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의 구성요소와 RPG

판타지 작가이며 잡지 편집장이었던 고 마리온 지머 브래들리 (1930-1999)가 1996년 쓴 글, 단편이란 무엇인가? (영문)를 보고 RPG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고 느꼈습니다. 브래들리는 이 글에서 돈이 되는 대중 단편소설이란 일정한 공식이 있게 마련이며, 이 공식을 충실하게 지키면 누구든 글을 팔아서 많든 적든 돈을 벌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대개의 성공적인 장편소설 역시 비슷하지만 호흡이 더 길 뿐이라고 말이죠.

브래들리가 제시하는 단편소설의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감가는 주인공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의미있는 목표를 성취한다.

이쯤 되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고 느끼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재미있는 RPG의 요소에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공식에서 어긋나서 상업적 수준의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이유들도 RPG를 재미없게 만들 수 있는 병리현상들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RPG에 적용할 때는 모두 조금씩 변형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매우 유사합니다.

1. 주인공에게 공감이 안 간다.

반드시 주인공이 완벽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너무 완벽한 주인공에게는공감하기 힘드니까요. 공감가는 인물을 보면 능력은 뛰어나더라도 뭔가 빠지는 게 꼭 있죠.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모습의 주인공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모든 대중 매체의 공통점이라고 할만합니다.

RPG에서도 비슷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참가자가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따라서 소설보다 주인공에 대한 몰입도가 높기 때문에 자기 주인공에 대해서는 왠만하면 공감을 느낀다는 점이 다릅니다. 주인공에 대한 공감이 문제되는 건 오히려 진행자를 포함한 다른 참가자들입니다. 참가자 자신이야 자기 주인공이 좋아 죽겠다고 해도, 진행자와 참가자들에게 그 주인공이 너무 재수없다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행이 모은 보물을 훔치는 도둑이라든가, 다른 일행에게 삥뜯는 전사라든가, 자꾸 일행을 따돌리고 혼자 다니려는 기사라든가.) 진행자는 그 시나리오를 짤 때 그 주인공에게 신경을 안 써줄수도 있고, 참가자들은 자기 주인공들을 조종해서 그 주인공을 무시하거나 해코지할 수도 있죠. 협력적인 놀이인 RPG의 성격을 감안하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할 것은 이건 진행자와 참가자의 감정 문제이지 주인공들의 감정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등장 인물들끼리야 아무리 으르렁거려도 그게 실제 참가자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닌 이상 플레이는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른 등장인물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일행간의 갈등도 극적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에 대한 공감 부재를 해결하려면 결국 모든 참가자가 (진행자 포함) 허심탄회하게 인물 설정과 주인공 행동 등 플레이에 대한 사항을 논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문제는 취향으로 돌아가고, 어떤 문제는 일반적인 극적 재미의 원칙 (절대완벽한 인물은 심심하다거나), 또 어떤 문제는 참가자의 무배려 (다른 주인공 사기치기 등)에 해당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있을 때 서로 얘기하고 귀기울이지 않으면 플레이의 재미는 곤두박질칩니다. 플레이후 간담회 등 의사소통의 통로를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은 이유죠.

주인공에 대한 공감은 또한 주인공이 악당인 캠페인을 돌리는 어려움과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흔히 말하는 악 성향 캠페인의 문제죠. 이건 취향 차이도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가능한 이유도 전혀 없이 남을 해치는 게 목적인 악당은 주인공으로서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주인공에 대한 공감이라는 요소 때문이죠.

2.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없다.

저택으로 들어가서 지도를 훔쳐내야 하는데 앞문은 열려있고, 집안에는 사람 하나 없고, 지도는 책상 위에 보라는듯 펼쳐져 있어서 유유히 가지고 나오면 되는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리고  주인공들이 침입하는 모습을 몰래 녹화한 것도 아니고 지도가 가짜인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속임수도 없었다면? 좋은 시나리오라고 박수받기는 좀 힘들 것입니다. 뭔가 어려움이 있어야 성취 또한 값지기 때문이죠. 또한 어려움 없이는 주인공이 능력이나 기지를 발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극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장애물을 준다면 그것 또한 문제죠. 이것은 주인공들을 괴롭힌다는 핑계로 참가자를 괴롭히는 행동입니다. 진행자라면 누구든 주인공을 괴롭히되 참가자를 괴롭히지는 말라는 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극복이 불가능한 장애물을 던져준다면 그 장애물을 피해갈 방법 또한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가자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흥미를 잃을 테니까요.

