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이론적 분석

규칙 – 취향을 넘어 기능으로

전에도 다루었듯 RPG계에서 규칙에 대한 논의는 민감한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분적으로는 인터넷 토론의 성격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규칙에 대한 논의는 흔히 기능이나 효용이 아닌 취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합니다.

취향은 근거 제시와 반론이 들어가는 생산적인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공감하거나, 존중하거나, 반대하거나, 싸움이 나거나 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게 아니므로 토론의 효과를 볼 수는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규칙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분일까요? 우리가 어떤 규칙이 좋거나 나쁘다고 할 때, 그것이 개인적 취향을 넘어 객관적인 토론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려면 무엇을 다루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의 목적, 혹은 기능이 아닐까 합니다. 즉 막연히 ‘좋다’ 혹은 ‘싫다’는, 처음부터 취향 얘기이거나 취향 얘기로 흐르기 쉬운 얘기가 아닌, ‘A 규칙책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스타일의 놀이에 적합하다’라거나 ‘B 규칙은 놀이 속에서 이러이러한 기능을 한다’는 식이죠.

예를 들면, ‘나는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 좋아’라든지 ‘나는 장면 신청 규칙이 싫어’는 공감이나 반감을 넘은 의미있는 찬성이나 반론을 할 수 없는 취향 표현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의 개들은 갈등에 새로운 수단을 도입할 때마다 추가로 주사위를 받으므로 상황이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극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는 데에 적합하다’라거나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 장면 신청 규칙은 참가자가 돌아가며 장면의 초점, 배경, 목적을 정하므로 진행자의 전통적인 장면 설정권을 상당 부분 참가자에게 이양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토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점점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되므로 오히려 새로운 주사위를 끌어들이지 못하게 위축시킨다’거나 ‘진행자도 토론과 제안을 통해 얼마든지 장면 설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식의 반론도 가능해지죠.

즉, 어떤 규칙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가치 판단은 ‘어떤 목적에 좋은가? 어떤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고려가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개인 취향의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은 쓸모없는 규칙이다’라고 하면 포도원의 개들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싸움나기 딱 좋지만, ‘포도원의 개들은 주사위의 내용이 “절름발이 2d10″이든 “명사수 2d10″이든 서술에 넣는 상황이 달라질 뿐 규칙상 동일한 가치를 가지므로 치밀한 전술적 시뮬레이션에는 쓸모없는 규칙이다’라고 한다면 수긍하든, 반론하든 소모적인 언쟁을 넘어선 토론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규칙과 그 목적, 혹은 기능에 대해 생산적 토론이 필요한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몇 가지 효용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자기가 하려는 플레이에 적합한 규칙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규칙을 사용하는지는 취향이나 친숙도, 시간 사정, 경제성 등 여러 가지 고려가 들어가므로 순수히 기능성만으로 규칙을 고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자신이 하려는 플레이를 원활하게 하는 규칙을 선택할 사정이 된다면 규칙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규칙을 고르는 데 도움을 주겠지요.

두 번째,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규칙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규칙 중 자기가 원하는 플레이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혹은 더 좋게 고칠 방향이 있다면 기능 중심적 생각과 토론은 플레이에 적합한 경향성을 만들도록 규칙을 수정하는 지침이 될 수 있죠.

세 번째, 규칙을 새로 디자인하는 사람에게 특히 규칙에 대한 토론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내가 지금 만드는 규칙이 플레이중 어떤 기능을 할 것인지, 다른 규칙과 어떤 식으로 맞물린 것일지 생각하는 것과 안 하는 건 차이가 크죠. 특히 ‘HP 규칙은 다들 쓰니까’ 하는 식의 타성에서 벗어나 HP가 실제로 플레이중 어떤 기능을 하는지, HP가 원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지원하는지 하는 고려가 막연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효용이 클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적 취향을 넘어 (비교적) 객관적인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규칙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방법과 효용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규칙에 대해 보다 평화적인(?) 토론을 하는 데 일조하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유형론

Georgios님이 쓴 진행자 유형을 허락을 받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독일어였고 원작자가 영어로 옮긴 걸 제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으니 벌써 3개 국어..(..) RPG는 국제적인 취미인 겁…

로빈 로스의 참가자 유형은 RPG 조언의 고전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진행자는 참가자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가정을 깔고 있어서이다. 물론 책은 참가자가 아닌 진행자가 대상이기는 했지만, 참가자 유형을 알아보는 것은 절반일 뿐이고 정말 재미있는 플레이를 하려면 진행자의 흥미와 욕구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진행자 유형을 정립하는 시도를 했다. 많은 의견과 활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주의사항: 로스의 참가자 유형과 마찬가지로 진행자 유형도 당연히 배타적이지 않다. 많은, 어쩌면 대부분의 진행자는 둘 이상의 유형에 속한다. 또한, 같은 유형에 속하는 진행자라고 반드시 진행 방식이 비슷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진행자 기대치를 파악하는 시작점으로는 제기능을 하리라 본다.)

세계 창조자는 깊이 있는 배경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세계는 얼굴없는 인물이 단조로운 건물 사이를 배회하는 무미건조한 장소가 아니다. 역사가 있는 세계, 다양하고 흥미로운 풍경, 살아 숨쉬며 무궁무진한 세부사항을 자랑하는 세계와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인물 군상이 있는 곳이다. 세계 창조자는 RPG 자료집, 참고 서적과 다큐멘터리, 장르 문학 등에서 엄청난 양의 자료를 가져다가 배경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배경은 그의 작품이며 참가자는 그의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일: 세계 창조자와 플레이한다면 배경에 관심을 두고 그 세밀함을 즐기는 것이 좋다. 특히 진행자가 기존 배경을 사용한다면 많은 참조와 의도적인 모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투가는 참가자와 경쟁하는 진행자이다. 그는 주인공 일행의 적수가 되는 것을 즐긴다. 그에게 플레이는 일행이 무엇인가를 걸고 싸울 때에야 비로소 시작한다. 그렇다고 결투가가 전투에만 가치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참가자에게 도전을 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게 얻은 승리, 참가자들이 아슬아슬하게 패배를 피하는 상황을 좋아한다. 하지만, 참가자가 좋은 전술과 전략을 보이면 그들이 쟁취한 승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규칙 판정을 엄격하게, 하지만 공평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승리는 무의미하다.

스타일: 결투가와 플레이한다면 도전을 회피하거나 전술·전략 외의 이유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결투가형 진행자에게서 뭔가 얻어내려면 반드시 노력이 들어가며, 계속해서 실력을 보여야 한다. 결투가의 말은 곧 법이지만, 명예의식 또한 강하므로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편파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

구성의 대가는 자신을 모든 실을 조작하는 인형술사로 여긴다. 그는 참가자들이 풀어내야 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성을 만들어 낸다. 그에게 배경 세계는 장소라기보다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인과의 그물이다. 따라서 때로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발단이 놀라운 반전과 복합적인 줄거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구성의 대가는 참가자들을 계속해서 교란하고 놀라게 하되, 돌아보면 일관적이고 말이 되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스타일: 진행자가 구성의 대가 유형이라면 플레이 내 사건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아무리 작은 세부 사항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퍼즐 조각을 모두 참가자에게 쥐여주는 것을 즐기지만, 맞추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참가자들은 지속적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로 가설을 주고받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가정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플레이 내에서 시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식전(式典) 책임자는 분위기와 몰입감이 넘치는 플레이를 중시한다. 그는 참가자들이 전혀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독특한 플레이를 진행하고 싶어한다. 현장감을 생생히 살리는 온갖 장치를 사용하는 것도 이 유형의 특징이다. 조명, 배경 음악, 소품, 전단 등. 각 조연의 대사와 행동에 진정성이 있는 것도 식전 책임자 유형에게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에게 RPG는 무엇보다 하나의 경험이자 현실 도피이다.

스타일: 식전 책임자와 잘 지내려면 최대한 몰입하고 농담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엉뚱한 순간에 잡담을 하거나 분위기를 깨는 행동을 하는 것은 미움을 사는 지름길. 이 유형은 특히 주인공 입장에서 벗어나 순수히 참가자로서만 하는 플레이를 싫어한다. (순수한 전술적 플레이도 여기 들어갈 수 있다.)

배우 유형 진행자는 모든 노력을 조연에 쏟아붓는다. 그는 참가자에게 개성 넘치고 특이한 조연을 선보이고 싶어한다. 배우 유형에게 배경 세계는 인물들의 호오(好惡)와 장단점이 중심이 된다. 그에게 RPG는 곧 인물간 상호작용이다. 그러려면 물론 각 조연에게 규칙이나 제약에 제한받지 않는 일관된 성격이 있어야 한다. 배우 유형은 각 인물이, 그리고 그들과 참가자의 관계가 기억에 남기를 바란다.

스타일: 배우 유형 진행자와 잘 지내려면 주인공에게도 개성이 있어야 한다. 참가자가 조연과 그들의 행동 동기를 알게 되듯 배우 유형은 참가자 인물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어한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는지. 인물 행동에 모순이 있다면 그 이유는 어떤 내적 갈등이나 충돌이어야 한다. 인물 행동의 일관성에 참가자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이유여서는 안 된다.

