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리스를 이용한 게시판 플레이에 대한 생각

유니버설리스 (Universalis)는 아직 끝까지 못 봐서 소개하지 못한 책인데, 그야말로 이야기 만드는 놀이입니다. 토큰이라는 자원을 써서 인물이나 배경 요소 등 극적 요소를 만들고, 서로 진행에 대한 의견이 다를 때는 교섭 규칙을 매개로 교섭하거나 교섭이 안 되면 극적 요소의 특징과 토큰을 사용해 서술권을 두고 경합을 벌이는 방식입니다. 진행자 (GM) 개념이 없고, 전담하는 인물도 없고, 특정 인물의 역할을 맡는 RP는 부차적인 등 RPG 범주에서는 좀 벗어나 있죠.

전에 소개한 게시판 플레이용 규칙 수정주의 역사 (Revisionist History)도 토큰 (연구자금) 사용 등 유니버설리스의 영향이 꽤 있는데, 아예 유니버설리스를 게시판 플레이에 활용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유니버설리스에서도 사건과 인물 등을 추적하는 기록자를 두게 되어 있는데, 그럴 바에야 아예 놀이 자체를 기록으로 해도 될지도요.

수정주의 역사에 비해 유니버설리스의 장점이라면 놀이 단위가 연구 기사가 아니라 장면이므로 형식과 내용의 제한을 덜 받는다는 점. 근거 제시와 결론을 생각할 필요없이 소설 형태로 쓸 수 있고, 후대에 남을 만한 기록과 증거를 따질 필요가 없으므로 내면 묘사라든지 사적 대화처럼 기록이 안 남는 내용도 쓸 수 있죠. 장면은 꼭 시간 순서로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나 먼 미래로 장면 배경을 옮기려면 토큰이 더 들기는 합니다.

어려움이라면 유니버설리스는 기본적으로 대면 상황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게시판이나 위키상으로 하려면 교섭과 대결이 까다로워진다는 점. 비동시성 플레이인데 반박이 시간 제한을 너무 받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고, 그렇다고 단일 서사인데 오래 전에 지나간 장면이 나중에 뒤집혀서 이후 전개가 다 영향을 받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시성 플레이와는 달리 얘기가 나오면 바로 반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일 서사와 서술권의 객관적 규율의 장점을 둘 다 취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수정주의 역사의 단순성과 유니버설리스의 서술 자유도를 결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유니버설리스에서 하듯 연구가 아닌 허구 그 자체를 다루고 극적 요소를 토큰으로 관리하되, 수정주의 역사처럼 글을 쓰는 시간 순서는 자유롭게 하고 참조 규칙을 사용해서 그 글에 근거해 쌓인 서술이 많을 수록 반박하기 어렵게 할 수 있겠죠. 아니면 그냥 수정주의 역사에서 연구 관련을 빼버리고 경매는 순전히 참가자끼리 해서 소설 쓰는 놀이로 할 수도 있고, 가능성은 이것저것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8 thoughts on “유니버설리스를 이용한 게시판 플레이에 대한 생각

  1. Wishsong

    ‘소설 쓰는 놀이’ 는 룰을 잘만 다듬으면 정말로 누구든지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스토리텔러로서의 본능은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나 애니, 영화등을 보면서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멋질 것 같아!’ 라고 대본을 뜯어고치고 싶은 충동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거에요. 그런 욕구를 쉽고 명쾌한 규칙을 통해 구현시키고 만족시켜줄 수 있는 스토리게임은 분명히 인기가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아이돌 팬픽을 쓰는 팬클럽이라든지(…) )

    한번 로키님이 만들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물론 저는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겠습니다. 떡 먹여 주세요. 아앙-.)

    Reply
    1. 로키

      예, 따지고 보면 그 ‘소설 쓰는 놀이’가 참 없죠. 물론 소설 쓰고 노는 일이야 많지만, 여럿이서 하다 보면 의견 충돌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어서 역할극에서 다룬 것과 같은 곤란함이 발생하기 쉬운 것 같아요. 수정주의 역사가 제일 근접한 형태인데, 그것도 사실 역사 연구를 다룬 거지 진짜로 소설 쓰는 놀이는 아니죠. 전에 쓰고 나서 마음에 안 들어서 내팽개친 수정주의 전생이 일단 형식은 소설이지만 소재는 전생이라는 제한을 받고요.

      그런 면에서 유니버설리스를 잘 개조하면 정말로 범용적인 이야기 만드는 놀이가 될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는 동시성 플레이용인지라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네요. 나중에 좀 작업을 해보고 플레이테스트 돌려보기로 하죠.

      Reply
  2. 소년H

    어라 저번엔 못 들었다 해놓고 이렇게 소개 간략한 거 보니 예전에 본 기억도 (…)

    스토리텔러로서의 본능이야 누구나 있지만 문제는 언제나 귀차니즘(..)

    Reply
    1. 로키

      예, 같이 소설 쓰고 노는 건 어지간히 글 쓰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오래 못하죠. 사실 글 쓰는 거 좋아해도 또 하다 보면 질리고요. (제 경험으로는 한 달이 한계..(..)) 그 지속성을 높일 방법이 있을지도 나름 연구 대상.

      Reply
  3. lhovamp

    전부터 몇 차례 언급하시던 그것이군요. +_+

    저도 승한님 옆에서 같이 입 벌리고 있겠습… (먼산)

    Reply
  4. Arafa

    ‘과거를 바꾼다’라는 개념으로 공동 창작 가능하지 않을까 요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과거 개조요. 이걸 기초로… 간단한 룰을 만들고 영문 번역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독특하면서도 스토리 창작에 범용 가능한 공동창작용 룰… 음 혹시 관심 있으세요?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