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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지다 1화 –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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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위험한 사랑의 상상은 날 위안한다
결국은 허무하게
모래처럼 날려 사라질
소진할 열정의 달콤한 폭주

차갑고 농밀한 나의 열정이
내 눈 먼 영혼을 잠식하면
뜨겁고 농염한 죄의 입맞춤
타락의 나락, 그 황홀

–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김윤아 노래)

요약

젊은 요정 군주 레드리스는 요정들의 성소인 아르베스 숲에서 황녀 아르테미시온과 깊어가는 감정을 느끼지만, 다음 황제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면서 아르테미시온은 곧 죽을 운명이 됩니다.(주:엔님의 세상을 바꾼 사랑 참조) 레드리스의 사촌형 나이라하는 아르테미시온과 연을 끊으라고 레드리스에게 경고하고, 레드리스는 자신의 마음 때문에 갈등합니다.

요정 기사 핀웰은 제국에 대한 반란군을 색출하러 와일드 헌트를 이끌고 요정 기사들과 함께 한 인간 마을을 살육합니다. 핀웰의 인간 부하인 요르문트는 학살에 경악하고, 몰래 인간 어머니와 어린아이를 탈출시켜주다가 발각당합니다. 핀웰은 요르문트의 간청대로 그들을 살려주는 대신 요르문트에게 미래에 자신의 요구 세 가지를 들을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레드리스의 대녀 스즈는 오라비 렌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가 이를 알게 된 전 약혼자 세이야가 렌을 눈앞에서 살해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레드리스는 때마침 난입(!)해 세이야가 스즈마저 죽이는 것을 막고, 렌의 죽음은 병사로 처리하고 시체는 화장하도록 지시합니다. 스즈는 렌과 사랑을 속삭이던 이니스 강변으로 혼자 떠납니다.

다시 레드리스와 핀웰의 시간대로 돌아와서, 아르베스 숲과 주변 마을의 요정 수호자인 펜나르는 인근 마을 사람 자비에르의 다급한 애원으로 ‘꽃의 귀부인’이라는 요정이 여신을 위한 제물로 납치해간 자비에르의 아들을 구출하러 달려갑니다. 펜나르는 오래 전에 사랑하는 사이였던 꽃의 귀부인에게 아이를 되찾으려고 분투하지만 결국 그녀의 환술과 자신의 마음에 지고 맙니다. 꽃의 귀부인이 자비에르를 조종해 아들의 목을 졸라 죽이게 하는 동안 펜나르는 자비에르의 절규와 죽어가는 아이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꽃의 귀부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감상

정말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첫 플레이였습니다. (…) 공통적인 평가는 일단 ‘재밌었다’입니다. 상당히 감정적으로 몰입도 되고, 장면들도 짤막짤막하지만 극적이고요. 아무도 혼자서는 생각해낼 수 없었을 서술이 4인 사이의 밀고 당기는 긴장 속에서 나오는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전통적인 진행자 중심 구조에서는 사실 자기 주인공이 등장하는 차례가 아니면 참가자의 완전한 관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반면, 폴라리스처럼 권한 분산형 플레이에서는 자기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이 아니어도 각자 역할이 있으므로 장면 하나하나마다 굉장히 관심도가 높았습니다. 마음 (주인공 조종)보다 달그늘 (주인공의 적과 시련 조종)이 더 재밌었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진행자 중심 구조는 일행 개념과도 직결되는데, 폴라리스에서는 일행 개념을 파괴해서 집단 모험 형식으로는 하기 어려운 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개개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는 장면들 진행하면서 일행을 유지하기는 좀 어려우니까요. 일행 구조를 벗어나고 나니 내밀한 감정과 인간관계, 성적 영역을 다루는 등 이야기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일행이 있으면 아무래도 모두의 모험이 초점이 되지 개별 주인공의 감정과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기는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에 중요했던 요인은 물론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참가자 4인이 서로 친하고, 호흡도 잘 맞고, 감각도 있고, 배경과 인물에 대해 관심이 깊은 점이 재미의 원동력이었겠죠. 규칙이나 구조는 그런 능력과 관계를 보조해주는 도구였고요.