감독 유형은 RPG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매체로 여긴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꾸며가려고 그는 모험 구조, 도전, 극적 갈등 등 RPG 내적 수단뿐 아니라 그가 아는 모든 서사 예술에서 장치를 끌어온다. (3막 구조, 장르 법칙, 영화 언어 등.) 감독형 진행자는 중요한 대목을 플레이하는 데만 관심을 보인다. 줄거리를 진행하거나 인물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하는 장면이라면 피하거나 잘라버리기 십상이다.

스타일: 감독 유형은 참가자들도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를 기대한다. 즉, 이야기를 만들어갈 기회를 찾아서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행자는 참가자가 상황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서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을 즐긴다.

제공자는 플레이에 자신만의 욕구가 없는 유형이다. 그의 재미는 곧 참가자가 느끼는 재미이다. 많은 제공자는 모두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즐기며, 종종 진행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진행을 잡곤 한다. 모험은 종종 참가자 선호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또한, 참가자 권한이 많은 편이 참가자에게 재미있다면 제공자형 진행자는 언제든지 참가자에게 권한을 넘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늘 참가자와 기대치를 타협할 의무를 느낀다.

스타일: 제공자 유형과 잘 지내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참가자가 이 유형을 가장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공자도 두 가지 경우에는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 우선, 참가자는 대충이라도 자신이 RPG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제공자형 진행자에게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과 실제 선호가 다른 참가자이다. 또한, 제공자는 다른 어떤 진행자보다 플레이가 재미있었다는 확인을 바란다. 진행을 잘했으며 플레이가 즐거웠다는 말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제공자를 소진으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다.

각 유형 설명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유형에도 부정적인 변형이 많다. 결투가는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킬러 진행자가 될 수 있으며, 구성의 대가 중에는 대가는커녕 준비조차 제대로 안 해서 모험 내용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진행자도 보인다. 세계 창조자는 자기 창조물에 넋을 잃고 끝없는 장광설이나 쓸데없는 묘사로 참가자들을 지루하게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작용은 이들 진행자 유형의 잘못된 모습이며, 이를 이유로 진행자의 다양한 욕구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진행자 유형론을 번역해보았습니다. 의구심이 든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진행자도 자신만의 욕구와 필요가 있는 참여자라는 생각의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또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옮겼습니다.

보면서 그동안 제가 겪은 진행자 유형을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더군요. 예를 들어 아루스 캠페인 진행자 아사히라군은 결투가 성향이 강한 것 같았고, 7번째 바다 플레이를 함께했던 란님은 구성의 대가, 언더월드 진행자였던 제노시아님은 세계 창조자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진행자도 유형만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진행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대응하면 서로 재미있는지, 나에게 맞는 진행자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면 더욱 풍요로운 RPG 생활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RPG의 기능적 구분 – 설정, 진행, 참가

지난번에 Wishsong님과 성일님의 글에 답변하면서 떠오른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RPG, 혹은 다른 놀이를 할 때 참여자가 맡을 수 있는 기능에는 크게 설정, 진행, 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의 초기 조건을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정하는 것이고, 진행은 설정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참가는 참가 수단 (RPG의 경우는 인물)을 움직여서 설정의 초기 조건을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수정 (07/06/24 08:19): 성일님의 반론대로 진행과 참가의 구분은 인적 구분이 개입한 면이 큽니다. 참가는 진행 중 서술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정리해보고 싶으니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보통 RPG에서는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의 역할, 참가는 참가자의 역할입니다만, 일반적일 뿐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가 설정과 진행 권한을 나누어 가질 수도 있으며, 설정과 진행 일부를 규칙책과 카드에 맡겨놓고 진행자 없이 참가자만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 인적 구분이라면, 사람이 아닌 기능에 따라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기능적 구분입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부 구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우리가 평소 놀 때 하는 각 활동이 전체 놀이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효용이 있겠지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각 상세 구분마다 제가 아는 규칙의 예를 들겠습니다.

1. 설정

1.1. 배경 설정

놀이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진행자 권한으로 전부 설정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모두 아는 배경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주로 상황 설정의 맥락이 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2. 상황 설정

놀이의 틀이 될 극적 상황을 설정하는 기능입니다. 인물 설정에 제약이자 맥락 역할을 하며, 배경 설정을 의미 있게 활용하는 초점이 되기도 합니다.

1.3. 계획

놀이 속에서 벌어질 사건의 전개나 향방을 정하는 기능입니다. 반드시 소설이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하는 것은 아니고, 시나리오의 종류에서 다루었듯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진행자의 영역이지만,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다룬 성일님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참가자가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많은 순기능이 있습니다.

1.4. 장면 설정

미시적인 설정 기능으로, 한 장면의 초기 조건을 정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습한 지하실입니다’ 하는 식으로 시작해서 이 장면에서 참가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설정의 다른 세부 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장면 설정은 특히 진행에 계속 영향을 받으며, 진행 기능에 속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를 두고 보는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설정에 들어갑니다. 장면 설정도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이지만, 역시 참가자의 의견을 받기도 합니다.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은 장면 설정 처리에서 흥미로운 데가 있는데, 각 참가자가 돌아가면서 원하는 장면을 얘기하는 장면 신청 규칙이 그것입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참가자는 ‘김 장군하고 박 장군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이끌 것인가 조정 앞에서 결판이 나는 장면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는 식으로 원하는 장면을 PD에게 신청합니다. 장면의 결말은 정하지 않고 (둘 중 누가 북방 원정군을 지휘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김 장군, 박 장군), 장면의 배경은 무엇인지 (조정), 장면에 나올 사건은 무엇인지 (북방 원정군 지휘관 결정) 얘기하는 형식이지요. 그러면서 서로 제안도 주고받으며 (“조 부인을 사이에 둔 감정 문제도 나오면 재밌겠다”라든지)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의 과정이 있든 없든 각 참가자에게 규칙으로 이러한 장면 설정권을 보장(강제?)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장면 신청 규칙의 부수적 결과라면, 장면 설정 권한을 참가자들에게 주기 때문에 진행자 (PD)에게는 장면 설정권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신청 사항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권한은 있고 또 언제든지 제안이나 의견을 낼 수 있지만, 장면의 뼈대를 구성하는 창의적 권한은 기본적으로 참가자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진행자가 장면을 구성하고 참가자는 제안만 하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2. 진행

2.1. 서술

놀이 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정의 초기 조건이 변하는 것을 서술하고 묘사하는 기능입니다. 종종 참가에 반응해서 나옵니다. ‘고요한 연못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장면 설정, ‘돌을 던져요’가 참가라면 ‘크툴루가 튀어나옵니다’는 서술일 것입니다. 역시 보통은 진행자의 권한에 들어갑니다.

폴라리스 (Polaris)는 서술 중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의식(儀式) 언어를 사용한 교섭으로 처리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서사나 설정의 영역도 넘나들지만…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노란색으로 강조한 글자가 의식 언어입니다.)

마음: 강 도령은 “이 간신 놈!” 하고 외치며 이 대감의 배에 칼을 박아넣었다!
후회: 하지만 그러려면 그 순간 포졸들이 들이닥쳐야 한다.
마음: 그리고 또한 강 도령과 장래를 약속한 선화 낭자가 이 대감의 딸이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선화 낭자’를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해야 한다. (강 도령의 운명 중 ‘복수가 부르는 비극’을 발동하겠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마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강 도령의 축복 중 ‘하인 돌쇠’를 발동해서 울부짖는 선화가 아버지의 죽음을 못 보게 돌쇠가 막았다고 보름달과 그믐달에게 승인받음.)
후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의 효과로 마지막 서술을 대폭 수정) 그리고 또한 선화 낭자가 아버지를 죽인 강 도령과 원수가 되어야 한다.
마음: 일의 전말은 이와 같았더라.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서술을 받아들이고 갈등을 끝냄.)
후회: 이 대감이 죽어가는 사이 포졸들은 강 도령을 포위하고…

폴라리스의 교섭 규칙은 이처럼 의논이나 합의가 아니라 규칙으로 서술상 의견 충돌을 해소하는 점이 특이합니다. 게다가 서로 기본적으로 적수인 ‘마음’과 ‘후회’는 서로 제안이나 이견 조율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양보 없이 각자 의견을 밀고 나가면서도 일관성 있는 결론을 낼 수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2.2. 조연 RP

넓은 의미에서는 서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조연을 움직이는 것도 진행의 한 가지 기능일 것입니다. 물론 주인공과 조연을 오가는 인물도 있는 만큼 (여러 인물을 참가자와 진행자가 돌려가며 맡을 수 있는 아르스 마기카가 좋은 예죠) 늘 뚜렷한 구분은 아닙니다.

