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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폴라리스 순서도

어제 폴라리스 단편을 플레이한 승한군이 의식어 순서도에 대한 지적을 해서 살짝 고쳐보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에서 나오는 화살표가 없어서 마치 그걸로 갈등이 끝나는 것 같다는 얘기가 있었죠. 처음에는 순서도에 나오는 의식어 순서를 바꾸려고 했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그냥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에서 화살표를 내는 걸로 끝냈습니다. 언제나처럼 글리피는 유용한 도구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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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단편: 잔인한 봄

정기 플레이 대신 승한군과 제노님과 한 폴라리스 (Polaris) 단편입니다. 뭔가 폴라리스 할 때마다 도시가 하나씩 무너진다는 느낌이..(…)

요약

두 별빛의 기사 안타레스와 뮬리파인. 안타레스는 악마가 씌운 여동생을 살해하고 이후 악마와 싸우다가 씌워서 의원을 죽인 후 도망자가 되고, 뮬리파인은 연적의 음모에 휘말려서 살인자이자 악마 내통자의 누명을 쓴 채 탈옥합니다.

전설의 타락 기사 알골의 현신인 안타레스는 솔라리스 경에게 솔라리스의 인을 받고 악마를 조종할 힘을 얻고, 이 힘을 이용해 스스로 악역이 되어 뮬리파인을 기사단에 복귀시킵니다. 그러나 안타레스는 솔라리스의 속임수에 걸려 새로운 솔라리스 경이 되고, 뮬리파인은 다시 기사가 되어 둘은 적이 됩니다.

플레이 내용

별빛의 기사인 뮬리파인은 대모이자 사우스마치 의원인 나오스가 별빛 기사단의 해체를 주장하자 곤란한 위치에 놓입니다. 거기다가 약혼녀 데비까지 동조하자 더더욱. 그러나 데비는 사실 기사단의 해체보다는 뮬리파인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을 그는 알게 되고, 그가 기사단에서 나오기로 약속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마음을 확인합니다.

한편, 악마에게서 창 사르가스를 빼앗은 별빛의 기사 안타레스는 여동생 메로페가 악마에게 씌운 것을 알게 되고, 메로페에게 씌운 악마가 안타레스의 부하이자 메로페를 사랑하는 기사인 타비트를 죽이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타비트의 눈앞에서 메로페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전설의 타락 기사 알골의 현신인 안타레스의 힘으로 메로페의 영혼은 오빠 곁에 남게 됩니다.

별빛 기사단의 해체를 역설하는 나오스에게 안타레스는 악마들이 활동하는 봄에 시찰하시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그때까지 결정을 늦추기로 나오스는 동의합니다. 봄이 오자 정찰을 나간 안타레스는 사르가스의 원 주인이었던 악마와 마주치고, 악마와 싸우다가 한쪽 눈을 빼앗기지만 악마를 마침내 소멸시키는 데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순간 악마에게 혼을 빼앗긴 그는 시찰을 나온 나오스를 살해하고 얼음의 황야로 도망칩니다.

도망자가 된 안타레스 대신 뮬리파인은 최전선으로 나서고, 그 와중에 부하 둘이 뮬리파인의 약혼녀 데비를 탐내는 알비레오의 사주를 받아 뮬리파인을 살해하려 합니다. 뮬리파인은 암살자를 살해하지만, 그 모습을 본 기사들에게 붙잡혀 옥에 갇힙니다. 한편 알비레오는 뮬리파인에게 있던 아버지의 유품인 ‘크럭스’라는 보석이 악마들과 내통한 증거라고 누명을 씌우지요. 그러나 뮬리파인은 데비의 도움으로 탈옥해 안타레스와 합류합니다.

뮬리파인과 함께 행동하게 된 밤, 안타레스는 솔라리스 경에 나오는 꿈을 꿉니다. 안타레스와 타락 기사 알골과 똑같은 얼굴을 한 솔라리스 경은 안타레스에게 악마들을 제어할 수 있는 솔라리스의 인을 건네고, 아침에 깨어난 안타레스의 손가락에는 그 반지가 끼워져 있습니다. (제노님: “마이 푸레셔스~!”) 뮬리파인은 반지의 힘으로 알비레오를 실각시킨 후 악마들을 돌려보내자고 하지만 안타레스는 거부합니다.

그때 도시에서 기사들이 두 사람을 잡으러 나타나고, 기사들 중에 있던 타비트는 더 이상 알비레오의 전횡을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해서 옛 상관 안타레스 편에 섭니다. 이에 기사들은 타비트를 죽이려고 하지만 안타레스가 악마의 창으로 막아서고, 그 모습에 악마들이 달려들어 기사들을 살해합니다. 반지로 이들을 물린 안타레스는 스스로 남은 기사들을 몰살시키지요.

뮬리파인과 타비트라도 도시에 돌아갈 수 있게 하려고 안타레스는 악역을 자처합니다. 그는 두 사람을 도시로 돌려보내고, 이틀 후 새벽에 악마들의 기습에 대비하라고 하지요. 알비레오 앞으로 끌려간 뮬리파인은 악마들의 기습을 경고하지만 알비레오는 듣지 않고, 데비는 알비레오가 뮬리파인에게 빼앗은 보석의 힘으로 알비레오에게 홀려 있습니다. 그때 뮬리파인은 알비레오의 눈빛에서 그에게 깃든 악마를 알아보고 그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데비는 정신을 홀리고 있던 크럭스의 힘이 갑자기 사라지자 실성하고 맙니다.

다음날, 안타레스는 악마들을 이끌고 사우스마치 주변에 잠복하고 있다가 도시에 잠입해 옛 저택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가보인 한 쌍의 반지를 메로페와 타비트를 위해 꺼내오지요. 하지만 도시에서 나온 척후를 붙잡았는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공격이 시작하고, 솔라리스의 인이 성내로 들어왔기에 솔라리스 경 성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솔라리스 경은 괴물들을 소환해 내부에서 도시를 공격합니다.

이때 타비트를 비롯한 기사들이 도착하고, 타비트는 솔라리스를 공격했다가 단칼에 죽습니다. 솔라리스를 베어버린 안타레스는 어느새 스스로 솔라리스 경으로 변하고 (맞나요? 기억이 약간..), 타비트 역시 그의 악마 부하로서 되살아납니다. 뮬리파인을 비롯한 기사단의 생존자들은 저항을 계속하려고 사우스마치에서 도피하고, 새로운 솔라리스 경이 된 안타레스는 동생 메로페의 영혼과 되살아난 타비트에게 반지를 건네며 축복합니다.

감상

예, 막장이 아니면 폴라리스가 아니겠죠. 승한군 말마따나 끝까지 솔라리스 경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안타레스는 결국 비극적으로 타락했고, 그 힘의 유혹을 느꼈던 뮬리파인은 저항군을 이끌게 된 역설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메로페와 타비트의 비극적인 사랑은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하려요.

폴라리스 판정은 처음에 좀 정리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마음과 후회가 밀고 당기며 극단적인 이야기 진행을 이끄는 강점은 여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기사들이 뮬리파인과 안타레스를 쫓아온 부분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판정의 결과였습니다.

후회 (승한군): 타비트가 옛 상관 안타레스에게 돌아선 것을 보고 분노한 기사들은 습격을 하고, 그 와중에 타비트가 살해당한다!
마음 (제노시아님):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악마의 창 사르가스’ 면모로 안타레스의 ‘축복’ 주제를 소모해서 창으로 기사들을 막아선다.
달 (로키): 주제 소진 인정하죠.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가 나왔고 안타레스의 주제도 소진했으므로 이제 후회는 방금 전 서술과는 전혀 다른 서술을 제시해야 합니다.)

