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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 Tell: 실험적 2인용 RPG

간단하게 해볼 수 있는 RPG 같아 이곳에서 본 것을 원저자 허락 받고 번역합니다. 실제 플레이 실험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해보신 분들은 플레이 로그를 주신다면 감사감사하죠.
말하고 전하기
– 2인용 RPG
인물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평범한 사랑 이야기의 장면들을 채워가는 놀이입니다.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플레이해보세요.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플레이하기 바랍니다.
한 명은 ㄱ, 한 명은 ㄴ 역할을 합니다. ㄱ은 ㄱ으로 시작하는 이름, ㄴ은 ㄴ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짓습니다. (역주: 원문은 A와 B. 작명하기 어려우면 이쪽으로 해도 되겠군요. 아니면 갑돌이 을순이? ㅋㅋ) 인물을 맡은 본인 혹은 상대 참가자가 이름을 지으면 그대로 정합니다.
– 말하기: 인물의 입장에서 대사만 합니다.
– 전하기: 서술만을 합니다. 대사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아래 장면 요약을 두 사람 다 가지고 있도록 합니다. 두 사람 다 이름 등 세부사항을 적을 수 있는 필기수단을 준비합니다. 작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서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플레이합니다.
아래 장면들을 1번부터 끝까지 합니다. ㄱ과 ㄴ은 어느 장면을 누가 말하거나 전하는지 표시합니다. ㄱ+ㄴ이라면 같이 합니다. 어떻게 분배할 지는 자유롭게 정합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손으로 ‘커트’해서 장면을 끝낼 수 있습니다. 이때는 장면을 바로 끝냅니다. 장면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장면을 시작합니다.
흐름을 따라가면서 재미있게 플레이하세요!
1. ㄱ: ㄴ을 처음 본 이야기를 전합니다.
2. ㄴ: ㄱ을 처음 본 이야기를 전합니다.
3. ㄱ+ㄴ: 둘의 첫 대화를 말합니다.
4. ㄱ+ㄴ: 심각한 사고를 당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5. ㄱ+ㄴ: 병원 침대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하는 대화를 말합니다.
6. ㄱ: 청혼을 말합니다.
6. ㄴ: 청혼에 대한 반응을 전합니다.
6. ㄱ: 답변을 기다리는 심정이 어떤지 전합니다.
6: ㄴ: 결혼하겠다고 하자 ㄱ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전합니다.
7. ㄱ: ㄴ이 구두가게에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8. ㄱ: 두 사람이 살 곳을 구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9. ㄱ+ㄴ: 두 사람의 전화통화를 말합니다.
10. ㄱ+ㄴ: 말하기: ㄴ은 걱정하는 어머니와 통화하고, ㄱ은 그 대화에 대해 논평하거나 끼어듭니다.
11. ㄱ: 결혼식 후 두 사람만의 저녁식사를 계획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11. ㄴ: 결혼식 후 저녁식사 때 ㄱ에게 한 말을 말합니다.
11. ㄴ: 두 사람이 결혼식에서 춤춘 이야기를 전합니다. (역주: 우리 문화에는 맞지 않는 듯하군요. 폐백이라든지 손님들에게 인사다니는 걸로 대체해도 되겠습니다.)
12. ㄱ+ㄴ: 첫 아이를 낳거나 입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13. ㄱ+ㄴ: 아이의 세례식과 이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역주: 백일잔치로 대체해도 되겠네요.)
14. ㄴ: 셋이서 아이의 첫 생일을 기념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역주: 아니면 돌잔치 얘기)
15. ㄱ+ㄴ: 아이가 잘못했을 때 ㄱ이 어떻게 벌을 주었는지, 그리고 ㄴ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전합니다.
16. ㄱ+ㄴ: 일상적인 말다툼을 말합니다.
17. ㄱ+ㄴ: 아주 심각한 싸움을 말합니다. 언성을 높이고, 둘 중 하나가 아주 상처가 되는 말을 하며 끝냅니다.
18. ㄴ: 공원에 있는 ㄱ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19. ㄱ+ㄴ: 두 사람 중 하나가 이혼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고 다른 쪽이 반응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20. ㄱ+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이야기를 말합니다.
21. ㄱ: 이혼 후 사는 곳의 모습을 전합니다. 아주 자세히 묘사합니다.
22. ㄱ+ㄴ: 두 사람의 마지막 전화통화를 말합니다. 연결상태가 좋지 않아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표현합니다.
아래는 원저자가 요청한 저자 소개입니다.
Tomas HV Mørkrid
– Norwegian game-smith
– games: Muu, Pervo, Fabula
– inventor of the role-playing poetry genre

피아스코: 욕망의 비극, 또는 희극

흔히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이란 곧 지옥이라고도 하지요. 인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기대하고 좌절을 맛보고, 가질 수 없는데 소유하고자 하고,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남이 채워주기를 바라면서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 하나씩은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런 고통을 달래줄 도피처를 찾아 헤맵니다. 돈을 벌면, 성공하면, 날씬해지면, 예뻐지면, 술을 마시면, 네가 나를 사랑하면,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라고, 아니면 잠시 잊을 수는 있을 거라고 되뇌며 비틀거리는 나약한 우리. 그런 인간에게 인간관계란 고문관 없는 고문실이나 다름없습니다.

피아스코 표지fiasco
낭패
a fiasco failure
대실패.
피아스코 (Fiasco: A Game of Powerful Ambition and Poor Impulse Control, 2009 Bully Pulpit Games)는 바로 그런 관계와 욕망이 얽히고 섥히는 놀이입니다. RPG에서 일반적으로 놀이의 시작이자 기본단위는 인물입니다. RPG라는 말 자체가 인물의 역할 (Role)을 맡는 (Playing) 유희 (Game)를 가리키고 있지요. 반면 피아스코의 플레이 준비는 인물이 아닌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A는 설정표를 잠시 보다가, 굴려놓은 주사위 중 3을 골라서 관계 분류 3인 ‘과거’를 자신과 플레이어 B 사이에 설정합니다. 다음 B는 6으로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과거 분류 중 6번인 ‘안 좋은 가족사’를 고릅니다. A와 B는 아직 인물 설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인물은 불미스러운 가족사라는 관계에 얽혀있게 됩니다.

