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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적 RPG,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의 배경은 펨버튼이라는 가상의 유서깊은 미국 대학입니다. 주인공들은 이 펨버튼 대학의 교수로서, 이들이 1년의 기간에 걸친 여섯가지의 교내 행사 (입학식, 와인 파티 등) 동안 영향력과 명성을 두고 경쟁하는 내용이 게임의 초점입니다.

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존재가 제목에 나오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입니다. 이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기생해 조종하면서 고대 수메르 문명을 지배하던 벌레 일족의 생존자라는 설정입니다. 펨버튼 대학의 애플비-젠킨스 교수가 샤브 알-히리에 있는 유적에서 발견해서 새로운 바퀴벌레 종의 표본으로 미국으로 가져온 이 바퀴벌레는 다시 한번 인간 문명을 지배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 세계는 벌레가 익숙한 4000년 전 수메르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점. 가축처럼 다루면 되었던 고대 수메르 숙주보다 현대인의 정신은 훨씬 반항적이어서 좌절하고 있던 중, 펨버튼 교수들의 권력욕 넘치고 고루한 정신은 매우 익숙한 종류인지라 벌레는 기뻐하고 있지요.

이와 같이 공포와 풍자의 요소를 둘다 갖춘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다분히 RPG와 보드게임의 중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가자만 있을 뿐 진행자는 따로 없으며,  게임 속에서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명성 점수가 제일 높고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승자라는 승리조건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각 교내행사가 시작할 때마다 행동 카드를 뽑는 규칙도 보드게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행방법 자체는 장면 설정과 갈등 해소라는 RPG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요.

각 주인공은 정교수이거나 부교수입니다. 정교수는 학술이나 권력이 관련되었을 때 더 큰 주사위를 굴리고, 부교수는 실용적인 능력이 관련된 갈등에서 더 큰 주사위를 굴립니다. 각 주인공은 또한 한가지 전문분야와 두가지 열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인공 교수들간의 관계, 이름, 대략의 배경 등을 설정하면 시작할 준비가 끝납니다.

각 행사 때마다 모든 참가자는 돌아가면서 자기 주인공이 주역이 되는 장면을 하나 설정합니다. 각 장면은 갈등으로 끝나야 하며, 이 갈등에서 이길 경우 판정에 걸은 명성 점수 (1~5점)를 얻고, 질 경우 판정에 건 명성을 잃습니다. 다른 주인공들은 행동 카드와 이번 장면에서 주역인 참가자의 지정으로 장면에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선택적으로 장면에 참가해서 그 장면 주역의 편을 들거나 반대편을 들 수 있습니다. (주역이 아닌 인물은 갈등에 개입되어도 명성점수 1점만을 걸 수 있습니다.)

갈등해소에 개입하는 인물들은 관련 행동에 해당되는 크기의 주사위를 굴리고, 각 편의 주사위를 모두 합산해 높게 나온 편이 이기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 장면에 다른 주인공과 조연을 되도록 많이 끌어들여야 유리합니다. 이러한 조력자 중 최강은 단연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로, 판정에 d12를 더해줄 수 있는 존재는 이 벌레밖에 없죠.

주인공들은 언제든지 캠퍼스 내를 돌아다니는 바퀴벌레 (알주머니의 알도 깠기 때문에 여러 마리가 있습니다)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갈등 판정에서 추가 d12를 굴릴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벌레의 지배를 받게 되고, 행동 카드를 뽑을 때 그 행동 카드에 나오는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명령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어떤 방법이든 희생이 따릅니다. 열정을 한가지 희생해서 벌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행사 내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 명성 1점을 잃고 한단계 낮은 주사위를 굴릴 수도 있고, 애플비-젠킨스 교수처럼 자살할 수도 있는 겁니..(..)

명령이 정말 사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보통 행동 카드에는 기회와 명령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벌레의 지배를 받게 되는 카드도 10장 있습니다.) 기회도 명령도 다른 인물을 개입시킬 경우가 있는데,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인물은 행동 카드를 뽑고 어떤 기회인지 확인하고 나서 그 대상을 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벌레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카드를 뽑기 전에 그 명령의 대상을 미리 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명령은 대체로는 적대적이기 때문에 사이가 안좋은 인물을 고르면 되지요. 예를 들어

명령하노니 이 자를 모함하라.

라든지

너의 임무는 이 자를 너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다.

하는 식입니다. 문제는 그 명령이 우호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점. 예를 들어

말하노니 이 자는 이제 너의 동맹이다.

..같은 건 그래도 낫지만,

이 자에게 욕망을 느껴 교미하라.

..같은 카드가 나오면 술이 안 넘어갈래야 안 넘어갈 수가..(..)

이와 같이 규칙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틀로 작용하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간단하면서도 흥미로운 규칙입니다. 교수들이 서로 편가르고 배신하고 속이는 학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강력하지만 물정 모르는 벌레의 좌충우돌… 그 유쾌한 내용에 숨은 부조리 때문에 더욱 우스운 샤브 알-하리 바퀴벌레는 한편 웃고 한편 생각하며 즐겨보고 싶은 블랙 코미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