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는 게임인가

요즘 세션 등지에서 RPG가 게임인가 하는 의문을 접해서 제 나름대로 의견을 적어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RPG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성과 서사성 사이에는 아무 논리필연적 충돌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게임성 없이 RPG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라고 말이죠.

제가 RPG의 게임성을 판단하기 위해 참고한 글은 그레그 코스티캔의 게임론 (I Have No Words and I Must Design)입니다. 이 글에서 코스티캔은 게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 목적이 있다
– 장애를 제시한다
– 자원관리를 요구한다
– 게임말이 있다
– 정보가 주어진다

제가 아는 한 코스티캔의 게임론은 게임이 무엇인지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한 글이기 때문에 코스티캔이 정의한 바를 항목별로 따라가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RPG는 의사결정을 하는 놀이입니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에 따라서 게임의 상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퍼즐과 구분되고, 의사결정의 자유가 있다는 점에서 직선적인 이야기와도 구분됩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이야말로 RPG를 재미있게 하는 최대의 요소라고 저는 생각하며, RPG를 게임으로 규정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물론 RPG는 퍼즐처럼 돌릴 수도 있고, 직선적인 이야기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100% 순수한 퍼즐로 돌린다면 실마리를 주어서 하나하나 짜맞추며 전체적인 실상에 다가갈 수 있게 하되, 참가자의 결정은 퍼즐 자체의 상태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발견할 수만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진행자의 선택 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선택도 (예를 들어 용의자 추적, 증거 은닉 등) ‘퍼즐’ 전체를 변하게 하며, 따라서 RPG를 순수한 퍼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퍼즐의 요소는 장애물로서든 시나리오의 구성으로든 RPG에 흔히 들어가며 (시나리오의 종류 참조), 진행 스타일에 따라서는 게임 다음으로 RPG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직 퍼즐이라고 하면 의사결정의 요소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퍼즐 외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

RPG를 직선적인 이야기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참가자의 의사결정이 이야기의 결말이나 전개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며, 오직 정해진 이야기만을 따라갈 수 있게 말이죠. 이러한 RPG를 하고 싶은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진행하기도, 참가하고도 싶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직선 진행은 흔하지 않다 하더라도 (금방 파토나는 게 보통이죠), 이야기와의 일종의 타협점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즉 참가자의 선택에 따라 그때그때 전개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전체 결말은 정해져 있거나, 아니면 두세가지 중 하나로 압축되는 것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져 있는 이야기와는 구분되기 때문에, RPG를 100%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목적이 있다

위에서 말한 의사결정은 어떤 식으로든 목적이 있어야 의미를 갖습니다. 주인공이 오크 세마리를 보고 도망쳐야 할까요, 싸워야 할까요? 아무 목적이 없다면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도 없습니다. 보물을 찾아 미궁을 털러 온 것이든, 포로로 잡혀와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든, 생존 자체이든 뭔가 목적이 없이 의사결정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RPG에는 목적성이 있을까요? 단언하건대 제가 진행하거나 참가한 RPG 세션 중에서 크든 작든 목적이 없는 것은 없었습니다. ‘바빌론을 탈출해라’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라’부터 ‘세상을 구해라’까지, RPG 플레이에서는 진행자 설정이든 참가자 설정이든 수많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게 아무것도 없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주인공의 생존이라는 훌륭한 목적이 있습니다.

목표는 또한 다층적이기도 해서, 참가자의 목표는 주인공의 목표와는 흔히 ·차이가 납니다. 주인공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도 참가자의 목적은 위험하고 신나는 모험을 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다양하고 다층적인 목적들이 서로 얽히면서 플레이 내용에는 깊이가 더해지며, 의사결정은 복합적이고 흥미로워집니다.

3. 장애를 제시한다

한번의 의사결정만으로 목적을 이룬다면 별다른 재미는 느끼기 힘들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할래 집에 편하게 있을래?
세계를 정복한다고? 축하해! 넌 이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어!” 하는 진행은 짧고 간단한 점은 좋지만(..) 재미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목적으로 가는 길에는 크고 작은 장애가 제시됩니다.

이 장애는 여러가지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보드게임에서처럼 다른 참가자의 방해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장애의 요체는 목적으로 다가가는 길에 적절한 의사결정을 통해 넘어가야 할 어려움이지, 논리필연적으로 경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혼자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는 경쟁 없이 프로그램이 장애물을 내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장애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컴퓨터 게임의 게임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습니다.

의사결정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는데 기준을 두기 위해 RPG에는 흔히 규칙책과 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RPG의 규칙은 책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참여자들의 명시적·암묵적 합의 역시 규칙으로 작용합니다. 심지어는 규칙책도 판정도 없는 플레이 역시 장애물 극복 등 게임성의 요소를 갖춘 게임일 수 있습니다.