피아스코 설정 단계에서 참가자들은 미리 굴려둔 주사위를 골라서 설정표에 나오는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그 인간관계에 붙는 욕구, 장소와 물건도 마찬가지로 고릅니다. 그 인간관계의 당사자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계의 망을 짜면서 차차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피아스코의 인물은 관계의 망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니까요.
관계에는 욕구, 장소, 물건 중 한 가지가 붙습니다. 플레이어 C는 4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욕구 분류의 4번인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를 고릅니다. 다시 차례가 돌아온 플레이어 A는 역시 4가 나온 주사위를 집어들어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 욕구의 4번인 ‘경찰에게 망신을 줘서 친구들에게’를 고릅니다.
불미스러운 가족사하고 경찰을 망신주는 일이 어떻게 연관이 될까 서로 얘기해보다가, A는 B가 경찰이고 A는 그의 숨은 아들이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다른 플레이어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하지만, 일단 다른 관계와 욕구·장소·물건도 설정해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합니다.
관계와 그에 붙는 부속을 다 설정했으면 그에 맞추어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하고 플레이에 들어갑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자신의 인물이 나오는 장면을 합니다. 이때 참가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장면을 시작하고 다른 참가자들이 성패를 정하거나,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시작하고 자신이 스스로 성패를 정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성공에는 흰 주사위, 실패에는 검은 주사위를 스스로 고르거나 참가자들에게 받으면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관계를 설정한 후에 A는 불량 고등학생 애니, B는 애니의 어머니를 오래전에 버린 경찰관 빌, C는 빌에게 쫓기는 마약 딜러이며 애니의 남자친구인 찰리라고 정합니다.
차례가 돌아온 A는 스스로 장면을 설정하기로 합니다. 새로 산 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과속을 하다 걸린 애니는 단속 경찰관 빌을 알아보고는 친구들 앞에서 빌에게 망신을 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애니는 빌에게 그 나이가 되도록 교통단속이나 한다고 살살 약올리기 시작합니다.
B와 C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성공이라는 표시로 둘이서 하얀 주사위를 골라 A 앞에 놓습니다. B가 맡은 빌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답을 못하다가 애니를 홧김에 체포해버립니다. 애니는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등뒤에 손으로 승리의 V를 그리지요. 애니는 단번에 친구들 사이에 영웅이 됩니다.
장면을 설정하고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참가자의 의지이기에, 놀이 속 인물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맡은 참가자 역시 계산을 하고 눈치보고 견제하는 구도를 이루게 됩니다. 장면과 성패 규칙은 참가자끼리 이야기에 대한 기대심리와 욕구가 다른 그 미묘한 긴장을 이용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점점 치닫는 이야기를 이끌어내지요. 욕구가 서로 엇갈리고, 그 욕구를 위해 서로 이용하는 동안 서술의 양상은 계속해서 어긋나며, 균열은 점점 커집니다. 놀이 속에서나, 그리고 밖에서도.

자기 차례가 돌아온 C는 A와 B에게 장면을 설정해달라고 합니다. 빌이 마약거래 현장에서 찰리를 쫓는 장면은 어떻겠느냐고 A가 제안하고, B도 동의합니다. 마약 거래 현장을 포착한 빌은 찰리를 쫓아 달리고, 찰리는 정신없이 달아납니다. 뒷골목을 따라 쫓기던 찰리는 리볼버 권총 (둘의 관계에 붙은 부속물)을 들어 빌에게 겨누는데…! 성공하고 달아나되 경찰을 쏜 중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붙잡힐 것인가? C는 고민하다가 결국 검은 주사위를 들어보이고, 찰리는 총을 겨누다가 무서워서 쏘지 못한다고 서술합니다. B가 맡은 빌은 달려와서 찰리를 한 방 먹이고는 수갑을 채웁니다.

피아스코에서 주사위는 정말로 용도가 다양한 도구입니다. 위에서 다루었듯 설정과 성패 결정에도 사용하지만, 이야기 완급을 조절하고 결말을 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주사위를 반 소모하면 1막이 끝나고, 남은 주사위를 굴려서 반전 (The Tilt)을 설정표에서 고릅니다. 그리고 2막을 하면서 나머지 주사위를 소모하고, 마침내 결말에 도달합니다.

1막을 끝내고 세 참가자는 반전을 정합니다. A는 2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반전표에서 ‘비극’을 고르고, B는 1이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비극 중 1번인 ‘느닷없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세 사람은 이야기 끝에 찰리가 총기 오발로 경찰을 죽여서 경찰에 대대적으로 쫓기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반전을 몇 개 정하고 잠시 쉬었다가 돌아와 2막을 시작합니다.

2막에 나머지 주사위도 전부 소모했으면 각 참가자 앞에는 흰색과 검은색 주사위가 쌓여 있게 됩니다. 여기서 인물을 해피엔딩으로 이끌고 싶다면 하얀 주사위 혹은 검은 주사위만 있는 것이 최상이며, 두 가지 색이 비등하게 있으면 최악입니다. 결말을 이끌어내려면 하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하고 검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한 다음에 높은 쪽에서 낮은 쪽을 뺍니다. 그 최종 결과가 높을 수록 해피엔딩이고, 0이나 음수이면 배드엔딩입니다. 어차피 8~9쯤은 되어야 그나마 현상유지를 하므로 해피엔딩이 나오기는 확률상 쉽지 않습니다.
2막까지 끝나고 이제 모든 주사위를 소모했습니다. 빌 앞에는 하얀 주사위 3개에 검은 주사위 하나가 있습니다. 하얀 주사위를 굴리자 4 + 2 + 2 = 8이 나오고, 검은 주사위는 1이 나옵니다. 8 – 1 = 7 이고 하얀색이 높으므로 결과는 백7입니다. 애니는 흑14, 찰리는 백3이 나옵니다.
결말표에서 찾아본 결과 흑13이 넘은 애니는 더 좋을 수가 없는 결말이 나오고, 백7인 빌은 실패하고 감옥에 가며, 백3인 찰리는 파멸합니다. 애니는 감옥에서 억만장자의 아들을 만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빌은 찰리의 총기오발을 가장해 동료 경관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가며, 찰리는 빌의 죄가 드러나기 전에 유치장에서 당한 폭행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됩니다.
플레이 중 참가자는 되도록 검은색 혹은 흰색 주사위만 많이 얻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2막에는 자기 장면의 성패 주사위를 스스로 가지지만, 1막 중에는 남에게 주게 되어 있거든요. 즉, 1막에는 한쪽 주사위만 많아지지 않도록 견제당하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가자 사이에 치밀한 거래와 배신이 판을 치기 십상이지요. 2막 들어서는 자기 주사위를 자기가 가지므로 다른 참가자들에게 장면 설정을 부탁하고 한쪽 주사위만 늘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추가할 수 있는 주사위는 2개입니다. 게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설정하므로 사건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겠지요. 결국 피아스코의 타인은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아스코를 한 판 마치고 나면 망가진 인생과 부서진 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과 이상할 정도로 행운이나 불운의 지배를 받는 인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막장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헤어날 수 없는 인연의 끈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공허 속에 허우적거리다 파국을 맞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비쳐주는 거울 아닐까요? 이지러진 것이 거울인지 아니면 자신의 얼굴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주사위

주사위에 운명을 걸어볼까요?