위에서 얘기한 폴라리스에서는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누어서 맡는데, ‘후회’가 전통적인 진행자에 가장 가깝지만 주인공과 사회적, 권력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남자 조연은 ‘보름달’이, 정서적, 감정적 관계가 있는 조연과 기타 여자 조연은 ‘그믐달’이 맡습니다. 조연의 행동은 ‘후회’ 혹은 ‘마음’이 특수 교섭 언어로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2.3. 서사

역시 넓은 의미로는 서술에 들어갑니다만, 주인공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범위에서 생기는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좀 더 거시적으로, 주인공들이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는 범위에서도 배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 서사라고 조금 욕심을 내어 구분해 보았습니다. 서술과 마찬가지로 참가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참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도적 길드 마스터를 죽여서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이 전자의 예라면 옆 나라에서 홍수가 나서 난민이 몰려드는 것은 후자의 예입니다.

2.4. 규칙 운용과 해석

판정의 과정과 결과를 규칙에 따라 서술하고 해석하는 기능입니다. 규칙을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이 있고, 참가자가 개별 판단에 따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단순 서술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규칙으로 규정한 영역에 발생하는 두 번째 효과를 참조하시길. 진행자가 최종 결정권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참가자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로 이러한 마찰의 핵심은 규칙의 올바른 해석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주도권 혹은 참가의 의의가 살지 않는다는 불만의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긴 하지만요.

3. 참가

3.1. 인물 설정과 변화

놀이 속 사건의 주체이자  참가의 수단이 될 인물을 설정하고 변화시키는 기능입니다. 참가자 인물 (주인공, PC) 설정을
통해 보통 참가자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설정 기능이기도 합니다. 조연 (NPC) 설정은 배경이나 상황 설정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참가의 기본 틀이며, 참가자의 욕구를 표시하는 중요한 신호가 되어 설정, 진행 기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보통 인물 설정은 참가자 한 명의 권한으로 생각하지만, 이 과정에 진행자와 다른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습니다.

3.2. 선언

참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판단과 의사결정에서 나온 주인공 행동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에는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라는 전술적 판단, 이 장면에서는 이런 내용을 보고 싶다는 극적 욕구, 인물의 성격과 배경에는 이런 것이 어울린다는 인물 자체의 성질 등 많은 층이 있습니다. 보통은 개별 참가자의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 제안, 의논, 혹은 합의가 들어갈 수 있겠죠.

3.3. 판정

선언의 일종이지만 위의 규칙 운용과 해석에서 말했듯 좀 더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한 전술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규칙을 매개로 놀이에 참가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수치상의 능력만 들어가고 주인공의 배경이나 정서, 인간관계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수치상의 능력에 주인공 자체의 특징이 들어간다면 그러한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이라면 ‘명사수 1d6’과 마찬가지로 ‘어려서 당한 사고 때문에 다리를 전다 1d6’도 판정에 도움이 되고, 세기의 혼 (Spirit of the Century)이라면 ‘친구에게 느끼는 열등감’ 면모를 발동해서 판정에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용하려면 이러한 능력치나 면모가 판정에 들어가야 하므로 이런 내용은 판정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에도 영향을 주고, 이렇게 해서 생기는 ‘이야기’는 판정의, 그리고 참가의 또 다른 층을 이룹니다.

이처럼 일단 거칠게 설정, 진행, 참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잡아보았습니다. 말했듯 이 구분을 칼같이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각 활동이 놀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보는 데에 효용이 있는 구분이긴 하지만요. 논의와 사고의 틀이 되는 하나의 도구일 뿐, 이리 비틀고 저리 끼우다 결국 부러지면 버리고 더 좋은 걸 만들면 되겠죠.

참가자와 진행자의 관계에 대한 의견

Wishsong님의 글 플레이어-마스터와의 관계와 이에 대한 성일님의 답변과 반론에 대한 의견입니다. 자칫 복잡해질 수 있으니 Wishsong님의 원문성일님의 원문을 색으로 구분하겠습니다. Wishsong님이 제시하신 전제들은 논의의 핵심이므로 진한 글씨로 나타내겠습니다.


1. RPG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플레이)을 이루기 위해 만드는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쌍방향이 진행자 (마스터)와 참가자 (플레이어) 사이 말씀이라면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Wishsong님의 글에 대한 반론의 중심이기도 하고요. 일단은 쌍방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제한적인 이유를 두 가지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성일님 말씀대로 대립과 긴장, 합의의 양상은 진행자와 참가자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참가자라고 해서 단일한 목적이나 지향이 있지는 않으며, 긴장의 축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입니다.

둘째, 좀 있다 얘기하겠지만 진행자와 참가자는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으로 제한해서 생각하기에는 설명의 일반성이 떨어집니다.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사람인데 진행자의 역할과 참가자의 역할은 반드시 사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략)

저는 RPG라는 형식이 의사소통의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원문에서 읽힙니다.

(중략)

꼬투리를 잡는 것 같지만, 글 전체로 봤을 때 승한님께서는 RPG를 어떤 정해진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으로 파악하고 계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짚고 갑니다.

제 생각은 한 편으로는 비슷하고 한 편으로는 다릅니다. RPG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의 양식은 반드시 규정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일부는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칙 (룰)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한 예로는 ‘내 화살이 맞았나’ 하는 결과를 정하는 의사소통을 판정 규칙으로 양식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덜 흔한 예로는 폴라리스 (Polaris) RPG에서 이야기의 진행 자체를 의식 언어로 교섭하는 것도 들 수 있습니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암시하는 데가 있는 대목이라 일단 얘기해 둡니다.


2.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수단으로 플레이에 참여한다. 양측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속성은 다르다.



RPG는 서로 입장이 다른 두 축(플레이어-마스터) 중 한 쪽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유희입니다. ‘무대’를
만드는 건 마스터이고, 그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서로 적극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이라고 서로가 생각하고, 인정하는 암묵적 경계선은 있기 마련입니다.

RPG에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에 따라 구분한다는 점에서 분석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나치게 제한적인 이해라서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이나 제가 겪은 인디 RPG의 경험을 포괄할 수 없거든요.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RPG 플레이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지만, 그마저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많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일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논의하겠습니다.

(전략)

무대를 만드는 것이 마스터라는 법이 없고,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캐릭터라는 법도 없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Wishsong님이 말씀하신 두 개의 축을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20년 전에 이미 등장한
RPG인 “아르스 마기카”에서는 마스터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세션마다 돌아가면서 한다고 했을 때, 조금 하다 보면
그 “무대”는 어느 한 명이 준비했다고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중략)


아르스 마기카만의 예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PC와 NPC의 구별이 흐리고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역할 분담이 뚜렷하지 않은
시스템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스템을 사용했을 때 RPG가 성립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아르스 마기카처럼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RPG 뿐만 아니라 아예 진행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진행자 역할을 여럿이서 분담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 (The Shab al-Hiri Roach)에는 진행자가 없이 참가자만 있고, 폴라리스는 4인이 플레이를 하면 그 중 3인이 전통적인 진행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갈등 제시, 조연 [NPC] 역할) 1인이 전통적인 참가자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인적 구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예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기능적 구분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아르스 마기카의 예를 들어서, 진행을 돌아가면서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한 편으로는 진행자 역할이 사람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뒤집어 말하면 진행자라는 기능, 혹은 직능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기능을 채우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적 구분을 부정할 이유가 될 뿐, 기능적 구분은 여전합니다.

폴라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행자와 참가자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심지어는 돌아가면서 맡지만 그 역할 자체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고정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심지어는 진행자가 없는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에서도 인적 구분은 없어도 기능적 구분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진행자의 전통적 역할을 일부는 규칙책에 나오는 기본 설정 (펨버튼 대학, 1년에 6가지의 교내 행사, 각종 행동 카드)에 맡기고, 일부는 참가자들이 나누어 맡습니다 (조연 역할). 이 경우는 설정을 정하고 진행하는 기능을 맡는 사람이 유동적인 정도가 아니라 규칙책과 카드 등 ‘사람이 아닌 것’이 맡지만, 기능 자체는 존재합니다.

일반적인 시스템을 사용한 일반적인 플레이에서도 “암묵적 경계선”의 위치는 팀마다, 캠페인마다 많이 다르게 설정됩니다. (중략)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말씀하신 “경계선”은 취향에 따라, 편의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지 RPG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후략)

제 생각은 여기서 성일님과 갈라집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경계선이 팀이나 규칙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 애당초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이 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건 당연하죠. 경계선은 진행자라는 사람과 참가자라는 사람이 아닌 진행과 참가 기능을 구분하며, 그 기능은 경우에 따라 누구든 맡을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규칙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기능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혹은 무엇에 맡기냐에 따라 RPG라는 놀이가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샤브 알-히리 바퀴벌레는 보드게임적 성향이 짙고, 진행 기능의 모든 것을 컴퓨터에 맡기면 RPG가 아닌 CRPG가 됩니다. 하지만, RPG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 내에서도 이 기능을 누가, 무엇이 맡느냐는 성일님 말씀대로 상당한 유동성이 있습니다.

RPG에서, 혹은 놀이 전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능적 구분은 크게 설정, 진행, 참가라고 생각합니다. 설정은 놀이가 이루어지는 배경, 혹은 상황을 만드는 기능입니다. 진행은 놀이 속 사건의 추이를 움직이고 배경이나 상황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참가는 의사 결정을 통해 그 배경이나 상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입니다.

