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와 최적 경험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산다는 게 쉽지 않지요. 갑작스레 무거운 얘기일 지도 모르습니다만, 살아간다는 것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우연한 재해나 사고로 일시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해 인간관계는 갈등의 연속이며, 먹고사는 일은 언제나 전쟁이지요. 인간의 욕망이나 꿈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심한 우주에 살아간다는 것은 혼란과 고통에 쉴새없이 마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인간은 자기 나름의 질서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비대한 뇌와 발달한 전두엽의 강점이지요. 똑같이 사고나 병으로 장애가 생긴 상황에서도 ‘난 틀렸어’ 하고 포기해버릴 수도 있고, ‘지금부터 시작이다!’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가 생긴 사실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에 부여하는 내적 질서와 의미가 다른 것이지요.

사람이 내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장치 중 하나가 최적 경험 (peak experience)입니다. 의식을 흐리게 하는 약물이나 단순한 유희와 같은 일회적인 쾌락을 통해 고통과 불안을 피하는 시도도 흔하지만, 이러한 것은 보통 심리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사람의 정신에 질서를 잡아주거나 의식을 확장시키지 않습니다. 반면 일체감과 조화감, 무아지경의 환희 등의 특징이 있는 최적 경험은 창의성과 공감, 자긍심, 의지력, 그리고 장기적 행복감을 증진하는 등 내적 질서를 정립하는 효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최적 경험 개념을 상당 부분 정립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 (Abraham Maslow, 1908-1970)는 지속적인 최적 경험은 자아실현의 척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마슬로우에게 최적 경험이 그야말로 최고봉 (peak)에서 겪는 것, 초월과 하나가 되는 대면상황이라면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교 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ly Csikszentmihalyi)는 최적 경험을 땅으로 끌어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적 경험의 중요한 특징인 일체감과 행복감, 그리고 그 결과인 성격과 능력의 긍정적 변화를 종교와 신비주의의 영역에 남겨두지 않고 일상생활로 끌어낸 것이지요. 생업과 놀이의 자연스러운 리듬 속에서 행복과 몰입을 느끼고 자아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주:제가 심리학도가 아니고 이 주제에 대해 철저한 문헌조사를 한 것이 아니므로 마슬로우와 칙센트미하이가 정립한 개념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적 주시거나 이후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일상 속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최적 경험을 플로우 (Flow)라고 부릅니다. 그는 동명의 책을 통해, 도전이 되는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서 자의식과 불안을 잊고 순수한 즐거움에 빠져드는 플로우는 심리적 에너지를 분산하지 않고
집중해 자아를 키우고 내적 질서를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은 예능, 학습, 노동, 감상,
가사, 놀이 등 어떤 활동에서든 느낄 수 있으며, 개인의 자긍심과 행복감을 크게 증진시켜 풍요로운 삶에 기여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책에서는 삶의 다양한 양상에서 플로우를 얻을 수 있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는 제목으로 한울림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활동이 플로우를 일으킬까요? 플로우에는 크게 네 가지의 공통 요소가 보입니다.(주:책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었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어 네 가지로 줄이고 약간 재배열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할 가능성이 있는 도전 활동일 때 플로우가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행위자의 능력을 너무 초과하는 도전에는 불안감을 느끼거나 포기하기 쉽고, 반면 너무 쉬워서 도전의식을 느낄 수 없으면 자극이 부족해서 완전히 집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플로우 경험에 중요한 성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활동을 발전적으로 지속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발전한 상태에서도 몰입을 지속하려면 도전의 수위를 높여가야 하지요. 그 결과 계속 발전해가고 새로운 도전에 마주하는 자신을 느끼게 되고, 자긍심과 자신감이 향상합니다.

둘째, 플로우를 일으키는 활동에는 보통 명확한 목표가 있습니다. 게임이나 스포츠에는 목표가 자명하지만 (공주를 구출해라, 상대의 골에 공을 넣어라), 예술이나 창작활동에는 그 목표의 범위가 일반적으로 개방적입니다. 후자와 같은 상황에는 목표가 무엇인지, 즉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가 어떤 모습인지 안목과 감을 기르는 것 자체가 플로우 달성에 중요합니다.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정답이 없는 이와 같을 활동은 더욱 복합적인 특징을 띱니다.

셋째, 그 목표의 달성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즉각적인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지 나쁜지 평가할 기준이 있다면 그만큼 몸짓, 붓질,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빠져들게 됩니다. 후회되는 과거와 불안한 미래, 일상의 자잘한 걱정에서 벗어나 현재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만큼 이 활동과 그 결과를 통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신감이 들고, 세계와 타인의 변덕에 흔들리는 불안한 객체가 아닌, 운명을 자기 손에 쥔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됩니다.

넷째, 그 활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을 의식하지 않고 몰입해 자의식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플로우의 중요한 특징인 일체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러한 집중은 다른 세 가지 요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활동 자체에 대한 호오(好惡)나 주변 환경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집중할 수 있고 그러고 싶은 활동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플로우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지요.