[일일 플레이 후기] 역사를 지키는 자와 바꾸는 자! <타임키퍼즈>

네이버 TRPG 카페 제7회 일일플레이가 8월
7일에 있었습니다. 성황리에 치러진 행사였고, 아주 재밌었지요. 저는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으로 한 테이블을 맡았는데, 이때 플레이한 가상의 TV 드라마는 <타임키퍼즈>라는 시간여행/느와르 첩보물이었습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사용자 삽입 이미지안방극장 대모험은 간략한 인물 능력치와 판정을 통해 인물의 관계와 내적 갈등, 그리고
협력적인 이야기 만들기를 강조한 규칙입니다. 그 창의적인 디자인 때문에 2004년 인디 RPG 상의 ‘올해의 인디게임’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04년 ‘올해의 인디게임’이었던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에 이어 2위였으니, 포도원의 개들과 같은 해에 심사받은 불운(?)만 아니었다면 수상했을 작품이지요.

안방극장 대모험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마치 텔레비전을 보면서 와 멋있다, 으 쟤
뭐야 수다떨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가슴 두근거리는 재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재미를 느끼려면 무엇보다 참여자 전원이 가슴이 뛰고
흥분될 만한 배경과 인물이 필요합니다. 즉, 배경과 인물을 설정하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모두의 흥미도를 확실하게 확보해야 전체
시즌을 무리 없이 끌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안방극장 대모험은 도저히 제가 시나리오나 인물을
만들어갈 수가 없는 규칙이었습니다. PD (진행자)가 일방적으로 만든 설정으로는 플레이의 재미를 살리는 데 필수적인 감정적 몰입을
도저히 이끌어갈 수 없었거든요. 그리고 사실 저 자신이 시나리오 쓰는 걸 무지 싫어하기도 합니다. 즉흥성이 강한 저는 참가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해서 서로 즐거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며, 참가자의 취향이나 욕구를 모른 상태로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런 면에서 안방극장은 저에게 잘 맞는 규칙이기도 합니다. (2008년 초에도 도쿄의 달이라는 메이지 유신 시대물 시즌을 즐겁게 완결한 적이 있었죠.)

그래서 저는 이번 일일 플레이를 준비하며 기획에 아예 플레이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습니다. 즉, 어떤 시리즈를 만들 것인가 일체
정하지 않은 채 참가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결정하고 인물을 만들어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죠. 시간은 좀 들어도 그렇게 해야만
안방극장 대모험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테스트 플레이를 한 결과는 꽤 재미있고 유쾌하기는
했지만, 몇 가지 개선점은 있었습니다. 우선 기획 단계를 완전히 자유롭게 진행하다 보니 다소 무질서했고, 그 혼란 속에서 모두의
선호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인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하게도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물의 내면이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인물의 깊이가 부족해서 극단적인 전개와 과장에 의존하는, 소위 ‘막장’ 플레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신없이 웃으며 하긴 했지만 극적 완성도는 아무래도 부족했죠.

테스트 플레이의 경험과 피드백을 바탕으로
저는 기획 절차를 체계적으로 하고자 간단한 설문지를 만들었습니다. (첨부 파일 참조) 그리고 인물에 대한 논의를 기획의 한 단계로
추가했습니다. 또한, 원래 플레이 계획은 1화짜리 파일럿을 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제 돌려본 결과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파일럿은 생략하고 5 세션을 몰아서 1 시즌을 완성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모로 테스트 플레이는 플레이상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재밌게 플레이해주시고 좋은 조언 주신 테스트 플레이어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일플날 아침, 이제 준비는 되었습니다. 앗, 그런데 가장 중요한, 판정에 사용할 트럼프 카드가 없었습니다! 테플 때는 승한에게
빌렸었는데, 승한이 하는 새비지 월드에도 카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깜박 잊은 것이지요. 왠만한 편의점에는 있겠거니 생각하고 일단
집을 나섰습니다. 이번 플레이는 어떤 모습이 될까 기대 반, 긴장 반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타임키퍼즈’가 탄생하기까지

먼저 도착해 있던 저는 참가자 중 처음 도착하신 까까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알고보니 방송 전공이시라는 말씀에 급 쫄아들었죠.
이후 빅베어님과 페르소나님, 그리고 맛난파이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한 분 오실 때마다 설문지를 한 장씩 드렸는데, 그렇게
개별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전체 다 모이기 전에는 규칙 설명이나 기획을 하기가 어려운데, 그렇다고
잡담만 하면서 주의가 흩어지는 것보다는 플레이와 관련이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각자 작성할 수
있는 설문지가 제몫을 한 것 같습니다.

설문지를 모아 내용을 정리해본 결과 장르 선호도는 판타지, 역사물, 군사물
순이었고, 인물끼리의 복잡한 관계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에 대한 욕구가 높았습니다. 인물 유형은 개성과 엉뚱한 매력, 동시에
냉철한 전문성에 대한 욕구도 있었고요. 그 결과에 토대를 두고 어떤 시리즈를 할까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게
논의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논의의 틀이 생기니 기획 과정에 한결 틀이 잡힌 것 같았습니다. 까까비님이 (전공자답게!) 의견을 잘
정리해주시고, 파이님이 취향을 구체적으로 어필하시고, 빅베어님과 페르소나님이 세세한 의견을 내주셔서 차차 시리즈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빅베어님의 제안은 거의 그대로 최종안이 되기도 했지요.

그렇게 해서 나온 설정은 역사를 그대로
지키려는 집단과 역사의 비극을 지워버리려는 적대 집단 간의 갈등,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네 명의 인물 이야기였습니다. 꼭 마법이
아니라도 환상과 도피의 요소가 있고, 그러면서도 시대물이나 위기 극복에 대한 욕구도 충족할 수 있는 시간여행물/첩보물이 괜찮다는
총의를 형성해갔지요.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을 내본 결과 나온 설정과 인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타임 키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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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가려는, 말하자면 역사 수호대입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원래 그대로 지켜가려는 이 집단은
장차 다가올 대재앙, 적사병 (The Red Death)으로 인류의 90%가 몰살당하는 역사마저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재앙을 막으려는 타임 브레이커즈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고, 그 싸움이 1기의 근간을 이룹니다.

