 돈을 받아 처먹는 것도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고, 내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했지만 원체 말을 들어먹어야지. 아예 붙잡아서 복도에 내던지고 면상에 문을 쾅 닫아버리는데 어찌나 후련하던지.

오랜만에 위스키나 마시면서 제 2 신전의 플레임키퍼에 대해 썼던 그간의 노트들을 훑어보았다. 그중 한 반쯤은 벽난로에 버린 것 같다. 잘 타더구만. 어쩌면 그 엘프여자의 신망을 떨어뜨리기에는 그간 잡은 방향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불행한 연인 얘기라면 환장을 하거든. 어쩌면 승계의 법도를 어기기는 했지만 그 여자 생각이 옳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기랄, 어쨌든 술 때문인지 기분은 적당히 좋다. 내일이면 연구비도 사무실도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2.2.3. 철회한 글을 참고하는 기사

위의 반박상황 처리 경매에 의해 어떤 기사가 철회될 경우 그 글을 참고해서 쓴 기사 역시 효과를 잃습니다. 규칙상으로는 철회된 글의 결론에 의존한 글은 위의 반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모순된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글을 쓰는데 있어 다른 연구원의 글을 참고했다면 경매에서는 그 글의 편을 드는 편이 유리할 것입니다.

예: 위의 경우 만약 아엘레시아가 사피리온에 대한 감정 때문에 대관식을 거행했다는 결론을 참고하는 기사가 있었고 그 결론이 반박 후 철회당했다면, 그 결론을 참고한 기사에 대해서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반박 경매 없이 반대되는 글을 올려도 됩니다.

2.3. 새로운 연구대상 확립

새로운 연구대상을 설정하려면 그 연구대상의 이름을 언급하는 글이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는 어떤 연구원이든지 새로운 연구대상에게 연구자금을 투자해 권위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예: 참가자 C는 간접 출처에 의존한 글을 써서 연구자금을 1 벌었고, 연구자금을 권위도에 3점까지 투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참가자 B가 쓴 글의 출처에 나온 키리엔 경에 대해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키리엔 경에게 연구자금을 2점 투자합니다.

2.4. 끝내기

연구대상들의 이야기가 만족스럽게 밝혀졌다는 합의가 참가자들 사이에 형성되면 수정주의 역사 게임은 끝납니다.

근데 저 닭살대사들을 보면 저도 어쩔수없는 90년대 순정만화 세대라는 생각이…낄낄. 카르디온과 사피리온의 역사적 모델이 누구였는지 맞추시는 분은 보너스(?)

보드게임적 RPG,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의 배경은 펨버튼이라는 가상의 유서깊은 미국 대학입니다. 주인공들은 이 펨버튼 대학의 교수로서, 이들이 1년의 기간에 걸친 여섯가지의 교내 행사 (입학식, 와인 파티 등) 동안 영향력과 명성을 두고 경쟁하는 내용이 게임의 초점입니다.

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존재가 제목에 나오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입니다. 이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기생해 조종하면서 고대 수메르 문명을 지배하던 벌레 일족의 생존자라는 설정입니다. 펨버튼 대학의 애플비-젠킨스 교수가 샤브 알-히리에 있는 유적에서 발견해서 새로운 바퀴벌레 종의 표본으로 미국으로 가져온 이 바퀴벌레는 다시 한번 인간 문명을 지배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 세계는 벌레가 익숙한 4000년 전 수메르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점. 가축처럼 다루면 되었던 고대 수메르 숙주보다 현대인의 정신은 훨씬 반항적이어서 좌절하고 있던 중, 펨버튼 교수들의 권력욕 넘치고 고루한 정신은 매우 익숙한 종류인지라 벌레는 기뻐하고 있지요.

이와 같이 공포와 풍자의 요소를 둘다 갖춘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다분히 RPG와 보드게임의 중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가자만 있을 뿐 진행자는 따로 없으며,  게임 속에서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명성 점수가 제일 높고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승자라는 승리조건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각 교내행사가 시작할 때마다 행동 카드를 뽑는 규칙도 보드게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행방법 자체는 장면 설정과 갈등 해소라는 RPG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요.

각 주인공은 정교수이거나 부교수입니다. 정교수는 학술이나 권력이 관련되었을 때 더 큰 주사위를 굴리고, 부교수는 실용적인 능력이 관련된 갈등에서 더 큰 주사위를 굴립니다. 각 주인공은 또한 한가지 전문분야와 두가지 열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인공 교수들간의 관계, 이름, 대략의 배경 등을 설정하면 시작할 준비가 끝납니다.