고전적인 RPG에서 설정과 진행은 진행자, 참가는 참가자에게 국한되지만 이것은 논리 필연적인 역할 분담은 아니며, 기능적 분담을 인적 분담과 혼동하면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생기기도 합니다. 참가자도 얼마든지 설정이나 진행에 참여할 수 있고, 진행자도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습니다. 진행자 없이 설정과 진행 기능 일부를 규칙책이나 카드에 맡길 수도 있고, 진행 역할을 셋이서 분담하고 한 명만 참가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기능적 구분은 존재하되, 그것을 누가 맡느냐 하는 인적 구분은 유동적입니다.

2-1. 마스터는 RPG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근간 설정을 담당하고 책임진다.

(Wishsong님이 드신 예 생략)

이것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예임에는 확실하나, RPG가 그래야만 한다,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일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설정과 진행, 참가를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으로 이해한다면 이 전제는 ‘고전 RPG 모델에서 진행자는 일반적으로 설정 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진행자라는 사람, 혹은 위치에 속한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 놀이의 기능을 참여자들에게 분배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한 가지 모습입니다.

팀의 합의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마스터가 저렇게 얘기해도 결과가 안 되는 경우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마스터는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팀에서 결정된 내용을 정리하여 발언할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좀 더 보충하자면, 합의에 따른 진행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합의 말고도 설정 혹은 진행 기능을 제어하는 장치도 있습니다. 폴라리스의 서술 교섭과 같은 규칙이 한 예이죠.


2-2. 플레이어는 마스터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면 마스터는 생명을 불어넣고 변화를 일으킬 수 없나요? 그렇다면 소설에는 생명이 없고 변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RPG에서 마스터가 소설 쓰듯 혼자 노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

소설과 RPG에서 나타나는 생명력과 변화는 분명히 다르고, 이것은 소설과 RPG의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RPG에서 나타나는 역동성을 소설에서 느끼는 역동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개념 혼동의 위험이 큽니다. 소설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고, 이미 내용을 알고 읽어도 끝없이 새로운 의미와 상상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RPG에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변할 수 있고, 이것은 참가 기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Wishsong님이 말씀하신 생명력과 변화는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RPG에서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곧 RPG의 생명력이나 변화와 소설의 생명력과 변화는 다르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만… RPG에서 있어야 하는 생명력과 변화가 소설과 같은 것이라면 참가 기능은 의미가 없고, 진행자가 소설 쓰는 것도 생명력과 변화가 가득한 훌륭한 RPG일 테니까요.

(계속)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유일하게 플레이어에게만 허용된 속성이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후략)

역시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2-2는 참가는 보통 참가자가 맡는다는 일반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다른 기능적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인적으로는 유동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성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Wishsong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참가는, 그리고 참가 기능이 있는 참가자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판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니까요.

반면 성일님 말씀대로 진행자 역시 플레이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듯 참가가 설정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능이라면 진행은 변화 자체의 표현입니다. 진행자, 혹은 진행을 맡은 참여자는 그 변화와 역동성을 표현함으로써 얼마든지 플레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참가자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파급 효과가 있고, 여기에 반응해서 다시 또 변화를 일으키고… 하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죠.

딱히 Wishsong님의 전제에 대한 반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초기 조건이 참가이기 때문입니다. 즉 Wishsong님의 이 전제는 ‘참가자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유일성을 강조했다기보다는 ‘참가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참가의 능동적, 역동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세 구분을 논리적으로 따라가자면 진행자가 참가 기능을 맡을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과 조연이 대화를 나눈다고 하면 주인공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참가, 조연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진행 기능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은 조연의 반응에 영향을 주고, 조연의 반응은 다시 또 주인공의 반응에 영향을 주면서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위의 설정, 진행, 참가 기능을 나누면서 참가가 기본적으로 작용이라면 진행 기능은 반작용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그 영향의 방향은 일방적이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행과 참가는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이며, 성일님의 말씀대로 진행자도 배경이나 상황에 생명력과 변화를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플레이어는 갈등과 서사를 원한다. 따라서 마스터에게 이 부분을 이양한다.

->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캐릭터가 맞부딪힐 갈등, 그리고 만들어갈 이야기를 관리할 존재로 마스터를 선택하고, 이 부분에 대한 ‘권력’- 갈등의 시작 및 PC를 위한 무대 설정을 위임합니다. 물론 마스터가 ‘이러이러한 캠페인을 합니다~’ 라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근본적으로 RPG의 권력은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세계를 맡기는’ 형태라고 봅니다.

물론 설정과 진행 기능이 일반적으로 진행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고, 여기에 참가자의 이양이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나 들어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의문이 가는 부분은 ‘갈등과 서사에 대한 욕구’와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 설정의 권한을 갖는 것’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입니다. 어째서 진행자가 갈등과 서사에 관련한 권한이 있어야 유토피아가 아닌 갈등과 이야기가 성립하는지 하는 논리적, 혹은 현실적 필연성이 들어가야 완전할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의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플레이어와 마스터 사이의 갈등과 등치시키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플레이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플레이 내의 일이고, 마스터와 플레이어 사이의 권력 분배는 플레이 외의 일입니다. 마스터에게
갈등과 서사에 관한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도 갈등을 접하고 서사를 일으킬 수 있음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되었고, 실례도 많이
등장한 바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 성일님이 이미 하신 말씀과 같군요. (퍽)


4. 하지만 마스터도 사람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전략) 마스터는 자신의 생각한 이야기와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이 떠맡긴
잡무(….)를 처리하는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가 잡무를 처리하면서까지 RPG를 하겠다고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건
이런 이유겠죠.

저는 이 현상을 현실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잡무”라고 이야기하신 다양하고도 복잡한 의무들이 사실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권력임을 플레이어들이 깨닫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것을 포기함으로써 플레이는 마스터의 변덕에 그대로
노출되며, 마스터의 수완에 의해 플레이의 질이 결정 나버리는 결과에 달합니다. (후략)

‘잡무 대신 권력’이라는 발상이 위험하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설정과 진행 기능이 대부분 진행자에게 있는 것이 곧 참가자가 놀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진행자의 자의에 노출되는 결과가 된다는 데에는 반대합니다. 이것은 참가 기능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설정과 진행은 각각 참가의 틀과 참가에 대한 반응을 이루며, 특히 진행이 참가에 반응하지 않고 진행자의 자의에 따를 때 성일님이 말씀하신 병리 현상이 생깁니다. 설정과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도 나누어 갖는 것도 이러한 병리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잡무 대신 권력’이 위험하다는 점에서는 성일님과 생각을 같이하지만, 그 근거는 다릅니다.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분담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위험 현상이 아니라는 의견은 방금 얘기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부분은 첫 번째, 설정과 진행 기능을 기능이 아닌 권력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 두 번째, 반대급부라는 대가성을 넣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진행자가 설정과 진행 기능을 맡기 때문이 아니라 참가의 의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나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과중한 잡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었어! 따라서 나에게 대항하는 것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진행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기는 플레이 내 병리가 얼마나 많은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위에 말했듯 성일님이 말씀하신 설정과 진행 기능의 분담도 한 가지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해결책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이지만요.


5.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멋진 것’과 마스터가 생각하는 ‘멋진 것’은 다르다.

-> 마스터도 플레이어도 모두 사람입니다.  서로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다릅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플레이어의 목적은 자신의 PC를 통해 충분히 롤플레이를 하면서 세션에서 드러난, 혹은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마스터의 가치관이 개입된 세계, 그리고 플롯에 맞부딪히면서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전략) 저라면 굳이 “플레이어” “마스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으며,
사전 합의는 이런 괴리를 해소하는 것이 그 목적의 하나입니다. (후략)

인적 구분이 아닌 기능적 구분에 따라 저는 이 전제를 성일님이 지적하셨듯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멋진 것”은 서로 다르다’라고 고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역동적 긴장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성일님 의견하고는 조금 다르게, 플레이 외적 긴장은 플레이 내적 갈등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역동적 긴장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겠지요.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플레이 안에서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서로 밀고 당기게 되며, 이 과정을 참여자 간의 파괴적인 갈등이 아닌 플레이 속의 생산적인 갈등, 서로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내면서도 조화로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역동적 긴장을 다루면서 생각한 핵심입니다.

6. 플레이어와 마스터는 사전 합의를 통해 이러한 마찰의 요소를 사전에 최대한 배제시키려고 한다.

-> 이건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마스터에게 권력을 주는 과정에서 합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일님 지적대로 대상이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플레이 외적 마찰은 배제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플레이 내적 갈등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플레이의 재미입니다. 아마도 전자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드신 예를 봐도 이것이 반드시 배제해야 할 마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역동적 긴장이라는 이름으로 했던 구분에 따라 논의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수단에 대한 긴장.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은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는 거인의 수중에 있습니다. 진행자는 거인을 때려잡는 것과 거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열쇠를 얻는 것 사이에 선택시키고 싶습니다. 반면 참가자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노래를 불러 거인을 잠들게 하고 열쇠를 훔친다거나, 열쇠 없이 성벽을 넘어간다거나, 열쇠를 걸고 수수께끼 겨루기를 제안한다거나.

