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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코: 욕망의 비극, 또는 희극

흔히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이란 곧 지옥이라고도 하지요. 인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기대하고 좌절을 맛보고, 가질 수 없는데 소유하고자 하고,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남이 채워주기를 바라면서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 하나씩은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그런 고통을 달래줄 도피처를 찾아 헤맵니다. 돈을 벌면, 성공하면, 날씬해지면, 예뻐지면, 술을 마시면, 네가 나를 사랑하면, 부모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라고, 아니면 잠시 잊을 수는 있을 거라고 되뇌며 비틀거리는 나약한 우리. 그런 인간에게 인간관계란 고문관 없는 고문실이나 다름없습니다.

피아스코 표지fiasco
낭패
a fiasco failure
대실패.
피아스코 (Fiasco: A Game of Powerful Ambition and Poor Impulse Control, 2009 Bully Pulpit Games)는 바로 그런 관계와 욕망이 얽히고 섥히는 놀이입니다. RPG에서 일반적으로 놀이의 시작이자 기본단위는 인물입니다. RPG라는 말 자체가 인물의 역할 (Role)을 맡는 (Playing) 유희 (Game)를 가리키고 있지요. 반면 피아스코의 플레이 준비는 인물이 아닌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A는 설정표를 잠시 보다가, 굴려놓은 주사위 중 3을 골라서 관계 분류 3인 ‘과거’를 자신과 플레이어 B 사이에 설정합니다. 다음 B는 6으로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과거 분류 중 6번인 ‘안 좋은 가족사’를 고릅니다. A와 B는 아직 인물 설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인물은 불미스러운 가족사라는 관계에 얽혀있게 됩니다.

피아스코 설정 단계에서 참가자들은 미리 굴려둔 주사위를 골라서 설정표에 나오는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그 인간관계에 붙는 욕구, 장소와 물건도 마찬가지로 고릅니다. 그 인간관계의 당사자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계의 망을 짜면서 차차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피아스코의 인물은 관계의 망 속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니까요.
관계에는 욕구, 장소, 물건 중 한 가지가 붙습니다. 플레이어 C는 4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욕구 분류의 4번인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를 고릅니다. 다시 차례가 돌아온 플레이어 A는 역시 4가 나온 주사위를 집어들어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 욕구의 4번인 ‘경찰에게 망신을 줘서 친구들에게’를 고릅니다.
불미스러운 가족사하고 경찰을 망신주는 일이 어떻게 연관이 될까 서로 얘기해보다가, A는 B가 경찰이고 A는 그의 숨은 아들이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다른 플레이어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하지만, 일단 다른 관계와 욕구·장소·물건도 설정해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합니다.
관계와 그에 붙는 부속을 다 설정했으면 그에 맞추어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하고 플레이에 들어갑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자신의 인물이 나오는 장면을 합니다. 이때 참가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장면을 시작하고 다른 참가자들이 성패를 정하거나,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시작하고 자신이 스스로 성패를 정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성공에는 흰 주사위, 실패에는 검은 주사위를 스스로 고르거나 참가자들에게 받으면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관계를 설정한 후에 A는 불량 고등학생 애니, B는 애니의 어머니를 오래전에 버린 경찰관 빌, C는 빌에게 쫓기는 마약 딜러이며 애니의 남자친구인 찰리라고 정합니다.
차례가 돌아온 A는 스스로 장면을 설정하기로 합니다. 새로 산 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과속을 하다 걸린 애니는 단속 경찰관 빌을 알아보고는 친구들 앞에서 빌에게 망신을 주기로 마음먹습니다. 애니는 빌에게 그 나이가 되도록 교통단속이나 한다고 살살 약올리기 시작합니다.
B와 C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성공이라는 표시로 둘이서 하얀 주사위를 골라 A 앞에 놓습니다. B가 맡은 빌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답을 못하다가 애니를 홧김에 체포해버립니다. 애니는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등뒤에 손으로 승리의 V를 그리지요. 애니는 단번에 친구들 사이에 영웅이 됩니다.
장면을 설정하고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참가자의 의지이기에, 놀이 속 인물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맡은 참가자 역시 계산을 하고 눈치보고 견제하는 구도를 이루게 됩니다. 장면과 성패 규칙은 참가자끼리 이야기에 대한 기대심리와 욕구가 다른 그 미묘한 긴장을 이용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점점 치닫는 이야기를 이끌어내지요. 욕구가 서로 엇갈리고, 그 욕구를 위해 서로 이용하는 동안 서술의 양상은 계속해서 어긋나며, 균열은 점점 커집니다. 놀이 속에서나, 그리고 밖에서도.