각 행사 때마다 모든 참가자는 돌아가면서 자기 주인공이 주역이 되는 장면을 하나 설정합니다. 각 장면은 갈등으로 끝나야 하며, 이 갈등에서 이길 경우 판정에 걸은 명성 점수 (1~5점)를 얻고, 질 경우 판정에 건 명성을 잃습니다. 다른 주인공들은 행동 카드와 이번 장면에서 주역인 참가자의 지정으로 장면에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선택적으로 장면에 참가해서 그 장면 주역의 편을 들거나 반대편을 들 수 있습니다. (주역이 아닌 인물은 갈등에 개입되어도 명성점수 1점만을 걸 수 있습니다.)

갈등해소에 개입하는 인물들은 관련 행동에 해당되는 크기의 주사위를 굴리고, 각 편의 주사위를 모두 합산해 높게 나온 편이 이기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 장면에 다른 주인공과 조연을 되도록 많이 끌어들여야 유리합니다. 이러한 조력자 중 최강은 단연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로, 판정에 d12를 더해줄 수 있는 존재는 이 벌레밖에 없죠.

주인공들은 언제든지 캠퍼스 내를 돌아다니는 바퀴벌레 (알주머니의 알도 깠기 때문에 여러 마리가 있습니다)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갈등 판정에서 추가 d12를 굴릴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벌레의 지배를 받게 되고, 행동 카드를 뽑을 때 그 행동 카드에 나오는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명령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어떤 방법이든 희생이 따릅니다. 열정을 한가지 희생해서 벌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행사 내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 명성 1점을 잃고 한단계 낮은 주사위를 굴릴 수도 있고, 애플비-젠킨스 교수처럼 자살할 수도 있는 겁니..(..)

명령이 정말 사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보통 행동 카드에는 기회와 명령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벌레의 지배를 받게 되는 카드도 10장 있습니다.) 기회도 명령도 다른 인물을 개입시킬 경우가 있는데,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인물은 행동 카드를 뽑고 어떤 기회인지 확인하고 나서 그 대상을 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카드를 뽑기 전에 그 명령의 대상을 미리 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은 대체로는 적대적이기 때문에 사이가 안좋은 인물을 고르면 되지요. 예를 들어

명령하노니 이 자를 모함하라.

라든지

너의 임무는 이 자를 너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다.

하는 식입니다. 문제는 그 명령이 우호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점. 예를 들어

말하노니 이 자는 이제 너의 동맹이다.

..같은 건 그래도 낫지만,

이 자에게 욕망을 느껴 교미하라.

..같은 카드가 나오면 술이 안 넘어갈래야 안 넘어갈 수가..(..)

이와 같이 규칙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틀로 작용하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간단하면서도 흥미로운 규칙입니다. 교수들이 서로 편가르고 배신하고 속이는 학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강력하지만 물정 모르는 벌레의 좌충우돌… 그 유쾌한 내용에 숨은 부조리 때문에 더욱 우스운 샤브 알-하리 바퀴벌레는 한편 웃고 한편 생각하며 즐겨보고 싶은 블랙 코미디이기도 합니다.

분석적 제작과 게슈탈트적 제작

요즘 처음으로 겁스 (GURPS) 인물 제작을 스스로 해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거의 진행자 제작 인물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조금 가공해서 했던지라 이것저것 낯설군요. 재미있기도 하지만 어려운 점이라면 제가 익숙한 방식과는 반대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물이나 장비 제작에서 두 가지 다른 접근을 분석적 제작과 게슈탈트 제작이라고 이름붙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겁스는 어떤 효과를 내려면 그 구체적인 효과를 모두 분해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처를 입혔을 경우 상대를 일시적으로 눈멀게 하는 검이라면 해악, 단점부과 (실명) 특수향상, 후속효과 향상, 근접공격 제한, 물품용 제한 등 그 구성요소를 일일히 생각해야 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제작방식을 편의상 ‘분석적 제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분석적 제작을 사용하는 예로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히어로 (HERO) 나 트라이스탯 (Tri-Stat) 등이 있습니다.

