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니까 마스터다?

이전 캠페인의 플레이어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나름 재미있어서 적어봅니다.

이방인님과 저는 둘다 생명력을 띈 인물의 내면과 의지에 따라 흘러가는 인물 중심적 플레이를 즐기는 편입니다. 이방인님은 인물에 많이 몰입하시고, 심지어 나중에 끝나면 자신이 그런 RP를 했다는 기억도 나지 않으신다고 하더군요.
저도 인물 중심 마스터링에 정리했듯 조연 (NPC) 초기 설정에서 시작해 인물 간의 상호작용에 진행의 상당 부분을 맡깁니다. 조연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는 일은 물론 많고, 그냥 ‘얘는 이렇게 할 것 같아서’ RP를 했다가 나중에서야 그 이유가 떠오르는 일도 있습니다.
이방인님과 저의 차이라면 이방인님은 하나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참가 (플레이)를 선호하시고, 저는 여러 인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진행 (마스터링)을 선호합니다. 그 차이가 성별 차이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일반화이지만, 도식화하자면 남성인 이방인님은 개체 중심적 사고가 발달한 예가 아닌가 합니다. 남자들의 로망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활약과 승리, 고뇌가 중심이고, 물론 사회와 주변 인물과 관계도 맺지만 그런 사회성은 주인공 개인의 존재에 비해서는 덜 중요합니다. 초보자님과 제가 이방인님 인물들을 가리켜 ‘마초’라고 하는 것은 그런 특징도 포함하고 있겠죠.
반면 저는 관계 중심적 사고가 더 발달한 것 같습니다. 여자들의 로망에는 물론 개인도 존재하지만, 개인 간의 관계와 감정이 그 개인의 활약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특히 감정이 가장 얽히고 섥히는 가족과 연애관계 (까놓고 말하면 피와 섹스)는 지대한 관심사이지요. 제 경험으로는 일반적으로 여성 참가자가 주인공의 가족이나 연애 설정에 적극적인 편입니다. 그리고 종종 진행자가 그런 설정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서 설정이 묻혀지곤 하죠. (안습)
이러한 대조의 예를 들자면, 이방인님이 맡으셨던 주인공 자락스 토레이는 루바트 오르가나라는 조연이 대신 죽어줘서 목숨을 부지하고는 시스에서 제다이로 전향한 인물입니다. (죽은 이의 뒷모습) 흔한 듯하면서도 보편적인 당위성이 있는 설정이고, 강한 떡밥이기도 했죠. 다만, 죽은 루바트와의 ‘관계’라는 요소는 별로 없었습니다. 자락스라는 인물의 영웅 서사시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결국 자락스에게 루바트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의 불편함이 없는 편리한 추상이었죠. 희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상징하는.
참가자 설정에 나온 이 떡밥을 활용하는 것은 진행자인 저였는데, 제가 루바트 오르가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가족은 심정이 어땠을까’였습니다. 아들이자 형제가 죽어서 돌아오면 억장이 무너지는 건 너무 당연한데 루바트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가족 관점으로는) 루바트를 죽게 한 시스에 대한 마음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자락스에게는 관계가 부재한 상징이었던 루바트의 이야기가 저에게는 관계의 그물에 남은 커다란 구멍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마침 오르가나는 (이방인님이 무작위 제조기에서 뽑으신 이름이었지만) 스타워즈 영화 시대의 알데란 왕가기도 하겠다, 아주 정치물로 갈 수도 있겠더군요.
그래서 생긴 설정이 루바트의 동생 다룬이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선택을 한 형도, 그 죽음의 계기가 된 자락스도 용서할 수 없으며, 아끼고 존경한 형에 대한 열등감의 반작용으로 무서운 야심가가 된 모순투성이 어린아이. 자락스의 적수에서 시작해서 공의회의 적수로서 캠페인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한 다룬은 철저히 관계 중심적 사고의 산물이었습니다. 제게 루바트는, 그리고 나아가서 자락스도 그 개체만으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거죠. 혈육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가족 간에 얽히게 마련인 감정과 그에 따르는 무수한 왜곡과 오해를 생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게는 루바트도 자락스도 제대로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관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행자란 꽤나 편리한 위치입니다. 인물을 관계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면 인물의 단위 자체가 ‘다수’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진행자는 여러 인물을 설정할 수 있으니까요. (참가자의 의견이나 설정을 받을 수는 있지만 조연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일반적으로 진행자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플레이 중 사건의 결과도 여러 인물에게 한꺼번에 적용할 수 있고요. 같은 원리로 개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물만 맡으면 되는 참가자가 일반적으로 더 편할 것입니다.
위와 같이 생각해 보면 진행자는 여성에게 꽤 적합한 역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정확히는 관계 중심적으로 인물과 설정을 생각하는 사람에게요. 마찬가지로 참가자는 남성, 정확히는 개체 중심성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에게 적합할 수 있겠지요.
당연하지만 이것은 좀 지나칠 정도의 단순화이고, 남녀로 구분하는 것은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경향에 대한 일반화한 표현일 뿐입니다. 실제로 개체 중심적 사고와 관계 중심적 사고는 서로 완전히 다른 부류라기보다는 중점의 차이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라고 다 개체 중심적인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다 관계 중심적인 것도 아니죠. (즉 제목은 떡밥입니다 (?)) 그저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이 RPG 진행을 맡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성별이 아니라 개체이며, RPG인의 개인적 특징 중에는 얼마든지 좋은 마스터링이나 플레이로 이어질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관심사가 한 영웅의 심리와 모험을 탐험하는 것이든,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의 탐구이든, 무술이든, 정치물이든, SF이든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의 취향과 관심사, 그리고 개인적 스타일이야말로 RPG 생활을 풍요롭게 할 테니까요.

