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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도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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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환님이 참가하실 수 없어서 나머지 두 분 참가자와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스타워즈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도전자 (Contenders)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배경은 서울, 주인공은 자기가 자라난 고아원을 지키려는 김현석, 결핵에 걸린 여동생 병원비를 내려고 백방으로 뛰는 이지형, 촉망받는 프로 지망생이었지만 일단 술집에 다니는 애인 지현의 빚부터 갚아주려고 내기 권투에 뛰어든 최동주 셋입니다.

요약

현석, 지형, 동주는 각자 사정으로 공사장 인부 일, 편의점 아르바이트, 프로 선수 스파링 상대 등 돈을 버느라 바쁘게 뛰어다닙니다. 현석은 많은 돈을 받고 프로 권투선수를 습격해서 시합을 할 수 없도록 부상을 입히고, 서로 얼굴은 알아보지 못한 채 그를 막으려던 동주에게서 도망칩니다.

이후 동주는 안씨가 하는 허름한 체육관에서 트레이너 일을 하며 돈을 좀 벌고, 주먹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던 현석에게 제대로 권투를 가르칩니다. 현석은 동주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지형은 잠도 못 자가며 일을 하던 중 편의점에 든 강도를 막다가 다칩니다.

시합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은 현석과 동주는 서로 시합 상대라는 것을 알고 놀라지만, 둘 다 꼭 돈이 필요해서 시합을 하기로 합니다. 동주를 ‘최 선생님’으로 모시는 현석은 동주의 시합 준비를 돕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 지형은 시합을 보러 와 동주에게 돈을 걸지만, 현석은 3라운드에서 심판 몰래 반칙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습니다.

현석의 반칙을 똑똑히 봤던 지형은 심판이 현석의 손을 들어주기 전에 뛰쳐나와서,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해도 얻는 게 없는 자기 처지에 울분을 참지 못합니다. 시합에 이긴 현석은 동주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지만 동주는 승자로서 당당해지라고 말합니다. 지현을 위해서라면 이 진흙탕도 참아낼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다음날, 지형이 또 병원비를 늦게 내며 간호사의 닦달을 견뎌내던 중 전날 시합의 상처 때문에 병원에 온 동주가 간호사에게 한 마디 하고, 지형의 여동생 민영의 담당의가 마침 나와 지형의 편을 듭니다. 이 의사는 동주가 프로를 지향하던 시절부터 알던 사람인 것이 밝혀지고, 동주와 지형은 서로 인사합니다.

감상

이전에 미묘군과 일상물 RPG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제 경험 중 일상물에 가장 가까운 게 이 플레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좀 막장 처절 일상(..)이긴 하지만 일, 인간관계, 훈련 등 장면 유형 때문에 자질구레하고 구질구질한 얘기들이 꽤 비중이 있었습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일상 속의 감동?

그런 면에서 권투 시합 장면은 일상의 구차함을 벗어나는 의미가 커보였습니다.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꿈을 표상하는 한편 (돈 때문에 왔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열광하는 지형의 모습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났죠) 그런 몸부림을 압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요.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굴레라는 긴장이 재밌었습니다. 따라서 수적으로는 적어도 극적 비중은 큰 시합 장면의 비중을 비교적 세세한 규칙으로 표현한 것은 규칙 설계상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시합 장면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라운드별로 어떤 전술을 선택할까, 희망과 권투 능력 등 자원은 어떻게 관리할까 생각하고 카드 결과를 기다리는 스릴이 말이죠. 특히 반칙을 선택한 3라운드 때는 서술권이 안 나오면 큰일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경쟁적 요소는 보드 게임 같은 느낌도 들어서 흥미로웠습니다. 희망을 태워서 끈기를 회복한 때처럼 규칙이 열혈스런 연출을 유도하기도 했고요.

김현석: ‘질 수 없어… 질 수 없어, 절대로!’
김현석: 그는 꺾이는 다리를 억지로 버티며 조명이 눈부신 천장을 올려다본다.
김현석: ‘원장님.. 모두들…!’
김현석: (희망 1 태워서 끈기 2 회복합니다)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각 주인공의 이야기가 엮이는 과정도 재밌었습니다. 서로 인간적 교감을 느끼면서도 묘하게 악연으로 얽혀가는 동주와 현석이라든지, 동주와 현석의 시합 속에서 자기 삶의 모습을 엿본 지형의 모습 등. 그런 교차하는 감정과 주제가 있으니까 일행 없는 플레이에서도 집단 서술의 의의가 살아났고, 일행으로서는 다루기 어려운 얘기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즐거웠습니다.

저로서는 진행자 역할에서 벗어나 준비나 진행의 부담이 없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그때그때 재밌겠다 싶은 게 있으면 제안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제가 좋아하는 묘사나 다양한 인물 담당도 할 수 있다는 점은 금상첨화! 그러면서도 내가 모두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고, 이야기가 굉장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규칙인 만큼 미리 생각하거나 준비할 것도 없으니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 외에 별이 지다에서도 했던 야자타임(?)도 괜찮게 효과를 본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 서술과 플레이 외적 대화를 구분하는 수단도 되고, 소설적인 느낌도 나고요. 재밌는 플레이에 함께한 두 분께 감사드리고, 저는 다음에 이어서 할 기회가 있어도 재밌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