레드리스 장면은 아무래도 처음이었던 만큼 규칙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인물의 행동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까지 서술한다는, 다른 RPG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 익숙해져야 하기도 했고, 또 서술권의 경계를 확고히 하는 등 준비체조 성격이 강했죠. 그러는 동안에도 뱀프님의 훌륭한 묘사라든지 젊고 순수한 레드리스의 감정 표현, 국가의 건설 캠페인 때부터 비련의 주인공으로 관심을 모았던 아르테미시온의 아련한 슬픔이 깔린 천진함 등이 와닿더군요.

핀웰 장면은 이제 좀 더 폴라리스의 규칙과 구조에 익숙해지면서 4인이 밀고 당기는 극적 긴장이 더욱 극명하게 살아났습니다. 와일드 헌트의 섬뜩한 아름다움, 요르문트에 대한 핀웰의 집착 등 요정의 어두운 면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죠. 네 명이서 각자 다른 역할로 척척 손발이 맞는 점도 멋졌고요.

스즈 장면은 결과가 대체로 정해진 것이라 자유도는 좀 제약이 있었지만 감정의 깊이는 상당했습니다. 스즈의 복잡한 심리라든지 세이야의 광기, 아르테미시온의 죽음 이후 사람이 달라진 레드리스의 이중인격(..) 등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인연과 감정이 짧은 장면에도 잘 나타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스즈를 괴롭혀줄 일이 기대됩니..(퍽)

펜나르 장면은… 펜나르는 선량한 녀석이었는데! ;ㅁ; 역시 폴라리스에는 그딴 거 없다는 걸 절감했어요..(…) 자비에르 아들은 죽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역시 자유도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펜나르를 위해 최선을 다해 교섭했습니다. 폴라리스의 극적 긴장은 각자 자기편을 위해 서술을 힘껏 끌고가는 데서 나오니까요. 정해진 역사에서 벗어나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되면 또 어떤 게 나올지 기대되네요.

그래도 결국 펜나르가 자기 마음에 진다는 건 아이가 죽는다는 결과에 부합하기도 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카라에 대한 마음 사이에 있는 갈등도 표현하니까 적당한 데서 항복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멋진 장면이었으니까요! 자비에르를 조종해 애를 죽인다는 엔님의 발상도 압권이었고요. ㅡㅡd

정말 즐거운 플레이였고, 함께해주신 세 분께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도 재밌게 플레이해요~

태양의 마지막 빛 – 요정

캐나다 작가 가이 가브리엘 케이 (Guy Gavriel Kay) 작품 ‘태양의 마지막 빛 (The Last Light of the Sun)’에 요정이 나오길래 해당 대목을 옮겨봅니다. 이번에 하는 폴라리스 플레이 ‘별이 지다’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배경은 우리 세계의 중세의 웨일즈 비슷한 땅입니다. 이야기 속의 알룬은 바이킹을 모티프로 한 에를링 족 약탈에서 방금 형을 잃고 그 잔당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숲에서 빠져나온 알룬은 공터로 나왔다. 그가 추격하는 기수가 숲속의 못을 돌아 남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말없는 고함과 함께 그는 에를링족이 타고 왔던 말을 얕은 못으로 몰았다. 못을 바로 가로질러 상대를 가로막으러.

그 순간 말이 갑자기 멈추자 알룬은 낙마를 간신히 면했다.

말은 겁에 질려 히힝거리며 앞발을 들어 공중에 휘저었다. 그리고는 도로 앞발을 내리고는 제자리에 굳었다. 마치 뿌리박혀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비는 그 반응을 더욱 과장한다. 어떤 사람은 겁에 질려 모든 것을 부인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품어온 꿈이 현실이 되는 기쁨에 몸을 떨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취했거나 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본질에 대한 깊은 신념을 삶의 기반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특히 이러한 순간에 취약하다. 예외도 있지만.