극복이 불가능한데다가 피할 수조차 없는 장애물은 세번째 병리현상에도 연결됩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일행 몰살이나 막다른 골목 식으로 시나리오가 완전히 막혀버리므로 결국 진행자가 자비(…)를 베풀거나 해결사 조연(NPC)을 보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3번과 연관되지요.

3. 주인공 스스로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분명히 악당도 잡았고 보물도 잔뜩 얻었는데도 참가자들이 불평하는 배은망덕한(!)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경우죠. 도저히 손도 못댈 정도로 강한 적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데 주인공보다 훨씬 강한 조연이 나타나서 땀 한방울 안 흘리고 해치워줬다거나, 문이 안 열려서 동동거리고 있는데 좀전까지 이상하게도 안 보였던 열쇠가 바로 옆에 있다거나 한 경우입니다.

물론 주인공의 설득에 못이긴 조연이 와서 도와주는 것처럼 주인공의 행동에 의한 것일 때에는 해당 없지만, 주인공의 행동과 상관없이 진행자가 던져주는 행운에 의해 일이 해결되는 경우 참가자들은 고민과 모색 끝에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특히 주인공이 못하는 일마다 나타나서 찬란한 활약 끝에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조연은 십중팔구 참가자들의 미움을 사게 마련이지요. 이 넓은 세상에 주인공들보다 더한 실력자가 있는 것은 물론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조연을 부를 경우 그것은 주인공 자신이어야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괜히 끼어들어서 일을 해결하는 조연은 주인공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을 뿐입니다.

4. 목표에 의미나 가치가 없다.

너무 작고 별볼일없는 목적은 고생해서 이룰 가치가 없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수단과 목적의 균형도 생각해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적을 연필을 찾기 위해 책상서랍을 뒤지고 소파 밑을 들여다볼 수는 있겠지만 연필 한자루를 구하러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사하라 사막을 건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산업사회 기준, 궁극의 세계파괴 마법의 연필 제외)

반대로 참가자들이 공감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목표 역시 의미없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대표적으로 세계나 우주를 구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확실히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는 목적이기는 하지만 참가자들의 기대치와 따로 놀 때는 연필 찾아 세계일주만큼이나 싱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캠페인의 성격, 참가자들의 희망, 주인공 설정 등에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만한 개연성이 보이지 않으면 세계를 구하는 것은 그저 캠페인 규모를 키우기 위한 억지일 수도 있습니다.

참가자가 원하는 플레이의 성격은 종종 주인공 설정을 통해 드러나는만큼 주인공들의 설정은 의미있는 캠페인 목표를 설정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또한 이러한 설정들은 플레이 전 진행자와 참가자가 한 합의의 표현이기도 하고요. (아니라면 좀 문제가…) 상상 속의 인물일 뿐인 주인공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주인공 설정은 이와 같이 참가자의 기대와 캠페인에 대한 합의의 표현이기 때문에 꼭 참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개별 주인공의 설정과 목표를 참고는 하되,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소설과 달리 RPG에서는 반드시 성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노력으로 성취할 정당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이 실제 성취보다 많을지도 모르고, 인물의 생각과 관점이 변해가면서 목표도 달라질지도 모르고, 막상 목표를 달성해도 생각보다는 허무할지도 모릅니다. 모두 극적 재미에 도움이 되는 일이지요.

이와 같이 브래들리 여사의 글에 비추어 RPG를 재미있게 하는 요소, 그리고 RPG를 재미없게 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뭐, 결국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재밌는 게 중요한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 재미라는 것도 때로 만만치 않다는 것이 RPG의 어려움, 또한 묘미인 것 같습니다.

8 thoughts on “단편의 구성요소와 RPG

  1. 삭풍

    2번의 경우 트랩두개에 두달을 끈 이후로 다시는 다쳇팀같은것에 지원하지 않으리라 결심한적이 있었죠[먼산]
    슈퍼 npc같은경우 마스터에게 꽤 매력적인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어디로 튈지 모르는 pc대신 맘대로 굴려먹을 카드라는 것이죠.원하는 대로 술술 이야기를 풀어먹는데는 좋을지 몰라도 가장 경계해야할 독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마스터는 좋을지 몰라도 pc들은 하나도 즐겁지 않죠[…]

    Reply
    1. 로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심심한 위로를.. (뭔소리냐)

      확실히 신적 조연은 플레이를 예상대로 끌어가고 싶을 때 큰 유혹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적도 말이죠.

