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톨스타 멸망기

2월 2일에는 난생 처음으로 TRPG를 해보았습니다. ORPG가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하는 RPG는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죠. 사용한 규칙은 폴라리스 (Polaris)였습니다. 플레이하다 보니 배경 설정에 나온 도시 톨스타 (Tallstar)가 그만 망해버리더군요 (?).

요약

이야기는 네 젊은 기사와 그들의 얽히고 섥힌 운명이 폴라리스 멸망 이후 첫 왕의 즉위와 톨스타 함락으로 이어지는 게 큰 줄기입니다. 플레이 전에 딱히 계획한 건 아닌데 플레이하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생겨나는 게 재밌었죠.

1부: 여름의 어긋남

마이자르의 약혼녀 루크바는 황야에서 악마 에츨리오텍에게 심한 부상을 입고 마이자르에게 구출받아 톨스타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녀를 치료하던 치유사 카시오페이아에게 씌웠던 질병의 악마 케 쿠안이 루크바에게 숨어들고, 루크바는 치유원에서 탈출합니다. 톨스타에는 케 쿠안의 영향으로 전염병이 번집니다.

한편, 별빛 기사단의 수장이며 명망높은 기사인 엘 타닌은 스스로 왕이 되어 민족을 단합시킬 계획을 그의 연인 카리나에게 털어놓으며 지지를 호소합니다. 카리나는 그녀의 스승 알 나이르가 엘 타닌을 믿지 말라고 한 경고를 떠올리고 ‘진실의 노래’로 그의 마음을 떠보지만, 엘 타닌은 카리나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의 타락의 시작점이 됩니다.

또 다른 기사 미카르는 의원인 아버지와 엘 타닌의 야심을 저지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다가 문밖에 인기척을 느낍니다. 문을 벌컥 열자 문밖에서 엿듣는 것은 엘 타닌의 심복 엘사피. 엘사피는 상관에게 알리려고 도망치지만, 미카르는 그를 따라잡아 골목길에서 살해합니다. 이 모습을 그의 친구 엘 스트롬멜이 보게 됩니다.

마이자르는 도시를 배회하며 질병을 퍼뜨리는 약혼녀 루크바를 붙잡아 다시 치료소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이 모습을 본 엘 스트롬멜이 그를 파렴치한으로 오인하고 (열병의 신인 케 쿠안에게 씌운 루크바는 옷을 다 벗어던진 상태라..) 저지하려 합니다. 마이자르는 엘 스트롬멜에게 쉽게 이기지만, 모두의 주의가 결투에 쏠린 동안 엘 스트롬멜의 친구 미카르는 엘사피의 시체를 숨깁니다.

2부: 가을의 사냥

카리나는 친구이며 엘 타닌의 전처인 치유사 카시오페이아의 부탁으로 도시에 도는 병을 치료할 약초를 찾으러 떠납니다. 약초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루크바에게 부상을 입혔던 악마 에츨리오텍과 마주치고, 결투 끝에 에츨리오텍의 목을 벱니다. 그러나 에츨리오텍의 피가 스민 약초에 부정한 기운이 서린 것은 모른 채 약초를 카시오페이아에게 전달합니다.

마이자르는 옛 연인 아트리아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사이, 카리나가 가져온 약초를 먹고 나은 약혼녀 루크바에게 유혹당해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러나 루크바는 이제는 케 쿠안이 아닌 에츨리오텍에게 씌워 있었죠. 이 일로 루크바는 임신하고, 마이자르는 루크바와 강제로 결혼하게 됩니다. 아트리아 역시 임신했지만 그녀는 마이자르를 위해 아이 아버지가 마이자르가 아니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마이자르는 아내에게 큰 관심이 없이 아트리아와 관계를 유지합니다.

한편, 젊은 기사 아딜은 친 엘 타닌파 상원의원인 어머니 키에트의 부탁을 받고 엘 타닌에게 반대하는 기사 엘 스트롬멜을 엘 타닌 편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둘은 깊은 관계가 됩니다. 자신의 살인 사실을 아는 엘 스트롬멜이 정치적 적수의 딸과 사귀는 것을 불안해한 마이자르는 키에트 의원이 딸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키에트를 유혹해 모녀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영화 졸업생이 떠오르는 건 저만은 아니겠지요..(…))

엘 스트롬멜은 갈등하다가 결국 아딜에게 마이자르 미카르의 살인 사실을 알립니다. 엘사피의 시체를 찾아낸 아딜은 원로 기사인 아버지 에스미디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에스미디케는 엘사피의 죽음에 대해 정보를 캐고 다닙니다.