비밀 집단인 타임
키퍼즈는 대외적으로는 적절하게도 (?) 스위스의 유서깊은 시계회사 네프 주식회사입니다. 설립자인 네프의 후손이 네프사의 회장인
동시에 타임 키퍼즈의 최고지도자입니다. 그 밑에는 간부와 요원, 그리고 각종 보조직이 있습니다. 요원은 흔히 키퍼라고 합니다.

타임 브레이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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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사병 발발을 막으려는 집단으로, 타임 키퍼즈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적사병에 인류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문명이 파괴된 이후 원래의
타임키퍼에서 갈라져나왔거나, 조직 자체의 목적이 변해 타임 브레이커가 되었습니다. 이들 요원은 흔히 브레이커라고 합니다.

준 (암호명 Pers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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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키퍼의 젊은 엘리트 요원으로, 키퍼 코드명은 ‘페르소나’입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 페르소나님이 맡으신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타임키퍼에서 요원으로 길러진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꿈에도 모른 채 명령을 따릅니다.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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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숨기고 과거로 온 타임 브레이커 요원입니다. 다가오는 적사병 발발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준을 납치해오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준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면서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채 프리랜스 작가로서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까까비님이 맡으신 인물이었습니다.


Mr. M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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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키퍼의 주요 간부 중 하나로, 준의 직속 상사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준의 아버지라는 것도, 준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숨긴 채 오직 회장인 제임스 네프의 명령만을 맹종하며 살아왔습니다. 빅베어님의 PC입니다.

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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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박사로서, 여러 해 전에 적사병 바이러스를 개발한 장본인입니다. 준의 생모이기도 하지요. 타임키퍼가 적사병을 악용하지 않을까
두려워진 그녀는 적사병 치료약을 개발하다가 타임키퍼의 추적을 받게 되었고, 미스터 마와의 결혼생활도 파국을 맞았습니다. 결국
아들마저 잃어버리고 그녀는 키퍼 요원을 피해 시간과 공간을 도망다니며 치료약 개발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맛난파이님이 담당하셨습니다.

<타임키퍼즈> 제1기

1화

1952년, 정은경 박사는 타임키퍼의 눈을 피해 6·25 사변 중에 미군 병원에서 일하면서 적사병 치료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때 정체불명의 남자가 미군으로 변장한 채 그녀에게 총을 겨누는데… 정 박사는 탈출에 실패하지만, 때맞춰 도착한 타임키퍼 준이
남자를 제압합니다. 정 박사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던 준은 이 암살자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도망치는 정 박사를 무시하고
습격자를 생포해 21세기로 귀환합니다.

심문 결과 습격자는 타임 브레이커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타임 브레이커에서도 정은경 박사를 노린다는 것을 알고 미스터 마는
이 사실을 네프 회장에게 보고합니다. 한편, 격무에 시달리던 와중에도 준은 유리에게서 온 문자를 보고 따스한 웃음을 짓습니다.
네프 회장에게 보고하고 돌아온 미스터 마는 숨겨둔 사진 속에 활짝 웃고 있는 자신과 은경, 그리고 어린 아들을 보며 회한에
잠깁니다.

타임 브레이커에서는 이번에는 준을 노립니다. 준은 제때 시간이동을 하지만, 시간이동 손목시계에 총탄이 스쳐 시계가 오작동을 하자
마치 악몽과 같은 시대로 이동합니다. 파괴당한 도시의 잔해 속에서 괴생명체에게 위협당한 그는 총을 든 여인에게 구조를 받고,
그에게 다른 손목시계를 준 여인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바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타임키퍼와는 다른 문양의 손목시계에 의지해 자기
시대로 돌아온 준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낍니다.

2화

정 박사는 치료약을 완성하고자 이전에 한 번 성공했었던 항체를 되찾을 계획을 세웁니다. 20년 전, 타임키퍼에 쫓기던 그녀는
항체를 어린 아들에게 주입해 숨긴 후 아들을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에 태우고, 키퍼들의 주의를 끌며 다른 시대로
탈출했었습니다. 박사는 아들을 떠나보낸 그 순간으로 이동해 배에 탄 아들에게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계획을 눈치챈 미스터 마
역시 선상에 나타납니다. 얌전히 있으라며 잠시 사라졌던 엄마가 갑자기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자 혼란에 빠진 준은 미스터 마에게
매달리고, 은경을 기절시킨 미스터 마는 준을 데리고 사라집니다. 준은 이렇게 해서 타임 키퍼 요원으로 자라나게 된 것이죠.

한편, 현재에서는 유리가 계속해서 준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방치하자 브레이커 요원이 찾아와 유리를 강제로 미래로 송환하려고 합니다.
유리의 문자를 받고 집으로 찾아온 현재의 준은 그 모습을 보고 브레이커를 제압하지요. 준이 경찰을 부르러 간 사이 유리는
브레이커 요원의 시계를 작동시켜 미래로 돌려보낸 후, 범인이 도망쳤다고 둘러댑니다. 한편, 그녀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거의 완성한
소설이 보입니다. 레드 바이러스와 적사병, 문명의 멸망을 그린 묵시록이…

3화

출판사 사장은 유리의 소설에 크게 흡족해하고 출판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타임키퍼의 정보망을 통해 타임키퍼에
알려지고, 작가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안 지도부는 미스터 마를 통해 준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필명으로 쓴 소설의 작가를
찾아내 죽이라는 것이지요.

조사 결과 소설의 작가가 유리라는 것을 깨달은 준은 갈등하다가 유리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합니다. 유리는 혼쾌히 그러마고
하지요.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의 펜션에 도착한 그들. 그날 밤, 준은 유리에게 총을 겨누며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궁합니다. 유리는 명령이 아니라 너 자신의 판단으로 방아쇠를 당기라고 하고, 준은 끝내 쏘지 못합니다. 유리는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고, 레드 바이러스와 적사병, 그녀가 떠나온 지옥 같은 미래를 그에게 알려줍니다. 준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갈등합니다.

한편 은경은 중세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치유사로 숨어지내다가 타임 브레이커 요원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의 설득 끝에 타임
브레이커즈와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박사는 미래의 그들이 보유한 적사병 지식을 이용해 결국 적사병 항체를 완성합니다.

