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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지난번 글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 수집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이 다음과 같이 많이 때문이지요.
1. 타인의 관점과 정보를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현실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지요. 누구든지 감각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걸러내고 해석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얘기입니다. 그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실을, 즉 감각정보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감각정보의 홍수에 묻혀서 살 뿐 사람으로서, 아니 동물로서도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 때문에 입장에 따라 같은 현실에 대한 결론도 크게 다르다는 것도 역시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같은 경기를 보면서 A팀 팬에게는 심판 오심인 것이 B팀 팬이 보기에는 심판의 명판정이고 B팀의 나이스 플레이입니다. A팀 팬도, B팀 팬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둘다 옳을 수 있습니다. A팀 팬과 B팀 팬은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관점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확대하고, 맞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지극히 당연한 걸러내기와 해석 과정을 거쳤을 테니까요. 그들이 각각 선택한 정보 내에서는 아마 그들의 해석은 각자 옳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A팀과 B팀 팬이 서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면 당연히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A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선을 넘지도 않았었는데! 그 심판은 경기 내내 A팀에 불리하게 판정했어!) 내에서 B팀 팬의 결론을 도출한다면 어불성설일 테고, 마찬가지로 B팀 팬이 걸러내서 해석한 정보 (휘두른 순간 공이 확 휘어져서 헛스윙했지! 그날 내내 A팀 경기는 엉망이었어!) 내에서 A팀 팬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요.
스포츠 팬끼리 적당히 싸우는 건 스포츠의 재미 중 하나기도 합니다만, 인간관계를 해칠 수도 있는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럴 때에는 상대가 왜 나하고는 의견이 다른지, 즉 같은 상황에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했기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들어보기 전에는 의견 차이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상대는 다른 정보를 가지고 다른 해석을 해서 당연히 결론이 다른 것인데, 그 생각을 (원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뿐만 아니라 입장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자체도 다릅니다. 플레이에 매번 늦는 참가자는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갔다가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동생과 싸워서 컴퓨터를 쟁취해낸 후에야 플레이를 위해 접속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정보는 공유하기 전에는 그 참가자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같은 현실을 어떻게 걸러내고 해석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아는지는 제대로 대화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필요한 정보입니다. 이 점을 모르면 자신이 취사선택한 정보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만 고려하는 반쪽 대화가 될 테니까요. 결국 공감대 없이 서로 목소리만 높일 뿐, 진정 주고받는 소통은 없기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관점과 정보를 알아내고 자신의 관점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2. 타인의 의도를 모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의도를 타인이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합니다. 예를 들어 참가자가 플레이에 늦어서 플레이에 곤란이 생겼다면 참가자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고 했다, 혹은 곤란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진행자가 일방통행식 진행을 해서 재미없어졌다면 진행자는 내 재미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도가 나쁜 사람은 곧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런 상종 못할 게으르고 무배려한 인간, 저런 천하의 독재자 하는 식으로 우리의 삶에는 악역이 꽤 많지요. 타인을 나쁜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내기는 어려워지고, 감정이 쌓이거나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타인의 의도를 모릅니다. 행동의 결과에 따라 추정할 뿐이지요. 자꾸 늦는 참가자는 자기 때문에 시간을 바꾸자고 하기가 미안해서 시간을 맞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일방통행식 진행자는 참가자의 적극성이 부족해서 자꾸 진행이 표류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이끄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행동의 의도와 결과는 서로 별개의 개념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행동의 결과가 의도와 어긋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로부터 추정한 의도는 그저 추정일 뿐,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추정한 의도로 타인을 마음 속에서 악역으로 만들고 왜 당신은 무배려하고 무책임하느냐, 왜 마음대로 하려고만 하느냐 하고 윽박지르는 것도 비생산적이지요.
따라서 타인의 의도를 지레짐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추정은 그저 추리, 혹은 가설로 남겨놓고 타인의 진짜 의도를 알아내는 편이 더 정확하고, 감정적 소모가 적습니다. A님이 의도적으로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러이러한 점이 힘든데, 이유를 알 수 있겠는지, 혹은 B님의 진행 속에서 참가자는 할일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방향을 생각하고 계신지 하는 식의 대화는 한결 얘기할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3. 타인에 대한 내 행동의 결과를 모른다
타인의 행동의 결과에서 타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의도에 맞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플레이를 곤란하게 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곤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독재자가 될 의도가 없으니까 실제로 참가자들은 내 진행을 독재로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면 그것은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플레이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는지, 내가 독재적 진행을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참가자가 할일이 없다고 그러는지 말이죠. 결국 자신의 좋은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며 역시 머릿속의 악역을 늘리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의도와 행동은 별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행동의 결과가 반드시 좋지는 않으며,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의도란 복잡해서 자신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좋은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비생산적인 옳고 그름에 대한 다툼에 빠지기 쉽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의도보다는 행동의 결과이며, 대화의 목적은 의도가 좋았네 나빴네 다투는 것보다는 행동의 실제적 결과에서 생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참가자가 남을 배려하려고 시간을 바꾸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고 시간을 맞추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자꾸 늦는다면 플레이가 곤란해지며, 진행자가 진행이 표류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참가자가 낄 데가 없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타인의 의도를 혼자 억측하지 않고, 또 자신의 의도에서 결과를 유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도는 논의할 만하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보다는 결과입니다. 감정이 쌓이지 않게 생산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의도에 대한 토론은 분명 가치가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결국 의도와 결과는 별개이니까요.