후회: 기사들을 안타레스가 사르가스로 막아내는 모습을 보고, 곁에서 도사리고 있던 악마들이 일제히 돌진해 기사들을 죽인다.
마음: 그리고 또한 다 죽이기 전에 안타레스가 악마들을 물리고 남은 기사들을 스스로 몰살시켜야 한다. ‘알골의 현신’ 면모로 안타레스의 ‘운명’ 주제 소진합니다.
달: 예, 주제 적합하네요.

(여기서 그리고 또한 대신에 주제를 소진하지 않는 그러나 그러려면을 사용해도 상대의 마지막 서술을 인정하고 자신의 서술을 덧붙인다는 점은 같습니다. 하지만 후자 쪽은 주제를 소진하지 않는 만큼 효과가 좀 더 약합니다.)

후회: 그리 되었더라.

이렇게 마음은 주인공 기사를 위해, 후회는 기사의 이익에 반해 철저하게 자기 입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는 밀고 당김 속에서 굉장히 파국이 많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쉽게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이 판정 방식은 비극을 지향하는 폴라리스의 방향성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제노시아님과 승한군이 둘다 좋은 이야기 방향을 많이 생각해 내셔서 줄거리도 전반적으로 좋았습니다. 스스로 악당이 되면서 부하와 동료를 복귀시키려는 안타레스의 비극적인 모습이 잘 살았던 것 같아요. 안타레스를 정말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비참의 극으로 몰고간 승한군의 악마성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그에 비해 뮬리파인의 이야기는 초점이 덜 확실했던 것 같아서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알비레오라는 좋은 악역이 생긴 후에는 만족스럽게 막장으로 흘러간 걸로 봐서 역시 좋은 적수가 긴장감 있는 진행에는 필수인 것 같습니다.

아쉬웠던 점이라면 기사의 열정과 피로 수치와 실제 이야기 진행이 반드시 맞아떨어지지는 않아서 때로 규칙이 이야기를 오히려 제약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막장에 막장으로 흘러가는데 아직 피로는 없고 열정은 2 남아있어서 규칙상으로는 아직 죽거나 타락할 수 없던 것은 좀 답답했죠. 그래서 결국 시간관계와 이야기 흐름상 안타레스는 아직 열정이 남은 상태에서 타락시켰습니다.

플레이 후의 승한군 제안대로 경험이 나올 때마다 (기사가 잔인하거나 냉소적인 언행을 했을 때 경험을 굴림) 경험을 굴리는 대신 열정을 무조건 깎거나 피로를 올리고 소진한 주제도 초기화하면 좀 더 진행 속도와 열정-피로 진행을 맞출 수 있을지도요. 폴라리스 부록에 나온 변형 규칙으로는 경험을 굴릴 때 3 이하면 무조건 성장, 4 이상이면 무조건 주제 초기화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도 여전히 확률을 타니까 승한군 제안 쪽이 속도감 면에서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주 재밌게 한 비극 플레이였습니다. 폴라리스는 비극적인 서사시에 딱 좋은, 다른 배경으로도 해보고 싶은 규칙입니다. 좋은 플레이 보여주신 제노님과 승한군에게 감사합니다.

[폴라리스] 톨스타 멸망기

2월 2일에는 난생 처음으로 TRPG를 해보았습니다. ORPG가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하는 RPG는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죠. 사용한 규칙은 폴라리스 (Polaris)였습니다. 플레이하다 보니 배경 설정에 나온 도시 톨스타 (Tallstar)가 그만 망해버리더군요 (?).

요약

이야기는 네 젊은 기사와 그들의 얽히고 섥힌 운명이 폴라리스 멸망 이후 첫 왕의 즉위와 톨스타 함락으로 이어지는 게 큰 줄기입니다. 플레이 전에 딱히 계획한 건 아닌데 플레이하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생겨나는 게 재밌었죠.

1부: 여름의 어긋남

마이자르의 약혼녀 루크바는 황야에서 악마 에츨리오텍에게 심한 부상을 입고 마이자르에게 구출받아 톨스타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녀를 치료하던 치유사 카시오페이아에게 씌웠던 질병의 악마 케 쿠안이 루크바에게 숨어들고, 루크바는 치유원에서 탈출합니다. 톨스타에는 케 쿠안의 영향으로 전염병이 번집니다.

한편, 별빛 기사단의 수장이며 명망높은 기사인 엘 타닌은 스스로 왕이 되어 민족을 단합시킬 계획을 그의 연인 카리나에게 털어놓으며 지지를 호소합니다. 카리나는 그녀의 스승 알 나이르가 엘 타닌을 믿지 말라고 한 경고를 떠올리고 ‘진실의 노래’로 그의 마음을 떠보지만, 엘 타닌은 카리나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의 타락의 시작점이 됩니다.

또 다른 기사 미카르는 의원인 아버지와 엘 타닌의 야심을 저지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다가 문밖에 인기척을 느낍니다. 문을 벌컥 열자 문밖에서 엿듣는 것은 엘 타닌의 심복 엘사피. 엘사피는 상관에게 알리려고 도망치지만, 미카르는 그를 따라잡아 골목길에서 살해합니다. 이 모습을 그의 친구 엘 스트롬멜이 보게 됩니다.

마이자르는 도시를 배회하며 질병을 퍼뜨리는 약혼녀 루크바를 붙잡아 다시 치료소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이 모습을 본 엘 스트롬멜이 그를 파렴치한으로 오인하고 (열병의 신인 케 쿠안에게 씌운 루크바는 옷을 다 벗어던진 상태라..) 저지하려 합니다. 마이자르는 엘 스트롬멜에게 쉽게 이기지만, 모두의 주의가 결투에 쏠린 동안 엘 스트롬멜의 친구 미카르는 엘사피의 시체를 숨깁니다.

2부: 가을의 사냥

카리나는 친구이며 엘 타닌의 전처인 치유사 카시오페이아의 부탁으로 도시에 도는 병을 치료할 약초를 찾으러 떠납니다. 약초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루크바에게 부상을 입혔던 악마 에츨리오텍과 마주치고, 결투 끝에 에츨리오텍의 목을 벱니다. 그러나 에츨리오텍의 피가 스민 약초에 부정한 기운이 서린 것은 모른 채 약초를 카시오페이아에게 전달합니다.

마이자르는 옛 연인 아트리아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사이, 카리나가 가져온 약초를 먹고 나은 약혼녀 루크바에게 유혹당해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러나 루크바는 이제는 케 쿠안이 아닌 에츨리오텍에게 씌워 있었죠. 이 일로 루크바는 임신하고, 마이자르는 루크바와 강제로 결혼하게 됩니다. 아트리아 역시 임신했지만 그녀는 마이자르를 위해 아이 아버지가 마이자르가 아니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마이자르는 아내에게 큰 관심이 없이 아트리아와 관계를 유지합니다.

한편, 젊은 기사 아딜은 친 엘 타닌파 상원의원인 어머니 키에트의 부탁을 받고 엘 타닌에게 반대하는 기사 엘 스트롬멜을 엘 타닌 편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둘은 깊은 관계가 됩니다. 자신의 살인 사실을 아는 엘 스트롬멜이 정치적 적수의 딸과 사귀는 것을 불안해한 마이자르는 키에트 의원이 딸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키에트를 유혹해 모녀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영화 졸업생이 떠오르는 건 저만은 아니겠지요..(…))

엘 스트롬멜은 갈등하다가 결국 아딜에게 마이자르 미카르의 살인 사실을 알립니다. 엘사피의 시체를 찾아낸 아딜은 원로 기사인 아버지 에스미디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에스미디케는 엘사피의 죽음에 대해 정보를 캐고 다닙니다.

