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 개념은 진행자/참가자의 역할 구분, 주사위, 규칙책과 함께 RPG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 속합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저는 일행 단위의 진행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1 플레이의 허와 실에서 다루었듯 일행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 분업이라든지, 여러 사람의 이야기와 인간관계, 발상이 엮여서 나오는 상승 효과라든지요. 또 현실적으로 참가자가 한 명을 넘어갈 때부터는 일행이 가장 편리한 단위이기도 합니다.
반면 RPG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다양해지면서 일행 개념에 무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주인공들이 함께 몰려다니며 전투하는 미궁 탐사형 모험이라든지,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해서 임무를 함께 하는 임무형 모험 등에는 일행 개념이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하지만 주인공들 사이에 그런 접점이 없이 각자의 삶이 있을 때 일행을 유지하기란 항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각자의 목적이 일치할 때는 함께 행동하기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각 주인공의 동기와 이해에 따라 일행이 흩어지기 쉬운 것이지요.
일행이 깨졌을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 등장하지 않고 있는 주인공을 조종하는 참가자는 할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특정 장면에서 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될지는 몰라도 더 중요한 것은 참가자가 심심하다는 사실이겠죠. RPG는 뭔가를 하는 놀이이지 구경하는 놀이는 아니니까요. 이 ‘구경’ 부분이 너무 많아질 수 있다는 점이 일행이 갈라졌을 때의 문제점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일행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어떻게 하면 일행을 유지시키느냐, 두번째는 혹시 일행이 갈라지더라도 어떻게 하면 참가자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각 논점은 다시 규칙 내적인 해결 방법과 규칙 외적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일행 유지시키기
1.1. 규칙으로 일행 유지시키기
규칙 내적으로 일행을 무조건 유지시키는 규칙책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얼음깨기 같은 경우 데이트를 다루는 규칙이므로 두 주인공이 함께 있지 않으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지만, 2인용이므로 일행 유지가 문제되는 인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행을 유지시키는 규칙상의 수단이라면 강제하기보다도 유도하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궁 탐사라고 봅니다. 일행 전체의 분업을 통해서 보물을 획득하고 괴물을 잡는다든지요. 물론 시나리오의 구성에 따라서도 분업은 확보할 수 있는 등, 전반적으로 규칙 자체가 일행을 유지시키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1.2. 규칙 외의 수단으로 일행 유지시키기
규칙 외적 수단을 통한 일행 유지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는 설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에 아사히라님의 아루스 캠페인처럼 모두 같은 수사대 소속이라서 함께 임무를 해결한다든가, 제노시아님의 언더월드 캠페인 외전 중 제가 진행하는 ‘브루하 폭주전대’처럼 같은 특수부대 소속이라든가. 이 경우 주인공끼리 어느정도 갈등이 생겨도 왠만하면 일행이 유지된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아루스 캠페인 당시의 이단심문관 아론과 사제 레테, 아니면 폭주전대의 단순과격한 요한과 왕자병 환자 프란츠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라도 일행이 바로 깨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행을 유지하면서도 주인공간의 관계를 심도있게 탐색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의 소재는 다소 한정되겠지요.
의무적으로 함께 일행으로 묶인 경우가 아니라도 각자의 이해관계나 목적이 일치해서, 혹은 휘말려서 함께 행동하게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예전에 진행했던 라이테이아 캠페인이나 현재 참가하고 있는 제노님의 언더월드 3기가 그 예입니다. 각자 다른 생활이 있는 사람들이 공동의 적 때문에, 혹은 우연같은 농간같은(…) 상황 때문에 일행을 이루는 경우이지요. 이러한 방법을 쓸 때면 임무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간의 감정적 갈등의 범위는 제한되는 느낌입니다. 어쨌든 싫어지면 (생존 같은 중대한 이유가 걸려있지 않은 이상) 헤어지면 그만이니까요.