4. 자신이 한 원인 제공을 모른다
위 1번에서 다루었듯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관점과 결론이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타인의 원인 제공을 크게 보고 자신의 원인 제공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잘못했다, 내가 잘했다 하는 시비가 흔히 붙는데, 이것이 무익하다는 것은 이미 이전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문제를 정말 해결하려고 한다면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논의는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입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과는 다른 개념으로, 상황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정죄 없이 따져보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번 늦는 참가자가 현실적인 시간으로 플레이 약속을 잡지 않은 점, 진행자가 참가자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진행하는 점은 그들이 상황에 한 기여이지만, 다른 참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상황에 기여했을 수 있습니다. 플레이 시간을 다시 잡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거나, 진행자에게 충분히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이 그 예이지요.
원인 제공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둘다 잘못했다는 식의 얘기와는 다릅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의 얘기이니까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제에 기여는 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또한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 잘못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대화의 중점을 잘잘못에 둘 것인가, 문제 해결에 둘 것인가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다면 정죄보다는 원인 제공 논의가 낫다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목표라면 잘잘못과 별개로 기여도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거의 어떤 상황에서든 양측 모두, 비록 한쪽이 99%이고 다른쪽이 1%라도 기여도가 있게 마련이기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 잘못이라는 결론이 나면 다른 쪽의 원인 제공은 묻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행자가 자신의 일방통행식 진행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고 행동을 고친다 하더라도, 참여를 잘 하지 않는 참가자의 원인 제공에 대응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를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원인 제공, 혹은 기여도를 파악해야 하는데, 타인의 원인 제공은 비교적 알기 쉽지만 자신의 원인 제공은 상대적으로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모두 알아야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논한 바와 같죠. 그래서 자신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아내고 타인이 어떻게 기여했는지 (정죄 없이) 알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석입니다.
5.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라
오랜 옛날에 어느 위대한 성현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탐구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크고작은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면 대화를 통해서 알아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추정과 억측을 기반으로 하여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 1~4번에서 다루었듯 타인의 개입이 있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정보의 반쪽밖에 모릅니다. 그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한 혼자 추정할 뿐이지요. 모르는 상태에서 내리는 진단과 해결은 불완전하고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쉽습니다. 결국 혼자 납득할 뿐 상대의 협력을 끌어내기는 어렵지요. 그리고 그 추정이 실제와 맞아떨어졌다 하더라도 먼저 대화로 풀어내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없이는 옳은 말도 상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확실성의 관점으로 대화에 접근하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우며, 호기심의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모르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대화를 하면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의 공감과 협력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 수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첩보전을 벌이거나 독심술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상대의 관점과 의도, 자기 행동의 결과와 자신의 기여도를 알아내는 방법은 대화이며, 그 중에서도 발언보다는 경청이겠지요.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경청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2: 옳고 그름은 무의미하다

대화를 할 때면 대화의 목적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평소에 편하게 하는 대화야 그냥 재미로 하지만,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지는 곤란한 상황이거나 대화를 통해 뭔가를 결정하는 뚜렷한 기능이 있을 때에는 그 대화에 임하는 자신의 목표의식에 따라 대화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때 대화의 목적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면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즉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납득시키는 것이 대화의 진짜 목적이라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거나 매우 비효율적인 목표이므로 침묵만 못합니다. 기껏 대화를 시작했다가 대판 싸움이 나고 후회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이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상대적입니다. 이것은 언쟁을 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지요. 보통 어느쪽도 자신이 옳았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대개의 사람에게 그것은  ‘내가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는 옳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이기에 상대의 마음 속에서는 그가 옳고 내가 틀렸지요.
그래서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대화는 스스로 옳다는 자신의 확신을 강화할 뿐, 상대를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설사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상하기 쉬우며, 관계를 손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 토론에 결론이 안 나는 이유이며, 우리말에서 ‘시비’라는 말의 어감이 부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옳고 그른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시비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자아 정체감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더더욱 지기 어려운 문제이고, 결론을 내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서 내가 그르면 나는 바보이거나 나쁜 사람이 된다면, 누구든지 절대로 그르다는 인정을 하지 않겠지요. 혹은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균형을 잃고 감정이 상할 것입니다. 내가 똑똑하거나 좋은 사람이라는 증명을 하려고 타인에게 그런 굴욕을 안겨주는 것도 다르게 보면 참 못할 짓입니다. (정체감에 대해서는 나중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대화는 결론을 내기도 어렵고, 낸다 하더라도 대가가 큰 비효율적인 활동입니다.