4화

준이 명령을 어긴 것을 안 네프 회장은 미스터 마에게 준을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아침에 펜션에서 나온 준과 유리는 기다리던
미스터 마와 대면합니다. 유리는 그를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미스터 마는 결국 아들을 쏘지 못합니다. 네프가 보낸 또 다른 요원이
명령을 대신 수행하려고 하자 미스터 마는 요원에게 총을 겨누고, 준과 유리에게 도망치라고 합니다. 차를 몰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준과 유리는 멀리서 울리는 두 발의 총성을 듣습니다.

타임 브레이커즈를 통해 정 박사의 존재를 알게 된 유리는 준을 데리고 은경을 만나러 갑니다. 그곳에서 준은 미스터 마와 은경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과, 자신의 몸에 레드 바이러스 항체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지요. 그는 고뇌에 빠지지만 그것도 잠시, 항체와
치료약이 한곳에 있는 기회를 포착한 네프 회장은 타임키퍼즈를 보내 준과 유리, 정 박사가 있는 건물을 포위합니다.

5화

타임키퍼 요원들에 대항해 준과 유리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중과부적입니다. 준이 적 사이로 잠시 퇴로를
확보하자 은경은 치료약을 유리에게 쥐어주고, 두 사람의 퇴로를 가로막은 채 레드 바이러스를 자신에게 주입합니다. 순식간에 그녀는
마치 구울(ghoul, 시체먹는 괴물)과 같은 괴생명체로 변해 타임키퍼 요원을 학살합니다.

몇십 년 후, 같은 장소. 건물은 무너지고, 도시는 파괴당해 불타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한 여인이 총을 들고 도시의 폐허를
순찰하고 있습니다. 문득 소리를 들은 그녀는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달려가고, 그 자리에 나타난 준을 지켜줍니다. 그녀는
변이한 은경이 과거의 준을 해칠 수 없도록 막지요. 타임 브레이커 문양이 있는 자신의 시계를 준에게 던져준 중년의 유리는 준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떠나라고 합니다. 그 옛날, 미스터 마와 은경의 희생에 힘입어 탈출했던 젊은 자신과 준이 이 미래를 막아주기를
바라며…

감상과 평가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기획부터 탄탄해서 끝까지 진정성 있는 전개가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장면 신청과 판정, 승자와 서술권자의 분리 등 의외성과 협동성을 함께 살리는 장치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주 역동적이었어요. 어디선가 본 듯한 것도 물론 많았지만, 그렇다고 꼭 감동이라든지 개연성이 떨어지지도 않더라고요. 협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주 즐거웠고, 결과물도 괜찮았습니다.

아쉬웠던 점이라면 우선 저의 준비성이 있겠지요. 트럼프 카드는 끝내 못 구해서 아이팟 앱으로 대신했는데, 큰 문제는 없었고
공간활용 면에서는 오히려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카드 크기나 가독성은 한계가 있었고, 가뜩이나 행사 준비로 정신이 없는
두하군에게 부담을 준 것이 미안했습니다. 앞으로는 준비를 철저히 해서 민폐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Card Table 스크린샷

Card Table 앱을 잘 썼습니다


또 하나 개선할 점이라면 판정의 성공과 실패의 결과 설정 부분이었습니다. 판정이 실패해서 이야기가 재미없을 만한 결과는 판정
결과에 걸어서는 안 되는데, 그 점을 제가 잘 설명하거나 지도하지 못해서 가끔 판점 부분이 삐걱였습니다. 예를 들어 준을 데려가는
선상 장면에서는 은경과 미스터 마가 둘다 PD에게 져서 ‘은경도 준의 피를 못 뽑아가고, 미스터 마도 준을 못 데려간다’는
결과가 나와 결국 준이 미스터 마를 자발적으로 따라간다는 식으로 빠져나갔지요.

선상 장면은 그나마 나았습니다만, 더 심각하게도 5화에는 ‘전원이 타임키퍼에 잡힌다’는 판정 결과가 나와서 이야기 진행을 위해
사실상 판정 결과를 무시해야 했습니다. 저럴 때는 탈출하느냐 못 하느냐를 판정 결과에 거는 대신, 성공하든 실패하든 탈출은 하되
희생 없이 탈출할 수 있는가라든지 치료약을 가지고 탈출하느냐라든지 하는 것을 판정에 걸어야 했죠. 이런 점을 당시에 바로잡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소리가 울려서 의사소통 자체에 좀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했고요.

참가자분들은 RPG를 1~2 세션 해보셨거나 페르소나님처럼 아예 처음인 초보들이셨는데, 이건 뭐 초보 숙련자 나누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수준급으로 잘해주셨습니다. 발랄한 대화와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테이블 분위기를 밝게 해주셨던 까까비님 (유리), 스토리를
안정감 있게 끌어가시면서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RP를 하신 빅베어님 (회상 장면 하나 없이 끝난 눈물의 마씨 아저씨ㅠㅠ),
주인공으로서 극의 호흡을 이어가는 동시에 가히 악마적인 반전을 엮어넣으신 페르소나님 (준), 그리고 평소 조용하시면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드라마틱한 전개를 주도하신 맛난파이님 (은경) 모두 함께하기 즐거웠던 실력파 참가자들이셨습니다.

하나 재미있는 현상이라면 진행자와 참가자, 혹은 참가자 사이의 서술권 구분이 그닥 뚜렷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기존 RPG
관념에 익숙하지 않으신 참가자분들이라서 그런 면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숙련자분들과 함께한 테스트플레이 때도 나타난 현상인 것을
보면 안방극장 대모험이 그런 점을 유도하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다 보니 참가자분들이 조연에 대한 서술도 하시고, 다른
참가자의 주인공에 대한 서술도 하시는 게 재밌더라고요. 사실 생각해보면 그런 서술권 구분을 꼭 엄격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테스트 플레이나 이전 도쿄의 달 때도 담당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을 때 참가자가 조연을 맡는다든지 해서 원활하게
돌린 것을 생각해보면 기존 RPG의 서술권 구분이 꼭 필요한가 하는 재고도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이상 제7회 일일 플레이 안방극장 대모험 미니캠페인, <타임키퍼즈>를 소개하고 분석해 보았습니다. 좋은 플레이 해주신 참가자분들과 수고해주신 스탭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렇듯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네이버 TRPG 카페 인디 페스티벌 ‘귀신잡는 가족’ 후기

그저께 인디 페스티벌에 한 플레이는 드레스덴 파일 RPG로 한 서울 배경 현대 판타지로,
박수무당 아버지와 세 자녀가 납치당한 손녀/조카딸 지수를 찾는 얘기였죠. 꽤나 오랜만의 마스터링이었는데, 제가 잠이 너무
많아서(..) 결국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세션을 맞이해서 많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인물과
시나리오를 미리 만들려고 하면 저는 심각하게 막히더라고요. 제 평소 방식은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다같이 논의하고, 같이 모인
자리에서 캐릭터를 제작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참가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한 후 인물 배경과 참가자의 극적 욕구를 반영해
제 취향을 버무리는 것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인물과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해가는 방식은 그런 사전 논의가 없어서 결정을 준비하는 데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준비해가는 진행은 저에게 안 맞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캐메 자료와 예시 캐릭터 시트를 충분히 준비해가서 각 참가자가 인물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 시트를
수정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저께도 보니까 불완전한 시트를 보충하거나 있는 시트를 수정하는 등 준비해간 시트도 잘
고쳐서 사용하시더라고요.