이러한 것이 배제해야 할 갈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역동적인 긴장에 대한 글에서 얘기했듯 상당한 지적, 논리적 도전이 아닐까요? 참가의 의의를 살리면서도 진행자가 어느 정도 원래의 선택지를 유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정당해야겠지요. 성벽을 넘어갈 수 있나 탐사했더니 성벽에 마법 가시나무가 뒤덮여서 잘라내도 잘라내도 계속 자라나고, 부상을 입지 않고 올라가려면 마법이 걸린 보호구가 필요한데 그걸 구하려면 또 멀리 있는 마법사의 탑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이러한 설정들은 특히 규칙을 매개로 하면 참가자에게 의사 결정의 여지를 주며, 결국 참가자가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해서 성벽을 넘어간다면 그것도 즐거운 결론입니다. 아예 무너뜨린다거나, 가시나무를 태워버린다거나, 등등. 반면 무턱대고 너무 높다면서 오르기 판정에 수정치 -20을 붙이는 식의 자의는 참가의 의의를 줄이는 것이며, 자칫 플레이 외적인 감정적 마찰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 시점에서 합의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거인은 나중에 나름 중요한 인물인데 말야, 만나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난 가시나무를 넘어가는 쪽이 더 재밌는걸.’ 이것이 진행의 기능을 참가자와 일부 나누는 방향입니다. 반면 합의 없이 밀고 나가서 규칙을 매개로 참가자가 성공하면 참가자의 해결책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가의 의의를 살리는 방향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어느 쪽이든 이것이 미리 배제해야 하는 성격의 충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 목적에 대한 긴장. 마왕에게 반한 주인공의 예를 가져오면, 사실 이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진행자가 생각하지 못한 마왕의 면모를 주인공이 발견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극적 재미는 깊어질 테니까요. 다른 주인공에게 마왕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라면 주인공 일행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반하는 일도 있을 수 있죠.

물론 이 경우도 이것이 플레이 내 갈등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 외적 마찰이 될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끊고 서로 합의를 보든지, 규칙대로 판정해서 해결하든지 해야겠죠. 플레이 내의 갈등은 플레이의 재미 그 자체이지만, 플레이 외적 마찰은 플레이에 독이 되니까요. 서로 생각이 달라서 플레이 내에서 밀고 당기는 것과 서로 감정이 상할 만한 마찰은 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전략) 사전 합의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 중에도 예측 못한
문제(갈등이라는 표현은 쉽게 쓰기 어렵습니다.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아예 다른 물건이니까요)가 발생합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사실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해야 할 문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리가 안 돼서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성일님 말씀대로 플레이 내의 갈등과 플레이 외의 갈등은 다르니까요. 플레이 내의 갈등이라면 그건 플레이의 재미이니까 사전 합의를 통해 배제하자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플레이 외적 갈등이라면 플레이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플레이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넘어서는 안 될 경계나 의사소통의 통로를 정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니까 굳이 얘기하자면 이쪽이려나요.

끝에 좀 헷갈려 버렸지만, 어쨌든 저도 정리를 하고 끝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환호성을 지르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

저는 플레이어와 마스터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플레이를 꾸미고 진행하는 방식에 객관적인 장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RPG라는 놀이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봅니다.

객관적인 장점이 있다는 점에는 찬성하고 흥미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논리적 귀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설정, 진행, 참가의 기능적 구분을 택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도 반론할 여지가 많겠죠) 성일님이 말씀하시는 합의에 따른 진행은 설정과 진행의 권한을 진행자와 참가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RPG의 병리 현상을 해결하고 모두가 더 재밌게 노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일하고 논리필연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설정과 진행의 권한이 진행자에게 있어도 참가의 의의 또한 확보하고 살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합의와 상관없이 서로 목소리를 내면서 밀고 당기며, 규칙과 논리에 따라 결론을 내서 각자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더 재미있는 결과를 내는 플레이가 제가 역동적 긴장이나 코스티캔의 게임론을 끌어들여서 구현하고자 하는 플레이입니다. RPG는 설정과 진행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참가의 기능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일님이 그 가능성을 배제하신 것은 결코 아니니까 반론이라기에도 뭣합니다만..^^ ‘논리적 귀결’이라는 말씀에 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 점은 반박할 수 있는 근거 없이 성일님의 생각이라고 밝히셨으니까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취향이나 신념의 영역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어디에도 논의는 넘쳐나는 곳이 인터넷이지만, Wishsong님이 RPG에 대한 전제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밝히신 의미는 대단히 큰 것 같습니다. 종종 전제 자체가 다른 건 생각 못한 채 꼬리를 물고 도는 논의가 되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그 전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건 크나큰 생각의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정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고요.

RPG에서 규칙의 영역에 대해

천승민님의 을 보고 꼬리글로 작성하다가 분량을 넘겨버려서 엮인글로 씁니다. 이후 이 글은 확장하고 수정해서 규칙의 도구성을 다룬 글에 넣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물리적 내지는 활극적인 부분은 규칙으로, 서사적 내지는 탈활극적인 부분은 합의로 처리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잘못된 이해라면 지적 바랍니다. 일단은 이 전제로 댓글을 작성합니다.)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플레이중 벌어지는 모든 일은 서사의 요소이며, 어차피 RPG는 사회적인 놀이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합의로 정해도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이 상황에서 내 화살이 맞았을까’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대목에서는 성질을 못 이겨서 문제를 일으키는 게 재밌겠다’까지 말이죠. 하지만, 합의에는 시간이 들고, 매우 부정형적인 과정이며 때로는 발언력의 불균형 등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규칙으로 이 과정에 기준을 만들고 시간상으로 압축한 것이 RPG와 규칙 없는 RP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규칙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객관성이 생기기 때문에 어떤 영역을 규칙에 넣으면 크게 두 가지 효과가 생긴다고 봅니다.

첫째, 플레이중 장려하고 싶은 행동의 포상, 뒤집어 보면 플레이중 원치 않는 행동을 억제. 예를 들어 활극이라면 규칙은 말도 안 되는 화려한 액션을 장려할 것이고, 역사에 충실한 전쟁물이라면 무모한 행동은 바로 규칙상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둘째, 게임적 강조의 효과. 일단 어떤 영역이 규칙의 대상이 되면 이것은 팀 전체의 합의가 아닌 개인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되고, 따라서 개인 의사판단 혹은 자원 활용의 대상이 됩니다. 즉 게임적 의사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함정을 해제하는 규칙은 있지만 참가자에게 배경 세계에 대한 서술권을 주는 규칙은 없는 RPG라면, 참가자는 자기 인물에게 함정을 해제하는 능력을 줄 수도 있고 실제로 함정을 발견하면 해제하는 시도도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가 다른 이유로 저지할 수는 있지만 왜 그런지 설명을 해야겠죠.

반면 ‘내 인물이 비밀 결사에 있는데, 이 도시에 그 결사의 지부가 있으면 좋겠어요’ 같은 요청은 순수하게 진행자의 판단 영역, 혹은 모두의 교섭과 합의의 영역이 됩니다. 따라서 필요할 때마다 자기 결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인물의 능력을 키울 수도, 그게 가능하도록 게임 내 자원을 모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영역이 규칙의 대상으로 적합한가, 부적합한가 논의할 때는 위에 말한 규칙의 두 효과가 그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플레이를 더 재미있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활극적인가, 서사적인가 하는 구분 자체가 주요 요소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은 그런 구분의 근거 자체도 잘 모르겠고..) 규칙이 서사적 요소를 반복적으로 만들고 상상의 여지를 제약한다면 활극적 요소에는 어째서 그렇지 않은지, 혹은 활극적 요소는 반복적이 되어도 상관없는 성질이 있는지 같은 논의가 먼저 필요한 것 같습니다.

RPG, 혹은 역동적 긴장

Wishsong님의 글과 그에 대한 성일님의 댓글을 보고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트랙백 주거니 받거니, 그 두번째! (..)

RPG의 게임성을 다룰 때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규칙을 매개로 해서 밀고 당기는 활동에서 나오는 역동적 긴장은 RPG의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역동적 긴장의 내용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크게 다음 세가지입니다.

1. 진행 방식에 대한 긴장

링크한 Wishsong님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예입니다. 목적의 실행에 어떤 수단을 취할 것인가, 어떤 수단이 합리적인가를 가지고 밀고 당기는 것이지요. 진행자는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 사이에 선택시키고 싶은데 참가자가 그 선택 상황을 벗어난다면? 참가자와 진행자 사이의 두뇌싸움이 되기 쉬우며, 가장 지적, 논리적 도전이 되는 내용의 긴장인 것 같습니다. 세션 글에서 성일님이 지적하셨듯 플레이의 병리현상이 나타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죠.