      하지만 그런 조연을 쓰느냐 마느냐보다 이전 문제는 진행자가 자기 멋대로 얘기를 진행하고 싶어한다는 점 같습니다. 참가자에 의해 얘기가 이런저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는 것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진행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Reply
  2. 진야의 방문자

    저는 (RPG의) 난관에 대해서 불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칼질을 굉장히 잘하는 사람에게는 술집에서 덤비는 마을 불량배A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스펙타클 하지 않지요. 함정해체기술이 굉장히 높은 도적 케릭터에가 그에게조차 적당한 실패의 확률이 있는 함정이어서 실패해버리면 무안해 집니다. 그렇다고 쉬운 함정을 주고 비 전문가에게 해체하라고 하는 것도 곤란해 집니다.

    소설이라면 주인공의 노력(…)으로 해결이 되지만,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가 주사위를 잘 굴리는 노력을 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안 떠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묘해요. 미묘.

    역시 포도원의 개들의 방법은 신선합니다.
    그렇다고 주사위 굴리기가 재미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Reply
    1. 로키

      전제가 조금 잘못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극적 긴장감은 반드시 어려운 주사위 굴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실패가 반드시 극적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도 아니고요. 판정의 실패는 전체 플레이의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판정의 성공만을 바란다면 규칙은 버리고 프리플레이로 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성공률을 높이고 그 대가를 치르거나 실패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거나, 참가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포도원의 개들처럼 상황을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성공률을 높이는 방식도 좋은 것 같고요. 과연 이것이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하거나 친구의 얼굴에 총을 들이댈만큼 중요한 일인가? 하는 판단은 참가자의 몫이니…

      또 노빌리스나 액티브 엑스플로이트 등 자원관리형 다이스리스 RPG들은 유한한 자원을 이 판정에 얼마나 소모할 것인가 참가자가 판단하게 합니다. (노빌리스는 미라클 점수, 액티브 엑스플로이트는 노력) 역시 그 판정의 중요성에 따라 얼마나 대가를 치를지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있죠. 포도원의 개들보다는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좀더 쉽습니다만…

      그 외에 극점수를 도입한 규칙들 역시 성공할 것이냐 실패할 것이냐 하는 판단의 여지를 어느정도 참가자에게 남겨놓고 있지요.

      Reply
    2. 진야의 방문자

      ‘내가 실패해도 파티가 도와 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분업이 너무 잘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파티의 실패가 되면 아무래도 최초의 전문가에게 눈총이 갈거 같습니다.

      자원관리라는 부분은 왠지 전략게임(컴퓨터든 카드보드게임이던)이 생각납니다.
      보드 카드 게임등에서는 실패도 그럭저럭 즐기는 편인데 RPG에서는 실패하면 제법 우울함이 남아있군요.

      Reply
  3. 로키

    실패도 성공만큼 재미있지 않으면 RPG에 규칙이 있는 의미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결국 무규칙으로 그냥 소설 쓰듯이 하면 실패할 일도 없는 것을 규칙이나 주사위를 도입해서 괜히 실패 가능성을 만든 거나 마찬가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실패의 가능성은 어떤 식으로든 플레이에 긍정적인 영향이 있다는 뜻일텐데…

    제 생각에는 성공이 한가지 가능성을 연다면 실패는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실패했다고 막다른 골목에 막혀 이도저도 못하게 된다거나, 주사위가 잘못 나온 게 다른 등장인물도 아니고 다른 참가자들에게 눈총받을만한 일이라면 실패의 여지를 만드는 규칙을 아예 배제하고 무규칙 프리플레이로 가는 게 나을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Reply
    1. 진야의 방문자

      실패가 성공만큼이나 재미있게라니 가슴이 찡합니다.

      역시 남에게 눈총을 준다거나 받는다는 생각이 든 것은 역시 마스터를 어떻게서든 이기고 싶어서였던거 같습니다.
      규칙 이전의 마음의 문제로군요. 하지만 착각할 여지가 없는 룰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사실 막혀서 이도저도 없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실수가 계속쌓이면 기운이 빠져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안좋은 선택을 하며 무리를 하게 되더군요. 좀더 넓은 관점에서 봐야겠습니다.

      Reply
  4. 로키

    성공과 실패는 확실히 복잡한 문제라는 느낌이 듭니다. 주인공 능력치를 성장시켜서 확률을 성공 쪽으로 끌어오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지만, 여전히 실패의 가능성은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요. 이 실패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성공과 실패가 참가자와 진행자의 대결처럼 되면 금방 RPG가 재미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예전에 썼던 글 행동판정과 갈등판정 ( http://blog.storygames.kr/loki/2127683 )이라는 글도 한가지 지침이 되는 것 같지만, 좀더 연구해볼 문제군요.

    Reply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