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놀이 속의 가족, 혹은 그 부재에 대하여

많은 역할놀이에서 빠진 것 중 한가지를 들라면 바로 ‘가족’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경우 주인공들에게는 부모형제와 친척이 없거나 그 설정이 애매하며, 그들과의 관계가 놀이 속에 소재로 등장하는 일도 거의 없죠. 배우자나 자녀가 있는 경우는 더더욱 드뭅니다. 가족이 있고 설정이 자세한 경우는 많은 경우 어째서 그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는지, 혹은 왜 가족과 반목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설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가족의 부재 경향을 꽤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친족에 대한 감정은 종종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입체적이기 때문에 역할놀이에 좋은 감정적, 극적 기회를 제공하니까요. 으르렁거리며 싸우다가도 어려울 때면 달려오기도 하고, 열심히 서로 돕다가도 돌아서면 경쟁하기도 하는 등 복합적인 것이 가족관계입니다. 지겹고 지긋지긋해도 쉽게 놓을 수 없는 끈이기도 하지요. 한마디로 ‘인간의 굴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달까요. 사랑과 미움이, 원망과 미안함이 서로 상극만이 아닌 것이 친족관계입니다.

또한 한 인물의 성장배경을 보는 것은 그 인물을 완성하고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거북이나 뱀도 아니고, 인간의 갓난아이는 절대로 혼자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은 그의 신체와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은 절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의 존재가 사회와 만나는 지점에는 언제나 그를 키워준 가족, 혹은 다른 양육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손에 자라난 ‘정글북’의 모글리에게도 그를 거두어준 늑대 가족과 곰, 흑표범과의 가족관계는 그의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또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가족은 종종 사회적 권력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이해공동체인 친족집단은 강력한 정치적 동맹이자 경제단위로서 기능해 왔지요. (메디치 가문의 거대한 자본력도, 그들이 배출한 교황과 왕비도 어디까지나 개인만의 능력이 아닌 ‘가문’의 전폭적인 협력과 지원이 뒷받침된 성과였죠.) 전통적인 사회일수록 이끌어주고 뒷받침해줄 가족과 친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사회적 성공률은 비교하기조차 힘듭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실질적으로 많은 이득이 있는 가족이 역할놀에서 실종된 이유는 무엇일가요? 제가 보기에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역할놀이 자체가 어느정도 현실도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구질구질하게 가족관계에 치이는데 가상세계에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역할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점. 예외가 많은 도식화이긴 하지만 대체로 여자의 환상이 가족적이라면 남자의 환상은 탈가족적입니다. 여성이 즐기는 허구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가족과 가족관계, 혹은 그 기반을 이루는 연애와 성이라면 남성이 즐기는 허구에서는 다 죽이든 대판 싸우든 다른 차원으로 가든 하여튼 어떻게든 가족에서 이탈해 자신의 능력을 보이는 게 중심이랄까요.

셋째, 나쁜 경험. 과거에 진행자가 참가자와 상의 없이 주인공 가족을 대학살했다거나 하는 나쁜 기억이 차후 캠페인에서 가족없는 고아를 양산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가상 인물의 가상의 가족이라고 해도 다 고문당하고 죽는다든지 하는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으니까요. (현실에서 아버지를 잃고 얼마 안돼 뱀파이어 LARP에서 사이어가 눈앞에서 살해당하자 크게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었죠.) 온갖 복잡한 감정이 얽힌 가족이라는 존재를 허구라고 해서 진행자들이 함부로 대하는 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족을 역할놀이 속에서 활용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첫째, 과연 가족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기. 캠페인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주인공에게 가족이 있는 것이 좋은지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하감옥에 쳐들어가 괴물을 쓸어버리고 보물을 약탈하는 것이 놀이의 주요 내용이라면 딱히 주인공의 가족 설정이 그다지 자세할 필요도, 가족과의 관계가 등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산을 차기하기 위한 싸움이 주요 내용이라면 가족관계는 꽤 중요해질 것입니다.

둘째, 명확한 선긋기. 진행자가 어디까지 주인공의 가족을 건드릴(?)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불가침인지 합의가 필요합니다. ‘위기에 빠지는 건 좋지만 생명의 위협은 안된다’라거나, ‘전혀 아무 위험도 닥치지 않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어떻게 돼도 괜찮지만 어머니는 안된다’ 등등 다양한 합의사항이 존재할 수 있겠지요. 일단 선이 명확하게 정해지면 참가자와 진행자 모두 편한 마음으로 가족을 극적 광맥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자유영역의 확보. 주인공에게 가족에게서 자유로운 삶의 영역을 확보해 두면 가족을 활용하되 얽매이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점이 많은 극적 장치라도 주인공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지긋지긋해질 테니까요. 예를 들어 10대 수퍼영웅 이야기라면 성적과 장래, 아버지와의 갈등 등은 물론 가족과 긴밀하게 연관되겠지만, 수퍼영웅으로서의 활동이나 연애는 가족과 상관없게 하자고 합의한다든지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이 자유영역은 넓게 잡을 수도, 좁게 잡을 수도 있겠죠.

넷째, 규칙의 활용. 겁스나 7번째 바다, 거의 모든 실험규칙 등 인맥과 배경에 규칙상 효과를 주는 경우 규칙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가족과 가족관계를 놀이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피난처나 숙박의 제공 등 위기시에도 이점이 되도록 하면 더욱 좋겠죠.

결론적으로, 주인공의 가족이란 보다 진정성 있는 인물연기와 세계설정을 위해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극적이고 사실적인 놀이에서는 더욱이요. 앞으로 좀더 많은 활약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 thoughts on “역할놀이 속의 가족, 혹은 그 부재에 대하여

  1. Sihaya

    가족은 별로 ‘쓸 데가 없다’ 라는 점도 중요한 거 같아요. 형제 자매 줄줄이 만들어놓아도 많은 경우에는 아예 등장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시나리오에 묻혀 사라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뭐 본인은 꽤나 적는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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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키

    기본적으로 모험물을 원형으로 삼고 있는 RPG에서 어쩌면 가족이 설 자리가 별로 없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서 가족의 자세한 설정이 정말 이 캠페인에서 필요한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하지만 결국 주인공의 배경 중 어떤 점을 살리고 어떤 점을 버릴지는 진행자와 참가자간의 활발한 의사소통이 요구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가족도 예외일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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