8 thoughts on “여자니까 마스터다?

  1. Wishsong

    확실히 누나의 마스터링을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 같아. 그 점은 정말 배워야 할 부분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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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사람마다 인물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 같아. 관계는 부차적이고 인물 혼자 서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계 없이는 인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개인적으로 관계야말로 제일 재밌는 얘기가 나오는 소재라고 난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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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orches

    승한님 말씀대로 로키님의 마스터링은 인물들 간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듯. 상당히 부러워요.

    제 경우는 pc를 만들 때 굳히 의식하는 건 아닌데 가족관계나 연예관계 등을 설정하고 있거나.. 플레이 중에 다른 pc의 관계에 발리고 엮여지길 원하는 경우도 잦은 것 같아요. 마스터가 떡밥을 던져주면 혼자 정줄 놓구 안드로메다까지 연성질하며 날라갔다 온 다음에 이 무서운 시스로드 발리게 만들다니 흑흑 책임져요 요러는건 기본이구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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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오체스님의 그런 성향이 이 글의 일반화에 참고가 되었죠. 마스터가 잘 못 살리는 일이 많다는 것도 저와 오체스님의 경험에서 따온 얘기고요. (안습) 음 뭐 제가 원래 좀 다쓰 로키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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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사히라

    저는 플레이를 하면서 관계를 맺어가는건 그렇다 치더라도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물의 주변 관계를 설정하는걸 상당히 귀찮아 하는 경향이 있는듯…
    제대로 된 가족관계를 가지고 있던 캐릭터가 별로 없었던 듯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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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이 글 쓰면서 아군 생각도 했었지..ㅋㅋ 남자들이 고아 PC가 많기도 하고. 특히 아군과 오체스님의 대조가 참고가 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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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크리

    적어도 sex로서의 남성이 아닌 gender로서의 그것의 경우라면 뒤가 없이 앞만 있는 인물을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은건 확실한 듯 합니다. ‘미션과 쇼핑’이라는 비유로 설명할 수 있는 그거요. 최근에 같이 rpg를 하는 분의 제작된 캐릭터 몇개를 보고 등 위가 가렵게 된 이유의 가장 최근 글을 발견하게되어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는 이유나 가치관 선택의 결과를 ‘효율’이나 ‘이득’이 아닌 캐릭터의 동기로 잘 연결짓지 못하게 되는건 남성성을 이유로 들어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남자라고 여성성이 없는건 아니니까요). 취향과 관심분야, style이 rpg를 풍요롭게 하리라는 말에 적극동감합니다.. 동시에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담긴, ‘배려’가 rpg를 하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이 되는 style로 자리매김하길 바래야겠죠. :>
    종종 나침반이 되어줄 로키님의 글과 만날 수 있도록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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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좋은 구분이군요. 신체적인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라면 역시 조심스럽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서라면 비교적 그렇게 얘기하기 쉽죠. 미션과 쇼핑 하니 이전에 읽은 책에서 남자가 쇼핑에 지겨워하지 않고 따라오게 하는 방법이 생각나네요. 진짜 엉터리 계획이라 하더라도 어디어디 가게에 들러서 몇시에 끝낸다, 식으로 끝이 있는 목적지향적 행동, 즉 미션으로 만들어주면 한결 쉽게 따라다닌다는 조언이었지요.

      개별적인 스타일이 RPG를 풍요롭게 하는 만큼 RPG에는 남성성과 여성성 역시 같이 있는 편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핵심에는 역시 말씀하신 배려가 있어야겠지요. 통찰력 있는 댓글과 칭찬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들러주시고 댓글도 남기실 마음이 나게 더욱 좋은 글을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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