또한 각자의 삶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일행을 유지하는데 때로 논리적인 무리가 가기도 합니다. 라이테이아 때는 예언까지 동원해 가면서 좀 억지로 일행을 만든 감이 있고, 나중에는 그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엄청난 우연을 동원시키기도 했죠. (참가자들이 저 진행자 미쳤나 하고 쳐다보면 당당히 예언을 가리키는 것입..) 이 접근의 장점이라면 다양한 설정과 성격의 사람들이 서로 엮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대개의 플레이에는 왠만하면 일행을 유지하자는 게임 외적인 합의가 깔려있습니다. 어쨌든 일행 개념을 전제로 한 캠페인에서 자꾸 주인공들이 따로 논다면 파토는 이미 성큼 다가와 있다고 봐도..(…) 결국 이 부분은상호존중과 상호합의라는 일반론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2. 일행 없는 진행
일행 단위로 진행하는 모험에서도 일행이 어쩔 수 없이 갈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또 처음부터 일행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이야기도 있을 법 합니다. 역시 규칙 내외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1. 일행 없이 진행하는 규칙
제가 접한 RPG 중에서 일행 개념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주인님과 함께’가 처음입니다. 이 경우 주인공들은 돌아가면서 하나씩 장면을 진행합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서 조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며, 기본적으로 진행 방식은 순차적입니다. 개개인의 인간성과 자기혐오 사이의 갈등이 중점인만큼 일행 단위 진행이 필요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위에서 말한 참가자가 구경꾼이 되는 현상은 해결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주인님과 함께의 전신격인 니코틴 걸즈도 일행 개념은 없지만, 대신 같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통해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와 성공률에 어느정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반드시 모든 주인공을 참가시키는 것도 아니고 또 주변 인물과 피울 수도 있기 때문에 참가자의 참여가 규칙 자체적으로 확보되지는 않습니다.
트롤베이브 같은 경우 지도 중심 모험으로, 지도의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지정하면서 모험을 시작합니다. (바빌론 베이브 캠페인 같은 경우 기원전 4세기경 중동 지도[503KB 그림 파일 직링크]를 사용하고 있지요.) 그리고 주인공들이 지도상에서 서로 다른 지점을 선택했을 경우 때로는 전혀 만나지 않은채 각각의 이야기로 진행할 수도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행동이 서로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라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발상이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실행할지에 대해서는 지침이 없고, 참가자들이 다른 주인공들의 얘기에 제안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고 해도 자기 주인공이 나오지 않고 있을 때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폴라리스 같은 규칙이 일행 없는 플레이를 진행하는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 참가자의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머지 참가자들은 진행자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눠가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주인공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모든 참가자는 규칙 자체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가지게 됩니다. 진행자는 보통 참가자보다 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 진행자 역할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은 오히려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이는 한번에 한 주인공의 감정적, 극적 변화에 집중하면서도 다른 참가자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좋은 해결책으로 보이긴 합니다. 다만 얼음깨기와 비슷하게 인원 제한이 있고 (3명이나 5명으로도 돌릴 수 있긴 하지만 4인이 이상적), 죽음과 타락이라는 매우 개인적이고 우울한 소재를 벗어나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의문입니다. 또한 캠페인 전체에 거치는 계획이나 구성을 짜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르스 마기카 같은 경우 트루프 플레이라는 기법을 통해 일행이 갈라지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정확히는 일행이 깨지는 대신구성이 변하는 것이지요. 이 규칙에서는 마법사가 가장 강하고 비중도 높습니다. 반면 마법사만 나온다면 단조로워지기 쉽죠. 따라서모든 참가자가 각각 셋 이상의 등장 인물 (마법사, 전문가,일꾼 3종)을 제작하고 상황에 따라 바꿔가면서 연기합니다. 예를 들어마법사의 집회 때는 참가자 전원이 자기 마법사를 연기하면 되지만, 한명의 마법사만 여행을 떠난다면? 이때는 다른 참가자들의전문가와 일꾼이 따라가면 됩니다.
이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일행이 갈라졌을 때의 지루함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봅니다. 반면 참가자가 한명의 주인공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인물을 바꿔가며 연기하는 것은 그다지 즐겁지 않을 수도 있으며, 바꿔치기하다 보면 진행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2.2. 일행이 갈라졌을 때의 규칙 외적 해결 방법
이제 일행이 갈라져도 (혹은 처음부터 없어도) 지루하지 않을만한 방법 중 규칙과 상관없이 사용할만한 것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아르스 마기카 (Ars Magica)식으로 한명의 참가자가 여러 명의 주인공을 제작하는 것은 규칙이라기보다는 기법이므로 아르스 마기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이는 인물의 힘이나 비중 등의 ‘급’이 다른 인물들을 모두 플레이할 수 있는 접근법이기도 합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지금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참가자에게 주변 인물(NPC)을 주어서 연기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실제로 위에서 얘기한 아르스 마기카 트루프 플레이의 경우 가장 약하고 비중도 적은 일꾼은 진행자도 주변인물로 돌릴 수 있고 다른 참가자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경계가 흐릿한 유형입니다.
물론 참가자의 주변인물 연기는 인물의 성격이 갑자기 변한다든지 정보의 차이가 많이 난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시나리오에 기반한 진행일 경우에는 시나리오의 내용이나 주변 인물의 뒷이야기를 어느정도 참가자에게 알려줘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일행은 비록 RPG의 전통적인 요소이지만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며, 일행이 있더라도 다루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어째 상당히 길어지긴 했지만..) RPG의 소재가 다양해진만큼 일행 개념도 좀더 다양하게 변해가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