카시오페이아가 약초로 치료한 사람들이 에츨리오텍에 씌우는 일이 생기자 카시오페이아는 악마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 카리나는 법정에서 뛰어난 말솜씨로 카시오페이아는 무죄라고 재판관을 설득하나 몇몇 별빛의 기사가 끝내 납득하지 않고 무죄판결을 받은 카시오페이아를 직접 제거하려고 합니다. 카리나는 이들을 막아내나, 실수로 몇 명을 죽이고 이 일로 엘 타닌의 분노를 삽니다.

3부: 겨울의 피

카리나는 스승이며 루크바의 아버지인 알 나이르의 부탁으로 루크바를 보러 갔다가 그녀에게 씌운 에츨리오텍의 존재를 간파하고, 에츨리오텍이 뱃속의 아기에게 옮겨붙자 별빛의 검으로 즉석 낙태를..(..) 기사단의 법도를 어긴 잔혹 행위로 카리나는 기사직을 잃고 도시에서 추방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마이자르는 장인에게 악감정을 품고 엘 타닌에게 돌아섭니다.

아딜과 그녀의 아버지 에스미디케가 자신의 죄목을 캐고 다니자 초조해진 미카르는 결국 아버지의 적인 엘 타닌과 거래를 해서 에스미디케를 무고한 혐의로 체포시킵니다. 아딜은 연인 엘 스트롬멜과 함께 아버지를 탈출시키려고 하나 엘 타닌의 부하들에게 체포당해 감옥에 갇힙니다. 명예높은 기사들의 감금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톨스타 내에 폭동을 일으키고, 엘 타닌은 기사단장으로서 계엄 권한을 요구합니다.

상원이 계엄령을 승인하지 않자 엘 타닌은 민족을 위하려면 부패한 의원들을 척결해야 한다며 기사들을 규합해 상원을 습격합니다. 돌격대의 선두를 맡은 마이자르는 상원을 지키려는 장인과 맞서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아내 루크바가 막아서서 결국 처와 장인을 둘 다 죽이고 맙니다. 상원을 점거하고 의회를 해산한 엘 타닌은 왕위에 오릅니다. (이건 스타워즈 3, 혹은 좀 더 가까운 우주의 좀 더 가까운 과거이려나요)

4부: 봄의 파국

봄에 악마들이 톨스타를 공격해 오자 감옥에 갖힌 에스미디케, 아딜 부녀와 엘 스트롬멜은 최전선에서 싸울 수 있게 풀어주겠다는 제의를 받습니다. 엘 타닌 왕에게는 반대하지만 도시를 지키려고 그들은 출전하고,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워 악마들을 톨스타에서 몰아낸 후 전사합니다.

엘 타닌은 후퇴하는 악마들을 추격해 몰살할 것을 기사단에 명령합니다. 그러나 기사들을 독려해 ‘후회’에 몰아넣고 물러서는 엘 타닌을 보고 미카르는 기사단을 몰살시키려는 음모임을 깨닫고 엘 타닌을 공격합니다. 싸움 끝에 엘 타닌은 ‘후회’의 입구에 떨어지지만 악마의 수장, 태양처럼 타는 왕관을 투구 위에 쓴 솔라리스 왕이 되어 다시 나타납니다.

한편 마이자르 역시 엘 타닌의 음모를 깨닫고 무방비 상태가 된 톨스타에 있는 연인 아트리아를 구하려고 달려갑니다. 아트리아를 말에 태워 탈출하던 중 악마의 습격을 받아 아트리아는 살해당하고, 마이자르는 그녀의 태에 있던 아이만 간신히 살려 이제 악마가 완전히 점령한 톨스타를 피해 황야로 피합니다. 그러나 얼음 처녀와 마주쳐 그녀의 입맞춤에 조용히 숨이 멎습니다.

추방 이후 혼자 황야를 헤매던 카리나는 마이자르의 얼어붙은 시체와 그 품안에 우는 조그만 갓난아기를 발견합니다. 자신이 죽였던 아이의 이복 동생을 그녀는 사우스와치 시에 데려다준 후 이제 솔라리스 왕이 된 엘 타닌이 점령한 톨스타로 향합니다. 성벽 위에 뛰어오른 그녀는 엘 타닌과 전투 끝에 그를 살해하는 데 성공하지만, 부정한 피를 뒤집어쓰고 타락해 악마가 됩니다.

감상

예, 막장에 또 막장입니다. (..) 정말 재밌었어요. 플레이 내용은 쉴새없이 땅을 파고들었지만 참가자들은 굉장히 즐거워했습니다. 특히 주인공을 위해 교섭하는 ‘마음’과 주인공의 시련을 위해 교섭하는 ‘후회’의 밀고 당기는 긴장과 경쟁은 인물 엿먹이기에 비극적 재미를 끌어내기에 정말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죠.

마이자르의 마음: 죽은 아이에 대한 원한으로 엘 타닌에게 돌아선 마이자르는 돌격대의 선두에서 상원 점거를 성공시킨다!
마이자르의 후회: 그러나 그러려면 그의 장인 알 나이르가 막아서야 한다.
마음: 그러나 그러려면 마이자르가 알 나이르에게 이겨야 한다.
후회: 그러나 그러려면 루크바가 그 순간 뛰어들어 장인과 아내 둘 다 죽여야 한다!
전원: (순간 침묵) 우와, 정말? (폭소)
마음: 그리 되었더라.

얼굴을 맞대고 플레이하는 것은 확실히 채팅 플레이, 심지어는 음성 플레이하고도 다르더군요. 같은 공간에 모여 서로 표정과 반응을 보면서 일어나는 상승효과가 상당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저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굉장히 마음이 잘 맞았고, 분위기도 좋았고요. 웃고 떠들고 간식 먹고, 인물들에게 무슨 짓을 할까 궁리하면서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TRPG라서 느낀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역시 빠르더군요..(…) 저게 3시간 반 정도 플레이한 건데, 같은 시간 동안 한 채팅 플레이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분량이 많았습니다. 쑥스러워서 못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T(elephone)RPG 예행 연습을 해서 그런가(??) 괜찮더라고요. 나중에는 칼을 들어 휘두르는 시늉까지 하면서 어이 너 서른 살 맞냐 신나게 놀았습니다. 반면 채팅 플레이 같은 정교한 맛은 덜해서 확실히 서로 다른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 예정이나 플레이 전에 짠 계획 없이, 심지어 인물 제작도 플레이 시작할 때 했는데 플레이하면서 저렇게 얽히고 섥히는 얘기가 나온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것도 개개 인물은 특별한 악의 없이 그냥 자기 욕망이나 신념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 그게 하나하나 쌓여 결국 도시의 멸망이라는 파국으로 간 점이 아주 비극에 어울리는 전개였습니다. 아마 일행 단위로는 나오기 어려웠을 얘기라는 점에서 일행 개념에서 벗어난 놀이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인연과 사건의 긴밀한 연계는 공동 서술의 의의를 잘 살렸죠.

어쨌든 결과적으로 참 즐거운 오후였습니다. 드디어 폴라리스를 다시 잡아봤어 엉엉 초대해 주고 주최측으로 고생한 제프와 모나, 그리고 같이 플레이한 패티와 숀 부부에게도 감사해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플레이하는 중 모나가 집에 돌아왔을 때 대화가 잊허지지 않는군요.

제프: (문을 열어주며) 여보 나 여자 두 명 임신시켰어. 여자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억지로 결혼해.
모나: 음, 그랬어? 에익 나도 폴라리스 플레이하고 싶었는데!