이렇게 최적 경험, 혹은 플로우가 무엇인지 정립하고 나면 RPG에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RPG 자체가 워낙 복합적인 활동이라 RPG를 하는 능력이란 무엇인지, RPG를 할 때의 도전이란 어떤 성격인지, 또 어쩌면 가장 애매하게도 목표와 피드백이 어떤 것인지 모두 복잡한 문제입니다. 집중하는 것은 사안 자체는 간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행은 말처럼 쉽지 않고요.

앞으로 올리는 글에서는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RPG가 복합적인 활동인 만큼 RPG인의 능력도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RPG가 ‘규칙’을 매개로 ‘서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놀이라고 정의한다면, RPG라는 활동을 하는 능력은 크게 게임적, 창의적, 사회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능력과 향상 방법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RPG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실질적인 주체인 팀의 능력도 다루어 보겠습니다.

다음은 능력에 맞는 도전의 문제입니다. RPG인의 능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 도전 역시 그렇게 나누어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게임적이고 서사적인 측면에서 도전의 수위를 측정하고 높여가는 방법, 그리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가고 더욱 깊은 지적, 창의적,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표 설정은 RPG에는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팀 단위, 개인 단위, 그리고 등장인물의 목표가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게임적 목표, 서사적 목표, 그리고 개개인의 사회적 목표가 다르고 서로 긴장 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목표인지 일률적으로 말할 수도 없기에 더욱 복잡한 것이 RPG의 목표 설정이지요.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이렇듯 목표가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종종 긴장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RPG는 그만큼 복합적이고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합니다. 팀원간의 목표가 다르고, 또 등장인물 간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창의적인 긴장과 극중 재미의 원천인 갈등을 유발하니까요. 다만, 이 긴장이 지지부진한 분열이 되지 않으려면 팀 단위에서는 어느 정도 기본 목표에 대한 의사합치와 공통 가치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팀 단위에서의 목표 설정과 그 범위를 먼저 생각해보고 팀원과 등장인물의 목표, 그리고 그 목표에 부합하는지 여부로 개별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피드백을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중과 몰입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RPG를 하는 시간에 집중을 하는 조건과 마음가짐, 그리고 환경 등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즐겁게 RPG를 즐기면서 RPG인으로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며 글을 맺을 계획입니다.

이렇게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시작합니다. 제게는 RPG뿐 아니라 놀고 창의하고 어우러져 산다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보는 마음속 여행이 될 것 같군요. 이 여행에 많은 질책과 지적, 격려를 주시며 함께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래는 글에 대한 대략의 계획입니다. 광열군의 ‘RPG에 좋은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 시리즈를 보고 글에는 역시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는 걸 느껴서 말이죠. 물론 이미 이 첫 글을 쓰면서도 달라진 만큼, 쓰면서 목차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RPG와 최적 경험 시리즈>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최적 경험과 플로우
(2) 플로우의 조건
(3) RPG와 플로우
2. RPG인의 능력
(1) 게임적 능력
(2) 서사적 능력
(3) 사회적 능력
(4) 팀의 능력
3. 도전을 수준에 맞추어가기
(1) 게임적 도전
(2) 서사적 도전
(3) 사회적 도전
4. RPG의 목적성과 피드백
(1) 팀 단위에서의 목적 설정
(2) 팀원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3) 등장인물 간 목적의 일치와 긴장
(4) 피드백으로 목적 합치성 평가하기
5. 집중과 몰입
(1) 집중을 위한 조건
(2) 집중을 위한 마음가짐
(3) 집중을 위한 환경
(4) 결어

12 thoughts on “RPG와 최적 경험 1. 최적 경험을 위하여

  1. 케찰코아틀

    재미있는 기획이 될 것 같네요.
    목차를 보면서 느낀 건데, 확실히 저의 RPG 게임은 D&D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도전과 극복에 좀 치중된 느낌이 큰 것 같습니다. 그것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구요.
    특히 등장인물 간의 갈등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네요.(NPC,PC를 불문하고…)

    다양한 룰을 접하면서 안목을 높여야 할텐데 딱히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문제 같습니다.
    의무적으로 RPG를 즐길 순 없으니까요. 게임을 즐기다보면 언젠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생길 것이고 그 때에는 세계를 넓힐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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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전투 속의 도전과 극복에 중점을 두는 것이 모두에게 재미있다면 그게 정답 아닐까요? 갈등이나 이야기 목표 같은 서사적 고려를 통해 전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아니라면 안 해도 무관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서사적 개연성과 갈등 요소가 들어가면 같은 전투도 더 재밌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건 다분히 제 취향이 들어간 판단이지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은 그 속에서 더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고 새로운 자극을 받는 의미가 있지만, 좀 지루하거나 신선한 자극의 필요성을 느낄 때 하는 거지 말씀대로 의무일 수는 없죠. 충분히 만족하고 그 속에서 말씀하신 도전과 극복을 통해서 계속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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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실버

    우와..제가 꼭 봐야 할 것 같은 시리즈들이네요.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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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삭풍

    손대시는 분야가 늘어가는걸 보니
    로키님이 피곤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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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Asdee

    오오. 뭔가 장대한 시리즈가 될 것 같군요! +_+)b

    @ 저는 얼른 RPG에 좋은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나 마무리지어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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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키

      너무 장대한 게 문제? ㅎㅎ 자네나 나나 일을 크게 벌린 게 탈이로구먼. 그래도 광열군은 거의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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