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1: 문제의 제기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다 그렇듯 RPG도 하다 보면 크고작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참가자가 원하는 인물 설정이 마음에 안 드는데 차마 뭐라고 하기는 그래서 그대로 진행하는 일도 있고, 반대로 뭐라고 했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지요. 진행자의 일방통행식 진행이 불만일 수도 있고, 진행자가 참가자의 설정을 왜곡하거나 참가자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옆에서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족쇄를 끊는다고요? 난이도는 초특급. 저런,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앞에서 여동생이 칼에 찔립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흔히 제시되는 해결책은 배려와 의사소통입니다만, 배려와 의사소통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배려와 의사소통이 각각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첫째, 배려가 침묵이 될 때. 기분이 나쁜데도 분위기를 깨지 말자고 생각하고 혼자 참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냥 넘기면 대수롭지 않은 일도 많지만, 실제로 감정이 상하고 플레이에 문제가 있는데도 그냥 참고 있다 보면 감정은 점점 쌓이고 플레이는 그만큼 망가집니다.
게다가 무조건 침묵하는 배려는 타인에 대한 배려일 지는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재한 반쪽 배려입니다. 분명히 자기 자신도 플레이에 참여하는 사람인데, 참여자 어느 한 사람이 무시당하는 것은 전원이 배려받는 건강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 무시가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도요.
두 번째 문제는 의사소통이 말다툼이 될 때입니다. 용기를 내서, 혹은 도저히 못 참고 말을 꺼냈는데, 그 결과 감정싸움과 언쟁이 일어나고 플레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까지 손상이 오는 것 역시 건전한 의사소통은 아니겠지요. 왜 이런 인물을 만들었느냐, 왜 그런 진행을 하느냐, 참을 만큼 참았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맨날 그러느냐.
역으로는 다들 역시 너무 조심하고 ‘배려’하느라 정작 중요한 얘기는 피하고, 아무 실질적인 해결도 변화도 없는 대화를 하는 것도 의사소통이 왜곡된 형태입니다. 아 예,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예 그건 몰랐네요. 앞으로 고치도록 하죠. 오늘 얘기해서 참 다행입니다. 등등 얘기하고 나서 다음번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벌어진다면 그것도 아주 김빠지는 일이지요.
언쟁이든 예의바르고 공허한 대화이든 가장 큰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소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할 얘기를 하고, 상대의 얘기에는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기 쉽지요. 그나마 예의바르고 알맹이 없는 대화는 예의 면에서는 진일보한 것입니다만, 역시 쌍방향 소통과 이해가 없이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쓰려는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시리즈에서는 RPG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플레이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물론이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대해 토의할 때에, 앞으로 플레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때에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도 그렇고요.
글에 나오는 내용은 여러분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이라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생각해보면 더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효과가 없는지 생각할 수 있겠지요. 또한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기에도 글이 있는 편이 좋을 테고요. 그래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시간나는 대로 써내려가보려고 합니다.
(이번 글 시리즈는 이전에 쓰려고 했던 놀이와 대화 시리즈를 대체하며, 역시 내용은 Difficult Conversations에서 따온 것에 제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책의 구성을 따라가기는 영 안 맞아서 그냥 제가 원하는 구성으로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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