4. 자원관리를 요구한다

게임 내에서는 의사결정을 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원을 관리합니다. 이 자원은 인물 제작 점수, HP, 마법 주문, 극점수, 경험치, 식량, 재산, 정보, 명성, 한 라운드 내의 시간 등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관리해야 할 자원이 다양할수록 의사결정은 더욱 복합적이고 흥미로워집니다.

주사위 없이 자원관리만으로 성패를 결정하는 다이스리스 RPG도 있습니다. 미라클 점수를 사용하는 노빌리스 (Nobilis)라든지 노력 점수를 사용하는 Active Exploits 등이 그 예이지요. 게임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반드시 무작위수가 아니더라도 여러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5. 게임말이 있다

게임에서는 또한 자원관리를 하고 의사결정을 반영함으로써 목적을 이루는 수단인 말이 있습니다. 게임말은 참여자가 게임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RPG에서 참가자가 다루는 주인공(PC)도 하나의 게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게임말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깊이있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게임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인공은 복잡하고 자세한 게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치와 행동범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와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가진 게임말이라고 해서 게임말이 아니라는 필연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참여자가 사용하는 게임말의 수가 많을수록 각 말이 가진 특성은 단순해지고, 수가 적을수록 복잡다단해집니다. 한사람 앞에 16개가 있는 체스말은 종류와 움직임 규칙, 위치라는 특징만을 갖지만,  한사람 앞에 RPG의 주인공은 감정,  배경, 인간관계, 개인적 욕구, 능력치, 고민, 허점, 주제의식 등 훨씬 다양한 면모가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게임성 측면에서 보면 주인공이 게임말이라고 해서 허구적 인물로서의 깊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임말이라고 해서 깊이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게임성과 서사성이 서로 모순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성격은 아니지만 저는 게임성과 서사성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라는 게임말 역시 얼마든지 서사적 깊이를 갖출 수 있습니다.

진행자의 역할은 참가자와는 달라서, 게임말을 다룬다기보다는 게임판을 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참가자와의 의논과 합의는 있어야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권한으로 말이죠.

전통적인 진행자/참가자 역할구분에서 진행자는 게임판에만, 참가자는 게임말에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 구분을 어느정도 흐리게 하는 규칙책도 보입니다. 페이트 (FATE) RPG에서 페이트 점수를 들여서 다양한 서술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든지 (“회중전등이 필요한데..” 1 페이트 점수 사용 “..마침 주머니에 회중전등이 있군!”), 트롤베이브 (Trollbabe)나 던전 (Donjon),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s)에서 참가자 역시 서술권을 가질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일 것입니다. True20의 신념 (Conviction) 점수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알고 있고요.

마찬가지로 참가자의 게임말에 대한 진행자의 권한을 일부 인정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겁스 (GURPS)에서 정신적 단점의 자제판정을 시킨다든지, 페이트에서 면모를 강제발동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 예이지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RPG에서 모든 참여자가 플레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가자든 진행자든 자신의 게임말 (진행자는 게임판)을 통해 의사결정과 자원관리를 하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지요.

6. 정보가 주어진다

게임의 다른 모든 요소는 정보가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의미있는 의사결정과 자원관리, 장애물 극복을 위해서는 그러한 결정들을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정보가 주어져야 합니다. 오크가 몇마리인지,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 중립적인지, 어디 있는지 몰라서야 싸워야 할지, 싸운다면 어떤 전술을 써야 할지, 교섭해야 할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으로 향해야 할지 알 방법이 없죠.

필요한 정보가 없는 것도 곤란하지만 필요없는 정보를 너무 많이 주는 것도 곤란합니다. 오크와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데 오크의 계보와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반면 오크 부족을 서로 이간질시키려고 한다면 오크 부족간의 역사와 정치적 관계는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정보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와 관련성을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진행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참가자 또한 주인공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진행자와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합니다. 각 참여자의 선택과 행동은 새로운 정보를 창출하며, 그래서 RPG 플레이는 참여자의 행동에 따라 변해가는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7. 결론

이상과 같이 RPG가 게임인지 코스티캔의 게임론에 나온 게임의 요소에 비추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퍼즐이나 이야기 같은 다른 유희에서 빌려온 요소 역시 있다  해도 RPG는 기본적으로 게임이라는 결론에 나름대로 도달했습니다. RPG는 게임말을 이용하여 자원관리를 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 목적을 가지고 유의미한 의사결정을 하는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RPG 최대의 재미는 바로 이 게임성에서 나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즐겁고 하나하나 맞춰가는 퍼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RPG의 질리지 않는 재미는 의사결정의 요소, 즉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는 또다른 대응을 요구하는 게임적인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와도 다르고 퍼즐과도 다른 이 역동성이야말로 RPG가 제공하는 즐거움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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