그날 밤 오윈의 둘째 아들이 그랬듯이 이미 삶이 조각조각 부서진 채 상처처럼 노출되고 약한 상태인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한 그의 이해가 틀렸다는 확인을 오히려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한결같지 않으며, 삶에 대한 반응도 한결같지 않으니까. 이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는 순간이 있다.

말이 뒷발로 섰을 때 알룬은 발이 등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말갈기를 붙잡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말의 앞발이 첨벙거리며 연못을 다시 쳤을 때야 간신히 자세를 안정시켰다. 칼이 얕은 물에 빠지자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말을 몰려고 했지만,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이 들려왔다. 알룬은 고개를 돌렸다.

있을 수 없는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오름처럼 창백한, 그러나 오늘은 달이 없는 밤. 다가오면서 음악소리는 커졌고, 연못의 수면 위에 걷고 말을 몰며 지나가는 그 밝은 행렬이 알룬 아브 오윈 앞을 지나갔다. 빛은 그들 주변에, 그들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밤의,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순간 변했다. 그 은빛을 내는 존재는 요정이었으며 알룬의 눈에는 그들이 ‘보였’기에.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요정이 여전히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의 신앙에 따르면 자드(주:이 세계에서 기독교의 신에 해당하는 존재)께 저주받은 이 악마들에게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했다. 동시에 춤추며 지나가는 행렬 한가운데 가마에 앉은 키 크고 날씬한 여인, 하얀 옷과 순백의 피부, 밝아오는 은빛 광휘 속에 쉴새없이 머리색이 변하는 그녀에게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두 감정 사이에 그는 마치 그물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해왔다. 음악은 점점 커지며 그의 심장박동처럼 높아만 갔다. 숨을 쉬라고 자신에게 되뇌어야 했다.

악령이라면 철로 물러나게 할 수 있으리라. 옛이야기에 따르면 그랬다. 그러나 검은 이미 떨어떠린 후였다. 태양의 표식(주:태양신인 자드의 숭배자들이 그리는 성호)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은 고삐를 잡은 채, 말은 못의 얕은 기슭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둘은 숨쉬는 석상처럼 행렬을 지켜보았다. 달 없는 숲 깊은 곳에서 혼백의 빛에 힘입어 알룬은 처음으로 그가 탄 에를링 말의 안장 천에 이교도의 망치 상징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여왕을 다시 보며–잔잔한 수면을 건너는 저 빛나는 존재, 희망이나 추억만큼 아름다운 그녀가 여왕이 아니면 누구겠는가?–알룬은 누군가 그녀와 나란히 말을 모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갈기에 방울과 리본을 엮은 채 걸음걸이 경쾌한 작은 암말에 탄 것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알룬은 가슴을 망치에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거기까진 할 수 있었다–소리를 지르려 했다. 손이든 발이든 움직이려고, 말에서 내려 달려가려고.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그는 굳은 말 위에 굳어 앉아 형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변했으되 전혀 변하지 않은, 마당에 죽어 쓰러져 있는데 여기서 밤의 연못 위로 말을 몰며, 알룬을 보거나 듣지 못하는 형은 한 손을 뻗어 요정 여왕의 새하얗고 섬세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들은 별빛 아래 못이 있는 공터로 나와 일제히 말없이 멈추었다. 순간 말들조차 침묵했다.

사제 케이니온 옆에 있는 사내가 태양의 표식을 그렸다. 사제도 뒤늦게 마찬가지로 했다. 숲 속의 연못, 우물, 떡갈나무 숲, 흙둔덕… 모두 반세계의 장소. 킨게일이 자드를 섬기기 전에, 신이 그들의 골짜기와 언덕에 찾아오기 전에 이교도의 성소였던 곳들.

숲 속의 못은 사제의 적이었다. 바티아라와 페리에르(주:프랑스에 해당)에서 건너온 첫 사제들은  바로 이런 물가에서 엄격한 기도문을 외우며경전을 읽어 거짓 영과 옛 마법을 쫓아냈다. 적어도 그러고자 노력은 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돌로 지은 예배당에서 신께 무릎을 꿇고서는 바로 쥐 뼈로 점을 치는 마녀에게 찾아가 미래를 묻거나 우물에 봉납물을 바치고는 했으니까. 아니면 별빛 아래 연못에. 케이니온은 입을 열었다.