2. 극적 방향에 대한 긴장

1번이 수단에 대한 긴장이라면 이것은 목표에 대한 긴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Asdee님의 댓글에 대한 답변에서 제시한 것으로, 선택의 방향에 대해 참여자간에 밀고 당기는 것을 극적 방향에 관련한 역동적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에 반하는 활동을 하는 기업을 고발해야 하는가? 도시의 경제가 무너져도? 이것은 극적이고 도덕적인 도전이며, 역동적인 긴장 중 제게는 가장 흥미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칫하면 비생산적인 의견대립으로 흐를 수도 있고 참여자의 심리나 신념의 영역을 건드릴 위험도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3. 대립과 상생 사이의 긴장

마지막으로 대립과 상생 자체 사이에도 긴장이 존재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언제 양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죠. 핏대올리고 싸우느라고 플레이가 깨져버리는 것, 서로 눈치보고 사양하느라고 아무도 즐겁지 못한 것, 이 양 극단을 피하면서 여럿이서 함께 즐거운 것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때로는 권력적인 성격의 긴장이며, 1번과 2번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개념적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역동적 긴장을 이렇게 분류해 본다면 모든 것이 합의로 정해지는, 명문규칙 없는 RP (소위 ‘소꿉놀이’)와 명문규칙이 있는 RPG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가절하의 의미 없이 편의상 소꿉놀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저도 소꿉놀이 좋아라 하니까요), 소꿉놀이에서는 명문으로 정해진 규칙의 매개가 없이 상생과 합의에 좀더 중점을 두고 RPG에서는 명문규칙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의지해 밀고 당기는 데에 좀더 중점을 둘 뿐일지도요.

중요한 건 소꿉놀이든 RPG이든 위 세가지 역동적 긴장의 모습은 모두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제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그렇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합의로 정한다 해도 바로 그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역동적 긴장은 계속해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귀기울이고 언제 의견을 내세우며, 언제 누가 진행을 주도해나갈 것인가. 명문화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웠을 뿐이죠.

결국 역동적 긴장은 다층적으로 작용하며, RPG 뿐만 아니라 여러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전반에 작용하는 원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과정에서 혼자서는 절대 생각해지 못했을 방향과 생각들이 나오고, 그러면서 놀이는 더욱 풍부하고 재밌어진다는 것이 제 경험이죠. 그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 RPG를 그렇게도 재미있는 놀이로 만드는 게 아닐까요.

로빈 로스 – 참가자 유형과 그 활용

얼마 전에 로빈의 마스터링 법칙 (Robin’s Laws of Good Game Mastering)을 굉장히 재밌게 보았는데, 특히 참가자를 유형별로 구분해서 보다 재미있는 모험을 제공하는 내용이 아주 유용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유형에 경직되어 얽매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역효과일 테고, ‘이 참가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생각하는 하나의 시작점으로서 유용한 도구인 것 같습니다.

책에서 구분하는 참가자 유형, 그리고 그 활용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 유형

파워 플레이어 – 경험치, 부, 마법물품, 능력 등의 보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형입니다. 주인공을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투중시형 – 신나는 전투를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유형. 파워 플레이어와 겹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지만, 전투 자체를 좋아하는 것과 인물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서로 다른 동기라는 점에서 구분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두가지 유형에 다 속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니까요)

전술가 – 합리적 수단과 계획을 통한 문제해결을 가장 좋아하는 유형.

전문가 – 특정 인물 유형을 아주 좋아해서 캠페인이나 배경에 무관하게 그 범주에 속하는 인물만 하려고 하는 유형. (예를 들어 닌자) 누구든지 좋아하는 인물 유형은 있지만, 전문가 성격이 강할수록 자기 선호 인물을 하는 것이 역할놀이를 하는 목적이라, 선호 인물을 할 수 없다면 캠페인을 하지 않거나 최대한 자기 선호 유형에 가까운 인물을 만들려고 합니다.

배우 – 인물 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유형. 자기 주인공답게 행동하는 것,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연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야기꾼 – 극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데서 가장 재미를 느끼는 유형. 극적 재미를 위해 놀이의 다른 많은 요소를 희생할 수 있습니다. 제가 확연히 속하는 유형.

무심한 참가자 – RPG에 큰 관심없이 친구따라 강남온 유형. 자신이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모두와 함께 뭔가를 하고 있다는데 중점을 둡니다. 소극적인 참가자를 모두 이 유형에 넣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극적 참가자의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다를듯. 어쨌든 책의 조언은 이런 유형에게는 연기나 주인공 자리를 강요해서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인데, 그점이 꽤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한국 RPG의 현실상 보기 어려운 유형이기는 합니다.

물론 이들 유형은 고정된 목록이 아니라 생각의 시작점일 뿐이고, 많은 참가자들은 두가지 이상의 유형에 속하거나 여기 나열되지 않는 유형에 속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탐험가 등)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유형 구분이 아니라 각 참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참가자 유형의 활용

참가자 유형을 활용하는 방법은 ‘이 모험에서 참가자의 동기를 충족시켜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가자 유형보다는 오히려 참가자 동기라든지 참가자 욕구라는 말이 어울릴지도요.

예를 들어 파워 플레이어는 경험치나 보물, 새로운 힘 등을 얻을 수 있는 모험이 재밌을 것이며, 전투중시형은 흥분되는 전투 기회가 없으면 지루할지도 모릅니다. 전술가는 제 아무리 극적인 얘기라도 합리적 문제해결과 계획수립 기회가 없었다면 허무할 것이며, 전문가는 자기 선호유형의 특징이 살아날 기회가 없었다면 별 재미가 없겠죠. 배우는 자기 인물의 갈등과 성격이 충분히 드러났는지, 이야기꾼은 전체 서술의 흐름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를 볼 것입니다.

그래서 책에서는 모험을 만든 후에는 항상 각 참가자별로 그 참가자의 동기가 충족될 요소가 있었는지 확인해볼 것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주를 구출하는 모험이라면 팀의 파워 플레이어를 위한 마법물품은 충분히 있는지, 전술가를 위한 문제해결의 기회는 있는지 등등. 이렇게 하면 기존 시나리오를 사용해도 참가자들에 맞게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가자 욕구에 맞는 모험을 만들어라…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당연한 얘기이면서도 상당히 좋은 조언입니다. 특히 참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작점으로서의 유형은 꽤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석적 제작과 게슈탈트적 제작

요즘 처음으로 겁스 (GURPS) 인물 제작을 스스로 해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거의 진행자 제작 인물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조금 가공해서 했던지라 이것저것 낯설군요. 재미있기도 하지만 어려운 점이라면 제가 익숙한 방식과는 반대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물이나 장비 제작에서 두 가지 다른 접근을 분석적 제작과 게슈탈트 제작이라고 이름붙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겁스는 어떤 효과를 내려면 그 구체적인 효과를 모두 분해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상처를 입혔을 경우 상대를 일시적으로 눈멀게 하는 검이라면 해악, 단점부과 (실명) 특수향상, 후속효과 향상, 근접공격 제한, 물품용 제한 등 그 구성요소를 일일히 생각해야 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제작방식을 편의상 ‘분석적 제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분석적 제작을 사용하는 예로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히어로 (HERO) 나 트라이스탯 (Tri-Stat) 등이 있습니다.

반면 제가 익숙한 접근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분석적이 아닌 게슈탈트적 제작입니다. 효과를 개별 요소로 분해하는 대신 키워드로 표현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페이트 (FATE) 1.0으로 같은 검을 구현한다면 검을 부속으로 만들고 ‘상처를 입으면 시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한다’ 면모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효과 (시간적 범위, 필요한 성공차이, 판정에 수정치 등)가 필요하면 종종 규칙의 범위 내에서 합의해서 정합니다. 페이트 외에 히어로퀘스트 (HeroQuest)나 포도원의 개들 (Dogs in the Vineyard), 라이서스 (Risus) 등 다수의 규칙이 게슈탈트적 제작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두 가지는 일장일단이 있는 접근들이라고 봅니다. 분석적 제작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게슈탈트적 제작은 제작이 쉽고 유연합니다. 단점은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석적 제작은 복잡해질 수 있고, 기본적으로 목록에서 고르는 형태이므로 반드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게슈탈트적 제작은 대가성 확보가 불확실할 수 있고, 구체적인 효과는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이 두 접근은 서로 취할 점이 많아 보입니다. 우선 분석적 제작에서 효과를 요소별로 분해해 생각하는 방식은 게슈탈트식 제작에서도 형평을 맞추거나 구체적인 효과를 정할 때 좋은 시작점이 됩니다.예를 들어 ‘감각 기반’ 향상을 보면, 검이 섬광을 발산해 그걸 보기만 해도 잠시 눈이 안보이는 것은 검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야 하는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각 기반의 능력은 명중 판정을 요구하는 능력보다 면모 칸이 더 많아야 한다든지, 페이트 점수를 써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대가성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것은 감각 기반 향상을 몰라도 원론적으로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때로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정형화된 규칙을 보는 것이 더 구체적인 발상을 유도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너무 얽매여서 게슈탈트식 제작의 장점인 평이함과 유연성을 잃는 것은 금물. 그저 생각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아주는 정도로 사용해야지 목록이 발상의 자유로음을 제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석적 제작도 게슈탈트식 제작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상상력을 펼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개별 요소의 목록이 상상력의 발판이 아닌 천장이 될 위험을 피한다는 면에서이죠. 즉, 목록에 얽매이지 않고, 목록에 없는 것도 구현하려는 생각의 방향을 잡아주는 정도일까요.