반면 제가 익숙한 접근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분석적이 아닌 게슈탈트적 제작입니다. 효과를 개별 요소로 분해하는 대신 키워드로 표현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페이트 (FATE) 1.0으로 같은 검을 구현한다면 검을 부속으로 만들고 ‘상처를 입으면 시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한다’ 면모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효과 (시간적 범위, 필요한 성공차이, 판정에 수정치 등)가 필요하면 종종 규칙의 범위 내에서 합의해서 정합니다. 페이트 외에 히어로퀘스트 (HeroQuest)나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라이서스 (Risus) 등 다수의 규칙이 게슈탈트적 제작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두 가지는 일장일단이 있는 접근들이라고 봅니다. 분석적 제작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게슈탈트적 제작은 제작이 쉽고 유연합니다. 단점은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석적 제작은 복잡해질 수 있고, 기본적으로 목록에서 고르는 형태이므로 반드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게슈탈트적 제작은 대가성 확보가 불확실할 수 있고, 구체적인 효과는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이 두 접근은 서로 취할 점이 많아 보입니다. 우선 분석적 제작에서 효과를 요소별로 분해해 생각하는 방식은 게슈탈트식 제작에서도 형평을 맞추거나 구체적인 효과를 정할 때 좋은 시작점이 됩니다.예를 들어 ‘감각 기반’ 향상을 보면, 검이 섬광을 발산해 그걸 보기만 해도 잠시 눈이 안보이는 것은 검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야 하는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각 기반의 능력은 명중 판정을 요구하는 능력보다 면모 칸이 더 많아야 한다든지, 페이트 점수를 써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대가성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것은 감각 기반 향상을 몰라도 원론적으로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때로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정형화된 규칙을 보는 것이 더 구체적인 발상을 유도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너무 얽매여서 게슈탈트식 제작의 장점인 평이함과 유연성을 잃는 것은 금물. 그저 생각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아주는 정도로 사용해야지 목록이 발상의 자유로음을 제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석적 제작도 게슈탈트식 제작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상상력을 펼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개별 요소의 목록이 상상력의 발판이 아닌 천장이 될 위험을 피한다는 면에서이죠. 즉, 목록에 얽매이지 않고, 목록에 없는 것도 구현하려는 생각의 방향을 잡아주는 정도일까요.

이와 같이 분석적 접근과 게슈탈트적 접근은 서로 반대이긴 하지만, 발상을 얻거나 생각의 방향을 잡는데 서로 취할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른만큼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예시에 쓴 검을 겁스와 페이트로 제작해서 비교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명혼도 (冥昏刀) – 겁스판

해악 (2단계): 15CP

실명: +50%
근거리 (공격범위 1, 2): -25%
도난 가능 (ST 겨루기): -30%
소비시간 연장 (1초): -10%
일시적 단점 (죽음의 기운): -10%

비고: 일시적 단점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불길한 검이라 들고 있으면 반응판정에 벌점이 붙는 걸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끄고 켤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데 1초 이상이 걸리는 능력에만 붙일 수 있다고 해서 1초 소비시간을 넣긴 했지만 어차피 전투중에 반응판정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전투 외의 상황에서 능력을 끄는 건 쉬우니까요.

차라리 검을 해악 장점을 가진 동료로 제작해서 죽음의 기운을 넣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해악만이 목적인데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제작하기는 좀 그런 면도 있지만요. 아니면 참가자와 진행자가 합의해서 다른 효과를 부여할 수도 있겠죠.

명혼도 (冥昏刀) – 페이트판

명혼도 (□)
실명을 유발한다 □□
불길한 기운 □

발동조건: 다친 결과 (성공차이 3) 이상으로 공격에 성공했을 때 실명 면모 발동할 수 있음. 조건 충족시 피해자는 기본적으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실명 상태, 발동에 페이트 점수를 들여 시간단위 올릴 수 있음.

비고: 위에서 말한 ‘불길한 검이라 사회생활에 지장’ 부분은 어렵지 않게 표현됩니다. 불길한 기운 면모를 강제 발동하면 사회적으로 손해볼 때마다 페이트 점수를 받을 테니 대가성도 확보하고요. 반면 위협 판정을 할 때는 자발적으로 발동해 가산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시 위의 겁스판과는 달리 공격의 구체적인 효과는 따로 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경우에 형평성을 맞추는데 좀더 신경을 써야 하고, 이점에 대해서는  페이트 규칙 자체 외에도 겁스 같은 다른 규칙을 참고하는 것이 발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서러 – 욕망과 오만의 비극, 혹은 희극