“어서 갑시다. 물이고 숲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사제님.”

케이니온 옆의 사내, 태양의 표식을 그렸던 이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했다.

“왕자는 여기 있습니다. 보세요.”

그제야 케이니온은 물가에 선 말잔등에 가만히 앉은 소년을 보았다.

“자드여! 물로 들어갔어.”

누군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달이 없어. 달이 없는 밤이라고–홀린 거야.”

“음악이 들리나? 들어봐!”

시안이 갑자기 말했다.

“들리지 않소이다.”

루웨르트의 케이니온은 날카롭게 말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안이 다시 말했다.

“보세요. 덫에 걸린 겁니다. 움직이지도 못하잖아요!”

말들은 이제 기수들의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움직일 수 있지요.”

사제는 단숨에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숲과 밤, 빠르고 단호한 움직임에는 익숙했다.

“사제님! 사제님, 그만-”

케이니온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했다. 구하고 지켜야 할 영들이 있었다. 그의 과업. 어디선가 사냥하는 부엉이가 울었다. 밤의 숲에 어울리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소음. 사람은 미지를 두려워하기에 어둠을 두려워핬다. 자드는 빛의 존재, 악마와 혼백에게서 그의 자녀를 지키는 피난처일지니.

그는 빠르게 기도하고 바로 얕은 물에 첨벙거리며 들어가며 젊은 왕자를 불렀다. 소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옆에 다가서자 알룬 아브 오윈은 말을 하거나 고함을 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케이니온은 충격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두렵게도 정말로 음악이 들려왔다. 저 앞에, 오른편에서 희미하게 뿔고동과 피리, 현악기와 방울 소리가 물결 없는 연못 위로… 케이니온은 자드의 신성한 이름을 불렀다. 태양의 표식을 그린 그는 에를링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그가 말과 씨름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들의 영혼이, 신앙이 위험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무 저항이 없는 오윈의 아들을 안장에서 끌어내렸다. 젊은이를 한쪽 어깨에 메고 그는 첨벙거리고 비틀거리며, 거의 넘어질 뻔하며 못에서 나와 알룬을 물가의 풀밭에 눕혔다. 그는 젊은이 곁에 무릎을 꿇고 목에 건 원반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잠시 후 알룬 아브 오윈은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자 케이니온은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빛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기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낮고 억양 없이 젊은이는 말했다.

“보았습니다. 형을요. 요정들과 있었어요.”

“그럴 리가 없네.”

케이니온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자네는 마음이 슬픈 데다 외지에 나와 있고, 적을 죽이지 않았는가. 잘못 본 게야. 있을 수 있는 일이네, 오윈의 아들이여. 전에도 본 일이 있어. 잃어버린 이를 그리는 마음에 어디서나 그들을 보게 되지. 해가 뜨면 신의 자비로 착각을 깨달을 걸세.”

“형을 보았습니다.”

강조조차 필요없는 그 조용한 확신은 열의나 고집보다도 사제를 불안하게 했다. 알룬은 눈을 뜨고 케이니온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은 신성 모독이네. 나는 사제로서-”

“보았어요.”

케이니온은 어깨 너머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멀어서 듣지는 못했으리라. 연못은 유리처럼 고요했고, 숲속 공터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도 착각했을 것이다. 이런 장소의 기묘함에 그도 완전히 면역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이곳과 비슷한 다른 곳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언제나 떠오르면 밀쳐버리고 하는… 그도 오류를 범하는 사람, 선을 거부하는 시대에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필부일 뿐.

다시 부엉이 울음이 이제는 물 건너에서 들려왔다. 케이니온은 나무 위 창공에 가득한 별을 올려보았다.