카시오페이아가 약초로 치료한 사람들이 에츨리오텍에 씌우는 일이 생기자 카시오페이아는 악마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 카리나는 법정에서 뛰어난 말솜씨로 카시오페이아는 무죄라고 재판관을 설득하나 몇몇 별빛의 기사가 끝내 납득하지 않고 무죄판결을 받은 카시오페이아를 직접 제거하려고 합니다. 카리나는 이들을 막아내나, 실수로 몇 명을 죽이고 이 일로 엘 타닌의 분노를 삽니다.

3부: 겨울의 피

카리나는 스승이며 루크바의 아버지인 알 나이르의 부탁으로 루크바를 보러 갔다가 그녀에게 씌운 에츨리오텍의 존재를 간파하고, 에츨리오텍이 뱃속의 아기에게 옮겨붙자 별빛의 검으로 즉석 낙태를..(..) 기사단의 법도를 어긴 잔혹 행위로 카리나는 기사직을 잃고 도시에서 추방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마이자르는 장인에게 악감정을 품고 엘 타닌에게 돌아섭니다.

아딜과 그녀의 아버지 에스미디케가 자신의 죄목을 캐고 다니자 초조해진 미카르는 결국 아버지의 적인 엘 타닌과 거래를 해서 에스미디케를 무고한 혐의로 체포시킵니다. 아딜은 연인 엘 스트롬멜과 함께 아버지를 탈출시키려고 하나 엘 타닌의 부하들에게 체포당해 감옥에 갇힙니다. 명예높은 기사들의 감금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톨스타 내에 폭동을 일으키고, 엘 타닌은 기사단장으로서 계엄 권한을 요구합니다.

상원이 계엄령을 승인하지 않자 엘 타닌은 민족을 위하려면 부패한 의원들을 척결해야 한다며 기사들을 규합해 상원을 습격합니다. 돌격대의 선두를 맡은 마이자르는 상원을 지키려는 장인과 맞서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아내 루크바가 막아서서 결국 처와 장인을 둘 다 죽이고 맙니다. 상원을 점거하고 의회를 해산한 엘 타닌은 왕위에 오릅니다. (이건 스타워즈 3, 혹은 좀 더 가까운 우주의 좀 더 가까운 과거이려나요)

4부: 봄의 파국

봄에 악마들이 톨스타를 공격해 오자 감옥에 갖힌 에스미디케, 아딜 부녀와 엘 스트롬멜은 최전선에서 싸울 수 있게 풀어주겠다는 제의를 받습니다. 엘 타닌 왕에게는 반대하지만 도시를 지키려고 그들은 출전하고,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워 악마들을 톨스타에서 몰아낸 후 전사합니다.

엘 타닌은 후퇴하는 악마들을 추격해 몰살할 것을 기사단에 명령합니다. 그러나 기사들을 독려해 ‘후회’에 몰아넣고 물러서는 엘 타닌을 보고 미카르는 기사단을 몰살시키려는 음모임을 깨닫고 엘 타닌을 공격합니다. 싸움 끝에 엘 타닌은 ‘후회’의 입구에 떨어지지만 악마의 수장, 태양처럼 타는 왕관을 투구 위에 쓴 솔라리스 왕이 되어 다시 나타납니다.

한편 마이자르 역시 엘 타닌의 음모를 깨닫고 무방비 상태가 된 톨스타에 있는 연인 아트리아를 구하려고 달려갑니다. 아트리아를 말에 태워 탈출하던 중 악마의 습격을 받아 아트리아는 살해당하고, 마이자르는 그녀의 태에 있던 아이만 간신히 살려 이제 악마가 완전히 점령한 톨스타를 피해 황야로 피합니다. 그러나 얼음 처녀와 마주쳐 그녀의 입맞춤에 조용히 숨이 멎습니다.

추방 이후 혼자 황야를 헤매던 카리나는 마이자르의 얼어붙은 시체와 그 품안에 우는 조그만 갓난아기를 발견합니다. 자신이 죽였던 아이의 이복 동생을 그녀는 사우스와치 시에 데려다준 후 이제 솔라리스 왕이 된 엘 타닌이 점령한 톨스타로 향합니다. 성벽 위에 뛰어오른 그녀는 엘 타닌과 전투 끝에 그를 살해하는 데 성공하지만, 부정한 피를 뒤집어쓰고 타락해 악마가 됩니다.