론 에드워즈의 소서러 RPG (Sorcerer RPG)는 포지 계열 인디 RPG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풍으로, 인디 RPG 중에서도 ‘포지’라는 특징적인 영역을 처음 확보한 책이기도 합니다. 제한된 장르와 주제의식만을 다루면서도 배경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든지, 인간과 도덕성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다든지, 비교적 단순하고 유연한 규칙으로 이를 구현한다든지… 포지가 발전하면서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규칙도 많이 생기게 되지만, 아직까지도 소서러 및 소서러의 영향을 받은 RPG들은 가장 특징적인 포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소서러는 제목 그대로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흔히 떠오르는 판타지의 마법사보다는 좀더 어둡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마법력을 가지고 이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계약해서 악마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얘기해 두자면 악마라고 해도 반드시 지옥과 사탄 같은 기독교적 개념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소서러에서는 악마의 성격을 각 캠페인마다 정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의 무의식이 실체화된 것일 수도 있고, 원혼일 수도 있고, 과거 사건의 잔영일 수도 있고, 지옥에서 나온 악마일 수도 있고, 지성을 가진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습니다.

악마가 순수하게 악한 존재일 필요가 없듯 소서러 역시 반드시 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참가자가 공감할만한 인간적인 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주인공 제작에서 가장 강조되는 점 중 하나죠.

소서러를 규정하는 최대의 특징은 악이 아니라 욕망과 오만입니다. 모든 소서러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염원이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강력한 존재와 계약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존재와 거래하는 유혹과 위험을 자신은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사회법규와 자연법칙을 어겨가며 악마와 계약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강하고 제멋대로인 인간상이라는 면에서 WoD 쪽의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특히 메이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소서러의 악마들은 현실의 법칙에 늘 저항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에 띄는 행동을 거부한다는 점도 메이지와 비슷한 면이 있고요. 어쩌면 소서러도 WoD의 영향을 받았거나 WoD와 공통된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소서러 자신과 마찬가지도 악마도 반드시 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소서러처럼 악마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서러를 통해 그 욕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지요. 살인이나 폭력, 흡혈처럼 반사회적인 욕구를 가진 것이 가장 고전적인 악마겠지만 시사지식이나 이성과의 데이트처럼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욕구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소서러가 악하든 악하지 않든, 악마가 악하든 악하지 않든 이 계약 상황은 근본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소서러에서 마법은 이성적인 법칙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진 다른 존재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소서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구가 있고,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소서러에게 힘을 부여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이렇게 엇갈리는 욕망과 악마가 가진 커다란 힘 사이에서 계약상황은 점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욕과 끝없는 위험, 사회적 파탄의 연속이 되기 쉽습니다.

권력은 타락한다고 했던가요. 소서러는 권력과 권력욕에 대한 RPG이며,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대한 RPG이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얼마만큼 희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지. 그것이 바로 소서러의 이야기입니다.

(위의 얘기가 전에 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감상글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끼신다면, 그 느낌은 정확합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실제로 소서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소서러 서플먼트로 만들 생각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소서러를 뒤집은 반대편의 이야기가 포도원의 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칙상으로 두 RPG는 전혀 다르지만 주제의식 면에서 상당한 접점들이 보이죠. 실제로 포도원의 개들에 보면 악마의 힘을 빌리는 ‘소서러’라는 존재들이 적으로 나와서 재밌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지원하기 위해 소서러에서는 악마를 다루고 활용하는 규칙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인간성 규칙을 통해 주인공의 도덕성이 타락하거나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솔직히 규칙 면에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좀 복잡하거든요. 능력치도 많지 않고 기본 주사위 굴림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규칙이 조금씩 달라서 한번 읽어본 것만으로는 잘 파악이 안됩니다. 또 전투 규칙이 너무 자세하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들고… 뭐,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정리해봐야겠지만요. 확실히 규칙 깔끔한 것은 소서러보다는 후기의 포지 RPG들이 훨씬 낫습니다.

위에서 포도원의 개들 얘기도 했지만, 포도원이 아니어도 이후 인디 RPG에 소서러가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무엇보다 확고한 주제의식과 초점이 확실한 이야기의 지원, 인간 감정과 도덕성에 대한 초점 등 포지 RPG의 특징을 처음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소서러의 주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포도원의 개들, 소서러의 주사위 굴림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던전 (Donjon), 인간성과 자기혐오 규칙으로 구원과 저주를 다룬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 (주인님과 주인공들의 관계는 소서러와 악마의 관계와 꽤 유사하기도 합니다), 열정을 잃고 피로가 늘면서 비극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는 폴라리스 (Polaris) 등등 많은 규칙들에서 소서러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포지 RPG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소서러에 대해 역사적, 계보적 흥미가 더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서러가 과거의 유물이라거나 하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최근에만 해도 또다른 서플먼트인 ‘무의 사전’이 나와서 호평을 받고 있고 말이죠. 설사 소서러 자체가 언젠가는 잊혀진다 하더라도 다루고 있는 주제의식, 곧 욕망과 권력의 관계는 결코 그 중요성과 현재성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세기의 혼 도착!