다음에는 꼭 플레이할 수 있길..(…)

별이 지다 1화 –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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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위험한 사랑의 상상은 날 위안한다
결국은 허무하게
모래처럼 날려 사라질
소진할 열정의 달콤한 폭주

차갑고 농밀한 나의 열정이
내 눈 먼 영혼을 잠식하면
뜨겁고 농염한 죄의 입맞춤
타락의 나락, 그 황홀

–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김윤아 노래)

요약

젊은 요정 군주 레드리스는 요정들의 성소인 아르베스 숲에서 황녀 아르테미시온과 깊어가는 감정을 느끼지만, 다음 황제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면서 아르테미시온은 곧 죽을 운명이 됩니다.(주:엔님의 세상을 바꾼 사랑 참조) 레드리스의 사촌형 나이라하는 아르테미시온과 연을 끊으라고 레드리스에게 경고하고, 레드리스는 자신의 마음 때문에 갈등합니다.

요정 기사 핀웰은 제국에 대한 반란군을 색출하러 와일드 헌트를 이끌고 요정 기사들과 함께 한 인간 마을을 살육합니다. 핀웰의 인간 부하인 요르문트는 학살에 경악하고, 몰래 인간 어머니와 어린아이를 탈출시켜주다가 발각당합니다. 핀웰은 요르문트의 간청대로 그들을 살려주는 대신 요르문트에게 미래에 자신의 요구 세 가지를 들을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레드리스의 대녀 스즈는 오라비 렌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가 이를 알게 된 전 약혼자 세이야가 렌을 눈앞에서 살해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레드리스는 때마침 난입(!)해 세이야가 스즈마저 죽이는 것을 막고, 렌의 죽음은 병사로 처리하고 시체는 화장하도록 지시합니다. 스즈는 렌과 사랑을 속삭이던 이니스 강변으로 혼자 떠납니다.

다시 레드리스와 핀웰의 시간대로 돌아와서, 아르베스 숲과 주변 마을의 요정 수호자인 펜나르는 인근 마을 사람 자비에르의 다급한 애원으로 ‘꽃의 귀부인’이라는 요정이 여신을 위한 제물로 납치해간 자비에르의 아들을 구출하러 달려갑니다. 펜나르는 오래 전에 사랑하는 사이였던 꽃의 귀부인에게 아이를 되찾으려고 분투하지만 결국 그녀의 환술과 자신의 마음에 지고 맙니다. 꽃의 귀부인이 자비에르를 조종해 아들의 목을 졸라 죽이게 하는 동안 펜나르는 자비에르의 절규와 죽어가는 아이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꽃의 귀부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감상

정말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첫 플레이였습니다. (…) 공통적인 평가는 일단 ‘재밌었다’입니다. 상당히 감정적으로 몰입도 되고, 장면들도 짤막짤막하지만 극적이고요. 아무도 혼자서는 생각해낼 수 없었을 서술이 4인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긴장 속에서 나오는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전통적인 진행자 중심 구조에서는 사실 자기 주인공이 등장하는 차례가 아니면 참가자의 완전한 관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반면, 폴라리스처럼 권한 분산형 플레이에서는 자기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이 아니어도 각자 역할이 있으므로 장면 하나하나마다 굉장히 관심도가 높았습니다. 마음 (주인공 조종)보다 달그늘 (주인공의 적과 시련 조종)이 더 재밌었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진행자 중심 구조는 일행 개념과도 직결되는데, 폴라리스에서는 일행 개념을 파괴해서 집단 모험 형식으로는 하기 어려운 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개개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는 장면들 진행하면서 일행을 유지하기는 좀 어려우니까요. 일행 구조를 벗어나고 나니 내밀한 감정과 인간관계, 성적 영역을 다루는 등 이야기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일행이 있으면 아무래도 모두의 모험이 초점이 되지 개별 주인공의 감정과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기는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에 중요했던 요인은 물론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참가자 4인이 서로 친하고, 호흡도 잘 맞고, 감각도 있고, 배경과 인물에 대해 관심이 깊은 점이 재미의 원동력이었겠죠. 규칙이나 구조는 그런 능력과 관계를 보조해주는 도구였고요.

레드리스 장면은 아무래도 처음이었던 만큼 규칙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인물의 행동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까지 서술한다는, 다른 RPG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 익숙해져야 하기도 했고, 또 서술권의 경계를 확고히 하는 등 준비체조 성격이 강했죠. 그러는 동안에도 뱀프님의 훌륭한 묘사라든지 젊고 순수한 레드리스의 감정 표현, 국가의 건설 캠페인 때부터 비련의 주인공으로 관심을 모았던 아르테미시온의 아련한 슬픔이 깔린 천진함 등이 와닿더군요.

핀웰 장면은 이제 좀 더 폴라리스의 규칙과 구조에 익숙해지면서 4인이 밀고 당기는 극적 긴장이 더욱 극명하게 살아났습니다. 와일드 헌트의 섬뜩한 아름다움, 요르문트에 대한 핀웰의 집착 등 요정의 어두운 면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죠. 네 명이서 각자 다른 역할로 척척 손발이 맞는 점도 멋졌고요.

스즈 장면은 결과가 대체로 정해진 것이라 자유도는 좀 제약이 있었지만 감정의 깊이는 상당했습니다. 스즈의 복잡한 심리라든지 세이야의 광기, 아르테미시온의 죽음 이후 사람이 달라진 레드리스의 이중인격(..) 등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인연과 감정이 짧은 장면에도 잘 나타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스즈를 괴롭혀줄 일이 기대됩니..(퍽)

펜나르 장면은… 펜나르는 선량한 녀석이었는데! ;ㅁ; 역시 폴라리스에는 그딴 거 없다는 걸 절감했어요..(…) 자비에르 아들은 죽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역시 자유도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펜나르를 위해 최선을 다해 교섭했습니다. 폴라리스의 극적 긴장은 각자 자기편을 위해 서술을 힘껏 끌고가는 데서 나오니까요. 정해진 역사에서 벗어나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되면 또 어떤 게 나올지 기대되네요.

그래도 결국 펜나르가 자기 마음에 진다는 건 아이가 죽는다는 결과에 부합하기도 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카라에 대한 마음 사이에 있는 갈등도 표현하니까 적당한 데서 항복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멋진 장면이었으니까요! 자비에르를 조종해 애를 죽인다는 엔님의 발상도 압권이었고요. ㅡㅡd

정말 즐거운 플레이였고, 함께해주신 세 분께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도 재밌게 플레이해요~

태양의 마지막 빛 – 요정

캐나다 작가 가이 가브리엘 케이 (Guy Gavriel Kay) 작품 ‘태양의 마지막 빛 (The Last Light of the Sun)’에 요정이 나오길래 해당 대목을 옮겨봅니다. 이번에 하는 폴라리스 플레이 ‘별이 지다’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배경은 우리 세계의 중세의 웨일즈 비슷한 땅입니다. 이야기 속의 알룬은 바이킹을 모티프로 한 에를링 족 약탈에서 방금 형을 잃고 그 잔당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숲에서 빠져나온 알룬은 공터로 나왔다. 그가 추격하는 기수가 숲속의 못을 돌아 남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말없는 고함과 함께 그는 에를링족이 타고 왔던 말을 얕은 못으로 몰았다. 못을 바로 가로질러 상대를 가로막으러.

그 순간 말이 갑자기 멈추자 알룬은 낙마를 간신히 면했다.

말은 겁에 질려 히힝거리며 앞발을 들어 공중에 휘저었다. 그리고는 도로 앞발을 내리고는 제자리에 굳었다. 마치 뿌리박혀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비는 그 반응을 더욱 과장한다. 어떤 사람은 겁에 질려 모든 것을 부인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품어온 꿈이 현실이 되는 기쁨에 몸을 떨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취했거나 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본질에 대한 깊은 신념을 삶의 기반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특히 이러한 순간에 취약하다. 예외도 있지만.