이렇듯 저의 준비 부족이 아쉽기는 했지만 참가자분들이 워낙 재밌게 RP를 하셔서 무사히
세션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루영익님이 하신 능청스럽고 돈 밝히면서도 자식들을 끔찍이 아끼는 박수무당 아버지 박상규, 시드님의
신실하면서도 한 성질 하는 조폭출신 열혈목사 큰아들 박문형, 화련님의 활 무지 잘 쏘면서도 왠지 눈에 안 띄는 딸 캐릭터 박보경,
그리고 휴님이 하신 초 유능한 오타쿠 환상술사 박재형 등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살아있고 유쾌해서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에
구미호 잡은 후에 다같이 가죽 벗기고 꼬리 자르고 하는 거 보니 과연 악역은 어느 쪽이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는 했지만요.


적으로는 모두가 개성과 능력을 잘 발휘하셨던 것 같아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귀신 부르는 능력이나 목사 아들의 기도와 축복 능력,
딸네미의 최강 궁술, 그리고 막내의 넷상 정보수집력과 환상술을 다들 잘 활용하셔서 사건을 해결하셨습니다. 애당초 드레스덴 파일
RPG에 관심이 생겼던 이유가 영능력자와 일반인이 한 일행에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일반인(?)인 딸이 최강자였던 것 보면
그 장점은 여기서도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제 준비 부족으로 전투가 좀 시시한 듯하여 아쉬웠습니다. 특히
초자연물에서는 보경의 양궁 스턴트 같은 강한 공격력이 무조건 최강자가 되는 것은 지양할 방법이 있었는데 (무기가 안 통하는
괴물이라거나), 그런 방법을 생각 못했던 게 후회스럽네요.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가족 인물 RP와 참가자들의
문제해결 과정이 돋보이는 플레이였다고 생각하며, 함께 해주신 네 분 참가자께 감사드립니다.

폴라리스 번역 공개 중단

폴라리스 (Polaris) 번역을 링크해둡니다. 공개는 권한제로 제한하고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개별적으로 연락 주세요.

또한, 번역을 공개받으신 분들은 폴라리스를 해보거나 읽은 감상을 글로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로 달아주시거나, 엮인글을 걸어주셔도 좋고요. 짤막해도 상관없고, 그냥 읽거나 해본 후 떠오르신 것을 적으시면 됩니다.

2008/7/4 추가: 읽기 권한을 받으신지 한 달 (7월 4일 이전에 권한을 받은 분은 7월 4일부터 한 달) 이내에 감상문을 쓰지 않으시는 분은 읽기 권한 해제합니다. 읽어보실 기회는 충분하셨을 테니 사실 지금 해제해도 문제는 없으리라고 보지만, 혹시라도 불편이 있을까봐 공지하는 의미에서요.

2010/5/1 추가: 원작자 허락도 없는 무단 번역이지만 해놓은 김에(..) 몇 분께만 보여드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규모가 커져서 앞으로 새 권한 신청은 받지 않겠습니다. 부탁드린 것과는 달리 감상문 올리신 분이 거의 없기도 했고요. 현재 권한 있으신 분은 일주일 후에 접속이 차단되며, 공지를 조금이라도 확실히 하고자 글을 최신으로 띄워둡니다. 그동안 폴라리스 번역에 보여주신 관심에 감사드리며, 원작자인 벤 레만 (Ben Lehman)씨와 얘기가 잘 된다면 나중에 좀 더 정식으로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막힌다면 다른 길을 찾아라

저번 일일 플레이 뒤풀이 때에 다른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와 비슷한 고충을 느끼고 계신 점이 놀라웠던 기억이 납니다. 두 분 모두 WoD, 겁스 등의 캐릭터 시트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점이 저와 비슷했지요. 시트를 짤 수는 있는데 효과적으로 만들기는 어렵다는 고충을 함께 나누기도 했고요.

그와 관련하여 다른 두 분은 아직 진행 (마스터링)을 맡으신 적은 없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누구보다 규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므로 규칙 운용과 시트 짜기에 자신이 없다면 당연히 맡기 어려울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구르고 깨지다 보면 결국에는 해낼 수 있겠지만, 처음에는 심리적 부담감과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겠지요.
저도 마찬가지로 겁스나 D&D처럼 제가 잘 모르는 규칙이었다면 아마 아직도 마스터링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몇 번 플레이를 한 겁스도 시트를 짜려고 하면 멀미부터 나니까요. 분명히 읽어본 규칙인데도 옆에서 얘기하고 있으면 외계어 같고요. 정도는 덜하겠지만 저와 얘기하신 분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규칙을 플레이하는 것 이상으로 마스터링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저는 RPG를 시작한지 약 6개월 후에 진행질(?)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도 대부분 참가보다는 진행을 맡았습니다. 1년 반짜리 캠페인을 진행해서 종결을 보기도 했고, 수많은 단편과 중편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진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저에게 맞는 규칙으로 진행을 하고, 그런 규칙이 안 보이면 찾아나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규칙을 찾아보라는 바바 히데카즈씨의 글과 각종 RPG를 소개한 존 킴씨의 사이트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진행을 해본 규칙이 주인님과 함께 (My Life with Master)였지요.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간단한 규칙, 그리고 서사와 규칙의 밀접한 관계가 서사와 참가자의 서사 제어를 중시하고 복잡한 규칙을 싫어하는 제 취향에 잘 맞아서 성공적으로 캠페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진행자로서 사용한 규칙도 이와 특징이 비슷한 인디 RPG, 내지는 이야기를 규칙으로 다루는 이야기 놀이 (story game)였죠.
결국 진행을 잡기 어렵다면, 혹은 RPG에 흥미가 떨어진다면 답은 ‘난 진행을 못한다’나 ‘RPG는 재미없다’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한다’일 확률이 높습니다. RPG는 워낙 다양성이 풍부한 놀이인지라 특정 형태의 RPG에 재미를 못 느낀다면, 그러면서도 인물성 표현과 사회적 창작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면 아마도 다른 형태의 RPG가 끌릴 것입니다.
RPG에 길은 무수히 많습니다. 어렵다면, 재미를 못 붙인다면, 혹은 권태를 느낀다면 다른 길로 가보면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아니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요. RPG에서 해볼 수 있는 시도에 제한은 없으며, 그것이 RPG의 재미이기도 합니다.

