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아름다움의 함수 – 폴라리스

벤 레만의 폴라리스(Polaris)는 3~5명의 참가자를 위한 RPG이며, 이상적으로는 4인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제목은 북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내 판타지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와는 상관없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비극이 목적인 폴라리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전 세상의 끝에서 한 민족이 죽어가고 있더라.

그러나 희망은 남아 있어 안타레스에게는 별들의 부름이 들리나니.

그리하여…

일단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의식(儀式) 언어의 사용입니다. 모든 세션은 세상의 끝에서 죽어가는 민족에 대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주인공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가 (이 경우 ‘안타레스’) 별들의 노래를 듣는다는 문장을 얘기해야 하며, 모든 장면은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외에 이야기 교섭, 장면과 한 회의 끝을 위한 말들이 따로 있습니다.

또다른 특징은 참가자의 역할 분배인데, 대개의 RPG와는 달리 한명의 진행자와 다수의 참가자라는 구도가 없습니다. 주인공들의 일행 개념도 희박하지요. 대신 모든 참가자는 주인공을 만들고,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진행합니다. 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진행할 때마다  그 주인공이 속한 참가자는 주인공의 ‘마음’으로서 주인공의 행동과 선택, 감정 상태 등을 담당합니다. 이쪽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에 가깝겠지요.

반면 진행자 역할은 셋으로 나뉘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분배됩니다. 주인공의 ‘후회’는 전통적 진행자에 가장 가까운 역할로, 주인공에게 갈등상황을 제시하고 적에 해당하는 인물을 연기합니다. 또한 이야기와 관련해 의견충돌이 있을 때 ‘마음’과 교섭합니다. 주인공의 ‘보름달’은 주인공과 권력적·사회적 관계로 얽힌 인물들과 기타 남자 인물들을 연기하며, ‘초승달’은 주인공과 감정적으로 친밀한 인물들과 기타 여자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마음’과 ‘후회’가 교섭할 때면 두 달은 중재와 제안을 합니다.

‘마음’과 ‘후회’가 의견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이야기를 교섭할 때도 의식 언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초승달’이나 ‘보름달’의 주변인물 연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마음’과 ‘후회’가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은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고 ‘후회’는 실패를 바랄 때 교섭하는 동안에도 의식 언어를 통해 교섭을 조정합니다.

폴라리스의 또다른 큰 특징은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주인공의 죽음이나 타락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끌어가는 일련의 규칙들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모든 주인공은 ‘열의’에 넘치지만 결국에는 열의가 점점 없어지고 ‘피로’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만큼 더 능력있고 뛰어난 인물이 되어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힘든 싸움에 대한 절망과 냉소가 점점 커지고, 일단 ‘피로’가 ‘열의’를 대체하면 ‘마음’은 언제든지 주인공의 죽음을 교섭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어떤 경우에도 주인공의 죽음을 교섭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기사에게는 자비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죽지 않으면 그는 필연적으로 타락하여 그가 싸우는 악의 일부가 될테니까요. 사랑하는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 모든 기사에게 주어지는 운명, 죽어서만 피할 수 있는 파멸입니다.

일은 그렇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폴라리스의 기본 배경은 북극의 정점에 있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얼음과 별빛의 도시입니다. 별빛 속에 모든 것이 완벽하던 아름다움의 시대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 자신의 잘못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괴물들만 사는 거대한 검은 구조물, ‘후회’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괴물로부터 남은 민족을 지켜야 하는 별빛의 기사단. 그리고 폴라리스의 외곽이었던, 그 옛 영광의 희미한 잔재 속이지만 여전히 기사단의 희생 위에 풍요롭고 화려하게 살아가는 민족이 남았습니다. 무의미한 쾌락과 권력싸움으로 소일하며 기사단의 힘든 싸움을 애써 외면하는, 햇빛에 녹는 눈송이처럼 사라져갈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폴라리스라고 불리던 도시가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폴라리스를 파멸시킨 잘못에 대해서는 수천 수만의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모두 옳고 모두 틀립니다. 폴라리스는 영원했으며, 폴라리스는 덧없는 한 순간만 서있었으며, 존재했으며,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이곳은 이야기와 전설과 꿈의 영역, 사실의 흔들리는 그림자 틈새에서 점멸하는 진실의 땅입니다.

…라지만 있을 수도 없었던 북극의 도시보다는 좀더 이해하기 쉬운 배경을 사용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폴라리스의 파멸의 전설 중에는 카멜롯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많이 있지요. 왕과 왕비의 완전무결하던 사랑, 왕비를 지키기 위해 시작했던 별빛의 기사단, 그중 필두 기사와 왕비 사이의 금지된 연모의 정. 기네비어와 랜슬롯의 밀회와 모드레드의 음모로 깨어진 카멜롯의 꿈을 다루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혹은 톨킨의 엘프들을 다루어도 괜찮을지도요. 멜코가 세운 거대한 요새에서 끝없이 공격해 오는 괴물들과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중간계의 먼 옛날의 엘프들은 별빛의 기사단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어긋났다는 점 역시. 최종적으로 타락해서 멜코의 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거듭나는 엘프 전사들도 매우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퍽)

결국 이 세상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별빛의 기사단이나 원탁의 기사들이나 엘프만큼이나 있을 법하지 않은, 있었을지도 모르는,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존재들의 슬픈 잔해와 함께.

일은 그렇게 되었더라.

그러나 이것은 오래 전의 일.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도다.


추신: 문득 떠오른 재미있는 (나름대로) 우연. 부록에 보니 한명의 주인공이 처음 시작에서 최종의 타락까지 가는데는 평균 스물 일곱번의 성장 굴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폴라리스의 이상적인 참가자 수는 네명. 그렇다면 27 곱하기 4는? (퍽)

7 thoughts on “비극과 아름다움의 함수 – 폴라리스

  1. Forgotten

    제 기억이 맞다면 이런 종류를 Bardic-이라고 한듯 한데요. 기존의 RPG 시스템과 섞어보면 어떻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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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yst

    스트라비우스의 Forever가 테마곡으로 딱이군요.
    어찌보면 토먼트의 “에스얀논의 통곡자”도 생각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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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로키

    Forgotten// Bardic이라는 구분이 있었나요? 섞어서 하는 것도 재밌겠군요.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가는 규칙 쪽은 얼마나 호응을 받을지 몰라도 진행자 역할의 분리와 일행 개념의 파괴는 확실히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할지도요.

    myst// 확실히 그렇겠군요. 쓸쓸하고 슬픈 분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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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Xenosia

    북극의 도시와 정 반대의 환경이긴 하지만,
    어제 이야기 됬던 이오닉스 동부사막의 소수부족같은 경우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지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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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로키

    Xenosia// 사막 부족 이야기도 멋지겠는데요. Kill the Sun이라.. 제목이 딱 어울리는데요. ‘후회’에서 나오는 괴물들의 수장이 태양의 검을 든 솔라리스 경이기도 하고요.

    Wishsong//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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