에를링 말은 고개를 젓더니 히힝거리며 차분하게 못에서 걸어나왔다. 말은 고개를 숙이고 근처에서 풀을 뜯었다. 그 일상적인 광경을 케이니온은 잠시 지켜보았다. 그는 다시 알룬에게 주의를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같이 가세나, 알룬. 예배당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알룬 아브 오윈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도움 없이 일어나 앉더니 일어섰다. 그리고는 바로 연못으로 걸어들어갔다.

케이니온은 만류하려고 한 손을 들다가 소년이 허리를 굽혀 물에 빠졌던 칼을 집어드는 것을 보고 침묵했다. 알룬은 물에서 걸어나왔다.

“요정은 이제 갔습니다.”

마당 저편, 나무 무성한 비탈에 빛이 있었다.

횃불이 아니었다. 창백하고, 움직이지 않고, 깜박이지도 않는 빛.

그는 마치 추적자를 피해 숨는 사람처럼 얕게 숨을 쉬었다.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을 때에도 빛은 여전했다. 마당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해가 뜰 때가지 아직 한참 남은 봄의 밤중, 바람은 부드럽고 별빛은 밝았다. 고대로부터의 영광과 고통을 그리는 별들의 모양, 자드 신앙이 북쪽으로 오기 전부터 있었던 별자리. 인간과 짐승, 신과 반신. 밤은 무겁고 무한했다. 마치 빠져들 듯이.

비탈에 빛이 있었다. 알룬은 검대를 풀고 검을 떨어뜨렸다. 그는 마당 문을 빠져나가 언덕을 올랐다.

그가 철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이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뜻. 요정이 지날 때 못에 들어온 인간은 때로 그 이후에도 요정을 볼 수 있게 된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이지 않은 채 지켜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 그녀는 억지로 제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그녀는 여왕보다 키가 작았다. 알룬보다 머리 반쯤. 그는 그녀가 선 곳 바로 밑에서 멈추었다. 덤불 곁에, 탁 트인 비탈에 함께 서서. 그녀는 어린 나무 뒤에 반쯤 숨었다가 그가 멈추자 나왔지만, 여전히 나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알룬이 안다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 선 요정.

가녀린 몸에, 손가락은 아주 길고 미간은 넓었다. 얼굴은 작았지만 아이 얼굴은 아니었다. 녹색 옷은 양팔과 무릎을 드러냈다. 허리에는 꽃을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색깔이 계속해서 어지럽게 변하는 머리에도 꽃을 엮고 있었다. 별빛밖에 없었지만, 요정 자신이 내는 빛으로 볼 수 있었다. 마당에서 몇 발짝 걸어나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이야기 속의 반세계, 그가 지금 있는 곳.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바로 이런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백년 후에야 돌아와서 알던 이는 모두 죽은 후. 얇은 옷을 통해 작은 가슴이 보였다. 요정도 추위를 느낄까?

목이 메어서 아팠다.

“어떻게… 어째서 내게 당신이 보이는 거죠?”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요정의 머리는 창백해지며 거의 하얘지더니 다시 거의 금빛으로 돌아왔다.

“당신 연못에 있었죠. 내가… 당신을 구했어요.”

단순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평생 하프로 연주한 것은 음악이 아니었음을. 노래를 제대로 부른 적도 없다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어떻게… 어째서?”

그녀의 목소리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는 거칠게 들렸다. 별빛 밝은 공기를 멍들게 하는 소리.

“말이 물가에서 멈추게 했죠. 여왕에게 더 다가갔더라면 살해당했을 거에요.”

질문 하나는 대답을 받았지만 하나는 대답이 없었다.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거기 형이 있었어요.”

“당신 형은 죽었어요. 그의 영혼은 여왕의 행렬에 있죠.”

“어째서?”

요정의 머리는 이제 붉어지며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빛으로 볼 수 있었다.

“영혼을 내가 여왕께 데려갔어요. 오늘 전투에서 처음 죽은 이.”

다이 형은 나갔을 때 무기가 없었다. 처음 죽은 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알룬은 축축하고 차가운 풀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속삭였다.