유니버설리스를 이용한 게시판 플레이에 대한 생각

유니버설리스 (Universalis)는 아직 끝까지 못 봐서 소개하지 못한 책인데, 그야말로 이야기 만드는 놀이입니다. 토큰이라는 자원을 써서 인물이나 배경 요소 등 극적 요소를 만들고, 서로 진행에 대한 의견이 다를 때는 교섭 규칙을 매개로 교섭하거나 교섭이 안 되면 극적 요소의 특징과 토큰을 사용해 서술권을 두고 경합을 벌이는 방식입니다. 진행자 (GM) 개념이 없고, 전담하는 인물도 없고, 특정 인물의 역할을 맡는 RP는 부차적인 등 RPG 범주에서는 좀 벗어나 있죠.

전에 소개한 게시판 플레이용 규칙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도 토큰 (연구자금) 사용 등 유니버설리스의 영향이 꽤 있는데, 아예 유니버설리스를 게시판 플레이에 활용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유니버설리스에서도 사건과 인물 등을 추적하는 기록자를 두게 되어 있는데, 그럴 바에야 아예 놀이 자체를 기록으로 해도 될지도요.

수정주의 역사에 비해 유니버설리스의 장점이라면 놀이 단위가 연구 기사가 아니라 장면이므로 형식과 내용의 제한을 덜 받는다는 점. 근거 제시와 결론을 생각할 필요없이 소설 형태로 쓸 수 있고, 후대에 남을 만한 기록과 증거를 따질 필요가 없으므로 내면 묘사라든지 사적 대화처럼 기록이 안 남는 내용도 쓸 수 있죠. 장면은 꼭 시간 순서로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나 먼 미래로 장면 배경을 옮기려면 토큰이 더 들기는 합니다.

어려움이라면 유니버설리스는 기본적으로 대면 상황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게시판이나 위키상으로 하려면 교섭과 대결이 까다로워진다는 점. 비동시성 플레이인데 반박이 시간 제한을 너무 받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고, 그렇다고 단일 서사인데 오래 전에 지나간 장면이 나중에 뒤집혀서 이후 전개가 다 영향을 받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시성 플레이와는 달리 얘기가 나오면 바로 반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일 서사와 서술권의 객관적 규율의 장점을 둘 다 취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수정주의 역사의 단순성과 유니버설리스의 서술 자유도를 결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유니버설리스에서 하듯 연구가 아닌 허구 그 자체를 다루고 극적 요소를 토큰으로 관리하되, 수정주의 역사처럼 글을 쓰는 시간 순서는 자유롭게 하고 참조 규칙을 사용해서 그 글에 근거해 쌓인 서술이 많을 수록 반박하기 어렵게 할 수 있겠죠. 아니면 그냥 수정주의 역사에서 연구 관련을 빼버리고 경매는 순전히 참가자끼리 해서 소설 쓰는 놀이로 할 수도 있고, 가능성은 이것저것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Beast Hunters

비스트 헌터 (Beast Hunters) 위키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규칙 요약은 권한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승한님과 뱀프님은 권한 드렸으니 로그인하고 보세요.) 엔님 연락이 있으면 폴라리스 하고, 안 그러면 비스트 헌터를 하도록 할까요.

덧: 내일 대회 관계로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아직 시간이 안 정해져서 혹시 제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되도록 오후로 얘기하고 있는데 아직 답이 없네요. 못 가게 되면 여기나 MSN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본격 연애 시뮬레이션 ‘얼음깨기’

얼음깨기 (Breaking the Ice)는 에밀리 케어 보스 (Emily Care Boss)의 2인용 RPG로, 두 주인공이 세 번 데이트하는 내용을 플레이한 후 그들이 이루어지는지 정하는 내용입니다.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연애물이죠. Breaking the ice라는 원제 자체도 모르는 사람끼리 어색하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외에도 여기에서는 맥락상 몇 가지 함축적 의미가 있겠지만요.

규칙이 다루는 것은 곧 그 놀이의 대상입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인 얼음깨기에는 연애 외적 요소인 HP나 힘, 심지어는 기능 규칙도 없습니다. 대신 매혹과 공감, 갈등이 있지요. 그 외에 ‘직업: 웹 디자이너’라든지 ‘애완견 뽀삐’ 등 주인공의 특징을 표현하는 키워드도 있지만, 그러한 키워드를 포함해 규칙은 연애라는 주제 하나에 몰려 있습니다.

이렇듯 규칙이 제약적인 점은 취향이나 용도에 따라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바바 히데카즈의 강좌에 나왔듯 배경 세계가 무한한 선택에 의미있는 제약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면, 규칙은 그 선택에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주면서 선택을 추가적으로 제약하는 효과를 냅니다. 그 제약의 정도가 규칙을 만들 때 내리는 결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얼음깨기는 그 제약이 심한 편이어서 딱 두 사람이 세 번의 데이트를 하는 얘기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그런 내용의 플레이를 하고 싶다면 규칙의 제약성은 장점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얼음깨기는 의도하는 용도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규칙이겠죠.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얼음깨기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는 상당히 넓습니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세 번의 만남 동안 겪는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는 형태인 것은 맞지만, 그 틀 내에서 세 ‘데이트’는 철수와 영희가 같이 공부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는 내용일 수도 있고, 두 적대국의 스파이가 임무를 수행하며 총탄과 유혹을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에 시하야님과는 마법사와 전사가 같이 던젼을 탐사하며 연인이 되는 BL물 플레이를 하기도 했죠. 두 주인공의 연애감정을 중심에 놓기만 한다면 거의 어떤 배경의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다는 점이 ‘제약 내의 범용’이라는 역설입니다.