감상

예, 막장에 또 막장입니다. (..) 정말 재밌었어요. 플레이 내용은 쉴새없이 땅을 파고들었지만 참가자들은 굉장히 즐거워했습니다. 특히 주인공을 위해 교섭하는 ‘마음’과 주인공의 시련을 위해 교섭하는 ‘후회’의 밀고 당기는 긴장과 경쟁은 인물 엿먹이기에 비극적 재미를 끌어내기에 정말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죠.

마이자르의 마음: 죽은 아이에 대한 원한으로 엘 타닌에게 돌아선 마이자르는 돌격대의 선두에서 상원 점거를 성공시킨다!
마이자르의 후회: 그러나 그러려면 그의 장인 알 나이르가 막아서야 한다.
마음: 그러나 그러려면 마이자르가 알 나이르에게 이겨야 한다.
후회: 그러나 그러려면 루크바가 그 순간 뛰어들어 장인과 아내 둘 다 죽여야 한다!
전원: (순간 침묵) 우와, 정말? (폭소)
마음: 그리 되었더라.

얼굴을 맞대고 플레이하는 것은 확실히 채팅 플레이, 심지어는 음성 플레이하고도 다르더군요. 같은 공간에 모여 서로 표정과 반응을 보면서 일어나는 상승효과가 상당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저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굉장히 마음이 잘 맞았고, 분위기도 좋았고요. 웃고 떠들고 간식 먹고, 인물들에게 무슨 짓을 할까 궁리하면서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TRPG라서 느낀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역시 빠르더군요..(…) 저게 3시간 반 정도 플레이한 건데, 같은 시간 동안 한 채팅 플레이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분량이 많았습니다. 쑥스러워서 못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T(elephone)RPG 예행 연습을 해서 그런가(??) 괜찮더라고요. 나중에는 칼을 들어 휘두르는 시늉까지 하면서 어이 너 서른 살 맞냐 신나게 놀았습니다. 반면 채팅 플레이 같은 정교한 맛은 덜해서 확실히 서로 다른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무 예정이나 플레이 전에 짠 계획 없이, 심지어 인물 제작도 플레이 시작할 때 했는데 플레이하면서 저렇게 얽히고 섥히는 얘기가 나온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것도 개개 인물은 특별한 악의 없이 그냥 자기 욕망이나 신념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 그게 하나하나 쌓여 결국 도시의 멸망이라는 파국으로 간 점이 아주 비극에 어울리는 전개였습니다. 아마 일행 단위로는 나오기 어려웠을 얘기라는 점에서 일행 개념에서 벗어난 놀이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인연과 사건의 긴밀한 연계는 공동 서술의 의의를 잘 살렸죠.

어쨌든 결과적으로 참 즐거운 오후였습니다. 드디어 폴라리스를 다시 잡아봤어 엉엉 초대해 주고 주최측으로 고생한 제프와 모나, 그리고 같이 플레이한 패티와 숀 부부에게도 감사해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플레이하는 중 모나가 집에 돌아왔을 때 대화가 잊허지지 않는군요.

제프: (문을 열어주며) 여보 나 여자 두 명 임신시켰어. 여자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억지로 결혼해.
모나: 음, 그랬어? 에익 나도 폴라리스 플레이하고 싶었는데!

다음에는 꼭 플레이할 수 있길..(…)

4 thoughts on “[폴라리스] 톨스타 멸망기

  1. Wishsong

    즐겁게 하셨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참가자 분들은 모두 커플이셨군요.(솔로! 솔로!) 부부가 함께 같은 취미를 즐기는 것, 멋지고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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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예, 정말 재밌었어요.^^ 솔로의 기치를 드높이며..ㅡㅡv 스토리 게임 쪽에 RPG 전반에 비해 여자가 좀 많은 느낌도 들고요. 앞으로도 사정이 된다면 TRPG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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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sdee

    와- 드디어 TRPG도 하셨군요^^ 3시간 반 동안 하나의 대장정을 끝내시다니 대단해요. 등장인물도 많은데 굉장히 매끄럽게 잘 마무리됐네요.

    @ 미카르가 엘사피를 죽였다가 다시 뒤에선 마이자르가 살인범이라고 나와서 약간 헷갈립니다.. 괜찮으시면 설명을 좀..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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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다들 워낙 손발이 척척 맞아서 진행이 잘 됐어요. 룰도 많은 도움이 됐고요. 지난 장면에서 뭘 어떻게 끌어올까, 이건 이렇게 되면 멋지지 않을까 하고 서로 제안을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이 나오더라고요.

      마이자르/미카르 부분은.. 실수입니다. (도주) 플레이 도중에도 종종 헷갈려서, 이름 너무 비슷하게 지었다고 남성 동지 두 분이 구박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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