“당신을 미워해야 하는데.”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요정의 목소리는 음악이었다. 그는 말을 곰씹으며 그녀를, 브린의 딸, 형의 시신이 누운 방에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평생 다시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까.

“여왕은… 여왕은 영혼을 어떻게…?”

요정은 처음으로 작고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지었다.

“그는 여왕께 사랑받을 거에요. 당신네 세상에서 온 이들,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여왕은 매혹당하죠.”

“영원히?”

머리는 보랏빛이 되었다. 작고 가냘픈 몸이 연녹색 옷 아래 너무나 희었다.

“영원한 게 뭐가 있나요?”

가슴이 텅 빈 느낌. 형이 있던 자리, 채워지지 않을 공허.

“그 다음에는? 그는… 어떻게 되죠?”

사제처럼, 지혜로운 아이처럼 엄숙하게, 그보다 훨씬 나이많은 존재의 엄숙함으로 그녀는 말했다.

“여왕이 싫증을 내면 그들은 행렬을 떠나가요.”

“어디로 가죠?”

목소리의 달콤한 음악…

“나는 지혜롭지 않아요. 나는 모른답니다. 물어본 적이 없어요.”

“유령이 될 거야.”

별빛 아래 무릎을 꿇은 알룬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혼자 떠도는 혼백, 길잃은 영혼.”

“나는 몰라요. 당신들의 태양신이 데려가지 않을까요?”

그는 풀에 손을 얹었다. 시원하고 일상적인 그 감촉. 배운 바에 따르면 자드는 지금 세상 아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괴물과 싸우고 있을 터. 그는 그녀 목소리의 음악 없이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모릅니다. 오늘밤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왜 연못에서 날… 구했죠?”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던 그 질문에 요정은 물처럼 물결치는 동작으로 두 손을 벌렸다.

“왜 당신이 죽어야 해요?”

“어차피 죽을 목숨이잖아요.”

“그래서 어둠을 향해 달릴 건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한 발짝 다가왔다. 무릎 꿇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손을 뻗으며. 손이 얼굴에 닿기 직전에 그는 눈을 감았다. 가히 압도적인 갈망의 존재. 자신을,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욕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밤공기 속에, 그녀 주변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알룬은 입을 열었다.

“가르침… 가르침을 받았어요. 빛이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당신 형에게도 그렇겠죠. 그게 진실이라면.”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손이 떨리자 그제야 그는 그녀도 그만큼 두렵고 흥분한 것을 깨달았다. 나란히 움직이되 닿지 않는 두 세계.

아니, 가끔은 닿기도 했다. 입을 열었지만, 미처 말하기 전에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 부재를 느꼈다. 하려고 했던 말은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몰랐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이미 열 발짝 떨어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어린 나무에 기대어 언제든 도망치려고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머리는 까마귀처럼 새까맸다.

돌아보자 누군가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놀람이라는 감정이 피처럼 흘러나간 기분이었다.

그날밤 알룬 아브 오윈은 아직 젊었다. 올라오는, 게다가 알룬이 아닌 요정을 바라보며 올라오는 사람을 알아본 순간 그는 평생 다시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브린 아프 휴울은 언덕을 올라와 알룬 옆에 웅크려 앉았다. 덩치 큰 사내는 풀을 몇 포기 뜯으며, 멀지 않은 곳에 선 빛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그녀가 보이는 겁니까?”

알룬은 낮게 물었다. 브린은 커다란 손바닥 사이에 풀잎을 문질렀다.

“반평생 전에 그 못에 들어간 일이 있었네. 여자에게 거절당하고 나서 혼자 숲을 걷고 있었지. 바보같은 짓이었지만, 여자에게 빠진다는 게 그렇지.”

“제가 그랬는지는 어떻게…?”

“시안의 부하가 보고하더군. 자네가 에를링을 둘 죽이고 케이니온이 꺼내올 때까지 연못에서 홀려 있었다고.”

“그가… 시안이 알고…?”

“아니네. 부하가 얘기한 건 거기까지야.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

“당신은 이해하신 겁니까?”