이렇게 연애감정에만 초점을 맞춘 규칙으로 개별 행동의 성공은 어떻게 정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규칙으로는 행동 판정은 하지 않습니다. 즉, 성공하기 원한다면 성공한다고 서술하면 되고 (‘추근대는 깡패들을 단번에 다 때려눕혀요!’), 실패를 원한다면 실패한다고 서술하면 됩니다 (‘깡패들한테 덤비다가 늘씬하게 얻어맞습니다’). 개별 행동의 성공과 실패는 규칙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규칙상 성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패를 가리는 대상이 다를 뿐이죠. 규칙은 행동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가리지 않고, 위에서 설명했듯 이 규칙의 진짜 대상인 연애감정, 즉 매혹과 공감이 증가하고 유지되느냐를 판정합니다. 깡패들을 다 때려눕힐 수도 있고 괜히 덤볐다가 실컷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매혹이나 공감을 얻고 데이트 사이에 매혹을 유지하는지는 자유 서술이 아니라 판정으로 정합니다.

참가자가 원하면 무조건 행동에 성공한다는 것은 묘한 일 같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동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원하면 성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실패를 ‘원하면’ 되니까요. 실패를 원할 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대방 참가자가 실패를 제안할 때, 두 번째는 이미 실패한 주사위를 다시 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말이 되게 얼음깨기 규칙을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얼음깨기는 진행자가 따로 없는 대신 두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능동 참가자 (Active player)와 길잡이 (Guide) 역할을 맡습니다. 능동 참가자는 장면 묘사, 조연 담당 등 주변 환경 서술을 맡는 동시에 자기 주인공을 움직여서 상대방 주인공에게 점수를 따려고 애씁니다. 요리를 해준다든지, 깡패를 때려눕힌다든지, 아름다운 호숫가로 데이트 장소를 잡는다든지 등등.

상대방인 길잡이는 능동 참가자의 서술이 마음에 들면, 혹은 주사위 종류에 따라 조건을 충족했다고 판단하면 주사위를 줍니다. 즉, 능동 참가자가 따려는 ‘점수’를 주사위 형태로 건네주는 것이 길잡이의 역할입니다. 능동 참가자는 길잡이에게 이들 6면체 주사위를 받아서 굴리고, 5 또는 6이 나온 주사위마다 성공입니다. 성공 3개로는 매혹, 4개로는 공감을 하나 올릴 수 있죠.

이와 같이 길잡이가 주사위를 지급하므로 능동 참가자는 길잡이의 마음에 들게 노력해야 하고, 자연히 길잡이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행동에 대해 길잡이의 제안이 있으면 (‘여기서는 깡패들한테 얻어맞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은데?’) 그 결과가 행동 실패라 하더라도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꽤 큽니다. 이것은 전에 얘기했던 가상현실과 극적 요소 중심 판정 (승민님의 더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묘사 중심과 서사 중심) 중, 후자에서 게임 내 현실을 규칙이 아닌 공감으로 정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실패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아닌 ‘원해서 하는 실패’라는 점도 재미있고요.

행동이 실패한다고 서술할 만한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재굴림 규칙입니다. 주사위 종류에 따라서는 실패를 다시 굴릴 수 있는데, 그 조건은 망신을 당한다든지, 위험에 처한다든지, 사이가 나빠진다든지 해서 뭔가 데이트가 잘 안 풀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굴림 규칙을 활용하려고 하면 주인공은 완벽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주인공이 상대와 맺어지기 어려운 사유인 갈등을 서술에 등장시키면 주사위를 더 받는 규칙 역시 주인공의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모습 표현을 포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 참가자가 2~3번씩 차례를 돌려가며 하고 나면 한 번의 데이트가 끝나고, 세 번의 데이트를 마치고 나면 그 동안 유지한 매혹 점수를 모두 굴려서 성공만큼 최종 매혹 점수를 냅니다. 그리고 매혹과 공감 수치를 참조해서 두 주인공이 맺어지는지 보고, 그에 맞게 두 사람이 이후 어떻게 되는지 후일담을 서술합니다.

규칙이 자체 완결적인 이야기에 추진력을 더해주고 진행자가 없다는 점 등 얼음깨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규칙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 중 첫째로 꼽고 싶은 것은 게임적 긴장감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두 참가자 사이에는 ‘얘네를 맺어주자’ 하는 공통된 목적이 있어서, 제 경험상 게임 플레이는 ‘둘이 협력해서 최대한 성공 짜내기’의 연속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주사위 종류마다 한도와 조건이 다르므로 (데이트가 잘 풀릴 때, 잘 안 풀릴 때, 갈등이 나올 때, 공감이 나올 때 등등) 두 참가자가 규칙에 따라 협력하면서 나오는 이야기 자체는 다양하고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얼음깨기 규칙의 진짜 의의일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때로는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더 굴릴 주사위가 없을 때까지 데이트를 질질 끌기도 하는 점은 오히려 이야기의 재미를 해친다고 봅니다. 두 참가자의 이익이 일치하다 보니 (성공을 짜내자!) 데이트를 적당한 데서 끊을 만한 반작용이 얼음깨기에서 시스템상 부족한 점이었다고 봅니다.

두 번째 문제라면 규칙이 좀 복잡하다는 점입니다. 인물 만드는 데까지는 쉬운데, 플레이 절차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매혹 주사위, 보너스 주사위, 재굴림 주사위, 갈등 주사위, 공감 주사위 등등 주사위 종류도 꽤 많고, 보너스와 매혹 중 실패가 재굴림의 한도이며 갈등 주사위는 재굴림에 해당 없고… 어렵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좀 지저분한 느낌이었달까요.

그와 관련해, 규칙에 따르다 보면 데이트의 각 턴이 너무 도식적이기 쉽다는 점도 단점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잘 보이면서 점수를 따다가 (보너스 주사위) 뭔가 계속 잘못되고 (재굴림 주사위 하나씩), 좀 길어지다 보면 (성공이 3개 안 나와! ;ㅁ;) 이 관계에 대한 고민거리가 등장하거나 (갈등 주사위) 두 사람의 공통점이 드러나거나 (공감 주사위) 하는 식으로요. 물론 이 간단한 도식 내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만, 몇 번 하다 보니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같은 디자인상 허점이 있기는 하지만 얼음깨기를 하면서 재미없었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던젼을 헤매는 모험가에서 현대 한국의 남녀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다뤄본 플레이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고, 여전히 둘이 모여서 가볍게 하기에 괜찮은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적당히 밀고 당기는 맛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비해서 너무 다정다감했을지도요. (웃음)

결론적으로 얼음깨기는 중심 소재인 연애에 초점을 맞춘 ‘연애 시뮬레이션’을 통해 게임성과 극적 재미를 연계시키는 흥미로운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부분도 있고 실패한 부분도 있지만, 놀이를 통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잘 보여주는 규칙이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