그날 밤 오윈의 둘째 아들이 그랬듯이 이미 삶이 조각조각 부서진 채 상처처럼 노출되고 약한 상태인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한 그의 이해가 틀렸다는 확인을 오히려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한결같지 않으며, 삶에 대한 반응도 한결같지 않으니까. 이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는 순간이 있다.

말이 뒷발로 섰을 때 알룬은 발이 등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말갈기를 붙잡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말의 앞발이 첨벙거리며 연못을 다시 쳤을 때야 간신히 자세를 안정시켰다. 칼이 얕은 물에 빠지자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몰려고 했지만,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이 들려왔다. 알룬은 고개를 돌렸다.

있을 수 없는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오름처럼 창백한, 그러나 오늘은 달이 없는 밤. 다가오면서 음악소리는 커졌고, 연못의 수면 위에 걷고 말을 몰며 지나가는 그 밝은 행렬이 알룬 아브 오윈 앞을 지나갔다. 빛은 그들 주변에, 그들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밤의,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순간 변했다. 그 은빛을 내는 존재는 요정이었으며 알룬의 눈에는 그들이 ‘보였’기에.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요정이 여전히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의 신앙에 따르면 자드(주:이 세계에서 기독교의 신에 해당하는 존재)께 저주받은 이 악마들에게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했다. 동시에 춤추며 지나가는 행렬 한가운데 가마에 앉은 키 크고 날씬한 여인, 하얀 옷과 순백의 피부, 밝아오는 은빛 광휘 속에 쉴새없이 머리색이 변하는 그녀에게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두 감정 사이에 그는 마치 그물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해왔다. 음악은 점점 커지며 그의 심장박동처럼 높아만 갔다. 숨을 쉬라고 자신에게 되뇌어야 했다.

악령이라면 철로 물러나게 할 수 있으리라. 옛이야기에 따르면 그랬다. 그러나 검은 이미 떨어떠린 후였다. 태양의 표식(주:태양신인 자드의 숭배자들이 그리는 성호)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은 고삐를 잡은 채, 말은 못의 얕은 기슭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둘은 숨쉬는 석상처럼 행렬을 지켜보았다. 달 없는 숲 깊은 곳에서 혼백의 빛에 힘입어 알룬은 처음으로 그가 탄 에를링 말의 안장 천에 이교도의 망치 상징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여왕을 다시 보며–잔잔한 수면을 건너는 저 빛나는 존재, 희망이나 추억만큼 아름다운 그녀가 여왕이 아니면 누구겠는가?–알룬은 누군가 그녀와 나란히 말을 모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갈기에 방울과 리본을 엮은 채 걸음걸이 경쾌한 작은 암말에 탄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알룬은 가슴을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거기까진 할 수 있었다–소리를 지르려 했다. 손이든 발이든 움직이려고, 말에서 내려 달려가려고.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그는 굳은 말 위에 굳어 앉아 형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변했으되 전혀 변하지 않은, 마당에 죽어 쓰러져 있는데 여기서 밤의 연못 위로 말을 몰며, 알룬을 보거나 듣지 못하는 형은 한 손을 뻗어 요정 여왕의 새하얗고 섬세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들은 별빛 아래 못이 있는 공터로 나와 일제히 말없이 멈추었다. 순간 말들조차 침묵했다.

사제 케이니온 옆에 있는 사내가 태양의 표식을 그렸다. 사제도 뒤늦게 마찬가지로 했다. 숲 속의 연못, 우물, 떡갈나무 숲, 흙둔덕… 모두 반세계의 장소. 킨게일이 자드를 섬기기 전에, 신이 그들의 골짜기와 언덕에 찾아오기 전에 이교도의 성소였던 곳들.

숲 속의 못은 사제의 적이었다. 바티아라와 페리에르(주:프랑스에 해당)에서 건너온 첫 사제들은  바로 이런 물가에서 엄격한 기도문을 외우며경전을 읽어 거짓 영과 옛 마법을 쫓아냈다. 적어도 그러고자 노력은 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돌로 지은 예배당에서 신께 무릎을 꿇고서는 바로 쥐 뼈로 점을 치는 마녀에게 찾아가 미래를 묻거나 우물에 봉납물을 바치고는 했으니까. 아니면 별빛 아래 연못에. 케이니온은 입을 열었다.

“어서 갑시다. 물이고 숲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사제님.”

케이니온 옆의 사내, 태양의 표식을 그렸던 이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했다.

“왕자는 여기 있습니다. 보세요.”

그제야 케이니온은 물가에 선 말잔등에 가만히 앉은 소년을 보았다.

“자드여! 물로 들어갔어.”

누군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달이 없어. 달이 없는 밤이라고–홀린 거야.”

“음악이 들리나? 들어봐!”

시안이 갑자기 말했다.

“들리지 않소이다.”

루웨르트의 케이니온은 날카롭게 말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안이 다시 말했다.

“보세요. 덫에 걸린 겁니다. 움직이지도 못하잖아요!”

말들은 이제 기수들의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움직일 수 있지요.”

사제는 단숨에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숲과 밤, 빠르고 단호한 움직임에는 익숙했다.

“사제님! 사제님, 그만-”

케이니온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했다. 구하고 지켜야 할 영들이 있었다. 그의 과업. 어디선가 사냥하는 부엉이가 울었다. 밤의 숲에 어울리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소음. 사람은 미지를 두려워하기에 어둠을 두려워핬다. 자드는 빛의 존재, 악마와 혼백에게서 그의 자녀를 지키는 피난처일지니.

그는 빠르게 기도하고 바로 얕은 물에 첨벙거리며 들어가며 젊은 왕자를 불렀다. 소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옆에 다가서자 알룬 아브 오윈은 말을 하거나 고함을 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케이니온은 충격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두렵게도 정말로 음악이 들려왔다. 저 앞에, 오른편에서 희미하게 뿔고동과 피리, 현악기와 방울 소리가 물결 없는 연못 위로… 케이니온은 자드의 신성한 이름을 불렀다. 태양의 표식을 그린 그는 에를링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그가 말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들의 영혼이, 신앙이 위험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무 저항이 없는 오윈의 아들을 안장에서 끌어내렸다. 젊은이를 한쪽 어깨에 메고 그는 첨벙거리고 비틀거리며, 거의 넘어질 뻔하며 못에서 나와 알룬을 물가의 풀밭에 눕혔다. 그는 젊은이 곁에 무릎을 꿇고 목에 건 원반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잠시 후 알룬 아브 오윈은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자 케이니온은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빛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기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낮고 억양 없이 젊은이는 말했다.

“보았습니다. 형을요. 요정들과 있었어요.”

“그럴 리가 없네.”

케이니온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자네는 마음이 슬픈 데다 외지에 나와 있고, 적을 죽이지 않았는가. 잘못 본 게야. 있을 수 있는 일이네, 오윈의 아들이여. 전에도 본 일이 있어. 잃어버린 이를 그리는 마음에 어디서나 그들을 보게 되지. 해가 뜨면 신의 자비로 착각을 깨달을 걸세.”

“형을 보았습니다.”

강조조차 필요없는 그 조용한 확신은 열의나 고집보다도 사제를 불안하게 했다. 알룬은 눈을 뜨고 케이니온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은 신성 모독이네. 나는 사제로서-”

“보았어요.”

케이니온은 어깨 너머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멀어서 듣지는 못했으리라. 연못은 유리처럼 고요했고, 숲속 공터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도 착각했을 것이다. 이런 장소의 기묘함에 그도 완전히 면역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이곳과 비슷한 다른 곳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언제나 떠오르면 밀쳐버리고 하는… 그도 오류를 범하는 사람, 선을 거부하는 시대에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필부일 뿐.

다시 부엉이 울음이 이제는 물 건너에서 들려왔다. 케이니온은 나무 위 창공에 가득한 별을 올려보았다.