이렇듯 효용이 적은 시시비비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라면 한결 현실성이 있습니다만, 이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상대를 설복시키는 것’이나 ‘내 해결책대로 상대가 따라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라면 역시 위의 결론이 안 나고 소모적인 시시비비로 돌아갑니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정보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해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특히 감정이 얽힌 문제일 수록 사람은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참가자가 플레이에 매번 늦는다면 그 참가자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일찍 와야 하며, 진행자가 일방통행식으로 진행한다면 그 진행자는 독재자이고 참가자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식으로 우리는 이미 문제와 해결책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대화에 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진단과 해결의 옳고 그름을 두고 역시 소모적인 대화를 하기 쉽지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요? 실은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모르는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자신의 관점은 알지만 타인의 관점은 모르고, 자신의 의도는 알지만 타인의 의도는 모르고, 타인이 한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한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모르며, 타인이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알지만 자신이 한 기여는 잘 모릅니다.
이렇듯 모르는 것이 많다면, 먼저 모르는 정보를 알아야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알아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대화이지요. 따라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처음에는 그 목적은 정보를 알아내고, 상대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글에는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르는 것들을 다루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의 초기 목적은 정보의 획득과 공유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1: 문제의 제기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다 그렇듯 RPG도 하다 보면 크고작은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참가자가 원하는 인물 설정이 마음에 안 드는데 차마 뭐라고 하기는 그래서 그대로 진행하는 일도 있고, 반대로 뭐라고 했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지요. 진행자의 일방통행식 진행이 불만일 수도 있고, 진행자가 참가자의 설정을 왜곡하거나 참가자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옆에서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족쇄를 끊는다고요? 난이도는 초특급. 저런,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앞에서 여동생이 칼에 찔립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흔히 제시되는 해결책은 배려와 의사소통입니다만, 배려와 의사소통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배려와 의사소통이 각각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되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첫째, 배려가 침묵이 될 때. 기분이 나쁜데도 분위기를 깨지 말자고 생각하고 혼자 참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냥 넘기면 대수롭지 않은 일도 많지만, 실제로 감정이 상하고 플레이에 문제가 있는데도 그냥 참고 있다 보면 감정은 점점 쌓이고 플레이는 그만큼 망가집니다.
게다가 무조건 침묵하는 배려는 타인에 대한 배려일 지는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부재한 반쪽 배려입니다. 분명히 자기 자신도 플레이에 참여하는 사람인데, 참여자 어느 한 사람이 무시당하는 것은 전원이 배려받는 건강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 무시가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도요.
두 번째 문제는 의사소통이 말다툼이 될 때입니다. 용기를 내서, 혹은 도저히 못 참고 말을 꺼냈는데, 그 결과 감정싸움과 언쟁이 일어나고 플레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까지 손상이 오는 것 역시 건전한 의사소통은 아니겠지요. 왜 이런 인물을 만들었느냐, 왜 그런 진행을 하느냐, 참을 만큼 참았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맨날 그러느냐.
역으로는 다들 역시 너무 조심하고 ‘배려’하느라 정작 중요한 얘기는 피하고, 아무 실질적인 해결도 변화도 없는 대화를 하는 것도 의사소통이 왜곡된 형태입니다. 아 예,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예 그건 몰랐네요. 앞으로 고치도록 하죠. 오늘 얘기해서 참 다행입니다. 등등 얘기하고 나서 다음번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벌어진다면 그것도 아주 김빠지는 일이지요.
언쟁이든 예의바르고 공허한 대화이든 가장 큰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소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할 얘기를 하고, 상대의 얘기에는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기 쉽지요. 그나마 예의바르고 알맹이 없는 대화는 예의 면에서는 진일보한 것입니다만, 역시 쌍방향 소통과 이해가 없이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쓰려는 ‘경청하고 대화하는 RPG’ 시리즈에서는 RPG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플레이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물론이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대해 토의할 때에, 앞으로 플레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때에 등등 다양한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도 그렇고요.
글에 나오는 내용은 여러분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이라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생각해보면 더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무엇이 효과가 있고 무엇이 효과가 없는지 생각할 수 있겠지요. 또한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기에도 글이 있는 편이 좋을 테고요. 그래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시간나는 대로 써내려가보려고 합니다.
(이번 글 시리즈는 이전에 쓰려고 했던 놀이와 대화 시리즈를 대체하며, 역시 내용은 Difficult Conversations에서 따온 것에 제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책의 구성을 따라가기는 영 안 맞아서 그냥 제가 원하는 구성으로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