음하하하하하하하!!!!

발매에 앞서 주문했던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 하드커버 한정판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앞표지 안쪽에는 세 작가 (로버트 도노휴, 프레드 힉스, 레오나르드 발세라)의 사인이 들어가 있고,  끼워져 나온 책갈피 두장 뒷면에는 형용사 사다리와 시간 단계, 거리 단계, 기능 목록 등 진행에 참고할만한 규칙이 발췌되어 있습니다. 코팅된 세기클럽 회원카드도 끼워넣어져 있군요. (회원번호 97, 센츄리온급 되겠시며..ㅡㅡV)

책도 참 예쁘고 튼튼해 보이고, 크기도 소설책보다 조금 큰 정도라 400여쪽이라는 (인디 RPG로서는 획기적인) 양에 비해 휴대도 편해 보입니다. 종이 질도 좋고… 질낮은 종이와 울퉁불퉁한 페이지 가장자리 때문에 ‘펄프’라는 이름이 붙은 장르를 지향하는 RPG로서는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책 제본도 깔끔하고 좋습니다.

평소에는 PDF로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물리적인 책에 대한 집착이 없는지라, 세기의 혼에 서슴없이 50불을 처넣은(..) 행동은 저로서도 당황스러울 지경입니다. 어쨌든 그만큼 기쁨도 크군요. 평소 너무너무 좋아했던 페이트 RPG가 이렇게 훌륭한 규칙책으로 나오다니, 50불이 아니라 100불이었어도 행복했을 지경이니까요.

그 외에 최근에 지른 RPG로는 소서러 (Sorcerer RPG)와 화륜전설 (Burning Wheel)이 있습니다. 소서러야 뭐 포지계열 인디 RPG의 고전인데다 최근 높이 평가받고 있는 배경설정인 무의 사전 (Dictionary of Mu)이 나와서 결국 질러버렸죠.

화륜전설 (오륜전설 패러디 번역?) 같은 경우 대개의 인디 RPG와 달리 경량 규칙은 아니지만, 극적인 플레이를 지원하는 신념 및 본능 규칙과 박진감있는 전투규칙으로 널리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 풍의 판타지를 더없이 잘 받쳐준다는 평이 있지만, 저는 염불보다는 잿밥인지라(..) 열사(熱沙)전설: 성전(聖戰) (Burning Sands: Jihad)이라는 무료 배경 때문에 질러버렸죠. 이게 듄을 기반으로 한 배경이라 듄 RPG로 사용할 생각이 있거든요. 과연 역량이 따를지는 그 다음 문제입…

문제는 돌리는 건 둘째치고 언제 다 읽을 것이냐…이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로키의 RPG 생활은 오늘도 즐겁습니다!

탈활극적 RPG들

워게임에서 갈라져 나와서 그런지, 향유자들의 취향인지, 둘 다인지는 몰라도 전투는 흔히 RPG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물론 개개 팀의 취향과 의지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문제이지만, 일단 대개의 RPG는 규칙 자체적으로 전투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바바 히데카즈가 지적했듯 많은 RPG에서 전투는 다른 규칙보다 더 자세하고 긴박감이 강조된 규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활극적 RPG를 모색하는데 있어서 첫 단계는 규칙의 지향성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투에 치중된 규칙은 100%는 아니어도 대체로 전투에 치중된 플레이를 유도하니까요. 그러한 모색의 출발점으로 전투중심 편향성이 전혀 없는 (몇 안되는) 규칙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포도원의 개들

예전의 소개글에서 다루었듯 포도원의 개들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가 중심인 규칙입니다. 끝까지 가면 이기기는 확실히 이깁니다.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고 친구의 얼굴에 총을 들이댈만큼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그만큼 그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한다면.