에를링 말은 고개를 젓더니 히힝거리며 차분하게 못에서 걸어나왔다. 말은 고개를 숙이고 근처에서 풀을 뜯었다. 그 일상적인 광경을 케이니온은 잠시 지켜보았다. 그는 다시 알룬에게 주의를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같이 가세나, 알룬. 예배당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알룬 아브 오윈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도움 없이 일어나 앉더니 일어섰다. 그리고는 바로 연못으로 걸어들어갔다.

케이니온은 만류하려고 한 손을 들다가 소년이 허리를 굽혀 물에 빠졌던 칼을 집어드는 것을 보고 침묵했다. 알룬은 물에서 걸어나왔다.

“요정은 이제 갔습니다.”

마당 저편, 나무 무성한 비탈에 빛이 있었다.

횃불이 아니었다. 창백하고, 움직이지 않고, 깜박이지도 않는 빛.

그는 마치 추적자를 피해 숨는 사람처럼 얕게 숨을 쉬었다.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을 때에도 빛은 여전했다. 마당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해가 뜰 때가지 아직 한참 남은 봄의 밤중, 바람은 부드럽고 별빛은 밝았다. 고대로부터의 영광과 고통을 그리는 별들의 모양, 자드 신앙이 북쪽으로 오기 전부터 있었던 별자리. 인간과 짐승, 신과 반신. 밤은 무겁고 무한했다. 마치 빠져들 듯이.

비탈에 빛이 있었다. 알룬은 검대를 풀고 검을 떨어뜨렸다. 그는 마당 문을 빠져나가 언덕을 올랐다.

그가 철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이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뜻. 요정이 지날 때 못에 들어온 인간은 때로 그 이후에도 요정을 볼 수 있게 된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이지 않은 채 지켜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 그녀는 억지로 제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그녀는 여왕보다 키가 작았다. 알룬보다 머리 반쯤. 그는 그녀가 선 곳 바로 밑에서 멈추었다. 덤불 곁에, 탁 트인 비탈에 함께 서서. 그녀는 어린 나무 뒤에 반쯤 숨었다가 그가 멈추자 나왔지만, 여전히 나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알룬이 안다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 선 요정.

가녀린 몸에, 손가락은 아주 길고 미간은 넓었다. 얼굴은 작았지만 아이 얼굴은 아니었다. 녹색 옷은 양팔과 무릎을 드러냈다. 허리에는 꽃을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색깔이 계속해서 어지럽게 변하는 머리에도 꽃을 엮고 있었다. 별빛밖에 없었지만, 요정 자신이 내는 빛으로 볼 수 있었다. 마당에서 몇 발짝 걸어나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이야기 속의 반세계, 그가 지금 있는 곳.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바로 이런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백년 후에야 돌아와서 알던 이는 모두 죽은 후. 얇은 옷을 통해 작은 가슴이 보였다. 요정도 추위를 느낄까?

목이 메어서 아팠다.

“어떻게… 어째서 내게 당신이 보이는 거죠?”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요정의 머리는 창백해지며 거의 하얘지더니 다시 거의 금빛으로 돌아왔다.

“당신 연못에 있었죠. 내가… 당신을 구했어요.”

단순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평생 하프로 연주한 것은 음악이 아니었음을. 노래를 제대로 부른 적도 없다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어떻게… 어째서?”

그녀의 목소리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는 거칠게 들렸다. 별빛 밝은 공기를 멍들게 하는 소리.

“말이 물가에서 멈추게 했죠. 여왕에게 더 다가갔더라면 살해당했을 거에요.”

질문 하나는 대답을 받았지만 하나는 대답이 없었다.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거기 형이 있었어요.”

“당신 형은 죽었어요. 그의 영혼은 여왕의 행렬에 있죠.”

“어째서?”

요정의 머리는 이제 붉어지며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빛으로 볼 수 있었다.

“영혼을 내가 여왕께 데려갔어요. 오늘 전투에서 처음 죽은 이.”

다이 형은 나갔을 때 무기가 없었다. 처음 죽은 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알룬은 축축하고 차가운 풀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속삭였다.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데.”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요정의 목소리는 음악이었다. 그는 말을 곰씹으며 그녀를, 브린의 딸, 형의 시신이 누운 방에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평생 다시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까.

“여왕은… 여왕은 영혼을 어떻게…?”

요정은 처음으로 작고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지었다.

“그는 여왕께 사랑받을 거에요. 당신네 세상에서 온 이들,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여왕은 매혹당하죠.”

“영원히?”

머리는 보랏빛이 되었다. 작고 가냘픈 몸이 연녹색 옷 아래 너무나 희었다.

“영원한 게 뭐가 있나요?”

가슴이 텅 빈 느낌. 형이 있던 자리, 채워지지 않을 공허.

“그 다음에는? 그는… 어떻게 되죠?”

사제처럼, 지혜로운 아이처럼 엄숙하게, 그보다 훨씬 나이많은 존재의 엄숙함으로 그녀는 말했다.

“여왕이 싫증을 내면 그들은 행렬을 떠나가요.”

“어디로 가죠?”

목소리의 달콤한 음악…

“나는 지혜롭지 않아요. 나는 모른답니다. 물어본 적이 없어요.”

“유령이 될 거야.”

별빛 아래 무릎을 꿇은 알룬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혼자 떠도는 혼백, 길잃은 영혼.”

“나는 몰라요. 당신들의 태양신이 데려가지 않을까요?”

그는 풀에 손을 얹었다. 시원하고 일상적인 그 감촉. 배운 바에 따르면 자드는 지금 세상 아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괴물과 싸우고 있을 터. 그는 그녀 목소리의 음악 없이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모릅니다. 오늘밤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왜 연못에서 날… 구했죠?”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던 그 질문에 요정은 물처럼 물결치는 동작으로 두 손을 벌렸다.

“왜 당신이 죽어야 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이잖아요.”

“그래서 어둠을 향해 달릴 건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한 발짝 다가왔다. 무릎 꿇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손을 뻗으며. 손이 얼굴에 닿기 직전에 그는 눈을 감았다. 가히 압도적인 갈망의 존재. 자신을,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욕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밤공기 속에, 그녀 주변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알룬은 입을 열었다.

“가르침… 가르침을 받았어요. 빛이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당신 형에게도 그렇겠죠. 그게 진실이라면.”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손이 떨리자 그제야 그는 그녀도 그만큼 두렵고 흥분한 것을 깨달았다. 나란히 움직이되 닿지 않는 두 세계.

아니, 가끔은 닿기도 했다. 입을 열었지만, 미처 말하기 전에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 부재를 느꼈다. 하려고 했던 말은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몰랐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이미 열 발짝 떨어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어린 나무에 기대어 언제든 도망치려고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머리는 까마귀처럼 새까맸다.

돌아보자 누군가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놀람이라는 감정이 피처럼 흘러나간 기분이었다.

그날밤 알룬 아브 오윈은 아직 젊었다. 올라오는, 게다가 알룬이 아닌 요정을 바라보며 올라오는 사람을 알아본 순간 그는 평생 다시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브린 아프 휴울은 언덕을 올라와 알룬 옆에 웅크려 앉았다. 덩치 큰 사내는 풀을 몇 포기 뜯으며, 멀지 않은 곳에 선 빛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그녀가 보이는 겁니까?”

알룬은 낮게 물었다. 브린은 커다란 손바닥 사이에 풀잎을 문질렀다.

“반평생 전에 그 못에 들어간 일이 있었네. 여자에게 거절당하고 나서 혼자 숲을 걷고 있었지. 바보같은 짓이었지만, 여자에게 빠진다는 게 그렇지.”

“제가 그랬는지는 어떻게…?”

“시안의 부하가 보고하더군. 자네가 에를링을 둘 죽이고 케이니온이 꺼내올 때까지 연못에서 홀려 있었다고.”