“그랬지.”

“그 오랜 세월… 그들이 보였던 겁니까?”

“볼 수는 있었지. 자주 보지는 못했어. 그들은 우리를 피하니까. 이 요정은… 좀 다르더군. 종종 여기에 오지. 아마 계속 같은 요정인 것 같아. 여기 브린펠에 있을 때면 가끔 보이지.”

“그랬는데 안 올라왔습니까?”

브린은 처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올라오기 두려웠네.”

“우리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아요.”

요정은 침묵하며 가녀린 나무 곁에 서서, 여전히 반쯤 도망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곳으로 이끄는 것만으로도 해칠 수 있네. 돌아오기가 어려워지거든. 자네도 옛이야기는 많이 들었겠지. 나는… 세상에서 할 일이 많네. 이제는 자네도 마찬가지지.”

케이니온이 아래 마당에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 우리를 떠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네.’

알룬은 브린을 보며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생각했다. 그 평생의 부담을.

“여기 올라오려고 칼을 푸셨죠.”

브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나보다 용감하게 둘 수야 있나.”

그는 밤하늘에 커다란 윤곽을 그리며 일어섰다.

“밤새 쭈그려 앉기에는 너무 늙고 뚱뚱해졌구만.”

나무 곁에 선 빛나는 모습은 다시 대여섯 발짝 물러났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이 아직도… 아파요.”

브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리라. 그 오랜 세월 이 목소리의 음악을 모르고… 반평생 전부터. 알고서도 말하지도 않고, 접근하지도 않은 그 의지력에 알룬은 감탄했다.

“칼은 풀었는…”

브린은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욕설을 내뱉고 신발 발목에 꽂은 나이프를 꺼냈다.

“사과하오. 그럴 의도는 아니었소, 정령이여.”

그는 몸을 돌리더니 강하게 앞으로 내딛으며 팔을 휘저어 나이프를 내던졌다. 칼은 밤하늘을 가로질러 크게 호를 그리며 언덕에서 벗어나 울타리를 넘더니 빈 마당에 떨어졌다.

저렇게도 멀리… 자신은 할 수 없으리라고 알룬은 생각했다. 그는 옆에 선 브린을 쳐다보았다. 에를링 약탈자들이 해마다 봄이나 여름에 나타나던 시절에 볼간을 죽인, 그나 다이가 태어나기 전, 어둡고 냉엄하던 시절. 그러나 바로 오늘 소규모의 실패한 약탈 중에 죽었어도 옛날에 볼간의 무리에게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것 아닌가. 그리고 영혼은…?

브린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내려가세. 가야 해.”

알룬은 시원한 풀에 무릎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은?

“그녀는 존재해선 안 되는 거겠죠?”

“누가 그러나? 요정 이야기를 남긴 우리 조상들이 바보였나? 그들의 매혹과 위험 이야기를… 그녀의 종족은 우리보다 오래 이 땅에 있었지. 사제들이 얘기는, 빛에 대한 우리 소망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거야.”

“그게 가르침입니까?”

알룬의 목소리는 쓰라렸다. 이곳, 별이 가득한 밤은 그녀의 빛 외에는 어두웠다.

그는 거의 의지에 반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나무에 기댄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색은 다시 밝았다. 나이프가 사라진 이후로. 그러나 다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녀 손가락의 감촉을, 꽃향기를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다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고 침묵했다.

“가르침이 진실임을 알잖나.”

요정은 나무 뒤에 서서 은은히 빛나며 머리칼이 동틀 적 동녘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브린 아프 휴울은 그녀가 아닌 알룬을 쳐다보았다.

“느낄 수 있잖나? 함께 내려가서 기도하세. 자네 형과 내 부하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냥… 등 돌릴 수 있어요?”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는 요정을 알룬은 마주보았다.

“그래야 해. 평생 그래왔고. 자네도 이제 그래야 하네. 자네 영혼과 앞으로 할 일을 위해.”