기본적으로 폭력성을 깔고 있는 성격의 규칙이지만 사회 판정과 인간관계에 능력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고 사회 판정에 주로 사용하는 지성과 마음 특성치를  많이 올리면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폭력사태까지 가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공산이 큽니다. 자의든 타의든 일단 폭력사태가 벌어지면 무능하겠지만요.
포도원의 개들도 이 글에 나오는 다른 규칙과 마찬가지로 전투와 사회판정을 완전히 똑같이 다룹니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을 설득해서 총을 내려놓게 하든 손을 쏴서 떨어뜨리게 하든 똑같이 효과적이니까요. 다만 피해만은 다르게 다루기 때문에 피해를 입는 김에는 사회판정에서 입는 것이 훨씬 성장이 빠릅니다. 성장이란 피해 굴림에서 1이 하나라도 나왔을 때 이뤄지는데, 총싸움에 의한 피해는 d10, 사회적 피해는 d4로 굴리기 때문에 사회적 피해에서 1이 나올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거든요.

폭력성을 전제로 하면서 정신과 인간관계에 상처를 입는 것이 신체적 부상보다 더 유리한 포도원의 개들은 역시 궁극의 폭력 RPG인 걸까요. 그럼에도 전투능력이 없어도 된다는 점은 역설입니다.

과거의 그늘

역시 전투와 비전투 판정을 완전히 동일하게 다룹니다. 심지어는 무기와 방어구까지. 칼싸움 판정에 도움이 되는 검이 있을 수 있듯 협박 판정에 도움이 되는 무서운 가면도 가능합니다.

과거의 그늘은 포도원의 개들과 달리 신체적 피해와 정신적·사회적 피해를 모두 동일하게, 같은 체계로 다룹니다. D&D에 빗대자면 총에 맞아서 20HP에서 16HP로 깎였다가,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실연을 당해서 16HP에서 9HP로 다시 깎이는 식입니다. 그래서 신체적 피해를 치유하는 치료 기능과 나란히 정신적 피해를 치유하는 상담 기능도 있습니다.

실제로 2005년 겨울에 7회짜리 단기 캠페인이었던 라이테이아 캠페인을 돌렸을 때 사회 판정이나 신체 판정은 꽤 많았지만 전투 판정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일 끝에 벌어졌던 아주 극적인 전투는 기억에 남지만요. 규칙의 편향성이 없으면 플레이의 전투 편향성 역시 없어질 수 있다는 실례로 생각됩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모든 판정을 동일한 규칙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과거의 그늘과 비슷합니다. 능력치랄 것이 거의 없고 뽑는 카드의 수는 화면 존재감과 팬레터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화면 존재감이 높은 화일수록 주인공은 매우 광범위한 능력을 보입니다. 이것은 그 주인공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화일수록 그 주인공의 다양한 모습들이 드러난다는 점과도 일맥상통하겠죠.

유일하게 전투와 비전투에 차등을 둘만한 것이라면 능력과 인간관계의 설정 부분입니다. ‘태권도 유단자’ 능력과 ‘도서관 사서’ 능력이 도움이 되는 상황이 다른 정도의 문제랄까요. 어차피 능력과 인간관계는 매우 넓은 범위 내에서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중요한 구분은 아니지만요.

얼음깨기

얼음깨기는 연애와 연애 심리가 중점이기 때문에 전투든 사회든 판정이랄 것이 없습니다. 오직 두 주인공의 마음의 변화만을 다루고 있지요. 따라서 위에서 얘기한 전투 편향성과 비슷한 원리로 얼음깨기 플레이에는 ‘연애 편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규칙의 초점에 따라 플레이의 실제 내용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하는 일이란 결국 세부 규칙을 통해 플레이의 초점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문화된 규칙이든 암묵적인 합의든 초점이 전혀 잡히지 않으면 화장실 가고 목욕하는 것도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거나 왕위를 계승하는 것과 동일한 중요성을 가질테니까요. 규칙이 달라지면 플레이의 초점이 달라지고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규칙이란 탈활극적 RPG를, 또 어떤 RPG든 논하는 첫 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RPG 속의 일행

일행 개념은 진행자/참가자의 역할 구분, 주사위, 규칙책과 함께 RPG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 속합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저는 일행 단위의 진행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1 플레이의 허와 실에서 다루었듯 일행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 분업이라든지, 여러 사람의 이야기와 인간관계, 발상이 엮여서 나오는 상승 효과라든지요. 또 현실적으로 참가자가 한 명을 넘어갈 때부터는 일행이 가장 편리한 단위이기도 합니다.