자기 차례가 돌아온 C는 A와 B에게 장면을 설정해달라고 합니다. 빌이 마약거래 현장에서 찰리를 쫓는 장면은 어떻겠느냐고 A가 제안하고, B도 동의합니다. 마약 거래 현장을 포착한 빌은 찰리를 쫓아 달리고, 찰리는 정신없이 달아납니다. 뒷골목을 따라 쫓기던 찰리는 리볼버 권총 (둘의 관계에 붙은 부속물)을 들어 빌에게 겨누는데…! 성공하고 달아나되 경찰을 쏜 중죄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붙잡힐 것인가? C는 고민하다가 결국 검은 주사위를 들어보이고, 찰리는 총을 겨누다가 무서워서 쏘지 못한다고 서술합니다. B가 맡은 빌은 달려와서 찰리를 한 방 먹이고는 수갑을 채웁니다.

피아스코에서 주사위는 정말로 용도가 다양한 도구입니다. 위에서 다루었듯 설정과 성패 결정에도 사용하지만, 이야기 완급을 조절하고 결말을 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주사위를 반 소모하면 1막이 끝나고, 남은 주사위를 굴려서 반전 (The Tilt)을 설정표에서 고릅니다. 그리고 2막을 하면서 나머지 주사위를 소모하고, 마침내 결말에 도달합니다.

1막을 끝내고 세 참가자는 반전을 정합니다. A는 2가 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반전표에서 ‘비극’을 고르고, B는 1이나온 주사위를 골라서 비극 중 1번인 ‘느닷없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세 사람은 이야기 끝에 찰리가 총기 오발로 경찰을 죽여서 경찰에 대대적으로 쫓기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반전을 몇 개 정하고 잠시 쉬었다가 돌아와 2막을 시작합니다.

2막에 나머지 주사위도 전부 소모했으면 각 참가자 앞에는 흰색과 검은색 주사위가 쌓여 있게 됩니다. 여기서 인물을 해피엔딩으로 이끌고 싶다면 하얀 주사위 혹은 검은 주사위만 있는 것이 최상이며, 두 가지 색이 비등하게 있으면 최악입니다. 결말을 이끌어내려면 하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하고 검은 주사위를 굴려 합산한 다음에 높은 쪽에서 낮은 쪽을 뺍니다. 그 최종 결과가 높을 수록 해피엔딩이고, 0이나 음수이면 배드엔딩입니다. 어차피 8~9쯤은 되어야 그나마 현상유지를 하므로 해피엔딩이 나오기는 확률상 쉽지 않습니다.
2막까지 끝나고 이제 모든 주사위를 소모했습니다. 빌 앞에는 하얀 주사위 3개에 검은 주사위 하나가 있습니다. 하얀 주사위를 굴리자 4 + 2 + 2 = 8이 나오고, 검은 주사위는 1이 나옵니다. 8 – 1 = 7 이고 하얀색이 높으므로 결과는 백7입니다. 애니는 흑14, 찰리는 백3이 나옵니다.
결말표에서 찾아본 결과 흑13이 넘은 애니는 더 좋을 수가 없는 결말이 나오고, 백7인 빌은 실패하고 감옥에 가며, 백3인 찰리는 파멸합니다. 애니는 감옥에서 억만장자의 아들을 만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빌은 찰리의 총기오발을 가장해 동료 경관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가며, 찰리는 빌의 죄가 드러나기 전에 유치장에서 당한 폭행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됩니다.
플레이 중 참가자는 되도록 검은색 혹은 흰색 주사위만 많이 얻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2막에는 자기 장면의 성패 주사위를 스스로 가지지만, 1막 중에는 남에게 주게 되어 있거든요. 즉, 1막에는 한쪽 주사위만 많아지지 않도록 견제당하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가자 사이에 치밀한 거래와 배신이 판을 치기 십상이지요. 2막 들어서는 자기 주사위를 자기가 가지므로 다른 참가자들에게 장면 설정을 부탁하고 한쪽 주사위만 늘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추가할 수 있는 주사위는 2개입니다. 게다가 다른 참가자들이 장면을 설정하므로 사건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겠지요. 결국 피아스코의 타인은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아스코를 한 판 마치고 나면 망가진 인생과 부서진 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과 이상할 정도로 행운이나 불운의 지배를 받는 인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막장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헤어날 수 없는 인연의 끈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공허 속에 허우적거리다 파국을 맞은 인간 군상의 모습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비쳐주는 거울 아닐까요? 이지러진 것이 거울인지 아니면 자신의 얼굴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주사위

주사위에 운명을 걸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