이와 같이 분석적 접근과 게슈탈트적 접근은 서로 반대이긴 하지만, 발상을 얻거나 생각의 방향을 잡는데 서로 취할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른만큼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예시에 쓴 검을 겁스와 페이트로 제작해서 비교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명혼도 (冥昏刀) – 겁스판

해악 (2단계): 15CP

실명: +50%
근거리 (공격범위 1, 2): -25%
도난 가능 (ST 겨루기): -30%
소비시간 연장 (1초): -10%
일시적 단점 (죽음의 기운): -10%

비고: 일시적 단점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불길한 검이라 들고 있으면 반응판정에 벌점이 붙는 걸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끄고 켤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데 1초 이상이 걸리는 능력에만 붙일 수 있다고 해서 1초 소비시간을 넣긴 했지만 어차피 전투중에 반응판정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전투 외의 상황에서 능력을 끄는 건 쉬우니까요.

차라리 검을 해악 장점을 가진 동료로 제작해서 죽음의 기운을 넣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해악만이 목적인데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제작하기는 좀 그런 면도 있지만요. 아니면 참가자와 진행자가 합의해서 다른 효과를 부여할 수도 있겠죠.

명혼도 (冥昏刀) – 페이트판

명혼도 (□)
실명을 유발한다 □□
불길한 기운 □

발동조건: 다친 결과 (성공차이 3) 이상으로 공격에 성공했을 때 실명 면모 발동할 수 있음. 조건 충족시 피해자는 기본적으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실명 상태, 발동에 페이트 점수를 들여 시간단위 올릴 수 있음.

비고: 위에서 말한 ‘불길한 검이라 사회생활에 지장’ 부분은 어렵지 않게 표현됩니다. 불길한 기운 면모를 강제 발동하면 사회적으로 손해볼 때마다 페이트 점수를 받을 테니 대가성도 확보하고요. 반면 위협 판정을 할 때는 자발적으로 발동해 가산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시 위의 겁스판과는 달리 공격의 구체적인 효과는 따로 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경우에 형평성을 맞추는데 좀더 신경을 써야 하고, 이점에 대해서는  페이트 규칙 자체 외에도 겁스 같은 다른 규칙을 참고하는 것이 발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RPG는 게임인가

요즘 세션 등지에서 RPG가 게임인가 하는 의문을 접해서 제 나름대로 의견을 적어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RPG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성과 서사성 사이에는 아무 논리필연적 충돌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게임성 없이 RPG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라고 말이죠.

제가 RPG의 게임성을 판단하기 위해 참고한 글은 그레그 코스티캔의 게임론 (I Have No Words and I Must Design)입니다. 이 글에서 코스티캔은 게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 목적이 있다
– 장애를 제시한다
– 자원관리를 요구한다
– 게임말이 있다
– 정보가 주어진다

제가 아는 한 코스티캔의 게임론은 게임이 무엇인지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한 글이기 때문에 코스티캔이 정의한 바를 항목별로 따라가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RPG는 의사결정을 하는 놀이입니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에 따라서 게임의 상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퍼즐과 구분되고, 의사결정의 자유가 있다는 점에서 직선적인 이야기와도 구분됩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이야말로 RPG를 재미있게 하는 최대의 요소라고 저는 생각하며, RPG를 게임으로 규정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물론 RPG는 퍼즐처럼 돌릴 수도 있고, 직선적인 이야기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100% 순수한 퍼즐로 돌린다면 실마리를 주어서 하나하나 짜맞추며 전체적인 실상에 다가갈 수 있게 하되, 참가자의 결정은 퍼즐 자체의 상태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발견할 수만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진행자의 선택 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선택도 (예를 들어 용의자 추적, 증거 은닉 등) ‘퍼즐’ 전체를 변하게 하며, 따라서 RPG를 순수한 퍼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퍼즐의 요소는 장애물로서든 시나리오의 구성으로든 RPG에 흔히 들어가며 (시나리오의 종류 참조), 진행 스타일에 따라서는 게임 다음으로 RPG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직 퍼즐이라고 하면 의사결정의 요소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퍼즐 외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

RPG를 직선적인 이야기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참가자의 의사결정이 이야기의 결말이나 전개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며, 오직 정해진 이야기만을 따라갈 수 있게 말이죠. 이러한 RPG를 하고 싶은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진행하기도, 참가하고도 싶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직선 진행은 흔하지 않다 하더라도 (금방 파토나는 게 보통이죠), 이야기와의 일종의 타협점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즉 참가자의 선택에 따라 그때그때 전개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전체 결말은 정해져 있거나, 아니면 두세가지 중 하나로 압축되는 것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져 있는 이야기와는 구분되기 때문에, RPG를 100%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목적이 있다

위에서 말한 의사결정은 어떤 식으로든 목적이 있어야 의미를 갖습니다. 주인공이 오크 세마리를 보고 도망쳐야 할까요, 싸워야 할까요? 아무 목적이 없다면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도 없습니다. 보물을 찾아 미궁을 털러 온 것이든, 포로로 잡혀와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든, 생존 자체이든 뭔가 목적이 없이 의사결정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RPG에는 목적성이 있을까요? 단언하건대 제가 진행하거나 참가한 RPG 세션 중에서 크든 작든 목적이 없는 것은 없었습니다. ‘바빌론을 탈출해라’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라’부터 ‘세상을 구해라’까지, RPG 플레이에서는 진행자 설정이든 참가자 설정이든 수많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게 아무것도 없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주인공의 생존이라는 훌륭한 목적이 있습니다.

목표는 또한 다층적이기도 해서, 참가자의 목표는 주인공의 목표와는 흔히 ·차이가 납니다. 주인공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도 참가자의 목적은 위험하고 신나는 모험을 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다양하고 다층적인 목적들이 서로 얽히면서 플레이 내용에는 깊이가 더해지며, 의사결정은 복합적이고 흥미로워집니다.

3. 장애를 제시한다

한번의 의사결정만으로 목적을 이룬다면 별다른 재미는 느끼기 힘들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할래 집에 편하게 있을래?
세계를 정복한다고? 축하해! 넌 이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어!” 하는 진행은 짧고 간단한 점은 좋지만(..) 재미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목적으로 가는 길에는 크고 작은 장애가 제시됩니다.

이 장애는 여러가지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보드게임에서처럼 다른 참가자의 방해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장애의 요체는 목적으로 다가가는 길에 적절한 의사결정을 통해 넘어가야 할 어려움이지, 논리필연적으로 경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혼자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는 경쟁 없이 프로그램이 장애물을 내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장애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컴퓨터 게임의 게임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습니다.

의사결정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는데 기준을 두기 위해 RPG에는 흔히 규칙책과 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RPG의 규칙은 책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참여자들의 명시적·암묵적 합의 역시 규칙으로 작용합니다. 심지어는 규칙책도 판정도 없는 플레이 역시 장애물 극복 등 게임성의 요소를 갖춘 게임일 수 있습니다.

4. 자원관리를 요구한다

게임 내에서는 의사결정을 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원을 관리합니다. 이 자원은 인물 제작 점수, HP, 마법 주문, 극점수, 경험치, 식량, 재산, 정보, 명성, 한 라운드 내의 시간 등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관리해야 할 자원이 다양할수록 의사결정은 더욱 복합적이고 흥미로워집니다.

주사위 없이 자원관리만으로 성패를 결정하는 다이스리스 RPG도 있습니다. 미라클 점수를 사용하는 노빌리스 (Nobilis)라든지 노력 점수를 사용하는 Active Exploits 등이 그 예이지요. 게임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반드시 무작위수가 아니더라도 여러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5. 게임말이 있다

게임에서는 또한 자원관리를 하고 의사결정을 반영함으로써 목적을 이루는 수단인 말이 있습니다. 게임말은 참여자가 게임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RPG에서 참가자가 다루는 주인공(PC)도 하나의 게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게임말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깊이있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게임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인공은 복잡하고 자세한 게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치와 행동범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와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가진 게임말이라고 해서 게임말이 아니라는 필연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참여자가 사용하는 게임말의 수가 많을수록 각 말이 가진 특성은 단순해지고, 수가 적을수록 복잡다단해집니다. 한사람 앞에 16개가 있는 체스말은 종류와 움직임 규칙, 위치라는 특징만을 갖지만,  한사람 앞에 RPG의 주인공은 감정,  배경, 인간관계, 개인적 욕구, 능력치, 고민, 허점, 주제의식 등 훨씬 다양한 면모가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게임성 측면에서 보면 주인공이 게임말이라고 해서 허구적 인물로서의 깊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임말이라고 해서 깊이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게임성과 서사성이 서로 모순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성격은 아니지만 저는 게임성과 서사성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라는 게임말 역시 얼마든지 서사적 깊이를 갖출 수 있습니다.

진행자의 역할은 참가자와는 달라서, 게임말을 다룬다기보다는 게임판을 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참가자와의 의논과 합의는 있어야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권한으로 말이죠.

전통적인 진행자/참가자 역할구분에서 진행자는 게임판에만, 참가자는 게임말에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 구분을 어느정도 흐리게 하는 규칙책도 보입니다. 페이트 (FATE) RPG에서 페이트 점수를 들여서 다양한 서술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든지 (“회중전등이 필요한데..” 1 페이트 점수 사용 “..마침 주머니에 회중전등이 있군!”), 트롤베이브 (Trollbabe)나 던전 (Donjon),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 참가자 역시 서술권을 가질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일 것입니다. True20의 신념 (Conviction) 점수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알고 있고요.