반면 RPG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다양해지면서 일행 개념에 무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주인공들이 함께 몰려다니며 전투하는 미궁 탐사형 모험이라든지,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해서 임무를 함께 하는 임무형 모험 등에는 일행 개념이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하지만 주인공들 사이에 그런 접점이 없이 각자의 삶이 있을 때 일행을 유지하기란 항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각자의 목적이 일치할 때는 함께 행동하기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각 주인공의 동기와 이해에 따라 일행이 흩어지기 쉬운 것이지요.

일행이 깨졌을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 등장하지 않고 있는 주인공을 조종하는 참가자는 할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특정 장면에서 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될지는 몰라도 더 중요한 것은 참가자가 심심하다는 사실이겠죠. RPG는 뭔가를 하는 놀이이지 구경하는 놀이는 아니니까요. 이 ‘구경’ 부분이 너무 많아질 수 있다는 점이 일행이 갈라졌을 때의 문제점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일행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어떻게 하면 일행을 유지시키느냐, 두번째는 혹시 일행이 갈라지더라도 어떻게 하면 참가자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각 논점은 다시 규칙 내적인 해결 방법과 규칙 외적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일행 유지시키기

1.1. 규칙으로 일행 유지시키기

규칙 내적으로 일행을 무조건 유지시키는 규칙책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얼음깨기 같은 경우  데이트를 다루는 규칙이므로 두 주인공이 함께 있지 않으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지만, 2인용이므로 일행 유지가 문제되는 인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행을 유지시키는 규칙상의 수단이라면 강제하기보다도 유도하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궁 탐사라고 봅니다. 일행 전체의 분업을 통해서 보물을 획득하고 괴물을 잡는다든지요. 물론 시나리오의 구성에 따라서도 분업은 확보할 수 있는 등, 전반적으로 규칙 자체가 일행을 유지시키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1.2. 규칙 외의 수단으로 일행 유지시키기

규칙 외적 수단을 통한 일행 유지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는 설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에 아사히라님의 아루스 캠페인처럼 모두 같은 수사대 소속이라서 함께 임무를 해결한다든가, 제노시아님의 언더월드 캠페인 외전 중 제가 진행하는 ‘브루하 폭주전대’처럼  같은 특수부대 소속이라든가. 이 경우 주인공끼리 어느정도 갈등이 생겨도 왠만하면 일행이 유지된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아루스 캠페인 당시의 이단심문관 아론과 사제 레테, 아니면 폭주전대의 단순과격한 요한과 왕자병 환자 프란츠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라도 일행이 바로 깨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행을 유지하면서도 주인공간의 관계를 심도있게 탐색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의 소재는 다소 한정되겠지요.

의무적으로 함께 일행으로 묶인 경우가 아니라도 각자의 이해관계나 목적이 일치해서, 혹은 휘말려서 함께 행동하게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전에 진행했던 라이테이아 캠페인이나 현재 참가하고 있는 제노님의 언더월드 3기가 그 예입니다. 각자 다른 생활이 있는 사람들이 공동의 적 때문에, 혹은 우연같은 농간같은(…) 상황 때문에 일행을 이루는 경우이지요. 이러한 방법을 쓸 때면 임무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간의 감정적 갈등의 범위는 제한되는 느낌입니다. 어쨌든 싫어지면 (생존 같은 중대한 이유가 걸려있지 않은 이상) 헤어지면 그만이니까요.

또한 각자의 삶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일행을 유지하는데 때로 논리적인 무리가 가기도 합니다. 라이테이아 때는 예언까지 동원해 가면서 좀 억지로 일행을 만든 감이 있고, 나중에는 그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엄청난 우연을 동원시키기도 했죠. (참가자들이 저 진행자 미쳤나 하고 쳐다보면 당당히 예언을 가리키는 것입..) 이 접근의 장점이라면 다양한 설정과 성격의 사람들이 서로 엮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대개의 플레이에는 왠만하면 일행을 유지하자는 게임 외적인 합의가 깔려있습니다. 어쨌든 일행 개념을 전제로 한 캠페인에서 자꾸 주인공들이 따로 논다면 파토는 이미 성큼 다가와 있다고 봐도..(…) 결국 이 부분은상호존중과 상호합의라는 일반론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2. 일행 없는 진행

일행 단위로 진행하는 모험에서도 일행이 어쩔 수 없이 갈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또 처음부터 일행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이야기도 있을 법 합니다. 역시 규칙 내외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1. 일행 없이 진행하는 규칙

