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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러 – 욕망과 오만의 비극, 혹은 희극

론 에드워즈의 소서러 RPG (Sorcerer RPG)는 포지 계열 인디 RPG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풍으로, 인디 RPG 중에서도 ‘포지’라는 특징적인 영역을 처음 확보한 책이기도 합니다. 제한된 장르와 주제의식만을 다루면서도 배경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든지, 인간과 도덕성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다든지, 비교적 단순하고 유연한 규칙으로 이를 구현한다든지… 포지가 발전하면서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규칙도 많이 생기게 되지만, 아직까지도 소서러 및 소서러의 영향을 받은 RPG들은 가장 특징적인 포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소서러는 제목 그대로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흔히 떠오르는 판타지의 마법사보다는 좀더 어둡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마법력을 가지고 이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계약해서 악마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얘기해 두자면 악마라고 해도 반드시 지옥과 사탄 같은 기독교적 개념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소서러에서는 악마의 성격을 각 캠페인마다 정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의 무의식이 실체화된 것일 수도 있고, 원혼일 수도 있고, 과거 사건의 잔영일 수도 있고, 지옥에서 나온 악마일 수도 있고, 지성을 가진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습니다.

악마가 순수하게 악한 존재일 필요가 없듯 소서러 역시 반드시 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참가자가 공감할만한 인간적인 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주인공 제작에서 가장 강조되는 점 중 하나죠.

소서러를 규정하는 최대의 특징은 악이 아니라 욕망과 오만입니다. 모든 소서러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염원이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강력한 존재와 계약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존재와 거래하는 유혹과 위험을 자신은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사회법규와 자연법칙을 어겨가며 악마와 계약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강하고 제멋대로인 인간상이라는 면에서 WoD 쪽의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특히 메이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소서러의 악마들은 현실의 법칙에 늘 저항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눈에 띄는 행동을 거부한다는 점도 메이지와 비슷한 면이 있고요. 어쩌면 소서러도 WoD의 영향을 받았거나 WoD와 공통된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소서러 자신과 마찬가지도 악마도 반드시 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소서러처럼 악마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서러를 통해 그 욕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힘을 빌려주는 것이지요. 살인이나 폭력, 흡혈처럼 반사회적인 욕구를 가진 것이 가장 고전적인 악마겠지만 시사지식이나 이성과의 데이트처럼 도덕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욕구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소서러가 악하든 악하지 않든, 악마가 악하든 악하지 않든 이 계약 상황은 근본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소서러에서 마법은 이성적인 법칙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진 다른 존재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소서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구가 있고,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소서러에게 힘을 부여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이렇게 엇갈리는 욕망과 악마가 가진 커다란 힘 사이에서 계약상황은 점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욕과 끝없는 위험, 사회적 파탄의 연속이 되기 쉽습니다.

권력은 타락한다고 했던가요. 소서러는 권력과 권력욕에 대한 RPG이며,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대한 RPG이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얼마만큼 희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지. 그것이 바로 소서러의 이야기입니다.

(위의 얘기가 전에 쓴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감상글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끼신다면, 그 느낌은 정확합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실제로 소서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소서러 서플먼트로 만들 생각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소서러를 뒤집은 반대편의 이야기가 포도원의 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칙상으로 두 RPG는 전혀 다르지만 주제의식 면에서 상당한 접점들이 보이죠. 실제로 포도원의 개들에 보면 악마의 힘을 빌리는 ‘소서러’라는 존재들이 적으로 나와서 재밌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지원하기 위해 소서러에서는 악마를 다루고 활용하는 규칙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인간성 규칙을 통해 주인공의 도덕성이 타락하거나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솔직히 규칙 면에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좀 복잡하거든요. 능력치도 많지 않고 기본 주사위 굴림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규칙이 조금씩 달라서 한번 읽어본 것만으로는 잘 파악이 안됩니다. 또 전투 규칙이 너무 자세하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들고… 뭐,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정리해봐야겠지만요. 확실히 규칙 깔끔한 것은 소서러보다는 후기의 포지 RPG들이 훨씬 낫습니다.

위에서 포도원의 개들 얘기도 했지만, 포도원이 아니어도 이후 인디 RPG에 소서러가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무엇보다 확고한 주제의식과 초점이 확실한 이야기의 지원, 인간 감정과 도덕성에 대한 초점 등 포지 RPG의 특징을 처음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소서러의 주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포도원의 개들, 소서러의 주사위 굴림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던전 (Donjon), 인간성과 자기혐오 규칙으로 구원과 저주를 다룬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 (주인님과 주인공들의 관계는 소서러와 악마의 관계와 꽤 유사하기도 합니다), 열정을 잃고 피로가 늘면서 비극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는 폴라리스 (Polaris) 등등 많은 규칙들에서 소서러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포지 RPG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소서러에 대해 역사적, 계보적 흥미가 더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서러가 과거의 유물이라거나 하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최근에만 해도 또다른 서플먼트인 ‘무의 사전’이 나와서 호평을 받고 있고 말이죠. 설사 소서러 자체가 언젠가는 잊혀진다 하더라도 다루고 있는 주제의식, 곧 욕망과 권력의 관계는 결코 그 중요성과 현재성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