그 목소리에서 뭔가 엿들은 알룬은 다시 브린을 올려보았다. 어둠 속에 별빛을 가린 그는 흔들림 없이 마주보았다. 30년 동안 칼을 들고 싸워온 전사가. 앞으로 할 일… 옛 이야기가 옳다면, 두 달 중 하나라도 오늘 떴더라면 요정을 볼 일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이는 여전히 죽었겠지. 다른 모든 죽은 이도. 브린의 딸이 그렇게 도전했었고, 그는… 답할 말이 없어서 도망쳤었다. 가슴 속 공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알룬은 다시 요정에게 몸을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그를 지켜봐줘요.”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는 이해하겠지.

그녀는 몇 발짝 다가와 다시 어린 나무에 한 손을 얹은 채 마치 끌어안듯, 하나가 되듯 섰다. 브린은 등을 돌리고 단호한 결의로 비탈을 내려갔고, 알룬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를 따랐다. 그녀가 비탈에서, 다른 세계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

폴라리스 캠페인 ‘별이 지다’

국가의 건설 캠페인에서 우리들이 함께 만들어간 세계를 배경으로 폴라리스 (Polaris) 캠페인을 하기로 했습니다. 국가의 건설에서 중요한 정서적 축을 이루었던, 새로운 신앙과 시대 앞에서 사라져가는 요정들의 비극을 담은 캠페인으로요. 폴라리스는 전부터 해보고 싶은 규칙이기도 했는데 특히 우리가 함께 만들어간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더욱 기대되네요. 캠페인 제목은 일단 ‘별이 지다’가 될 것 같습니다.

자꾸 ‘별이 지다’ 생각이 떠올라서 공부하기도 싫고 폴라리스 번역을 시작했는데, 그중 플레이가 어떤 분위기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개격인 ‘시간 속에 얼어붙은 순간들’입니다. (이제 갓 시작한 규칙 번역본은 뱀프님, 승한님, 엔님이 보실 수 있게 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분위기나 예시를 이해하려면 배경도 필요할 것 같아서 순서대로 다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 얼어붙은 순간들

오랜 옛날, 이 세상의 북쪽에서도 가장 북쪽에 이 세상에 있던 모든 민족 중 가장 위대한 민족이 살았도다. 그들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햇살 속에 녹아 사라지는 눈송이처럼 죽어가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으리.

세상이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듯 그들도 파괴되어 이제는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순간들, 시간 속에 얼어붙은 파편뿐.

보라…

  • 얼어붙은 불모지에 혼자 선 아름다운 소녀가 별빛에 빛나는 도시를 지켜본다. 얼굴에 표정은 없으나 독살스러운 질투는 입술에서 눈송이가 되어 떨어진다.
  • 그의 피가 차마 붙잡을 수 없는 이질적인 꽃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동안 누이는 손을 감싼 채 울음을 참으며 칼날의 차가운 입맞춤을 기다린다.
  • 소용돌이치는 진눈깨비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들의 검광밖에 없다.
  • 그녀의 손짓 하나, 노래 한 소절에 부패한 의원들의 살이 찢어져 내리면서 그 밑에 꿈틀거리는 구더기가 드러난다.
  • 얼음의 무도회장에 가득 춤추던 수천의 남녀가 갑자기 멈추면서 무지갯빛 창밖에 막 모습을 드러낸 여명을 지켜본다.
  • 아름다움에 홀린 그는 발톱을 보지 못한다.
  • 빙하 골짜기의 가장자리에서 칼과 칼이 부딪는다. 하나는 별빛처럼 창백하게 노래하고 다른 하나는 태양처럼 불탄다. 기사는 적의 얼어붙은 불길과 같은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형을 알아본다.
  • 잠든 기사들의 무덤에서 그녀는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전사 위로 몸을 숙인다. 위로의 말을 속삭이며 그녀는 얼어붙은 입술에 부드럽게 입맞춘다.
  •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연인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는다. “용서해 줘.” 말하며 죽어가는 그는 그녀에게 축배를 든다.

이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니며, 아직 이야기가 아니로다. 남은 것은 이것뿐. 만들어가는 것은 그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