제가 접한 RPG 중에서 일행 개념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주인님과 함께’가 처음입니다. 이 경우 주인공들은 돌아가면서 하나씩 장면을 진행합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서 조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며, 기본적으로 진행 방식은 순차적입니다. 개개인의 인간성과 자기혐오 사이의 갈등이 중점인만큼 일행 단위 진행이 필요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위에서 말한 참가자가 구경꾼이 되는 현상은 해결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주인님과 함께의 전신격인 니코틴 걸즈도 일행 개념은 없지만, 대신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통해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와 성공률에 어느정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반드시 모든 주인공을 참가시키는 것도 아니고 또 주변 인물과 피울 수도 있기 때문에 참가자의 참여가 규칙 자체적으로 확보되지는 않습니다.

트롤베이브 같은 경우 지도 중심 모험으로, 지도의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지정하면서 모험을 시작합니다. (바빌론 베이브 캠페인 같은 경우 기원전 4세기경 중동 지도[503KB 그림 파일 직링크]를 사용하고 있지요.) 그리고 주인공들이 지도상에서 서로 다른 지점을 선택했을 경우 때로는 전혀 만나지 않은채 각각의 이야기로 진행할 수도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행동이 서로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라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발상이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에 대해서는 지침이 없고, 참가자들이 다른 주인공들의 얘기에 제안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고 해도 자기 주인공이 나오지 않고 있을 때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폴라리스 같은 규칙이 일행 없는 플레이를 진행하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 참가자의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머지 참가자들은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눠가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주인공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모든 참가자는 규칙 자체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가지게 됩니다. 진행자는 보통 참가자보다 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 진행자 역할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은 오히려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이는 한번에 한 주인공의 감정적, 극적 변화에 집중하면서도 다른 참가자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좋은 해결책으로 보이긴 합니다. 다만 얼음깨기와 비슷하게 인원 제한이 있고 (3명이나 5명으로도 돌릴 수 있긴 하지만 4인이 이상적), 죽음과 타락이라는 매우 개인적이고 우울한 소재를 벗어나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의문입니다. 또한 캠페인 전체에 거치는 계획이나 구성을 짜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르스 마기카 같은 경우 트루프 플레이라는 기법을 통해 일행이 갈라지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정확히는 일행이 깨지는 대신구성이 변하는 것이지요. 이 규칙에서는 마법사가 가장 강하고 비중도 높습니다. 반면 마법사만 나온다면 단조로워지기 쉽죠. 따라서모든 참가자가 각각 셋 이상의 등장 인물 (마법사, 전문가,일꾼 3종)을 제작하고 상황에 따라 바꿔가면서 연기합니다. 예를 들어마법사의 집회 때는 참가자 전원이 자기 마법사를 연기하면 되지만, 한명의 마법사만 여행을 떠난다면? 이때는 다른 참가자들의전문가와 일꾼이 따라가면 됩니다.

이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일행이 갈라졌을 때의 지루함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봅니다. 반면 참가자가 한명의 주인공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인물을 바꿔가며 연기하는 것은 그다지 즐겁지 않을 수도 있으며, 바꿔치기하다 보면 진행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2.2. 일행이 갈라졌을 때의 규칙 외적 해결 방법

이제 일행이 갈라져도 (혹은 처음부터 없어도) 지루하지 않을만한 방법 중 규칙과 상관없이 사용할만한 것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아르스 마기카 (Ars Magica)식으로 한명의 참가자가 여러 명의 주인공을 제작하는 것은 규칙이라기보다는 기법이므로 아르스 마기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이는 인물의 힘이나 비중 등의 ‘급’이 다른 인물들을 모두 플레이할 수 있는 접근법이기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지금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참가자에게 주변 인물(NPC)을 주어서 연기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실제로 위에서 얘기한 아르스 마기카 트루프 플레이의 경우 가장 약하고 비중도 적은 일꾼은 진행자도 주변인물로 돌릴 수 있고 다른 참가자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경계가 흐릿한 유형입니다.

물론 참가자의 주변인물 연기는 인물의 성격이 갑자기 변한다든지 정보의 차이가 많이 난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시나리오에 기반한 진행일 경우에는 시나리오의 내용이나 주변 인물의 뒷이야기를 어느정도 참가자에게 알려줘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일행은 비록 RPG의 전통적인 요소이지만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며, 일행이 있더라도 다루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째 상당히 길어지긴 했지만..) RPG의 소재가 다양해진만큼 일행 개념도 좀더 다양하게 변해가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