“그가… 시안이 알고…?”

“아니네. 부하가 얘기한 건 거기까지야.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

“당신은 이해하신 겁니까?”

“그랬지.”

“그 오랜 세월… 그들이 보였던 겁니까?”

“볼 수는 있었지. 자주 보지는 못했어. 그들은 우리를 피하니까. 이 요정은… 좀 다르더군. 종종 여기에 오지. 아마 계속 같은 요정인 것 같아. 여기 브린펠에 있을 때면 가끔 보이지.”

“그랬는데 안 올라왔습니까?”

브린은 처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올라오기 두려웠네.”

“우리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아요.”

요정은 침묵하며 가녀린 나무 곁에 서서, 여전히 반쯤 도망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곳으로 이끄는 것만으로도 해칠 수 있네. 돌아오기가 어려워지거든. 자네도 옛이야기는 많이 들었겠지. 나는… 세상에서 할 일이 많네. 이제는 자네도 마찬가지지.”

케이니온이 아래 마당에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 우리를 떠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네.’

알룬은 브린을 보며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생각했다. 그 평생의 부담을.

“여기 올라오려고 칼을 푸셨죠.”

브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나보다 용감하게 둘 수야 있나.”

그는 밤하늘에 커다란 윤곽을 그리며 일어섰다.

“밤새 쭈그려 앉기에는 너무 늙고 뚱뚱해졌구만.”

나무 곁에 선 빛나는 모습은 다시 대여섯 발짝 물러났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이 아직도… 아파요.”

브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리라. 그 오랜 세월 이 목소리의 음악을 모르고… 반평생 전부터. 알고서도 말하지도 않고, 접근하지도 않은 그 의지력에 알룬은 감탄했다.

“칼은 풀었는…”

브린은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욕설을 내뱉고 신발 발목에 꽂은 나이프를 꺼냈다.

“사과하오. 그럴 의도는 아니었소, 정령이여.”

그는 몸을 돌리더니 강하게 앞으로 내딛으며 팔을 휘저어 나이프를 내던졌다. 칼은 밤하늘을 가로질러 크게 호를 그리며 언덕에서 벗어나 울타리를 넘더니 빈 마당에 떨어졌다.

저렇게도 멀리… 자신은 할 수 없으리라고 알룬은 생각했다. 그는 옆에 선 브린을 쳐다보았다. 에를링 약탈자들이 해마다 봄이나 여름에 나타나던 시절에 볼간을 죽인, 그나 다이가 태어나기 전, 어둡고 냉엄하던 시절. 그러나 바로 오늘 소규모의 실패한 약탈 중에 죽었어도 옛날에 볼간의 무리에게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것 아닌가. 그리고 영혼은…?

브린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내려가세. 가야 해.”

알룬은 시원한 풀에 무릎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은?

“그녀는 존재해선 안 되는 거겠죠?”

“누가 그러나? 요정 이야기를 남긴 우리 조상들이 바보였나? 그들의 매혹과 위험 이야기를… 그녀의 종족은 우리보다 오래 이 땅에 있었지. 사제들이 얘기는, 빛에 대한 우리 소망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거야.”

“그게 가르침입니까?”

알룬의 목소리는 쓰라렸다. 이곳, 별이 가득한 밤은 그녀의 빛 외에는 어두웠다.

그는 거의 의지에 반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나무에 기댄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색은 다시 밝았다. 나이프가 사라진 이후로. 그러나 다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녀 손가락의 감촉을, 꽃향기를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다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고 침묵했다.

“가르침이 진실임을 알잖나.”

요정은 나무 뒤에 서서 은은히 빛나며 머리칼이 동틀 적 동녘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브린 아프 휴울은 그녀가 아닌 알룬을 쳐다보았다.

“느낄 수 있잖나? 함께 내려가서 기도하세. 자네 형과 내 부하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냥… 등 돌릴 수 있어요?”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는 요정을 알룬은 마주보았다.

“그래야 해. 평생 그래왔고. 자네도 이제 그래야 하네. 자네 영혼과 앞으로 할 일을 위해.”

그 목소리에서 뭔가 엿들은 알룬은 다시 브린을 올려보았다. 어둠 속에 별빛을 가린 그는 흔들림 없이 마주보았다. 30년 동안 칼을 들고 싸워온 전사가. 앞으로 할 일… 옛 이야기가 옳다면, 두 달 중 하나라도 오늘 떴더라면 요정을 볼 일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이는 여전히 죽었겠지. 다른 모든 죽은 이도. 브린의 딸이 그렇게 도전했었고, 그는… 답할 말이 없어서 도망쳤었다. 가슴 속 공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알룬은 다시 요정에게 몸을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그를 지켜봐줘요.”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는 이해하겠지.

그녀는 몇 발짝 다가와 다시 어린 나무에 한 손을 얹은 채 마치 끌어안듯, 하나가 되듯 섰다. 브린은 등을 돌리고 단호한 결의로 비탈을 내려갔고, 알룬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랐다. 그녀가 비탈에서, 다른 세계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

폴라리스 캠페인 ‘별이 지다’

국가의 건설 캠페인에서 우리들이 함께 만들어간 세계를 배경으로 폴라리스 (Polaris) 캠페인을 하기로 했습니다. 국가의 건설에서 중요한 정서적 축을 이루었던, 새로운 신앙과 시대 앞에서 사라져가는 요정들의 비극을 담은 캠페인으로요. 폴라리스는 전부터 해보고 싶은 규칙이기도 했는데 특히 우리가 함께 만들어간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더욱 기대되네요. 캠페인 제목은 일단 ‘별이 지다’가 될 것 같습니다.

자꾸 ‘별이 지다’ 생각이 떠올라서 공부하기도 싫고 폴라리스 번역을 시작했는데, 그중 플레이가 어떤 분위기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개격인 ‘시간 속에 얼어붙은 순간들’입니다. (이제 갓 시작한 규칙 번역본은 뱀프님, 승한님, 엔님이 보실 수 있게 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분위기나 예시를 이해하려면 배경도 필요할 것 같아서 순서대로 다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 얼어붙은 순간들

오랜 옛날, 이 세상의 북쪽에서도 가장 북쪽에 이 세상에 있던 모든 민족 중 가장 위대한 민족이 살았도다. 그들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햇살 속에 녹아 사라지는 눈송이처럼 죽어가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으리.

세상이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듯 그들도 파괴되어 이제는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순간들, 시간 속에 얼어붙은 파편뿐.

보라…

  • 얼어붙은 불모지에 혼자 선 아름다운 소녀가 별빛에 빛나는 도시를 지켜본다. 얼굴에 표정은 없으나 독살스러운 질투는 입술에서 눈송이가 되어 떨어진다.
  • 그의 피가 차마 붙잡을 수 없는 이질적인 꽃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동안 누이는 손을 감싼 채 울음을 참으며 칼날의 차가운 입맞춤을 기다린다.
  • 소용돌이치는 진눈깨비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들의 검광밖에 없다.
  • 그녀의 손짓 하나, 노래 한 소절에 부패한 의원들의 살이 찢어져 내리면서 그 밑에 꿈틀거리는 구더기가 드러난다.
  • 얼음의 무도회장에 가득 춤추던 수천의 남녀가 갑자기 멈추면서 무지갯빛 창밖에 막 모습을 드러낸 여명을 지켜본다.
  • 아름다움에 홀린 그는 발톱을 보지 못한다.
  • 빙하 골짜기의 가장자리에서 칼과 칼이 부딪는다. 하나는 별빛처럼 창백하게 노래하고 다른 하나는 태양처럼 불탄다. 기사는 적의 얼어붙은 불길과 같은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형을 알아본다.
  • 잠든 기사들의 무덤에서 그녀는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전사 위로 몸을 숙인다. 위로의 말을 속삭이며 그녀는 얼어붙은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춘다.
  •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연인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는다. “용서해 줘.” 말하며 죽어가는 그는 그녀에게 축배를 든다.