마찬가지로 참가자의 게임말에 대한 진행자의 권한을 일부 인정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겁스 (GURPS)에서 정신적 단점의 자제판정을 시킨다든지, 페이트에서 면모를 강제발동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 예이지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RPG에서 모든 참여자가 플레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가자든 진행자든 자신의 게임말 (진행자는 게임판)을 통해 의사결정과 자원관리를 하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지요.

6. 정보가 주어진다

게임의 다른 모든 요소는 정보가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의미있는 의사결정과 자원관리, 장애물 극복을 위해서는 그러한 결정들을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정보가 주어져야 합니다. 오크가 몇마리인지,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 중립적인지, 어디 있는지 몰라서야 싸워야 할지, 싸운다면 어떤 전술을 써야 할지, 교섭해야 할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으로 향해야 할지 알 방법이 없죠.

필요한 정보가 없는 것도 곤란하지만 필요없는 정보를 너무 많이 주는 것도 곤란합니다. 오크와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데 오크의 계보와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반면 오크 부족을 서로 이간질시키려고 한다면 오크 부족간의 역사와 정치적 관계는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정보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와 관련성을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진행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참가자 또한 주인공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진행자와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합니다. 각 참여자의 선택과 행동은 새로운 정보를 창출하며, 그래서 RPG 플레이는 참여자의 행동에 따라 변해가는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7. 결론

이상과 같이 RPG가 게임인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온 게임의 요소에 비추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퍼즐이나 이야기 같은 다른 유희에서 빌려온 요소 역시 있다  해도 RPG는 기본적으로 게임이라는 결론에 나름대로 도달했습니다. RPG는 게임말을 이용하여 자원관리를 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 목적을 가지고 유의미한 의사결정을 하는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RPG 최대의 재미는 바로 이 게임성에서 나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즐겁고 하나하나 맞춰가는 퍼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RPG의 질리지 않는 재미는 의사결정의 요소, 즉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는 또다른 대응을 요구하는 게임적인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와도 다르고 퍼즐과도 다른 이 역동성이야말로 RPG가 제공하는 즐거움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경이감에 대하여

SF와 경이감에 대한 Wishsong님의 글에 댓글로 쓰다가 길어져서 엮인글로 올립니다.

경이감은 의식적으로 ‘느끼자!’ 하고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만큼 경이감을 느끼자는 합의의 내용은 애매한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합의의 일환으로 진행자가 묘사하는 것들이 반드시 위협이나 단서일 필요는 없다는 암묵적 혹은 명시적 공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경이감을 느낄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캠페인 내에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탄 우주선이 어떤 행성을 향해 가고 있는데 우주공간을 떠도는 ‘우주 반딧불’이 색색의 빛을 은은하게 발하면서 우주선 주변을 춤추듯 유영하고, 그들의 텔레파시로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아름다운 노래가 울린다고 하죠.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진공 속에서 듣는 노래… 그러나 이런 특이한 현상은 불행히도 90% 이상의 경우 위협으로 간주됩니다. 주인공이 함포로 달려가 우주반딧불을 몰살시켜 버린다면 경이감은 저 너머에. (먼산)

이 경우 상인들의 여행담이라든지 해서 ‘XX 행성 주변의 우주를 떠도는 우주 반딧불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미리 주지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얘기로만 듣던 우주 반딧불이다!’ 하고 PC들이 느긋하게 즐거워할 바탕도 될 수 있겠죠. (‘속으면 안돼! 마스터의 속임수야!’로 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참가자 입장에서는 배경세계의 일관성이 더욱 탄탄하게 느껴져서 몰입감은 한층 증가할 테고, 이것은 경이감에 더욱 도움이 되죠.

이 예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진행자와 참가자간의 합의는 ‘PC들을 계속적인 위협 상태에 두지 않는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캠페인 자체의 분위기는 끝없는 위협과 음모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비정물인데 갑자기 우주반딧불을 감상하며 즐거워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경이감을 살리려면 캠페인 분위기에 탐험과 발견이라는 느긋한 여유가 어느정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하나 생각할 점이라면 참가자는 (대개의 경우) 어린애가 아니며, 따라서 진행자가 보여주는 묘사에 앉아서 감탄하라는 것은 다소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참가자가 어떤 것에 실제로 감탄할지 스스로 얘기하는 것일텐데, 예를 들어 ‘거대한 지하도시가 나오면 좋겠어요’라든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구조물이 있으면 좋겠어요’라든지 ‘초월적 지성체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얘기하면 경험치나 극점수로 포상하는 것도 좋은 동기부여겠죠.

참가자 제안 외에도, 경이를 느끼는 것 자체에 포상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우주의 경이를 깊이 느끼며 감탄하는 것은 그 자체 즐거운 경험이며, 힘든 탐험생활에 새로운 동기부여를 하고, 정신의 지평을 넓히며, 지친 혼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이의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는 연기를 함으로써 경험치나 부상 회복을 받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죠. 경험치 획득의 조건을 참가자가 스스로 정하는 ‘과거의 그늘’이라면 다음과 같은 열쇠도 가능합니다.

경이의 열쇠
– 아무개에게는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보람입니다. 경이를 불러일으킬만한 광경에 하던 일을 멈추고 깊은 감동을 느끼면 1XP, 가던 경로를 바꾸거나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경이로운 광경을 일부러 찾아나서면 2XP, 목숨을 걸고 우주의 경이를 찾아나서면 5XP를 받습니다. (삭제조건: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험을 피합니다.)

물론 이 방법은 지나치면 억지 춘향이 돼서 진짜 경이감은 증발해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억지로 꾸민 감동은 없느니만 못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요소가 경이를 불러일으키는지 분석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질성과 규모, 공포, 희소성, 주제의식 관련성, 몰입감 등이 있습니다. 이질성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인데 이게 어떤 식으로든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공 속에 생물이 살아간다거나, 마치 레이스처럼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다리가 수천톤의 무게를 문제없이 견딘다거나.

규모는 말 그대로 규모. 물리적 규모이든 다른 의미의 규모이든 거대한 규모는 경이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두개의 대륙을 잇는 거대한 다리, 날개를 펼치면 하늘이 어두워지는 괴조, 인류의 전 역사에 걸쳐 진행돼 왔고 인류 전체의 운명을 포괄하는 비밀스런 계획 등이 그 예입니다.

공포의 요소가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고 덧없는 것인지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의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에서 바다를 내다보며 느끼는 감정은 규모와도 관련이 있지만 공포와도 관계가 있죠. 마찬가지로 위의 괴조의 예도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경이감이 증폭됩니다. 그럼에도 이 공포가 너무 큰 나머지 감동을 느낄 여지가 없을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는 점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포를 경이감의 요소로 활용하려면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그 위협이 느낌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가 아닌 방법이 있습니다. 괴조가 엄청나게 크긴 하지만 사실은 아주 온순한 지성체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면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든지 (총을 쏜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 무례), 반딧불이 머리속에 텔레파시로 얘기하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안전한 생물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함부로 죽였다가는 빈축을 살 것이라든지 말이죠.

두번째는 위협이 실체이기는 하지만 PC가 어떻게 해도 그 위험에 대응할 수가 없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주선이 웜홀로 끌려들어가는데 모든 기기가 반응을 안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든지. 이런 경우 참가자들은 위협에 대응하기보다는 웜홀의 신비에 관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RPG에서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기법이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왠만하면 좋을 테고요.

희소성도 경이감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경이를 느낄만한 장면이 너무 잦아서야 크게 가치절하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경이로운 경험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을 요구하는 것도 희소성을 확보하는 한 방법입니다. 고대 도시를 발굴하기 위한 모험이라든지 말이죠. 이럴 경우는 진행자의 묘사는 노력에 대한 대가같은 느낌도 들어서 더욱 인상깊지 않을까요.

경이로운 경험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성격이라면 감동은 더욱 증폭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캠페인의 주제가 ‘자유 의지’인 캠페인을 생각해 보죠. 이 경우 인간이 자멸해 버리지 않도록 인간의 역사와 선택을 교묘하게 조종해온, 자비롭지만 압제적인 초월적 지성체와의 만남은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에 얘기했듯 배경 세계에 대한 몰입감도 경이감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다는 얘기를 여행중에 듣기만 하다가 직접 자기 눈으로 보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겠죠. 여행자들은 신기한 것을 봤으면 대체로 소문을 내게 마련이며,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과장되거나 왜곡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치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은 세계의 일관성과 몰입감을 형성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경이감의 일반적인 요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특정 참가자들에게’ 무엇이 감탄스러운지 분석해 보는 노력일 것입니다. RPG는 의사소통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는 굳이 반복하기도 쑥스럽고 (그러면서 왜 반복하냐), 이것은 경이감을 유발하는 노력에도 예외가 아니니까요.

뭔가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정리해 보자면…

1.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캠페인
2. 참가자의 제안을 활발하게 받기
3. 경이를 느끼는데 대한 포상
4. 경이의 요소를 분석해서 활용

이상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