이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니며, 아직 이야기가 아니로다. 남은 것은 이것뿐. 만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

폴라리스 배경세계 – ‘그대는 전사일 뿐’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는 벤 레만 (Ben Lehman)의 폴라리스 (Polaris) 추가 배경 공모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중 레만씨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고 저도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그대는 전사일 뿐 (Thou Art But a Warrior)’입니다.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던 이베리아의 이슬람 왕국들이 점점 약해지고 분열되면서 기독교 ‘야만인’들에게 잠식당하는 시대, 이들을 막아내려는 이슬람 기사들의 희망없는 싸움이 중심이 되는 배경이지요. 신은 자신들이 아닌 적의 편이며, 이 반도의 미래는 저 야만스럽고 잔인한 민족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각 기사의 선택은 어떤 모습일지… 폴라리스 배경인만큼 아마 결론은 ‘죽거나 개종하거나’ 정도이겠죠.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시사적인 데가 있기도 하고, 그 자체 흥미로운 역사적 시기이기도 하고 해서 여러모로 재미있어 보입니다. 실제 역사가 부담된다면 이베리아의 이슬람 왕조 멸망기를 그대로 가상세계로 옮긴 가이 가브리엘 케이 (Guy Gavriel Kay)의 ‘알-라산의 사자들 (The Lions of Al-Rassan)’ 배경으로 해도 될듯 하고요. 언제 나올지 레만씨에게 문의했지만 제작자인 애나 크레이더 (Anna Kreider)씨가 본격 작업에 들어갔으며 자세한 일정은 모르겠다는 대답만이.. 너무 기대되는데 말이죠..;ㅁ;

벤 레만씨가 ‘그대는 전사일 뿐’에 대해 언급한 RPG.net 게시판글 (영문 링크)
‘그대는 전사일 뿐’ 출품 당시 심사평 (영문 링크)

비극과 아름다움의 함수 – 폴라리스

벤 레만의 폴라리스(Polaris)는 3~5명의 참가자를 위한 RPG이며, 이상적으로는 4인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제목은 북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내 판타지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와는 상관없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비극이 목적인 폴라리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전 세상의 끝에서 한 민족이 죽어가고 있더라.

그러나 희망은 남아 있어 안타레스에게는 별들의 부름이 들리나니.

그리하여…

일단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의식(儀式) 언어의 사용입니다. 모든 세션은 세상의 끝에서 죽어가는 민족에 대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주인공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가 (이 경우 ‘안타레스’) 별들의 노래를 듣는다는 문장을 얘기해야 하며, 모든 장면은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외에 이야기 교섭, 장면과 한 회의 끝을 위한 말들이 따로 있습니다.

또다른 특징은 참가자의 역할 분배인데, 대개의 RPG와는 달리 한명의 진행자와 다수의 참가자라는 구도가 없습니다. 주인공들의 일행 개념도 희박하지요. 대신 모든 참가자는 주인공을 만들고,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진행합니다. 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진행할 때마다  그 주인공이 속한 참가자는 주인공의 ‘마음’으로서 주인공의 행동과 선택, 감정 상태 등을 담당합니다. 이쪽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에 가깝겠지요.

반면 진행자 역할은 셋으로 나뉘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분배됩니다. 주인공의 ‘후회’는 전통적 진행자에 가장 가까운 역할로, 주인공에게 갈등상황을 제시하고 적에 해당하는 인물을 연기합니다. 또한 이야기와 관련해 의견충돌이 있을 때 ‘마음’과 교섭합니다. 주인공의 ‘보름달’은 주인공과 권력적·사회적 관계로 얽힌 인물들과 기타 남자 인물들을 연기하며, ‘초승달’은 주인공과 감정적으로 친밀한 인물들과 기타 여자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마음’과 ‘후회’가 교섭할 때면 두 달은 중재와 제안을 합니다.

‘마음’과 ‘후회’가 의견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이야기를 교섭할 때도 의식 언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초승달’이나 ‘보름달’의 주변인물 연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마음’과 ‘후회’가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은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고 ‘후회’는 실패를 바랄 때 교섭하는 동안에도 의식 언어를 통해 교섭을 조정합니다.

폴라리스의 또다른 큰 특징은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주인공의 죽음이나 타락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끌어가는 일련의 규칙들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모든 주인공은 ‘열의’에 넘치지만 결국에는 열의가 점점 없어지고 ‘피로’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만큼 더 능력있고 뛰어난 인물이 되어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힘든 싸움에 대한 절망과 냉소가 점점 커지고, 일단 ‘피로’가 ‘열의’를 대체하면 ‘마음’은 언제든지 주인공의 죽음을 교섭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어떤 경우에도 주인공의 죽음을 교섭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기사에게는 자비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죽지 않으면 그는 필연적으로 타락하여 그가 싸우는 악의 일부가 될테니까요. 사랑하는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 모든 기사에게 주어지는 운명, 죽어서만 피할 수 있는 파멸입니다.

일은 그렇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폴라리스의 기본 배경은 북극의 정점에 있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얼음과 별빛의 도시입니다. 별빛 속에 모든 것이 완벽하던 아름다움의 시대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 자신의 잘못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괴물들만 사는 거대한 검은 구조물, ‘후회’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괴물로부터 남은 민족을 지켜야 하는 별빛의 기사단. 그리고 폴라리스의 외곽이었던, 그 옛 영광의 희미한 잔재 속이지만 여전히 기사단의 희생 위에 풍요롭고 화려하게 살아가는 민족이 남았습니다. 무의미한 쾌락과 권력싸움으로 소일하며 기사단의 힘든 싸움을 애써 외면하는, 햇빛에 녹는 눈송이처럼 사라져갈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폴라리스라고 불리던 도시가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폴라리스를 파멸시킨 잘못에 대해서는 수천 수만의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모두 옳고 모두 틀립니다. 폴라리스는 영원했으며, 폴라리스는 덧없는 한 순간만 서있었으며, 존재했으며,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이야기와 전설과 꿈의 영역, 사실의 흔들리는 그림자 틈새에서 점멸하는 진실의 땅입니다.

…라지만 있을 수도 없었던 북극의 도시보다는 좀더 이해하기 쉬운 배경을 사용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폴라리스의 파멸의 전설 중에는 카멜롯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많이 있지요. 왕과 왕비의 완전무결하던 사랑, 왕비를 지키기 위해 시작했던 별빛의 기사단, 그중 필두 기사와 왕비 사이의 금지된 연모의 정. 기네비어와 랜슬롯의 밀회와 모드레드의 음모로 깨어진 카멜롯의 꿈을 다루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혹은 톨킨의 엘프들을 다루어도 괜찮을지도요. 멜코가 세운 거대한 요새에서 끝없이 공격해 오는 괴물들과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중간계의 먼 옛날의 엘프들은 별빛의 기사단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어긋났다는 점 역시. 최종적으로 타락해서 멜코의 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거듭나는 엘프 전사들도 매우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퍽)

결국 이 세상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별빛의 기사단이나 원탁의 기사들이나 엘프만큼이나 있을 법하지 않은, 있었을지도 모르는,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존재들의 슬픈 잔해와 함께.

일은 그렇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것은 오래 전의 일.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도다.


추신: 문득 떠오른 재미있는 (나름대로) 우연. 부록에 보니 한명의 주인공이 처음 시작에서 최종의 타락까지 가는데는 평균 스물 일곱번의 성장 굴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폴라리스의 이상적인 참가자 수는 네명. 그렇다면 27 곱하기 4는?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